김진국
I. 대항해 시대(大航海時代, Age of Discovery, Era das Grandes Navegações, the Age of Discovery, 대발견 시대)
15 세기 초 포르투갈의 엔히크 왕자(Henrique of Portugal, Henrique O Navegador)가 아프리카 서해안 탐험을 시작한 이래로 17세기 초까지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동양의 값비싼 금, 은, 향신료 등을 찾아서 미지의 바다로 나아가 신대륙을 발견하였던 시기를 대항해 시대(Age of Discovery)라 한다.
그 결과 유럽은 새로 발견한 신대륙을 식민지로 경영하여 제국으로 발전하고 또 전 세계를 상대로 무역을 하여 급속한 발전을 가져오게 되었다.
1. 대항해 시대(AgeofDiscovery)의 시대적 배경
가. 유럽 상황
대항해 시대 이전의 유럽은 중국이나 이슬람 등의 동양에 비해 국가는 재정이 빈약했고 생산되는 제품의 질도 뒤떨어져 있었다.그리고 조선 기술도 항해술도 뒤져 있었다.
이때 중국의 명나라는 나라가 부강하였고 조선기술도 발달하여 큰 배를 건조하였으며 항해술도 발달하였다.
제3대 명 황제인 영락제(永樂帝, 1360 ~ 1424, 즉위 1402~ 1424)가 되는 주체(朱棣)는 원나라의 지배하에 있던 윈난 성(雲南省, 운남성) 곤양(昆陽)을 정벌하여 성인 남자는 죽이고 남자아이는 거세하였다(정화도 12세에 거세 당함).
윈난 성(雲南省, 운남성) 곤양(昆陽)의 이슬람 출신인 정화(鄭和, Zheng He, Cheng-ho, 1371 ~ 1433, 본명 마삼보 馬三保, 마화 馬和, 내시부 환관태감)는 군인으로, 환관으로 성장하여 영락제의 황위 찬탈(簒奪)인 정난의 변(靖難之變)에 공을 세워 태감(太監, 환관의 장관) 직위에 올랐다.
정화는 영락제(永樂帝, 재위 1402 ∼ 1424, 명나라 제3대 황제)가 해외 진출 정책을 폄에 따라 조직된 남해(南海, 하서양 下西洋 - 인도양) 원정 함대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남해(南海, 하서양 下西洋 - 인도양) 원정 함대는 서양의 대항해시대보다 80년 앞선 1405년부터 1433년 사이에 7차례에 걸쳐 선미(船尾, stern)에 방향타(方向舵, rudder)가 있고 두꺼운 천(범포 帆布)으로 된 정사각형의 돛을 9개나 설치하였는데 돛의 형태는 정크(junk, 돛에 가로로 여러 개의널 batten 대나무 등을 달아 지지시킨 돛) 선으로 큰 것은 1500톤급 보선(寶船) 등 62척 (240여 척)에 2만 7천 명의 부하를 태우고(1차 원정) 나침판(羅針盤, compass)과 과양견성도(過洋牽星圖)로 방위를 측정하고 물시계로 배의 항해거리를 측정하면서 동남아와 실론(Ceylon, 스리랑카)을 거쳐 아라비아와 아프리카의 케냐까지 항해하면서 무력시위로 조공을 확약받았다.
정화는 7차 원정 중 1433년 인도의 캘리컷에서 죽었다.
남해원정 함대의 목적은 육로로 무역을 하는 것보다 해상으로 진출하여 여러 나라와 무역을 해서 몽골과의 전쟁 등으로 피폐된 재정을 보충하려는 것이었다.
명나라를 건국한 주원장(朱元璋, 洪武帝 홍무제, 1328 ~ 1398, 즉위 1368 ~ 1398)은 아들들을 지방을 다스리는 번왕(藩王, 변방의 왕)으로 내보냈다.
제3대 황제인 영락제(永樂帝, 1360 ~ 1424, 즉위 1402 ~ 1424)가 되는 주체(朱棣)는 주원장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무인 기질이 강하여 명의 최전방인 북평(북경)의 연왕(燕王)으로 봉해졌으며 최강의 군대를 보유하여 몽골족, 여진족 등 북방의 이민족의 침입을 막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황태자인 주표(朱標, 1355 ~ 1392)가 일찍이 죽고 주표의 맏아들인 주윤문(朱允炆, 1377 ~ 1402)이 2대 황제인 건문제(建文帝, 1377 ~ 1402, 즉위 1398 ∼ 1402)로 즉위하였다. 건문제는 번왕(藩王)들의 강한 세력에 반란 위협을 느끼고는 삼촌들의 세력을 꺾기 위해 번왕(藩王)들의 군권을 회수하고 불렀으나 연왕 주체는 불응하고 남경으로 쳐들어가 궁궐로 불태우고 반란을 성공시켜 3대 영락제로 즉위했으며 남경에서 북경으로 천도하였다.
그러나 영락제는 2대 건문제의 시신을 찾지 못하여 불안했다. 그래서 정화(1371 ~ 1433 추정)를 시켜 외국으로 탈출했을지도 모르는 건문제를 찾기 위해 대규모의 원정 함대를 조직하여 군사를 파견했다는 설도 있다.
영락제가 벌인 자금성 축조, 대운하 건설 등의 대규모 토목공사와 자연재해 등으로 나라가 어려워졌다.
영락제가 죽자 눌려 지냈던 유학자들은 토목공사 등의 정책의 시정을 요구하였으며 대규모 해외 원정 항해에 따른 제정의 낭비와 불필요성을 성토함에 따라 해외진출에 관심이 없었던 제4대황제인 홍희제(洪熙帝, 1378 ~1425, 재위1424 ~ 1425) 때에 정화의 원정은 6차로 중지되고 모든 항해기록은 불태워졌으며 대항해 금지령이 내려졌던 것이다.
그런데 홍희제(洪熙帝, 재위 1424 ~ 1425, 명 제4대 황제)가 1년 만에 죽고 이어서 즉위한 그의 아들 선덕제(宣德帝, 재위 1425 ~ 1435, 명 제5대 황제)는 대항해의 가치를 인정해이어서 7차 원정(1430 ∼ 1433)이 이루어졌다.
정화의 7차 원정 함대의 본대는 호르무즈섬까지 항해를 하였고, 별대는 아프리카 동쪽과 페르시아만까지 항해를 하였다.
이 항해를 함으로써 ‘바다 실크로드(silk voyage)’ 또는 ‘도자기 길(Ceramics Road)’이라 불리는 중국과 레반트(Levant, 시리아, 요르단, 레바논) 사이의 남해로(南海路)가 개척되었다.
명나라는 영토가 넓어 필요한 모든 물자가 자국 내에서 생산되었고 발달된 문명으로 상품이 상대적으로 뛰어나 무역의 필요성이 별로 없었으며 무역으로 얻을 수 있는 이득도 별로 없었다. 더욱이 명나라는 국가나 산업이 식민지를 경영할 체계가 아니었다. 중국은 자국 생산 물품만으로도 만족하는 보수적인 나라였던 것이다.
그래서 정화는 영락제를 위한 진귀한 물건을 찾아오고 정복한 나라들이 조공을 받치게 하는데 그쳤다. 정화의 항해는 단지 국력을 과시하는 것으로 끝나버렸으므로 세계 역사를 바꾸는데 기여하지 못한 것이었다.
명나라는 세계에서 그 시절에 가장 발달하여 부족한 것이 없었기 때문에 위험하고 극단적인 것에 치중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중국 청나라 제6대 황제인 건륭제(乾隆帝, 재위 1736 ∼1796)가 무역을 청하는 영국 사절에게 “중국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너희와 무역할 필요 따위는 없다. 너희를 만나 주는 것은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한다.
그 결과 동양은 유럽의 가난한 나라가 살아남기 위해 극단적이고 진취적이며 진보적으로 감행한 대항해 시대 이후에는 유럽에 추월당하였던 것이다.
그 시절 유럽에서는 동양으로부터 비단, 황금, 향신료 등이 비단길(실크로드, Silk Road, 자이덴슈트라센, Seidenstrassen, 페르디난트 폰 리히트호펜, Ferdinand von Richthofen, 1833 ~ 1905, 독일 지리학자, 1877년 처음 사용, 초원로 steppe route, 오아시스길 Oasis route, 바다길 maritime route 남해로 도자기길)로 수입되어 고가로 팔리고 있었으며 동양은 황금이 많고 부유하다는 이야기가 마르코폴로(Marco Polo, 베네치아의 상인, 1254 ~ 1324)의 동방견문록(東方見聞錄, The Travels of Marco Polo, Book of the Marvels of the World and Il Milione, c. 1300, 세계의 불가사의,The most noble and famous travels of Marco Polo, 감옥에서 마르코폴로의 체험담을 루스티첼로 Rustichello da Pisa가 기록한 여행기) 등에 의해 유럽으로 알려져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일찍이 동양에서 비단길을 통해 넘어온 주요 물품이 유럽 각국으로 이동되었던 경로는 비잔티움 제국(Byzantium Empire, 동로마제국, 395 ~1453)의 중계무역(콘스탄티노플 등)으로 지중해에 들어와 유럽 전역으로 공급되었다.
페르시아에 사산왕조(Sassanian Persia, 224 ~ 651)가 일어나 인도로 연결되는 육로가 차단되었을 때에는 유럽은 레반트(Levant, 시리아, 요르단, 레바논)에서 홍해로 나와 메카를 거쳐 배로 인도로 가는 무역로를 열었던 것이다.
레반트 무역(Levant trade, 시리아, 요르단, 레바논을 통한 동서무역)에 의해북부 이탈리아로 유입되어 유럽 중부내륙(독일)으로 가서 프랑스를 거쳐 영국과 북유럽으로 이동되었다.
이탈리아 북부는 서로마 제국이 멸망(476)한 뒤 베르됭 조약(Treaty of Verdun, 843)으로 중프랑크 왕국에 속하였고 870년 메르센조약(Treaty of Mersen, 870)으로 중프랑크는 동, 서프랑크에 흡수되어 이탈리아만 남았으나 이마저도 황제위와 함께 875년 서프랑크의 대머리왕 카를(Carolus II Calvus, 서프랑크 왕 재위 843 ~ 877, 로마 제국 황제 및 이탈리아 왕 재위 875 ~ 877)에게 넘어갔다.
그후 독일(동프랑크) 출신의 오토 1세가 이탈리아 왕국을 세우고 신성 로마 제국 오토 왕조 초대 황제에 오른 962년 이후로 신성로마제국의 통치하에 들어갔으나 11세기 이후 신성로마 제국의 권력이 약화되면서 황제와 교황 간의 세력 다툼이 격화되는 중에 각 지방에는 지방영주가 통치하는 도시국가가 출현하였다.
피렌체, 제노바, 밀라노, 베네치아 등은 자치도시(Comune)를 기반으로 비잔틴, 레반트 교역으로 번성하였다.
신성로마 제국의 프리드리히 1세(Friedrich I, 재위 1155 ~ 1190)가 이탈리아 북부를 침입함에 따라 이탈리아 북부에서는 교황의 지원으로 룸바르디아도시동맹(Lega Lombarda, Lombard League)을 맺고 맞서 1176년 레냐노 전투(Battle of Legnano)에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군에 이겼다. 그 결과 베네치아 조약(Treaty of Venice, 1177)을 맺어 알렉산데르 3세(Alexander PP. III, 재위 1159~1181)를 교황으로 인정하고(대립교황 빅토르 3세) 이탈리아 북부도시들은 신성 로마 제국에 잔류하면서 자치권을 얻었다.
15세기 이탈리아는 북부에 여러 자치도시(Comune, 사보이 공국 Duchy of Savoy, 밀라노 공국 Duchy of Milan, 제노바 공화국 Republic of Genova, 피렌체 공화국 Republic of Florence, 베네치아 공화국 Republic of Venice 등), 중부에 교황령, 남부에 나폴리 왕국, 시칠리아 왕국 등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힘의 공백이 생긴 이탈리아 북부는 프랑스, 신성로마제국, 스페인, 자치도시 등이 8차례 이탈리아 전쟁(대이탈리아 전쟁, Great Italian Wars, Great Wars of Italy, 1494 ~ 1559)을 치렀다.
이탈리아 북부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 이후에는 신성로마 제국을 종주국으로 하여 세금을 내고 자치도시로 운영되었다(베네치아는 완전한 자치도시로 운영됨).
더욱이 페르디난트 3세(Ferdinand III,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재위 1637 ~ 1657) 때 30년 전쟁(1618 ~ 1648, 종교 전쟁)의 결과로 맺은 베스트팔렌 조약(1648) 이후 신성 로마 제국은 명목상으로 이탈리아를 지배하였으며 그 이후로도 오스트리아 대공국의 합스부르크 가문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결과 맺은 위트레흐트 조약(Treaty of Utrecht, 1713)으로 밀라노 공국을 지배하였다.
12 ~ 14세기 유럽의 경제 중심지는 이탈리아의 피렌체였으며 13 ~ 17세기 중계무역의 중심지는 베네치아였다.
이때 이탈리아에는 이슬람에서 발전된 상업 기법이 들어와 어음이 사용되었고 환전하는 은행업이 생겼으며 로마 숫자 대신에 인도에서 발명된 0(영)이 있는 아라비아 숫자를 사용하여 복식부기로 장부를 정리하였다.
이탈리아에서 안경도 발명되어 사용되었다.
안경 등에 사용되는 볼록렌즈(convex lens)는 고대부터 제작되어 사용되었는데 고대 그리스의 프톨레마이오스(Klaudios Ptolemaeos, 85 ~ 165)는 볼록렌즈 제작법을 남겼다.
유럽의 볼록렌즈 제작법이 이슬람에 전해졌다가 유럽으로 역수입되어 12세기 유럽에서는 '리딩스톤(reading stone)'이라는 수정체로 만든 반구형 렌즈가 사용되었다.
안경은 이탈리아 피사의 살비노 다르마트(Salvino degli Armati, 1258 ~ 1312이탈리아)와 피렌체의 수도사 알레산드로 다 스피나(Alexandro de Spina, ? ~ 1313, 이탈리아)가 1284년에 발명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마르코 폴로(Marco Polo, 1254 ~ 1324,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상인)의 동방견문록에는 1270년에 중국의 노인들이 안경을 사용하는 것을 보고 안경의 유래에 대해 물어보자 중국인들이 11세기 아랍에서 발명된 것이라고 답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던 중 이 비단길과 인도에서 지중해로 들어오는 길이 오스만 튀르크(Osman Turk, 1299 ∼ 1922)에 의해 차단되었다.
1299년 투르크 족의 족장인 오스만 1세가 소아시아(투르키예)에 오스만 튀르크(Osman Turk) 제국을 세웠다.오스만 튀르크 제국은 1453년 비잔티움 제국(동로마제국)을 멸망시키고,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삼았다. 강력한 오스만 튀르크 제국은 아시아에서 지중해로 통하는 육지 무역로인 비단길을 독차지하였고 그리고 이슬람 상인들은 바닷길마저 지배하였다.
이슬람인들이 후에는 아프리카의 알렉산들리아에서 관세를 높이고 중계무역을 독점하여 폭리를 취함에 따라 지중해 주변 국가에서는 동방의 향신료, 비단, 금, 은 등의 수입품값이 급등하였으며 품귀 현상까지 일으켰다.
특히 향신료인 후추(호초 胡椒, pepper, Piper nigrum L.), 정향(丁香, clove, Syzygium aromaticum L.), 육두구(肉荳蔲, nutmeg, Myristica fragrans Houtt) 등은 인도네시아의 몰루카(Molucca) 지역에서 생산되어 인도 상인과 이슬람 지역의 유대 상인을 거쳐 이탈리아 베네치아 지역의 유대 상인들에 의해 유럽으로 수입되었으므로 값이 무척 높았던 것이다.
십자군 전쟁(Crusades, 1095 ~ 1291) 이후 로마 교황이 기독교도들의 이슬람 접촉을 금지했으므로 베네치아의 유대 상인들은 유대가 강한 이슬람 지역의 유대 상인들로부터 후추를 사들여 많은 이윤을 붙여 유럽에 중계무역을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이들 수입품을 직거래할 수 있는 인도 항로를 개척한다면 베네치아와 같이 많은 이윤을 얻어 나라가 부강해질 것이라 생각했다.
대표적인 수입품은 향신료인 후추, 정향, 육두구 등이었다.
15세기 전까지는 인도와의 무역을 중개한 비잔티움과 지중해를 장악한 이탈리아 상인들이 향신료 등에 대한 폭리를 취하였으나 15세기에 기독교국에 비우호적인 오스만 튀르크(Osman Turk) 제국이 이 지역을 점령하고 이슬람 상인이 인도와의 무역을 독점함에 따라 향신료의 값은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졌고 향신료의 수입량도 극히 줄어들어 이베리아 반도(포르투갈, 스페인)에서는 구하기 조차 어렵게 되었다.
당시 유럽에서는 식용으로 사용할 가축(양은 제외)을 가을에 모두 한꺼번에 도축하고 염장하여 1년 동안 먹었다. 가축은 가을에 살이 쪄서 고기를 많이 얻을 수 있고 가을에 도축하면 겨울을 나는데 필요한 사료를 줄일 수 있었던 것이다.
가축을 도축하여 염장할 때 후추 같은 향신료를 뿌리면 고기가 상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어 염장 기간을 늘릴 수 있었고 먹을 때도 향신료를 뿌리면 저장된 고기에서 나는 심한 냄새를 숨길 수 있었기 때문에 향신료가 필수였던 것이었다.
더욱이 이 시절에 북해 어장의 개척으로 생선(청어, 네덜란드, 대구)이 수 많이 잡힘에 따라 절여져 유럽의 남쪽 지역에 수출되었다. 이런 염장식품은 저장 중에 발효로 발생한 심한 냄새 때문에 이를 먹기 위해서는 후추 등의 향신료가 필수였으므로 향신료의 수요는 더욱 늘어나 값이 끝없이 상승했다.
그리고 값비싼 향신료를 많이 사용한 요리를 먹는 것으로 부를 과시하는 풍속이 유행하여 상류층이 향신료를 과다 사용함에 따라 귀해지고 값이 더욱 상승하였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지중해에서도 서쪽 변방인 이베리아 반도에 있는 나라들로 이슬람의 지배에서 겨우 독립하여 경제적으로 낙후되어 국력도 약하고 무역에서도 소외되고 있었다.
특히 국력이 약한 포르투갈은 위에는 프랑스에, 옆에는 스페인과 이슬람에 의해 육지 길이 막혀 있었고 대부분의 지중해는 오스만 튀르크와 이탈리아가 장악하고 있어 다른 나라가 시도하지 않았던 서부 아프리카와 먼바다로 나가 인도 항로를 개척하려는 특별한 방법을 택하였던 것이었다.
포르투갈은 먼저 이슬람과 직접 교역하기 위해 아프리카로 진출하려 했다. 그러나 아프리카에서 이슬람과의 교역이 이루어지지 않자 인도와 직접 교역할 수 있는 교역로를 찾게 되었던 것이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인도로 향하는 무역로를 개척하기 위해서는 이탈리아나 강력한 오스만 튀르크(Osman Turk) 제국이 지배하여 활발히 교역하는 지역을 피하고 이들의 힘이 거의 미치지 않는 지중해 서쪽과 대서양의 먼바다로 나가 아프리카의 이슬람과 교역하거나 아프리카를 둘러서 갈 수 있는 항로를 찾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먼바다로 나가 인도로 가는 항로를 찾는 새로운 모험을 시작한 것이다. 먼바다로 나간다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것으로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블루오션(Blue Ocean)이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하거나 여기에 모험 자본을 투자하는 나라는 그때까지는 없었던 것이다.
셰익스피어 작품인 베니스 상인에 나오는 샤일록은 바다에 떠있는 배와 화물은 재산이 아니며 배가 항구에 들어와야 재산이 된다고 생각하여 안토니오에게 바다에 나가 있는 배를 담보로 돈을 빌려 주면서 보복할 기회를 잡는 이야기가 항해의 위험성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기존에 알고 있는 항로를 운행하는 배도 이 만큼 위험한 것인데 미지의 먼바다를 처음으로 나간다는 것은 그야말로 위험천만한 극단적인 선택인 것이다.
유럽의 치열한 국가 간의 경쟁에서 가난한 포르투갈은 위험과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은 진취적인 사상으로 해양으로 진출하였던 것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이때에는 이슬람으로부터 발달된 조선기술과 항해술이 유럽으로 전파되어 연안을 따라서 멀리 항해하는 것이 가능하였다.
나. 로마 제국(Roman Empire)의 멸망과 그리스도교(Christianity)의 변화
1) 동, 서 로마 제국
로마 제국은 이집트를 지배하면서 많은 황금을 캐내어 화폐로 유통시켰다.
이집트에서는 B.C. 3000년 전부터 나일강 중류와 상류에 걸친 누비아 지방((Nubia, 이집트 남부의 나일강 유역과 수단 북부에 있는 지역)에서 사금을 채취하였으며 B.C. 1300년경 누비아에서는 얕은 지하 광맥에서 채굴하였다.
B.C. 1160 경의 지도에 와디 함마마트(Wadi Hammamat) 금광으로 가는 길이 그려져 있다.
이집트 투탕카멘 왕(Tutankhamun, B.C. 1331 ~ B.C. 1322, 이집트 제18왕조의 파라오)의 무덤에서 엄청난 양의 금이 발견되었다.
이들 금은 나일강 중류와 상류에 걸친 누비아 지방에서 사금으로 채취한 것이었다.
로마 제국(Roman Empire, BC 27 ~ 395, B.C.753년 로마를 건설한 로물루스 왕 Romulus에서 로마라는 명칭이 유래)은 3 세기 들어 4국(사두정치, Tetrarchia, 테트라키아, 네 명이 로마제국을 나누어 통치, 293 ~ 324)으로 분열되어 혼란스러웠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1세(콘스탄티누스 대제, Flavius Valerius Aurelius Constantinus, 274 ~ 337, 재위 306 ~ 337)는 리키니우스(Valerius Licinianus Licinius, 로마 황제 재위 308 ~ 324, 로마가 4국으로 나뉘었음)와 공동으로 밀라노 칙령(Edict of Milan)을 발표하여 기독교(그리스도교, Christianity)를 공인하였다.
본디 로마 제국은 다신교 국가였고 황제도 신이었다. 그래서 황제에게 예배를 거부하는 자는 모반죄로 탄압을 받았다. 유일신을 믿는 그리스도교인들은 황제에게 예배를 거부하였으므로 모반죄로 탄압을 받았던 것이다.
로마제국이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뒤에는 황제를 신이라 하지 않고 왕권신수(王權神授, divine right of kings, 제왕은신으로부터 권한을 부여받음)의 사상으로 변했다.
324년콘스탄티누스 1세(재위 306 ~ 337)는 분열된 로마 제국을 통일하여 수습하였으며 330년에는 이교도의 세력이 강한 로마에서 서유럽보다 평원이 많아 경제적으로 부유한 동유럽과, 교역의 요충지인 서남아시아에 가까운 비잔티움(Constantinople, 콘스탄티노플, 이스탄불)으로 수도를 옮겼다.
350년에는 바티칸 언덕에 있던 베드로의 무덤 위에 성베드로 대성당(Basilica di san Pietro in Vaticano, Basilica of St. Peter, 성 피에트로 대성당, 공사 324~349, 로마의 4대대성전중 대표적인 성전)을 세우고 교회의 재산 소유를 인정하였다.
이어서 황제에 오른 테오도시우스 1세(Theodosius I, 재위 379 ∼ 395)는 392년에 기독교(그리스도교, Christianity)를 로마 제국의 국교로 지정하였다.
395년 테오도시우스 1세(Theodosius I, 재위 379 ∼ 395)는 로마 영토가 너무 넓어 죽으면서 자신의 두 아들인 아르카디우스(Flavius Arcadius, 재위 395 ~ 408, 비잔틴제국, 동로마제국)와 호노리우스(Flavius Honorius, 재위 393 ~ 423, 서로마제국)에게 제국을 동서로 분리하여 물려주었다.
서로마제국(western Roman Empire, 395 ~ 476)의 초기 영토는 이탈리아, 브리타니아(Britannia, 영국 브리튼 섬), 갈리아(Gallia, 프랑스, 벨기에, 스위스 서부, 라인 강 서쪽의 독일), 히스파니아(Hispania, 포르투갈, 스페인, 안도라, 지브롤터), 마우레타니아(Mauretania, 북아프리카) 등이며 수도는 메디올라눔(Mediolanum, 밀라노)이었으나, 402년 라벤나(Ravenna, 이탈리아 북동부 에밀리아로마냐 주)로 옮겼다.
서로마는 동로마에 비해 경제적으로 약했다. 그 결과 훈족(Hun, 흉노족, 匈奴, Xiongnu, 투르크계,훈족은 흉노족의 후예)의 침입으로 게르만족(로마인이 중부 유럽지역인 Germania에 사는 사람이라고 붙인 이름, 노르만인 Norman-북쪽 사람, 바이킹 Viking-스칸디나비아와 덴마크에 걸쳐 있는 vik 만에서 유래)이 밀려 서로마로 침입하여 정착함으로써 멸망하게 되었다.
브리튼 섬(Great Britain I.)에는 앵글로 족(Angle, 게르만), 색슨족(Saxons, 게르만)이 침입하였고, 갈리아 지방에는 프랑크족(Franks, 게르만)과 부르군트족(Burgundians, 게르만)이 침입하였다.
에스파냐는 수에비족(Suevi, 게르만), 반달족(Vandals, 게르만) 등이 침입하여 점령하였으며 이어서 서고트족(Visigoth, 게르만)이 412년 남(南) 갈리아와 에스파냐(스페인)를 정복하였다. 이에 429년 반달족(Vandals, 게르만)은 북아프리카로 건너가 반달왕국(Regnum Vandalum)을 세웠다.
410년에는서고트족(Visigoth, 게르만)의 알라리크 1세(Alaric I, 서고트 왕, 재위 395 ∼ 410)가 이탈리아를 침략하여 수도인 라벤나(Ravenna)가 아닌 로마시를 점령하였다.
훈족(Hun, 흉노족의 후예, 투르크족)은 루마니아의 트란실바니아를 중심으로 일어나 유럽의 훈 제국(The Hun Empire, 기록이 없어 불확실함, 370 ~ 469)을 세웠으며 훈 제국(The Hun Empire, 투르크족)의 왕 아틸라(Attila, 재위 433 ~ 453)는 주변의 게르만족과 동고트족을 정복하여 동쪽은 카스피해에서 서쪽은 라인강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하였으며 447년 동로마제국을 공격하여 제국으로부터 조공을 받았다.
훈 제국(Hun, 투르크족)의 왕 아틸라(Attila, 재위 433 ~ 453)가 발렌티니아누스 3세(Valentinian Ⅲ, 서로마제국의 황제, 재위 425 ∼ 455) 때인 451년 유스타 그라타 호노리아(Justa Grata Honoria, 418 ~ 455,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누나) 공주의 황당한 청혼을 구실로 서로마 지역인 갈리아(독일, 프랑스 등)를 침략하자 서로마는 서고트 왕국(Regnum Visigothorum, 412 ~ 720경, 이베리아 반도)과 연합하여 카탈라우눔 전투(Battle of the Catalaunum Plains, 451, 파리 북동부)에서 격파하여 로마시를 방어하였으나 452년 아틸라가 재차 수도 라벤나(Ravenna)를 침공하자 많은 금액을 주고 퇴각을 협상하였다(교황 레오 1세의 중재로 퇴각).
훈 제국(The Hun Empire, 370 ~ 469)은 453년 아틸라가 죽은 후 지배하에 있던 주변의 게르만 족의 봉신(封臣, vassal)들이 반란을 일으킴에 따라 대부분의 영토를 잃었고 469년 뎅기지크(Dengizich, khan, ~ 469, 아틸라의 아들)가 트라키아(Thracia, 발칸반도 동부)에서 동로마 장군 아나가스투스(Anagastus, 466 ~ 470)에 패배하고 전사하여 멸망했으며 그 후 훈족은 다른 민족들에게 흡수되었다고 한다.
로마시는 455년 반달족의 게이세리쿠스(Geisericus, 반달 왕국, 재위 428 ∼ 477)의 침략으로 점령되고 이후 서로마는 게르만인 장군이 정치적 실권을 쥐었으며 게르만인 용병대장 오도아케르(Odoacer, 433 ~ 493, 점령 후 이탈리아 왕)가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 황제(Romulus Agustulus, 서로마 제국의마지막 황제, 재위475 ~ 476)를 폐하고 476년 서로마를 멸망시켰다.
이에 동로마 제국의 황제 제논(zēnōn, 재위 474 ~ 475, 476 ~ 491)의 지원을 받은 동고트왕 테오도리쿠스(Theodoricus, 재위 471 ∼ 526, 게르만 족)가 493년에 침략하여 오도아케르를 죽이고 이탈리아에 동고트 왕국(Ostrogothic Kingdom, Regnum Italiae, 이탈리아 왕국, 493 ~ 553)을 세웠다.
동고트 왕국은 552년 동로마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1세(Flavius Petrus Sabbatius Iustinianus, 재위 527 ~ 565) 황제 때에 장군 나르세스(Narses, 478 ~ 573)에 의해 정복되었다.
568년 랑고바르드족(Lombards, 덴마크와 스칸디나비아 반도 남부 기원) 부족장인 알보이누스(Alboin, 재위 560 ~ 572)가 동로마 제국령 이탈리아를 침공하여 랑고바르드 왕국(Regnum Langobardorum, 568 ~ 774, 수도 파비아)을 세우고 베네치아, 롬바르디아, 사부아 지방을 침략하여 영토를 넓혔다.
773년 프랑크의 샤를마뉴(카롤루스 대제, Carolus Magnus, 재위 800 ~ 814)는 알프스를 넘어 774년 랑고바르드 왕국을 멸망시키고 로마 공국과 남부의 일부 비잔티움 제국, 베네벤토 공국(Benevento, 571 ~ 1077, 랑고바르드계, 이탈리아 남부)을 제외한 이탈리아의 지배자가 되었으며 800년에 "로마의 황제"에 올랐다.
경건왕루도비쿠스 1세 피우스(Ludovicus I Pius, 로마 제국 황제 재위 814 ~ 840, 카롤루스 마그누스의 여섯째 아들)가 사망한 뒤 장남 로타리우스 1세가 동생들에게 841년퐁트누아 전투(Battle of Fontenoy, 오세르 근처)에서 패배함에 따라 3명의 아들이 베르됭 조약(Treaty of Verdun, 843)을 맺어 동프랑크(셋째 루트비히 2세, Ludwig II, 843 ~ 876, 라인강 동쪽, 독일), 중프랑크(장남로타리우스 1세, Lothaire, 로테르 1세, 중프랑크국왕, 재위843 ~ 855, 로마 황제 재위 817 ~ 855, 로트링겐, 부르군트, 북이탈리아, 이탈리아), 서프랑크(막내 대머리왕 카를 2세, Carolus II Calvus, 서프랑크 왕 843 ~ 877, 로마 황제 재위 875 ~ 877, 론강 서쪽, 프랑스)로 분열되었고 이어 870년 동프랑크 왕국의루트비히 2세(Ludwig II, 재위 843 ~ 876)와서프랑크 왕국의카를 2세(Carolus II Calvus, 재위 843 ~ 877, 로마 황제 재위 875 ~ 877)가 메르센조약(Treaty of Mersen, 870)을 맺고 동프랑크와 서프랑크로 재편되었다(둘째 피핀은 일찍이 사망).
중프랑크는 경건왕루도비쿠스 1세의 장남이었던 로타리우스 1세(Lothaire, 로테르 1세, 중프랑크 국왕, 재위843 ~ 855, 로마 황제 재위 817 ~ 855)의 나라였다.
로마 제국의황제인 로타리우스 1세(Lothaire, 로테르 1세, 중프랑크국왕, 재위843 ~ 855, 로마 황제 재위 817 ~ 855)가 로타링기아를비롯한 유럽 중부,이탈리아북부 등(현재 독일 서부, 프랑스 동부, 베네룩스 3국, 스위스,이탈리아북부 등)의 영토를 차지하고세운 중프랑크 왕국(regnum Francia media)은 동프랑크 왕국과서프랑크 왕국을 명목상으로 지배했으나 이질적인 민족들이라 결속력이 약했다. 중프랑크는 루이 2세(Louis II, 로마 황제 및 이탈리아 왕, 재위 844 ~ 875, 855년까지 로테르 1세와 공동)때인 870년 메르센조약(Treaty of Mersen, 870)으로 이탈리아만 남았으나 이마저도 황제위와 함께 875년 서프랑크의 대머리왕 카를 2세(Carolus II Calvus, 서프랑크 왕 재위 843 ~ 877, 로마 제국 황제 및 이탈리아 왕 재위 875 ~ 877)에게 넘어갔다.
카롤링거 왕조(카롤루스 왕조, Carolingian dynasty, 751 ~ 887)는 887년 비만왕 카롤루스 3세 크라수스(Carolus III Crasus, 839 ~ 887) 때까지 신성로마 제국의 황제로 이탈리아를 통치했다.
카롤루스 3세가 폐위되고카롤링거 조 출신의 이탈리아 구이도 가문의스폴레토 공작구이도가 구이도 3세 스폴레텐시스(Guido III Spoletensis, 재위 891 ~ 894)와 그의 아들 람베르투스 2세 스폴레텐시스(Lambertus II Spoletensis, 재위 891 ~ 898), 동프랑크의 왕아르눌푸스 카린티아이(Arnulphus Carintiae, 재위 896 ~ 899, 카를 대제의 4대손), 보소니드 가문의 루도비쿠스 3세 카에쿠스(Ludovicus III Caecus, 재위 901 ~ 905, 카롤링거 왕조의 외손)가 황제로 즉위했으며 카롤링거 조의 마지막 황제는 베렌가리우스 1세 포로이울리엔시스(Berengarius I Foroiuliensis,재위 915 ~ 924)이다.
프로방스(Provence, 프랑스 남부와 이탈리아 북서부 일부) 지역의 위그(Hugh) 공의 아들인 로타르 2세(Lothar II, 이탈리아 왕, 재위 947 ~ 950)는 부르고뉴(Bourgogne, Burgundy 브르군디, 프랑스 동부) 왕 루돌푸스 2세(Rudolph II of Burgundy, 재위 912 ~ 937)의 공주인 아델라이데(Adelaide of Italy, 931 ~ 999, 부르고뉴 여왕)와 결혼(947)하여 이탈리아 왕국의 왕이 되었으나 토리노에서 정적인 베링가리오 2세(Berengar II, 900 ~ 966)에 의해 축출되어 독살되었다.
이탈리아 왕으로 즉위 한베링가리오 2세가 아델라이데(Adelaide of Italy. 이탈리아 여왕)를 옥에 가두고 그의 아들 아달베르토(Adalbert)와 결혼을 강요하자 아델라이데는 951년 옥에서 탈출하여 독일 왕(동프랑크 왕) 오토 1세(오토 대제, Otto I, 재위 작센 공작 936 ~ 973, 이탈리아 국왕 961 ~ 973, 신성로마제국 황제 962 ~ 973)에게 구원해 달라는 편지를 보내어 구원해 주면 결혼하겠다고 하였다.
아델라이데는 파비아에서 오토 1세를 만나 951년에 결혼하였다.
오토 1세는 교황령을 위협하던 마자르 족(Magyars, 머저르 족, 헝가리 족)을 955년 레흐펠트 전투(Battle of Lechfeld)에서 승리하여 물리쳤다.
960년 베링가리오 2세는 교황령을 침공하였으며 이에 요한 12세(Ioannes PP. XII, 제130대교황, 재위955 ~ 964)는 960년 독일 왕(동프랑크 왕)오토 1세에게 특사를 보내어 도움을 요청했다.
961년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로 진격한 오토 1세는 962년 로마를 점령하여 이탈리아 왕국(Regnum Italiae, 962 ~ 1801, 신성 로마 제국 일원, 수도 파비아)을 세웠으며 요한 12세는 오토 1세(오토 대제, Otto I, 재위 작센 공작 936 ~ 973, 이탈리아 국왕 961 ~ 973, 신성로마제국 황제 962 ~ 973)를 신성로마 제국의 황제로, 아델라이데(후에 성 아델라이데 Saint Adelaide로 추앙됨)를 황후로 인정했다.
이 때부터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는 대부분 이탈리아와 독일의 왕이었다.
이렇게 프랑크의 로마제국이 동,서프랑크 왕국으로 나뉘어져 생긴 서프랑크 왕국은 중앙 집권의 프랑스 왕국으로 발달하여 강력한 국가가 되었지만 동프랑크 왕국은 수백 개로 나뉘어진 제후국들이 황제를 선출하는 신성 로마 제국으로 발달하였다. 그 결과 신성 로마 제국은 황제의 권력이 약한 영방 국가가 되었으며 제국을 구성하는 제후국들은 사실상 독립국가가 되었다.
비잔틴 제국(Byzantium Empire, 동로마 제국, Eastern Roman Empire)의 영토는 초기에 달마티아(Dalmatia, 크로아티아 남서부), 마케도니아(Macedonia, 발칸반도의 중부), 이카이아(Achaia, 그리스 서부), 트라키아(Thracia, 발칸반도 동부), 아나톨리아(Anatolia, 소아시아, 터키), 아르메니아(Armenia, 터키 북동쪽), 시리아(Syria), 유대(Judea, 요단 강 서쪽의 남부), 아라비아(Arabia), 이집트(Egypt) 등이며 유스티니아누스 1세(Justinianus I, 재위 527 ∼ 565) 때에 북아프리카, 이탈리아(Italy), 안달루시아(Andalucía,스페인 남부), 시칠리아(Sicilia), 사르데냐섬(Sardegna I., 이탈리아 서쪽 해)을 점령하여 최대 영토가 되었으나 7세기 초에는 이슬람 제국(Islamic Empire, 632 ~ 1258)에 아르메니아(Armenia, 터키 북동쪽), 시리아(Syria), 유대(Judea, 요단 강 서쪽의 남부), 아라비아(Arabia), 이집트(Egypt) 등을 잃었다.
이슬람의 우마이야 왕조(우마이야 칼리파국, Umayyad Caliphate, 661 ~ 750) 초대 칼리프 무아위야 1세(재위 661 ~ 680)의 아들야지드 1세(재위 680 ~ 683)에 의해 674 ~ 677년 3년 동안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포위 공격(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제2차는 626년사산 왕조,제1차는 559년 쿠트리구르 족과 훈 족 연합군)을 받았으나 비잔틴 제국의 콘스탄티노스 4세(Kōnstantinos IV, 재위 668 ~ 685)는 그리스 불(Greek fire, 석유를 이용한 공격)을 이용하여 물리쳤다.
바실리오스 2세 (Basilius II,재위 976 ~ 1025) 때에는 다시 확장하여 불가리아, 그루지아, 아르메니아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발칸 반도 대부분과 남이탈리아, 크레타, 키프로스, 소아시아, 아르메니아 등을 영토로 차지했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Innocentius Ⅲ, 재위 1198 ~ 1216)의 요청에 따라 처음 목표는 예루살렘이었으나 군비를 지원한 베네치아의 요구에 따라 이집트 공략을 목표로 하였다. 1202년 결성된 제4차 십자군에 참가한 세력은 이탈리아 북부 몬페라토의 보니파치오 후작, 플랑드르와 에노의 보두앵 6세 드 에노 백작, 프랑스의 상파뉴 백작 티보와 발루아 백작 루이, 신성로마제국의 오토 4세 및 베네치아 공화국의 엔리코 단돌로 도제(Doxe de Venexia, 베네치아 공화국의 원수 정부수반)였다.
군비가 부족한 십자군은 베네치아의 지원을 받아 출발하였고 이에 베네치아는 이집트가 아닌 베네치아를 배신한 헝가리의 차라(Zara, 자다르, Zadar)를 정복하기를 요구함에 따라 십자군은 기독교 국가인 헝가리 왕국의 차라를 공략하였으므로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십자군 전체가 파문당하였다가 후에 철회되었다.
이어서 이들 십자군은 1204년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하여 라틴제국을 세웠다.
그리고 베네치아는 제 4차 십자군의 수장인 보니파치오 대신에 베네치아와 가까운 보두앵 6세 드 에노 백작(Baudouin VI de Hainaut, 1172 ~ 1205)을 황제 보두앵 1세로 옹립하였다.
이에 분개한 보니파치오는 테살로니키(Thessaloniki, 그리스 북부, 그리스 제2의 도시)를 점령하여 테살로니카 왕국(Regnum Thessalonicae, 1204 ~ 1224)을 세웠고 초대 왕으로 등극했다.
쫓겨난 동로마제국의 황족들은 제국령 지방에 망명 정권(라스카리스 왕조, 니케아 제국)을 수립했다가 1261년에 미카엘 8세 팔레올로고스(Michael Ⅷ Palaeologos, 재위 1259 ~ 1282)에 의해 동로마제국이 재건되어 팔레올로고스 왕조가 시작되었다.
내전과 투르크족의 침입으로 영토가 축소되어 14세기에는 트라키아(Thracia, 발칸반도 동부), 그리스(Greece, 발칸반도 남단)로 축소되었으며, 요안니스 5세(Ιωάννης Ε', 재위 1332 ~ 1391) 이후에는콘스탄티노폴리스(Constantinople, 이스탄불), 테살로니키(Thessalonica, 그리스 북부), 모레아(Morea, 그리스)만이 남았다가 1453년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트 2세(II. Mehmet,Mehmed Ⅱ, 재위 1444 ~ 1446, 1451 ~ 1481)에 의해 테오도시우스 성벽(콘스탄티노플 성)이 함락되고 콘스탄티노스 11세(Constantine XI Dragases Palaiologos, 재위 1449 ~ 1453)가 전사함에 따라 멸망했다.
그리스, 로마의 건축물은 지금도 남아있다.
그리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에 있는 파르테논 신전(Parthenon)은 백색 대리석으로 지어졌다.
그리스는 험한 산간 석회암 바위 지대라 무러서 다루기 쉽고 아름다운 백색의 대리석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의 건축은 그리스의 대리석 건축을 계승함과 더불어 콘크리트(concrete)로 된 건축이 많이 남아있다.
시멘트(cement)는 5000년전 고대 이집트인들이 가장 먼저 개발하여 피라미드에 사용(석회석 벽돌과 석회 시멘트)했다.
시멘트(cement)와 물 그리고 골재를 혼합하여 만든 것이 콘크리트(concrete)이다.
석회암을 시멘트로 만드는 과정과 시멘트가 굳어지는 과정은 다음과 같다.
석회암(석회석, limestone, CaCO3 탄산칼슘, 고체)을 태우면 시멘트로 사용하는 생석회(CaO, 산화칼슘, 고체)가 된다.
생석회(CaO, 산화칼슘)를 물과 골재를 배합하여 콘크리트로 건축하면 생석회(CaO, 산화칼슘)는 물에 녹아 소석회(Ca(OH)2, 수산화칼슘, 액체)이 되고 공기 중의 이산화탄소(CO2)와 반응하여 탄산수소칼슘(Ca(OH)CO3, 액체)이 되었다가 마르면 물이 빠져 나가면서 탄산칼슘(CaCO3, 석회암, 고체)으로 되면서 굳어져 고체가 되는 것이다.
로마의 콘크리트(pozzolana, 포졸리나)는 시멘트에 화산재(SiO2, Al2O3, Fe2O3, MgO 등)를 첨가하여 만들었으므로 콘크리트에 금이 가거나 훼손되면 그 부분에 규산칼슘(Ca₂O₄Si)이 생성되어 틈을 메워주므로 콘크리트의 수명이 긴 장점이 있었다.
로마의 콘크리트(pozzolana, 포졸리나)는 동로마까지 이어졌으나 그 이후로는 명맥이 끊어졌다.
현대의 일반적 시멘트의 구성 성분은 석회(CaO) 약 63%, 실리카(SiO2 이산화규소) 약 23%, 알루미나(AI2O3) 6% 등이다.
2)그리스도교(Christianity)의 변화
예수 그리스도(Jesus Christ, 예수 메시아, 구세주 예수)를 믿는 종교를 크리스트교(Christianity, 基督敎, 기독교, Christ ; 기름부음을 받은 자, 메시아, 구세주)라하며 로마 시대인 1054년에 서로마의 로마 카돌릭(Rome Catholic, Catholic Church 보편적 교회)과 동로마의 동방 정교회(The Eastern Orthordox, Ecumenical Church)로 분리되었다.
로마 카돌릭(Rome Catholic)이 다시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가톨릭(Catholic, 천주교)과 개신교(Protestantism)로 분리되었다.
기독교(基督敎, Christianity)는 제2성전 유대교(Second Temple Judaism, 제2성전 시대의 유대교, B.C.516 ~ A.D.70)에서 시작되었지만 기독교 시대의 첫 세기(A.D.1 ~ A.D.100)에 기독교와 유대교는 분리되었다.
유대교(猶太敎, Judaism 쥬디즘)와 크리스트교(基督敎, Christianity)는 모두 하느님을 믿지만 크리스트교(基督敎, Christianity)는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인정하여 섬기고 유대교(猶太敎, Judaism 쥬디즘)는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는다.
유대교를 믿는 사람들은 하느님을 '야훼(Yahweh 여호와)'라 부르고 섬기며 기독교에서는 삼위일체(三位一體, Trinitas 트리니타스, 성부, 성자, 성령)를 섬긴다.
성경(구약, 신약)은 기독교의 경전이고, 토라(Torah)와 탈무드(Talmud)는 유대교의 경전으로 성경(聖經, Testament)은 구약(구약성경, 舊約聖經, Old Testament, OT)과 신약(신약성경, 新約聖經, New Testament, NT)으로 되어 있으며, 구약은 예수가 태아나기 이전을 기록한 책이고, 신약은 예수가 태어난 이후를 기록한 책으로 예수가 중심이다.
구약성경(舊約聖經, Old Testament, OT)은 제1부 토라(Torah,모세5경), 제2부 네비임(Nebiim, 예언서), 제3부 케투빔(Kethubim, 성문서 聖文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신약성경(新約聖經, New Testament, NT)은 복음서, 사도의 활동, 바오로 서신, 발신자 불명의 서간, 야고보의 서간, 베드로의 서간, 요한의 서간, 유다의 서간, 묵시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유대교 경전 중 토라(Torah, 율법)는 모세의 경전으로 모세 오경인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탈무드(Talmud)는 구약성경 이후 유대교의 법률, 전통, 관습, 절기, 전승, 판례, 해설 등을 모아 편찬한 책이다.
황제 숭배하의 다신교인 로마신앙은 제국을 종교적으로 분열시키고, 인종간의 갈등과 대립을 유발하는 문제점이 있었다. 그래서 콘스탄티누스 1세는 기독교를 받아들이면 로마 제국의 통일을 위한 중요한 도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어머니(헬레나)가 기독교 신자인 콘스탄티누스 1세는 밀비우스 다리 전투(Battle of the Milvian Bridge, 312) 전날의 꿈 지시대로 병사의 방패에 카이 로(키 로, XP)를 그려서 치룬 전투에서 승리하자 결정적으로 기독교를 믿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콘스탄티누스 1세와 리키니우스는 로마 제국을 새로운 사회 질서를 세워 안정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313년 밀라노 칙령(Edict of Milan)을 발표하여 기독교를 공인하고 또 기독교 내의 분열을 정리하였다.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1세(Constantinus I , 콘스탄티누스 대제 Constantinus the Great, 재위 306 ∼ 337)는 기독교 내의 분열을 일으키는 기독교 교리를 정리할 목적으로제1차 니케아 공의회(First Council of Nicaea, 325)를 325년 5월 20일 니케아(Nicaea,튀르키예의 이즈니크)에 있는 콘스탄티누스 1세의 별궁에서 개최하였다.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296 ~ 373, 알렉산드리아의 대주교)가 주장한 신(神, God)인 아버지와 아들인 예수가 같다는 교설(삼위일체설 교의, 동일본질 Homoousion 교리)을 의심한 아리우스파(Arianism, 아리우스 Arius, 250 ~ 336, 알렉산드리아의 사제)는 예수는 성부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이며 성부와 함께 영속하는 존재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후에 안티오케이아의 아에티우스와 그의 제자인 에우노미우스에 의해 상이본질 anomoeanism이라는 극단적인 이론으로 변모하였다.
이에 니케아 공의회에서 안티오키아 학파(네스토리우스학파, Nestorianism, Nestorius, 386 ~ 451)와 알렉산드리아 학파(아타나시우스학파, Athanasius, 296/298 ~ 373)는 힘을 합쳐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는 아리우스파(Arianism, Arius 250/256 ~ 336)를 이단으로 파문하였다.
니케아 공의회에서 콘스탄티누스 1세(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진행으로 부활절과 삼위일체 등을 논의했으며, 니케아 신경(信經, Nicene Creed)을 채택하여 삼위일체 교리를 보편 교리로 채택하고 예수를 피조물이라고 주장한 아리우스파(Arianism)를 이단으로 규정하여 기독교교리를 정리함으로써 로마 통치를 쉽게하는 보편교회(공교회)를 지향했다.
현재 아리우스파(Arianism)는 남아있지 않다.
이어 5세기에 접어들면서 예수는 신성을 지니고 탄생했다는 테오토코스(Theotoskos)를 주장하는 알렉산드리아 총주교 키릴루스(Cyrillus, 376 ~ 444)와 예수는 신격과 인격을 가진디는 이성설二性說을 주장하는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주교 네스토리우스(Nestorius, 386 ~ 451)를 중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논쟁이 일어났다.
키릴루스(Cyrillus, 376 ~ 444)는 신성(神性)을 지니고 태어난 예수로 인해 신성을 지닌 예수를 낳은 마리아를 거룩한 어머니, 성모(聖母, 테오토코스, Theotoskos, 노트르담 Notre-Dame)라 하였다.
네스토리우스파(Nestorianism, 예수는 신격과 인격을 가진디는 이성설 二性說 주장, 경교 景敎)는 아리우스주의(Arianism, 예수의 신성을 부정함) 및 아폴리나리우스주의(Apollinarism, Apollinarianism, 예수는 인간의 몸과 민감한 인간 영혼을 가졌으나 인간의 이성적인 마음이 아닌 신성한 마음을 갖고 있다)에 논박하는 관점에서 예수는 인성과 신성을 완전히 독립된 두 개의 휘포스타시스(hypostasis, 자립존재, confidence essence, nature, person)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해석했고, '테오토코스(Theotokos, Mother of God, 예수는 하느님에서 인간이 되었다고 주장하며 성모 마리아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인성과 함께 신성을 지닌 존재로 태어났다는 것을 의미하는 '신성 출산'을 의미, 하나의 휘포스타시스 hypostasis)'보다는 '크리스토토코스(Christ-bearer, 그리스도를 낳은 사람, 예수는 인간에서 하느님이 되었다는 주장을하며 예수는 인간이었으며 인간을 잘 알고 인간에게 복음을 전하며 하느님을 보인 자로서 예수를 하느님이 택하여 양자로 삼아 메시야가 되었다고 함)' 즉 '그리스도의 탄생'이라 불러야 합당하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에 431년 에페소 공의회(Council of Ephesus, 431)가 열려 성모 마리아에게 하느님의 어머니(Mother of God, 테오토코스, Theotokos)라고 하는 호칭을 사용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네스토리우스파(Nestorianism, 그리스도는 신격과 인격을 가진디는 이성설二性說 주장, 경교 景敎)는 이단으로 규정되어
네스토리우스(Nestorius, 386 ~451,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대주교)는 테오도시우스 2세(Theodosius II, 로마 황제, 재위 408 ~ 450)에 의해 아라비아의 페트라(Petra, 요르단)로 추방당했으며 네스토리우스 파(Nestorians)의 교설을 신봉하던 콘스탄티노플 총 대주교(總大主敎)도 파문되었다.
이후 에페소 공의회의 결과를 칼케돈 공의회(Council of Chalcedon, 451, 튀르키예 이스탄불 주)에서 정리하여 칼케돈 신조를 통해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분리될 수 없음을 강조하는 테오토코스(Theotokos, Mother of God)를 재확인하였으며 동방 교회가 주장한 그리스도교 단성론(單性論, monophysitism, 천주성 Divine Nature은 하나뿐이며 강생한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 神性과 인성 人性의 이중 본성 Dyphysite을 가진다는 설)을 배척하자 네스토리우스 파(Nestorians)는 더욱 압박을 받게 되어 네스토리우스파는 424년경부터 이집트, 시리아, 팔레스티나 지방, 인도등 동방 지역으로 피신하여 선교 활동을 하였으며, 중국에까지 전파되어경교(景敎)라는 이름으로 성행하였다.
아시리아 동방교회(정교회와는 별개의 계통)의 일부는 1553년에 가톨릭교회로 돌아와(Sulaqa) 칼데아 전례 가톨릭 교회(동방귀일교회, 동방전례 가톨릭 교회의 하나)로 현재에도 남아있다.
그리고 교황 레오 1세(Papa Leone I,제45대교황, 재위440 ~461)가 전 가톨릭 교회에 대하여 로마의 주교가 수위권(首位權)을 가진다고 말해 가톨릭 교회(Catholic Church, Roman Catholic Church)의 설립 강령을 천명하였다.
476년 서로마는 멸망했으나 비잔틴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1세(Justinianus I, 527 ~ 565)가 동고트 왕국의 내분을 틈타 이탈리아 원정(535 ~ 540)을 하여 535년 로마를, 540년 라벤나를 점령함에 따라 로마에 536년 로마 공국(Ducatus Romanus, 536 ~ 756, 로마 교황)이 세워졌다.
로마 공국은 명목상 동로마 제국 하의 공국으로 유지되었으며 로마 교황(Papa라틴어, 영어Pope)은 서로마 제국의 멸망과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으로 혼란한 서구 사회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은 로마 교황(로마 공국)을 지배하기 위해 압박했으며 주변 국가들도 로마 공국을 위협하였다.
이탈리아 북부에 위치한 롬바르드 왕국(랑고바르드 왕국, Langobard, 568 ~ 774)이 이탈리아 북동부 라벤나 지역을 점령하고 로마 공국을 위협하자 교황 스테파누스 2세(Stephanus Ⅱ, 제92대 교황, 재위 752~757)의 구원 요청으로 프랑크 왕국(Frankenreich, 481 ~ 843, 피레네 산맥에서엘베강에 이르는서유럽 대부분이 영토, 프랑스)의 피핀 3세(pippin Ⅲ, 재위751 ~ 768,프랑크 왕국의 궁재 宮宰 majordomus였던 피핀 3세가 메로빙거 왕조로부터 왕위를 넘겨받아 카롤링거 왕조를 열었는데 이의 정당성을 얻기 위해서는 교황의 지원이 필요했음)가 754년 라벤나와 부르군트 지방을 점령하여 교황에 헌납함으로써 로마 공국은 교황령(PapalState, 756 ~ 1870)이 되었고 그 후 프랑크 왕국의 2대 국왕인 샤를마뉴(Charlemagne, 카롤루스 대제, Carolus Magnus, 재위 768 ~ 814, 카롤링거 제국 황제 800 ~ 814)는 교황령의 범위를 성문화 하여 로마 공국, 라벤나, 베네벤토, 토스카나, 코르시카, 롬바르디아, 그리고 이탈리아 여러 도시 등으로 넓혔으며 이에 800년교황 레오 3세(Papa Leone III, 재위795 ~ 816)는 샤를마뉴(Charlemagne, 카롤루스 대제, Carolus Magnus, 재위 768 ~ 814, 카롤링거 제국 황제 800 ~ 814)를 초대 ‘로마 황제(Augustus Romanorum)’로 임명하는 대관식을 거행하였다. 기독교회에서 여자가 황제가 될 수 없다는 법을 어기고 동로마제국의 태후 이리니(Irene of Athens, 레온 4세의 황후)가 아들인 콘스탄티노스 6세(재위 780 ~797)를 폐위시키고 황제(재위 797 ~ 802)에 오르자 교황 레오 3세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샤를마뉴를 황제로 봉하였던 것이다.
교황령(Papal State, 756 ~ 1870)은 1870년이탈리아 왕국(1861 ~ 1946, 사르데냐 왕국이 이탈리아를 통일하여 세움)에 멸망, 합병되기 전까지이탈리아 반도의도시국가로 강력한 세력을 유지하였다.
이와는 달리 동로마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1세(Justinianus I, 527 ~ 565)는 황제가 교회의 수장을 겸하는 그리스 정교(Greek Orthodox, 콘스탄티노플 교회)를 세워 황제(Caesar)가 교황(Papa 라틴어, 영어 Pope)의 권위를 겸하여 갖는다는 황제 교황 주의(皇帝敎皇義, Caesaropapism)를 확립하였으며 황제 교황 주의(皇帝敎皇義, Caesaropapism)는 1453년 동로마제국이 멸망될 때까지 계속되었고 러시아에 이어져 1917년까지 계속되었다.
726년, 비잔틴 제국(동로마 제국)의 황제 레오 3세(Pope Leo III, 제96대 교황, 재위 795 ~ 816)는 725년 우상숭배금지령(偶像崇拜禁止令)을 칙령으로 반포하고, 726년 성상파괴운동(聖像破壞運動, 이콘파괴운동 iconoclasm)을 시작하였다.
레오 3세가 이 시기에 성상 금지령을 반포한 이유는 확실하지 않지만 레오 3세 이전부터 성상 공경에 대한 비판이 있었으며 레오 3세의 중앙집권체제 강화, 그 시절의 화산 분화 등의 천재지변, 우상을 부정하는 이슬람교의 비판 등이 이유라고 한다.
레오 3세가 반포한 성상 금지령으로 동로마 제국에서는 내전이 일어났고, 로마 교황청이 이를 비난함에 따라 성상 파괴 논쟁이 일어났다.
로마 교황청은 이교도인 로마인의 개종을 위해서는 성상이 필요했고 또 동로마 황제의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726년 동로마 황제 레오 3세(Leo III, 재위 717 ~ 741)는 성상파괴령(聖像破壞令, iconoclasm, 726)에 도전하는 로마교황 그리고리오 2세(715~ 731)를 정벌하였으나 실패하였고 로마교황의 권위를 몰수하여 동로마 콘스탄티노폴리스 총 대주교에게 넘겨주었다.
그 결과 동서 로마교회의 관계는 악화되어 로마 가톨릭과 동방 정교회는 성상피괴령을 명분으로 분리되었다.
로마 교황 니콜라오 1세(Nicolaus PP. I, 재임 858 ~ 867)는 로마 교황이 동서방 교회의 최고 권한을 가진다고 주장함으로써 교황권을 더욱 강화하려고 하였다.
로마 교황 니콜라오 1세는 동로마 황제 미카엘 3세(Michael III, 842 ~ 867)가 853년에 임명한 제86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 대주교 포티오스(Photios, 820 ~ 893)를 863년에 파문하였으며 동로마 황제 미카엘 3세(Michael III, 842 ~ 867)는 867년 교황 니콜라오 1세(Nikolaus PP. Ⅰ, 재임 858 ~ 867)를 퇴위시켜 파문의 처벌을 내렸다.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을 믿었던 로마 교황 레오 9세(Papa Leone IX, 제152대 교황, 재위1049 ~1054)는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인 로마 교황만이 전체 교회의 최고 수위권을 지닌다고 주장하였다.
동로마 제국의콘스탄티노폴리스 미카엘 총대주교(Miguel I Cerulario, 재위 1043 ~1059)가로마 교황 레오 9세에게 서방 교회에서 효모를 넣지 않은 빵을 사용하는 것과 단식일에 대해 비난하는 서신을 보냈다.
이에 로마 교황 레오 9세(Papa Leone IX, 제152대교황, 재위1049 ~1054)는 선종하기 전에훔베르트 추기경을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에 파견하여 동로마의 총 대주교를 파문하는 교서를 전달하였다. 그러나 이미 로마 교황이 선종한 다음에 일어났으므로 교회법상 무효였지만 이에 맞서 동로마의 미카엘 총 대주교가 훔베르트 추기경을 파문하는 교서를 내림으로써 1054년에 동서로 교회가 완전히 분열되었다.
동방정교회(東方正敎會, Eastern Orthodox)는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의 네 곳의총 대주 교구(Patriarchatus)가 있었다. 이들 각 교회는 독립을 유지하였지만 유대 관계를 가졌으며 콘스탄티노플총 대주교(patriarch, patriarcha)에게 수위권이 있었다.
동프랑크 왕국의 오토 1세(오토 대제, OttoI, 재위 작센 공작 936 ~ 973, 이탈리아 국왕 961 ~ 973, 신성로마제국 황제 962 ~ 973)는 세력 확장에 로마 교황의 권위를 이용하여 독일 신성로마제국을 세우고 초대 황제가 되었다.
오토 1세는 교황령을 위협하던 마자르 족(Magyars, 머저르 족, 헝가리 족)을 955년 레흐펠트 전투(Battle of Lechfeld)에서 승리하여 물리쳤으며 이에 962년교황 요한 12세는 오토에게 황제의 관을 씌어 주어 독일왕이 이탈리아와 교황령을 겸하게 되었으며 고대 로마의 후계자로 여기게 되었던 것이다.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3세(Heinrich III, 신성로마제국 황제, 재위 1046 ~ 1056)는 4명의 교황을 마음대로 세우는 등 신성로마 제국 초기에는 교황권보다 황제권이 우위에 있었다.
그런데 어린 하인리히 4세(Heinrich IV, 재위 독일 국왕 1053 ~ 1105, 이탈리아 국왕 1056 ~ 1105년 12, 신성로마제국 황제 1084 ~ 1105)가 즉위하여 왕권이 약화되자 교회 개혁가였던 교황 그레고리오 7세(Gregorius VII, 재임 1073 ~ 1085)는황제에게 있던 서임권(주교 등의 성직자 임명권)을 가져오는 등 교황권 투쟁을 벌였다.
1073년 밀라노 대주교를 선출하는 과정에서 개혁파 주교들이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의 허락을 받아 대주교를 옹립했으나 하인리히 4세는 반대하여 다른 대주교를 내세웠다.
이에 1075년 교황그레고리오 7세(Gregorius VII, 157대, 재임 1073 ~ 1085)는 교황 교서(Dictatus papae)에서 서임권은 교황에게 있고 교황은 오류를 범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않으며 교황에게는 황제를 폐위할 권한이 있다는 등 교황권 27개 조항을 발표했다.
그레고리우스 7세는 유럽 왕국들을 지배하여 교황의 신권 정치 원리를 적용하려 했던 것이다.
이에 1076년 1월 하인리히 4세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를 폐위시켰으나 오히려 그레고리우스 7세에게 파문(破門, Interdikt)을 당하여 제후들의 충성을 받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1077년 하인리히 4세는 카노사의 굴욕(Humiliation at Canossa, 카노사 성의 교황을 찾아가 성 밖 눈 속에서 맨발로 3일간 서서 용서를 빌어 파문의사면을받음)을 겪어야 했다.그런데 하인리히 4세의 파문 철회를 반대하는 제후들이 1077년 슈바벤 공작 루돌프를 독일 국왕(슈바벤 공작 프리드리히 1세)으로 선출함에 따라 국왕이 2명이 되었다.
하인리히 4세와 루돌프는 독일 왕국의 왕권을 놓고 3년 동안 전쟁을 하였다. 이에 1080년 그레고리우스 7세는 루돌프를 왕으로 승인하고 다시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제후들이 교황권의 강화를 우려하여 교황의 명령에 반대하였으며 루돌프가 전사하자 하인리히 4세는 교황을 폐위시키고 라벤나 대주교 구이베르트를 교황 클레멘스 3세(Clemens III, 재임 1080 ~ 1100)로 옹립함에 따라 교황이 2명이 되었다.
1081년 하인리히 4세가 로마로 침입하자 1084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는 살레르노(Salerno, 이탈리아 남서부)로 망명하였으며 계획했던 십자군 원정도 실행할 수 없게 되었다.
로마 교황이 된 클레멘스 3세는 1084년 하인리히 4세를 신성로마 제국 황제로 올렸다.
그러나교황 그레고리우스파는 1086년 빅토르 3세(Papa Vittore III)를 제158대교황(재위 1086 ~ 1087)으로 선출하고 공회에서 인정받음에 따라 다시 교황이 2명(대립 교황)이 되었으며 이어서 선출된 159대 우르바노스 2세(Urbanus II, 재위 1088 ∼ 1099, 1095년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십자군 원정 호소 1096 ~ 1099) 때에도 교황이 2명(대립 교황)이었다.
이슬람의 셀주크 투르크가 1055년에 바그다드를 점령하고, 1071년에는 비잔틴 제국을 공격하여 해안지역을 제외한 터키와 시리아, 예루살렘을 점령하였다. 이후 1095년에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건너편 해안까지 공격해 오자 동로마 제국(비잔틴 제국)의 황제 알렉시우스 1세(Alexius I, 재위 1081 ∼ 1118)는 로마 교황 우르바노스 2세(Urbanus II, 159대, 재위 1088 ∼ 1099)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우르바노스 2세는 이 기회에 유럽의 여러 왕들을 십자군에 끌어들여 자기 세력화함으로써 대립 교황에서 우위를 점하고자 하였다.
1095년 우르바노스 2세는 클레르몽 공의회(Council of Clermont)를 열어 성지 예루살렘 회복을 위하여 원정군을 파견할 것을 전 그리스도교계에 호소하였다.
이에 유럽은 1096년부터 8차례 십자군을 조직하여 예루살렘에 파견하여 1272년까지 약 200년 동안 십자군 전쟁을 치렀다.
우르바노 2세(Papa Urbano II,제159대 교황, 재위 1088 ~ 1099)의 제의에 의한 제 1차 십자군 원정으로 참전한 프랑스군이 1097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하인리히 4세(Heinrich IV)가 옹립한 우르바노 2세의 대립교황인 클레멘스 3세(Clemens III)를 로마에서 축출함으로써 교황의 권위를 되찾게 되었다.
이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들은 교황권이 황제권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였으며 300년 동안 황제가 임명해 오던 대주교와 수도원장의 서임권도 보름스 협약(Concordat of Worms, 1122)으로 교황권이 되었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Innocentius III, 이노센트 3세, 재위 1198 ∼ 1216) 때에 교황권이 가장 강력하였다.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6세(Heinrich VI, 재위 신성로마제국 황제 1191 ~ 1197, 독일 국왕 1169 ~ 1197, 이탈리아 국왕 1186 ~ 1197, 시칠리아 국왕, 1194 ~ 1197)가 죽고 오토 4세(Otto IV, 1175 ~ 1218)와 필리프 폰 슈바벤(Philipp von Schwaben, 1178 ~1208) 간에 황제 다툼(1198 ~ 1208)이 일어나자, 교황 인노첸시오 3세(Innocentius III, 이노센트 3세, 재위 1198 ∼ 1216)는 로마냐(Romagna), 마르크안코나(Mark Ancona) 등의 황제령(皇帝領)을교황령(敎皇領)에 합병하였으며 1208년에 오토 4세(Otto IV,슈바벤 공작 필리프와 대립 황제 1198 ~ 1208, 단독 황제 1209 ~ 1215)가 황제로 즉위하자,성직 임명권을 놓고 다투어 시칠리아 왕프리드리히 2세를 독일 왕으로 옹립하고 오토 4세를 파문(1210)하여 굴복시켰다.
그리고 교황 인노첸시오 3세(Innocentius III, 이노센트 3세, 재위 1198 ∼ 1216)는 프랑스 왕필리프 2세(PhilippeⅡ, 재위 1179 ~ 1223, 존엄 왕)를 이혼 문제를 이유로1200년에 파문하였고 영국 왕 존(John, 재위1199 ~ 1216)과도 캔터베리대주교(大主敎)의 임명권을 두고 다투어 1209년에 파문하였다.
1209년에는 수도회 프란치스코회의 창설을 인가하였고, 1215년에는 라테라노 공의회(公議會)를 열어 신부의 규율과 교의(敎義)에 관한 제반 사항을 결정하였다.
그런데 알렉시우스 4세가 제4차 십자군(1202 ∼ 1204)을 콘스탄티노플로 끌어들여 알렉시우스 5세(재위 1204)에 반기를 들고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여 황제가 되었다.
알렉시우스 4세는 그 대가로 경제적 지원을 약속하였고 그리스 정교를 포기하고 기독교와 합칠 것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알렉시우스 4세가 경제적 여력이 없어 십자군과의 약속을 이행하지 못하자 십자군은 다시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여 라틴제국(Latin Empire, 1204 ∼ 1261)을 세웠으며 황제로는 베네치아 십자군으로 참가한 보두앵 6세 드 에노 백작(Baudouin VI de Hainaut, 1172 ~ 1205)을 보두앵 1세(재위 1204 ∼ 1205)로 옹립하였다.
이에 동로마제국의 황족들은 지방(니케아)으로 쫓겨났다.
1261년 니케아 제국(Empire of Nicaea, 라스카리스 왕조, 1204 ~ 1261, 소아시아)의 미카엘 8세 팔라이올로구스(Michael VIII Palaiologos, 재위 1261 ~ 1282)가 보두앵 2세(재위 1228 ∼ 1261) 때인 1261년에 라틴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팔라이올로구스 왕조의 비잔티움 제국을 재건하였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InnocentiusIII, 이노센트 3세, 재위 1198∼1216)는 “교황은 태양이요, 황제는 달”이라 하였다.
이와 같이 동로마가 쇠퇴하자 로마 교황은 왕국들과 투쟁하여 영국, 프랑스, 신성로마제국, 포르투갈 등을 교황 세력 하에 두었으며 권력과 부를 가지기도 하였다.
비잔틴 제국은 쇠퇴하여 멸망에 이르자 로마 교회(Roman Catholic)와 그 영향 하에 있는 서방국가들로부터 도움을 얻기 위하여 1439년 피렌체 종교회의(The Council of Firenze, 1439 ~ 1442)에서 로마 교황의 최고권을 인정하였다. 이것은 로마 가톨릭 교회와 그리스 정교회가 연합한다는 교회일치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로마교회 대주교가 로마 황제에게 우위에 있고 영토의 권한도 우위가 있다는 교황 수위권(敎皇首位權, Papal primacy)은 '콘스탄티누스의 기증(Constitutum Donatio Constantini 또는 Constitutum domini Constantini imperatoris)'을 근거로 하였는데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은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Flavius Valerius Aurelius Constantinus, 272 ~ 337)가 로마 제국의 수도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기면서 그리스도교인이 된 것을 감사하는 표시로 로마 도시와 서방 제국을 교황 실베스테르 1세(Silvester I, 재위 314 ~ 335)와 그의 후계자들에게 넘기고 자신은 동방 제국의 황제권을 보유한다는 칙령으로 로마교황이 주장해 왔지만 750년에서 850년 사이에 위조된 칙령이란 것을 1440년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자 로렌초 빌라로렌초 발라(Lorenzo Valla, 1407 ~ 1457, 철학자)가 밝혀냈다.
이 문서가 처음으로 드러난 것은 로마총대주교 스테파누스 2세(Stephanus Ⅱ, 교황, 재위 752 ∼ 757)가 롬바르드(Lombards, 랑고바르드족 Langobards, 게르만족)가 753년 로마를 위협하자 프랑스로 가서 피핀 3세에게 ‘콘스탄티누스의 기증(Constitutum Donatio Constantini)’이라는 문서를 제시하면서 롬바르드를 물리쳐 줄 것을 요청했다는 것이다.
1453년 동로마 제국(비잔틴 제국)이 멸망하자 오스만 튀르크의 메흐메드 2세(MehmedII, 재위 1444 ~ 1446, 1451 ~ 1481)가 로마 황제와 동방정교희를 취하여 잇고자 하였으나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1472년 모스크바 대공이반 3세(Ivan III, 재위1462 ~ 1505)는 동로마 제국(비잔틴 제국)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콘스탄티노스 11세 드라가세스 팔레올로고스, 재위 1449 ~ 1453)의 조카 소피아 팔레올로기나(1440, 1449 ~ 1503)와 결혼하고 동로마 제국의 문장인 쌍두 독수리를 문장으로 삼고차르(tsar, 카이사르, 즉 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하면서 동방정교회의 맥을 러시아 정교회(Russian Orthodox Church)가 물려받았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튀르크에 의해 함락되자 콘스탄티노플 총 대주교(patriarch, patriarcha)는 러시아로 피신하여 러시아 정교회가 동방정교회를 주도하게 되었으나 그 후 총 대주교(patriarch, patriarcha)의 수위권은 여전히 콘스탄티노플의 총 대주교(patriarch, patriarcha)에게 있었다.
현재의 동방정교회는 콘스탄티노플, 안티오키아, 알렉산드리아, 예루살렘, 불가리아, 러시아, 그루지아, 세르비아, 루마니아, 그리스, 키프로스, 알바니아, 폴란드, 체코, 슬로바키아, 일본 등 15개 자립교회로 되어 있다.
3) 성경(聖經, Bible)
성경(聖經, Bible)에는 구약 성경(舊約聖經, Old Testament)과 신약 성경(新約聖經, New Testament, Novum Testamentum)이 있다.
구약 성경(유대교의 성, Tanakh 타나크)은 B.C. 1500 ~ B.C. 400년대에 바빌로니아, 팔레스티나, 이집트 등 지역의 유대인에 전승(傳承, tradition)되어 온 것과 중동지역에서 전승되어 온 것을 유대교 입장에서 히브리어로 기술한 것으로 B.C. 5세기경에 정립되었다.
신약 성경(新約聖經, New Testament, Novum Testamentum)은 예수와 사도들의 언행과 신앙 관련 내용을 정리한 내용을 후세에 잇기 위해 1세기경에 헬라어(hella, 희랍어 希臘語, 그리스어)로 작성되었으며 성전(聖典, 정전 正典)으로 승인(canonization)된 것은 397년의 카르타고 종교회의에서였다.
유대인(Jew)들이 사용하던 히브리어 성경((Hebrew Scriptures)은 B.C.250 ~ 200년경 헬라어(hella, Greek language, 희랍어)로 번역되었다.
헬라어 성경(희랍어 성경, Greek version)은 유대인들이 히브리어(Hebrew language)를 모르는 유대인들을 위해 헬라어(hella, 그리스어, 희랍어)로 번역한 것으로 70인 역(the Septuagint, ⅬⅩⅩ) 또는 알렉산드리아 역본(the Alexandrian version) 등이 있다.
라틴어 성경(Latin Versions)은 2세기경 북아프리카에서 헬라어 성경(희랍어 성경, Greek version)을 번역하여 만들었으나 완전하지 못하였으며 그 후 개정된 라틴어 성경(Latin Versions)에는 불가타(Vulgate) 성경이 있다.
Bible(성경)의 어원은 이집트의 파피루스(papyrus)에서 유래한 헬라어(hella, 그리스어) 비블로스(biblos, 책)이다.
1450년 서양 최초의 금속활자와 인쇄기를 발명한 요하네스 구텐베르크(Johannes Gutenberg, 1397 ~ 1468, 독일)는 필사(筆寫)로 만들었던 성경을 1455년부터 인쇄기로 대량 인쇄함으로써 일부 성직자들만 보유하던 성경을 대중에게 보급하게 되었다.
유럽 각국은 라틴어 성경을 자국어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1384년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1320 ~ 1384, 영국, 종교 개혁자)는불가타 성경을 토대로 성경을 영어로 최초 번역하였다.
독일의 루터(Martin Luther, 1483 ~ 1546)는 로마 가톨릭의 라틴어 성경 숭배의 벽을 무너뜨리고, 1522년 신약 성경, 1532년 구약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였다.
프랑스 파리 대학교의 교수자크 르페브르 데타플(Jacques Lefèvre d'Étaples, Jacobus Faber Stapulensis, 1450? ~ 1537)는1523년신약성서의 프랑스어 번역본을 출간하였다.
1526년 영국의 윌리엄 틴데일(William Tyndale, 1494? ~ 1536)은 성경을 평민들의 언어로 번역하여 틴데일 성경을 만들었으며 1611년 제임스 1세의 지시로 영어 성경인 킹 제임스 성경(King James Version, KJV, 흠정 역본, 欽定譯)을 만들었다.
* B.C.(BC, Before Christ, 크라이스트 이전에, 기원전)
* A.D.(AD, Anno Domini 아노 도미니, 주의 해(年)에, Anno 해, Domini 주님의, 기원후, 서력기원 西曆紀元, 西紀 서기)
4) 십자군 원정(十字軍遠征, Crusades, 1095 ~ 1291)
에루살렘(Jerusalem)은 A.D. 70년 로마 제국(Roman Empire, B.C. 27 ~ 395)이 점령한 이후 동로마 제국(Eastern Roman Empire, 비잔티움 제국 Byzantine Empire, 395 ~ 1453)의 지배하에 있었으며 638년 이슬람 제국(Islamic Empire 632 ~ 750, 아비스왕조 750 ~ 1258)의 제2대 칼리프 우마르 1세(Umar ibn al-Khattāb, 재위 632 ~ 644)에 의해 정복되어 아랍의 지배하에 있었다.
이어서 1077년 셀주크튀르크(Seljuk Turk, 1040 ~ 1157)가 다시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예루살렘 순례를 방해하였다.
제1차 십자군 원정(1096 ~ 1099)
1077년 예루살렘을 차지한 셀주크 제국(Seljuk, 1040 ~ 1157, 튀르크)은 비잔티움 제국(Byzantium Empire, 395 ~ 1453)까지 침략할 기세였다.
셀주크 제국에 위협을 느낀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알렉시오스 1세 콤니노스(Alexius I Comnenus, 재위 1081 ~ 1118)가 로마 교황인 우르바누스 2세(Urbanus PP. II, 제159대 교황, 재위 1088 ~ 1099)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이에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클레르몽(Clermont, 프랑스)에서 교회회의(1095. 11.)를 개최하고 교황의 권위(교황이 2명인 대립교황)를 세우기 위해 예루살렘을 되찾자고 설파했다.
이에 따라 예루살렘을 되찾기 위해 형성된 연합 군대를 제1차 십자군(1096 ~ 1099)이라 한다.
십자군의 본대가 결성되어 출발하기 전인 1095년에 교황 우르바노 2세의 부름에 전 유럽에서 15만 명이 넘는 기사, 제후, 사제, 구원을 바라는 여자와 노약자까지 참여한 민중 십자군이 형성되었다. 교황은 병사가 될 수 없는 사람들의 십자군에 참여를 금지하였지만 이들은 은자(隱者) 피에르(Pierre l'Ermite 피에르 레르미트, ? ~ 1098, 1115) 등에 이끌려 출정하였는데 거지 떼가 되어 약탈, 살상 등을 일삼으며 화려한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했으나 알렉시우스 1세(Alexius I Comnenus 알렉시우스 1세 콤네누스, 동로마 제국 황제 재위 1081 ~ 1118)는 이들을 소아시아의 이슬람인 룸 술탄국으로 바로 보냈다.
룸 술탄국의 17살의 술탄 클르츠 아르슬란 1세(Kılıç Arslan, 재위 1092 ~ 1107)는 니케아 근처에서 약탈하는 이들을 박살 냈으며 이들을 본 이슬람은 십자군을 오합지졸로 생각하여 제1차 십자군이 출정해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다.
1096년 제1차 십자군의 총사령관은 명목상 아데마르 주교(Adhemar de Monteil, 아데마르 드 몽테유)였으며 프랑스 툴루즈를 중심으로 프로방스 전체를 다스리던 툴루즈 백작 레몽 4세(Raymond), 프랑스의 부용(Bouillon 현재 스위스 북부) 지방의 영주인 로렌 백작 고드프루아(Godfrey, 1061 ~ 1100, 예루살렘 왕국의 1대 국왕)와 그 의 동생 보두앵 1세(Baudouin I, 보두앵 드 불로뉴, Baudouin de Boulogne, 1065 ~ 1118 플랑드르 가문, 에데사 백국의 초대 백작, 예루살렘 왕국의 2대 국왕), 배르망두아(프랑스 북부) 지역의 프랑스 국왕의 동생인 위그(Hugh), 이탈리아의 타란토(taranto)의 보에몽 1세(Bohemund of Taranto), 보에몽의 사촌 탄크레드(Tancred), 플랑드르 백작 로베르 2세, 노르망디 공작 로버트 2세(로베르 2세,Robert Curthose or Robert II, 1051, 1054 ~ 1134), 블루아(Blois, 프랑스) 백작 에티엔 2세(Etienne II de Blois), 은자(隱者) 피에르(Pierre l'Ermite 피에르 레르미트, ? ~ 1098, 1115) 등 제1차 십자군으로 참여하였다.
1097년 5월 연합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플로 향하여 출발하였으며 수많은 약탈로 원정 비용과 물욕을 채웠다.
비잔틴 제국(알렉시오스 황제)의 타티키오스 군과 마누일 부투미티스 함대와 합세한 연합 십자군은 비잔틴의 보스포루스 해협을 넘어 소아시아(아나톨리아 , 터키)로 진군하여 룸 술탄국(클르츠 아르슬란 1세 Kilij Arslan, 1092 ~ 1107)의 수도 니케아를 21년 만에 점령하여 탈환하였다.
십자군은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계속 진군하여 셀주크 제국이 지배하고 있던 안디옥(Antioch)에 1907년 10월에 도착하였으며 블로뉴의 보두앵 1세(Baudouin I, 1065 ~ 1118, 예루살렘 국왕, 에데사 백작, 프랑스의 백작)와 탕크레드 드 오트빌(Tancrède de Hauteville, 1072 ~ 1112, 프랑스, 노르만)은 군을 분리하여 1907년 에데사를 정복하였으며 보두앵이 에데사 공국을 창설하였다.
레몽, 보에몽, 피에르는 고전 끝에 1098년 3월에 안디옥(Antioch)을 점령하였다.
1097년 십자군은 안디옥(Antioch) 공성전에서 도망친 블루아(Blois, 프랑스) 백작 에티엔 2세(Etienne II de Blois)와 유럽으로 돌아가버린 프랑스 왕 동생 위그(Hugh)를 제외한 거의 모든 십자군이 예루살렘 탈환에 참여하였다.
3년 만에 예루살렘을 탈환하여예루살렘 왕국(Kingdom of Jerusalem, 1099 ~ 1291)을 세웠으며 신성 로마 제국의 로렌 백작 고드프루아(Godfrey, 예루살렘 왕국 1대 왕, 재위 1099 ~ 1100)가 왕이 되었다.
제1차 십자군의 성공으로 지중해 동해안에는4개의 십자군 국가들(에데사 백국, 안티오키아 공국, 예루살렘 왕국, 트리폴리 백국)이 세워졌다.
제2차 십자군 원정(1145 ~ 1149)
주로 귀족이 참여한 제1차 십자군 전쟁과는 달리 왕들이 출전한 첫 번째 십자군 전쟁이었다.
모술(Mosul, 이라크 북부)의 아타베그(Atabeg, 군사력을 가진 제후)인 장기(Zengi, Imad ad-Din Zengi, 이마드 앗딘 장기, 1085 ~ 1146, 이라크 총독, 장기 왕조 창건)가 1145년 에데사 백국(County of Edessa, 터키의 우르파)을 점령하자 서유럽에서는 위기감이 조성되어 교황 에우제니오 3세(Eugenius PP. III, 제167대 교황, 재위 1145 ~ 1153)의 호소로 제2차 십자군이 결성되었다. 당시의 명성 높은 설교가였던 클레르보의 베르나르(Bernardus Claraevallensis, 베르나르두스 클라라에발렌시스, 1090 ~ 1153, 수도자, 시토회를 창립)의선동으로 프랑스의 루이 7세, 독일 왕 콘라트 3세, 슈바벤 공작 프리드리히(신성 로마 제국의 프리드리히 1세)를 중심으로 많은 참가자들이 출정하였다.
제2차 십자군은 소아시아(터키)에서 룸 셀주크(Rum Seljuk, 1077 ~ 1307)에게 패배했다.
이어서 안티오키아 공국에 도착하였으나 예루살렘 왕국은 기독교국으로 유지되고 있었고 에데사 백국은 상대하기 어려운장기(Zengi, Imad ad-Din Zengi, 이마드 앗딘 장기, 1085 ~ 1146, 이라크 총독, 장기 왕조 창건) 왕조가 지배하고 있으므로 목표가 뚜렷하지 않아 전의를 상실하였다.
그래서 에데사 백국을 탈환하지 않고 예루살렘에 전군이 집결해 정치 불안으로 비교적 약하고 장기 왕조와 대립하고 있는 다마스쿠스 지역의 셀주크 제국의 지방정권인 부리드 왕조(Burids, 1104 ~ 1154)를 공격하였으나 그마저 실패하여 철수하였다.
제3차 십자군 원정(1189 ~ 1192)
아이유브 왕조(Ayyubids dynasty, 이집트의 이슬람 왕조1169 ∼ 1250)의 시조인 살라흐 앗 딘(Sahah al-Din Yusef b. Ayyub, 재위 1169 ~ 1193, 살라딘)은 1174년 알렉산드리아를 내습한 예루살렘 왕국 등의 십자군을 격퇴하고 시리아의 십자군 도시를 차례로 점령했으며 1187년 갈릴리의 하틴 전투(The Battle of Hattin)에서 기 드 뤼지냥(Gui de Lusignan, 기사, 예루살렘 왕국의 제9대 공동 국왕, 재위 1186 ~ 1192)이 지휘한 십자군을 대파하고 성지가 있는 예루살렘을 다시 빼앗았다.
예루살렘의 왕 기 드 뤼지냥(Gui de Lusignan, 재위 1186 ~ 1192)은 유일한 영토인 팔레스타인 해안 쪽의 티레(성주 코라도 델 몬페라토, Corrado del Monferrato)로 수도(1187 ~ 1191)를 옮겼으나 화난 성주와 기사들이 받아주지 않아 노숙하였다. 성지가 있는 예루살렘은 빼앗겼으나 예루살렘 왕국의 명맥은 이어갔던 것이다.
예루살렘의 함락 소식을 들은 교황 우르바노 3세(Urbanus PP. III,제172대 교황 재위 1185 ~ 1187)는 충격으로 죽었고 뒤를 이은 교황 그레고리오 8세(Gregorius PP. VIII, 제173대 교황 재위 1187 ~1187)는 성지 탈환을 목표로 새로운 십자군 결성을 호소했다.
프랑스 왕 존엄 왕 필리프 2세(Philippe Ⅱ, 재위 1180 ~ 1223),잉글랜드 왕 리처드 1세(Richard I, 재위 1189 ~ 1199),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1세(Friedrich I, 재위 1079 ~ 1105) 등이 1189년에 십자군으로 참여하였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1세는 비잔티움 제국을 통과하여 1189년 5월 룸 셀주크 제국의 수도 이코니움(콘야, Konya, Ικoνιο, 터키 중부)을 점령했다. 그러나 1190년 6월 10일 프리드리히 1세가 킬리키아(Cilicia, 터키의 남동쪽 해안)의 살레흐 강에서 익사하였다.
신성로마 제국군의 대부분은 흩어지고 일부는 계속 전진했으나 시리아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패배하였다.
1191년 잉글랜드 왕 사자심왕 리처드 1세(Richard I)와 프랑스의 필리프 2세(Philippe Ⅱ, 재위 1180 ~ 1223)는 함께 해로로 출발해 키프로스를 점령했으나 둘 사이에 관계가 악화되어 각각 따로 팔레스타인에 도착했다.
필리프 2세와 리처드 1세는 1191년 아크레(Acre, 이스라엘 북부 항구, 예루살렘 왕국의 수도가 됨, 1191 ~ 1229)를 탈환했으나 불화로 필리프 2세는 프랑스로 돌아갔다.
리처드 1세는 아르수프 전투(Battle of Arsuf, 1191)에서 살라딘에 승리하여 자파를 탈환했다.
예루살렘 왕국의 왕위 계승 문제에 의견이 있었으나 1190년 코라도 1세(Conrad, Corrado del Monferrato, 코라도 델 몬페라토,몬페라토 변경백, 이탈리아)로 결정되었는데 코라도 1세는 1192년 암살 교단(아사신, Assassin, 중세 이슬람 시아파의 극단주의 암살 조직)에 의해 살해되었다.
리처드 1세는 1192년 봄 예루살렘으로 진군했으나 본국 영국에서 비보가 전해졌다.
성지에서 귀국한 프랑스의 필리프 2세가 리처드 1세의 막내 동생 존을 앞세워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 지방을 넘어 영국까지 침공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리처드 1세는 몇 달 더 전투에 임했으나 진퇴를 반복할 뿐 상황이 나아지지 않았다. 이슬람 군대가 리처드를 막기 위해서 전력을 다했기 때문이다.
리처드는 살라흐 앗 딘(살라딘)과 강화를 맺기로 하였다.
이슬람의 성직자 이맘들은 리처드 1세가 처한 상황을 알고 강화를 격렬히 반대했지만, 살라흐 앗 딘은 오히려 젊은 35세의 리처드와 54세의 자신 살라흐 앗 딘의 나이를 언급하며 시간이 꼭 나의 편이 아니라고 역설하며 리처드 1세가 처한 위기 상황을 이용하지 않고 강화를 맺기로 하였다.
회담의 결과 1조 항에 '예루살렘은 이슬람에 속한다. 그리스도교인의 모든 성지 순례를 보장한다.'였다.
리처드 1세는 살라흐 앗 딘과 휴전 협정을 체결하면서 성지 예루살렘 탈환 작전은 실패로 끝났다.
제4차 십자군 원정(1202 ~ 1204)
교황 인노첸시오 3세(Innocentius Ⅲ, 재위 1198 ~ 1216)의 요청에 따라 처음 목표는 예루살렘이었으나 군비를 지원한 베네치아의 요구에 따라 이집트 공략을 목표로 하였다. 1202년 결성된 제4차 십자군에 참가한 세력은 이탈리아 북부 몬페라토의 보니파치오 후작, 플랑드르와 에노의 보두앵 6세 드 에노 백작, 프랑스의 상파뉴 백작 티보와 발루아 백작 루이, 신성로마제국의 오토 4세 및 베네치아 공화국의 엔리코 단돌로 도제(Doxe de Venexia, 베네치아 공화국의 원수 정부수반)였다.
군비가 부족한 십자군은 베네치아의 지원을 받아 출발하였고 이에 베네치아는 이집트가 아닌 베네치아를 배신한 헝가리의 차라(Zara, 자다르, Zadar)를 정복하기를 요구함에 따라 십자군은 기독교 국가인 헝가리 왕국의 차라를 공략하였으므로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십자군 전체가 파문당하였다가 후에 철회되었다.
이어서 이들 십자군은 1204년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하여 라틴제국을 세웠다.
그리고 베네치아는 제 4차 십자군의 수장인 보니파치오 대신에 베네치아와 가까운 보두앵 6세 드 에노 백작(Baudouin VI de Hainaut, 1172 ~ 1205)을 황제 보두앵 1세로 옹립하였다.
이에 분개한 보니파치오는 테살로니키(Thessaloniki, 그리스 북부, 그리스 제2의 도시)를 점령하여 테살로니카 왕국(Regnum Thessalonicae, 1204 ~ 1224)을 세웠고 초대 왕으로 등극했다.
멸망한 동로마제국의 황족들은 제국령 각지에 망명 정권(니케아 제국)을 수립했다(동로마제국은 1261년에 재건되었다).
베네치아는 전쟁으로 영토를 차지하고 약탈로 재물을 얻었으며 그리고 라틴제국 황제를 베네치아 세력 하에 둠으로써 무역 경쟁자인 제노바와 피사를 제치고 동 지중해의 무역권을 독점하게 되었다.
* 알비 십자군(Albigensian Crusade, 1209 ~ 1239)
교황 인노첸시오 3세(Innocentius Ⅲ, 재위 1198 ~ 1216)는 프랑스 남부의 카타리파(Cathari, 알비파, Albigenses)를 이단으로 규정하는 칙서를 반포하고 십자군의 결성을 촉구하였다.
알비 십자군(Albigensian Crusade)은 피에르 드 카스티니오(Pierre de Castinio)를 사령관으로 하여 카타리파의 중심지인 프랑스 남부 랑그도크(Languedoc) 지역을 공격하였다(Albi는 이지방의 지역명).
알비 십자군(Albigensian Crusade)의 결성은 도미니코회(Ordo Fratrum Praedicatorum)의 설립과 종교재판(宗敎裁判, inquisitio)의 계기가 되었다.
* 소년 십자군(少年十字軍, Children's Crusade, 어린이 십자군, 1212)
소년 십자군은 독일과 프랑스의 10대 소년들이 하느님의 계시를 받았다면서 결성한 십자군을 말한다.스테판이라는 10대 소년이 출애굽 설화에 나오는 바다가 갈라지는 기적이 벌어질 것이라고 주장하며 선동하였지만 그들은 상인들의 농간으로 노예로 팔리거나 해상사고로 죽고 말았다. 이들 중 노예로 팔린 소년들은 이슬람 지도자 살라딘의 관용으로 해방되었다.
제5차 십자군 원정(1217 ∼ 1221)
교황 이노켄티우스 3세(Innocentius Ⅲ, 재위 1198 ~ 1216)는 1213년 교황 칙령으로 십자군의 소집을 요구하고 1215년의 제4차 라테란 공의회(Lateran Council)에서 이를 선포했다
제5차 십자군에는 헝가리 왕 엔드레 2세, 오스트리아 제후 레오폴트가 참가하였다. 십자군은 팔레스타인의 아크레에 상륙한 후아이유브 군을 만나자 팔레스티나 탈환을 단념했다. 1218년부터 1219년에 걸쳐서 예루살렘 왕 휘하의 프랑크 시리아 군은 아이유브 왕조의 수도 카이로를 공격하고 나일강어귀의 다미에타를 점령했다. 이에 아이유브 왕조의 술탄 알카밀(al-Malik al-Kamel Naser al-Din Abu al-Ma'ali Muhammed, 제5대 술탄, 재위 1218 ~ 1238)은 화의(和議)를 제창하고 아울러 다미에타와 예루살렘의 교환을 제의했다. 그러나 십자군은 이를 거절하였을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왕 휘하의 프랑크 시리아 군은 1221년 카이로로 진격했지만 큰 홍수를 만나 완패했다.
제6차 십자군 원정(1228 ~ 1229)
제6차 십자군원정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2세(Friedrich II, 1194 ~ 1250)가 교황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아 파문되자 1229년 억지로 실시하였다.
그는 이슬람과 협상을 통해 1229년 조약을 맺고 예루살렘을 획득했다.
그러나 1244년 아이유브 왕조가 불러들인 호레즘 왕조(Khwarazmian)의 잔당 군벌에게 다윗 탑의 십자군 수비대가 항복하여 예루살렘이 다시 이슬람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지방으로 이전한 예루살렘 왕국(Kingdom of Jerusalem, 1099년 ~ 1291년)은 레반트의 기독교 왕국으로 존재하다가 1291년에 맘루크 왕조에 의해 멸망하였다.
제7차 십자군 원정(1248 ~ 1254)
교황 인노센트 4세(Innocentius PP. IV, 제180대 교황, 재위 1243 ~ 1254)는 1245년 리용 종교회의에서 제7차 십자군 결성을 촉구하였다.
제7차 십자군은 프랑스 루이 9세(Louis IX, Saint Louis, 재위 1226 ~ 1270)가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멸망한 호레즘 제국(Khwarazmian1077 ~ 1231)의 잔당 군벌에 의해 1244년 예루살렘이 점령되고 1247년에 아스칼론(Ascalon, 팔레스타인 남단)이 함락되었으며 그리고 몽골의 일 한국이 안티오키아를 위협하였다.
이에 루이 9세는 1248년에 아이유브 왕조(1171 ~ 1260, 튀르크 국)가 지배하는 이집트로 향해 출범하여 1249년 다미에타( Damietta, 이집트 나일 삼각주 지역의 항구)를 점거했다. 이에 아유브 왕조의 술탄 앗사리프가 다미에타와 예루살렘을 바꾸자는 제의를 하였으나 루이 9 세는 거부하고 카이로로 진격하여 1250년 만수라(왕궁 성) 전투(The battle of Mansura)에서 슐탄의 친위대인 바이바르스(Baibars, Mamluk, 맘루크)에게 패하고 파리스쿠르 전투( Bataille de Fariskur, 이집트)에서 이집트군에 포위되어 포로로 잡혔다.
이집트의 아이유브 왕조는 1250년 7차 십자군 전쟁에서도 승리했으나 전쟁 중에 술탄 알 살리흐(Salih, 재위 1204 ~ 1249)가 병사하고, 슐탄의 알 살리흐의 아내 샤자르 알 두르(Shajar al-Durr)와 결탁한 친위대인 바이바르스(Baibars, Mamluk, 맘루크)에 의해 후계자인 알 투랸샤가 살해당하여 아이유브 왕조는 멸망했다.
바이바르스(Baibars, Mamluk, 맘루크)는 슐탄의 알 살리흐의 아내 샤자르 알 두르(Shajar al-Durr, 재위 1250년 5월 ~ 7월)를 술탄으로 추대하여 마물루크 왕조(Mamlk, 맘루크 왕조, 1250 ~ 1517, 튀르크 국)를 세웠다.
루이 9세는 마물루크 왕조에 고액의 몸값을 치르고 석방되었다.
제8차 십자군 원정(1270 ~ 1270)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가 1260년 아인잘루트 전투(Battle of Ain Jalut1260, 팔레스타인의 갈릴리, 제즈 리엘 계곡)에서 일 한국(일 칸국, Ilkhanate)의 칸 훌라구가 보낸 키트부카(Kit-buqa) 몽골군에 승리한 이후 이스라엘 지역의 아르슈프(Arsuf), 아틸리트(Atlit), 하이파(Haifa), 제파(Zefat), 아슈켈론(Ashqelon), 카이사레아Caesarea)에 있는 십자군을 공격하기 시작하여 1268년에는 안티오키아 공국(Principality of Antioch, 1098 ~ 1268, 터키 남부와 시리아 국경 부근, 1260년 일 한국에 항복)을 멸망시켰으며 이어서 트리폴리 백국(Comitatus Tripolitanus, 1102~1289, 레판토 지역, 안티오키아 아래 이스라엘 위 지역)을 공격하려고 했다.
이에 루이 9세(Louis IX, 재위 1226 ~ 1270, 프랑스 왕)는 이집트의 맘루크를 공격하려다가 북아프리카의 튀니지(Tunisia)로 바꾸었다.
제8차 십자군은 루이 9세가 1270년 튀니지를 공격한 십자군이다.
1270년 루이 9세(Louis IX, 재위 1226 ~ 1270, 프랑스 왕)는 예루살렘 왕 휘하의 프랑크 시리아의 기독교계 거점을 공격하는 마물루크 왕조(맘루크)를 저지하기 위해 제8회 십자군을 일으켰다. 그러나루이 9세는 북부 아프리카 문제에 큰 관심을 품고 있던 시칠리아 왕 샤를 당주(루이 9세의 동생)의 제언에 따라 튀니지를 공격하였다.
그리데 루이 9세는 같은 해에 그곳에서 병사하고 말았다.
제9차 십자군 원정(1271 ~1272)
제8차와 제9차를 통합하여 제8차 십자군 원정이라고 하기도 한다.
제9차 십자군의 원정은 프랑스의 루이 9세(Louis IX, 재위 1226 ~ 1270, 프랑스 왕)가 제8차 십자군 때 튀니지를 점령하지 못하자 튀니지 원정에 참여했던 영국의 헨리 3세의 아들 에드워드 1세(Edward I, 재위 1272 ~ 1307, 잉글랜드 왕)는 바이발스(Baibars, Mamluk, 맘루크)가 1268년 함락시킨 안티오키아 공국(Principality of Antioch, 1098 ~ 1268, 남부터키와 시리아 국경 부근, 1260년 일 한국에 항복)을 수복하려고 아크레(Acre, 이스라엘의 도시)로 원정한 것이다.
에드워드 1세는 일 한국과 협력하여 바이발스를 대적하고자 했다. 에드워드 1세는 1271년 적은 병력으로 아크레(Acre)에서 십자군 원정을 시작하여 몇 곳에서 승리하였으나 일 한국의 사마가르(Samagar) 장군이 바이발스와 대적하기 어려워 돌아가고 바이발스(Baibars, Mamluk, 맘루크) 군도 적군 파악이 어려워 공격하지 않았다. 이에 에드워드 1세는 군대가 약하여 싸울 수 없다고 판단하여어 회군함으로써 십자군 원정의 막이 내렸다.
다. 중세(中世, Medium aevum)
유럽 역사에서 서로마 제국이 멸망(476년)한 이후부터 비잔틴 제국(동로마제국 이제국)이 멸망하기까지, 대항해시대 전, 혹은 르네상스 전까지를 중세(中世, Medium aevum)라 한다.
중세시대에는 기독교 교리가 온 세상의 생각과 문화를 지배하였다.
중세의 철학자들에게 진리는 오로지 기독교에 있었다.
중세를 지배한 기독교에 대한 무조건적 믿음을 뒷받침한 철학자로 교회의 아버지라 불리는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 354 ~ 430, 로마, 아프리카 타가스테 출생)는 기독교를 향한 굳은 믿음만이 진리를 향한 길이라고 생각하여 믿음이 깊으면 하느님이 영혼을 밝혀 주어 초자연적인 인식을 얻게 된다고 하였다.
기독교가 온 세상을 지배함에 따라 영의 세계는 빛을 잃고 가톨릭 교권은 부패하였다.
교황의 권위를 추락시키고 이슬람과의 갈등을 격화시키며 민생을 암울하게 만든 십자군 전쟁(11 ~ 13C), 몽골군의 침입(1220년대 ~ 1240년대), 흑사병(黑死病, Black Death, Pestilence, Great Plague, Plague, Black Plague, 패스트, 대유행 1346 ~ 1351) 창궐 등이 일어나고 부패한 교회가 온 세상을 지배한 중세를 암흑시대(暗黑時代, Dark Ages)라고 한다.
암흑시대(暗黑時代, Dark Ages)란 부패한 교회가 삶을 지배하여 개인은 신에 헌신하고 개성이 무시되며 자아를 잃고 교회에 순종과 복종을 하여 경제적, 지적, 문화적으로 쇠퇴한 시대를 의미한다.
그뿐만 아니라 자연과학 분야도 암흑기였다.
과학 발전의 전환점이 되는 지동설을 에로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고대 그리스의 알렉산드리아에서 활동한 프톨레마이오스(Ptolemaeus, 85 ~ 165, 고대 그리스, 천문학자, 수학자)가 지은 '알마게스트(Almagest)가 중세의 서양의 우주관, 나아가 종교관과 세계관을 지배했다.
그중의 하나인 지구가 우주의 중심으로 움직이지 않고 달, 태양, 행성들이 지구의 둘레를 공전한다는 천동설(天動說, Geocentric theory)은 히파르코스(Hipparchos,B.C. 190 ~ B.C. 120경, 고대 그리스, 천문학자) 등 그리스의 이론을 종합하고 그로부터 더 나아가 프톨레마이오스가 체계를 완성한 것으로 1400년 동안을 교회의 지지로 지배했던 것이다.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1473 ~ 1543, 폴란드, 천문학자)는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를 1525 ∼ 1530년 사이에 집필하였는데 태양이 우주 혹은 태양계의 중심에 있고 나머지 행성들이 그 주위를 공전한다는 지동설을 종교재판 등의 압박 속에 겨우 발표하였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주장은 과학사의 획기적인 사건이다.
1608년 네덜란드의 한스 리퍼세이(Hans Lippershey, 1570 ~ 1619, 안경 제조업자)는 우연히 볼록렌즈와 오목렌즈 둘을 겹쳐서 먼 곳의 물체를 잘 보이는 망원경을 발견하였다.
1609년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 ~ 1642, 이탈리아, 천문학, 물리학, 수학)는 이 소식을 듣고 망원경을 만들어 천체를 관측하고는 지동설(地動說, Heliocentric theory, 태양중심설)을 세우고 1632년 '프톨레마이오스와 코페르니쿠스의 2대 세계체계에 관한 대화(Dialogo sopra i due massimi sistemi del mondo, tolemaico e copernicaon)'를 집필하여 지동설을 뒷받침하였다.
1095년 교황 우르바노 2세(Urban Ⅱ, 재위 1088 ~ 1099)가 개최한 클레르몽(Clermont) 종교회의에서 결정된 십자군 원정(the Crusades)은 200여 년간 지속되었으며 중세 유럽의 정치, 사회, 문화, 종교 등에 큰 변화를 일으켰다.
그래서 십자군 원정을 기준으로 중세를 전반기와 후반기로 구분하기도 한다.
십자군 원정이 실패하고 영국의 젠트리(Gentry), 절대 왕정의 중상주의 경제 정책으로 부를 축적한 부르주아(bourgeois) 등의 수많은 자유인들이 생겨남에 따라 제후들의 배경이 되었던 봉건제도(封建制度, feudalism)와 장원제도(莊園制度, Manorialism)가 붕괴되었다.
봉건제도의 붕괴는 사회적, 경제적으로 큰 변화를 가져왔으며, 교회와 신앙에도 영향을 주어 신(교회)보다는 인간이, 봉건 제도하에서의 결속보다는 개인이, 내세보다는 현세가 중시됨에 따라 교황과 교회의 권위가 추락되고 종교개혁이 일어났으며 굶주림을 탈출하기 위해 대항해시대를 열었으며 자유사상이 확산되어 자아와 개성을 찾아 인문주의 운동인 문예 부흥(르네상스, Renaissance)이 일어나면서 중세는 몰락하고 근세(近世, early modern period, 르네상스 ~ 산업혁명)로 접어들게 되었다.
아이러니(irony)하게도 흑사병(黑死病, Black Death, Pestilence, Great Plague, Plague, Black Plague, 패스트)으로 많은 사람이 죽자 인구감소로 살아남은 사람은 전보다 많은 토지를 소유하게 되어 주식이 죽에서 빵으로 바뀌게 되고 육식을 많이 하는 식습관으로 변화되었다.
라. 이슬람(Islam)
1) 페르시아 제국의 아케메네스 왕조(Hakhāmanišiya)
키루스 대왕(Cyrus the Great, 키루스 2세, B.C. 600 ~ BC 530)이 세운 페르시아 제국의 아케메네스 왕조(Hakhāmanišiya, B.C. 550 ~ B.C. 330)는 기원전 6세기부터 기원전 4세기 전반기를 포함한 시기까지 지중해 동쪽의 마케도니아, 트라키아와 흑해 서부 해안 (오늘날 불가리아 남동부와 동부), 이집트, 아나톨리아, 페니키아, 레반트 등을 대부분 지배하였고 정치체제는 강력한 중앙집권국가였다.
아케메네스 왕조(Hakhāmanišiya, B.C. 550 ~ B.C. 330)는 고대 세계의 금 생산지역을 지배하였으므로 많은 양의 금이 페르시아로 집합되었다. 아케메네스 왕조의 키루스 왕이 금으로 만든 판에 써넣은 선언문도 발굴되었다고 한다.
2) 알렉산드로스 대왕, Alexander III)
알렉산드로스 3세 메가스(알렉산드로스 대왕, Alexander III Magnus, B.C. 356 ~ B.C. 323)는 고대 그리스 북부의 왕국 마케도니아 왕국(Μακεδονία, B.C. 808~B.C. 148) 필리포스 2세(Philip II,B.C. 382~B.C. 336)의 왕자로 태어나 16세까지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가 되어 교육받았다.
필리포스 2세는 B.C. 346년 포키아(Phokida)를 병합하여 마케도니아를 강력한 왕국으로 만들었다.
B.C. 338년 알렉산드로스는 필리포스 2세와 같이아테네,테베, 그리고 코린토스 등도시국가들의 연합군을 상대로 카이로네이아 전투(Battle of Chaeronea, B.C. 338)에서 승리하였으며 B.C. 337년마케도니아 왕국은 스파르타를 제외한모든 그리스도시국가가 포함된코린토스 동맹(League of Corinth, BC 337, 군사 동맹)을 수립하여 맹주가 되었다.
B.C. 336년 알렉산드로스는 20세에 아르게아스 왕조(Argeadai, 마케도니아 왕국의 첫번째 왕조, B.C. 808 ~ B.C. 310)의 제26대 마케도니아 국왕(재위 B.C. 336 ~ B.C. 323)이 되었다.
마케도니아 왕국은 제정이 궁핍하였으며 알렉산드로스는 금이 쌓여있다는 이집트와 아케메네스 페르시아를 정복할 계획을 세웠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먼저 이소수 전투(Battle of Issus, B.C. 333)에서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군을 물리치고 소아시아(아나톨리아, 튀르키예)를 정복한 다음331년 이집트를 정복한 알렉산드로스는 이집트를 떠나 다시 가우가멜라전투(Battle Of Gaugamela, B.C. 331) 등에서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3세에게 승리하여 아케메네스 제국을 정복했으며 인도 북부까지 침략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전쟁에서 패한 적이 없었다.
이렇게 정복한 이집트에서는파라오(재위 B.C. 332 ~ B.C. 323)에 등극하였으며 페르시아에서도 페르시아 국왕(재위 B.C. 330~ B.C. 323)으로 즉위하였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Alexandria)라는 지명은 자기 이름을 따서 스스로 붙인 것이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세우고 우수한 그리스 문명과 문화를 미개한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에 전파하고자 했으나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의 문명과 문화가 더 우수하여 두 국가의 우수한 것을 융합하여 헬레니즘(Hellēnismos, 19C 요한 구스타프 드로이젠 Johann Gustav Droysen 이 명명, 그리스 문화를 동양 식민지에 전파) 문화를 열었다.
알렉산드로스 3세는 B.C. 323년 31세에 바빌론에서 사망하였다.
알렉산드로스 3세가 사망하자 그의 부하 장군들은 대왕의 후계자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디아도코이 전쟁(Wars of the Diadochi, 후계자 전쟁 Wars of Alexander's Successors, B.C. 323 ~ B.C. 281)을 하였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급사했을 때 후계자는 없었으나 록사네(Roxana, ? ~ B.C. 309) 왕비가 임신 중이었다.
대왕 사후 마케도니아 왕국의 체제를 결정하기 위해 개최된바빌론 회의에서 임신 중인 아이의 성별을 알 수 없어 대왕의 배다른 형인 아리다이오스를 명목상 필리포스 3세(Philip III, 재위 B.C. 323 ~ B.C. 317)로 세우고 디아도코이 전쟁(Wars of the Diadochi, 후계자 전쟁 Wars of Alexander's Successors, B.C. 323 ~ B.C. 281)의 장군 중의 한명으로 제국의 총사령관이 된 페르디카스(Perdiccas, ? ~ B.C. 321)가 섭정을 하며 왕비가 임신 중인 아이가 남자로 태어날 경우 공동 왕으로 세우기로 결정했다.
B.C. 323년 8월 임신 중인 아이가 남아로 태어나 알렉산드로스 4세(Aleksandros IV, B.C. 323 ~ B.C. 309)로 즉위하여 공동 통치자가 되었다.
마케도니아 왕국(Μακεδονικό βασίλειο, B.C. 808 ~ B.C. 168, B.C. 150 ~ B.C. 148)은 B.C. 148년 로마와의 전쟁에 패배하여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3) 셀레우코스 제국(Seleucid Empire, B.C. 312 ~ B.C. 63)
알렉산드로스 3세 사후 그의 부하 장군들이 대왕의 후계자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디아도코이 전쟁(Wars of the Diadochi, 후계자 전쟁 Wars of Alexander's Successors, B.C. 323 ~ B.C. 281)을 치렀는데 디아도코이 전쟁의 최종 전투인 코로페디온 전투(Battle of Corupedium, B.C. 281)에서 승리한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Seleucus I Nicator, B.C. 358 ~ B.C. 281)가 아케메네스 제국의 영토 대부분을 차지하여셀레우코스 제국(Seleucid Empire, B.C. 312 ~ B.C. 63)을 B.C. 312년에 세웠다. 셀레우코스 제국에서는 지배층인 소수의 그리스인이 헬레니즘 문화를 강요하였다. 그동안 지방에서 세력을 키워온 파르티아(Parthia, 이란 북동부)와 박트리아(Bactria, 우즈베키스탄·타지키스탄의 남쪽과아프가니스탄의 북쪽) 지방의 사트라프(satrap, 총독)들이 B.C. 250년경 반란을 일으켜 왕국을 세웠다.
그리스-박트리아 왕국(B.C. 256 ~ B.C. 125)은 B.C.190년 로마에 의해 멸망되었다.
4) 파르티아 제국(Parthian Empire)
파르티아(Parthia)는 이란 북동부에 해당하는 고대의 지역으로 전성기에는 이란, 아르메니아, 이라크, 조지아, 터키 동부, 시리아 동부, 투르크메니스탄, 아프가니스탄, 타지키스탄, 파키스탄, 쿠웨이트, 사우디아라비아의 페르시아만 해안 지역, 바레인, 카타르, 아랍에미리트까지를 영토로 가진 파르티아 제국(Parthian Empire, 아르사케스 제국, Arsaces, Arshak, B.C. 247 ~ A.D. 224)이 되었다.
파르티아 제국은 지방에 총독을 파견하여 다스렸다. 아르사케스 가문은 유력한 가문으로 명목상 군주였으며 제국 전체를 직접 지배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5) 사산 제국(사산 왕조, Sassanids, Sassanid Empire, Eranshahr 에런샤흐르, 사산조 페르시아, 224 ~ 651)
사산 가문의 아르다시르 1세(Ardashir I, 재위226~241)가 사산 제국(224 ~ 651)을 건국한 직후 아르사케스 왕조 파르티아를 멸망시켜 서아시아의 패권국이 되었다.
사산 왕조는 강력한 중앙정부 체제를 갖추어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관료제를 구축하였으며 지방 통제를 강화하였다.
이로서 국가 자원의 효율적인 활용이 가능하게 됨에 따라 인구와 경제력에서 사산 왕조를 압도했던 동로마를 상대로 효과적인 전쟁을 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자라투스트라(Zoroaster 조로아스터)가 B.C.6 ~ 7세기경에 페르시아에서 창시한 조로아스터교(Zoroastrianism, Mazdaism 마즈다교, 배화교 拜火敎)가 국교이며, 조로아스터에서 분파된 마니교와 마즈다크교도 같이 유행했다.
7세기 초 아라비아에서 발흥한 아랍 이슬람의 제2대 정통 칼리프(caliph, 무함마드의 대리, 이슬람 제국의 주권자의 칭호) 우마르 이븐 알 하탑(Umar ibn al-Khattab, 586 ~ 644, 칼리프 재위 634 ~ 644) 때인636년 총사령관 사아드(Sa‘dIbn Abī Waqqās)가사산조 페르시아 원정을 하여 까디시야 전투(Battle ofal-Qādisiyyah)에서 대승을 거두었으며 페르시아는 651년 멸망했다.
6) 무함마드(Muhammad ibn Abd Allah)
7세기 초 아라비아반도(Arabian Peninsula)는 거대한 로마에 이어 비잔틴(동로마) 제국이 서쪽에 있었고 동쪽에는 페르시아의 사산 왕조(Sasan, 208, 224 ~ 637, 651)가 위치하였다.
그리고 로마제국과 연맹하고 기독교를 받아들인 에티오피아의 악숨 왕국(Axum, Aksum, BC 2세기 건국,왕국 AD 1세기 ~ 960, 6세기까지 번성) 지배하에 있던 홍해 입구의 예멘은 중계무역을하였다.
비잔틴 제국과 사산왕조는 300여 년간의 전쟁으로 국력이 약화되었고 더욱이 페스트의 창궐로 비잔틴제국은 40%의 인구가 감소하였고 페르시아는 25%의 인구가 감소하였다. 양국은 아랍인을 용병으로 고용하여 국경을 방어하였으므로 아랍인들 중에는 전투에 능한 사람이 많아지게 되었던 것이다.
두 강한 제국이 자리 잡은 사이에 아라비아반도는 중간지대로 남아 있었다. 아라비아반도는 대부분이 대규모 전투가 불가능한 사막이고 아라비아인들이 이런 사막을 이용하여 게릴라전(Guerrilla Warfare, 遊擊戰)을 펼침에 따라 양 제국이 정복하기 힘들어 중간지대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유럽의 지중해 국가들은 사산왕조에 의해 인도와의 육로 무역로가 막힘에 따라 해로를 통해 아라비아 사막의 메카를 거치는 해양 무역로를 이용하였으며 많은 아라비아인들은 이 지역에서 중계무역에 종사하여 부를 쌓았던 것이다.
610년 대상(隊商, caravan)으로 무역에 종사하던 무함마드(Muhammad ibn Abd Allah, 570 ~ 632)가 이슬람교를 창시하였으며 그는 주변의 여러 종교의 반발과 메카의 아랍 부족들의 공격에도 맞서야 했기 때문에 정신적 지도자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 군사적 지도자가 되어 이슬람의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그래서 이란 등의 이슬람은 지금도 군사력을 동원한 제정일치의 사회를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무함마드가 이끄는 이슬람은 중계무역으로 쌓인 부와 용병으로 전투력이 길러진 병사들을 동원하여 주변 지역을 무력으로 점령해 아라비아를 거의 통일하였으며 점령한 지역에서는 관용을 베풀어 개종하면 세금을 면제하였고 개종하지 않아도 세금만 내면 살 수 있게 하였으며 세금도 비잔틴 제국과 페르시아 제국 시절보다 적게 거두었다.
그 결과 무력을 사용하지 않아도 스스로 항복하여 복속되는 지역이 많게 되었다.
이슬람은 그 지역 사람이 세금만 내면 종교나 민족이 달라도 차별 없이 관용을 베풀어 포용하였으므로 적은 수의 아랍족이 그 넓은 지역을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무함마드에게는 적자 아들이 없었고 무함마드의 사촌(양아들)과 결혼한 1명의 딸이 있었으나 후계자 지명 없이 죽었다.
그래서 회의를 열어 후계자인 칼리프(caliph, 무함마드의 대리, 이슬람 제국의 주권자의 칭호)를 추대했다.
이후 무함마드 후손과 지지자들은 무함마드 후손이 칼리프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제4대 정통 칼리프(알리, Ali ibn Abi Talib, 600 ~ 661)만을 진정한 칼리프로 인정하였으며 이에 따라 파가 갈리게 되었다.
칼리프를 회의로 추대하기를 주장하고 4명의 정통 칼리프(아부 바크르, 우마르, 오스만, 알리)를 정통 칼리프로 인정하는 수니파(Sunni)와 무함마드 후손인 제4대 정통 칼리프 알리(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 Alī ibn Abī Ṭālib, 재위 656 ~ 661, 무함마드 4촌, 양아들, 사위)만을 진정한 칼리프로 인정하고 그 후손이 칼리프를 이어야 한다는 시아파(Shi'a)로 나뉘었으나 후에는 수니파도 자손에게 지명하여 이어졌다.
제2대 정통 칼리프(caliph, 무함마드의 대리, 이슬람 제국의 주권자의 칭호) 우마르 이븐 알 하탑(Umar ibn al-Khattab, 586 ~ 644, 칼리프 재위 634 ~ 644) 때인636년 총사령관 사아드(Sa‘dIbn Abī Waqqās)는사산조 페르시아 원정을 하여 까디시야 전투(Battle ofal-Qādisiyyah)에서 대승을 거두어 페르시아를 멸망시킬 수 있게 되었으며 639년 장군 아무르 이븐 알 아스(Amr ibn al-As, 592 ~ 664)를 비잔틴의 지배하에 있던 이집트에 파견, 643년에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하고 같은 해에 트리폴리까지 점령했다.
644년에 후다이파 이븐 알 야만(Hudhayfah ibn al-Yaman) 장군이 니하완드 전투(Battle of Nihawand)에서 승리하고 사산조(Sassanian Persia, 페르시아의 한 왕조)를 멸망시켰다.
그리고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 박트리아를 정복하고, 아프가니스탄과 인도의 일부까지 침략했다.
제2대 정통 칼리프 우마르(Umar ibn al-Khattab, 586 ~ 644, 칼리프 재위 634 ~ 644)는 페르시아 제국과 비잔틴 속주인 이집트, 팔레스타인, 시리아 정복을 명하여, 순수한 아랍 국가였던 칼리프의 영토를 거대한 제국으로 발전시켰다.
이때에 사산왕조의 페르시아(226 ~ 651)를 정복하면서 알아낸 사탕수수와 설탕 제조법(설탕 제조법은 인도에서 발명됨)을 아랍으로 가져왔으며, 다시 710년 정복지인 이집트에 전해져 설탕 제조법이 더욱 발전되었으며 이어서 이슬람의 우마야 왕조에 의해 모로코를 거쳐 지중해를 건너 755년에 스페인 남부에 전파되었던 것이다.
제3대정통 칼리프인 우스만(우스만 이븐 아판, Uthmān ibn ‘Affān, 재위644 ~ 656) 시대에도 정복 전쟁은 계속되었으나 코가서스(Caucasus, 캅카스) 지역의 하자르 칸국(Hazar Khanate, 카자르 칸국 Khazar Khanate 650 ~ 969, 유대교, 서돌궐 후예, 수도 아틸 Atil)과의 발란자르 전투(Battle of Balanjar, 652)에서 크게 패하여 이 지역 진출이 막혔다.
그리고 제3대정통 칼리프인 우스만(우스만 이븐 아판, Uthmān ibn ‘Affān, 재위644 ~ 656) 시대에 무아위야 1세(Muʿāwiyah ibn ʾAbī Sufyān, 우마이야 왕조, 재위 661 ~ 680)는 시리아 총독(아밀)으로 강력한 군대를 양성하였으며 전권을 가진 총사령관이 되어 여러 전쟁에 승리하였고 해군의 건설에 전력하였다.
무아위야 1세는 알리(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 Alī ibn Abī Ṭālib, 재위 656 ~ 661, 무함마드 4촌, 양아들, 사위)가 제4대 정통 칼리프(교주 겸 국왕)로 취임하자 반란을 일으켰다. 알리가 암살되자 자신이 칼리프로 취임하여 우마이야 왕조(Umayyad dynasty, 우마이야 칼리프국, Umayyad Caliphate,661 ∼ 750)를 열었다.
우마이야 왕조의 초대 칼리프 무아위야 1세(재위 661 ~ 680)는 아들야지드 1세(재위 680 ~ 683)를 원정 보내어 674 ~ 677년 3년 동안 콘스탄티노폴리스를 1,000여 척의 함정으로 포위 공격(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하였으나 비잔틴 제국의 콘스탄티노스 4세(Kōnstantinos IV, 재위 668 ~ 685)의 그리스 불(Greek fire, 석유를 이용한 공격)을 이용한 방어로 성 함락에 실패하였다.
710년 칼리프 왈리드 1세(재위 705 ~ 715)는 북아프리카를 점령하고 대서양 연안까지 진출하였다.
711년 베르베르족과 아랍인들로 이루어진 무어인(Moors) 군대가 이베리아 반도로 올라가 서고트 왕국을 멸망시키고 이베리아 반도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732년 우마이야 왕조(Umayyad dynasty, 우마이야 칼리프국, Umayyad Caliphate,661∼750)의 에스파냐 총독 압두르 라하만(Abdul Rahman Al Ghafiqi ,? ~ 732)의 군대는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한 후 피레네 산맥을 넘어 유럽을 정복하기 위해 프랑스로 진격하였으나 프랑코 왕국과의 투르 푸아티에 전투(Battle of Tours Poitier, 732년)에서 우마이야 왕조는 패하여 더 이상 유럽을 정복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투르 푸아티에 전투에서 공을 세운 궁재(宮宰) 샤를 마르텔(Charles Martel, Karl Martell, 카를 마르텔)은 영토를 더욱 확장했으며 궁재(宮宰)였던 그의 아들이 반란을 일으켜 피핀 3세(피피누스 3세 브레비스, Pippinus III Brevis, 재위 751 ~ 768)로 프랑크 왕국의 왕위에 올라카롤링거 왕조(Carolingian dynasty, 751 ~ 987)가 시작되었으며 프랑크 왕국의 2대 왕이 샤를마뉴(Charlemagne, 카롤루스 마그누스, Carolus Magnus, 재위 768~814, 대제 재위 800 ~ 814)이다.
그 결과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단지 북쪽에만 기독교 세력이 남아 레온(León), 카스티야(Castilla), 나바라(Navarra), 아라곤(Aragon), 카탈루냐(Catalonia, 바르셀로나, 헤로나) 등의 왕국으로 갈라져 있었다.
750년 우마이야 왕조(661 ∼ 750)가 아바스 왕조(Abbasids, 이슬람 왕조, 750 ~ 1258)에 의해 멸망되자 살아남은 우마이야의 왕자 압드 알 라흐만 1세(Abd al-Rahman I, 731 ~ 788, 재위 756 ~ 788)가 이베리아 반도로 탈출하여 코르도바 칼리프국(Califato de Córdoba, 후 우마이야 왕조 756 ~ 1031, 이베리아 반도)을 세웠다.
1031년 코르도바 칼리프국(후 우마이야 왕조 756 ~ 1031)이 내전으로 멸망하고 소국인 39개의 타이파(Taifa)가 생겨났다.
레온 왕 알폰소 6세가 1085년 타이파들을 공격하여 타호 강(ElTajo) 유역까지 지배하자 위기를 느낀 타이파들이 무라비트 왕조(알무 와히드 왕조, Almoravid dynasty, 1040 ~ 1147, 모로코 지역, 베르베르족의 술탄 왕조)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무라 비트 왕조(알무와히드 왕조, Almoravid dynasty, 1040 ~ 1147)가 이베리아 반도로 쳐들어와 1086년 사그라하스 전투(Battle of Sagrajas)에서 알폰소 6세에 승리하는 등 연이어 승리하여 그라나다, 세비야와 알메리야, 알리칸테, 바다호스 등을 정복했다.
이렇게 하여 1094년까지 무라비트 왕조(알무와히드 왕조, Almoravid dynasty, 1040 ~ 1147)는 사라고사를 제외한 모든 타이파 세력을 병합하여 이베리아 반도를 차지하였다. 이 시절에 엘시드의 활약으로 톨레도는 빼앗기지 않았던 것이다.
아바스 왕조(Abbasids, 이슬람 왕조, 750 ~ 1258, 이라크 바그다드, 아라비아,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터어키 일부)는 9세기에 이슬람 황금기라 불리는 문화적 번영기를 구가했으나 10세기부터는 시아파 제국들의 융성 및 지방 왕조들의 독립과 함께 쇠퇴했다.
그 후부와이 왕조(Buwaih Dynasty, 932 ~ 1055, 페르시아 지역),셀주크 왕조(Great Seljuq Empire, 대셀주크 제국, 1037 ~ 1194, 주앙 아시아, 이라크, 터키 확장)의 꼭두각시가 되어 실권을 상실했으며 12~13세기에 다시 이라크 일대의 지배력을 회복하여 부흥하였으나 곧 1258년에 몽골 제국의훌라구 칸에게 바그다드가 함락되어 멸망했다. 이후 이집트의맘루크 왕조가 아바스 칼리파를 명목상이었으나 1521년 오스만 제국(1299 ∼ 1 922)의 황제셀림 1세가 카이로를 점령하고 마지막 아바스 칼리파로부터 칼리파를 선양받았다.
7) 오스만 제국(Osman Empire, Ottoman Empire, 1299 ∼ 1 922)
11세기경 비잔틴 제국(Byzantine Empire, 동로마 제국, Eastern Roman Empire, 330 ~ 1405)의 지배하에 있던 아나톨리아(Anatolia, 소아시아, 튀르키예) 반도 일대에 북쪽 튀르크족(Turks)이 몽고군에 밀려 대거 이주해 오거나 노예로 들어와 이슬람으로 개종하여 정착하였으며 토착세력인 이슬람인들과 갈등 속에서 동화되어 여러 개의 소국을 세웠다.
비잔틴제국이 1071년 반 호(Van Lake, 투르키예 남동부 이란 국경 근방의 아르메니아 고원) 근처에서 일어난 만지케르트(Manzikert) 전쟁에서 대 셀주크 제국(The Great Seljuk Empire, 1037 ~ 1157)에 패한 후 약해졌으므로 아나톨리아에 공국들이 쉽게 세워질 수 있었던 것이다.
대 셀주크 제국(The Great Seljuk Empire, 1037 ~ 1157)은 유목민인 중앙아시아의 투르크 계인 오구즈족(Oghuz Turks) 출신의셀주크 베이(Seljuk Bei)가 페르시아의 호라산 지방에서 1037년에 세웠다.
셀주크 베이(Seljuk Bei)의 부친은 오구즈 국의 장군이었으며 아들인 셀주크 베이(Seljuk Bei)도 장군으로 오구즈족(Oghuz Turks) 사이에서 이름을 떨쳤으나 오구즈족의 야브구(Yabghu, 왕)와 싸우고는 자신의 무리들을 이끌고 나와 지금의 크질오르다(카자흐스탄)에 960년대에 정착했으며 셀주크 가문이 이때 수니파(Sunni) 이슬람을 받아들였다.
다시페르시아의 호라산 지방으로 이주하여 1038년 셀주크(싸우다, 장군이란 뜻) 국가를 건설하고 1055년 바그다드를 점령하였으며 이어서 아르메니아를 점령하고 1071년 아나톨리아에 진출하여 대셀주크 제국(Great Seljuk Empire, 1038 ~ 1194)이 되었던 것이다.
아나톨리아의 튀르크계 공국들은 점차 영향력을 넓혀 나갔으며 이슬람교에 동화되었다.
호레즘(Khwarizm)은 아랄해 남안, 아무다리야 강하류 지방(우즈베키스탄 카라카르파크 자치공화국, 튀르크멘 공화국 일부)의옛 이름이다.
대셀주크 제국(Great Seljuk Empire, 1038 ~ 1194)의 부장의 아들 쿠트브 웃딘 무함마드(재위 1097 ~ 1127, 튀르크계)가 이슬람(아랍계 아바스 왕조,750 ~ 1258, 1055년 셀주크 튀르크가 통치권) 지역에 호레즘 왕국(Khwarazmian Empire, 호레즘 샤 왕조 Khwarezm-Shah, 1077 ~ 1231)을 설립하였으며 서요(西遙, 카라 키타이 Kara Khitai, 1124 ~ 1218)와 연합하여 이란, 아프가니스탄으로 진출하여 대국이 되었다. 한 때 사마르칸트를 중심으로 하는 동서무역을 독점하여 번영하였다.
1206년 몽골을 통일한 칭기즈칸(Genghis Khan,1162 ~ 1227)은 경제를 살리기 위해 교역에 관심을 가졌다.
대상들로부터 호라즘 왕국의 소식을 들은 칭기즈칸은 1218년 호레즘왕국과 교역을 하기 위해 3명의 사신이 친서를 가지고 진귀한 물품을 실은 5백마리의 낙타와 4백50명의 무슬림 사절단을 이끌게하여 호레즘왕국에 보냈다.
그런데, 호라즘령 오트라르의 '아미르(ãmir, 에미르 Emir, 사령관, 총독, 영주)'이자 샤 무함마드 2세(제7대 술탄 알라 웃딘 무함마드, Alā al-Dīn Muḥammad, 1169 ~ 1220)의 외가 친척인 이날추크가 칭기즈 칸의 사절이 교역을 하기위해 가져온 진귀한 물품이 탐이나 사신과 무슬림 대상들을 살상했다.
이때 간신히 탈출한 말 몰이꾼으로부터 소식을 전해들은 칭기즈 칸이 항의 사신을 다시 보냈지만 무함마드 2세(제7대 술탄 알라 웃딘 무함마드, Alā al-Dīn Muḥammad, 1169 ~ 1220)는 사신 1명은 죽이고, 사신 1명은 수염을 깎아 몽골로 돌려보냈다.
칭기즈칸(Genghis Khan,1162 ~ 1227)과 무함마드 2세는 두 제국이 모두 강대국으로 섯불리 전쟁을 일으킬 수 없었지만 칭기즈 칸은 무함마드 2세의 모욕을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전 병력을 동원해 호라즘을 침공했다.
이때 징기즈칸이 지휘한 몽고군은 1214년 금의 수도인 북경을 점령한 후 기술자들로부터 알아낸 화약 무기로 1219년 호레즘 왕국의 오트라르(카자흐스탄, Otrar)를 공격하였다.
그리고 화약의 아랍으로 전파는 이렇게 전쟁에 의한 것인지 송나라에 아랍 상인이 빈번히 출입했으므로 송에서 바로 전파되었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몽골의 바투(1205 ~ 1255, 킵차크 칸국의 칸 재위 1227 ~ 1255,칭기즈 칸의 손자,주치 칸의 차남)와 수부타이(1176 ~ 1248,몽골 제국의 개국공신, 사구 중 한명)는 헝가리 공격에 앞서 벌어진 발스타트 전투(Schlacht bei Wahlstatt, 1241, 폴란드의 실레시아 공국)에서 독약연구(毒藥煙毬)를 사용하여 하인리히 2세 (Henryk II Pobożny , 핸리 2세,1196 ~ 1241, 실 레시아 공작, 폴란드 대공)가 지휘한 폴란드군을 물리쳤다.
이렇게 화약무기가 몽고군에 의해 유럽으로 전파되었다.
중국에서 발명된 화약을 병기로 사용한 기록은 당나라 때인 940년에 허동(許洞)이 저술한 호령경(虎鈴經, 병법서)에 '화포는 화약을 사용하는 포를 말하며 화구는 구상으로 만든 화약을 화전 끝에 가까이 묶은 다음에 인선(引線)으로 점화시키고 포로 발사하는 것'이라 하였다. 화포와 화구 등 화약 무기는 송나라에서 발달되어 금나라로 전해졌다.
포(砲, 대포 포)는 지렛대의 원리를 이용하여 인력(人力)으로 줄을 당겨 돌을 발사하는 무기로 중국 후한시대와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사용된 투석기(投石器, Catapult, 캐터펄트)였다.
그 후 인력(人力) 대신에 8세기 당나라에서 발명된 화약(火藥, gunpowder)을 이용한 화포(火砲, gun)가 송나라에서 발명되어 아랍으로, 금나라에서 몽골의 유럽 원정으로 널리 퍼졌던 것이다.
이때 화포의 포탄(砲彈, shell, bombshell)은 날아가서 폭발하는 것이 아니고 돌이 날아가는 석탄(石彈)이었다. 석탄(石彈)을 사용하는 화포를 사석포(射石砲)라 하였으며 성을 파괴하는 공성전(攻城戰)에 사용했다.
화포(火砲, gun)를 소형화하는 과정에서 화승총(火繩銃, match-lock)과 같은 총기류(銃器類, Gun)가 만들어졌으며 구경의 크기(20mm)에 따라 총(銃, gun)과 대포(大砲, cannon)로 세분화되어 발달되었다.
무함마드 2세는 전투에 패하여 인도로 도주하였다가 쫒겨 이란, 아제르바이잔으로 다시 카스피해 근처로 도주하던 중에 얻은 폐병으로 1220년에 죽었으며 아버지로부터 술탄을 물려받은 호라즘 왕조의 마지막 술탄(제8대 술탄) 잘랄 웃 딘 밍부르누(Jalal al-Din Menguberdi, 재위 1220 ~ 1231)는 끝까지 저항했으나 1231년에 피살되어 호라즘 왕국(1077 ~ 1231)은 멸망되었다.
비잔티움 제국이 점점 쇠퇴하자 술레이만(Suleiman, Suleyman I, Suleiman ibn Qutalmish, 재위 1077 ∼ 1086, 대셀주크 왕조의 말리크 샤 시대에 소아시아 방면의 군 지휘자)이 반란을 일으켜 건립한 룸 셀주크(al-Rum Seljuk, 아나톨 셀주크, 룸 술탄국, Sultanate of Rum, 1077 ~ 1308, 수도 니케아, 셀주크 튀르크의 분열로 생성)가 아나톨리아(Anatolia) 대부분을 지배하였다.
1097년에 제1차 십자군이 비잔틴 군과 연합하여 니케아 등지를 점령함으로써 룸 셀주크 튀르크는 서부 아나톨리아에서 철수하였다. 십자군은 셀주크 튀르크에 대한 공격을 계속하여 1098년에는 안티오키아와 에데사에 십자군 후국(侯國, 제후의 나라)인 안티오키아 후국(Principatus Antiochenus, 1098 ~ 1268)을 건립하였다.
1243년, 룸 셀주크는 쾨세다그 전투(Battle of Köse Dağ, 1243, 튀르키예 동쪽 Sivas 주)에서 몽골군에 패하여 일 한국(Il Khanate, 1259 ~ 1336, 몽골의 칸국)의 종속국이 되었으며 그 후 룸 셀주크는 내분이 일어났다.
룸 셀주크 세력의 와해로 일 한국(Il Khanate, 1259 ~ 1336, 몽골의 칸국)의 종주권이 확립되어 가자, 몽골 치하에 점령되지 아니한 아나톨리아(Anatolia) 일부에 있던 여러 독립 투르크계 공국들은 모두 일 한국(Il Khanate, 1259 ~ 1336, 몽골의 칸국)의 속주(屬州)가 되었다.
일 한국은 서쪽으로 진출하여 지중해 연안까지 확장하려고 노력한 결과 다마스쿠스를 점령하였으나 1260년 시나이 반도의 아인 잘루트 전투(Battle of Ain Jalut)에서 이집트의 맘루크(Memluks, 1254 ~ 1517)군에 패하여 더 이상 진군하지 못했다.
일 한국의 훌라구칸(Hulagu Khan, 재위 1258 ∼ 1265, 일 한국의 창설자)이 맘루크 원정에서 자행한 이슬람교도 학살 문제로 이슬람교로 개종한 킵차크한국(Kipchak Khanate, 1243 ∼ 1502, 남러시아에 설립된 몽골 왕조)의 베르케 칸(Berke Khan, 재위 1257 ~ 1266)과 훌라구칸 간에 베르케-훌라구 전쟁(Berke-Hulagu War, 1262)이 일어났으며 이후 일 한국은 쇠퇴하였다.
일 한국이 서쪽 진출에 몰두하자 북쪽의 튀르크 인들이 집단으로 아나톨리아(Anatolia, 소아시아, 튀르키예)에 들어와 튀르크 인들의 수가 더욱 많아지게 되었다. 이들 튀르크 인들이 아나톨리아(Anatolia, 소아시아, 튀르키예)에서 여러 부족 국가를 세웠다.
그중에서 오스만 베이(Osman Bey, 오스만 1세 Osman I, 재위 1299 ~ 1326)가 거느린 유목민 집단이 강한 세력으로 성장하여 1299년 오스만 공국을 건설하였다.
오구즈 튀르크 족(Oghuz Turks)의 카이(Kayi) 부족을 이끈 오스만 1세(오스만 베이)의 아버지 에르투룰 가지(Ertuğrul Gazi, ? ~ 1280, Gazi는 이슬람 전사, 오구즈족 출신)가 동로마제국(Eastern Roman Empire, 비잔틴 제국, Byzantine Empire, 395 ~ 1453)군이 셀주크 제국(Seljuk Empire)을 공격해 왔을 때 셀주크 제국을 위해 공을 세워 아나톨리아 중부의 카라카다그(Karacadağ)를 봉지로 하사 받고 베이에 올랐으며 쇠위트(Söğüt, 수도 1299 ~ 1326, 아나톨리아 북서부) 지역을 공격하여 영토를 넓혔다. 이어서 자치권(自治權)이 있는 우츠 베이(Uç Bey)에 봉해졌다.
그 후 1230년 룸 셀주크 제국(al-Rum Seljuk, 룸 술탄국 Sultanate of Rum, 1077 ~ 1307)의 카이쿠바드 1세(Kayqubad I, 1190 ~ 1237)와 호라즘 제국(Khwarazmian Empire, 1077 ~ 1231)의술탄 잘랄 웃딘 멩구베르디(Jalal al-Din Menguberdi,재위 1220~1231) 사이에 벌어진 야스체멘 전투(Battle of Yassıçemen, 1230, 튀르키예 에르진잔 주)에 룸 셀주크 제국 편에 참전하여 승리하는데 공을 세웠다.
오스만 1세(오스만 베이)는 이들 지역을 아버지 에르투룰 가지(Ertuğrul Gazi)로부터 물려받아 공국 건설의 기반으로 하였다.
비잔틴제국을 공격하는데 주도적으로 참가한 오스만 1세(오스만 베이, Osman bey)는 아나톨리아(Anatolia) 북서부의 비티니아(Bithynia) 지역의 아미르(Amir, 公國의 지배자)로 부상했다.
오스만 1세는 재임 기간 중 비잔틴 제국과의 경계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제2대 오르한(Orhan bey, 재위 1324 ~ 1362)이 1324년에 부르사(Bursa)를 점령하였고 1326년에 수도를 쇠위트(Söğüt)에서 부르사(Bursa)로 옮겼다.
이로써, 공국에서 국가로 성장하는 계기를 마련되었다.
이어서 아나톨리아 서북부의 주요 도시들인 이즈니크(Iznik, Nicaea, 1331), 이즈미트(Izmit, Nicomedia, 1337), 위스퀴다르(Uskudar, Scutari, 1338)를 점령하였다.
이어서 서남부의에르데 미트(Erdemit)만과 카프 다으(Kapi Dag, Cyzicus) 사이의 영토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하였다.
그리고 오르한은 발칸 반도에 진입한 뒤 존 6세 콘타쿠제누스(John Ⅵ, Contacuzenus, 재위 1347 ~ 1354)의 비잔틴 황제 위 찬탈에 개입하여 발칸 남동부의 트라키아(Thracia) 지방을 할양받았고 존 6세 콘타쿠제누스(JohnⅥ, Contacuzenus, 재위 1347 ~ 1354)의 딸 데오도라(Theodara)와 결혼했다. 오스만은 겔리볼루(Gelibolu, 갈리폴리, 아나톨리아 서쪽 건너편)를 통하여 지속적인 트라키아 물자를 약탈하여 오스만 국가의 부강을 이루었다.
제2대오르한(Orhan bey, 재위 1324 ~ 1362)을 이은 아들 무라드 1세(Murad I, 1360 ~ 1389)는 1362년에 비잔티움 제국 제2의 도시인 에디르네(Edirne, 아드리아노플)을 점령하여 오스만의 새 수도로 삼았다.
무라드 1세는 제도를 정비하고 '예니체리(Janissary)'라는 정예 보병 군대를 창설하였다.
오스만의 통치자 이름은 처음에는 베이(Bey, 총독, 부족장)라고 하였으며 무라드 1세부터 술탄(Sultan, 칼리프가 수여한 정치적 지배자의 칭호)이라고 하였다.
1389년 무라드 1세는 세르비아와의 코소보 전투(Battle of Kosovo)에서 대혈전을 벌여 승리했으나 전사했다.
술탄을 계승한 바야지트 1세(Bayezid I, 1389 ~ 1403)는 1389년 발칸반도 여러 나라의 동맹군을 무찔렀으며 1396년에는 니코폴리스에서 유럽연합의 십자군을 격파하여 발칸반도의 대부분을 병합했다(Battle of Nicopolis, 니코폴리스 전투, 1396).
몽골의 장군인 티무르(티무르, Timur, Tamerlane, 티무르 제국 건설, 재위 1370 ~ 1405)는 몽골의 후계자를 자처하며 차가타이 칸국 등에서 세력을 키워 서 차가타이 칸국을 정복하고 1370년 티무르 제국(수도 : 사마르칸트)을 세웠으며 이어서 동 차가타이 칸국을 침략하고 1372 ~ 1373년 코기란트 부족이 지배하던 호라즘 지역을 병합하였으며 1380년부터는일 한국 해체 후 분열상태로 있던 이란(Iran)에 진출하여 호라산을 정복하고, 1386년부터 시작된 3년간의 전쟁에서 아프가니스탄, 아르메니아, 그루지아등을 정복하였으며 인도와 맘루크를 원정하여 승리한 후 1402년 오스만 튀르크를 침략했다.
오스만 튀르크의 술탄 바야지트 1세(Bayezid I, 1389 ~ 1403)는 침략한 티무르(티무르, Timur, Tamerlane, 티무르 제국 건설, 재위 1370 ~ 1405)와의 앙카라 전투(Battle of Ankara, 1402)에서 패배하여 포로로 되었다가 감옥에서 병사했으며 그동안 바야지트 1세의 아들 4형제가 다툰 끝에메흐메트 1세가 승리하여 재위에 올랐다.
오스만은 강한 군사력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강력한 해군을 양성하였고 '예니체리(Janissary)'라는 정예 보병 군대를 대규모로 증가시켜 육성하였다.
메흐메드 1세(재위 1413 ~ 1421)는 비잔티움 제국과 동맹을 맺고 원조를 받았으며 분열한 오스만 제국을 재 통일하고 발칸 반도에서의 지배권을 재 확립하였다.
무라드 2세(Murad II, 1404 ~ 1451, 재위 1421 ~ 1451)는 해군을 길러 베네치아와 싸워 무역로를 열었고, 헝가리와도 싸웠다.
1444년 십자군의 마지막 전투인 바르나 전투(Battle of Varna, 1444)에서 교황령, 헝가리 왕국, 폴란드, 부르고뉴, 베네치아, 제노바의 연합군을 격퇴하였다.
1448년제2차 코소보 전투(The Second battle of Kosovo, 1448)에서 헝가리 주도의 십자군 군대를 격파하였다.
무함마드 2세(Muhammad II, 메흐메트 2세Mehmed II, 1432~ 1481, 재위 1451 ~ 1481)는 경고한 성이 있는 콘스탄티노폴리스, 테살로니키, 모레아 만 남은 비잔티움 제국(동로마 제국, 330 ~ 1453)을 점령하기 위해 1453년 8만 군사와 이민족의 지원군 2만 명을 합쳐 10만 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였다.
비잔티움 제국의 콘스탄티노스 11세(Constantine XI, 재위 1449 ~1453)는 5천 명 병사밖에 없어 교황에게 지원군을 요청하고 지원하고 있던 베네치아 군과 조반니 주스티니아니 론고(Ioannes Iustinianus Longus, 1418 ~ 1453, 제노바 도리아(Doria) 가문)가 이끄는 이천 명의 용병을 고용하여 교황의 지원군을 기다리며 콘스탄티노플의 견고한 세 겹의 테오도시우스 성(Theodosian wall, Walls of Constantinople, 콘스탄티노플 성)을 방어하고 있었다.
무함마드 2세는 10만 명의 병사로 교황의 지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콘스탄티노플을 속전속결로 점령하고자 했으나 비잔티움 제국이 쇠사슬로 동쪽 바다인 금각만(金角灣,Golden Horn) 입구를 가로질러 막아 놓아 지중해에서 금각만(金角灣,Golden Horn)으로 배가 들어갈 수 없어 동쪽 바다로 공격하지 못하고 육지로 둘러 비잔티움 제국의 북쪽 국경의 세 겹의 테오도시우스 성을 대구경의 우르반 대포(Urban's Bombard, Great Turkish Bombard, Basilica 바실리카포)로 공격했으나 성이 너무나 견고하고 포의 발사 간격이 길어 성이 허물어지면 또 쌓아 함락이 되지 않았다.
1452년 헝가리인 우르반(Urban)이 주조(鑄造, casting) 방법으로 제작한 500kg 중량(직경 0.63m)의 돌 포탄(石丸, 석환, stone balls)을 1마일 날릴 수 있는 사상 최대의 사석포(射石砲, Bombard)인 바실리카(Basilica, Urban's Bombard, Great Turkish Bombard)는 거대해서 하루에 움직일 수 있는 거리가 4km이고 하루 7발의 포탄을 발포할 수 있었다.
그래서 다시 동쪽 바다를 건너 공격하기로 하고 바다에 설치해 놓은 쇠사슬을 피해 배를 하루 만에 육지로 끌어올려 금각만(金角灣,Golden Horn)으로 들어가 성을 공격하였으나 주스티니아니가 이끄는 용병들이 잘 방어하였고 성밑에 터널을 뚫어 공격하였으나 돌파하지 못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군이 육로와 해로 양면으로 공격하고 전쟁이 계속 진행됨에 따라 비잔티움 제국은 군사력이 바닥이나 1453년 함락되었다.
교황의 지원군은 꾸물거리다가 전쟁이 끝난 후 도착하였으며 곧 돌아갔다.
비잔틴 제국을 멸망시킨 무함마드 2세(Muhammad II, 메흐메트 2세Mehmed II, 1432~ 1481, 재위 1451 ~ 1481)는 자신을 동로마 제국의 황제를 잇는 파디샤(Padishah, 황제)라고 칭하였는데 로마 교황은 인정하지 않았지만 메흐메트 2세 자신에 의해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로 선출된 옌나디오스 스콜라리오스(Gennadios II Scholarios, 총대주교 재임 1454 ~ 1464))로 부터는 로마 황제로 인정받았다.
메흐메트 2세는 수도를 에디르네(Edirne, 그리스명 아드리아노플)에서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로 이전하였다.
이로서 오스만 제국(Osman Empire, 1299 ∼1 922)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발칸반도의 베네치아 공화국 등 유럽의 여러 나라와 싸워 펠로폰네소스 반도와 세르비아를 정복했다.
그리고 트레비존드 제국(Trapezunt, 비잔티움 제국의 후계국, 1204 ~ 1461)과 카라만 후국(1467, 1300년대 중반~ 1487)을 멸망시킴으로써 아나톨리아(Anatolia) 지방을 완전히 정복했다.
1475년 메흐메트 2세는 몰다비아 공국(Principatul Moldovei, 1346 ~1859, 루마니아와 우크라이나 지역)의 슈테판 3세(Ștefan III, 몰다비아의 공작 재위 1457 ~ 1504)가 킬리야(Chilia, 우크라이나 부쟈크 지역)를 공략 하고 왈라키아 공국(Principality of Wallakia, 루마니아국, 1330 ~ 1859)을 침략하자 이를 응징하기 위해 몰다비아로 원정하였으나 바슬루이 전투(Battle of Vaslui, 1475)에서 패배하여 물러났다가 1476년 발레아 알바 전투(Battle of Valea Albă, 1476)에서 슈테판 3세가 이끄는 몰다비아 공국군을 격파했다. 그러나 이슈트반 바토리(Stephen V Báthory, 1430 ~ 1493)가 트란실바니아(Transilvania, 루마니아 지역)에서 반란을 일으켜 철수했다.
1480년 이탈리아 반도를 침공하여 오트란토(Otranto, 이탈리아 남동부의 풀리아주)를 점령하였으며 베오그라드(Belgrade, 세르비아의 수도)까지 진출했다.
무함마드 2세(Muhammad II, 메흐메트 2세Mehmed II, 1432~ 1481, 재위 1451 ~ 1481)는 법전(Qanunname)을 만들어 술탄은 자기 형제를 합법적으로 죽일 수 있도록 하여 술탄이 세습적으로 계승될 수 있게 하였다.
술탄바예지드 2세(Bayezid II, 재위 1481 ~ 1512)는 술탄 메흐메드 2세의 장남이고 켐 술탄(Cem Sultan, 1459 ~ 1495)은 이복동생이었다.
술탄 메흐메드 2세와 후계자 바예지드 2세(Bayezid II)는 반목했고 바예지드 2세(Bayezid II)가 아버지를 독살했다는 설이 있어 켐이 형 바예지드 2세(Bayezid II, 재위 1481 ~ 1512)에게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패배하여 로도스 섬(Rodhos, 그리스의 에게해 남동부)으로 망명하여 성 요한네스 기사단(로도스 기사단)에 가담하였다.
그때 오스만 제국의 유럽 쪽 영토는 헝가리 및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 접하였고 바다로는 베네치아 공화국과 접하고 있었다.
로도스 섬에는 십자군 의료 지원을 위해 설립된 성 요한네스 기사단(the Order of Knights of St. John, Knights Hospitaller, 간호 기사단, 로도스 기사단, 성 요한의 예루살렘과 로도스와 몰타의 주권 군사 병원 기사단, Sovereign Military Hospitaller Order of Saint John of Jerusalem of Rhodes and of Malta)이 주둔하여 오스만과 분쟁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바 예지 드 2세(Bayezid II, 재위 1481 ~ 1512)는 온건한 통치를 하였으며백성들에게 관용을 베풀고다양한 교육기관을 설립여 운영하였다. 그는 백성들을 교육시켜 이슬람을 부흥시키려고 교육을 장려하는 정책을 폈다.
바 예지 드 2세(Bayezid II)는 1492년 스페인이 스페인 남부 지역의 무슬림 왕조를 멸망시키고 통일하면서 무슬림과유대인을 이베리아 반도에서 강제로 추방하자 이들 모두를 오스만 제국으로 망명하게 하였다.
바 예지 드 2세(Bayezid II, 재위 1481 ~ 1512)가 장남인 세흐자데 아흐메트(Şehzade Ahmet, 1465 ~ 1513)를 후게자로 지명하자 막내인 셀림 1세(Selim I, 재위 1512 ~ 1520)가 반란을 일으켜 형 세흐자데 아흐메트(Şehzade Ahmet, 1465 ~ 1513)를 유배시키고 아버지 바 예지 드 2세(Bayezid II)를 퇴위시킨 후 즉위했다.
셀림은 즉위하자마자 그의 형제인 세흐자데 아흐메트(Şehzade Ahmet), OzzadeKorkut와 조카들을 사형에 처했다.그의 조카세흐자데 무라드(Şehzade Murad, 1495~ 1519, Şehzade Ahmet의 아들)는 아버지가 즉위할 수 없게 되자 이웃사파비드 제국(Safavids, 1501 ~ 1736, 이란)으로 도피하였다.
포르투갈이 인도항로를 개척함에 따라 인도 무역에 손해를 보게된 주위의 이슬람은 연합(오스만, 맘루크, 베네치아 등)하여 포르투갈군을 공격하였다.
인도 북서부의 디우항에서 벌어진 디우 전투(Batalha de Diu, 1509)에서 이슬람 연합군은 몇 배나 많은 군과 함선으로 포르투갈 함대를 공격했으나 포르투갈의 우수한 함선과 강한 화력에 패하였다. 이 해전의 결과 인도양의 제해권이 유럽으로 넘어가는 기점이 되었으며 1538년과 1547년의 포위 공격에서도 실패하여 인도양의 제해권이 유럽으로 완전히 넘어갔다.
셀림 1세(Selim I, 재위 1512 ~ 1520)는 1514년 찰디란 전투(Battle of Chaldiran)에서 사파비 왕조(Safavid dynasty, 1502 ∼ 1736)의 샤 이스마일 1세(Shah Ismail I, 재위 1501 ~ 1524)의 군대를 격파하여동부 아나톨리아와 북부 이라크를 점령했다.
대포와 머스킷 소총 등으로 무장한 강력한 대군을 파병하여 기병으로 맞선 맘루크 군을 격파하여 1516년 시리아를 1517년에는 맘루크 왕조(Mamluk dynasty, 125 ~ 1517, 이집트 지역)를 멸망시켜 이집트, 북아프리카, 시리아, 예루살렘뿐만 아니라 메카, 메디나의 2대 성지를 정복하여 이슬람 세계의 제국을 이룩하였다.
셀림 1세는 이집트에 있던 맘루크 술탄의 지배를 정당화하는데 이용되었던 이슬람 왕조인 아바스 왕조(Abbasids)의 마지막 칼리프(caliph, 신의 사도 무함마드의 대리, 이슬람 제국의 주권자의 칭호)인 알무타와킬 3세(Al-Mutawakkil Ⅲ, 1508 ~ 1516)로부터 1517년에 칼리프(caliph)의 칭호를 물려받아 술탄-칼리프(Sultan Caliph)가 되었다.
술레이만 1세(Suleiman I, the Magnificent, 술레이만 대제, 1494 ~ 1566, 재위 1520 ~ 1566)는 중앙집권적 조직을 만들어 지배하였으며 보병과 해군으로 구성된 강력한 상비 군단을 양성하여 1522년 로도스(Rodhos)에 주둔하고 있던 예루살렘 성 요한네스 병원 기사단(the Order of Knights of St. John, Knights Hospitaller)을 축출하였으며 이어서 발칸 반도로 진군하였고, 1526년 헝가리와의 모하치 전투(Battle of Mohács)에서 승리하였으나 정령하지 못하고 퇴각하였다.
1526년 헝가리-크로아티아-보헤미아 국왕러요시 2세가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모하치 전투에서 전사하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카를 5세(Karl V, 로마인의 황제, 재위 1530 ~ 1556)의 동생인오스트리아대공페르디난트 1세(Ferdinand I, 신성 로마 제국의황제 재위 1556 ~ 1564,헝가리 국왕 재위 1526 ~ 1564)는 러요시의 왕비인마리아의 동생으로 러요시가 생전에 항가리 왕 후계자로 인정했으므로 항가리 왕으로 즉위하였으며 서포여이 야노시(Szapolyai János,야노시 1세,I. János,헝가리 국왕 재위 1526 ~ 1540, 페르디난트 1세의 대립왕)는 항가리의 유력한 지방 귀족으로 대다수 귀족들의 민심을 얻어 항가리 왕으로 옹립되었다.
1538년 오스트리아 대공 페르디난트 1세(Ferdinand I, 신성 로마 제국의황제 재위 1556 ~ 1564,헝가리 국왕 재위 1526 ~ 1564)와 슐레이만 1세가 지원한 서포여이 야노시(Szapolyai János,야노시 1세,I. János,헝가리 국왕 재위 1526 ~ 1540, 페르디난트 1세의 대립왕)가 항가리를 분활하여 점령하였다.
1529년에는 당시 유럽의 강자였던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 왕가의 카를 5세(Karl V, 로마인의 황제, 재위 1530 ~ 1556)가 지원한 오스트리아 대공 페르디난트 1세와 대결하여 수도인 빈을 포위 공격(Siege of Vienna, 빈 공성전, 1529)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오스트리아의 수도인 빈(Wien, Vienna 비엔나)은 합스부르크가가 1440년부터 거주했으므로 신성 로마 제국의 실질적인 수도였던 것이다(법적인 수도는 로마).
1532년에도 술레이만 1세의 군대가 빈을 향해 진군하여 10만 명이 넘는 포로와 엄청난 전리품을 노획했지만 국경 지대의 전투에 머물렀고 양국은 1533년 평화협정을 맺었다.
1533년 술레이만 1세는 이라크와 쿠르디스탄 대부분과 아르메니아 서부를 점령하였고 페르시아를 공격하여 바그다드를 병합하였다.
1537년 술레이만 1세의 군대는 고르자니 전투(Battle of Gorjani)에서 2만 4천 명의 오스트리아,헝가리,신성로마제국,보헤미아(Bohemia, 체코), 티롤(Tirol, 오스트리아 서부), 크로아티아연합군을 격파하였다.
그리고 오스만 제국의 술레이만 1세(Suleiman I, the Magnificent, 술레이만 대제, 1494 ~ 1566, 재위 1520 ~ 1566)가 지중해로 진출하자 이에 위협을 느낀 교황 바오로 3세(Papa Paolo III, 제220대 교황, 재위 1534 ~1549)가 로마 가톨릭 동맹(교황령, 스페인, 제노바 공화국, 베네치아 공화국, 몰타 기사단)의 함대를 조직하여 1538년 그리스의 북서부에 있는 프레베자 근해에서 오스만 제국함대에대항하였으나 오스만 제국의 바르바로스 헤이레틴 파샤(Barbaros Hayrettin Paşa, 1466 ~ 1546)가 이끄는 함대는 이 프레베자 해전(Preveza war, 1538, 알바니아 해안, 현 그리스의 항구)에서 200여 척으로 구성된 로마 가톨릭 동맹 함대를 대파하여 무적함대의 명성을 드높였으며 그 후 1560년 제르바 섬 해전(Battle of Djerba)에서도 승리하여 지중해 해상권을 장악하였다.
그리고 오스만 제국이 이집트의 맘루크를 점령(1517)하여 홍해로 진출하자 오스만 제국과 포르투갈은 해외에서 빈번하게 충돌하였다.
오스만 제국의 하딤 슬레이만 파샤(Hadim Suleiman Pasha, 1467 ~ 1547)가 이끄는 함대는 1538년 홍해 연안의 포르투갈 지배하에 있던 항구도시인 제다(Jeddah, 홍해), 지부티(Djibouti, 아덴만의 서쪽 연안), 아덴(Aden, 아덴만)등을 점령하였다.
1548년에는 포르투갈이 아덴을 탈환했으나 1551년에 오스만 제국의 필리 레이스(Ahmed Muhiddin Pîrî Reis,1465 ~ 1553)가 이끄는 함대가 다시 아덴을 점령하고 이어서 포르투갈이 지배하던 호르무즈를 공격했으나 점령하지 못했다.
술레이만 1세의 군대는 1541 ~ 1543년에 걸쳐 헝가리 원정에 나서 합스부르크 군대와 전투를 벌인 결과 헝가리를 합스부르크가 통치 지역과 술탄 통치 지역으로 나누고 1562년에 평화협정을 맺었다.
술레이만 1세(Suleiman I, the Magnificent, 술레이만 대제, 1494 ~ 1566, 재위 1520 ~ 1566)는 많은 영토를 확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많은 법을 제정하여 '입법자(Kanuni)'라고 불리었으며 국가 체제를 정비하여 오스만 제국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셀림 2세(Selim II, 재위 1566 ~ 1574)는 형 메흐메드가 천연두로 살해되고, 이복형인장남 무스타파가 아버지의 명령에 의해 목이 졸려 죽었고, 동생지한기르는무스타파의 처형 소식에 비탄에 잠겨 죽었으며, 동생바예지드는 셀림에 반란을 일으킨 후 아버지의 명에 의해 살해된 후에 즉위하였다.
셀림 2세는 아나톨리아 서부 키오스(Chios)와 아라비아반도 예멘까지 점령하였으며, 1570년에는 키프로스를 오스만 제국의 영토로 복속시켰지만 1571년 레판토 해전(Battle of Lepanto)에서 스페인, 베네치아, 제노바의 신성동맹 함대에 패하였다.
무라드 3세(Murad III, 재위 1574 ~ 1595) 때인 1593년에 일어난 시삭 전투(Battle of Sisak, 크로아티아)에서 오스만 보스니아군은 합스부르크 연합군(주로 크로아티아와 오스트리아 군)에 대패하여 상당기간 유럽으로 진격할 수 없었다.
무라드 4세(Murad IV, 재위 1623 ~ 1640)는 이란의 사파비드(Safavid Persia, 1501 ~ 1736) 국왕 아바스 1세(Abbas I, Abbas the Great, 재위 1588 ~ 1629)의 침략으로 일어난 오스만-사파비드 전쟁(Ottoman–Safavid War,1603 ~ 1618)으로 아제르바이잔을, 1623년 왕위계승의 혼란기에 잃었던 바그다드를 오스만-사파비드 전쟁(1532 ~ 1555)으로 회복하였다.
메흐메트 4세(Mehmed IV, 1642 ~ 1693, 재위1648 ~1687, 내란으로 폐위)와 술레이만 2세(Suleiman II, 1642 ~ 1691, 재위 1687 ~ 1691, 메흐메드 4세의 이복동생)의 오스만 군은 폴란드-오스만 전쟁(신성 동맹 전쟁, War of the Holy League, 1683 ~ 1699)의 시작인 1683년에 제2차로 비엔나를 포위(The second Battle of Vienna)하였으나 대패하였으며 1697년에 헝가리와 오스트리아 연합군과의 젠타 전투(Battle of Zenta, 세르비아)에서 대패하고 1699년 카를로비츠조약(Treaty of Karlowitz, 오스트리아, 러시아, 폴란드, 베네치아 등과의 사이에 맺어진 평화조약)을 맺어 전쟁을 종식하고 헝가리와 트란실바니아(Transylvania, 루마니아 중서부)를 오스트리아에 할양하고 베네치아에는 모레아(Morea, 그리스 남부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활양하였다. 이후로 오스만 제국은 서서히 유럽의 위협이 되지 않았다.
오스만 제국은 대항해 시대 이후 동서 중계 무역의 이익이 사라지고 17세기 이후로는 내부적으로 관료가 비대해지고 부패했으며 예니체리가 권력을 잡아 왕권을 위협하고 많은 토지를 사유화하여 세금도 내지 않음에 따라 나라 경제가 무너져 점점 약화되었다.
1798년 프랑스 나폴레옹이 오스만 제국의 이집트를 침입하여 파죽지세로 점령하였으나 프랑스 해군이 영국 해군과의 나일 해전에서 패배로 봉쇄되고 프랑스 국내 정세가 변함에 따라 정치에 관여하기 위해 클레베르(Jean Baptist Kléber, 1753 ~ 1800)를 후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몰래 프랑스로 귀국하였으며 클레베르는 보급 부족으로 3년 후에 항복하였다.
전성기인 16, 17세기의 제국의 영토는 동서로는 카스피해와 페르시아만 연안에서부터 대서양 연안의 지브롤터 해협까지, 남북으로는 아라비아 반도 일부와 모로코를 제외한 북아프리카의 소말리아에서 북유럽과 서유럽을 제외한 유럽의 오스트리아 빈 경계에 이르렀다. 지중해의 주인은 오스만 제국이었던 것이다.
오스만 제국에서는 이후부터 러시아와의 여러 번 전쟁에서 패하고 여러 민족의 반란이 일어나 19세기에는 오스만 제국의 영토가 줄어들기 시작하였다.
오스만 제국은 유럽과 아시아의 중간에 위치하여 동서 교류의 중심지 역할을 했으며, 인종이나 종교적 탄압 없이 이슬람 우위에서 공존하였으며 문화는 비잔틴 문화와 이슬람 문화가 융합된 다원적인 성격을 띠었다.
기독교의 유럽에 비해 앞서 나갔던 이슬람은 오스만 제국에서도 계속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지 못하고 봉건제도와 이슬람 교리에만 집착하였으며 자유사상이 발전되지 않아 근대적 이념이나 체제를 능동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여 정체된 반면에 기독교의 유럽은 상공업의 발달로 영국의 젠트리(Gentry), 유럽의 부르주아(bourgeois, 프랑스어, 유래-성에 둘러싸인 중세 도시 국가의 주민, 절대 왕정의 중상주의 경제 정책으로 부를 축적한 유산 계급) 등 수많은 자유인들이 생겨남에 따라 봉건제도는 쇠퇴하고 자유사상이 발전되어 개혁과 개방을 쉽게 할 수 있어 새 시대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적응하였기 때문에 이슬람 등의 아시아를 추월하였던 것이다.
이슬람의 건축은 세밀하고 화려하다.
이슬람 건축의 주재료로는 석재, 벽돌, 콘크리트를 사용하였으며 벽면 마감재로 스투코(stucco)를 사용했는데 스투코(stucco)는 순수한 석고에 용해된 접착제, 석회, 분말 대리석, 달걀 껍질 등을 섞어 만든다.
이슬람에서는 유약을 입히는 중국의 도자기 제작방법을 도입하여 도자기를 제작할려고 했으나 고온으로 높일수 없어 실패하고 대신에 다양한 색상의 유리를 입힌 타일을 제작하여 건축에 널리 사용하였다.
특히 기리 타일링(girih tiling)은 기리(띠무늬) 장식의 타일링 5개로 만든 이슬람의 기하학적 무늬로 1200년경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슬람에서는 우상 숭배가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기하학 무늬와 문자 장식이 발전하였던 것이다.
이슬람 건축의 독특한 건물에는 모스크(모스크(mosque), 무덤, 궁전, 요새 등이 있으며 예배를 드리는 모스크에는 미나레트(minaret, 모스크의 부수 탑), 미흐라브(Mihrab, 모스크의 예배 방향을 가르키는 키블라 벽에 설치된 설비), 무카르나스(Muqarnas, 건축 내부 천장에 장식된 둥근 형태) 등의 시설이 있다.
2. 포르투갈의 대항해 시작
가. 포르투갈의 독립
유럽의 남서부에 위치하는 이베리아 반도에는 지중해 기원의 이베리아인이 살고있었고 기원전 11세기경에 이베리아 반도 서남부에 페니키아인들이 들어왔으며 기원전 750년경에 독일 동남부가 원주지인 켈트족(Celts, 갈리아를 지칭하는 라틴어 켈타이 Celtae에서 유래)이 유입되었다.
페니키아 인들은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이 원주민인 민족으로 항해술이 뛰어나 지중해의 동부 연안, 이집트, 서남 아시아 및 메소포타미아 등 인접 지역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북부의 지중해 연안 여러 곳에 교역 기지를 설치하였고, 기원전 1200년경에 이베리아 반도의 남쪽에 진출하여 기원전 1100년경에는 서부 유럽 최초의 도시인 카디스(Cádiz, 스페인 남서부 안달루시아에 있는 항구)를 건설했다.
아프리카 북쪽 페니키아인의 고대도시 카르타고(Carthago, B.C. 814년경 ~ B.C. 146)의 지배를 받던 스페인은 B.C. 51년에 로마 제국의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 줄리어스 시이저, BC 100 ~ BC 44)에게 정복되었다.
로마 제국 시절에는 이베리아 반도를 히스파니아(Hispania, 에스파냐의 어원)라고 하였으며 이베리아(Ibérica)라는 명칭은 동부 지중해 연안으로 흐르는 에브로강(Ebro)의 이름에서 온 것이다.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던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406년부터 반달족(Vandals, 동게르만족, 북아프리카로 건너가 439년 카르타고를 점령하여 반달 왕국을 세움 435 ~ 534), 부리족(Buri tribe, Germania 부리족의 일파가 수에비족을 따라 이베리아로 들어왔음)과 같은 게르만족의 침략으로 로마 제국이 무너졌으며 이들 게르만족 중에서 수에비족(수에비 왕국, Regnum Suevorum, 411 ∼ 584)과 서고트족(서고트 왕국, Regnum Visigothorum, 412 ~ 720)이 이 지역에 기독교 왕국을 세웠다.
수에비(Suevi)족은 발트 해와 엘베강(Elbe, 독일)을 기원으로 하는 게르마니아(Germania, 라인강 동쪽)에 살던 게르만족으로 일파는 독일 서남부 슈바벤(Swabia)에 정착했으며 다른 수에비 일파는 갈라에키아(오늘날의 갈라치아, 스페인, 포르투갈) 지방으로 내려와 411년 수에비 왕국(Regnum Suevorum, 411 ∼ 584)을 세웠던 것이다.
수에비 왕국(Regnum Suevorum, 411 ∼ 584)은 584년 서고트 왕국에 정복당해 멸망했다.
고트족(Gothi)은 스칸드나비아 반도 발트 해의 고틀란드라는 섬에 살던 게르만족이 중부 유럽을 가로질러 남쪽으로 이주하면서 두 파로 나누어졌다. 서고트족은 2세기경 다뉴브 강 변경 지방(루마니아 지역)에 정착했으며 동고트족은 더 동쪽으로 이동해 흑해 북서 연안에 정착하였으나 중앙아시아의 흉노족이 서쪽으로 이동함에 따라 그 지역에서 쫓겨난 고트족은 서쪽으로 이동하여 유럽으로 들어왔다. 서고트족은 376년 다뉴브 강을 건너 남쪽으로 이동하여 콘스탄티노플에서 동로마 군대를 물리친 다음 이탈리아로 진출한 알라리크 1세(알라리쿠스 1세 Alaricus I, 재위 395 ~ 410)는 409년 로마를 점령하고 다시 북쪽의 갈리아 지방으로 이동하였으며, 서로마제국은 이들에게 갈리아 남서부(스페인)를 주었다.
아타울프(Athaulf, 서고트 왕 재위 411 ~ 415)는 서고트 부족 왕을 서고트 왕국(Regnum Visigothorum 레그눔 비시고토룸, 412 ~ 720)으로 확립했다.
451년 카탈라우눔 전투(샬롱 전투)에서 서로마 제국의 플라비우스 아이티우스와 서고트족 왕 테오도리쿠스 1세(Theodoric I, 재위 418 ~ 451) 등의 연합군은 훈족의 아틸라군을 물리쳤다.
서고트 왕국은 이슬람 제국 우마이야 왕조의 침입을 받아 711년 과달레테 전투(battle of Guadalete, 711)에서 패배하여 멸망하였다.
동고트족은 5세기 경, 훈족(흉노족)에 밀려 서고트족을 따라 이탈리아로 이동했다.
동로마 제국 황제 제논(Flavius zeno, 재위 474 ~ 491)의 지원을 받은 동고트족의 테오도리쿠스 대왕(Theodoric the Great, 재위 488 ~ 526)은 스위스 왕국 및 발칸 제국의 왕과 함께 488년 이탈리아를 침략하여 493년에 완전히 점령하고 동고트 왕국(Ostrogothic Kingdom, 이탈리아 왕국 Regnum Italiae, 493 ~ 553)을 세웠다.
동고트 왕국은 552년 동로마 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Justinianus l, 재위 527 ~ 565) 때에 장군 나르세스(Narses, 478~573)에 의해 멸망했다.
그런데 이베리아 반도는 710년 북아프리카를 점령한 우마이야 왕조의 베르베르족과 아랍인들로 이루어진 무어인(Moor, 이베리아반도와 북아프리카에 살았던 이슬람계인, 아랍계와 베르베르족의 후손) 군대가 711년 과달레테 전투(battle of Guadalete, 711)에서 승리하여 서고트 왕국을 멸망시키고 이베리아 반도의 남쪽 대부분을 차지하여 우마이야 왕조(661 ∼ 750)의 알안달루스(Al-Andalus, 711 ~ 1492)를 세웠다.
이에 서고트의 기독교인들은 침략하가 어려운 이베리아반도 북쪽의 산악지대로 모였고 서고트 왕국의 장군 펠라기우스(Pelagius of Asturias, 685 ~ 737)가 우마이야 칼리파조의 군대를 격파하고 718년 왕위에 올라 아스투리아스 왕국(Reinu d'Asturies, Asturorum Regnum, 718 ~ 924)을 세웠다.
레콩키스타 중인 868년 아스투리아스왕 알폰소 3세(Alfonso III)의 가신인 귀족 비마라 페레스(Vímara Peres, 820 ~ 873)가 포르투스 칼레(Portus Cale, Proto시, 포르투갈 어원)를 점령하자 아스투리아스 왕 알폰수 3세(Alfonso III de Asturias, 848 ~ 910)가 비마라 페레스(Vímara Peres, 백작 재위 868 ~ 873)를 포르투갈 백작에 봉하여 포르투갈 백국(Condado de Portucale, 868 ~ 1071)이 세워졌다.
갈리시아 왕국(Reino da Galiza, 910 ~ 1833, 레온 왕국, 카스티야 연합 왕국, 스페인 왕국의 속국)의 가르시아 2세(García II, 1042 ~ 1090)는 페드로소 전투(Battle of Pedroso, 1071. 2.)에서 포르투갈 비마라 페레스 가문의 마지막 백작인 누누 2세 멘데스를 격파하였고 이어서 페르난도 1세의 영토를 통합한 알폰소 6세(Alfonso VI, 1040 ~ 1109, 레온 왕국, 갈리시아와 포르투갈, 카스티야 왕국, 톨레도 왕국의 국왕, 전히스파니아의 황제)가 1071년 포르투갈을 흡수했다.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한 이슬람이 종교적 탄압을 심하게 하자 이 지역의 기독교 세력들은 국토회복운동을 하였는 데 이를 레콩키스타(Reconquista, 711 ~ 1492)라고 한다.
1095년 프랑스 왕족 하이문두 드 부르고뉴(Raimundo de Borgonha, 1070 ~ 1107)와 앙리 드 부르고뉴(Henrique de Borgonha, 엔히크 드 보르고냐, 1066 ~ 1112)가 레온 왕의 요청으로 십자군 기사단으로 국토회복운동(Reconquista)에 참여하였다.
갈리시아 왕국과 포르투칼레를 통치하던 귀족들이 자치권 확대를 요구하자 이를 누르기 카스티야의 알폰소 6세(D. Afonso VI de Leão)는 하이문두 드 부르고뉴 (Raimundo de Borgonha, 1070 ~ 1107)를 사위로 삼고 포르투칼레가 포함된 갈리시아 백작령에 봉하였으나 국토회복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래서 1096년 알폰소 6세는 하이문두의 사촌 동생인 앙리 드 부르고뉴(Henrique de Borgonha, 엔히크 드 보르고냐, 1066 ~ 1112, 부인은 알폰소 6세 딸 테레자)에게 갈리시아 백작령 남쪽 땅의 통치권을 양도하여 포르투칼레 백작(conde de Portucale, 재위 1096~1112)에 봉하였으며 앙리 드 부르고뉴(Henrique de Borgonha, 엔히크 드 보르고냐, 1066 ~ 1112, 재위 1096~1112) 백작은 갈리시아(Galicia, 스페인의 북서부)와 포르투갈 북부 지역의 이슬람을 패퇴시켰다.
포르투갈의 근원이 되는 포르투갈 백작령(Condado de Portucale, 868 ~ 1139)은 본디 레온 왕국(Reino de León, 910 ~1833, 아스투리아스 왕국 후속 718 ~ 924 ) 소속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가 죽은 후 미망인인 도나 테레사(Teresa de León, 1080 ∼ 1130)가 5살의 아들 아폰수 1세를 대신하여 포르투갈 백작령의 권력을 장악하여 계승하였으며 그 후 어폰스1세가 20살이 넘어도 도나 테레사가 권력을 이양하지 않음에 따라 그녀의 아들 아폰수 엔리케스(아폰수 1세, Afonso I Henriques, 1109 ~ 1185)는 이에 대항하여 1128년 상 마메데 전투(batalha de São Mamede, 1128)에서 무력으로 제압하였다.
포르투갈 백작 아폰수 엔리케스(아폰수 1세, Afonso I Henriques, 1109 ~ 1185, 포르투갈 1대 왕)가 1130 ~ 1137년 동안에 갈리시아를 침공하고 Tuy를 점령하여 이종 4촌인 레온 왕 알폰소 7세(Alfonso VII, 1105 ~ 1157, 카스티야 레온 연합 왕국)와 싸웠으며 1137년 투이 조약(Tratado de Tuy, 1137)을 맺어 포르투갈-레온 전쟁을 종식하고 포르투갈은 카스티야 레온 연합 왕국에 속하게 되었다.
아폰수 엔리케스(아폰수 1세, Afonso I Henriques)는 1139년 우리크 전투(battle of ourique, 1139)에서 모라비드(알모라비드 왕조, Almoravid dynasty, 1040 ~1147, 모로코중심) 군을 격파하고 포르투갈의 독립을 선언하였으며 왕이 되었다.
아폰소 엔리케스(Afonso Henriques)가 투이 조약(Tratado de Tuy, 1137)을 위반하고 갈리시아를 침략하자 발데베스 전투(Torneio de Arcos de Valdevez, 1140 ~ 1141)가 일어났으며 1143년 포르르투갈은 교회에 십일조를 헌납하기로 약속하여 교황의 승인을 받고 대주교들의 중재로 카스티야 레온 연합 왕국과 사모라 조약(Treaty of Zamora, 자모라 조약, 1143)을 맺어 전쟁을 종식시키고 포르투갈 독립을 인정받았다.
아폰수 엔리케스(아폰수 1세, Afonso I Henriques, 1109 ~ 1185)는 리스본 전투(battle of Lisbon, 1147) 등에서 승리하여 산타렝, 리스본, 팔멜라, 에보라 등 주요 거점을 무라비트 왕조(알무와히드 왕조, Almoravid dynasty, 1040 ~ 1147, 베르베르족, 세네갈, 알제리, 모리타니아, 튀니지, 리비아,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로부터 탈환하였다.
아랍의 무라비트 왕조는 리스본전투(1147)에서 화약무기를 사용하였는데 이 화약 무기는 몽고군으로부터 전해졌는지 아랍 상인이 송나라에서 배워왔는지 알 수 없지만 아랍인들이 화학무기를 이 때 처음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포르투갈은 남부를 찾기 위한 국토회복운동(Reconquista)을 계속하여 1249년에 아폰수 3세(Afonso III of Portugal, 재위 1247 ~ 1279, 포르투갈 5대 왕)가 알가르브를 점령하면서 레콩키스타가 끝나고 오늘날의 영토가 정해졌다.
1340년 포르투갈의 아폰수 4세(AfonsoIV, 재위 1325 ~ 1357)와 카스티야 연합왕국의 아폰소 11세(AlfonsoXI)는 연합하여 마리니드 왕조(마린 술탄국, Marinid Dynasty, Imrinen, 1244 ~1465, 모로코지역, 베르베르인의 일파인 제나타가 세움)가 마지막으로 이베리아 반도를 침공하여 일어난 리오 살라도 전투(battle of Rio Salado, 1340)에서 승리하였으며 지브롤터의 항해권을 확보했다.
나. 엔히크 왕자(Henrique of Portugal, Henrique de Avis,1394 ~ 1460)의 대항해 시작
주앙 1세(John I of Portugal, 1357 ~ 1433, 재위 1385 ∼ 1433, 아비스 왕가의 시조, 포르투갈 10대 왕)는 포르투갈 왕인 형 페르난두 1세(Fernando I, 1345 ~ 1383, 9대 왕)가 죽은 후 그의 아내인 레오노르 텔레스(Leonor Teles)와 안 데이로(Juan Fernández de Andeiro) 백작이 정권을 잡자 안데이로를 전쟁으로 제압하고 아비스 왕조를 세웠다.
그리고 포르투갈은 영국과 영국-포르투갈 조약(1373)을 체결하였고 카스티야 왕국의 대군이 침입한하자 주앙 1세(JoãoI)는 영국군의 지원을 받아 알류바로타 전투(battle of Aljubarrota, 1385.8.)와 발베르데 전투(battle of Valverde, 1385.10.)에서 카스티야 군을 대파하고 포르투갈을 지켰다.
이렇게 긴밀해진 포르투갈과 영국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조약인 윈저 조약(Treaty of Windsor, 1386)을통해 영구적인 군사 동맹을 맺었다 .
엔히크 왕자(Henrique of Portugal, Henrique de Avis, 1394 ~ 1460, Henrique O Navegador 항해왕)는 포르투갈 아비스 기사단장(mestre)이었던 주앙 1세(재위 1385 ~ 1433, 아비스 왕가 시조, 10대 왕)와 영국의 필리파(Philippa of Lancaster, 1359 ∼1415) 사이에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주앙 1세는 포르투갈 왕위 계승이 확정되고 15세기 초 교황의 인정을 받아 정치적 안정을 이루자 동방무역을 중계하여 부유하게 된 베네치아(13 ~ 17세기 유럽 무역창구)와 같이 동방 무역로를 개척하여 부(富)를 축적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귀족 계급보다는 리스본 상인을 중용하여 왕실의 재정을 튼튼이 하며 군대를 동원하여 외부로 진출하여 동방무역으로 활로를 찾고 십자군의 정신을 이어받아 크리스트교의 포교를 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그때 유럽의 민간에서는 이슬람 세력 너머에 크리스트를 믿는 프레스터 존의 나라(에티오피아 혹은 네스토리우스파가 전파된 경교를 믿는 중국, 후에 바스코 다 가마가 에티오피아를 방문함에 따라 프레스터 존의 전설이 허구로 끝남)가 있다는 전설이 있었으므로 이슬람 지역 너머로 항해하여 프레스터 존 세력을 찾아 그들과 함께 이베리아 반도에 남아있는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고자 하였다.
그런데 포르투갈은 지리적으로 북쪽은 프랑스, 동쪽은 스페인과 이슬람에 막혀 있어 나갈 수 없고 대부분의 지중해는 오스만 튀르크와 이탈리아가 제해권을 가지고 있어 열려있는 곳은 지중해 서쪽과 대서양 밖에 없었다.
포르투갈에서는 동양으로부터 수입되는 향신료, 금, 은 등은 인도 상인, 이슬람 상인, 이탈리아 상인, 프랑스 상인 등을 거쳐 포르투갈로 들어왔으므로 값이 폭등하였다.
그래서 주앙 1세는 아프리카로 진출하고자 했으나 아프리카는 이슬람교인들이 북아프리카와 서아프리카까지 그 세력을 뻗어 무역을 독점하고 있었다.
북아프리카에는 마리니드 왕조(마린 술탄국, Marinid Dynasty, Imrinen, 1244 ~1465, 모로코지역, 베르베르인의 일파인 제나타가 세움), 지야니스(Ziyanids, 1236 ~ 1555, 베르베르 왕조 알제리 북서지역), 하프스(Hafsids, Hafsid dynasty, 1229 ~ 1574,베르베르족, 튀니지, 서부리비아, 동부알제리 지역) 등의 이슬람 왕조가 있었으며 서아프리카에는 말리 제국(Manden Kurufa, 1235 ~ 1670)이라는 넓은 영토와 많은 인구를 가진 거대하고 부강한 이슬람 국가가 있었다.
말리 제국(Manden Kurufa)은 막대한 금을 바탕으로 아프리카 교역의 중심지로 빠르게 성장했으며 당시 세계 금의 1/3이 말리에서 생산되었다. 금은 시리아, 제노바 등으로 넘어가 유럽으로 흘러 들어갔다. 그래서 아프리카에서는 금이 많이 생산된다는 것이 유럽에 알려져 있었다.
말리제국의 제9대 황제인 만사 무사(칸쿠 무사, Kanku Musa, 재위 1312 ~ 1337, 황금왕)는 말리 제국이 강대국이라는 사실을 전 세계에 과시하기 위해 1324년에는 이슬람의 성지인 메카로 성지순례를 떠났다. 이 순례는 거대하고 화려한 행렬이었는데 약 142톤의 금과 시종 500명, 60,000명의 시민, 12,000명의 노예를 거느리고 떠났던 것이다. 거지에게 황금을 뿌리고 모스도 세워 주는 등 부를 과시하였던 것이다.
주앙 1세는 국토회복운동(레콩키스타, Reconquista)으로 실전 경험이 풍부한 강력한 군대를 이용하여 아프리카로 내려가서 이슬람과 직접 교역하여 향신료, 금, 은 등을 수입할 수 있다면 엄청난 이윤을 얻어 나라를 부강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중앙 1세는 1415년 두아르트 왕세자, 엔히크 왕자엔히크 왕자(Henrique of Portugal, Henrique de Avis, 1394 ~ 1460, Henrique O Navegador 항해왕)와 함께 이슬람 세계의 무역 중심지로 금, 향신료, 양탄자, 비단, 보석 등이 활발히 거래되고 있던,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아프리카 대륙의 북서쪽 지금의 모로코에 있는 마리니드 술탄국(Marinid Sultanate, Marinid Dynasty, 1244 ~1465)의 세우타(Ceuta)를 국토회복운동(레콩키스타, Reconquista)으로 실전 경험이 풍부한 강력한 군대를 이용하여 정복하러 갔다. 모로코의 베르베르인들은 사하라 사막을 횡단하여 금, 소금, 향신료 등을 세우타 등으로 들여와 중계무역을 하고 있었다.
포르투갈은 이듬해 세우타를 점령하여 북아프리카에 거점을 확보했다.
그런데 포르투갈이 세우타(Ceuta)를 정복하자 이슬람 상인들은 세우타를 포기하고 새로운 무역 도착지로 세우타의 서쪽에 있는 모로코의 탕헤르(Tanger)를 이용하였으므로 금 등이 세우타에 들어오지 않아 포르투갈은 무역을 할 수 없었으므로 별 이득이 없었다. 이슬람과의 직접 교역이 무산되었던 것이다.
엔히크 왕자는 이 일을 계기로 이슬람 상인들을 거치지 않고 인도나 사하라 사막 남쪽 지역과 직접 교역할 수 있는 항로를 개척해야겠다는 뜻을 품게 되었다.
주앙 1세는 세우타 점령의 공을 세운 엔히크 왕자에게 비제우 지역에 신설된 초대 공작(Duque de Viseu)으로 임명하고 해양 개척의 의무를 맡겼다.
이때 포르투갈에는 재력이 풍부한아비스 기사단이 있었으며 단장은 주앙 1세(재위 1385 ~ 1433, 아비스 왕가 시조, 10대 왕)였다.
포르투갈 국토회복에 참여한 지역 기사단인 칼라트라바 기사단이 아퐁소 엔리케스(아퐁소 1세)의 무어족과의 영토 회복 전쟁에 참전하여 지원하였으며 이에 막대한 제원을 하사 받아 1162년 아비스 기사단(Ordem de São Bento de Aviz)이 되었던 것이다.
포르투갈의 왕 주앙 1세는 자기가 가졌던 그리스도 기사단(Ordem Militar de Cristo, 칼라트라바 기사단의 후속)의 단장(아비스 기사단의 메스트리)에 엔히크 왕자를 임명하였다.
엔히크 왕자는 진취적이고 일의 추진력이 뛰어났으며 이를 세우타(Ceuta) 공격에 참여하여 보여주었던 것이다. 이로서 엔히크 왕자는 그리스도 기사단이 보유한 상당량의 재력을 해양 개척에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기사단 명칭을 사용하는 집단이 많지만 템플 기사단(Ordre des Templiers, 성전기사단)은 프랑스 왕국 기사들이 예루살렘을 수호한다는 목적으로 처음 설립된 후 많은 기사단이 설립되어 세력이 대단하였으며 십자군 원정이 끝난 후 프랑스에 대부분 정착했다. 템플 기사단(Ordre des Templiers)은 전쟁이 끝난 뒤 전리품과 하사 받은 봉토(封土, lehen) 등으로 부와 권력을 가진 강한 세력을 형성하였으므로 왕권에 위협을 느낀 프랑스 필리프 4세는 왕권 강화를 위해 교황 등과 합세하여 기사단을 13세기말에 폐지하는 등(기사단의 부를 몰수하기 위함) 대부분의 기사단이 거의 힘을 잃었으나 포르투갈에서는 왕이 기사단을 이끌고 있었으므로 교황의 승인을 받아 아비스(칼라트라바) 기사단을 그리스도 기사단(Ordem Militar de Cristo)으로 변경하여 계속 유지시켰다.
대항해시대의 개막은 바다로 세력을 펼치고자 했던 주앙 1세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엔히크 왕자에 의해 시작되었던 것이다.
엔히크 왕자는 먼저 이슬람 상인이 황금 등의 물건을 공급하던 서 아프리카로 진출할 계획을 세웠다.
사전 준비를 위해 엔히크 왕자는 포르투갈 최남단 알가르브(Algarve)의 사그르스곶(Ponta de Sagres)을 항해의 거점으로 삼았다.
사그르스에 항해학교를 세워 항해연구소, 도서관을 설치하고 조선소를 세워 앞선 이슬람의 선박 기술을 받아들여 배를 건조하였으며 이탈리아인 등을 초빙하여 지도제작, 항로 등을 연구하고 항해사를 교육하였다.
이때에 이르러서 포르투갈에는 동양으로부터 항해에 필요한 나침판(羅針盤, compass)도 들어왔고, 아브라함 자쿠토(Abraham Zacuto, 1452 ~ 1515, 카스티야의 천문학자, 점성가, 수학자, 랍비)가 개량한 태양, 달, 행성, 별의 위치를 예측하는 기구인 아스트롤라베(astrolabe, 星盤, 성반)를 도입하여 별 등을 관측하여 현지시간, 위도, 측량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발달된 아슬람의 지도학, 항해학, 조선 등 항해와 관련 있는 학문이 수입됨에 따라 지중해를 벋어나 항해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고 있었다.
그리고지중해 서쪽은 오스만 튀르크와 이탈리아의 제해권이 약했다.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항로를 개척하여 이슬람으로부터 황금 등을 직수입하여 경제적인 이득을 얻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조선과 항해를 국가 시책으로 삼아 많은 돈을 집중 투자함에 따라 여러 나라의 전문가들이 포르투갈로 모여들게 된 것이다.
엔히크 왕자는 정복한 세우타에서 별로 이익을 얻지 못하였으므로 이슬람 국가인 말리제국(Manden Kurufa, 1235 ~ 1670, 만딩고족), 아랍의 이슬람이 많이 들어와 있는 수단(Sudan) 등 서아프리카 국가와 직접 황금 무역을 하기 위해 탐험대를 조직하여 아프리카 서쪽 해안을 따라 내려가는 아프리카 탐험 대서양 항로를 개척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다음에는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로 가는 항로를 찾으려는 의도였다.
서아프리카 북쪽 해안에서 내륙으로 들어가는 것은 이슬람과 부딪혀야 하고 내륙의 남쪽으로 내려가는 것은 동서로 걸쳐있는 거대한 사하라 사막(Sahara Des.)이 막고 있어 접근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바다로 내려가게 된 것이다.
그때까지 남아프리카에 대한 정보가 없었던 것은 육지는 사하라 사막으로 막혀있고 바닷길은 험난하여 개척이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1417년 엔히크 왕자는 교황으로부터 그리스도 기사단의 장(mestre, 크리스트 기사단의 메스트리)으로 임명되었으며 아프리카를 탐험하는 항해를 기독교 선교를 위한 항해로 그 정당성을 인정받았다.
1418년에 엔히크 왕자가 보낸 탐험대는 지금의 마데이라 제도(Madeira Is., 모로코 서쪽 대서양에 있는 섬)를 발견했다. 포르투갈은 이곳을 식민지로 삼고 본격적으로 탐험 준비를 시작했다.
그리고 값비싼 설탕의 원료가 되는 사탕수수를 재배했다.
엔히크 왕자가 섬의 토질이 숯처럼 목탄화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이 섬에 포도를 재배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며, 이후 섬은 이름난 와인(마데이라 주) 산지가 되었다.
그리고 항로 개척에 알맞은 3개의 마스트(Mast, 돛대)를 단 캐러벨(Caravel)이라는 새로운 배를 개발했다.
캐러벨은 어선을 원형으로 하여 소형으로 무게가 가볍고 2 ~ 3개의 돛대에 돛을 달아 고속으로 먼 거리를 항해할 수 있었다.
캐러벨(Caravel)은 길이가 18 ~ 30m, 중량이 25톤, 선원은 25명, 돛대에 라덴(lateen)이라는 2 ~ 3개의 삼각돛을 설치하여 속도가 빨랐고 흘수(吃水, draft)를 작게 만들어 바닷물에 적게 잠기도록 함으로써 수심이 얕은 해안을 따라 항해할 수 있었다.
1427년 연안에서 멀리 떨어진 대서양(大西洋, Atlantic Ocean, 그리스 신화의 Atlas가 어원이다. 페르세우스가 아틀라스에게잠자리를 청하였다가 거절당하자, 메두사의 머리를 보여 주었는데 이에 놀란 아틀라스는 돌로 변하여 아프리카의 북서쪽의 아틀라스산맥이 되었다. 이산맥의 앞바다를 Atlantic Ocean, 아틀라스의 바다, Sea of Atlas라 하였다. 한자어 大西洋은 유럽의 서쪽 바다라는 의미로 이탈리아의 예수회 선교사인 마테오 리치 Matteo Ricci, 1552 ~ 1610 가 중국에서 제작 소개한 세계지도인 '곤여만국전도 坤輿萬國全圖’에 표기함) 가운데에 있는 아조레스 군도(Azores Islands)를 발견하였다(서경 29도, 이탈리아인이 먼저 발견하였다고 하며 1351년 지도에 표기되어 있었으나 탐험 가록이 없고 무인도였음).
나중에 스페인이 신대륙을 발견하면서 아조레스 제도는 신대륙으로 가는 중간 경유지로서 각광을 받았는데 이주민이 급격히 늘어나 인구과잉 현상까지 일어났다.
엔히크 왕자는 보자도르곶(Cabo Bojador, 서사하라 중서부 해안, 북위 26°, 서경 14°)을 넘어 항해하기 위해 1424년에서 1434년 사이에 14회에 걸친 원정대를 파견하였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그때까지 유럽에서 아프리카 서쪽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 보자도르곶(Cabo Bojador)을 넘어 항해해서 돌아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보자도르 꽂은 예로부터 육지의 끝이라고 불렸으며 보자도르곶 아래의 바다는 뜨거운 수증기가 치솟고 있고, 사람뿐 아니라 먹는 물이나 나무나 풀조차도 없으며, 물살이 빨라 이 곶을 넘어간 배는 결코 돌아올 수 없다고 믿고 있었다.
실제로 이곳 바다는 무역풍 지역이라 내려갈 때는 북동풍을 받아 쉽게 갈 수 있었지만 돌아올 때는 역풍으로 항해가 쉽지 않았다.
1434년에 이르러 엔히크 왕자가 보낸 길 에아네스(Gil Eanes, 1395 ~?)가 이끄는 함대가 보자도르곶(Cabo Bojador, 서사하라 중서부의 대서양 연안)까지 항해하고 돌아왔다. 비로소 지중해를 벋어 난 항해가 시작된 것이다. 보자도르곶(Cabo Bojador) 주위에는 위험한 암초들이 많았고, 육지에서 5 km 떨어진 곳에서도 깊이가 1.8 m 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수심이 얕았으며, 파도가 심했다.
그들은 원주민을 사서 데려와 리스본에서 노예로 팔아 원정대 비용으로 사용하였다.그 이전에 이슬람인들이 사하라 사막 남쪽으로 내려가서 흑인을 데려와 노예로 삼은 적이 있지만 사고 판 것은 처음이었다. 포르투갈 원정대가 흑인을 리스본에 데려와 노예로 사고 판 것은 본격적인 상업 노예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이슬람의 낙타 캐러밴(caravan, 隊商, 대상, 사막이나 초원 등에서 낙타, 말 등을 타고 무리 지어 이동하면서 교역을 하던 상인 집단)들은 1415년에 세우타가 포르투갈에게 정복되자 그들은 육로 교역의 도착지로 탕헤르(Tanger)를 이용하였다. 그래서 세우타에서 이익을 얻지 못한 포르투갈은 다시 탕헤르를 차지하기 위해 1437년 모로코의 마리니드 왕조(마린 술탄국, Marinid Dynasty, Imrinen, 1244 ~1465, 모로코지역, 베르베르인의 일파인 제나타가 세움)에 맞서 탕헤르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엔히크는 크게 패하여 동생을 인질로 세우타를 넘겨주고 귀환했다(11대 왕 Duarte de Avis 두아르트 드 아비스, 1433 ~ 1438앤히크의 형).
포르투갈 군은세우타 방어에 대포를 사용하였고 탕헤르 원정에서는 휴대용 총기와 소총을 사용하였다.
탐험이 계속되어 1444년에는 디니스 디아스(Dinis Dias, 바르톨로뮤 디아스의 아버지)가 세네갈 강 입구(Cabo Verde)에 도달했고 알바로 페르난데스(Álvaro Fernandes)는 카보 베르데를 넘어 케이프 레드(Cape Red, Cabo dos Mastros)에 도착했다.
1456년 알비세 카다모스토(Alvise Cadamosto, 1432 ~ 1488)와 디오고 고메스(Diogo Gomes, 1420 ~ 1500)는 카보베르데 제도(Cabo Verde islands, 베르데 곶 서쪽)를 발견했다.
이렇게 포르투갈이 새로운 지역을 발견하자 1456년 교황 갈리스토 3세(Calixtus III, 교황 재임기간 1455 ~ 1458, 발렌시아 출신)는 “기니와 카보 보자도르(당시 유럽에 알려져 있던 가장 먼 땅, Cabo Bojador, 서사하라 중서부의 대서양 연안) 남쪽에서 앞으로 발견되는 모든 땅”은 포르투갈에 속한다는 칙서를 내렸다.
1460년에는 지금의 시에라리온(Sierra Leone, 기니 서쪽, 라이베리아 북쪽) 연안까지 도달했다.
1460년 평생 독신으로 살아온 엔히크 왕자(1394~1460)가 죽었으며 그의 비제우 공작(Duque de Viseu) 지위는 조카이며 아폰수 5세(Afonso V de Avis, 재위 1438 ~ 1481, 두아르트 드 아비스 1433 ~ 1438 아들, 주앙 1세 손자)의 동생인 인판테 페르난두, 비세우 및 베자 공작(Infante Ferdinand, Duke of Viseu and Beja, 비제우 공작 페르디난트, 두아르트 드 아비스 1433 ~ 1438 아들, 주앙 1세 손자)이 물려받았으며(엔히크가 두아르트에게 탕헤르 원정을 승인받기 위해 페르디난트에게 상속하기로 일찍이 약속하였음) 공작의 9번째 아들이 주앙 2세(John Ⅱ, 재위 1481 ~ 1495, 아폰수 5세 아들, 주앙2세의 아들 아폰소 왕세자가 16살에 낙마로 사망하여 적자가 없었음)의 뒤를 이은 마누얼 1세(Manuel I de Portugal, 재위 1495 ~ 1521)이다.
엔히크 왕자에게 항해왕(航海王, Prince Henry the Navigator)이란 별칭을 붙인 사람은 19C에 독일 역사가 하인리히 셰퍼(Heinrich Schaefer)와 구스타브 드 비어(Gustave de Veer )이다.
그런데 엔히크 왕자는 서아프리카연안탐사와 대서양 탐험과 개척을 이끌고 지원하였지만 직접 탐험하지는 않았으므로 항해왕(航海王, Prince Henry the Navigator)이란 별칭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람도 있다.
엔히크 항해왕자(Infante Dom Henrique, o Navegador, Prince Henry the Navigator, 1394~ 1460)가 죽고 아프리카 탐험이 주춤해지자 아폰수 5세(Afonso V de Avis, 재위 1438 ~ 1481)는 아프리카 탐험을 다시 실행하기 위해 민간주도 방식을 도입했다.
이에 탐험가이자 상인인 페르낭 고메스(Fernão Gomes, ?~?)는 1469년 아폰수 5세(Afonso V de Avis, 재위 1438 ~ 1481)로부터 5년간의 아프리카 개척 및 무역 독점권을 부여받았다. 매년 아프리카 해안의 남쪽으로 100레구아(약 600km)을 전진하고 500 크루사도스를 왕에게 바치기로 하는 조건이었다.
다시 포르투갈의 탐험이 재개되어 1469년에 상아 해안(코트디부아르), 후추 해안(시에라리온), 황금해안(가나), 노예해안(토고, 베냉, 나이지리아) 등으로 불리는 기니 만(灣) 연안을 탐험하였다.
기니 만(灣) 연안에서 상아 무역이 활발했기 때문에 코트디부아르(Côte d'Ivoire) 해안을 상아 해안(象牙海岸, Ivory Coast)이라 불리게 된다.
그리고 라이베리아,시에라리온 연안에서 후추를 발견하여 이 해안을 후추 해안(胡椒 海岸, Pepper Coast)이라 하며 후추를 무역하였다고곡물 해안(穀物 海岸, Grain Coast)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1471년 페르낭 고메스(Fernão Gomes)는 20척의 배들을 이끌고 적도를 지나 상투메프린스페(São Tomé and Príncipe, 1470년 João de Santarém과 Pedro Escobar가 발견) 섬에 식민도시를 건설했다.
이어서 1471년 포르투갈 선교사들이 해변에 널려 있는 황금을 발견한 기니 만(灣)의 황금해안(Gold Coast)에 도착하여 엘미나(Elmina, 광산)라는 사금 생산지를 발견하였으며 철제 제품 등을 주고 많은 량의 금을 거래하였다.
페르낭 고메스(Fernão Gomes)는 황금뿐만 아니라 노예, 후추, 상아 등을 무역하여 많은 수익을 올렸으며 이 수익으로 1471년 와타시드 (Wattassids, 1471 ~ 1554, 모로코 지역) 왕조의 영토인 아실라(Asilah, 모로코 북서부 연안), 크사르 에스 세기르(Ksar es Seghir, Alcácer Ceguer), 탕헤르(Tangier)를 정복할 때 전투를 지원하여 기사 작위를 받았다.
1482년 주앙 2세(João Ⅱ, 재위 1477~1495)는 이곳을 개척하여 요새를 건설하였으며 포르투갈인들이 사금(砂金)을 패닝(panning, 비중 선별법)으로 채취하였고 후에는 굴착하여 채굴하면서 황금해안(黃金海岸, Gold Coast, 가나 해안)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1488년 항해사 바르톨로뮤 디아스(Bartolomeu Dias,1450 ~ 1500)는 아프리카 대륙 최남단의 희망봉을 발견하였다(주앙 2세, John Ⅱ, 1481 ~ 1495). 이로서 인도로 갈 수 있는 아프리카 대륙의 끝에 도달하였던 것이다.
바르톨로뮤 디아스가 포르투갈로 돌아왔을 때 콜럼버스는 주앙 2세에게 대서양을 넘어가는 인도항로 탐험을 지원해 줄 것을 다시 청원하고 있었다. 바르톨로뮤 디아스가 아프리카를 돌아가는 인도항로를 개척할 수 있게 되었다고 보고하였으므로 콜럼버스는 소득 없이 돌아갔다.
그리고 주앙 2세(John Ⅱ, 1481 ~ 1495)는 1486년 육로로 인도를 탐사하기 위해 페루 다 쿠비양(Pero Da Covilha, 1460 ~ 1526)과 파이바(Afonso de Paiva, 1443 ~ 1490)를 이슬람 몰래 보냈었다. 쿠비양은 인도로 가서 칸나노르, 캘리컷, 고아 등을 돌아보고 1490년에 페르시아의 호르무즈로 돌아와 그리스도교 지도자와 연락을 취하고자 아비시니아(에티오피아)로 갔다가 억류되었다. 파이바는 쿠비양과 예멘의 아덴(Aden)에서 헤어져 카라반(caravan, 隊商)과 협력하기 위해 수단으로 간 후 죽었다.
주앙 2세(John Ⅱ)는 쿠비양을 보내 놓고 돌아오기를 9년이나 기다렸으나 쿠비양은 호르무즈 근처에서 서신만 보내오고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포르투갈은 오래전에 희망봉을 발견하였음에도 인도로 가는 항로 개척이 늦어졌던 것이다.
3. 스페인의 대항해
가. 스페인의 통일
유럽의 남서부에 위치하는 이베리아 반도에는 지중해 기원의 이베리아인이 살고있었고 기원전 11세기경에 이베리아 반도 서남부에 페니키아인들이 들어왔으며 기원전 750년경에 독일 동남부가 원주지인 켈트족(Celts, 갈리아를 지칭하는 라틴어 켈타이 Celtae에서 유래)이 유입되었다.
페니키아 인들은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이 원주민인 민족으로 항해술이 뛰어나 지중해의 동부 연안, 이집트, 서남 아시아 및 메소포타미아 등 인접 지역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북부의 지중해 연안 여러 곳에 교역 기지를 설치하였고, 기원전 1200년경에 이베리아 반도의 남쪽에 진출하여 기원전 1100년경에는 서부 유럽 최초의 도시인 카디스(Cádiz, 스페인 남서부 안달루시아에 있는 항구)를 건설했다.
아프리카 북쪽 페니키아인의 고대도시 카르타고(Carthago, B.C. 814년경 ~ B.C. 146)의 지배를 받던 스페인은 B.C. 51년에 로마 제국의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 줄리어스 시이저, BC 100 ~ BC 44)에게 정복되었다.
로마 제국 시절에는 이베리아 반도를 히스파니아(Hispania, 에스파냐의 어원)라고 하였으며 이베리아(Ibérica)라는 명칭은 동부 지중해 연안으로 흐르는 에브로강(Ebro)의 이름에서 온 것이다.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던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406년부터 반달족(Vandals, 동게르만족, 북아프리카로 건너가 439년 카르타고를 점령하여 반달 왕국을 세움 435 ~ 534), 부리족(Buri tribe, Germania 부리족의 일파가 수에비족을 따라 이베리아로 들어왔음)과 같은 게르만족의 침략으로 로마 제국이 무너졌으며 이들 게르만족 중에서 수에비족(수에비 왕국, Regnum Suevorum, 411 ∼ 584)과 서고트족(서고트 왕국, Regnum Visigothorum, 412 ~ 720)이 이 지역에 기독교 왕국을 세웠다.
수에비(Suevi)족은 발트 해와 엘베강(Elbe, 독일)을 기원으로 하는 게르마니아(Germania, 라인강 동쪽)에 살던 게르만족으로 일파는 독일 서남부 슈바벤(Swabia)에 정착했으며 다른 수에비 일파는 갈라에키아(오늘날의 갈라치아, 스페인, 포르투갈) 지방으로 내려와 411년 수에비 왕국(Regnum Suevorum, 411 ∼ 584)을 세웠던 것이다.
수에비 왕국(Regnum Suevorum, 411 ∼ 584)은 584년 서고트 왕국에 정복당해 멸망했다.
고트족(Gothi)은 스칸드나비아 반도 발트 해의 고틀란드라는 섬에 살던 게르만족이 중부 유럽을 가로질러 남쪽으로 이주하면서 두 파로 나누어졌다. 서고트족은 2세기경 다뉴브 강 변경 지방(루마니아 지역)에 정착했으며 동고트족은 더 동쪽으로 이동해 흑해 북서 연안에 정착하였으나 중앙아시아의 흉노족이 서쪽으로 이동함에 따라 그 지역에서 쫓겨난 고트족은 서쪽으로 이동하여 유럽으로 들어왔다. 서고트족은 376년 다뉴브 강을 건너 남쪽으로 이동하여 콘스탄티노플에서 동로마 군대를 물리친 다음 이탈리아로 진출한 알라리크 1세(알라리쿠스 1세 Alaricus I, 재위 395 ~ 410)는 409년 로마를 점령하고 다시 북쪽의 갈리아 지방으로 이동하였으며, 서로마제국은 이들에게 갈리아 남서부(스페인)를 주었다.
아타울프(Athaulf, 서고트 왕 재위 411 ~ 415)는 서고트 부족 왕을 서고트 왕국(Regnum Visigothorum 레그눔 비시고토룸, 412 ~ 720)으로 확립했다.
451년 카탈라우눔 전투(샬롱 전투)에서 서로마 제국의 플라비우스 아이티우스와 서고트족 왕 테오도리쿠스 1세(Theodoric I, 재위 418 ~ 451) 등의 연합군은 훈족의 아틸라군을 물리쳤다.
서고트 왕국은 이슬람 제국 우마이야 왕조의 침입을 받아 711년 과달레테 전투(battle of Guadalete, 711)에서 패배하여 멸망하였다.
동고트족은 5세기 경, 훈족(흉노족)에 밀려 서고트족을 따라 이탈리아로 이동했다.
동로마 제국 황제 제논(Flavius zeno, 재위 474 ~ 491)의 지원을 받은 동고트족의 테오도리쿠스 대왕(Theodoric the Great, 재위 488 ~ 526)은 스위스 왕국 및 발칸 제국의 왕과 함께 488년 이탈리아를 침략하여 493년에 완전히 점령하고 동고트 왕국(Ostrogothic Kingdom, 이탈리아 왕국 Regnum Italiae, 493 ~ 553)을 세웠다.
동고트 왕국은 552년 동로마 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Justinianus l, 재위 527 ~ 565) 때에 장군 나르세스(Narses, 478~573)에 의해 멸망했다.
이베리리아 반도는 유럽의 남서부에 위치하지만 프랑스 남쪽의 피레네 산맥(Pyrenees)이 유럽과 이베리아 반도를 단절시키는 반면에 이베리아 반도와 아프리카 사이의 지브롤터 해협(Strait of Gibraltar)은 가장 좁은 지역의 너비가 14km 정도 밖에 되지 않아 유럽보다 아프리카와 더 쉽게 관계를 맺었으며 이베리아 반도 내에는 높은 산맥이 많아 지역이 분리되어 통합이 어려웠다.
그런데 이베리아 반도는 710년 북아프리카를 점령한 우마이야 왕조의 베르베르족과 아랍인들로 이루어진 무어인(Moor, 이베리아반도와 북아프리카에 살았던 이슬람계인, 아랍계와 베르베르족의 후손) 군대가 711년 과달레테 전투(battle of Guadalete, 711)에서 승리하여 서고트 왕국을 멸망시키고 이베리아 반도의 남쪽 대부분을 차지하여 우마이야 왕조(661 ∼ 750)의 알안달루스(Al-Andalus, 711 ~ 1492)를 세웠다.
이에 서고트의 기독교인들은 침략하가 어려운 이베리아반도 북쪽의 산악지대로 모였고 서고트 왕국의 장군 펠라기우스(Pelagius of Asturias, 685 ~ 737)가 우마이야 칼리파조의 군대를 격파하고 718년 왕위에 올라 아스투리아스 왕국(Reinu d'Asturies, Asturorum Regnum, 718 ~ 924)을 세웠다.
이어서 우마이야 왕조 군은 유럽을 정복하기 위해 프랑스로 진격하였으나 프랑코 왕국과의 투르 푸아티에 전투(Battle of Tours Poitier, 732년)에서 우마이야 왕조는 패하여 더 이상 유럽을 정복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투르 푸아티에 전투에서 공을 세운 궁재(宮宰) 샤를 마르텔(Charles Martel, Karl Martell, 카를 마르텔)은 영토를 더욱 확장했으며 궁재(宮宰)였던 그의 아들이 반란을 일으켜 피핀 3세(피피누스 3세 브레비스, Pippinus III Brevis, 재위 751 ~ 768)로 프랑크 왕국의 왕위에 올라카롤링거 왕조(Carolingian dynasty, 751 ~ 987)를 열었으며 프랑크 왕국의 2대 왕이 샤를마뉴(Charlemagne, 카롤루스 마그누스, Carolus Magnus, 재위 768~814, 대제 재위 800 ~ 814)이다.
그 결과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단지 북쪽에만 기독교 세력의 왕국들이 남아 있었다.
750년 우마이야 왕조(661 ∼ 750)가 아바스 왕조에 멸망되자 살아남은 우마이야의 왕자 아브드 알라흐만 1세(Abderramán I, 재위 756 ~788)가 스페인으로 들어가 코르도바 칼리프국(Califato de Córdoba, 후 우마이야 왕조 756 ~ 1031)을 세웠다.
코르도바 칼리프국(Califato de Córdoba, 후 우마이야 왕조 756 ~ 1031)이 내전으로 1031년 멸망하고 소국인 39개의 타이파(Taifa, 이슬람 소왕국)가 생겨났다.
북쪽에 남아있던 기독교 세력은 레온(León), 카스티야(Castilla), 나바라(Navarra), 아라곤(Aragon), 카탈루냐(Catalonia, 바르셀로나, 헤로나) 등의 왕국으로 갈라져 있었다.
알폰소 6세(AlfonsoVI, 재위 1065 ~ 1109(레온), 1071 ~ 1109(갈리시아), 1072 ~ 1109(카스티야), 둘째 아들, 레온 상속)는 카스티야 왕국의 왕인 페르난도 1세와 레온 왕국의 왕인 알폰소 5세의 맏딸( 산차, Sancha) 사이에서 산초 2세(Sancho II, 재위 카스티야 1065 ~ 1072, 레온 1072, 갈리시아 1071 ~ 1072, 맛 아들, 카스티야 상속), 가르시아 2세(García II, 재위 1065 ~ 1071, 셋째), 우라카(Urraca, 딸, 사모라 Zamora와 토로 Toro를 상속)와 형제자매로 태어났다
레온 왕 알폰소 6세가 1085년 타이파(Taifa, 이슬람 소왕국)들을 공격하여 이베리아 전체를 지배하자 위기를 느낀 타이파(Taifa, 이슬람 소왕국)들이 무라비트 왕조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무라비트 왕조(알무와히드 왕조, Almoravid dynasty, 1050 ~ 1147, 베르베르족, 세네갈, 알제리, 모리타니아, 튀니지, 리비아,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가 이베리아 반도로 쳐들어와 1086년 사그라하스 전투(BattleofSagrajas)에서 알폰소 6세에 승리하는 등 연이어 승리하여 1090년에 그라나다, 세비야와 알메리야, 알리칸테, 바다호스(Badajoz) 등을 정복했다.
이때에 엘 시드(El Cid Campeador, Rodrigo Díaz de Vivar 로드리고 디아스 데 비바르, 1040~1099, 카스티야 장군)가 1094년 발렌시아를 정복하여 통치하였다.
카스티야 장군인 엘시드(El Cid, 1040 ~ 1099)는 산초 2세(Sancho II, 재위 카스티야 1065 ~1072, 레온 1072, 갈리시아 1071 ~ 1072, 맛 아들, 카스티야 상속)가 일찍이 1072년에 죽고 그와 싸웠던 알폰소 6세(AlfonsoVI, 재위 1065 ~ 1109(레온), 1071 ~ 1109(갈리시아), 1072 ~ 1109(카스티야), 둘째 아들, 레온 상속)가 카스티야를 차지하였다. 그래서 엘시드는 알폰소 6세로부터 오랜 기간 배척을 받아왔다.
그러던 중 알폰소 6세의 지배하에 있던 이슬람 왕국인 톨레도를 엘시드가 공격하자 알폰소 6세는 엘시드를 추방하였으며 추방당한 엘시드는 이슬람 왕조가 다스리던사라고사에서 일하였다.
엘시드는 사라고사에 있는 동안 계획하여 공들여 왔던 발렌시아를 1094년 정복하여 통치하였던 것이다.
엘시드는 현대에 스페인인들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1094년까지 무라비트 왕조(알무와히드 왕조, Almoravid dynasty, 1050 ~ 1147, 베르베르족, 세네갈, 알제리, 모리타니아, 튀니지, 리비아,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는 사라고사를 제외한 모든 타이파(Taifa, 이슬람 소왕국) 세력을 병합하여 이베리아 반도를 차지하였다.
내부 반란으로 무라비트 왕조(알무와히드 왕조, Almoravid dynasty, 1040 ~ 1147)가 망하고 무와히드 왕조(알모아데 왕조, 알모하드 칼리프 왕조, Almohad Chaliphate, 1121 ~ 1269, 베르베르족, 모로코)가 이어졌다.
아라곤 왕국은 여왕 페트로닐라 1세와 카탈루냐의 라몬 베렝게르 4세와 결혼으로 1137년에 카탈루냐를 통합했다.
무슬림이 종교적 탄압을 하자 이베리아 반도의 북쪽에 남아있던 기독교 세력들은 13세기 초부터 남진하여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이를 레콩키스타(Reconquista, 국토 수복 운동, 711 ~ 1492)라고 한다.
1212년 카스티야 왕국의 알폰소 8세(Alfonso VIII, 재위 1158 ~ 1214)를 중심으로 아라곤의 페드로 2세(Pedro II, 재위 1196 ~ 1213), 나바라의 산초 7세(Sancho VII, 재위 1194 ~ 1234), 포르투갈의 아폰수 2세(Afonso II of Portugal, 재위 1211 ~ 1223) 등과 연합해 싸운 라스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Battle of Las Navas de Tolosa)에서 이슬람의 무와히드 왕조(알모아데 왕조, 알모하드 칼리프 왕조, Almohad Chaliphate, 1121 ~ 1269, 베르베르족, 모로코)에 승리하여 남쪽의 그라나다 왕국이 있는 안달루스(andalus) 지역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을 탈환하였다. 무참히 패배한 이슬람은 약화되어더 이상 세력을 떨치지 못하게 되었다.
아라곤은 영토를 확장하여 피레네 남반부로부터 지중해안까지 넓혔으나 1213년 프랑스와의 무레트 전투(무레 전투, 뮤헤 전투, Battle of Muret)에 패하여 피레네 이북으로의 진출이 저지되었다.
1035년 백작령에서 왕국이 된 카스티야는 1198년 카스티야의 공주 베렝겔라와 사촌오빠인 레온 왕 알폰소 9세의 결혼으로 탄생한 페르난도 3세(Ferdinand Ⅲ, 재위 1 217 ~1252, King of Castile and León)가 1217년 어머니 베렝겔라에게서 카스티야 왕위를 이어받고 1230년 아버지 알폰소 9세의 레온의 왕위도 이어받아 레온을 합병했다.
카스티야 연합왕국의 알폰소 10세(Alfonso X, 재위 1221 ~ 1284, King of Castile and León)가 나폴리를 정복, 지중해로 진출하였다.
카스티야의 페르난도 3세(Ferdinand Ⅲ, 재위 1217 ~ 1252, King of Castile and León)는 무와히드 왕조(알 모아데 왕조, 1121 ~ 1269, 베르베르족, 모로코)가 점령하고 있던 코르도바를 1236년에 탈환하였으며 세비야를 1248년에 탈환했다.
1340년 포르투갈의 아폰수 4세(AfonsoIV, 재위 1325 ~ 1357)와 카스티야 연합왕국의 아폰소 11세(AlfonsoXI)는 연합하여 마리니드 왕조(마린 술탄국, Marinid Dynasty, Imrinen, 1244 ~1465, 모로코지역, 베르베르인의 일파인 제나타가 세움)가 이베리아 반도를 마지막으로 침공하여 벌어진 리오 살라도(Rio Salado)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지브롤터(Gibraltar)는 카스티야의 엔리케 4세(Enrique IV, Henry IV of Castile, 1425 ~ 1474, 재위 1454 ~ 1474, King of Castile and León)때인 1462년 제1대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 후안 알론소 데 구스만(Juan Alonso de Guzmán, 1st Duke of Medina Sidonia, 1405 ~ 1468)에 의해 탈환되었다.
카스티야의 엔리케 4세(Enrique IV, Henry IV of Castile, 1425 ~ 1474, 재위 1454 ~ 1474)는 아들이 없고 딸인 후아나(Juana La Beltraneja, 1462 ~ 1530)는 엔리케 4세의 딸이 아니라는 의심에 싸여 있었다. 엔리케 4세는 실정으로 신임을 잃고 있었고 후아나는 왕위 계승자로 인정을 받지 못했다. 그런데 엔리케 4세의 이복동생 이사벨 1세는 능력을 인정받아 카스티야의 희망이었다. 그래서 엔리케 4세는 이복동생인 이사벨 1세(Isabel I, 1451 ~ 1504, 재위 1474 ~ 1504)와 약정을 맺어 왕위를 이사벨 1세에게 물려주기로 하고 대신 이사벨 1세의 결혼 상대자는 자기가 동의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엔리케 4세는 이사벨 1세가 결혼하면 카스티야를 떠나게 할 수 있는 결혼 상대자를 찾고 있었다.
이사벨 1세는 엔리케 4세가 원하지 않는 사람을 결혼 상대자로 정하려고 하자 몰래 아라곤의 왕위 후계자인 페르난도 2세(Fernando II, 1452 ~ 1516, 재위 1479 ~ 1516)와 혼약하고 1469년에 다른 핑계를 대고 궁을 빠져나와 바야돌리드(Valladolid)에서 비밀리에 들어온 페르난도 2세와 결혼하였다. 이에 엔리케 4세는 이사벨 1세의 왕위 계승권을 취소하였다.
1474년 엔리케 4세(Enrique IV, 1425 ~ 1474, 재위 1454 ~ 1474)가 죽자 이사벨 1세(Isabel I, 1451 ~ 1504, 재위 1474 ~ 1504)는 왕위에 올랐지만 질녀 후아나와 왕위 계승 경쟁이 일어났고 후아나와 결혼한 후아나 외삼촌 포르투갈의 아폰수 5세가 1475년에 침공하여 3년간 카스티야-포르투갈 전쟁(1495 ~ 1497)을 치렀다.
1479년 알카소바스 조약(Treaty of Alcáçovas)을 맺어 이사벨 1세(Isabel I, 1451 ~ 1504, 재위 1474 ~ 1504)는 카스티야의 왕위 계승을 인정받았으며 포르투갈은 대서양에 있는 섬들에 대한 소유권과 아프리카 해안 지역의 권리를 보장받았다.단, 카나리아 제도(Canary Islands, 아프리카 북서부 대서양)는 예외로 함에 따라 아라곤의 후안 2세(Juan II, 재위 1425 ~ 1479) 때인 1479년에 카나리아 제도는 스페인 령이 되었다.
이렇게 하여아라곤의 왕위 후계자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Fernando II, 1452 ~ 1516, 재위 1479 ~ 1516I)와 카스티야의 왕위 계승 후계자 이사벨 1세(Isabel I, 카스티야의 여왕, 재위 1474 ~ 1504)가 결혼하여 공동 국왕이 지배하는 통일 스페인 왕국이 성립할 수 있게 되었다.
페르난도 2세와이사벨 1세는 대등한 사이(Tanto monta)로 권력을 공유하는부부재산계약을 하고 결혼했다. 그래서 이사벨 1세가 죽은 후 카스티야의 왕위 계승이 남편인 페르난도 2세가 아니고 딸인 후아나 1세가 하게 되고 그 후로 스페인은 카스티야-레온 연합, 아라곤, 포르투갈 등의 부속국이 독립적으로 유지되었다.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아라곤 재위 1479 ~ 1516, 카스티야의 페르난도 5세 재위 1474 ~ 1504)는 카탈루냐와 발렌시아, 발레아레스 제도와 시칠리아를 포함하는 거대 왕국의 왕으로 군림했다.
이 과정에서 아라곤 왕국과 카스티야 왕국을 통칭하는 용어로 에스파냐(España)가 쓰이게 되었다. 에스파냐(España)는 고대에 스페인을 지칭하던 라틴어인 히스파니아(Hispania)에서 유래한 것이다.
현 스페인국가(Estado Español, 西班牙 서반아)의 정식 명칭은 스페인 왕국(Reino de España 레이노 데 에스파냐, Kingdom of Spain)이며 약칭은 에스파냐(España)이다.
영어인 스페인(Spain)이라는 명칭은 고대 프랑스어 에스파뉴(Espaigne, 현 Espagne)가 영어화되면서 변한 것이다.
1492년 1월 남쪽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무슬림의 그라나다(Granada)를 정복함으로써 통일된 스페인 왕국이 되었다.
1492년 3월 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Isabel I, 재위 1474 ~ 1504)와 아라곤의페르디난드 2세(아라곤 재위 1479 ~ 1516,카스티야의페르난도 5세 재위 1474 ~ 1504)는 알함브라 칙령(Alhambra Decree)을 내려 유대인들에게4개월 내로 가톨릭으로 개종하거나 스페인을 떠날 것을 명하였다. 스페인 인구 700만 명 중에서 유대인은 수십만 명 정도였으며 그중 몇만 명은 개종하였고 몇십만 명은스페인을 떠나 포르투갈로, 일부의 유대인은 이슬람교도들과 함께 마그레브(Maghreb, 아프리카 북서부) 지역으로 이주하였다. 오스만 제국의 바예지드 2세(Bayezid II)는 유대인과 이슬람교도들의 유입을 허용하였으며 포르투갈의 주앙2세는 재정이 열악하여 돈을 받고 받아들였던 것이다.
칙령에 "유대인의 모든 재산권을 인정하고 보호하며, 동산과 부동산을 자유롭게 처분해 국외로 반출할 권리를 부여한다"라고 명시하였지만 단서로 "금과 은, 화폐의 반출을 비롯해 국가가 정하는 품목을 금지한다"라고 하여 실제로는 재산의 반출을 금지시켰다.
스페인은 유대인을 추방함으로써 수많은 지식인, 유능한 금융가, 의사, 상인, 기술자 등을 잃어 나라에 큰 손실을 가져왔으며 이들을 받아들인 포르투갈과 마그레브(Maghreb, 아프리카 북서부)지역에서는 나라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포르투갈로 간 유대인들은 포르투갈에서 마누엘 1세가 1496년 12월에 유대인 추방령을 또 내리자 네덜란드로 갔다.
스페인은 화승총(아쿼버스, arquebus)으로 전쟁에서 처음으로 승리한 국가이다.
이탈리아 원정에 나선 페르난도 2세(아라곤 재위 1479 ~ 1516, 카스티야의페르난도 5세 재위 1474 ~ 1504)의 스페인군은 화승총병을 두줄로 세워 번갈아 가면서 발사하게 하여 1503년 4월 체리뇰라 전투(Battle of Cerignola)에서 프랑스군에 승리했으며 12월 가릴리아노 전투(Battle of Garigliano)에서 프랑스군을 대파하였다,
이에프랑스의 루이 12세는 나폴리에서 물러났으며 나폴리는 스페인의 코르도바(Don Gonzalo Fernández de Córdoba, 1453~1515) 장군이 총독(1504 ~ 1507)이 되어 지배하였다.
15세기 초반에 유럽에서 개발된 아쿼버스(arquebus)를 헝가리 국왕후냐디 마차시(Hunyadi Mátyás, 재위 1458 ~ 1490)가 처음 대량으로 사용하였다.
헝가리 흑군(Fekete sereg)에 아쿼버스병이 배치되었으나 아쿼버스(arquebus)의 발사 속도가 느렸기 때문에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1512년 나바라(Navarra, 피레네 산맥 서부) 왕국은 페르난도 2세에 의해 스페인 왕국에 합병되었으며, 일부 지역은 프랑스(앙리 3세)에 합병되었다.
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Isabel I, 1451 ~ 1504, 재위 1474 ~ 1504)와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Fernando II, 1452~1516, 재위 1479 ~ 1516, 카스티야의 페르난도 5세 1474 ~ 1504) 사이에 1남 4녀(이사벨, 후안, 후아나 1세, 마리아, 캐서린)가 있었는데 아들 후안은 어릴 때 죽었고 큰 딸 이사벨은 포르투갈의 마누엘 1세와 결혼(1497)하였으나 미겔 왕자를 낳다가 죽었으며 그 뒤 마리아는 언니와 결혼했던 마누엘 1세와 결혼(1500)했다.
그리고 막내딸 캐서린(Catherine of Aragon, 카탈리나 다라곤 Catalina de Aragón)은 영국 왕세자 아서와 결혼했으나 일찍이 아서가 사망하여 시동생인 헨리 8세와 재혼을 하였다.
그래서 이사벨 1세가 죽자 둘째 딸인 후아나 1세(Juana I, 후아나, Joanna of Castile, 조아나, 1479 ~ 1555, 카스티야 재위 1504~1555, 아라곤 재위 1516 ~1555년)와 사위인 신성로마제국 막시밀리안 1세의 아들인 필리페 1세(Philipp Ⅰ, 1478 ~ 1506, 부르고뉴 공작 재위1482 ~ 1506)가 카스티야 왕위를 이어받았다.
이들 부부 사이에는 2남 4녀가 있었다.
장녀 레오노르 데 아우스트리아(Leonor de Austria, Eleonore von Kastilien 엘레오노레 데 카스틸리엔, 1498 ~1558, 두 이모와 결혼했던 포르투갈 마누엘 1세 왕비 1518 ~ 1521, 프랑스 프랑수아 1세 왕비 1530 ~ 1547), 장남 칼를 5세(Karl V, 1500 ~ 1558,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재위 1519 ~1556, 스페인 카를로스 1세 Carlos I), 이사벨 데 아우스트리아(Isabel de Austria, 오스트리아의 엘리사베트, 1501 ~ 1525,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2세의 왕비), 페르디난트 1세(Ferdinand I, 1503 ~ 1564,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재위 1556 ~ 1564), 마리아 폰 외스터라이히(Maria von Österreich, 1505 ~ 1558, 헝가리와 보헤미아의 왕 러요시 2세 왕비), 카탈리나 데 아우스트리아(Catalina de Austria, Catherine of Austria, 캐서린, 1507 ~ 1578, 포르투갈 주앙 3세 왕비)이다.
후아나가 카스티야를 물려받자 아버지인 페르난도 2세(Fernando II, 1452~1516, 아라곤 왕, 재위 1479 ~ 1516)가 왕위를 넘길 것을 강요하는 등 간섭이 심하여 페르난도 2세를 섭정으로 하였다. 남편인 필리페 1세가 1506년 28세로 일찍 죽자 정신에 이상이 있었던 후아나는 아버지 페르난도 2세(아라곤 재위 1479 ~ 1516, 카스티야의 페르난도 5세 1474 ~ 1504)에 의해 미쳤다고 수도원에 유폐(1509 ~ 1555)되었다.
후아니와 필리페 1세(Philipp Ⅰ)의 아들 카를 5세(신성로마제국 Karl V, 1500 ~ 1558, 신성로마제국 재위 1519 ~1556, 스페인 Carlos1세, 스페인 재위 1516 ~ 1556, 막시밀리안 1세와 마리아 부르고뉴 공작 사이의 손자)는 네덜란드에서 고모가 키우고 있었다.
필리페 1세(Philipp Ⅰ, 1478 ~ 1506, 부르고뉴 공작재위1482 ~ 1506, 카스티야 공동 제위 1504 ~ 1506)가 1506년에 죽자 카를 5세는 네덜란드의 부르고뉴 공작(재위 1506~1515)을 이어받았으며 고모가 섭정을 하였다.
페르난도 2세가 1516년에 죽자 카를 5세는 할머니 마리아와 아버지 필리페 1세로부터 네덜란드를(1506), 어머니 후아나로부터 카스티야를, 외할아버지 페르난도 2세로부터 아라곤을(1516),할아버지 막시밀리안 1세로부터 신성로마제국(독일 오스트리아)을(1519) 물려받았다.
카를 5세(신성로마제국 Karl V, 1500 ~ 1558, 신성로마제국 재위 1519 ~1556, 스페인 Carlos1세, 스페인 재위 1516 ~ 1556, 막시밀리안 1세와 마리아 부르고뉴 공작 사이의 손자)의 동생인 페르디난트 1세(FerdinandI, 재위1558 ~ 1564, 독일합스부르크 왕가의 시조)는 형이1520년 황제(대관식)가 되자 오스트리아의 통치권과 독일 그리고 뷔르템부르크 섭정직을 받았다.
페르디난트 1세(FerdinandI, 황제 재위1558 ~ 1564)는 카를 5세에 이어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되었으며 카를 5세의 아들인 펠리페 2세(Felipe II, 재위 1556 ∼ 1598)는 스페인 왕이 되었다.
스페인왕은 1516년 카를로스 1세(Carlos I, 재위 1516 ~ 1556)부터 합스부르크 왕조가 되어 카를로스 2세(Carlos II,1661~1700, 재위 1665~1700)까지 합스부르크 왕조가 계속되었다.
카를 5세 시절에 페르디난트 1세와 그의 처남인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왕 러요시 2세(II. Lajos,재위 보헤미아 왕 1516 ~ 1526, 헝가리, 크로아티아의 왕 1516~1526, 왕비는 페르디난트 1세의 누이동생)가 오스만 제국의 술레이만 1세(I. Süleyman, Süleyman the Magnificent, 재위 1520 ~ 1566)의 침공에 맞서 모하치 전투(battle of Mohács, 1526)에서 싸우다 러요시 2세가 젊은 나이에 후사도 없이 전사하게 됨에 따라 보헤미아, 헝가리, 크로아티아가 페르디난트 1세의 영토가 되었다.
카를 5세(Karl V, Carolus V, 1500 ~ 1558, 스페인왕 카를 1세,신성 로마 제국 황제 재위 1519 ~1558)는 1521년 에르난 코르테스의 아즈텍 제국 정복과 1533년 프란시스코 피사로의 잉카 제국 정복 등으로 역사상 최대 영토를 이룩했다.
스페인은 아메리카 대륙의 식민지에서 수탈한 막대한 재화를 이용하여 16세기에서 17세기 중반까지 150년간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제국이 되었다.
신성로마제국(스페인)은 1531년 북아프리카의 튀니지와 오랑을 함락시켜 서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했으며 이탈리아를 차지하기 위한 프랑스와의 8차례에 걸친 이탈리아 전쟁(1454 ~ 1559)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하여 밀라노 공국과 나폴리 왕국 등 이탈리아 남부를 스페인령으로 만들었다.
스페인은 가톨릭 신앙을 중시하고 개신교도, 유대인, 무슬림을 탄압했다.
특히 펠리페 2세(Felipe II, 재위 1556 ∼ 1598) 시대에 더욱 심했다.
펠리페 2세는 영국왕 메리 1세의 배우자 필립으로서 잉글랜드 왕국의 명예왕이었고 스페인 최전성기의 통치자였으며 대표적인 절대군주였다.
펠리페 2세(Felipe II, 재위 1556 ∼ 1598)는 4번 결혼했는데 근친결혼으로 논란이 있었다.
포르투갈의 마리아 마누엘라(Maria Manuela de Portugal, 1527 ~ 1545, 1543년 결혼, 펠리페 2세의 4촌, 주앙 3세의 맏딸), 메리 1세(Mary I, 1516 ~ 1588, 영국 튜더 왕조 제4대 국왕 아일랜드 국왕 재위 1553 ~ 1558 , 1554년 결혼, 5촌, 헨리 8세의 딸), 엘리자베트 드 발루아(Élisabeth de Valois, 1545 ~ 1568, 프랑스, 1559년 결혼, 앙리 2세의 딸), 오스트리아의 안나(Ana de Austria, Anna, 1549 ~1580, 1570년 결혼, 펠리페 2세 여동생의 딸,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막시밀리안 2세의 딸)이다.
펠리페 2세(Felipe II, 재위 1556 ∼ 1598)는 1571년 레판토 해전의 승리로 오스만 제국의 지중해 진출을 저지했으며 1580년 포르투갈을 합병하였다.
그러나 펠리페 2세가 종교적으로 억압하고 전비를 충당하기 위해 가혹한 과세 정책을 펴자 이에 반발해 네덜란드에서는 독립전쟁(1567 ~ 1648)이 일어났다.
영국-스페인 전쟁(1585 ~ 1604) 중 1588년 스페인 무적함대가 원정한 칼레 해전에서 스페인은 영국에 패하였으나 1589년 영국이 남아있는 스페인군을 섬멸하기 위해드레이크-노리스 원정군을 스페인에 출정시켰으나 라코루냐(La Coruña) 항구에서 스페인군에게 대패하였다.
나. 1492년 스페인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의 신대륙 발견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 Cristóbal Colón크리스토발 콜론, 1451 ~ 1506)는 이탈리아의 제노바에서 직물 공인 스페인계 아버지 도메니코 콜롬보와 스페인계 유대인 어머니 수산나 폰타나로사 사이에서 태어났다.
두 동생(바르톨로메오 콜롬보와 지아코모 콜롬보)이 있었으며 이들은 모두 항해에 종사했다.
콜럼버스는 1476년 그의 나이 25세 때 상선에 승선하여 플랑드르(Flandre, 네덜란드, 벨기에)로 향했다. 그러나 항해 도중 포르투갈 앞바다에서 카스티야-포르투갈 전쟁(이사벨 1세와 질녀 후아나 사이에 일어난 카스티야 왕위 계승 경쟁에 후아나와 결혼한 후아나 외삼촌 포르투갈의 아폰수 5세와의 전쟁)에 말려들어 콜럼버스가 탄 상선에 불이 붙는 바람에 해안으로 탈출하여 리스본으로 갔다.
1477년 콜럼버스는 선원이 되어 삼각돛을 단 캐러벨(Caravel)을 타고 지중해의 여러 항구를 거쳐 항해하면서 항해술, 먼바다에 대한 정보를 얻었으며 그리고 틈틈이 라틴어와 에스파냐어를 배웠다. 이뿐만 아니라 해도 제작과 판매를 하면서 서쪽 항로 개척에 대한 열정도 키웠다.
특히 프톨레마이오스 클라우디오스(Ptolemaeus Klaudios, 83 ~ 161, 85 ~ 165, 고대 그리스 천문학자)의 지리서와 세계지도가 동양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하는데 크게 작용했다.
그리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BC 356 ~ BC 323)이 건설한 페르시아 제국은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하여 인도까지 점령하여 동방과 교역을 했다.
이어서 로마제국(BC 27 ~ 1453)이 들어서자 이란을 거쳐 인도까지 교역을 하였다. 이때 벌써 인도의 후추를 수입하였다.
그런데 이란 지역에 유목민들이 뭉쳐서 나라를 건립하자 로마는 더 이상 이란을 거처 인도로 가는 육로를 이용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배를 타고 홍해를 거쳐 인도로 가는 해로를 찾게 되었다. 인도양의 바람을 잘 이용하면 40일 만에 인도에 갈 수 있었던 것이다. 로마는 해로로 중국으로 가는 길을 개척하기 시작했다. 말레이시아 반도에 도착해 육로로 중국으로 들어가는 길을 개척하였던 것이다.
그리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관장이었던 프톨레마이오스 클라우디오스(Ptolemaios Klaudios, 83 ~ 168, 천동설)가 저술한 2세기경의 로마제국시대 지리서 속에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세계지도가 있다.
이 지도에는 인도양이 동쪽에 육지로 막혀서 끝나게 그려져 있다. 인도양 동쪽을 막고 있는 육지가 말레이시아 반도라는 것이다.
2세기에 그려진 이 지도에는 지중해 지역, 인도 지역이 현재의 지도와 거의 비슷하며, 중국은 비단의 나라(Seres, 세레스)로 표기되어 있다.
그 이후 사장되어 있던 이 지도가 15세기에 대유행하여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인쇄되었다고 한다.
1478년 콜럼버스는 능력을 인정받아 마데이라 제도의 포르트산드 섬의 초대 총독인 바르도로메우 페레스트레로(Bartolomeu Perestrello, 1395 – 1457)의 딸인 펠리페(Filipa Moniz Perestrelo, 펠리파 모니즈 페레스트렐로, 1455 ~ 1478, 1484)와 결혼하였다. 장인은 유명한 선장 출신이었으며 처가는 섬에서 수탕 수수 농장을 경영했다. 장인이 남긴 항해에 관한 모든 자료를 물려받았다. 여기에 대서양의 바람과 해류에 관한 소중한 기록이 있었다.
그 당시 유럽에서는 인도, 카다이(Kadai, Katai, Cathay, 거란에서 유래한 고대 중국 명칭, 마테오 리치가 china가 Cathay라는 것을 밝힘), 지팡구(Zipangu, 일본) 등이 알려져 동경의 대상이었으며 마르코 폴로(Marco Polo, 1254 ~ 1324, 베네치아 상인)의 동방견문록(Book of the Marvels of the WorldandIl Milione, c. 1300,세계의 불가사의, 마르코 폴로의 체험담을 루스티치아노 Rusticiano가 기록, 원나라의 도성, 자와 섬의 향신료, 중국의 차 세금,지팡구의 황금 등이 기록됨)에 의해 동방에는 금은보화가 많다고 알려졌었다. 특히 콜럼버스는 향신료뿐만 아니라 황금의 나라 지팡구(Zipangu, 일본)를 가야겠다는 욕망을 가졌다.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 1451 ~ 1506)는 여러 지리서를 읽었고 지도를 보았으며 1482 ~ 1483년에는 아프리카 서해안 남쪽을 항해하여 항해에 필요한 자료를 수집하였다.
먼바다 항해에 무역풍, 편서풍 등 바람을 이용할 수 있다는 것도 습득했다.
콜럼버스는 토스카넬리(Paolo Toscanelli dal Pozzo, 1397 ~ 1482, 이탈리아 피렌체의 천문학자, 대서양으로 건너가면 Spice Islands 몰루카로 갈 수 있다고 주장함)가 제작한 지도를 보고 지구는 둥글며 유럽에서 서쪽으로 계속 가면 인도에 닿을 수 있다는 생각을 확신했다. 그리고 지구는 6/7이 육지로 바다는 좁다고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바다로 건너가면 훨씬 빨리 인도에 도착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1484년콜럼버스는 카나리아 제도(Canary Islands)에 있는 라 고메라(La Gomera) 섬의 엘히에로(El Hierro) 주민들로부터 대서양 건너 서쪽에 섬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포세이도니우스(Posidonius BC 135~ BC 51)는 지구 둘레를 24만 stadia로 측정하였으나 스트라보(Strabo, BC64, BC 63 ~ BC24)는 포세이도니우스의 지구 둘레 추정치를 18만 stadia(2만 9천 km)로 잘못 기록해 놓았다.프톨레마이오스 클라우디오스(Ptolemaeus Klaudios, 83 ~ 165, 고대 그리스 천문학자)도 자신의 지리학에서 지구 둘레를 18만 stadia(실제보다 약 33% 짧음)로 기록해 놓았던 것이다.
크리스토퍼콜럼버스는 프톨레마이오스가 기록한 지구 둘레가 18만 stadia로 2만 9천 km(아리스토텔레스 BC 384 ~ BC 322 40만스티아약 70,000㎞, 에라토스테네스 EratosthenesBC273 ~ 192 25만 스타디아 약 46,000㎞, 포시도니우스 24만 스타디아 약 44,000㎞, 실제 지구 적도 둘레 약 40,000km, 1 stadion= 600ft= 180m이지만 지역마다 15% 가감하여 다르게 사용, 155 ~197m)라는 것을 믿었으므로 대서양 서쪽으로 항해하여 가면 인도에 가는 항해 길이 짧아 인도에 쉽게 도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대서양 서쪽으로 항해하기 위해서는 배와 많은 선원이 필요하고 그들이 오랫동안 배에서 생활하며 항해하기 위해서는 많은 돈이 필요하며 그리고 왕의 허락과 약속이 있어야 인도 발견 후의 권리와 지위를 보장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대서양 서쪽으로 항해하는데 필요한 재정적 지원과 권한을 줄 수 있는 국가를 찾게 되었다.
1484년 콜럼버스는 포르투갈 왕 주왕 2세(John Ⅱ, 1455 ~ 1495)에게 포르투갈에서 대서양을 서쪽으로 계속 가면 인도에 닿을 수 있다고 설명하며 인도로 항해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을 요청했으나 주왕 2세는 이슬람을 비밀리에 거쳐가거나 아프리카 서쪽 남단을 횡단하여 인도로 가는 탐험 계획을 가지고 있었고 또 콜럼버스의 요구조건(인도 총독, 산물의 1/10 요구)이 과하다고 생각하여 거절하였다.
이때쯤에 콜럼버스의 부인 펠리파(펠리파 페레스트렐로 에 모니즈)는 아들 디에고 콜론(Diego Colon, Diego Columbus, 1480 ~ 1526, 1510 ~ 1512년 히스파니올라섬의 총독-아이티 토미니카, 인도제국 2대, 4대 총독) 하나를 남기고 죽었다.
1486년 콜럼버스는 스페인(에스파냐)으로 건너가 이사벨 여왕(IsableI, 재위 1474 ~ 1504, 카스티야의 여왕)에게 대서양을 건너 인도를 탐험하는 항해를 지원해 줄 것을 설득했으며 이에 스페인의 이사벨 여왕은 관심을 나타냈으나 국토회복 전쟁 중이고 콜럼버스가 설명하는 인도 탐험이 성공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워 승낙하지는 않았다. 이어서 프랑스, 영국에서도 거절당했으며 포르투갈에 재차 거절당했다.
콜럼버스는 스페인에 거주하는 동안 제노바 약종 상인과 어울리며 지원을 받았고 디에고 데 아라나(Diego de Arana, 1468 ~ 1493, La Navidad 스페인 최초 총독, 콜럼버스와 같이 1차 원정 후 총독으로 남아 있다가 원주민에 의해 피살)를 만났다.
1487년 디에고 데 아라나(Diego de Arana)는 그의 사촌인스페인 출신의 비트리즈 엔리케스 데 아라나(Beatriz Enriquez de Arana, 1465 ~ 1521)를 콜럼버스에게 소개했다.
1488년 혼외의 페르디난드 콜럼버스(Ferdinand Columbus=Fernando Colon, 1488 ~ 1539, 서지학자, 콜럼버스 전기 저자)가 출생했다. 그의 어머니인 비트리즈 엔리케스 데 아라나(Beatriz Enriquez de Arana, 1465~ 1521)는 콜럼버스와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안주인으로서 오랫동안 정신적 물적 지원을 한 동반자였다.
콜럼버스는 스페인에 머물면서 이사벨 여왕(IsableI, 재위 1474 ~ 1504, 카스티야의 여왕)을 설득하기 위해 다시 만날 수 있도록 수도원의 수사와 원장을 통해 집요하게 노력하였다. 수도원의 성직자들도 선교를 할 수 있는 더 넓은 땅을 원했기 때문에독실한 기독교인인 콜럼버스를 지원하고 여왕을 설득했던 것이다.
여왕은 위원회를 조직하여 콜럼버스의 제안을 논의하도록 하였으나 위원회는 지구 둘레 등 콜럼버스의 설명이 의문스러워 납득할 수 없다고 했다.
1492년 스페인은 남부의 그라나다(Granada)를 함락시키고 국내 통일을 완성하였다.
이때에 포르투갈은 이미 희망봉(1488년)을 발견한 후였다. 스페인의 이사벨과 페르난도 부부는 해외진출에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또 스페인의 해외 진출이 포르투갈에 뒤졌다고 생각하였으므로 여왕의 행정업무담당자인 루이스 데 산탄 겔(Luis de Santángel)의 의견에 따라 콜럼버스가 6년 동안 줄기차게 제안한 계획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여왕은 인도로 가는 새로운 항로가 개척되면 엄청난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이사벨 여왕은 1492년 4월 콜럼버스와 산타페 협약(Santa Fe Capitulations)을 맺었는데 내용은 ‘항해에 필요한 모든 지원을 하고 콜럼버스는 새로 발견한 지역의 총독(viceroy)으로 임명될 것이며, 이 직책과 특권(산물의 1/10, 교역의 1/8)은 자손에게 계승한다’는 것이었다.
귀족들이 재정 문제로 지원을 반대하였지만 이사벨 여왕은 항해에 필요한 선박 핀타호(Pinta, Caravel 선, 적재능력 60t, 길이 17m. 너비 5.4m,흘수(吃水) 2.3m, 승선인원 26명)와 니냐호(Niña, Caravel 선, 적재능력 50t, 길이 15m, 너비 4.9m,흘수(吃水) 2.1m, 승선인원 24명) 2척을 내주었다. 핀타호와 니냐호는 캐러벨이었으며 캐러벨은 어선을 원형으로 하여 소형으로 무게가 가볍고2 ~ 3개의 돛대에 돛을 달아 고속으로 먼 거리를 항해할 수 있도록 포르투갈에서 개발되었다.
흘수(吃水, draft)를 작게 만들어 배가 바닷물에 적게 잠기도록 함으로써 수심이 얕은 해안을 따라 항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항해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선원을 쉽게 모집할 수 있도록 선원으로 지원하는 사람은 과거의 모든 죄를 면죄(免罪)한다는 특혜를 주었다.
그리고 콜럼버스는 안 데 라코사(Juan de la Cosa, 1450 ~ 1510)에게 징발하여 계약한 산타마리아호(SantaMaria, 카라크선 carrack, 적재량 100~150t, 길이 23m,너비 7.5m,흘수(吃水) 1.8m, 돛대 3개, 승선인원 40명, 정확한 기록 없음)를 기함으로 삼았다.
산타마리리아호는 카라크(carrack, 나우 nau)이며 카라크(carrack)은 캐러벨(Caravel)을 크게 만든 것으로 2개의 갑판과 2~4개의 돛대를 가진 범선으로 캐러벨보다 많이 싣고 편안하였다.
여기에 팔로스(Palos) 최고의 선원인 마르틴 알론소 핀손(Martín Alonso Pinzón, 1441 ~ 1493)과 비센테 야네스 핀손(VicenteYáñezPinzón, 1462 ~ 1514) 두 핀손 형제가 참여하였다. 이들 형제의 도움으로 의사, 목수, 은세 공사, 에스파냐 황실의 사절, 아랍어 통역사까지 모두 90명의 선원들을 모았다.
콜럼버스 원정의 재정(財政)은 세비야에 거주하는 제노바 귀족 은행 7개가 연합하여 담당했다. 아메리코 베스푸치(Américo Vespucci, 1451~1512)는 콜럼버스의제1, 2차 항해를 주관한 세비야의 주오나토 베라르디(Jionato Verardi) 상사에 근무했다.
1492년 8월 3일, 콜럼버스는 두 동생 바르톨로메오와 지아코모와 함께 이탈리아인, 스페인인, 영국인, 그리고 유태인으로 구성된 90명의 선원들을 실은 산타마리아호, 핀타호, 니냐호를 이끌고 희망에 부풀어 바르셀로나 팔로스(Palos) 항을 출발하였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가 승선하여 지휘한 산타마리아호(SantaMaria)는 소유주인 안 데 라코사(Juan de laCosa, 1450 ~ 1510, 항해사, 지도제작자)가 선장이었으며 핀타호는 마르틴 알론소 핀손(Martín Alonso Pinzón, 1441 ~1493, 선원, 탐험가)이, 니냐호(Niña)는 비센테 야네스 핀손(Vicente Yáñez Pinzón, 1462 ~ 1514, 선원, 탐험가)이 선장이었다.
콜럼버스 선단은 먼저 남서쪽으로 내려가 무역 풍대에 속한 북아프리카의 카나리아 제도(The Canary Islands, Las Islas Canarias 라스 이슬라스 카나리아스, 카스티야 왕위 계승 전쟁 결과로 맺은 알카소바스 조약으로 스페인 령이 됨, 사탕수수 주산지였음)에 도착했다. 서쪽으로 바로 가는 것이 아니고 남서쪽의 카나리아 제도로 내려가 식수, 식량 등 보급품을 공급받고 북동 무역풍을 이용해 대서양을 건너려고 했던 것이다.
8월 6일 핀타호의 방향타(ruder, key, rudder, helm, wheel)가 부러져 밧줄로 묶어 항해했다. 선장인 마르틴 알론소 핀손(Martín Alonso Pinzón)은 이 항해에 두려움을 가진 선원이 항해를 방해할 목적으로 고의적으로 파손했다고 의심했다. 또 대서양을 서쪽으로 바로 항해하지 않고 남서쪽으로 항해하는데 대한 불만을 가진 선원들이 배를 파손시켰다는 설이 있다.
카나리아 제도에서 3주 동안 머물면서 사탕수수 농장주들의 지원을 받았으며 파손된 배도 수리하고 보급품을 실은 다음 9월 6일 북동 무역풍을 이용하여 대서양 서쪽으로 항해하였다.
그런데 계획했던 항해보다 길어지자 선원들의 불만이 점점 커져 되돌아가야 할 극한 상황까지 이르렀다.
그리던 중 더디어 69일간(카나리아 제도 출항 후 36일)의 항해 끝에 10월 12일 핀타호의 선원 로드리고 데 트리아나(Rodrigo de Triana, 1469 ~?)가 처음으로 육지를 발견했다.
도착한 곳은 원주민들이 ‘과니하니(바하마 군도의 한섬)’라고 부르는 섬이었는데, 콜럼버스는 그 섬을 ‘산살바도르(San Salvador, 성스러운 구세주)’라 이름 붙였다
두 번째로 발견한 섬이 오늘날의 쿠바였으며, 세 번째로 발견한 섬이 히스파니올라 섬(Hispaniola, Hispaniola 이스파니올라 섬, La Española 에스파뇰라 섬, 아이티와 도미니카 공화국)이었다. 이렇게 서인도 제도 일대를 탐험하였다. 이와 같이 콜럼버스가 처음 도착한 곳은 인도가 아니라 지금의 중앙아메리카에 있는 서인도 제도였다.
아메리카 대륙이 신대륙이라는 사실이 확인된 것은 1513년에 발보아(Balboa, 1475 ~1519, 스페인)가 파나마 지협을 도보로 횡단한 끝에 태평양을 발견한 것이다.
항해 중의 식량은 절임 대구와 하몽(Jamon, 돼지 뒷다리의 넓적다리를 통째로 잘라 소금에 절여 건조, 숙성시킨 스페인의 생햄)이었다.
1492년 크리스마스날 밤 산타마리아호가 서인도의 히스파니올라섬(아이티)을 이동하던 중 모래톱에 좌초하여 움직일 수 없게 되자 급히 히스파니올라섬(아이티)에 라 나비다드(La Navidad, 성탄절)라는 식민지를 건설하고 디에고 데 아라나(Diego de Arana, 1468 ~ 1493)를 라 나비다드(La Navidad)의 스페인 최초 식민지 총독으로 임명하였으며 39명의 선원을 식민지 지배자로 잔류시켜 놓고 귀국하였다.
스페인으로 돌아올 때는 먼저 북동쪽으로 항해하여 편서풍대에 들어간 다음 편서풍을 이용하였다.
콜럼버스는 나쁜 날씨 때문에 포르투갈의 항구에 먼저 기착했으므로, 주앙 2세는 스페인의 이사벨 1세보다 더 빨리 그의 성공 소식을 알았다.
1493년 3월 15일 그는 향신료 대신 금속 제품, 앵무새, 담배 등 신기한 물건들과 원주민 6명을 데리고 바르셀로나 팔로스(Palos)항으로 돌아왔다. 콜럼버스는 스페인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서인도에 금은보화가 많다고 사전에 편지로 보고하였으므로 이사벨 여왕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이어서 총독으로 임명된 콜럼버스는 1493년에 제2차(1493 ~ 1495) 서인도 항해를 하였다. 제2차 항해에서 가톨릭 포교, 무역 전진 기지 건설, 금광 발굴과 식민지를 개척하기 위해 서인도에 금은보화가 많다는 선전을 하였으며 이에 현혹되어 참가한 1,200여 명(대부분 금광을 케는 사람)을 17척의 배에 싣고 항해하여 처음과 같은 지점에 도착했으나 식민지 거류민으로 잔류시켜 놓았던 39명은 원주민과의 싸움으로 모두 죽고 없었다. 다시 히스파니올라 섬(아이티, 도미니카)에 이사벨라(Isabella)를 건설하고 원주민들에게 공납과 부역을 명했다. 원주민을 동원하여 금을 채굴하였으나 산출량이 보잘것이 없자 원주민이 가진 금제품 등을 수탈하고 원주민을 학살했으며 서인도를 삿삿이 탐험했으나 후추 산지, 금은광산 등을 찾지 못하고 대신에 원주민 500여 명을 유럽으로 끌고 와 노예로 파는 등 많은 문제를 일으켜 1496년에 비난을 받고 문책을 당했다. 또 농장을 경영하기 위해 여러 종류의 종자를 가지고 갔다. 그중에 카나리아 제도(아랍인에 의해 사탕수수 재배)에서 가져간 사탕수수 종자도 있었다. 에스파뇰라(현재의 아이티, 도미니카)에서 사탕수수 재배에 알맞은 지역을 찾았다. 콜럼버스 처가가 아프리카 마데이라 제도(엔히크 왕자 개척)에서 사탕수수 농장을 소유하여 경영했으므로 콜럼버스는 사탕수수의 재배에 적합한 땅을 쉽게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때부터 중남미에 사탕수수가 재배되었던 것이다(후에 프랑스령이 된 아이티는 사탕수수 노예 농장이 주 수입원이 됨).
제3차 항해 이후에는 재정적 지원과 참가자가 점점 줄어들었다.
1498년 제3차 탐험(1498 ~ 1500)에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6척의 선단을 이끌고 출발하여 3척은 히스파니올라 섬(Hispaniola)에 보급품을 운송하고 3척은 남쪽으로 탐험을 하여 1498년 8월 4일~12일 사이에 트리나드 섬(Trinidad)의 맞은편에 있는 베네수엘라의 오리노코강(Orinoco River)을 탐험함으로써 아메리카 대륙을 처음 발견하였고 최초로 상륙한 유럽인이 되었다.
콜럼버스는 제2차 항해에서 히스파니올라 섬의 파괴된 나비다드(Navidad) 대신에 이사벨라(Isabella)라는 새로운 식민지를 건설하여 바르톨로메오콜럼버스(Bartolomeo Columbus, 1461 ~ 1515, 콜럼버스 동생, 1494 ~ 1500통치자,1496 ~ 1498 제1대 총독)에게 통치를 위임하였다. 하지만 곧 원주민들의 반란이 일어났으며 1496년 누에바 이사벨라(NuevaIsabella, 산토도밍고)에 정착촌을 건설하여 옮겼으나원주민들의 반란으로 식민지가 더욱 혼란하게 되자 콜럼버스는 총독직에서 해임되고 형제는 본국에 송환되어 감옥에 갇혔다가 후에 사면되었다.
이에 스페인은 새 총독을 임명하였다.
콜럼버스 후임으로 니콜라스 데 오반도(Nicolas de Ovando, 1451년경? ~ 1518, 1501 ~ 1509 히스파니올라섬의 제3대 총독)가 1501년 9월에 히스파니올라의 총독에 임명되어 1502년에 부임하였다.
그리고 이때에 콜럼버스의 제1, 2차 항해에 동행했던 로드리고 데 바스티다스(Rodrigo de Bastidas, 1465 ~ 1527)가 황실의 허가를 얻어 후안 데 라 코사(Juan de laCosa, 1450 ~ 1510, 산타마리아 호 선장, 지도 제작자), 발보아 등과 함께 1500년 독자로 원정하여 1501년에 파나마를 발견하였다. 이어서 콜럼버스가 1502년 파나마 지협(地峽)을 탐험하였으며 1513년 발보아(Vasco Nunez de Balboa, 1475 ~ 1519)가 지협(地峽)을 횡단하여 태평양을 발견하였던 것이다.
이때 아메리코 베스푸치(Américo Vespucci, 1451~1512)는 1499년 5월부터 1500년 6월 사이에 알론소 데 오제다(Alonso de Ojeda, 1466 ~ 1515, 스페인 탐험가) 탐험대에 승선하여 가이아나(Guyana) 해안 탐험과 남쪽으로 내려가 아마존 강의 하구 탐험에 참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포르투갈의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 1469 ~ 1524)가 1497년에 출발하여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 1498년에인도 탐험에 성공하자 이에 자극을 받은 이사벨 여왕이 콜럼버스에게 말라카 해협(Straits of Malacca)을 찾도록 제4차 항해(1502 ∼ 1504)를 허가했다. 그러나 콜럼버스는 총독이 아니라 단지 탐험가로 배 4척의 선단(승선인원 140명)을 이끌고 원정하게 되었으며 새로 임명된 니콜라스 데 오반도(Nicolas de Ovando, 1451년경? ~ 1518) 총독의 시기로 히스파니올라 섬(Hispaniola)에는 상륙도 못하였지만 1502년 온두라스, 니카라과, 코스타리카와 파나마 지협(地峽)을 발견하였다.
1503년 6월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탐험을 위해 쿠바 해안을 항해하던 중 허리케인에 배가 파손되어 자메이카에 묶였으며 부하를 보내어 니콜라스 데 오반도(Nicolas de Ovando, 1451년경? ~ 1518) 총독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도움을 받지 못해 1년 동안 고립되었다가 돌아왔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파나마 지협(地峽)을 발견하고는 말라카 해협(Straits of Malacca)을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지만 찾지 못했고 선원과 배만 잃었다. 결국 콜럼버스는 제4차 항해에서 경제적 이익은 고사하고 손실만 입어 곤란한 처지에 빠졌던 것이다.
콜럼버스는 끝까지 신대륙을 인도라고 생각하였다.
1504년 후원자인 이사벨 여왕(IsableI, 재위 1474 ~1504, 스페인 카스티야의 여왕)이 죽고 왕위는 후아나(Juana, 1479 ~ 1555, 이사벨과 페르난도 2세 사이의 둘째 딸, 남편 펠리페 1세, 아들 카를로스 1세, 정신병)가 계승하였으나 통치에 분란이 일어났으며 실세가 된 페르난도 2세(스페인 아라곤의 왕, 1452~1516)는 콜럼버스를 지원하지도 않았고 원정을 승인하지도 않았으며 만나 주지도 않았다. 콜럼버스를 비난하는 여론이 들끓었기 때문이다.
세계사적 도전과 모험가인 콜럼버스는 소외된 채 멸시와 조롱으로 얻은 화병과 고질병으로 발라돌리(Valladolid, 스페인의 북서부 레온에 있는 도시)에서 1506년, 55세로 쓸쓸히 일생을 맞혔다. 발라돌리드(Valladolid)에 이어 세비야에 묻혔던 콜럼버스의 유해는 1542년 콜럼버스의 유언에 따라 그가 처음 도착하여 건설한 히스파니올라 섬(Hispaniola, Hispaniola 이스파니올라 섬, La Española 에스파뇰라 섬, 아이티와 도미니카 공화국)의 산토도밍고 성당에 안치되었으나 히스파니올라섬을 프랑스가 점령하자 1795년 쿠바의 아바나(현재도 묘가 있음)로 이장되었다. 쿠바가 독립하자 1899년 스페인 사람들은 위대한 그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스페인(에스파냐) 남부에 위치한 세비야 대성당에 네 지방을 상징하는 4명이 받치고 있는 네모난 관을 만들어 이장하였다. 그런데 콜럼버스 묘의 진위 논란이 150년 동안 지속되었다. 산토도밍고 성당에 안치되었던 유골이 아바나로 이장된 후인 1877년에 산토도밍고 성당의 무덤에서 '대단하고 뛰어난 사람 크리스토발 콜론 경(스페인어:Cristóbal Colón크리스토발 콜론, Christopher Columbus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이라고 쓰인 납으로 된 관이 발견되었는데이 관 속에는 13개의 큰 뼈 조각과 28개의 작은 뼈 조각이 들어있었다.
그래서 도미니카 공화국 사람들은 이장한 뼈는 가짜이거나 일부이고 히스파니올라 섬(아이티, 현재 도미니카 공화국)에 있는 묘가 진짜라고 주장하였지만 DNA 검사로 사실이 아닌 것이 밝혀졌다.
콜럼버스와 이사벨 여왕 사이에 맺은 조약은 파기되었지만 콜럼버스의 동생 바톨로 콜럼버스(Bartolomeo Columbus, 1461 ~ 1515, 정착촌 이사벨라 위임 통치)는 1496년 히스파니올라섬에 식민도시 누에바 이사벨라(NuevaIsabella, 산토도밍고)를 건설했으며 콜럼버스 아들 디에고 콜론(Diego Colon, 디에고 콜럼버스, 1480 ~ 1526)은 히스파니올라섬(서인도 제도)의 초대 총독(1510 ~ 1512)이 되었으며 인도제국 2대,4대 총독이 되었다.
콜럼버스라는 모험가의 노력에 의해 신 대륙이 발견됨에 따라 원주민은 유럽인들로 인해 말로 할 수 없는 피해를 당하였고 천연두 등 질병이 전해져 수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스페인은 금은보화 등을 약탈하여 부를 누렸으며 유럽은 그 뒤를 이어 많은 탐험가, 정복자, 개척자들의 노력으로 신세계를 열었던 것이다.
그리고 옥수수, 감자, 고구마, 땅콩, 고추, 토마토, 호박, 코코아, 아보카도, 담배, 고무나무, 바닐라, 칠면조, 밍크, 알파카 등 남미의 수많은 동식물이 유럽으로 유입되었으며 아메리카에는 소, 돼지, 밀, 목화, 사탕수수, 포도, 커피, 오렌지, 레몬, 바나나 등 많은 동식물이 전해져 생산됨에 따라 두 대륙에서는 식량 증산과 식품이 풍요해졌다.
처음에는 금은보화에 관심이 집중되었지만 이어서 유럽에 없는 식물종의 탐사에 노력했다. 남미 등에서 새로 발견한 식물이 금은보화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탐사가는 다음과 같다.
히폴리토 루이스 로페스(Hipólito Ruiz López, 1754~ 1816,식물학자, 스페인)와 호세 안토니오 파본 히메네스(José Antonio Pavón Jiménez, 1754 ~ 1840, 식물학자, 스페인)는 스페인 카를로스 3세(Carlos III)의 지원을 받아 1777 ~ 1788 기간 동안 페루와 칠레의 식물을 탐사했다.
호세 셀레스티노 무티스(Jose Celestino Mutis, 1732 ~ 1808, 스페인 식물학자)는 카롤로스 3세(재위 1759 ~ 1788, 스페인)의 지원을 받아 1783년부터 25년 동안 남미에서 5천 여종의 식물 신종을 발견하였다.
태평양을 일곱 번 항해하고, 오스트레일리아 동해안에 도달하였으며, 하와이 제도를 발견한 제임스 쿡(James Cook, 1730 ~ 1779, 영국의 탐험가, 항해사, 지도 제작자)의 영향을 받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하인리히 알렉산더 폰 훔볼트 남작(Friedrich Wilhelm Heinrich Alexander Freiherr von Humboldt, 1769 ~ 1859, 독일, 탐사가,지리학자)은 자비를 들여1799 ~ 1804 동안 남미의 생물과 지리를 탐사하여3천6백 여종의 식물을 발견하였다.
훔볼트는 무티스(Jose Celestino Mutis, 1732 ~ 1808, 스페인 식물학자)가 발견한 기나나무(키나나무, quinine tree, 幾那樹) 종이 말라리아에 특효였으나 기나나무(quinine tree) 종이 다양하여 어느 종이 약효가 있는지 알 수 없던 것을 구별하여 찾아냄으로써 현대의 말라리아 특효약인 키니네(퀴닌, Quinine)를 생산할 수 있게 되었으며 전기뱀장어를 산체로 잡아 생물전기 존재를 실험으로 확인했다. 또 남미 안데스의 큰 독수리인 콘도르(condor)는 수목한계선(1,000 ~ 3,500m) 이상에서도 서식한다는 것을 알아냈던 것이다.
이렇게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은 그 효과를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크다. 이들 두 대륙간의 동식물 전파를 콜럼버스의 교환(Columbian Exchange)이라고 한다.
다. 포르투갈과 스페인 간의 식민지 분쟁(1494년 토르데시아스 조약, 1529년 사라고사 조약)
콜럼버스가 대서양 서쪽으로 항해하여 신대륙을 발견한 것은 포르투갈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인도를 선점하는데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포르투갈의 주앙 2세(John Ⅱ, 1455~ 1495)는 콜럼버스가 새로 발견한 섬들이 엔히크 왕자가 발견한 포르투갈 영토인 아조레스 군도(Azores Is., 북대서양 중부, 1427년 발견, 서경 29도)와 가깝고 1456년 교황 갈리스토 3세(Papa Calixtus III, 로마 제209대 교황)의 칙서에서 기니(Guinea)와 카보 보자도르(Cabo Bojador) 남쪽에서 발견되는 모든 땅은 포르투갈이 권리를 가진다고 하였으므로 콜럼버스가 발견한 섬들은 위도상 카보 보자도르의 아래에 있으므로 섬들이 포르투갈 땅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포르투갈과 스페인 두 나라는 영토분쟁을 막기 위해 1494년 교황 알렉산드로 6세(214대, Papa Alessandro VI, 재위 1492 ~1503)에게 중재를 신청하였다. 스페인 출신으로 최근에 스페인의 지원으로 선출된 교황 알렉산드로 6세는 스페인에 유리한 경계선을 그었다. 이에 불만을 가진 포르투갈은 스페인에게 직접 협상할 것을 요구했다. 포르투갈은 스페인이 협상에 응하지 않으면 전쟁을 하겠다는 선포를 하였고 스페인은 이슬람과의 전쟁이 겨우 몇 년 전에 끝나 다시 전쟁을 할 수는 없어서 협상에 임했다. 협상 결과 현대 지도상의 약 서경 46도 37분에 선을 긋고 이 선의 서쪽에서 발견되는 땅은 스페인이, 동쪽에서 발견되는 땅은 포르투갈이 차지하도록 하는 토르데시야스 조약(Treaty of Tordesillas)을 맺게 되었다.
그 후에 포르투갈이 브라질을 발견했을 때 토르데시아스 선이 브라질에 걸쳐있어 브라질은 포르투갈의 식민지가 되었고 브라질 서쪽에 위치한 땅들은 스페인의 식민지가 되었다.(이 조약을 맺을 때 포르투갈은 이미 브라질(서경 33도 ~ 73도)을 발견해 놓았기 때문에 경계를 서쪽으로 더 넓히려 했다는 설도 있다.)
얼마 후 페르디난드 마젤란(Ferdinand Magellan, 1480 ~ 1521)이 세계일주를 하자 스페인과 포르투갈 사이에는 지구 반대편인 태평양에서 다시 식민지 경계 문제가 발생하였는데 1529년 사라고사 조약(Treaty of Saragossa)을 또 맺어 동경 142도를 경계로 서쪽은 포르투갈, 동쪽은 스페인의 영역으로 정하였다.
라. 1507년 신대륙을 아메리카로 명명
아메리고 베스푸치(Amerigo Vespucci, 1454 ~1512)는 이탈리아 토스카나주 피렌체 출생으로 1497 ∼1503년에 걸쳐 신대륙을 여러 번 항해하였다고 주장했다(뒤에 의문시되는 자료가 발견됨).
메디치가(Medici family, 15 ~ 17세기 피렌체를 지배했던 가문)의 사무원인 아메리고 베스푸치는 스페인에 파견되었다. 스페인에서 세비야의 주오나토 베라르디 상사로 옮겨 근무했는데, 이 상사는콜럼버스가 1차·2차 신대륙 항해를 준비한 곳이다.
아메리고 베스푸치는 1497년첫 신대륙 탐험을 하였으며 1499년에는 1499년 5월부터 1500년 6월 사이에 알론소 데 오제다(Alonso de Ojeda, 1466 ~ 1515, 스페인 탐험가) 탐험대에 승선하여 신대륙의 북위 15°지점에 도착하여 가이아나(Guyana) 해안을 탐험하였고 남쪽으로 내려가 브라질의 아마존 강 하구 탐험에 참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1503년 발행되어베스트셀러가 된 소책자 '신세계(theNew World)'와 1505년경 발간된 '4회의 항해에서 새로 발견된 육지에 관한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서한'등에서 콜럼버스가 발견한 곳이 인도가 아니라 신대륙이라는 주장을 했다.
1507년 독일의 지리학자 M. 발트제뮐러(Martin Waldseemüller, 1470년 경 ~ 1520)와 마티아스 링만(Matthias Ringmann, 1482 ~ 1511)은 여러 사람으로부터 자료를 수집하여 쓴 '우주론 입문 (Cosmographiae Introductio, 1507)'에서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보낸 자료를 보고 그가 신대륙을 발견하였다고 생각하였으며 그래서 그의 자료를 바탕으로 지도에 아메리카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사용했는데 이것이 뒤에 널리 사용되었다.
아메리카가 신대륙이라는 사실이 확인된 것은 1513년에 발보아(Balboa, 1475 ~ 1519, 스페인)가 파나마 지협을 도보로 횡단한 끝에 태평양(남해 South Sea라고 명명)을 발견한 것이다.
3. 포르투갈의 인도항로 개척
가. 1497년 포르투갈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1469 ~ 1524)의 인도 항로 개척
1488년 항해사 바르톨로뮤 디아스(Bartolomeu Dias,1450 ~ 1500)가 희망봉을 발견(주앙 2세, 1481 ~ 1495)하였으나 1486년 육로로 인도를 탐험하도록 보냈던 쿠비양(Pero Da Covilha, 1460 ~ 1526)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던 중 주앙 2세(John Ⅱ, 재위 1481 ~ 1495)가 1495년에 죽었다.
포르투갈에서는 육로로 인도와 무역하는 방법을 찾는데미련을 두고 있는 가운데 스페인이 후원하여 1492년 콜럼버스가 인도(신대륙)를 발견하였고 그리고 프레스터 존이라는 나라는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어 미지의 세계에 대한 탐험이 주춤해졌던 것이다.
그래도 포르투갈의마누엘 1세(Manuel I de Portugal, 재위 1495 ~ 1521)가 즉위한 후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로 가는 원정대를 다시 조직하고 책임자로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 1469 ~ 1524)를 임명하였다.
1497년 7월 8일 바스코 다 가마는 168명의 선원을 120톤급의 캐랙 범선 2척과 50톤급 캐러벨 범선 1척, 보급선 1척에 태우고 리스본을 떠나 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인도로 향했다.
이 항해에 동행한 바르톨로뮤 디아스(Bartolomeu Diaz (Dias), 1450~ 1500, 포르투갈, 희망봉 발견)는 서부 아프리카 해안을 남하할 때 연안을 따라가지 말고 대서양 바다 가운데로 멀리 돌아갈 것을 조언했다.
그렇게 항해한 바스코 다가마의 선단은 기니만의 무풍지대와 해안의 무역풍 맞바람을 피해 비교적 순조롭게 아프리카의 최남단까지 도달하였다.
바스코 다 가마는 1497년 11월 22일 희망봉을 돌아 아프리카 동쪽 연안을 따라 북상하여 모잠비크, 몸바사를 경유해 다음 해인 1498년 4월 케냐의 말린디(Malindi)에 도착했다.
바스코 다 가마는 이곳에서 이슬람의 항로 안내자 이븐 마지드(Ahmad Ibn Majid, 1421 ~ 1500, 아랍 항해가, 아랍 해양탐험가)의 안내로 순풍을 받아 인도양을 23일 만에 건너 1498년 5월 20일 인도의 캘리컷(Calicut, 현재의 코지코드)에 도착하였다. 이로서 포르투갈과 인도 사이의 항로가 최초로 개척되었다.
바스코 다 가마는 캘리컷의 힌두 통치자 사마린(Samarin, Samudiri, Zamorin)을 만나 가져간 외투, 모자, 현악기, 방울, 산호, 설탕 등으로 교역을 요청했지만 그들은 금을 요구했다. 그 당시 중국과 유럽은 은을 화폐로 사용하였고 이슬람은 아프리카와 페르시아에서 많이 생산된 금을 화폐로 사용하였던 것이다.
당시 문명이 훨씬 발달된 이슬람권과 무역을 하던 캘리컷 사람들에게 바스코 다 가마 선단이 가져온 물건들은 수준이 너무 낮아 무역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정식 통상교섭은 난항을 거듭하여 조약도 맺지 못하였고3개월 만에 겨우 약간의 향료를 입수하였다.
바스코 다가마의 포르투갈로 돌아오는 길은 무척 험난했다. 인도로 갈 때는 인도양을 순풍으로 23일 만에 건너갔지만 돌아오는 길은 역풍이라 인도양을 건너는데 3달이나 걸렸다.
오랜 항해로 선원들의 영양상태가 악화되어 괴혈병(모세혈관이 터져 출혈이 일어나는 병, 비타민C 부족이 원인, 60일 이상 신선한 채소 불 섭취 시 발생함)이 발생하여 수많은 선원이 죽었다. 1499년 리스본에 도착했을 때 살아서 돌아온 선원은 떠날 때의 1/3 정도인 55명이었다.
포르투갈 왕 마누엘 1세(Manuel I de Portugal, 재위 1495 ~ 1521)는 바스코 다가마가 무역으로는 별 성과를 얻지 못했지만 인도로 가는 항해 길을 개척한 공으로 그를 대 환영했다. 그리고 왕은 바스코 다가마에게 귀족의 작위를 내리고 인도양의 제독이라는 칭호도 하사하였다.
나. 1500년 포르투갈 카브랄의 브라질 발견
1500년 마누엘 1세(Manuel I de Portugal, 재위 1495 ~ 1521)는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 1469 ~ 1524)가 1497년 인도 항로를 개척함에 따라 1500년에 카브랄(Pedro al vares cabral, 페드로 알 바르로스 카브랄, 1468 ~ 1520)이 이끄는 13척으로 구성된 2차 인도 항해 선단을 보냈다.
카브랄 선단은 1차 선단과는 달리 해풍을 이용하기 위하여 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내려가는 것이 아니고 대서양 가운데까지 남서 진하여 내려간 다음 북동 진하여 희망봉을 돌아가는 항해를 하였다.
그래서 카브랄과 바르톨로뮤 디아스(희망봉 발견)는 좀 더 서쪽으로 항해하게 되어 남아메리카 대륙의 브라질을 발견하였던 것이다. 오늘날의 포르투세구루(Porto Seguro, 브라질 동북부)와 가까운 브라질 해안에 상륙했는데 대륙이 아니라 섬이라 생각했다.
카브랄은 새로 발견한 브라질을 포르투갈의 식민지로 선포하고 수송선 한 척을 포르투갈로 보내어 왕에게 보고했다.
그런데 포르투갈이 1496년 토르데시아스 조약(treaty of Tordesillas)에서 서쪽으로 더 멀리 경계를 원했던 이유가 브라질을 먼저 발견하고는 숨기고 있었다는 것이다.
스페인은 1492년 콜럼버스가 서인도를 발견한데 이어서 1498에는 베네수엘라를 발견하여 1499년에 점령하였다. 그래서 1500년 카브랄의 브라질 발견은 먼저 발견해 놓았던 것을 더 이상 숨길 수 없어 대외에 발표한 것이라고 의심받았다.
어쨌든 카브랄이 발견한 브라질(서경 33도 ~ 서경 73도)은 서경 46도선을 넘지 않았기 때문에 토르데시야스 조약(treaty of Tordesillas)에 위반되지 않아 포르투갈의 식민지가 되었던 것이다.
그 후 포르투갈은 서경 46도선을 넘어 내륙으로 진출하여 개척하였던 것이다. 포르투갈은 1580년에서 1640년까지 60년 동안 스페인에 합병되었기 때문에 토르데시야스 조약(treaty of Tordesillas)의 경계선이 사실상 의미가 없어져서 포르투갈이 경계선을 넘어 내륙으로 진출해도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카브랄은 처음 발견한 브라질에 열흘간 머문 후 인도로 향했다.
그런데 희망봉을 향해 대서양 가운데를 항해하던 중 폭풍을 만나 5척이 파손되고 1척은 멀리 표류하여 수많은 사람을 잃었다.
폭풍에 파손되지 않고 흩어졌던 6척의 배는 모잠비크 해협에서 모두 만나 다시 선단을 이룬 뒤 인도의 칼리코트로 향했다.
카브랄은 캘리컷(인도 남부 도시)에서 무역소를 설치하고 거래권 협상에 성공했지만 먼저 자리 잡고 있던 아랍의 이슬람 상인들은 자신들의 독점에 대한 위협으로 보고 무역소(재외상관)를 습격하였다.
이슬람 상인들의 공격을 받은 카브랄은 대포로 쏘아 진압하면서 초토화시켰다.
캘리컷에 개설했던 상관(商館 , 무역 거래소, merchant adventurer)이 습격당했을 때 50여 명의 포르투갈인이 사망했는데 이로 인해 4차 원정의 목표 중 하나는 캘리컷에 대한 응징이 되었다.
이어서 카브랄은 또 다른 인도의 도시 국가인 코친 왕국으로 항해했다. 카브랄은 코친 왕국의 통치자와 친해져 조약을 맺고 무역을 하게 되었다.
코친, 카나놀 등 각지에 상관(商館 , 무역 거래소, merchant adventurer)을 설치하여 인도와 포르투갈 간의 무역길을 열었다.
다량의 향신료, 도자기, 생강, 향목, 진주, 다이아몬드, 루비 등을 싣고 리스본으로 돌아왔다.
향신료로 얻은 엄청난 수익은 포르투갈의 재정을 뒷받침했다.
다. 포르투갈의 3차, 4차 인도 항해
마누엘 1세(Manuel I de Portugal, 재위 1495 ~ 1521) 때인 1501년 포르투갈의 주앙 다 노바(João da Nova, 1460 ~ 1509, 탐험가, 3차 원정 사령관)는 3차 인도 항해를 하였다. 그는 남대서양에서 어센션 섬(Ascension Island)을, 모잠비크 해협에서 주앙 다 노바 섬(Juan de Nova Island)을 발견하였으며 인도에 도착하여 칸누르(Cannanore)에 상관(商館 , 무역 거래소, merchant adventurer) 개설했다.
주앙 다 노바는 인도양의 캔나노어 항구(Cannanore harbor) 밖에서 벌어진 자모라가 지휘하는 켈컷 해군(배 220척)과의 전투에서 포르투갈 해군(Carrack 4척)의 첫 해전을 지휘하였다.
주앙 다 노바(João da Nova, 1460 ~ 1509)가 귀국(1502년 11월 귀국)하기도 전인 1502년 2월에 바스코 다 가마는 4차 인도 항해를 출발하였다.
4차 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 항해는 평화적인 인도 항해가 아니었다. 그들은 20척의 선단을 이끌고 인도로 갔으며 그 배에는 포와 총칼로 무장한 1,500명의 병사들을 싣고 있었다.바스코 다 가마는 외교적으로 무역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 인도 도착 이후 이슬람군과 벌인 해전에서 승리하고는 이교도들이 자행한 무역소 습격사건의 복수를 시작하였다.
무역을 뒷전으로 하고 약탈과 해적질을 했던 것이다.
먼저 인도 북부에서 이슬람 상선을 잡아 재물들을 빼앗은 후 배를 불태워 몇백 명에 달하는 사람들을 수장시키고 이슬람 상선을 상대로 해적질을 일삼았다.
이에 캘리컷의 통치자 사마린은 이슬람 세력과 연합하여 그에 맞섰지만 패배하였다.
포르투갈은 인도양의 제해권을 차지하였고 인도와의 독점 무역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할 수 있게 되었다. 바스코 다 감사는 이 일로 백작에 봉해지고 국왕의 인도 정책고문이 되었다.
그러나 이 같은 무력에 의한 인도와의 무역은 많은 문제를 발생시켰다. 그동안 인도와의 무역을 독점했던 이슬람 세력이 박탈감을 가지면서 갈등이 높아졌던 것이다. 여기다 인도 고유의 문화를 이해하지 못해 발생하는 인도인과의 문화적 갈등과 크리스트교를 포교하려는 신념 때문에 종교적 마찰도 잦았다.
바스코 다 가마는 20여 년이 지난 1524에 주앙 3세(João III, 1521 ~ 1557)에 다시 발탁되어 1차, 4차에 이어 본인의 3번째 인도 항해를 하였다.
바스코 다 가마는 마젤란(Ferdinand Magellan, 1480? ~ 1521)이 세계일주(1519 ~ 1522년)를 하는 등 스페인의 세력이 확장되자 인도의 중요성을 설파하였으며 인도 5대 총독인 두아르트 드 메네제스(Duarte de Menezes, 임기 1522 ~ 1524)가 무능하고 부패했다는 논란이 일어바스쿠 다 가마는 1524년 부왕(副王, Viceroy) 자격을 가지고 인도6대 총독(바스코 다 가마 Vasco da Gama, 임기 1524 ~ 1524)에 임명되었던 것이다.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는 인도에 도착하여 전임 총독을 체포하였다, 이어 부패를 추방하던 중에 말라리아에 걸려 코친에서 1524년에 사망했다
라. 1510년 포르투갈 알부케르크(Alffonso de Albuquerque)의 고아, 말라카, 몰루카, 호르무즈, 아덴 점령
포르투갈의 군인 출신 알부케르크(Alffonso de Albuquerque, 1453 ~ 1515)는 강력한 군대와 동양의 각 나라들의 분열을 이용하여 점령함으로써 동양의 식민지를 공고히 하고 오세아니아 동쪽까지 침략하여 향신료 무역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알부케르크(Alffonso de Albuquerque, 1453 ~ 1515)는 포르투갈 출신으로 1503년 인도에 파견되어 최남단의 인도의 코친 왕으로부터 근거지 설립의 허가를 얻었으며 1506년에는 다시 포르투갈을 출발하여 아프리카 동해안의 아랍인을 토벌하였다.
포르투갈이 인도에 진출한 이후 포르투갈인들은 주로 켈리컷(칼리코트)에서 활동하였지만, 구자라트 지역은 무역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지역으로, 구자라트족은 동서 무역의 필수적인 중개자로 중국에서 비단을 가져오고 몰루카에서 향신료를 가져와 이집트인과 아랍인들에게 팔고 다시 이것을 베네치아가 중개하였던 것이다.
그동안 포르투갈이 강력한 대포로 무장한 함대로 이 지역 무역 중개권을 가로채 독점함으로써 포르투갈에 당해왔던 구자라트 왕국과 켈리컷의 토착세력, 그리고 이집트와 주변 이슬람 국가들은 중계무역에 타격을 입은 베네치아의 지원을 받아 연합함대를 조직하여 반격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1508년 포르투갈의 인도 총독 프란시스코 데 알메이다(Francisco de Almeida, 1450 ~ 1510, 포르투갈 귀족, 1대 총독)의 함대는 차울 해전(하울 전투, Battle of Chaul, 1508, 차울은 인도 중서부 항구)에서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와 오스만 제국의 연합 함대를 이끄는 아미르 후세인 알 쿠르디(Amir Husain Al-Kurdi, 맘루크의 제다 Jeddah 총독)의 기습공격에 아들(돔 루렌소, Dom Lourenso, 20세)이 패하여 차울항에 있던 함대와 함께 수장되자 프란시스코 데 알메이다 총독(Francisco de Almeida, 1450 ~ 1510)은 함대를 이끌고 아라비아로 후퇴하였다.
이에 포르투갈 왕 마누엘 1세(Manuel I de Portugal, 재위 1495~1521)는 알부케르크를 2대 인도 총독(1509 ~ 1515)으로 임명하였다.
알부케르크는 이슬람이 점령하고 있는 동방 교역의 거점인 말라카와 호르무즈에서 이슬람과 간접 무역으로는 나라를 크게 부강시킬 수 없으며 이들 지역을 군사력으로 점령해서 무역을 독점해야 나라를 부강하게 할 수 있다고 마누엘 1세에게 건의하였다.
이슬람이 강하지만 여러 나라로 분열되어 있으므로 승리할 수 있다고 했다.
알부케르크는 마누엘 1세의 승낙을 받아 1,000여 명의 군사를 배에 승선시켜 출발했다.
인도로 가는 아프리카의 해안과 아라비아 해로의 모든 포르투갈 점령지를 공고히 지배하기 위하여 돔 두아르테 데 레모스(Dom Duarte de Lemos)를 그 지역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던 것을 알부케르크가 이어받았다.
총독으로 임명된 알부케르크가 말라바르(Malabar, 인도 남서 해안 지역) 해안에 이르자 전임 알메이다 총독(Francisco de Almeida, 1450 ~ 1510)은 자신이 이슬람과 아랍에게 아들의 원수를 갚고자 알부케르크의 총독 임명장을 위조라고 우기고는 알부케르크를 감옥에 가두었다.
1509년 알메이다 총독(Francisco de Almeida, 1450 ~ 1510)은 비자야나가라제국(인도)과 연합하여 디우 전투(Battle of Diu, 다우는 인도 서북부 항구)에서 쿠르디(Amir Husain Al-Kurdi, 아미르 후세인 알 쿠르디, 맘루크 제독)가 이끈 맘루크 왕조, 캘리컷, 구지라트의 연합 함대(오스만, 베니스 지원)를 완파하여 아들의 원수를 갚았으며 포르투갈 해군이 이슬람 해군을 물리치고 인도양의 지배권을 확립함으로써 역사적으로 서양의 해양 세력이 동양의 해양 세력에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이슬람은 훨씬 많은 함선으로 포르투갈 군을 공격하였으나 배의 성능이 뒤지고 화력이 약해 패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포르투갈에서 새로 파견된 함대가 알부케르크의 총독 임명을 사실로 확인하자 총독직에서 물러났으며 알부케르크는 2대 인도 총독이 되었다.
1510년 알부케르크는 인도의 힌두교도들이 이슬람의 지배에 대한 불만이 매우 높다는 것을 파악하고는 1,000명의 병사로 인도의 서안에 있는 고아(Goa)에 주둔한 이슬람 비자푸르 왕국의 군대 4만 명을 격파하고 고아를 점령하였으나 이내 비자푸르 왕에게 빼았겼다가 다시 점령하였다.
알부케르크는 고아(Goa)를 동방 포르투갈 제국의 수도로 삼고 이어서 실론을 점령하여 향료 등을 교역하였다.
1509년 포르투갈의 디오구 로페스 드세케이라(Diogo Lopes de Sequeira)가 원정하였다가 실패한 말라카(Malacca, 말레이반도의 남서부, 동서 교역의 중심지, 향료 무역 중계항, 명나라 지배하에 이었음)를 1511년 알부케르크가 1,000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말라카 왕국(Sultanate ofMalacca, 1402 ~ 1511, 이슬람)의 2만 명의 군사를 물리치고 점령하였다.
이어서 알브르크는 몰루카 제도(Molucca, 인도네시아 동쪽 끝, 향료 제도, 후추 정향 육두구 생산지)에도 진출하였으며, 사이암, 수마트라, 자바를 점령하여 그곳으로부터 조공(朝貢)을 받았다.
인도네시아의 몰루카(Molucca) 지역에는 테르나테 술탄국(Sultanate of Ternate, 1257, 1486 ~ 1914), 티도레 술탄국(Sultanate of Tidore, 1081, 1450 ~ 1967) 등이 경쟁하고 있었다(정향 丁香 clove 생산지).
포르투갈은 몰루카제도의 무인도였던 암본 섬(Pulau Ambon)에 요새를 쌓고 활동의 중심지로 삼았다.
자바에는 1293년 침입한 몽골군과 이슬람으로부터 대포 기술이 전해져 일찍이 1346년에 대포와이를 운영하는 포병이 있었다고 하며 드막 술탄국(Demak Suntanate, 1475–1554)의 파티 유누스(Patih Yunus, 1488 ~ 1521) 왕자가 이끄는 자바 함대는 말레이시아의 말라카(Malacca)에서 1513년, 최초로 배에 대포를 싣고 포르투갈 군을 포위 공격했다.
알부케르크는 호르무즈를 공격하기 위해 마누엘 1세에게 군사를 더 보강해 주기를 청했으나 알부케르크를 시기하는 신하들의 반대로 마누엘 1세는 군사를 보내 주지 않았다. 그런던 중 그지역의 슐탄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알부케르크는 그 틈을 노려 호르무즈를 공격하여 홍해의 아덴(1513)과 페르시아만(1515, 호르무즈 섬 등)을 점령하였다. 알부케르크는 동방 교역의 삼대 거점(고아 1510, 말라카 1511, 호르무즈 1515)을 점령함으로써 오스만 제국을 협공하여 압박할 수 있게 되었고 포르투갈이 동방에 진출하는 길을 열었다.
그리고 알부케르크는 페르시아만에 들어간 최초의 유럽인이 되었다.
알부케르크는 기독교를 포교하고, 향신료의 무역을 계속하며, 포르투갈의 아시아 제국 성립을 위해 이슬람에 강력한 정책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알부케르크는 1515년 포르투갈 왕 마누엘 1세(Manuel I de Portugal, 재위 1495 ~1521)가 그의 정적(政敵) 소아레스(Lopo Soares de Albergaria, 1460 ~ 1520, 3대 총독)를 후임 총독으로 파견하자 절망하여, 왕에게 유서를 남기고 자살하였다.
마. 포르투갈의 중국, 일본 해로 개척 및 무역
포르투갈의 조르즈 알바레스(Jorge Alvares,?~ 1521, 탐험가)는 마누엘 1세(Manuel I de Portugal, 재위 1495 ~1521) 때인 1513년에 처음으로 중국의 광동을 탐험했다.
1514년부터 계속 중국과의 무역을 시도했으나 거절당하였다.
1517년에는 마카오에 불법 상주하기도 하였으며 주앙 3세(João III, 1521 ~1557) 때인 1553년에 지방관을 매수하여 마가오에 상주와 교역이 가능하게 되었다
포르투갈은 말라카와 마카오를 교역 거점으로 삼아 수출입의 중심지로 삼았다.
명나라 때 중국인들은 포르투갈을 불랑기(佛狼機, (al-Ifranj)라고 불렀다.
1557년 포르투갈인들은 중국 해안에 출몰하여 괴롭히던 해적을 퇴치한 대가로 마카오(호경오)에 주택과 상가를 짓고 불법으로 상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자치행정기관으로 의사국(議事局), 사법관(司法官), 자위대(自衛隊) 등을 조직해 운영하였으며 이어서 1680년 포르투갈 정부에서 총독을 공식 파견하여 통치하였다.
그리고 1540년대 이후에 베트남의 후이안과 필리핀의 마닐라를 경유지로 삼아 무역을 하였다.
포르투갈은 1557년 마카오(해적 토벌 대가로 특별 거주 지역으로 조차)에 정착촌을 만들고 무역항을 설립하여 중국의 비단, 도자기, 차 등을 마카오에서 말라카를 경유해서 고아로 이어지는 교역 통로로 이용하여 유럽으로 수송했으며 이어서 마카오를 식민지로 만들었다.
이때 명나라의 금값이 은값에 비해 쌌으므로 포르투갈은 은으로 물품을 사 와 중국에 팔고 금으로 물품값을 받아가 많은 이익을얻었다.
아편전쟁(1842년 난징조약, 1860년 베이징조약)으로 영국이 점령한 홍콩이 아시아 무역의 중심이 되자 포르투갈은 아시아에서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 1553년 이래 불법 거주하여 무역활동을 해오던 마카오의 아오먼(澳門) 반도 전역과 타이파·콜로안 두 섬을 무력으로 점령하고, 1887년 청(淸)·포르투갈 조약을 맺어 식민지를 합법화하였으며 1999년에 중국에 반환하였다.
1543년 일본에서는 중국의 광주에서 출발한 중국 무역선(해적선)이 풍랑으로 표류하여 일본(Zipangu, 지팡구) 종자도(種子島, 타네가시마)에 정박하였는데 선장이 살아남기 위해, 또 선박 수리, 숙식등을 제공받기 위해 같이 타고 있던 포르투갈인의 화승총(arquebus 아쿼버스, 심지에 불을 붙여 발사, 조총, 철포, 대뽀)을 종자도 영주인 다네가시마 토키타카에게 받쳤다. 이에 많은 은을 주고 두 정을 더 구입하여 대량으로 복제 생산하게 되었다(실제로는 총을 복제하였으나 주요 부속이 불량으로 총이 파손됨에 따라 기술을 익히기 위해 일본 여인을 포르투갈인과 결혼시키고 많은 은을 주어 포르투갈에 보냈으며 일 년 후 여인이 기술자를 데려와 복제하여 일본 전국 시대에 사용). 이 배에는 포르투갈 상인이 세명이나 타고 있었다.
다음 해인 1544년 포르투갈은 16척의 상선에 담배, 약품, 장식물 등의 상품을 싣고 다시 日本을 방문하였다. 이후 포르투갈 상선은 매년 일본과 무역을 하였다.
1549년에 예수회(가톨릭의 남자 수도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포교 목적으로 일본에 온 이후로 화산지대에 은(세계 생산량의 25% 일 때도 있었음), 유황 등의 생산량이 많은 일본과 교역하였다.
포르투갈은 1571년 규슈의 나가사키(長崎)에서 다이묘와 무역을 시작하였다.
조선과 명나라는 일본을 야만인으로 취급하여 무역도 별로 하지 않았지만 포르투갈은 중국에서 은으로 비단 등을 사서 일본에 은을 받고 팔아 많은 이익을 보았다.
다이묘들은 일본의 전국시대에 내전으로 노획한 수많은 포로들을 포르투갈 상인에게 노예로 헐값에 팔아 전비로 사용했다.
무역이 활발해짐에 따라 일본에 포르투갈인의 거주지가 생기고 일본이 직접적으로 서양과 교류하여 서양문물에 접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 포르투갈인들에 의해 빵이 전파되었다. 우리가 먹는 빵을 나타내는 용어로는 영어 브래드(bread), 포르투갈어 팡(pão), 프랑스어 pain(뺑), 스페인어 pan(빤) 등이 있는데 우리가 쓰고 있는 빵(bread)이란 용어는 이때 포르투갈어 팡(pão)이 일본에 들어온 것이 후에 한국에 전해진 것이다.
그리고 빵 중에서영국의 스펀지케이크(Spongecake)에 해당하는 카스텔라(castella)의 어원은 스페인 지역의 이름인 카스티야(Castilla)이며 포르투갈의 스펀지 빵인 팡 드 로(pão de ló)가 팡 드 카스텔라(pão de Castela)로 일본에 전해져 간단히 카스텔라(castella)로 불리게 되었으며 현재는 일본 나가사기 현의 특산품이 되었다.
화산이 많은 일본은 은, 유황 등을 재원으로 하는 국부를 이용하여 서양의 발달된 모든 문물을 수입하여 발전시킴으로써 국력의 팽창을 이룩하였던 것이다.
스페인도 1584년부터 히라토(平戶)에 내항하여 일본 무역을 개시하였다(포르투갈은 1580년 스페인에 합병되었으나 포르투갈은 스페인과 합병(1580 ~ 1668) 중에도 해외무역과 식민지 경영을 스페인의 간섭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운영하였음).
일본은 1591년에 포르투갈을 견제하기 위해 스페인과 교역을 활발히 하였다.
임진왜란 때 일본은 화포를 제작할 수 없어 포르투갈의 화포를 수입하여 임진왜란에 사용하였다. 화포의 사거리 등이 조선 화포보다 짧았으며 무엇보다 일본 배 자체가 약해 화포를 배에 싣고 발사할 수가 없었다. 판자의 결속력이 약해 포 발사 충격에 배가 파손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에 밀렸던 것이다.
포르투갈이 가톨릭을 계속 포교하자 1641년 일본이 교류를 단절했다.
4. 스페인의 아시아와 아메리카 개척
가. 1519년 스페인 마젤란(Ferdinand Magellan)의 세계일주 항해
마젤란(Ferdinand Magellan,1480 ~ 1521)은 포르투갈에서 출생했으며 해양 지도와 항해 기술에 정통했다. 1505년 인도의 포르투갈 총통 프란시스코 데 알메이다(Francisco de Almeida, 1450 ~ 1510, 포르투갈 귀족) 함대의 인도 원정에 참가하여 7년 동안 체재하면서 몰루카 제도(Molucca, 인도네시아 동쪽 끝, 향료 제도, 후추 생산지)와 향료의 거래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는 등 항해와 무역을 경험하고 1512년 포르투갈로 돌아왔다.
1516년 마젤란은 포르투갈 국왕 마누엘 1세(Manuel I, 재위 1495 ~ 1521)에게 봉급 증액과 대서양 서쪽으로 돌아 몰루카 제도로 가는 항해를 위한 지원을 해줄 것 등을 3번이나 청원했으나 국왕은 이와 같이 항해하는 것은 토르데시야스 조약(treaty of Tordesillas, 서경 46도 37분을 경계로 서쪽은 스페인 령, 동쪽은 포르투갈 령)에 위반될 소지가 있다고 거절하였다.
그래서 1517년 마젤란은 스페인의 카스티야로 갔다.
1518년 스페인 왕인 카롤루스 1세(Carlos I, 스페인 재위 1516 ~ 1556, 신성로마 황제 카를 5세 Karl V, 재위 1519 ~ 1556)에게 대서양 서쪽으로 돌아가 몰루카 제도에 도달하는 항로 계획을 제안하여 항해지원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포르투갈은 인도 항로 개척으로 수많은 경제적 이득을 얻었지만 스페인은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였지만 그때까지 경제적 이득은 별로 얻지 못했으므로 경제적 이득을 얻을 수 있는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 했던 것이다.
희망봉과 인도를 거쳐 인도네시아의 몰루카(Molucca)로 가는 항로는 포르투갈이 항해권을 장악하고 있으므로 스페인은 이용할 수 없었다.
마젤란은 포르투갈 주앙 2세(John Ⅱ, 1455 ~ 1495)의 왕비 밑에서 함께 일했던 루이 팔레이루(Rui Faleiro, 15C말 ~ 16C, 지리 천문학자, 포르투갈)의 도움으로 당시 스페인이 보유하고 있던 남아메리카의 해도를 이미 열람하였으므로 남아메리카 항해에 자신이 있었다.
1518년 마젤란과 루이 팔레이루는 루이 팔레이루(Rui Faleiro)가 계산한 항해거리에 따라 작성한 원정 계획서를 카롤루스 1세(Carlos I)에게 제출하여 원정 지원을 약속받았고 몰루카 함대(Armada de Molucca, 향 섬(Spice Islands)인 Molucca로 가는 항로를 찾는 것이 목적)의 공동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스페인 국왕 카롤루스 1세(Carlos I)는 원정이 성공하면 총독으로 임명하고 무역으로 얻는 이익의 1/20을 주기로 약속하였다
1년 여동안 선원 270여 명을 모집하고 5척의 선박 트리니다드(Trinidad, 110t, 선장 마젤란, 승선원 55명),샌안토니오(San Antonio, 120t, 선장 Juan de Cartagena, 승선원 60명), 콘셉시온(Concepción, 90t, 선장 Gaspar de Quesada, 승선원 45명), 산티아고(Santiago, 75t, 선장 João Serrão, 승선원 32명), 빅토리아(Victoria, 85t, 선장 Luis de Mendoza, 승선원 42명)로몰루카 함대(Armada de Molucca)를 조직하는 등 원정을 준비했다. 기함은트리니다드호(Trinidad, 카라크 carrack선, 승선인원 55명, 110t)로 하였다.
포르투갈은 마젤란이 스페인으로부터 원정 지원을 약속받았다는 것을 알자 마젤란에게 원정을 포기할 것을 강요했으나 마젤란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런데 루이 팔레이로(Rui Faleiro)는 원정 출발 전에 정신 이상이 되어 원정이 취소되었고 마젤란이 단독 지휘자가 되어 출발하게 되었다.
마젤란은 5척의 몰루카 함대에 약 270명의 선원을 태우고 1519년 8월 10일 세비야를 떠나 산 루카르 드 바라메라항에서 마지막 점검을 한 후 1519년 9월 20일 대서양으로 출항하였다.
몰루카 함대는 카나리아 제도를 거쳐 그해 12월 리우 데 자네이루만(灣)에 도착했고 남하하여 1520년 1월 남아메리카의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 사이의 라플라타강(江)을 탐험했다. 처음 계획대로라면 이곳이 남단이어야 했는데 남단은 더 내려가야 했으므로 실제 항해는 계획했던 항해와 어긋났으며 이에 3척의 선원들이 반란을 일으켜 진압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선상 재판을 열어 반란 주동자를 처단했다.
원정대는 스페인 출신 선원이 많고 포르투갈 출신 선원이 적은 수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스페인 선원들은 마젤란의 항해 지휘를 불신했다.
이때부터 마젤란의 항해는 고난이 연속되었다. 겨우 남아메리카 끝부분의 마젤란 해협을 발견하고 통과하여 태평양으로 넘어갔다. 마젤란 해협을 통과하는 동안 산티아고호(Santiago)는 모래톱에 좌초되어 운항할 수 없게 파손되었고 샌안토니오호(San Antonio)는 도망쳐서 스페인으로 돌아가버려 세척만이 남았다.
이후로는 섬이 없어 물과 식량의 공급이 제대로 되지 않아 극한 상황이 되었다.
마젤란은 마젤란 해협을 어렵게 통과한 후 넓고 고요한 태평양(太平洋, Pacific Ocean)이 나타나자 '평화로운 바다(Mare Pacificum)'라고 명명했으며 한자어 '태평양(太平洋)'은 18세기 후반 일본 에도 막부(江戸幕府, 도쿠가와막부徳川幕府)에서 서양 문물과 서적을 도입하여 용어를 한자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탄생했다.
1521년3월 6일태평양의 괌(Guam, 마젤란이 처음으로 상륙한 서양인, 1565년필리핀의 초대 총독인 미겔 로페스 데 레가스피Miguel López de Legazpi 장군이 스페인 땅이라고 선언, 1898년 미국과 에스파냐의 전쟁 결과 미국 영토가 됨) 섬에 도착하여 차모로 족(Chamorro)과 물물교환으로 물과 식량을을 얻었으며 계속 항해하여 1521년 4월 7일 필리핀 제도의 세부섬(Cebu Island)에 도착했다.
마젤란은 섬의 왕 하마발과 우호를 맺어 그리스도교를 전파하고 스페인 왕에게 복종하게 했으나, 이것을 거부하는 근처 막탄섬(Mactan Island)의 왕 라프라프(Lapu - Lapu, 1491 ~ 1542)를 정벌하기 위해 머스킷 총과 석궁, 칼 창 등으로 무장한 60명의 병력으로 출정했다가 칼, 죽창 등으로 무장한 1,500명의 적군과 대적하게 되어 중과부적으로 1521년 4월 27일 그 섬에서 전사했다.
원정대는 선거로 마젤란의 처남인 두아르테 바르보사(Duarte Barbosa, 1480 ~1521)와 후안 세라노(João Serrão,? ~1521) 두 명을 공동 지휘관으로 선출했다.
그런데 1521년 5월 1일 두아르테 바르보사와 후안 세라노 등 대부분이 장교들인 30명이 마젤란과 동맹을 맺은 세부의 왕 라자 후마본(Rajah Humabon)이 초대한 식사에 응했다가 두아르테 바르보사와 후안 세라노, 빅토리아호의 선장 아폰소 데 고이스(Afonso de Góis)등 27명이 피살당했다.
지휘관 후안 세라노가 부상을 당한 체 잡혀서 해안으로 끌려 나와 몸값을 지불하고 교환해 주기를 원했으나 지휘관의 다음 순위인 카르발호(João Lopez Carvalho)가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설이 있다.
1521년 5월 2일 이어서 원정대의 지휘관이 된 카르발호(João Lopez Carvalho)는 생존자가 115명 밖에 없어선원이부족함에 따라 낡은 콘셉시온호(Concepción, 선장 후안 세바스티안 데 엘카노)를 침몰시키고 기함인 트리니다드호(선장 마르틴 멘데스 Martin Mendez)와 빅토리아호(선장 곤살로 데 에스피노사 Gonzalo Gomez de Espinosa), 두척의 배로 몰루카(Molucca, 인도네시아)를 찾아 나섰다.
1521년 9월 21일 카르발호(João Carvalho)가 지휘관에서 물러나고 마르틴 멘데스 (Martin Mendez)가 지휘관으로, 곤살로 데 에스피노사(Gonzalo Gomez de Espinosa)가 트리니다드호의 선장이 되고, 후안 세바스티안 데 엘카노(Juan Sebastián Elcano, 1476 ~ 1526)가 빅토리아호의 선장이 되었다.
6개월 동안 탐험하여 1521년 11월 8일 몰루카 제도(Molucca Is., 인도네시아)에 도착하였다.
몰루카에서 옷, 칼, 유리제품 등을 주고 향신료(정향)를 헐값에 잔뜩 사들였다. 후추는동남아와 세계 여러 곳에서 생산되지만 정향과 육두구는 몰루카 제도에서만 주로 생산되므로 값이 후추의 몇 십배에서 크게는 몇 백배 이상으로 값이 비싼 것이었다.
1521년 12월 21일 빅토리아호는 인도양을 거쳐 희망봉을 돌아가는 귀향길에 올랐으나 기함인 트리니다드호는 누수로 수리를 하여 며칠 뒤에 출발하여 아메리카로 가서 유럽으로 가는 동쪽 항로를 택하였다. 그런데 트리니다드호는 귀국 도중에 포르투갈 함대에 나포되었다가 풍랑으로 난파되었다.
원정대는 5척 중에서 선원 18명 실은 빅토리아호(Victoria, Carrack선, 길이 18 ~ 21m, 승선인원 42, 85t)만 남았던 것이다.
후안 세바스티안 데 엘카노(Juan Sebastián Elcano, 1476 ~ 1526) 선장을 지휘관으로 하여 선원들은 빅토리아호를 타고 포르투갈이 지배하는 인도 항로와 인도양의 역풍을 맞으며 항해를 해야 했으므로 수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빅토리아호는 1522년 9월 6일 스페인 산루카르 데 바라메다(Sanlúcar de Barrameda)로 돌아왔으나 원정에 대한 불신, 원주민과의 싸움, 식량부족, 괴혈병, 악천 후 등에 270명 중에서 겨우 지휘관인 후안 세바스티안 데 엘카노(Juan Sebastián Elcano) 등 18명만이 살아 돌아왔다.
그렇지만 빅토리아호가 싣고 돌아온 향신료인 정향의 값은 원정 함대 전체 비용보다 더 많았다.
이와 같이 마젤란 선단은 악전고투하며 역사상 최초로 지구를 일주하는 항해를 하였다. 마젤란은 필리핀에서 전사했지만 본인은 이보다 10년 전에 이미 인도를 거쳐 몰루카제도까지 항해한 경력이 있었으므로 합치면 대략 세계를 일주한 셈이 된다.
한 번의 항해로 지구를 일주한 사람으로는 물론 스페인에 살아 돌아온 18인으로 그중 지휘관인 후안 세바스티안 데 엘카노(Juan Sebastián Elcano, 1487 ~ 1526)가 대표이다.
마젤란이 점령한 필리핀(동경 124 ~ 132도)은 동경 142도를 경계로 정한 1529년의 사라고사 조약(the Treaty of Zaragoza)에 따른다면 포르투갈에 지배권이 있었으나 마젤란과 그 일행에 의해서 소유권이 확립되었으므로 스페인의 땅이 되었다.
이어서 1543년 루이 로페즈 드 빌라로보스(Ruy Lepoz de Villalobos, 1500 ~ 1546, 스페인 탐험가)가 필리핀의 여러 섬들을 발견하였으며 1565년 미겔 로페스 데 레가스피(Miguel Lopez de Legazpi, 1502 ~ 1572, 필리핀 초대총독)는 필리핀을 식민지로 선언하였다. 필리핀(Philippines)이란 명칭은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FelipeⅡ de España, 1527 ~ 1598)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스페인은 필리핀과 타이완의 일부, 팔라우, 마리아나 제도를 묶어 스페인령 동인도로 하였다.
나. 스페인 에르난 코르테스(Hernán Cortés,1485 ~1547)의 아스테카(Aztec) 왕국 정복
에르난 코르테스(Hernán Cortés,1485 ~1547)는 스페인의 시골 메델린(Medellin)의 하급 귀족 출신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살라망카(Salamanca) 대학에 입학했으나 1501년에 퇴학을 당했다. 코르테스는 19세 때인 1504년 야망을품고 대서양을 건너 에스파뇰라(오늘날의 히스파니올라) 섬의 총독으로 임명된 동향인 니콜라스 데 오반도(Nicolas de Ovando, 1501 ~ 1509)의 휘하에 들어갔다.
에스파뇰라 섬의 신생 도시 아수아(Azua)에서 6년간 서기로 근무하면서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
1511년 디에고 벨라스케스 데 케야르(Diego Velázquez de Cuéllar, 1465~ 1524)는 서인도제도의 총독인 디에고 콜론(Diego Colón, 디에고 콜럼버스, 콜럼버스 아들)의 명령에 따라 쿠바를 점령하고 제1대 쿠바 총독이 되었다. 코르테스도 이 전투에서 공을 세워 쿠바 시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스페인의 레 콩키스타(Re Conquista, 국토회복운동) 출신의 푸에르토리코 총독이었던 후안 폰세 데 레온(Juan Ponce de León, 1474 ~ 1521)이 1513년에 지금의 마이애미를 발견하여 'Pascua Florida(꽃의 축제)'라는 이름을 붙였다.
1517년에 에르난데스 데 코르도바(Francisco Hernandez de Cordoba, 1475 ~ 1526)가 유카탄 반도를 탐험한 후 그곳에 황금이 많다는 소문이 퍼졌다.
쿠바 총독 디에고 벨라스케스 데 케야르(Diego Velázquez de Cuéllar, 1465~ 1524)도 정보를 얻기 위해 유카탄 반도(멕시코 남동부)로 원정대를 보냈지만 1차원 정대에 이어 1517년에 떠난 2차 원정대도 소식이 없자 1519년 3차 원정대를 조직하였으며 코르테스를 원정대장에 임명하였다. 총독은 코르테스가 군대 경험이 별로 없고 애국심이 강하므로 총독인 자신의 명령에 복종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에르난 코르테스(Hernán Cortés, 1485 ~1547)가 3차 원정대를 준비하고 있을 때 2차 원정대가 쿠바로 귀환하자 3차 원정대의 계획이 변경되었다.
총독 디에고 벨라스케스 데 케야르(Diego Velázquez de Cuéllar, 1465~ 1524)는 코르테스의 승진이 너무 빠르다고 생각하여 3차 원정대의 원정대장 임명 계획을 취소하였던 것이다.
이에 1519년 에르난 코르테스는 명령에 불복하고 독자적으로 새로운 식민지를 탐험하기 위해 11척의 배에병사 508명과 말 16 필을 싣고 유카탄 반도(멕시코 남동부)로 출발하였다.
그는 유카탄 반도의 타바스코(Tabasco)에서 인디언을 격파하고 베라쿠르즈(Veracruz, 에로이카베라크루스 Heroica Veracruz, 성십자가, 1518년 후안 데 그리할바 JuandeGrijalva가 탐험)라는 항구를 점령 기지로 활용하여 마야족들과 전투를 벌이면서 부족들을 점령해 나갔다.
말(馬, horse), 화승총인 아쿼버스(arquebus), 대포 등을 처음 본 인디오들은 공포에 떨며 코르테스에게 항복하였다.
그리고 코르테스는 전쟁에서 사로잡은 인디언 귀족 출신의 노예인 말린체(La Malinche, 코르테스의 통역사 겸 현지 처, 귀족이 노예로 전락되어 제국에 원한이 많았고 유능한 인재였음)라는 반 아스테카(Aztec)적인 유능한 여인을 통해 황금으로 가득 찬 아스테카(Aztec) 왕국에 대한 정보와 아스테카(Aztec) 왕국을 형성하는 각 부족의 이해관계와 알력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여 정복할 부족은 정복하고 회유할 수 있는 반 아스테카(Aztec)적인 부족과는 연합함으로써 아스테카(Aztec) 왕국을 정복할 방법을 찾게 되었던 것이다.
에르난 코르테스(Hernán Cortés,1485 ~1547)는 스페인(에스파냐) 병력 1,100명과 아스테카(Aztec) 제국에 복속하기를 거부하고 있던 틀락스칼라 왕국을 정복하여 틀락스칼라의 강력한 5만 전사를 우군으로 확보하였다.
이때 일부 부하들이 쿠바로 돌아가기를 원하자, 코르테스는 원정대가 타고 온 11척의 배를 모두 침몰시켜 버렸다. 그리고는 군사들을 이끌고 왕국을 정복하기 위해 진군하였다.
그런데 아스테카(Aztec) 제국을 제외한 다른 피지배 부족들은 코르테스 일행의 행색을 보고 코르테스를 전설 속의 왕인 케챨코아틀(Quetzalcóatl)이 하늘에서 내려온 것으로 착각하고 자신들의 메시아로 간주하여 그들을 환대하였다.
마야 제국을 이은 아스테카(Aztec) 제국(멕시코 제국)은 테노치티틀란의 멕시카족, 테수이코(텍스코코)의 쿨루아족, 틀라코판(타쿠바)의 테파넥족으로 구성되었으며 아스테카(Aztec, 그들은 멕시카족이라 함)족이 제국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스테카 족은 한 번에 수천 명씩 이민족을 제물로 바쳤으므로 이민족들은 아스테카 족에 반감이 매우 강했다. 그래서 코르테스 군대가 침략하자 12만 명의 여러 이민족 병사가 코르테스의 우군이 되어 참전하였던 것이다.
아스테카(Aztec) 왕국의 수도 테노치티틀란(Tenochtitlán, 멕시코시티)은 고원의 큰 호수 속의 섬에 있었다.
1519년 코르테스는 테노치티틀란(Tenochtitlán, 멕시코시티)을 기습 공격하여 왕인 몬테수마 2세를 인질로 잡고 에스파냐 왕에 대한 충성을 강요하였다. 그리고 아스테카(Aztec)의 우상을 파괴하고 그들의 수도인 테노치티틀란(멕시코시티)에 교회를 세웠다.
디에고 벨라스케스 데 케야르(Diego Velázquez de Cuéllar, 1465~ 1524) 쿠바 총독은 이 같은 코르테스의 군사 원정을 반란으로 간주하여 토벌군을 보냈으나 코르테스는 토벌군을 격파하였다.
그런데 코르테스 군은 1520년 아스테카(Aztec)에서 멕시카족의 전통 축제를 반란으로 오인하여 이들을 무력으로 무자비하게 진압하였다.
이에 분개한 멕시카족은 반란을 일으켜 코르테스의 부하 대부분을 죽였으며 코르테스 일행은 테노치티틀란(Tenochtitlán, 멕시코시티)에서 철수하였다. 후일 스페인인들은 이것을 ‘슬픔의 밤’(1520. 6. 30)이라고 불렀다.
유럽의 정복자들로부터 전파된 천연두, 장티푸스, 홍역 등에 의해 아스테카(Aztec) 제국의 많은 원주민들이 죽어 제국의 세력이 약화되었다.
이에 1521년 9월 에르난 코르테스(Hernán Cortés,1485 ~1547)는 다시 900명의 병사를 모아 테노치티틀란(Tenochtitlán, 멕시코시티)을 탈환하고 아스테카(Aztec)를 정복하였다. 에르난 코르테스는 900여 명의 군사로 인구 500만 명의 왕국을 점령하였던 것이다.
아메리카에서는 가축을 거의 기루지 않았고 농업도 별로 발달하지 않았으며 수렵으로 식품을 조달했다. 유럽인들은 소, 말, 돼지, 닭 등 13종이나 되는 가축을 기루는 동안 가까이 한 가축으로부터전염된 여러 종류의 병에 걸려 면역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전염병이 돌아도 면역이 되지 않은 일부만 죽었지만 아메리카 원주민은 가축을 기루지 않아 면역이라고는 어떤 종류의 면역도 생성된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유럽인에 의해 장티푸스, 천연두, 홍역 등의 전염병이 전파되어 수많은 사람이 죽었던 것이다. 아메리카 원주민이 쉽게 스페인에 점령된 것은 전염병으로 많은 원주민이 죽어 세력이 약해졌기 때문이다.
1522년 에르난 코르테스는 뉴 에스파냐(Nueva España, 누에바 에스파냐, 현 멕시코) 총독(부왕 하의 총독)으로 임명되었으며 테노치틀란(Tenochtitlán)의 이름을 멕시코 시티(Mexico City, Ciudad de México)로 변경했다. 에르난 코르테스는 인디오 문명에 대한 편견으로 그들을 증오하였으며 탄압과 수탈로 가혹한 통치를 하였다.
그리고 1524 ~ 1526년 온두라스를 탐험하였다.
그는 1526년 월권 혐의로 파면되어 본국으로 송환되었으며 더 이상 식민지 총독은 되지 못했다. 그러나 본국에서 공로를 인정받아 발례후작(Marques de Valle)이 수여되어 영지를 하사 받았다. 1530년 멕시코에 다시 갔으며 1536년 멕시코 북서부를 탐험하여 바흐 캘리포니아 반도(Baja California Peninsula)를 발견하고 1540년에 귀국하였으며 다시 1541년에 알제리(Algeria)를 탐험했다.
에르난 코르테스(Hernán Cortés,1485 ~1547)는 귀국 후 카를로스 1세(카를 5세)의 냉대를 받아 실의 속에 살았으며 1547년에 죽었다.
1519년 에르난 코르테스(Hernan Cortes)가 점령한 아스테카(Aztec)에서 몬테수마 왕은 에스파냐의 정복자 코르테스(Hernan Cortes)에게 쇼콜라틀(xocolatl)이라는 음료를 대접했다고 하며 이 음료는 카카오 열매를 으깬 것에 바닐라를 가미하여 풍미를 낸 것이었다.
카카오나무(cacao tree, cocoa tree)는 아메리카의 열대 지역이 원산지이며 그 열매인 카카오 콩(Cacao Bean)을 볶아(Roaster) 껍질을 제거한 카카오 닙스(Cacao Nibs)를 빻아 만든 가루가 코코아(Cocoa)이다.
현대의 초콜릿(chocolate)은 고대 멕시코의 음료인 쇼콜라틀(xocolatl)에서 유래한 용어이며 코코아(Cocoa)에 우유, 설탕, 향료 따위를 섞어 만든 것이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에스파니아로 처음 카카오 콩을 가지고 왔으며 1528년에 아즈텍을 정복한 스페인의 콩키스타도르인 에르난 코르테스가 카카오의 활용법을 깨닫고 유럽에 대량으로 가져와 전파했다.
스페인의 예수회는 카카오(Cacao tree) 농장을 만들어 생산한 코코아(Cocoa)를 외국과 교역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을 것을 예측하고는 포교하는 중남미의 열대 지방마다 카카오 농장을 건설했다.
1875년 경에는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등의 열강에 의해 경작지가 서아프리카로 확대되어 코트디부아르(기니)는 프랑스, 가나는 영국의 식민지로 경영되었다.
현재 코코아(Cocoa)의 최대 생산자는 코트 디부 아르이며 두 번째가 가나이다.
향신료 중 하나인 바닐라(vanilla)는 학명이 Vanilla planifolia인 난과의 덩굴 다육성 식물로 중앙아메리카, 남아메리카가 원산지이다.
Vanilla(바닐라)는 속명이며 스페인어 ‘vainilla(배닐라, 작은 콩)’에서유래하였다.
향료로는 열매와 씨앗을 이용하는데 수확한 꼬투리를 발효와 건조를 반복하여 향을 낸다.
오늘날 중앙아메리카, 마다가스카르, 인도네시아 등에서 생산되는데 인도네시아 생산량이 80%이다.
다. 스페인 프란시스코 피사로 곤살레스(Francisco Pizarro González, 1475 ~ 1541)의 잉카 제국 정복
프란시스코 피사로의 아버지는 스페인(에스파냐)의 군인이었고 어머니는 도시빈민 출신이었다. 프란시스코 피사로는 아스테카(Aztec) 제국을 멸망시킨 에르난 코르테스와 외가 쪽으로 6 촌간이다.
프란시스코 피사로는 사생아로 태어나 교육을 받지 못한 문맹이었고 돼지를 돌보는 일을 하는 등 어린 시절을 어렵게 보냈으며 용병 생활을 경험한 뒤 새로운 인생을 도전하기 위해 신대륙으로 건너갔다.
1501년 스페인인들이 처음 파나마에 도착했을 때 파나마에는 75만 명의 인디언이 살고 있었으나 그 후 질병, 살인 등으로 1/10이 죽었다.
피사로는 1502년 아메리카로 갔으며 1509년 11월에는 알론소 데 오제다(Alonso de Ojeda, 1466 ~ 1515)가 이끄는 선단에 합류하여 현재의 콜롬비아로 항해했다.
스페인 식민지는 1510 ∼ 1514년에 바스코 누녜스 데 발보아(Vasco Nunez de Balboa, 1475 ~ 1519 스페인)에 의해 처음으로 성공적으로 세워졌다.
발보아(Vasco Nunez de Balboa) 원정대는 파나마의 다리엔(Darién)을 발견하고 남아메리카 최초의 유럽 이주민 정착촌을 건설하고 정착촌의 임시 총독과 사령관이 되었다.
1513년 스페인인 발보아(Balboa)는 태평양을 발견하였으며 피사로는 발보아 원정대에 참가하여 태평양을 발견한 스페인(에스파냐) 사람 27명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스페인은 발보아가 태평양을 발견함으로써 태평양 쪽에서 아메리카의 여러 지역을 탐험하여 개척할 수 있게 되었다.
발보아는 인디언 원주민들로부터 잉카제국에 많은 금이 매장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그 지역을 정복하기 위한 군사를본국에 요청했으나 본국에서는 발보아 반대파의 득세로 인해 새 총독이 오게 되고 발보아는 그 부하가 되었다.
1514년 새 총독으로 부임한 페드로 아리아스 다빌라(Pedro Arias de Davia, 1440 ~ 1531, 일명 페드라리아스)는 발보아를 싫어하여 피사로에게 발보아를 체포하도록 밀명을 내렸으며 피사로는 1519년 발보아를 체포하여 처형하였다. 피사로는 그 공으로총독의 지원을 받아 새롭게 건설된 식민도시 파나마의 시장과 행정관이 되었다.
그때 피사로는 에르난도 코르테스가 멕시코에서 아즈텍 제국을 정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그도 황금의 나라를 찾던 중 페루의 잉카제국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군인이었던 디에고 데 알마그로(Diego de Almagro,1475 ~ 1538)와 에르난도 데 루케(Hernando de Luque,? ~ 1532) 신부와 함께 원정대를 구성하여 1524년과 1526년에 남아메리카를 탐험하였으나 기후와 향토병 때문에 실패하였다.
총독은 피사로에게 탐험을 못하게 하였으나 피사로는 총독의 명령을 거부하고 원정을 계속하였다.
1528년 4월에 북부 페루 지방까지 진출하여 그곳의 원주민들로부터 황금이 많이 있다는 잉카제국을 찾게 되었다.
이 원정에서 알마그로는 전투 중에 한쪽 눈을 실명하였고 얻은 전리품이라고는 없었다. 하지만, 잉카제국의 존재를 확인하였다.
그런데 피사로의 탐험대 중에는 힘들고 지친 나머지 그만 집으로 돌아가려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때 피사로는 칼로 땅에다 선을 긋고는, “부와 명예를 바라는 사람은 이 선을 넘어오라.”라고 했는데 넘어온 사람들은 모두 열세 명에 불과했다.
페루의 잉카 제국으로 들어갔으나 원정대원의 수가 너무 적어 피사로는 탐험만 계속하다가 그만 파나마로 돌아왔다.
잉카 제국의 발견은 그에게 세 번째 원정을 나서게 하는 열망을 심어주었고, 피사로는 파나마로 돌아와 파나마 총독에게 원정대 파견을 요청하였지만 총독은 남아메리카 원정을 반대하였다.
1528년 피사로는 스페인(에스파냐) 국왕 카를로스 1세(Carlos Ⅰ, 재위 스페인 왕 1516 ~ 1556, 신성로마제국 칼 5세 1519 ~ 1556)를 직접 만나 허락을 받기 위해 귀국하였다. 세비야에서 우연히 멕시코 정복자 에르난 코르테스를 만나 조언을 받았고 국왕 카를로스 1세를 설득하여 원정을 허락받았다. 국왕이 하사한 훈장과 갑옷을 가지고 파나마로 돌아왔다.
1528년 피사로는 황금을 찾는 원정에서 정복한 누에바 카스티야 주(Gobernacion de Nueva Castilla,페루 지역,1528~ 1542)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1531년 1월 병사 180명(기마 37두)과 함께 페루의 잉카 제국 원정을 떠났다.
잉카 제국 원정은 파나마에서 배로 태평양을 항해하여 페루 북부에 상륙하여 안데스산맥을 넘어 안데스 고지의 카하마르카(Cajamarca, 페루 북서부 도시)를 점령하고 쿠스코(Cuzco, Cusco, 페루 남부, 잉카 제국의 수도)로 향하는 원정이었다.
원정 도중에 푸니섬에서 수천 명에 달하는 푸니족 전사들과 100명이 겨우 넘는 원정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으나 장창병(pikemen, 긴 창을 쓰는 병사)들이 단단한 대형을 형성하여 푸니족의 돌격을 막고 화승총(arquebus, 아쿼버스) 병사들이 푸니족에게 사격을 가하여 푸니족 전사들을 물리쳤다.
이어서 원정군은 안데스를 넘어 내륙으로 들어갔다.
1532년 11월 잉카 제국의 우아이나 카팍 왕 Huayna Capac, 1464 ~ 1524)이 천연두로 죽자 우아스카르(Huáscar,1503 ~ 1532)가 왕위를 이어받았으나 이복동생인 아타우알파(Atahualpa, 1497 ~ 1533)가 반란을 일으켜 형제간에 내란이 일어났다.
피사로는 이를 탐지하고 카하마르카(Cajamarca, 페루 북서부)에서 잉카제국의 왕인 아타우알파(우아스카르의 이복동생)와 만나기를 청했다.
프란시스코 피사로는 적은 군사로 전쟁을 승리하기 위해서는 왕을 포로로 잡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잉카인들은 피사로의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 별로 두려워하지 않고 황제를 만나는 것을 쉽게 허락해 주었다.
피사로는 카하마르카(Cajamarca)라는 곳에서 잉카의 황제 아타우알파를 만나기로 했다. 그리고 피사로 군사들은 약속 장소에 몰래 대포를 끌고 와 설치했다. 다음날 그는 수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나타난 황제를 만나 크리스트교를 받아들이라고 했지만 황제는 거절하였다. 그러자 스페인 병사들은 준비해 둔 대포를 발사하고 말에 탄 스페인(에스파냐) 병사들은 총을 쏘았다. 대포와 총은 물론 말도 처음 본 수만 명의 잉카 군사들은 크게 놀라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겨우 168명의 군사로 잉카 황제의 대군을 제압한 것이다.
피사로는 사로잡은 황제에게 커다란 방을 금으로 가득 채우면 놓아주겠다고 했다. 황제는 온 나라에서 금, 은, 보석을 모아 몇 달에 걸쳐 방을 채웠지만 피사로는 이듬해인 1533년에 아타우알파를 스페인 왕에 대한 반역죄로 처형하였다.
1533년 피사로 원정대는 곧바로 잉카 제국의 수도인 쿠스코(Cuzco, Cusco, 페루 남부)로 쳐들어가 전투 없이 6 피사로의 형제는 이를 구실로 삼아 알마그로를 처형했다.
1541년 6월 알마그로의 아들과 추종자 20명이 피사로의 궁을 공격해 피사로를 살해했다.
한편, 잉카인들은 산악 지역으로 옮겨가 스페인 군에 20만 대군으로 저항했지만 1572년에 마지막 황제 투팍 아마루(만코 카파크의 아들)가 잡혀 처형당하면서 결국 완전히 멸망하였다.
안데스 산맥을 중심으로, 지금의 콜롬비아에서 페루, 칠레에 걸쳐 있던 잉카 제국을 스페인이 완전히 정복했던 것이다.
피사로의 잉카 제국 정복으로 스페인은 남아메리카 대부분을 식민지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스페인(에스파냐)은 이들 지역에 자국민을 이주시켜 정착촌을 형성하여 지배하는 식민지 개척이 아니고 무력으로 지배하면서 많은 금은 등을 수탈하여 스페인(에스파냐)으로 가져가는 식민지 경영이었다.
Ⅱ. 세계 제국의 시작
1. 포르투갈 제국
포르투갈 제국은 세계 첫 제국이었고, 1415년 세우타 정복부터 1999년 마카오의 중국 반환까지 거의 600년 동안 이어진, 가장 오래 지속된 식민지 제국이었다.
그리고 포르투갈은 스페인과 합병(1580 ~ 1668) 중에도 해외무역과 식민지 경영을 스페인의 간섭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운영하였다.
가. 포르투갈 제국 경영
포르투갈은 가톨릭 전파에 심혈을 기울였으나 스페인과는 다르게 국내의 유대인들을 추방하지 않고 명목상 가톨릭으로 개종하면 해외 식민지 개척 등에 참여시켜 이용하였다.
그런데 주앙 2세(João II, 1455~ 1495)의 4촌 동생으로 왕위를 계승한 마누엘1세(ManuelI, 1469 ~ 1521, 재위 1495 ~ 1521)는 스페인의 이사벨 1세(Isabel I de Castilla y Aragón, 1451 ~ 1504)와 페르난도 2세(Fernando II de Aragón, 1452 ~ 1516) 사이에 태어난 큰 딸 이사벨(Isabella, Princess of Asturias, 1470 ~ 1498, 포르투갈 주앙 2세의 왕세자 아폰수 Afonso 1475~ 1491와 초혼을 했으나 아폰수는 16세에 낙마로 사망)과 1497년 9월에 결혼하였다.
이사벨 1세는 정략결혼 조건으로 유대인 추방을 제시하였고 마누엘 1세는 이를 받아들여 1496년 12월에 유대인 추방령을 선포했다. 이에 많은 유대인들이 네덜란드와 이슬람으로 떠났으며 남아있는 유대인들은 개종해야만 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표면적으로만 개종했으며 마누얼 1세는 이를 용인했다.
마누엘 1세도 유대인들은 금융과 상업에 종사하며 부유한 자본을 가지고 있었고 국가 발전에 필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마누엘1세는 유대인들을 추방하고 왕위계승서열 2위(1위는 후안 왕자, 1497년 10월 사망)인 이사벨과 정략 결혼하여 이베리아 반도의 권력자가 되고 싶은 야망을 실현하고자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사벨 왕여(1470 ~ 1498)는 1498년에 왕자를 낳다가 죽었고 태어난 왕자도 2살에 죽었다.
그 후 마누엘1세는 이사벨 둘째 여동생 마리아(1482 ~ 1517)와 다시 결혼하였다(스페인의 카스티야는 후아나 1세가 계승).
마누엘 1세는 주앙 2세에 이어 인도 항해 개척을 계승하여 바스쿠 다 가마(Vasco da Gama, 1469? ~ 1524, 포르투갈의 항해가)의 인도 도착(1498)과 카브랄의 브라질 발견(1500)으로 포르투갈 해상제국을 실현하였다.
그런데 1506년 마누엘 1세가 의도하지 않은 가톨릭교도들에 의한 유대인 대학살 사건이 리스본에서 발생하여 7천여 명의 유대인이 죽었다.
다수의 유대인들은 자산가였고 채권자들이 많아 민중의 증오의 대상이 되었는데 유대인들에 대한 국왕의 정책이 바뀌자 민중이 폭도로 변했던 것이다.
포르투갈은 브라질(Brasil, 1500 ~ 1822), 마카오(Macau, 1553 ~ 1975, 중국), 동티모르(East Timor, 동남아시아 태평양의 섬, 1520년포르투갈인 상륙, 1722~ 1975), 앙골라(Angola, 아프리카남서부, 1482년 포르투갈인 상륙, 1575 ~ 1975, 1641 ~ 1661 네덜란드점령, 17 ∼ 19C 포르투갈의 노예무역 중심지, 1975년 독립), 기니비사우(Guinea-Bissau, 아프리카 서쪽 연안, 1446년 포르투갈 발견, 17~18세기 노예 무역, 1879년 포르투갈령 기니, 1974년 독립), 카보베르데(Cabo Verde, Cape Verde, 아프리카 서쪽 대서양 섬, 1456년 발견, 1975년 독립), 상투메 프린시페(São Tomé e Príncipe, 아프리카 서쪽 대서양 섬, 1471년 발견, 사탕수수, 노예 중계, 19C 카카오커피 플랜테이션, 1975년 독립), 모잠비크(Mozambique, 아프리카 남동부, 1498년 바스코 다 가마 상륙, 1505 ~ 1975년 독립) 등의 식민지를 둔 제국을 건설하였으며, 이를 통해 전 세계에서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강대국이 되었다.
포르투갈 기원의 과자로 에그 타르트(Egg tart)가 있다.
타르트(tart, tarte)는 얕은 원형 틀(파이접시)에 파트 브리제(pâte brisée, 반죽형 파이반죽)로 만든 접시 모양에 과일이나 크림을 채워서 구운 과자이며 접시 모양의 반죽에 달걀노른자, 생크림 등을 섞어 만든 커스터드크림(custard cream)으로 속을 채워 구운 파이를 에그 타르트(Egg tart)라 한다.
포르투갈 리스본의 제로니모스 수도원(Mosteiro dos Jerónimos)에서는 달걀흰자를 이용하여 제복에 풀을 먹였는데, 이때 남은 달걀노른자를 이용하여 타르트를 만든 것이 에그 타르트(Egg tart)의 시작이며 1820년대 자유주의 운동의 여파로 이 수도원이 문을 닫으면서 에그 타르트 레시피는 민간으로 퍼져나갔다.
포르투갈이 인도로 진출함에 따라 인도항로 주변의 오스만 제국, 맘루크 술탄국 등 인도항로를 지배하고 있던 기존의 이슬람 국가들의 저항이 거셌다.
1508년 멜리카즈(Meliqueaz)가 이끄는 맘루크 술탄국의 함대는 인도양의 차울 항구를 급습하여 포르투갈 군과 해전을 치러 승리하였다. 차울 해전(Battle of Chaul,1508. 3.)에서 포르투갈의 인도총독 프란시스코 데 알메이다(Dom Francisco de Almeida, 1450 ~ 1510)의 아들인 로렌스데 알메이다(Lorenço de Almeida,1480 ~ 1508)가 전사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프란시스코 데 알메이다(Dom Francisco de Almeida, 1450 ~ 1510) 총독은 아들의 복수를 다짐하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1509년 포르투갈의 인도 항로 개척으로 손해를 본 오스만 제국, 맘루크, 베네치아 등 인도 항로 인접국들의 연합군은 인도 북서부의 디우항에서 벌어진 디우 전투(Batalha de Diu, 1509. 2.)에서 몇배나 많은 함선으로 포르투갈 군을 공격하였으나 배의 성능이 뒤지고 화력이 약해 패하였다.
포르투갈은 프란시스코 데 알메이다(Dom Francisco de Almeida, 1450 ~ 1510) 총독이 지휘한 이 해전에서의 승리로 유럽 역사상 처음으로 인도양을 지배하게 되었으며 세계를 제패하려는 오스만 제국의 꿈에 상처를 입혔다.
오스만 제국은 1538년과 1547년에도 대규모 함대를 디우에 파견하여 포위전을 펼쳤지만 모두 실패하였으며 인도양의 제해권은 완전히 포르투갈에 넘어갔다.
오스만 제국(셀림 1세, 재위 1512 ~ 1520)은 대포와 머스킷 소총 등으로 무장한 강력한 대군을 해외로 파병하여 기병으로 맞선 맘루크 군을 격파하여 1516년 시리아를 점령했으며, 1517년에 맘루크 왕조를 무너뜨리고 이집트를 점령하여 홍해로 진출하자 오스만 제국과 포르투갈 간의 충돌이 빈번하게 되었다.
1538년 하딤 슬레이만 파샤(Hadim Suleiman Pasha, 1467 ~ 1547)가 이끄는 오스만 함대는 홍해 연안의 포르투갈 지배하에 있던 항구도시와 제다, 지주 티, 아덴등을 점령하였다.
포르투갈의 식민지 경영은 사금과 노예의 획득, 향료를 비롯한 몇 가지 농산물의 수입에 주력하였으며, 수도 리스본은 각지로부터 유입된 부(富)의 집산지로써 크게 번창하였다.
포르투갈은 이렇게 원양 교역에만 집착하고 그 부(富)로 외국 물품을 수입하여 사용했으므로 국내 산업은 발전시키지 못했다.특히 직물 산업이 발달하지 못해 직물을 영국에서 수입했으므로 나라의 부(富)가 영국으로 빠져나갔다.
포르투갈의 부(富)는 왕실과 귀족에게만 집중되었으며, 이들의 낭비와 경제정책의 실패로 인하여 국내 부(富)는 형성되지 못하였다.
그리고 해외로 나간 상선이 약탈을 당하거나 침몰하고 일부만 돌아와도 얻는 수익은 많았으나 이들 부(富)는 왕과 귀족이 차지하여 선원들은 가난하였으며 바다에서 죽어 줄어든 선원을 채울 선원을 쉽게 양성할 수 없었다.
또 14세기 이후에도 페스트병이 계속 창궐하여 많은 사람이 병사하고 식민지의 반란과 주변국의 침략으로 수많은 병사를 잃어 나라를 지킬 병력 자원을 구할 수도 없을 정도가 되었다.
군인들과 선원들로 많이 빠져나감에 따라 국내의 부족한 노동력은 서아프리카에서 수입해 온 흑인 노예로 충당하였다.
포르투갈은 1578년, 세바스티앙 1세(Sebastião I, 1554 ~ 1578, 재위 1557 ~ 1578)가 모로코의 무슬림을 상대로 십자군 원정(아브 마르완 압드 알 말리크 1세에 의해서 모로코의 왕위를 빼앗긴아브 압둘라 무하마드 2세가 포르투갈에 지원을 요청)을 하였으나 알카세르 퀴비르 전투(Battle of Alcácer Quibir, 1578)에서 패하고 후계자 없이 사망하여 왕위 승계권 문제가 일어났고 1580년 스페인(펠리페 2세, Felipe II de España)과의 전쟁으로 통합되어 60여 년간 카스티야-레온 연합 왕국, 아라곤 왕국처럼 스페인의 부속 왕국으로 전락하였다. 포르투갈이 스페인의 부속 왕국이 되었다는 것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화학적으로 융합된 하나의 국가가 아니고 같은 왕 밑에 각각 독립적으로 운영되었던 것이다.
나. 포르투갈의 식민지 경영
1) 포르투갈의 아프리카와 아시아 경영
포르투갈 주앙 1세(João I, 재위 1385~1433)의 아들인 엔리케 왕자(항해왕, 航海王, Prince Henry the Navigator, Henrique o Navegador, 1394 ~ 1460)가 파견한 질 이아네스(GilEanes, 1395 ~?)가 이끄는 탐험대는 1434년(두아르트 드 아비스, Duarte de Avis, 재위 1433 ~ 1438)에 서아프리카의 보자도르곶(串, 카보 보자도르, CaboBojador)에 닿았다.
이렇게 인도양에 진출한 포르투갈은 해상무역로를 독점하였으며
1443년 엔리케 왕자(항해왕 엔히크, Henrique o Navegador, 1394 ~ 1460)는 왕과교황의 허가를받아 선박 항해의 면허제를 시행하였다.
1446년에 알바로 페르난데스(Álvaro Fernandes)는 기니(Guinea) 지역을 발견하였다(아폰소 5세 Afonso V, 재위, 1438 ~ 1477).
1460년 엔리케 왕자가 죽었으며 그때까지 아프리카 서해안의 코나크리(Conakry, 기니 수도) 부근까지 탐험하였다.
엔히크 항해왕자(Infante Dom Henrique, o Navegador, Prince Henry the Navigator, 1394~ 1460)가 죽고 아프리카 탐험이 주춤해지자 아폰수 5세(Afonso V de Avis, 재위 1438 ~ 1481)는 아프리카 탐험을 다시 실행하기 위해 민간주도 방식을 도입했다.
이에 탐험가이자 상인인 페르낭 고메스(Fernão Gomes, ?~?)는 1469년 아폰수 5세(Afonso V de Avis, 재위 1438 ~ 1481)로부터 5년간의 아프리카 개척 및 무역 독점권을 부여받았다. 매년 아프리카 해안의 남쪽으로 100레구아(약 600km)을 전진하고 500 크루사도스를 왕에게 바치기로 하는 조건이었다.
다시 포르투갈의 탐험이 재개되어 1469년에 상아 해안(코트디부아르), 후추 해안(시에라리온), 황금해안(가나), 노예해안(토고, 베냉, 나이지리아) 등으로 불리는 기니 만(灣) 연안을 탐험하였다.
기니 만(灣) 연안에서 상아 무역이 활발했기 때문에 코트디부아르(Côte d'Ivoire) 해안을 상아 해안(象牙海岸, Ivory Coast)이라 불리게 된다.
그리고 라이베리아,시에라리온 연안에서 후추를 발견하여 이 해안을 후추 해안(胡椒 海岸, Pepper Coast)이라 하며 후추를 무역하였다고곡물 해안(穀物 海岸, Grain Coast)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1471년 페르낭 고메스(Fernão Gomes)는 20척의 배들을 이끌고 적도를 지나 상투메프린스페(São Tomé and Príncipe, 1470년 João de Santarém과 Pedro Escobar가 발견) 섬에 식민도시를 건설했다.
이어서 1471년 포르투갈 선교사들이 해변에 널려 있는 황금을 발견한 기니 만(灣)의 황금해안(Gold Coast)에 도착하여 엘미나(Elmina,광산)라는 사금 생산지를 발견하였으며 철제 제품 등을 주고 많은 양의 금을 거래하였다.
페르낭 고메스(Fernão Gomes)는 황금뿐만 아니라 노예, 후추, 상아 등을 무역하여 많은 수익을 올렸으며 이 수익으로 1471년 와타시드 (Wattassids, 1471 ~ 1554, 모로코 지역) 왕조의 영토인 아실라(Asilah, 모로코 북서부 연안), 크사르 에스 세기르(Ksar es Seghir, Alcácer Ceguer), 탕헤르(Tangier)를 정복할 때 전투를 지원하여 기사 작위를 받았다.
1482년 주앙 2세(João Ⅱ, 재위 1477~1495)는 이곳을 개척하여 요새를 건설하였으며 포르투갈인들이 사금(砂金)을 패닝(panning, 비중 선별법)으로 채취하였고 후에는 굴착하여 채굴하면서 황금해안(黃金海岸, Gold Coast, 가나 해안)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기니(Guinea) 지역에서는 인구의 절반이 노예로 팔려 노예해안(奴隸海岸, Slave Coast)이라 불리게 되었다. 1482년에 발견한 엘미나(Elmina,가나)는 후에 노예무역의 중심지로 개발되었다.
1490년 앙골라 해안 루안다를 식민지로 만들고 노예무역을 하여 콩고, 앙골라의 많은 원주민이 노예로 팔려 나갔다.
포르투갈은 15세기 이후 대항해로 인도항로를 개척(1498년 6월 바스코 다가마 인도 캘리컷 도착)함에 따라 아프리카, 서아시아, 인도 등을 점령하였던 것이다.
포르투갈은 이렇게 인도 항로를 개척하여 인도양에 진출하자 해상무역로를 독점하면서 카르타즈(cartaz)라는 해상 무역 허가서(출입증)를 1502 ~ 1750년 동안 발행하여 인도 항로의 항해를 통제했다.
마누엘 1세(Manuel I de Portugal, 재위 1495~1521) 때인 1502년 바스코 다 가마의 두 번째 인도 항해에서 아프리카 대륙 동부 인도양에 있는 킬와(Kilwa, 탄자니아)를 침략하여 술탄에게 공물을 바칠 것을 강요하였다.
1503년 잔지바르(Zanzibar, 탄자니아의 섬)에 도착한 프란시스코 드 알메이다(Francisco de Almeida, 1450 ~ 1510, 제1대 인도 총독) 선단의 라바스코(Ruy Lourenço Ravasco Marques) 대위는 원주민 배들을 대포로 공격하여 위협하고 물건을 강탈했다.
1505년 프란시스코 드 알메이다는 동아프리카의 요충지인 소팔라(Sofala, 모잠비크), 킬와(Kilwa, 탄자니아),몸바사(Mombasa, 케냐)를 침략하였으며 1507년 동아프리카 모잠비크 섬에 요새를 건설하고 식민지화하였다.
프란시스코 드 알메이다는 1508년 차울(Chaul) 해전에서 맘루크(이집트 아라비아의 이슬람) 함대에 패하였으나 1509년 디우 전투(Batalha de Diu, Diu Muharebesi, 아라비아해의 인도 북서부 항구)에서 포르투갈은 비자야나가라 제국과 연합하여 인도의 구자라트-맘루크 연합군을 격파함으로써 서양의 해양 세력이 동양 해양 세력을 누루고 패권을 차지하게 되었다.
포르투갈의 알부케르크(Alffonso de Albuquerque, 1453 ~ 1515 제2대 인도 총독)는 인도 고아(1510)뿐만 아니라 말레이시아의 말라카(Malacca, 후추 집산지, 중계 항구, 1511)를 점령하였다.
포르투갈은 인도네시아(몰루카, Molucca, 후추 생산지), 중국(마카오), 실론섬(스리랑카, 1518년 요새 건설), 베트남(1523년) 등에도 거점마다 식민지를 건설하여 무역 망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이들 인도, 아세아 나라들은 강하여 무력으로 멸망시킬 수는 없었다. 그래서 포르투갈은 이들 지역에 자국민을 이주시켜 정착촌을 형성하는 식민지 개척이 아니고 해안 거점마다 성을 쌓아 요새를 건설하고 대포를 설치하여 무력으로 무역소를 보호하여 향신료 등을 교역(交易, trade)하여 포르투갈로 가져가는 방식이었다.
16세기에는 인도인, 동남아인, 일본인 등도 리스본까지 끌고 와 노예무역을 하였다.
2) 포르투갈의 브라질 식민지 경영
1500년 페드루 알바레스 카브랄(Pedro Álvares Cabral, 1467 ~ 1420)의 인도 원정대가 브라질을 발견하고 포르투갈 왕국의 영토로 선포하였다.
그러나 포르투갈은 중국, 인도, 동인도 등과의 교역에 집중하였으므로 브라질에 관심이 별로 없었다.
그러자 프랑스인이 브라질에 들어와 염료(빠우 브라질)를 채취하고 해안을 탐사하였다. 프랑스인들의 침략을 막기 위해 1530년 포르투갈은 마르팅 아폰수 드 소사(Martim Afonso de Sousa, 1500 ~ 1564, 인도총독)를 파견하여 프랑스인의 거주를 금지시키고 상비센티(São Vicente)에 정착촌을 건설하였으며 탐사를 하였다.
처음에는 15개 도독령(Capitanias do Brasil, 1534 ~ 1548), 다음엔 총독령(Governo-Geral do Brasil, 1549 ~ 1621), 포르투갈 왕국의 브라질 주(Estado do Brasil, State of Brazil, 1621 ~ 1815), 브라질 왕국(Reino do Brasil, 1815 ~ 1822)으로 지배하였다.
브라질의 원주민은 여러 종족의 인디오들이며 유목 및 반유목 생활을 하며 살고 있었다. 여러 종족의 인디오는 1,000여 개의 언어를 사용하며 각각 다른 풍습의 생활을 하는 통일된 국가가 아니었으므로 포르투갈은 큰 저항을 받지 않고 쉽게 인디오들을 밀어내거나 노예로 삼았고 그리고 아프리카 흑인 노예를 이주시켜 식민지로 개척하였다.
식민지 초기에 '빠우 브라질(pau-brasil, 파우 브라지우)'이라는 빨간색(보라색) 염료를 브라질 나무(brazilwood, Pernambuco wood 페르남부코 나무, 학명 Paubrasilia echinata, 콩과식물)에서 발견하여 채취했는데 브라질이라는 이름은 이 염료의 이름에서 가져온 것이다.
포르투갈은 브라질을 식민지로 만든 후 황금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포르투갈은 브라질에 대규모 사탕수수 농장, 담배농장, 커피농장, 목화 농장 등을 경영하였다.
포르투갈인들은 상비센티(São Vicente)의 정착촌 건설시기부터 사탕수수를 재배하였으며 산타카타리나 섬(Santa Catarina Island), 데메라라(Demarara, 남미 북동부 해안에 있는 가이아나 Guianas에 있는 지역), 수리남의 북쪽 해안 등에 사탕수수 재배농장과 제당소(製糖所, sugar mill)가 수없이 많이 건설되었다.
아프리카에서 끌고 온 흑인 노예와 내륙에서 잡아 온 인디오를 사탕수수 재배 농장의 노예로 이용하였다.
목화는 영국에 수출하고 사탕수수는 아메리카의 2위 생산국으로 막대한 부가 창출되었다.
유럽에서 소를 들여와 농작물의 운송수단과 육류 공급원으로 이용함에 따라 목축업이 일어나 사탕수수 농장주들과 농경지를 차지하기 위한 충돌이 생겨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포르투갈 왕실이 브라질과 포르투갈 간의 무역과 운송에 대한 독점권을 행사하여 대부분의 부(富)를 가져갔다.
1690년대부터 미나스 게라이스(Minas Gerais, 브라질 남동부), 고이아스(Goiás, 브라질 중부 고원 지대), 마투그로수(Mato Grosso, 브라질 중서부 지방) 지역에서 많은 금광이 발견되었다.
금광이 발견되자 해안가에 모여 살던 인구가 내륙으로 많이 이동하였다.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부라질은 혼혈이 많이 생겨나 메스티소(mestizo, 인디오와 포르투갈, 스페인계 백인 사이의 혼혈)와 물라토(mulato, 백인과 흑인의 혼혈), 파르도(pardo, 다인종 혼혈) 등으로 구성원이 다양해졌다.
브라질의 커피 생산은 1727년 포르투갈 주앙 5세(João V de Portugal, 재위 1706 ~ 1750)의 커피나무 씨앗을 구하라는 명령을 받은 프란시스코 데 멜로 팔레타(Francisco de Melo Palheta, 1670 ~ 1750, 탐험가, 해안경비대 중위)가 프랑스와 네덜란드 간에 일어난 기니(Guinea, 서아프리카에 위치)의 분쟁을 조정해 달라는 초청으로 기니에 갔다가 프랑스 총독 부인(염문艷聞이 있음)이 준 꽃다발에 커피나무 씨앗을 숨겨서 몰래 가져와 브라질의 파라(Para) 주에 심어 브라질에서 커피가 재배되기 시작하여 커피 플랜테이션 농장으로 발전하였다.
브라질이 포르투갈로부터 독립한 1822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생산되었으며 현재는 세계 1위 생산국이다.
고무(rubber)를 생산하는 고무나무는 남아메리카가 원산지이며 아마존강 유역과 아프리카 콩고 등에서만 야생하였다.
고무(rubber, 천연고무)는 파라고무나무(Hevea brasiliensis)의 수액에서 얻는다. 고무나무줄기에 칼로 흠집을 내면 흰색 수액이 나오는데 이것을 채취하여 고무의 원료로 사용한다. 고무나무는 종류가 다양한데 종류마다 채취되는 천연고무의 탄성이 다르다.
고무가 유럽으로 전해진 것은 18세기 후반이었다.
1770년에 에드워드 네어(Edward Nairne, 1726 ~ 1806, 영국, 안경사, 과학기기 제조사)가 빵조각으로 연필 글씨를 지운다는 것이 실수로 고무조각을 사용하였는데 잘 지워졌다. 그래서 고무조각을 지우개로 팔았다고 한다.
그리고 고무의 이름을 rubber(문지르다)라고 사용하게 된 것은 조지프 프리스틀리(Joseph Priestley, 1733 ~ 1804, 영국, 화학자, 산소 발견)가 1770년에 식물에서 추출한 고무를 '흑연을 지우는 용도'로 사용할 수 있다는 기록을처음으로 남긴 것에서 유래하였다.
그런데 채취한 자연산 고무는 온도에 민감하여 여름에는 녹고 겨울에는 부스러져 별로 이용가치가 없었다.
그러던 중 1839년 찰스 굿이어(Charles Goodyear 1800 ~ 1860, 미국, 무학력의 발명가, 에보나이트 ebonite 발명)가 고무를 황과 반응시키면 탄성이 매우 커지고 내약품성, 내열성이 생성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고무나무에서 채취한 생고무에 열을 가하면서 황을 배합제로 첨가하는 가황(加黃, vulcanization)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고무는 이용범위가 넓어졌던 것이다.
브라질의 고무 채취업자는 고무나무에서 채취한 고무를 유럽으로 수출하여 고소득을 올렸다. 이에 고무의 중요성을 인식한 브라질은 고무나무 씨앗이 해외로 방출되는 것을 금하였다.
그렇지만 영국은 1875년 브라질로부터 묘목을 몰래 수입하여 인도 식물원에 심었으나 실패하였고, 이듬해에 7만 개의 종자를 몰래 수집하여 영국의 큐 왕립식물원(Royal Botanic Gardens, Kew)에서발아시킨 것을 실론섬에 심어 재배에 성공하였다.
이 고무나무를 1877년 싱가포르(말레이시아), 1879년 인도네시아, 1886년 오스트레일리아에 전파하여 재배하였다. 그 후 열대 각지에 전파되어 재배되었으나 남아메리카에서는 병충해 발생 등으로 재배에 실패하였다.
현재는 말레이시아 및 인도네시아에서 전 세계 생산량의 95% 이상이 생산되고 있다.
그리고 아프리카 콩고에서는 벨기에의 레오폴드 2세(Leopold II, 1865 ~ 1909)가 콩고에 자유국을 세웠으나이름과는 달리 주민들에게 상아, 고무(아프리카 콩고 고유종), 야자유(油) 등의 채취량을 강제 할당하고는 할당량을 채우지 못한 주민들에게 극단적인 형벌을 주면서 이들 생산물을 끌어모아 개인 욕심을 채웠다.
포르투갈은 브라질에서 염료, 사탕수수 농장, 목화 농장, 커피 농장, 담배 농장 등을 경영하여 큰 이득을 얻었던 것이다.
2. 스페인 제국
가. 스페인의 제국 경영
스페인은 남아메리카 대부분과 북아메리카의 3분의 1, 필리핀 등을 지배하였으며 이들 식민지에서 원주민과 노예를 착취하여 서인도제도 등의 열대지방에서는 사탕수수, 커피 등의 플랜테이션 농장을 개발하여 수출하고 원주민과 노예들을 이용한 광산에서 생산된 엄청난 양의 황금과 은 등을 들여왔다.
스페인은 이런 막대한 금은의 재화를 이용하여 16세기에서 17세기 중반까지 150년간 많은 무기를 생산하고 군사력을 확보하여 이슬람 세력(오스만튀르크)과 프로테스탄트(신교도) 세력을 막아내고 프랑스를 고립시키며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이자 가장 넓은 해외 영토를 갖는 세계 제국이 되었다. 그때에 중국과 유럽은 은을 화폐로 사용하였고 이슬람은 아프리카와 페르시아에서 많이 생산된 금을 화폐로 사용하였던 것이다.
스페인은 제국을 정치적, 군사적으로 통합함과 동시에, 종교적, 민족적, 문화적 통합까지 이루려 했다. 이를 위해 가톨릭으로 개종하지 않은 유대인과 이슬람교도들을 추방했다. 1480년 종교재판과 1492년(17만 명 추방) 개종하지 않은 유대인 추방 등으로 26만 명의 유대인들이 탈출했다.
스페인 이사벨 여왕과 페르난도 왕은 그라나다 함락 석 달 후인 1492년 3월 '알람브라 칙령(Alhambra decree)'을 포고하여 이슬람과의 전쟁으로 이완된 민심을 추스르고 바닥난 재정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유대인을 추방하고 재산을 몰수하였던 것이다.
개종한 유대인도 겉으로만 개종하였으므로 마라노(marrano, 돼지, 지저분한 사람)라고 지칭하여 비하하였으며 돼지고기를 싫어하는 유대인에게 돼지고기를 먹게 하여 개종하였음을 나타내게 하였다. 지금도 스페인 축제에서는 애저요리(코치니요 알오르노 cochinillo al horno, 코치니요 아사도 Cochinillo asado, 토스톤 아사도 tostón asado, 생후 2주 된 아기 돼지를 통째로 구운 고기, 애저 哀猪 Cochinillo 어린 새끼돼지)가 이용되는데 이때에 생겨난 것이다.
그런데 이교도인 유대인과 이슬람교도들은 기술과 금융의 전문가들로 부(富)를 축적하고 있었다.
이들을 추방한 것은 나라의 전문가 집단을 무너지게 하는 것이었으며 더욱이 재산의 반출을 허용했으므로 나라의 부(富)가 빠져나갔던 것이었다. 이들은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었던 네덜란드로 가서 네덜란드 발전에 기여하게 된 것이다.
스페인의 부(富)는 식민지로부터 수탈하여 차지한 왕실과 귀족층에 편중되었고 유대인, 이슬람 등 전문집단이 쌓아 올린 부(富)는 빠져나갔으며 식민지로부터 차지한 부를 국내 산업에 투자하지 않아 국내 산업이 발전되지 않았으므로 생필품을 수입하는 등 일반 백성들의 삶이 형편 없는 등 기초가 허약한 나라가 되었다.
더욱이 식민지의 산업 수준이 본국 수준에 이르자 스페인은 본국 생산품이 식민지에서 필요하지 않아 외국에서 물품을 수입하여 식민지와 교역을 하게 되니 식민지와의 무역 수익이 점점 줄어들어 갔다.
이 시기 스페인에서는 왕실은 사냥 등 호화 생활을 이어갔으며 귀족층을 중심으로 한 사회에서는 회화, 건축과 같은 문화가 발전하고, 문학과 철학이 융성하였다.
대외적으로는 식민지를 차지하기 위해 포르투갈과 충돌하고, 독일과 프랑스의 신교에 맞서 가톨릭을 수호하는 종교 전쟁을 치르며 유럽 각국 정치에 간섭을 하는 등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특히 1545년 이후로 멕시코(1520년대 과나후아토Guanajuato, 1546년부터 사카테카스Zacatecas에서 은을 채굴)와 페루(1545년 포토시Potosí에서 은광 발견)에서 은광이 발견되어 수많은 양의 은이 유입됨에 따라 스페인은 축적된 재화로 수많은 대형 교회를 세우고 군대를 강화하여 네덜란드 독립 전쟁(Dutch War of Independence, 1567 ~ 1648), 대 이탈리아 전쟁 (grandi guerre d'Italia, 1494 ~ 1559), 오스만-합스부르크 전쟁(Ottoman-Habsburg Wars (1521 ~ 1791), 영국 - 스페인 전쟁(Anglo-Spanish War, 1585 ~1604), 국내의 반란 진압 등을 치르는 동안 국가 재정은 적자에 허덕였다.
많은 투자로 강화된 스페인의 해군 부대는 펠리페 2세(Felipe II, 재위 1556 ∼ 1598) 때인 1571년 오스만의 주력 함대를 레판토 해전에서 완전히 격파함으로써 무적함대(無敵艦隊, Spanish Armada)로 불리게 된다(스페인, 교황청, 베네치아, 제노바 등의 신성동맹 함대).
펠리페 2세(Felipe II, 재위 1556 ∼ 1598) 때에는 1580년 포르투갈을 병합하는 등 스페인 최대의 황금기를 맞지했다.
그런데 영국이 네덜란드의 독립 전쟁을 지원하며 가톨릭을 억제하고 성공회를 국교로 결정함에 따라 이를 응징하기 위해 펠리페 2세(Felipe II, 재위 1556 ∼ 1598)가 일으킨 영국 - 스페인 전쟁(Anglo-Spanish War, 1585 ~1604)에서 1588년 133척의 무적함대(無敵艦隊, Spanish Armada)가 영국으로 원정하였으나 해전에서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 재위 1558 ~ 1603)의 약한 함대에게 크게 패한 이후 스페인은 서서히 약해졌다.
펠리페 3세(Felipe III, 재위 1598 ~ 1621)는 1609년네덜란드와의 휴전협정을 맺은 후에는 모리스코(morisco, 이베리아 반도에 거주한 이슬람교도)들에 대한 추방령을 내렸다. 30만 명에 달하는 인구가 스페인에서 빠져나갔는데 이들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스페인 농업은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스페인은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신성로마제국(독일 오스트리아) 내의 신구교의 갈등이 국제 전쟁으로 확대된 30년 전쟁(1618 ∼ 1648년, 신구교 간 종교전쟁)에서 스페인 펠리페 3세(Felipe III, 재위 1598 ~ 1621, 포르투갈 필리피 2세 Filipe II)가 신성로마제국에 가담하여 전쟁이 진행되자 구교도 국가인 프랑스는 스페인과 신성로마제국의 포위에 압박감을 느껴 신교도 편에 서서 스페인을 공격함에 따라 스페인은 30년 전쟁(1618 ~ 1648, 신구교 전쟁, 구교도 국인 프랑스는 신교도 편에 가담 승리, 스페인, 오스트리아 패배)에서 패하였다.
스페인은 펠리페4세(FelipeIV, 재위 1621 ~ 1665, 포르투갈의 왕 재위 1621 ~1640) 때에 일어난 카탈루냐(1640)의 반란, 안달루시아(세비야)의 메디나 시도니아 9대 공작과 아야몬테 후작의 1641년 반란, 1646~1647년에 시칠리아에서 반란, 1647년에 나폴리에서반란, 1648년 나바라의 이하르 공작의 반란 등 내부 반란의 진압에 국력이 소모되고 30년 전쟁에 패하자 포르투갈(1668)과 네덜란드(1648)가 독립하였다.
30년전쟁은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Peace of Westphalia, WestfälischerFriede, 1648)을 맺고 끝이 났으나 1659년 스페인은 1635년에 시작된 프랑스-스페인 전쟁(30년 전쟁 중에 발생된 프랑스-스페인 전쟁, 1635 ~ 1659)에서 패배하여 프랑스와 피레네 조약(Treaty of the Pyrenees, 1659)을 체결하고 루시옹(Roussillon)과 아르투아(artois) 등 스페인령 네덜란드 영토를 잃었다.
피레네 조약(Treaty of the Pyrenees, 1659)은 프랑스의 루이 14세(Louis XIV, 재위 1643 ~ 1715)의 재상이었던 쥘 마자랭 추기경(Jules Raymond Mazarin, cardinal-duc de Rethel et de Mayenne et de Nevers, 1602 ~ 1661)과 스페인의 펠리페4세(FelipeIV, 재위 1621 ~ 1665, 포르투갈의 왕 재위 1621 ~1640)의 루이스 멘데스 데 하로(Luis Méndez de Haro, 1598 ~ 1661, 귀족, 정치가)가 프랑스와 스페인 국경의 비다소아강 서쪽 끝부분에 있는 하중도(河中島, river island, 강 속의 섬)인 꿩섬(Pheasant Island, 페상섬)에서 회담하여 체결되었고 회담 체결 내용 중에 양국은 6개월씩 번갈아가며 무인도인 꿩섬(Pheasant Island)을 관리하기로 하였으며 지금도 그 방식대로 관리하고 있다.
루이 14세(Louis XIV, 재위 1643 ~ 1715)의 아내 마리아 테레사가 카를로스 2세(Carlos II, 재위 1665 ~ 1700)의 이복 누나여서 루이 14세는 카를로스 2세의 매형이었지만 스페인을 지속적으로 침략했다.
루이 14세가 네덜란드의 플랑드르가 프랑스 영토라고 침입하여(귀속 전쟁 War of Devolution, 1667 ~ 1668) 스페인령 네덜란드와 프랑슈콩테의 상당 부분을 점령했다. 이에 네덜란드는 프랑스와의 동맹을 파기하고 잉글랜드-스웨덴과 함께 삼중동맹을 맺는 등으로 대항했다.
스페인과 프랑스는 엑스라샤펠 조약(Treaty of Aix-la-Chapelle, 1668)을 맺어 귀속 전쟁(War of Devolution, 양도 전쟁, 1667 ~ 1668)을 끝냈으며 이 조약으로 스페인은 프랑스로부터 플랑드르의 캉브레(Cambrai), 에어 쉬르 라 리스(Aire-sur-la-Lys), 생오메르(Saint-Omer), 프랑슈콩테(Franche-Comté)를 반환받고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플랑드르 일부(Armentières, Bergues 등)를 할양했다.
1678년 루이 14세가 네덜란드를 침입함에 따라 네이메헨 조약(Treaties of Nijmegen, 1678 ~1679)으로 프랑슈콩테(Franche-Comté), 생오메르(Saint-Omer)와 아르투아(Artois)의 나머지 부분을 잃었고, 1697년 대동맹 전쟁(1688 ~ 1697, 아우크스부르크 동맹전쟁, 9년 전쟁, 팔츠 계승 전쟁)의 결과로 맺어진 레이스베이크 조약(Treaties of Rijswijk, 1697)으로 서인도 제도의 히스파니올라섬(아이티)을 프랑스에 양도했다.
그리고 1668년 카를로스 2세는 포르투갈과 리스본조약(Tratado de Lisboa, 1668)을 체결하여 세우타를 할양받고 포르투갈의 독립을 승인했다.
스페인의 카를로스 2세(Carlos II, 재위 1665 ~ 1700)는 후사가 없었으며 스페인 왕위를 계승할 수 있는 후보는 합스부르크 왕조의 독일 황제 레오폴 1세(Léopold Ier, empereur d'Allemagne, 1640 ~ 1705)의 외손자 호세 페르난도와 오스트리아 황제 레오폴트 1세(Leopold I, 재위 1658 ~ 1705)의 차남인 카를로스, 그리고 프랑스의 루이 14세의 손자 필리프였으며 이 중 호세 페르난도를 후계자로 지명했으나 1699년에 갑자기 죽었다.
그래서 스페인의 왕 카를로스 2세(Carlos II, 재위 1665 ~ 1700)는 즉위 기간 내내 루이 14세의 공격을 받아 프랑스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오스트리아와 바이에른의 비밀협약(1698, 바이에른의 페르디난트가 스페인, 저지대 국가(벨기에)와 스페인의 아메리카 식민지를 받고, 앙주(Anjou)의 필리프가 시칠리아와 나폴리를, 카를 대공은 밀라노와 이탈리아의 나머지 영토 및 스페인 북부 기푸스코아를 받기로 함)에 분노해 프랑스의 17살 난 앙주 공 필리프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했다.
필리프는 프랑스 루이 14세의 둘째 손자로서 조모는 스페인 카를로스 2세의 누이인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사였다. 앙주 공 필리프를 펠리페 5세로 지명한 것은 마리아 테레사의 아들과 첫째 손자는 일찍 죽고 손자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배경으로 인하여 필리프는 1700년 스페인의 카를로스 2세(Habsburgo, 합스부르크 왕조)가 1700년 자손 없이 서거하였을 때 펠리페 5세(Philip V, 재위 1700 ~ 1724, 1724 ~ 1746)로 스페인 왕위를 계승하여 스페인 보르봉 왕조(Borbón, 1700 ~ 1808, 1813 ~ 1868, 1874 ~ 1931, 1975 ~ 현재)를 열었다.
스페인-프랑스가 연합하는 거대 제국을 우려했던 유럽의 주변국인 신성 로마 제국과 영국, 네덜란드 등은 펠리페 5세의 왕위 계승권을 부인하고 1701년에 동맹을 맺어 오스트리아 황제 레오폴트 1세(Leopold I, 재위 1658 ~ 1705)의 차남인 카를로스 대공을 스페인 왕으로 추대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카탈루냐 - 아라곤 연합 왕국도 합스부르크 왕가의 카를로스 대공을 지지했다. 이들 양진영 사이에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War of the Spanish Succession, 1701 ~ 1714)이 일어났으며 1707년 버윅 공작을 위시한 스페인-프랑스 군대가 스페인 동부에서 벌어진 알만사 전투(Battle of Almansa, 1707, 펠리페 5세와 카를로스 대공의 양 진영 간의 전투)에서 영국, 포르투갈, 네덜란드, 신성 로마 제국의 연합군에 승리하였지만 그 후 오우데나르데 전투(Battle of Oudenarde,1708, 벨기에)에서 영국, 네덜란드, 신성 로마 제국의 연합군에 프랑스군이 참패하였으며 1710년에 합스부르크의 카를로스 대공이 마드리드에 입성했다.
그런데 1711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요제프 1세(Kaiser Joseph I, 재위 1705 ~ 1711)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동생인 카를로스 대공이 신성 로마 제국의 카를로스 6세(Kaiser Karl Ⅵ, 재위 1711 ~ 1740)로 즉위하면서 유럽의 세력균형을 위협하는 존재가 펠리페 5세가 아니라 카를로스 6세가 될 수 있었다.
이에 영국과 네덜란드는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에서 펠리페 5세가 프랑스의 왕위 계승을 포기하기를 요구하였으며 펠리페 5세는 이에 응하여 스페인 왕위를 인정받게 되었다. 영국도 앤 여왕(Anne, 재위 1702 ∼ 1714)의 왕위 승계를 인정받았다.
스페인 왕위에 오른 펠리페 5세는 자신의 왕위에 대해 반기를 들었던 국내의 카탈루냐(바르셀로나 백작의카탈루냐 군주국, 1162 ~ 1714) - 아라곤(아라곤 왕국, 1035 ~ 1707)이 연합된 아라곤 연합왕국(Corona d'Aragón, Crown of Aragon, 1162 ~ 1716)에 대해서는 종래의 자치권을 박탈하고 카스티야(Castilla)에 종속시키는 강경책을 실시하였다.
스페인은 아라곤 연합 왕국을 합병하므로서 포르투갈을 제외한 이베리아 반도 전역을 법적으로 통일하였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은 영국, 네덜란드 및 오스트리아 3국이 신대륙의 무역을 확보하려는 전략에서 프랑스와 스페인의 제휴에 반대하여 전쟁을 시작하여 유럽 대륙, 인도, 아메리카 식민지(앤 여왕 전쟁)까지 확대되었으며, 동맹군 측에 유리하게 진전되어 위트레흐트 조약(Treaty of Utrecht, 1713 ∼ 1715)을 맺었다.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영국은 프랑스로부터 허드슨만과 아케디아(Acadia, 미대륙의 동북부 끝) 등 미국 식민지 일부를 할양받았고 스페인으로부터 지브롤터와 미노르카섬(Minorca, 스페인 발레아레스 제도의 한 섬), 그리고 아시엔토(Asiento, 스페인의 아메리카 식민지에 노예 공급권)를 획득하였다. 네덜란드는 상업상 특권을 승인받았고 프로이센은 프랑스로부터 뇌샤텔(Neuchâtel, 현 스위스 서부)과 겔덜랜드(Gelderland, 헬데를란트, 현 네덜란드 중동부)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인정받았다.
그리고 이듬해인 1714년에 라슈타트 조약(treaty of Rastatt)과 바덴 조약(treaty of Baden)으로 스페인은 독일과 오스트리아에게 네덜란드 지역과 이탈리아 내에 있는 소유령들을 잃음으로써 스페인 제국의 영토는 이베리아 반도의 카스티야와 아라곤, 그리고 아메리카 식민지로 축소되었다.
17세기 중반부터 수많은 수도원 건설, 왕실의 과다한 재정 지출과 영국과의 전쟁,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네덜란드 독립전쟁 등 계속되는 수많은 전쟁으로 인해 전쟁비용이 늘어나 적자 재정으로 변했다. 더욱이 이슬람인들이 지중해에 빈번히 출현하는 해적과 내통할 것을 두려워하여 수많은 이슬람교도를 추방하였고 페스트병이 14세기 이후에도 계속 유행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으며 계속된 전쟁에 출병하여 전사하는 등으로 인구는 점점 감소하였고 유래 없는 자연재해로 국력이 쇠퇴하는 등 적자 재정과 인구의 감소로 스페인 제국은 점점 쇠퇴했던 것이다.
스페인은 남미, 중미, 서인도 제도에 있던 많은 식민지를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 등에 잃었다.
그러나, 스페인은 여전히 유럽 국가 가운데 러시아를 제외하고 가장 넓은 영토를 갖고 있는 강력한 국가였다.
특히 스페인 제국은 부르봉 스페인 왕가(1700 ~ 1931, 1975 ~)가 시작된 때에 부흥되었다.
펠리페 5세(Felipe V, 1700 ~ 1746)는 아메리카 대륙과 유럽 대륙 사이의 무역을 크게 장려했고, 군사력을 발전시키며 내치에도 힘을 쏟았다.
카를로스 3세(Charles Ⅲ, 재위1759 ~ 1788) 때에는 아메리카 대륙에 남부 아르헨티나에서부터 미국 서부, 중부, 남부, 루이지애나 일부와 캐나다 남부까지 차지하였다.
카를로스 4세(CharlesIV, 재위 1788 ~ 1808) 때 프랑스에 대혁명(French Revolution, 1789 ~ 1794)이 일어나 루이 16세를 처형하자 정치에 관심이 없는 카를로스 4세를 대신하여 왕비 마리아 루이사(María Luisa de Parma, 1751 ~ 1819, 카를로스 4세의 4촌)가 대(對) 프랑스 동맹에 가담하자 프랑스 제1공화정(1792 ∼ 1802)의 혁명군이 1793년에 침입하여 전쟁을 벌인 결과 패하였으며 전쟁에 패한 스페인은 1795년에 제2차 바젤 조약(second peace of Basel, 1795.7)을 체결하여 히스파니올라 섬의 동부 3분의 2를 프랑스에 내어주고 기푸스코아(Gipuzkoa)를 돌려 받는 등 국경선의 변경이 있었으며 1797년에 제2차 산 일데폰소 조약(Second Treaty Of San Ildefonso)을 맺고 프랑스의 동맹국이 되었다.
1807년 카를로스 4세의 왕비 마리아 루이사(María Luisa de Parma, 1751 ~ 1819)와 애인인 마누엘 데 고도이((Manuel de Godoy y Álvarez de Faria,1767~1851) 재상은 나폴레옹과 퐁텐블로 조약(Traité de Fontainebleau)을 맺고 프랑스군이 포르투갈을 정복할 길을 내주면서 프랑스군이 스페인에 들어오게 하여 침략할 기회를 제공했다.
스페인 해안에서 영국과의 밀무역이 성행하자 1808년 조아생 뮈라(Joachim Murat,1767~1815, 원수)가 지휘하는 12만명의 프랑스군이 포르투갈의 지배를 공고히 하고 스페인이 내정을 바르게 실시하도록 하기 위해 스페인에 주둔하였으며 이에 불안해진 국왕 부처와 고도이는 아랑후에스(Aranjuez, 마드리드 지방의 도시)시로 도피하였고 이틈을 타 왕태자가 부추킨 민중봉기로 카를로스 4세가 퇴위하고 왕태자가 페르난도 7세로 즉위하자 나폴레옹은 카를로스 4세와 페르난도 7세를 소환하여 중재회의에서 스스로 왕위를 포기하도록 만들고 뮈라를 왕위에 올리려 했으나 국민의 반발이 심하여 그의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Joseph Bonaparte, 나폴리 왕 Giuseppe Bonaparte 재위 1806 ∼ 1808, 스페인 왕 José I 호세 1세 재위 1808 ∼ 1813)를 스페인과 신대륙의 왕으로 임명했다.
조제프 보나파르트(호세 1세 José I Bonaparte, 재위1808 ~1813)는 1808년부터 1813년까지 스페인을 통치했다.
프랑스의 조제프 보나파르트에 항거하는 스페인인들은 1810년 카디스(Cadiz)에서 아메리카와 필리핀의 대표들도 참가한 의회인 코르테스(Cortes)를 열어 세계 최초의 헌법인 스페인왕정 정치헌법(Constitucion Polytica de la Monarquia Española, 카디스 헌법)을 1812년에 제정하였다.
스페인은 1813년 조제프 보나파르트(호세 1세 José I Bonaparte, 재위1808 ~1813)가 물러가자 1813년 12월,프랑스와스페인 사이에 발렌시아 조약(Treaty of Valençay, 1813.12. 스페인)을 맺었으며 이 조약에 의해 스페인에서 프랑스군을 철수하고, 1808년부터 발렌시아에 투옥되어 있던페르난도 7세(Fernando VII, 재위 1808, 1814 ∼ 1833)를 합법적인 스페인 국왕으로 인정함에 따라 스페인은 왕정으로 독립되었다.
1820년 1월 스페인 반란(Trienio Liberal, Reino de España)이 군부에 의해 일어났으며 이는 군주제에 대항하여 발생한 자유주의적 반란이었다. 포로로 구금되었던 페르디난도 7세는 1823년에 풀려났다.
1873년 아마데오 1세(Amadeo I, 1845 ~ 1890, 재위 1871 ~ 1873)는 나라가 혼란하자 스스로 물러났으며 이어 공화파에 의해 입헌군주제인 스페인 제1공화국(República Española, 1873 ~ 1874)이 설립되었으나 내전이 일어나 1874년 마티네즈 캄포스장군(Arsenio Martínez-Campos Antón, 아르세니오 마르티네즈-캄포스 안톤, 1831 ~ 1900, 스페인 군인, 정치가)에 의해 알폰소 12세(Alfonso XII, 재위 1874 ~ 1885, 카디스 공작 프란시스코 Francisco de Asís María Fernando de Borbón y Borbón-Dos Sicilias의 아들)로 왕정이 복고되었으며 1931년제2공화국이 설립되면서 알폰소 13세(Alfonso XIII, 재위1886 ~ 1931, 알폰소 12세의 유복자)는 추방되었다.
나. 스페인 식민지 경영
스페인은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이후 점령한 아메리카 식민지를 4개의 부왕령(副王領, Viceroyalty)으로 분할하여 통치하였다.
먼저 1519년에 북미에 뉴 스페인 부왕령(멕시코 부왕령, 누에바 에스파냐, Virreinato de Nueva España, Viceroyalty of New Spain, 멕시코, 서인도제도, 중앙아메리카, 루이지애나, 캘리포니아, 플로리다, 필리핀, 괌, 1519 ~ 1821)을 설치하였으며 1535년 스페인령 남미 전체에 페루 부왕령(Virreinato del Perú, Viceroyalty of Peru, 페루, 볼리비아, 1542 ~ 1824)설치하였다가 1717년 페루 위쪽 부분을 분리하여 누에바 그라나다 부왕령(Virreinato de Nueva Granada, Viceroyalty of New Granada, 콜롬비아, 파나마, 에콰도르, 베네수엘라, 1717 ~ 1819)을 설치하였고 1776년 페루 아래쪽 부분을 분리하여 리우 데 라플라타 부왕령(Virreinato del Río de la Plata, Viceroyalty of the Río de la Plata,아르헨티나, 우루과이, 파라과이, 칠레, 1776 ~ 1814)을 설치하였다.
이들 지역에서는 계급이 뚜렷하여 피지배 계급의 불만이 쌓여갔다. 에스파냐(스페인) 인이 최고의 지배층이었고, 크리오요(Creole, 현지 스페인 2세)가 그다음을 차지하였으며, 메스티소(mestizo, 백인과 인디오 혼혈)는 중간 계급, 인디오와 흑인, 몰라토(mulato, 흑백 혼혈)는 최하층에 속하였다.
스페인의 아메리카 식민지는 캘리포니아에서 파타고니아(Patagonia, 남아메리카 대륙의 남쪽 끝)에 이르렀다.
* 아메라카(America)의 구분
• 북아메리카(North America,북미 北美)와 남아메리카(South America,남미 南美)
아메라카를 지리적으로 파나마 지협(운하) 북쪽을 북아메리카, 파나마 지협(운하) 남쪽을 남아메리카로 구분한다.
• 앵글로아메리카(Anglo-America, 앵글로 색슨 아메리카 Anglo-Saxon America)와 라틴아메리카(Latin America)
앵글로아메리카는 영어를 사용하는 미국, 캐나다 지역이고 라틴아메리카는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멕시코와 그 남쪽 아메리카 전지역으로 나누는 문화적 구분이다.
• 중앙아메리카(Central America, 중미 中美)
중앙아메리카는 북아메리카 중에서라틴 아메리카에 속하는 멕시코 ~파나마 지협과카리브 제도이다. 지리적으로는 북아메리카에 속하고 문화적으로는 라틴아메리카에 속하는 지역이다.
1) 스페인의 중미 식민지 경영
스페인은 콜럼버스가 1493년 에스파뇰라 섬(도미미카와 아이티, 갈라파고스 제도)에 들여온 사탕수수를 원주민과 흑인 노예를 고용하여 재배하였다.
1520년대에 많은 제당소(製糖所, sugar mill)가 쿠바와 자메이카에 건설되었다.
칼리브해지역과 멕시코는 사탕수수의 주산지로 세계의 설탕 주산지로 변했으며 1540년대까지 스페인의 식민지 최대 수입원이 되었다.
사탕수수 재배와 설탕 제조에는 많은 인력이 필요로 하는 노동집약형 산업이다.
그래서 설탕 농장주들은 흑해 지역에서나 아프리카에서 노예들을 데려와서 이용했다.
서인도제도의 '설탕 섬’이라고 불리던 앤틸리스 제도(Antilles)는 이 시기 무렵부터 유럽 도시들의 항구에 위치한 제당 공장에 사탕수수를 공급했다.
1585년경에는 서인도 제도에서 중국 남부 원산의 생강을 재배하여 유럽으로 수송하기도 하였다.
커피는 프랑스로부터 1720년대에 커피나무가 중미에 들어와 멕시코에서는 1790년부터 커피를 경작하기 시작하였고, 북부지역은 커피 존(Coffee Zone, 남북위 25도 사이 지역)을 벗어나기 때문에 남부지방에서만 커피가 경작된다.
멕시코는 대량의 커피 소비국가인 미국에 접해 있어 지리적으로 수출이 용이하였으므로 많이 생산되어 세계 6대 생산국가가 되었다.
아메리카 안데스 산맥이 원산지인 담배는 마야인과 아즈텍인이 종교 행사나 제사 때 담배를 피웠다.
원주민들이 사용하던 담배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에 의해 유럽에 알려졌다.
1531년 스페인 정착민들이 산토도밍고에서 처음 담배 경작을 시작하였다.
그 후 스페인은 담배 생산에 알맞은 중남미 지역에서 좋은 담배 품종을 재배하여 유럽에 들여왔다.
처음에는 별로 관심을 끌지 못하다가 1558년 스페인의 펠리페 2세의 명으로 씨앗을 들여와 톨레도에서 관상용이나 약용으로 재배되었으며 식물학적인 호기심으로 유럽의 정원에서 재배되었고 패스트 치료에 이용되기도 했다.
프랑스에 최초로 담배를 들여온 사람은 장 니코(Jean Nicot de Villemain, 1530 ~ 1604, 프랑스 외교관, 학자)이다.
1560년에 파리에 담배와 씨앗을 가져와 프랑스 왕에게 선물하고 약용 용도로 재배를 장려하였다.
담배 식물의 학명인 니코티아나 타바쿰(Nicotiana tabacum)의 이름과 니코틴(Nicotine)의 어원은 장 니코(Jean Nicot de Villemain)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1607년에 건설된 영국 최초의 북미 정착지인 제임스 타운에서 1611년 유럽인 중에서 담배를 처음 피운 영국인 존 롤프(John Rolfe, 1585 ~ 1622, 버지니아 식민지 개척자)가 담배(니코티아나 타바쿰, Nicotiana tabacum)를 상업적으로 재배하는데 성공했다. 롤프는 당시 스페인이 트리니다드 섬(Island of Trinidad, 소앤틸리스 제도) 등 남미에서 재배하여 인기가 높은 담배 품종의 씨앗을 몰래 반입하였으며 이주민들은 이 씨앗으로 담배농사를 지어 유럽으로 수출하여 정착생활을 영위((營爲)하였던 것이다.
스페인(에스파냐)은 아스테카(Aztec)에 자국민을 이주시켜 정착촌을 형성하는 식민지 개척이 아니고아스테카(Aztec)를 300여 년 동안 무력으로 지배하면서 많은 금은 등을 수탈하여 스페인(에스파냐)으로 가져가는 식민지 경영이었다. 예를 들어 1520년대 멕시코의 과나후아토 지역의 은을 채굴하기 시작하였고 1546년부터는 멕시코의 사카테카스 지역에서 은을 채굴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은의 채굴로 스페인 부(富)를 축적하였던 것이다.
아스테카(Aztec)인들은 옥수수를 주식으로 하였다. 과테말라 지역의 마야인들은 옥수수를 하룻밤 동안 석회수에 불려 화학적으로 나이아신(Niacin, 비타민 B3, 니코틴산)이 생성되도록 하였다. 이렇게 하면 나이아신 결핍증인 펠라그라(Pellagra, 나이아신, 비타민 B3의 결핍에 의하여 일어나는 병, 옥수수를 주식으로 하는 지방에 유행, 손발, 목, 얼굴 등 햇볕을 쬐는 피부에 생기는 홍반 및 신경장애와 위장장애)에 걸리지 않았다. 이 옥수수를 갈아 만든 반죽을 마사(masa)라고 한다. 마사(masa)는 타코(Taco, 옥수수로 만든 빵, 멕시코식 샌드위치) 요리에 쓰이는 토르티야(Tortilla, 옥수수로 만든 얇은 전병)의 원료이다.
2) 남미 식민지 경영
스페인의 식민지 경영은 무력으로 금과 은을 강탈하거나 광산과 농장에서 원주민과 흑인 노예에게 강제로 노동을 시켜 생산한 은과 농산물을 수탈하고 본국의 물품을 강매하는 등 중상주의 정책을 폈던 것이다.
남미의 컬럼비아 등 열대지방에서는 일찍이 사탕수수, 담배 등이 경작되었으며 이들 농산물을 운반하고 육류를 생산하기 위해 소를 들여와 목축 농장이 운영되었다.
그러던 중 1535년에 점령한 볼리비아의 포토시(Potosí)에서 1545년 대규모 은광이 발견되어 1546년부터는 은을 채굴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세계 은 생산량의 50%을 이곳 안데스 산맥에서 생산하였으며 이를 태평양을 건너 식민지인 필리핀의 마닐라로 싣고 갔으며 마닐라를 기지로 하여 중국과 도자기, 비단 등을 사서 태평양을 건너 다시 멕시코로 가져와서는 스페인으로 가져갔던 것이다.
1569년부터 광대한 페루 부왕령(Virreinato del Perú, Viceroyalty of Peru, 남미 전체, 1542 ~ 1824)으로 즉위하여 "최고 조직자"로 유명한 페루부왕 프란시스코 드 톨레도(Francisco Álvarez de Toledo, 다섯번째 페루부왕 재위 1569 ~ 1581)는 많은 토착민을 강제로새로운 정착지로 이주시켜스페인 기업과 광산에서 일할 노동력을 공급하고 이들로부터터 조공과 세금을 징수하였으며 기독교를 포교하였던 것이다.
이때 포토시는 인구가 10만명 이상인 도시로 발전하였던 것이다.
여러 곳에서 은이 채굴되었으며 그리고 수은으로 은광석의 은을 녹여 분리하는 방법이 개발됨에 따라 은의 생산량은 더욱 많아져 스페인은 부(富)를 축적하게 되었으며 중국도 무역 수입이 많아졌던 것이다.
1717년 페루 위쪽의 콜롬비아, 파나마, 에콰도르, 베네수엘라 등을 페루 부왕령(Virreinato del Perú, Viceroyalty of Peru, 남미 전체, 1542 ~ 1824)에서 분리하여 누에바 그라나다 부왕령(Virreinato de Nueva Granada, Viceroyalty of New Granada, 1717 ~ 1819)을 설치하였다.
알토 페루(Alto Peru, 차르카스 Charcas, Upper Peru, 높은 페루)라고 불렸던 볼리비아는 1776년 페루 부왕령에서 리오데 라 플라타 부왕령(Virreinato del Río de la Plata, 1776 ~ 1814,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 일대)으로 편입되고, 이후 경제와 사법이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종속되었다. 1778년 부에노스 아이레스 항구가 정식으로 개항된 이후 알토 페루의 해외 무역은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통해 수행되었다.
콜롬비아(Colombia)에서는 1800년대 초에 유럽 선교사들 의해 커피 경작이 시작되었으며 1900년 경에는 한 때 세계 최대 커피 생산국이 되었다.
아르헨티나는 1516년에 후안 디아스 데 솔리스(Juan Díaz de solís, 1470 ~ 1516, 포르투갈 출신 항해자, 탐험가, 우르과이 발견)에 의해 발견되었고 처음 정착한 것은 1527년 파라나강 근처의 지역이었으며 1549년 스페인 페루 부왕령(Virreinato del Perú, 1542 ~ 1824)의 리오데라플라타 주(Governorate Of The Rio De La Plata, 1549 ~ 1776,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 일대)가 되었다.
1557년에 포도를 재배하기 시작하였으며 목축업 중심의 농업국가로 개발되었다.
아르헨티나에는 1573년 코르도바(Córdoba)와 후후이(Jujuy), 1582년 살타(Salta), 1591년 라리오하(La Rioja) 시 등 25개의 도시가 건설되었다.
1536년에 건설된 부에노스아이레스는 1580년에 재건되어 1580년에 스페인의 영구 정착지인 식민지가 되었으며 대서양과 리오데라플라타(Rio De La Plata,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 일대) 유역을 침범하는 해적을 방어하는 수비대 기지 역할을 하였고 1593년부터는 브라질과의 노예무역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1778년 부에노스 아이레스 항구가 정식으로 개항되고 유럽과의 항로가 개척되어 무역항으로 발전하였다.
1776년 아르헨티나에 리오데라플라타 부왕령(Virreinato del Río de la Plata, 1776 ~ 1814)이 설치되고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총독부가 세워졌다.
스페인은 이들 지역에 자국민을 이주시켜 정착촌을 형성하는 식민지 개척이 아니었으며 금, 은의 생산량이 늘자 사탕수수 농장 경영에도 관심이 없어졌던 것이다.
3. 스페인의 포르투갈 합병과 포르투갈 독립
가. 1581년 스페인의 포르투갈 합병
1578년 포르투갈의 세바스티앙 1세(Sebastião I, 1554 ~ 1578, 재위 1557 ~ 1578)가 모로코에서 내분이 일어남(아브 마르완 압드 알 말리크 1세에 의해서 모로코의 왕위를 빼앗긴아브 압둘라 무하마드 2세가 포르투갈에 지원을 요청하였음)에 따라 이을 기회로 모로코를 회복하기 위해 무슬림을 상대로 십자군 원정을 벌였다가 24세의 미혼으로 후계자 없이 전사했다.
죽은 세바스티앙 1세의 뒤를 이어 세바스티앙 1세(Sebastião I)보다도 훨씬 나이가 많은 64세의 삼촌 동 엔리케(Dom Henrique, Henrique I 'o Casto' de Portugal, rei de Portugal, 앙리케 1세 '오 카스토' 드 포르투갈, 레이 드 포르투갈, 재위 1578 ~ 1580)가 왕위에 올랐으나, 그의 왕위 승계에 적법성이 문제가 되었다.
스페인 왕 펠리페 2세(FelipeII, 1527 ~ 1598)도 왕위를 자기가 계승하고 싶어 했다.
그런 와중에 엔리케 왕(Dom Henrique, 재위 1578~ 1580)이 갑자기 죽자 마누엘 1세(Manuel I, 재위 1495 ~ 1521)의 손자인 브라간자 공작부인 인판타 카타리나(Catarina of Portugal, Duchess of Braganza),크라투 수도원장(성 요한 기사단 Hospitaller 수장) 안토니오(António, Prior of Crat, António de Portugal, 1531 ~ 1595),스페인의 필립 2세(FelipeII) 3명이 서로 왕위 계승자임을 주장했다.
포르투갈 시민들의 지지를 받은 크라투 수도원장 안토니오(António, Prior of Crat, António de Portugal,1531 ~ 1595)가 왕위에 올랐으며 궁정 회의기구인 코임브라의 의원인 귀족들은 불만을 가지고 스페인으로 탈출하였다.
이에 펠리페 2세는 전쟁을 통해 포르투갈을 합병하기로 하고 알바 공작(Gran Duque de Alba, 페르난도 알바레스 데 톨레도 이 피멘텔 데 알바 데 토르메스 공작,Fernando Álvarez de Toledo y Pimentel, III duque de Alba de Tormes, 1507 ~ 1582, 나폴리 부왕, 네덜란드 총독, 포르투갈 무관장)이 지휘하는 군대를 파견하였다.
1580년 6월 27일, 2만 3,000명의 알바 공작의 군대가 바다호스(Badajoz)에서 리스본을 향해 진군을 했고, 157척의 스페인 함대를 카디스에서 타호 강변로 진입했다.
포르투갈에서는 왕으로 즉위한 크라투 수도원장 동 앙토니우(António de Portugal, António, Prior of Crato, 1531 ~ 1595)가 리스본 시민군을 지휘하여 알칸타라 강 서쪽에 포진하였다.
이 전투에서 포르투갈 군은 4천 명을 잃고 패하였으며 크라투 수도원장 군대는 물러났다.
이렇게 스페인은 1580년 8월 25일 알칸타라 전투(the Battle of Alcântara)에서 포르투갈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이어서 알바 공작은 리스본을 점령했으며 1580년 말에는 포르투갈의 대부분을 점령했다(포르투갈 왕위 계승 전쟁, 1580 ~ 1583).
마지막 왕인 크라투 수도원장 안토니오(António, Prior of Crat, António de Portugal, 1531 ~ 1595)는 왕위에 오른 지 33일 만에 영국으로 탈출하였다.
1581년 스페인의 펠리페 2세는 포르투갈의 궁정 회의기구인 코임브라 회의를 통해 공식적으로 포르투갈의 국왕으로 인준되어 1581년 3월 25일 스페인과 포투 갈 왕을 겸임했다.
스페인이 포르투갈을 합병함으로써 포르투갈의 영토와 수많은 식민지는 스페인의 식민지가 되었다.
포르투갈이 이렇게 쉽게 스페인에 합병된 이유가 있다.
포르투갈의 첫 번째 왕조인 보르고냐 왕조(Dinastia de Borgonha, 1139 ~ 1385)를 지탱한 것은 중세의 귀족이었지만 첫 번째 왕조인 보르고냐 왕조를 무너뜨리고 들어선 두 번째 왕조인 아비스 왕조(Dinastia de Avis, 1385 ∼ 1580)는 대항해 시대를 열고 신항로를 개척함에 따라 상인들이 부를 점점 키워서 아비스 왕가를 지탱하게 되었으므로 아비스 왕가는 구 귀족들을 중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스페인의 합스부르크 왕가(Habsburg, Habsburgo de España, 1516 ~ 1700)는 중세의 귀족들이 여전히 세력을 펼 수 있게 중용하였다.
그래서 포르투갈의 중세 가문 출신의 귀족들은 포르투갈의 아비스 왕조보다는 스페인의 왕조가 오히려 자신들의 세력을 유지하는데 유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포르투갈 귀족들은 포르투갈-스페인 전쟁(포르투갈 왕위 계승 전쟁, 1580 ~ 1583) 때에 스페인을 지지했으며 리스본이 함락되자 궁정 회의를 통해 펠리페 2세를 포르투갈의 국왕으로 임명하는 결의까지 했던 것이다.
그리고 펠리페 2세도 포르투갈에 유화정책을 폈다.
포르투갈인들의 무역, 관습, 문화, 법령 등을 존중하며 포르투갈 지역의 실질 행정업무는 포르투갈 왕가 사람들을 고용하였으며 능력 있는 포르투갈인에게는 스페인 수도에서 일할 수 있게 하는 등 포르투갈인을 차별하지 않았다.
스페인은 포르투갈에 세금 감면 등 각종 복지정책을 폈으므로 포르투갈인들은 스페인과의 합병에 큰 불만이 없었다.
그리고 포르투갈은 스페인과 합병(1581 ~ 1668) 중에도 해외무역과 식민지 경영을 스페인의 간섭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운영하였다.
당시 스페인의 펠리페 2세는 영국의 해적행위를 응징하고, 영국국을 가톨릭 국가로 만들기 위해 정복할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두 나라의 갈등이 심해지자 펠리페 2세는 전쟁준비를 하게 되었다.
그래서 대서양 쪽에 있던 포르투갈을 영국과의 전쟁을 위한 전진기지로 이용했다.
1588년 펠리페 2세가 이끄는 무적함대가 영국과의 칼레 해전에서 패하였으며 그 후 스페인은 서서히 약해졌다.
포르투갈이 전쟁의 전진기지가 되자 포르투갈인들은 스페인에 불만을 품기 시작하였으며 이후 60년간 지속된 두 나라의 합병은 점점 반감이 커져 갔다.
그러나 1589년 영국에 망명해 있던 포르투갈의 마지막 왕인 안토니오(António de Portugal, Prior of Crat 크라투 수도원장 포르투갈 안토니오, 1531 ~ 1595)가 영국군의 지원으로 포르투갈을 공격했으나 포르투갈인들이 지지해주지 않아 전쟁에서 패하여 되돌아갔다.
나. 1668년 포르투갈의 스페인으로부터 독립
포르투갈은 1580년 펠리페 2세의 침략으로 60년간(1581 ~ 1640) 스페인 제국에 합병되었다.
포르투갈인들은 스페인과의 합병으로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으나, 그다지 잃은 것은 없었다.
스페인은 포르투갈을 착취하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스페인 왕실은 포르투갈의 해양 방어와 브라질로 가는 대서양 항로를 강화해 주었으며 옛날 식민지도 포르투갈이 독자적으로 경영하게 하였던 것이다. 많은 포르투갈인들이 스페인-아메리카 무역에 끼어들어 부자가 되었다. 합스부르크 왕가 편인 포르투갈 귀족들은 병합을 원했고 병합된 왕가로부터 작위와 관직을 받았고, 경제적 이익까지 얻고 있었으므로 굳이 독립을 요구할 필요성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스페인은 아메리카 식민지로부터 수익이 점점 줄어들었고 합스부르크 왕국(Habsburgermonarchie, 1282 ~1918,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이 통치하던 제국, 신성로마제국도 합스부르크 출신의 황제 소속이었으나 독일신성로마제국은 자치였으므로 주로 오스트리아 지역을 칭함)에서 시작된 30년 전쟁(三十年戰爭, Thirty Years' War, 1618 ∼ 1648,독일을 무대로 한 신구교 종교전쟁)에 가담하여 발생한 군비를 충당하기 위해 펠리페 4세는 펠리페 2세와는 달리 포르투갈 귀족에게 세금을 부담시켰으며 포르투갈의 관직에 스페인의 카스티야 인을 더 많이 앉히려 하였으므로 포르투갈인들의 불만이 쌓여갔다.
더욱이 포르투갈의 해외 식민지가 네덜란드, 영국 등에 잠식되어 포르투갈의 경제는 점점 어려워졌던 것이다.
이러한 변화로 1637년에는 민중 봉기가 일어났지만, 카스티야 군대에 의해 신속하게 진압되었다.
스페인이 포르투갈에 요구하는 것이 점점 많아지자 포르투갈 귀족들은 불만이 극도로 쌓여갔으며 스페인이 전쟁으로 인해 국력이 약해지자 1640년에 리스본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사건의 촉발은 스페인 펠리페 4세(재위 1621~ 1665)의 수상 올리바레스 백작이 포르투갈의 대지주인 브라간사(Casa de Bragança, 왕가에서 분리된 가문) 공작 주앙 2세(주앙 2세 드 브라간사, 8대 브라간사 The eighth Duke of Bragança, 1604 ~ 1656)에게 수천 명의 포르투갈 군사를 이끌고 카탈루냐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는데 참가하라고 압력을 넣었던 것이다.
이에 독립운동가들은 브라간사 공작(1604 ~ 1656, 주앙 2세 드 브라간사, 8대 브라간사 The eighth Duke of Bragança)을 설득하여 포르투갈 왕 주앙 4세(João IV de Portugal, 재위 1640 ~ 1656)로 옹립하였다. 브라간사 공작은 프랑스(루이 14세 Louis XIV, 재위1643 ~ 1715), 영국(올리버 크롬웰, Oliver Cromwell, 1599 ~ 1658, 호국경)과 동맹을 맺고 포르투갈 주둔 많은 스페인군이 카탈루 반란의 진압을 위해 본국으로 돌아간 틈을 이용하여 독립전쟁(1640 ~ 1668)을 시작하였다.
스페인을 위해 일하던 포르투갈 내각수반(Prime Minister)인 미겔 데 바스콘셀루스(Miguel de Vasconcelos, 1590 ~ 1640)를 암살하고 포르투갈의 총독(總督, 副王 부왕, Viceroy, Vicereine)인 사보이마거릿(Margaret of Savoy, 만투아 공작부인 Duquesa de Mântua,1589 ~ 1655, 총독 재임 1634 ~ 1640)을 스페인으로 축출했다.
포르투갈 군은 오랜 기간 간헐적으로 스페인군과 싸워 결국 스페인 주둔군을 물리쳤다.
스페인은 30년 전쟁(1618 ∼ 1648)으로 프랑스와 싸우고 카탈루냐(1640)의 반란, 세비야의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의 반란, 아야몬테 후작의 1641년 반란, 1648년 나바라의 이하르 공작의 반란 등 내부 반란에 군사가 묶여 포르투갈의 독립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포르투갈은 독립 전쟁 중에 네덜란드와 식민지 쟁탈 전쟁을 치렀고 포르투갈령의 식민지에서는 독립운동이 일어나 포르투갈은 여러 식민지들을 상실했다.
1641년 조호르 술탄국(The Sultanate of Johor, 1528 ~ 1855 영국령, 말레이시아)과 연합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세력에 말라카가 점령당했으며 이어서 네덜란드에 아프리카의 앙골라, 상투메(아프리카 기니만의 섬)를 상실하였고 1644년에는 실론섬을 상실했다. 1648년 포르투갈은 다시 앙골라와 상투메를 수복하였다.
포르투갈은 동맹을 맺었던 영국에 경제적 종속이 심화되었다.
독립전쟁 중인 포르투갈은 영국과 1650 ~ 1654년 동안에 전쟁을 하였는데 전쟁에 패배한 포르투갈은 영국이 교역을 할 수 있도록 브라질, 아프리카, 그리고 동양 식민지들의 문호를 개방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포르투갈과 영국 사이에 1661년 결혼 조약(TheMarriage Treaty, Anglo-Portuguese Treaty)으로 포르투갈 왕가의 캐서린(Catherine of Braganza, 1638 ~ 1705, 주앙 4세의 딸)과 영국의 찰스 2세(1630 ~ 1685)가 결혼했다. 결혼 지참금으로 인도의 봄베이와 모로코의 탕헤르를 영국에 할양(割讓)했다.
포르투갈은 스페인이 30년 전쟁과 내전으로 전력이 분산된 틈을 타 8대 브라간사 공작(The eighth Duke of Bragança)을 왕(주앙 4세, João IV de Portugal, 재위1640년 ~ 1656)으로 옹립하고,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 등의 지원을 받아 스페인군과 싸워 독립했던 것이다.
1668년, 포르투갈은 스페인과 리스본 조약을 체결하여 아프리카의 세우타를 스페인에 양도하고 포르투갈의 독립을 승인받았다.
그러나 이후 포르투갈은 갈수록 세력이 약화되어 떠오르는 네덜란드와 영국에 밀려나게 되었던 것이다.
다. 포르투갈 제국의 쇠퇴
포르투갈은 대항해 시대를 열고 발달된 대포로 최초로 많은 식민지를 개척했지만 본래의 나라가 작고 인구가 적어(200만 명) 넓은 브라질과 인도양의 여러 국가를 제대로 경영할 수없었다.
16세기말 네덜란드와 영국 선박이 동남아와 인도에 처음으로 진출했으나 포르투갈은 이들을 제대로 방어할 수 없었다.
1605년 포르투갈은 네덜란드에 몰루카 제도의 암보이나 섬(AmboinaI., 암본섬 Ambon I.)과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로 가는 인도 항로를 넘겨주었다. 이어서 네덜란드와 영국이 점차 포르투갈의 식민지들을 빼앗아 갔다.
포르투갈은 1599년 개척하였던 버마(미얀마)의 시리암 요새(fort Syriam)를 처음으로 1613년 버마왕에게 빼앗기면서 버마와의 교역로를 잃게 되었다.
포르투갈의 알부케르크(Alffonso de Albuquerque, 1453 ~ 1515)가 1515년에 점령한 페리시아만 입구의 오르무즈(Ormuz, 오만, Hormuz 호르무즈)에서는 오스만 튀르크의 술레이만1세(SüleymanI, 재위 1520 ~ 1566)의 홍해 함대가 1552년 공격하였으나 포르투갈은 잘 방어하였지만 1622년 페르시아의 사파비드(Safavid Persia, 1501 ~ 1736) 국왕 아바스 1세(Abbas I, Abbas the Great, 재위 1588 ~ 1629)의 확장 정책에 따라 영국(동인도회사)-페르시아 연합군에게 오르무즈(Ormuz, 오만, Hormuz 호르무즈, 반다르아바스 Bandar ‘Abbās, 호르무즈 섬 Hormuz Island)를 점령당하였으며 1631년에는 몸바사에서도 반란이 일어났다.
포르투갈은 1641년 네덜란드에 말라카(Malacca)와 앙골라 해안루안다를 잃었으나 1648년에 루안다를 탈환하고, 앙골라 내륙으로 침공하였다.
1658년 네덜란드에실론을 잃었다.
네덜란드는 1609년 독립전쟁 휴전 이후부터 스페인과 협상하여 브라질에 진출하여 많은 설탕 정제소를 운영했다. 1622년 12년의 휴전기간이 끝나고 네덜란드가 서인도 회사를 설립하여 공격적으로 진출하자 네덜란드와 포르투갈의 전쟁이 이어졌다.
1630년 네덜란드의 프레데리크 헨드리크(Frederik Hendrik van Oranje, 1584 ~ 1647, 오라녜 공작)가 지휘한 네덜란드군이 브라질 북부의 페르남부코와 레시페를 점령해 네덜란드령 브라질을 건설했다.
1648년 포르투갈은 브라질에 노예를 공급하는 앙골라를 재점령하여 서인도 회사에 타격을 입히는 등 전쟁이 계속되었으며 포르투갈이 1654년1월 헤시피 재점령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어네덜란드령 브라질을 차지하게 되었다. 1661년에 체결된헤이그 조약(Vrede van Den Haag Tratado da Haia, 1661.8.)에 따라 포르투갈은 브라질 북동부와앙골라를 돌려받았고 현금으로 보상했으며 브라질 내의 네덜란드인들은 본국으로 돌아가거나 북아메리카의뉴네덜란드로 갔다.
1698년 술탄 빈 세이프의 아들 이맘 세이프 빈 술탄(SeifBinSultan, 재위 1692 ~ 1711, 오만 야루비드 왕조)이 몸바사(Mombasa, 케냐)의 지저스 요새를 장악하였고 1699년 킬와(Kilwa, 탄자니아), 펨바(Pemba, 모잠비크 최북단)에서도 포르투갈인들이 축출되어 동아프리카 해안 전역에서 포르투갈은 물러났다.
1703년 영국과 메수엔 조약(treaty of Methuen, 영국의 외교관 John Methuen 유래)을 맺었는데주 내용은 포르투갈이 영국의 직물(織物)을 수입하는 대신에 영국은 포르투갈의 포도주를 수입하며 프랑스 포도주보다 관세를 1/3 로 낮춘다는것으로 영국에 경제적 종속을 강요하는 것이었다.
포르투갈의 리스본에서 주제 1세(Jose I, 1714 ~ 1777, 재위 1750 ~ 1777) 때인 1755년 가톨릭 만성절에 대지진이 발생하여 수많은 건축이 붕괴되었고 화재로 시 전체가 잿더미로 변했다. 리스본의 27만 명의 인구 중에 3만 명이 죽었으며 이어진 겨울 동안에 추위와 부상, 굶주림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그리고 지진으로 큰 교회건물들이 무너짐에 따라 교회에 모여 있던 가톨릭 신자들이 수없이 죽었으나 교회에 가지 않았던 무신론자들은 별로 죽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계몽주의자들은 신의 존재에 의문을 표시했으며 이를 계기로 불신론자가 늘어났다.
포르투갈은 브라질 식민지 생산물과 영국과의 무역에 의존하고 있었으므로 수세기 동안 영국과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에 1801년 나폴레옹은 "영국과 손을 끊고 프랑스-스페인 동맹과 손잡지 않는다면 무력으로 응징하겠다"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주앙 왕자(마리아 1세 1734 ~ 1816는 정신병, 1792년부터 정무)가 거부하자 스페인과 프랑스는 동맹을 맺고 영국의 오랜 동맹인 포르투갈을 오렌지 전쟁(Guerra das Laranjas, Guerre des Oranges, 1801)에서 승리하여 점령했다. 이에 포르투갈은 이들과 바다호스 조약(Badajoz, 1801)을 맺어 스페인군이 철수하는 대신에 올리벤사(Olivenza, 스페인 국경도시)를 스페인에 할양하였고, 프랑스에 2천만 프랑의 배상금을 지불했으며, 영국 선박의 항구 이용을 금지해야 했다.
오렌지 전쟁(Guerra das Laranjas, Guerre des Oranges)이란 명칭은 전쟁 중에 스페인 수상 마누엘 드 고도이(Manuel de Godoy)가 Elvas에서 오렌지를 따서 리스본으로 가는 중이라는 메시지를 함께 스페인 여왕에게 보낸 데서 유래하였다.
영국은 이에 대응해 1801년 7월 북대서양에 있는 포르투갈의 마데이라 섬을 점령하여 1802년 아미앵 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주둔했다. 또한 1801년 9월 프랑스와 마드리드 조약(Treaty of Madrid, 1801.9.)을 체결하여 포르투갈령 기아나의 절반을 프랑스에 양도하고 프랑스와 평화 협약을 맺었다(프랑스령 기아나).
프랑스의 나폴레옹은 1805년 프랑스 스페인 연합해군이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영국군에 패하자 대륙 봉쇄령을 내렸다.
포르투갈이 대륙 봉쇄령을 위반하자 1807년 프랑스의 장 앙도슈 쥐노 장군(Jean-Andoche Junot, 1er duc de Abrantes, 1771 ~ 1813)이포르투갈로 진군하여 리스본을 함락했다. 이에 영국이 함대를 파견하여 포르투갈이 프랑스와 동맹을 맺으면 리스본을 공격하겠다고 통고했다.
포르투갈 왕실(섭정 주왕 왕자)은 진퇴양난으로 고심끝에 영국의 15척 함대에 5천여명이 타고 브라질의 리우 데 자네이루로 도피했다.
프랑스의 쥐노 장군은 포르투갈의 민병대와 영국군의 공격과 포르투갈의 청야 전술(淸野 戰術, 적군이 사용할 수 있는 군수물자와 식량 등을 없애 적군이 현지 조달을 할 수 없게 만드는 전술)에 궁지에 몰려 산트라 협약(The Convention of Cintra or Sintra, 1808.8.)을 맺고 영국배로 철수하였다.
1814년 프랑스군이 물러간 후에도 영국의 윌리엄 베레스포드(William Carr Beresford 장군 , 1st Viscount Beresford, 1st Marquis of Campo Maior 제1대 베레스포드 자작, 1768 ~ 1854) 원수는 영국군을 거느리고 포르투갈 육군의 사령관(일종의 총독)으로 남아 섭정을 하였다. 그는 브라질 연합왕국, 노예공급문제, 브라질의 산업, 포르투갈과의 교역 등 금후 국가계획을 계획했다.
그러나 1820년 포르투갈의 반도전쟁에 참가한 포르투갈군 장교들은 영국군을 추방하고 8월에 오포르토(Oporto, 포르투갈의 두번째 도시)에서 자유주의 혁명을 일으켰으며 이후 포르투갈은 입헌군주국이 되었다.
포르투갈의 개혁 정부는 왕실이 포르투갈로 돌아와 입헌 군주의 역할을 해줄 것을 종용했다. 이에 1821년 주앙 6세(João VI, 1767 ~ 1826, 재위 1816~26)와 그의 왕비 카를로타 조아키나는 포르투갈로 귀국하고 황태자 동 페드루 4세(Dom Pedro IV, 1666 ~ 1718)는 브라질에 남았다.
브라질에서는 개혁을 열망하는 지식인들과 파르도(pardo, 다인종 혼혈) 자유민들이 이 기회를 이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1822년 황태자 동 페드루 4세(Dom Pedro IV, 1666 ~ 1718)는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황제명을 어기고 그들의 요구에 따라 입헌 군주제를 받아들이고 브라질의 독립을 선언하여 브라질 황제 동 페드루 1세로 즉위하였다.
이렇게 브라질을 잃은 포르투갈은 막대한 경제적 손실로 쇠퇴하게 되었다.
그러나 포르투갈에는 여전히 아프리카에 앙골라, 모잠비크 등의 많은 식민지가 남아 있었다.
포르투갈은 이 아프리카 식민지를 기반으로 동쪽으로 확장하여 제국을 부활하려는 정책을 폈으나 영국의 남진 정책과 충돌하게 되었다.
포르투갈은 1890년영국의 최후통첩에 전쟁도 해보지 않고 굴복하였으며 경제가 악화되는 등으로 왕실이 불신을 받아 오던 중 1908년 2월 국왕 동 카를루스와 왕세자동 루이스 필리프가 암살되었으며 1910년 10월 5일 혁명이 일어나 마누엘 2세를 마지막으로 입헌 군주제가 종식되고 공화정으로 넘어갔지만 많은 혼란이 일어나게 된다.
포르투갈은 1849년 중국의 거류지였던 마카오를 식민지화하였다.
포르투갈은 1859년에 서티모르를 네덜란드에 할양하였으며 2차 대전 중인 1942년에일본군에게 동 티모르를, 1943년에는 중립 항구 마카오를 일본이 보호령으로 하였다.
III. 세계 제국들의 형성
1. 영국의 성장
가. 영국의 고대, 중세
대륙과 분리된 영국의 원주민은 이베리아 반도 기원의 이베리아족과 프랑스 기원의 켈트족(Celt-히랍인이 붙인 이름, 갈리아인, Gallia-로마인이 붙인 이름, Gauls, 인도유럽어족)이었다.
영국에는 기원전 6세기 무렵부터 서부 유럽(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 벨기에 등)에서 건너온 켈트족(Celt, 갈리아인, Gallia, Gauls, 인도유럽어족)이 원주민을 밀어내고 점차 내륙으로 이동하여 정착하였다.
로마제국의 장군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 BC 100년 ~ BC 44년)가 기원전 55년에 침입한 이후 410년까지 영국은 로마제국의 지배하에 있었다.
449년에는 독일 북서부에 살던 게르만족의 일파인 앵글로-색슨족(Anglo-Saxon)이 브리튼 섬을 침입해 켈트족을 웨일스(Wales)와 스코틀랜드(Scotland) 지역으로 몰아내고 잉글랜드(England) 각지에 소왕국을 건설하였다.
앵글로-색슨족의 침략을 받은 원주민들은 살아남기 위해 변방으로 이동하여 지역별로 폐쇄적인 생활을 영위함에 따라 지금도 지방색이 강한 4개의 나라로 구분된다.
597년 교황 그레고리 1세는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와 40여 명의 선교사를 켄트 왕국 캔터베리(Canterbury)에 파견하여 앵글랜드에 기독교를 전파했다.
828년에 색슨족(Saxons) 국가인 웨섹스(Wessex)의 왕 에그버트(Egbert, 재위 802 ~ 839)가 잉글랜드(England)에 여러 소왕국을 병합하여 통일 왕국을 세웠다.
북유럽의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살던 노르만족은 8세기말 ~ 11세기 초에 토지가 메마르고 협소하며 기후가 한랭한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온난하고 비옥한 땅을 얻기 위하여 민족 대이동을 감행하여 러시아, 영국, 프랑스를 점령하고 에스파냐와 북아프리카까지 진출하였다. 뛰어난 항해술을 가진 이들 바이킹(Viking)은 여러 지역을 탐험하고 이민족과 용감히 싸워 정복하였으며 교역도 하였다.
앵글로-색슨 왕국 시대이던 8세기말에 북유럽의 노르웨이와 덴마크계의 바이킹족이 침입해 요크(York)를 수도로 삼고 잉글랜드(England) 동북부 지방에 정착하였는데, 이 지역을 후에 다넬라겐(Danelagen, Danelaw)이라고 불렀다.
영국 앵글로-색슨 왕국의 마지막 왕인 에드워드(Edward, 1042 ∼ 1066, 참회왕 에드워드 Saint Edward the Confessor)가 노르만인(人)을 중용함에 따라 토착민인 앵글로색슨인과 노르만인 사이에 대립이 발생하여 노르만 정복의 소지가 만들어졌다. 그가 아들 없이 죽고 처남인 해럴드 2세(Harold II,1022년경 ~1066년10월 14일, 재위 1066년 1월 ~ 1066년 10월)가 왕위를 이어받았다.
이때까지 영국은 북유럽 국가로 취급되었으며 지중해가 중심이던 고대 유럽의 변방국이었다.
고대에 부국강병을 이룩하는 방법은 농업과 전쟁이었다. 자국 농경지를 넓히거나 전쟁으로 영토를 넓히고 전쟁으로 적의 물자를 약탈하고 포로나 주민을 끌고 와 노예로 이용하는 것이었다. 농업의 기본인 노동력은 노예였으므로 전쟁으로 노예를 얻는 것은 매우 중요한 국가사업이었다. 그런데 전쟁이 자주 일어나 계속되면 병졸로 출정한 농민들은 사상자가 발생하고 자기 집의 농사는 노동력 부족으로 어려워지는 등 많은 피해가 발생해 점점 어려워지는 반면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온 장군과 귀족들은 새로운 영지와 노예를 얻어 더욱 부유해졌다. 결국 농민층은 점차 몰락해 갔고 봉건 영주 세력은 점점 더 커졌던 것이다.
특히 슬라브족(Slavs)이 많이 살고 있던발칸 반도에서는 9 ~ 10세기에 수없이 많은 전쟁이 일어났으며 적국의 슬라브족(Slavs)을 잡아다 노예로 삼거나 이슬람 국가에 노예로 팔았다. 바이킹(Viking, 협강 vic에서 온자)도 드네프르 강이나 볼가강 수로를 이용하여 내려와 일부는 정착하여 루스(Rus, рус, 배를 젓는 사람, 860년)가 되었고 일부는 콘스탄티노플이나 바그다드 등과 교역하면서 모피 등 외에는 교역할 물품이 없어 강 주변과 넓은 지역에 까지 들어가 슬라브계 주민을 납치하여 노예무역을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노예를 뜻하는 영어 Slave(슬레이브)의 어원은중세 라틴어로 슬라브족(Slavs)을 뜻하는 Sclavus(슬라브)이다.
바이킹(Viking, 협강 vik에서 온자)은영국의 동북부 해안(793), 프랑스 서부 해안 등에도 침략과 약탈을 감행하였다.
845년 북유럽 덴마크 바이킹인 노르만인인 롤로( Rollo, 846, 854 ~ 932)가 프랑스를 침략하여 약탈하자 911년 서프랑크 왕 샤를 3세(Charles III, 재위 898 ~ 922)는 약탈을 막기 위해 생클레르쉬레프트 조약(Traité de Saint Clair sur Epte, 911)을 맺고 롤로(Rollo, 846, 854 ~ 932, 샤를 3세의 서녀와 결혼, 가톨릭으로 개종)에게 센강하류 지대를 봉토로 하사함에 따라 롤로(Rollo)는 노르망디 공국(Normandie dukedom)을 세우고 지배력을 넓혀 나갔다. 1066년 노르망디 공국(公國, 공작公爵 Duke이 다스리는 국가)을 세운 롤로(Rollo)의 손자인 노르망디 공작 기욤 2세(Guillaume II, 1028 ~1087, 정복자 윌리엄)는 영국의 에드워드(Edward, 1042 ∼1066, 참회왕 에드워드 Saint Edward the Confessor, 왕비 이디스 Edith)가 1066년에 죽자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며 잉글랜드(England)를 침략하여 헤이스팅스 전투(Battle of Hastings)에서 1066년 10월 해럴드 2세(Harold II,1022년경 ~1066년 10월 14일, 재위 1066년 1월 ~1066년 10월, 왕비 이디스 Edith의 오빠)를전사시키고 승리하여 윌리엄 1세(William of Normandy, Guillaume, 1028 ~1087, 재위 1066 ~ 1087)로 왕위에 올라 영국 노르만 왕조의 제1대 왕이 되었다. 윌리엄 1세(William I, 재위 1066 ~ 1087)는 노르망디에서 데려온 기사들을 중심으로 강력한 행정적, 군사적 체제를 갖추고 잉글랜드(England)를 지배했다.
이때부터 영국이 서유럽 국가로 인정되었다.
윌리엄 1세의 넷째 아들(첫째 아들 로베르는 반란으로 미움을 샀으며, 둘째 아들은 일찍 죽어 셋째 아들 윌리엄 2세가 1087 ~ 1100 동안 재위하여 왕위를 이었으나 사냥 중에 사살됨)로 윌리엄 2세에 이어 왕위에 오른헨리 1세(Henry I, 1068 ~ 1135, 재위 1100 ~ 1135)는 아들이 없어 조카인 스티븐(Stephen, 블루아의 스티븐 Stephen of Blois, 재위 1135 ~ 1141, 윌리엄 1세의 딸 아델라의 아들)이 왕위를 계승했으며 헨리 1세는 스티븐으로부터 딸 마틸다(Empress Matilda, Empress Maude, 마틸다 황후, 1102 ~ 1167)에게 다음 왕위를 계승한다는 약속을 받았다. 스티븐 왕은 이를 부인하여 마틸다(Matilda)와 여러 번 전투를 하였으며 포로가 되기도 하였다.
헨리 1세의 딸 마틸다(Empress Matilda, Empress Maude, 마틸다 황후, 1102 ~ 1167)는 프랑스 앙주 백작 조르푸아(제프리) 5세(Geoffrey V of Anjou, 1113 ~ 1151)와 결혼하여(Matilda는 신성로마 제국의 하인리히 5세와 결혼했으나 일찍 사별하고 두 번째 결혼) 노르망디 공작 헨리 플랜태저넷(헨리 2세, 1133 ~ 1189)을 낳았다.
노르망디 공작 헨리 플랜태저넷(헨리 2세, 1133 ~ 1189)은 프랑스의 루이 7세에게 간통 문제로 이혼당한 11년 연상의 전 왕비 엘레오노르(Aliénor d'Aquitaine, 알리에노르 다키텐, 1122 ~ 1204, 아키텐 공작기욤 10세의 상속녀)의 구애를 받아 1152년에 결혼하였다.
엘레오노르는 부(父)로부터 프랑스의 아키텐, 푸아투, 기엔, 가스코뉴를 상속받아 지배하고 있었다.
그리고 노르망디 공작 헨리 플랜태저넷은 프랑스 왕 루이 7세와 싸워서 브르타뉴를 빼앗아 프랑스 국토의 서반부를 탈취하였다. 이때 헨리 플랜태저넷 부부는 루이 7세보다 더 많은 프랑스 영토를 가졌던 것이다.
1152년에 노르망디 공작 헨리 플랜태저넷(마틸다의 아들, 1133 ~ 1189, 영국 국왕 헨리 2세)은 잉글랜드에 상륙하여 요지(要地)를 점령하여 스티븐을 위협하였고 영국 왕 스티븐은 아들 유스타스(Eustace, 1130 ~ 1153)가 불의의 사고로 사망함에 따라 실의에 빠졌다. 그래서 노르망디 공작 헨리 플랜태저넷과 영국 왕 스티븐은 웨스트민스터 조약(Treaty of Winchester, Treaty of Wallingford, 1153)을 맺게 되었다. 이 조약으로 스티븐은 그의 아들 윌리엄(William, 1137 ~ 1159)이 왕비인 부르고뉴 백작 마틸다 1세(Matilda I, Countess of Boulogne, 1105 ~ 1152)의 부르고뉴 백작을 계승하고, 스티븐은 살아 있는 동안 잉글랜드를 통치하며 노르망디 공작 헨리 플랜태저넷(마틸다의 아들, 영국 국왕 헨리 2세)은 스티븐의 후계자가 된다는 것이었다.
1154년 스티븐 왕이 죽자 노르망디 공작 헨리 플랜태저넷이 군대를 동원하여 21세에 영국 왕 헨리 2세(Henry II, 1133 ~ 1189, 재위 1154 ~ 1189, 잉글랜드 국왕,앙주 백작,노르망디 공작 겸임)로 등극함으로써 플랜태저넷 왕조(Plantagenet Dynasty)가 시작되었다.
헨리 2세(Henry II, 재위 1154 ~ 1189, 영국 국왕 헨리 2세, 앙주 백작, 노르망디 공작을 겸임)는 아버지로부터 앙주(Anjou, 프랑스 중서부)를 물려받고 어머니인 마틸다를 통해 노르망디 공국을 물려받았다.
헨리 2세는 1162년 토머스 베킷(Thomas Becket)을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했다.
토머스 베킷은 대주교가 되고 나서 종교인을 다스리는 부적절한 법령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자 헨리 2세의 신하들은 베킷에게 이를 철회하고 교권보다 왕권이 우위에 놓여 있다는 클래런던 헌장(Charter of Clarendon)에 복종하기를 강요했다. 베킷은 국외로 탈출하여 교황(알렉산데르 3세, Alexander PP. III, 제170대 교황, 재위 1159 ~1181)의 후원하에 헨리 2세에게 종교적 파문을 하였다. 1170년 화해하고 돌아왔으나 충돌이 더욱 격화되어 살해되었다. 이에 헨리 2세는 교황을 달래기 위해 많은 양보를 하여 헨리 8세 때까지 왕권이 교권에 눌리게 되었다.
헨리 2세는 상속문제로 아들들과 갈등이 심했다. 왕비 엘레오노르(자녀는 루이 7세와 2녀, 헨리 2세와 5남 3녀)는 헨리 2세의 부정에 불만이었고 아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후원하였다.
헨리 2세는 아들들은 사면하고 왕비 엘레오노르를 감옥에 가두었으며 왕비 소유의 프랑스 푸아투, 기엔, 가스코뉴 지역에 붕신을 보내어 직접 관할하였다.
헨리 2세는 그의 아들인헨리,리처드,조프리가 1173년 ~ 1174년에 일으킨 반란이 실패한 후 막내인 존을 가장 사랑하여 1177년에아일랜드 영주로 임명하였고 유럽과 영국에 있는 영토도 하사하였다.
1189년 헨리 2세의 셋째 아들 리처드 1세(Richard Ⅰ, 사자왕, 재위 1189 ~ 1199)는 프랑스왕 필리프 2세의 충동으로 반란을 일으켜 왕위에 올랐으며 전쟁을 좋아하여 제위기간 내내 전쟁터에 있었다(5형제 윌리엄, 헨리, 리처드, 제프리, 존 중 리처드와 존만 살아 있었고 나머지 형제는 먼저 죽었음).
리처드 1세(Richard Ⅰ)는 1190년 7월 제3차 십자군 전쟁(1189 ~ 1192)에 참전하여 살라딘(Saradin, 1137 ~ 1193,아이유브 조 창시 1169~1252, 재위 1169 ~ 1193)과의 여러 전투에서 무용을 자랑하였고 빼앗겼던 레반트 해안 지역의 주요 도시 중 일부를 탈환하였으며 이어서 여러 왕들이 예루살렘을 공격하자고 했지만 예루살렘을을 탈환하기도 어렵고 예루살렘을 탈환할지라도 십자군이 철수한 후에는 강력한 살라딘의 공격을 막을 수 없다고 생각하여 살라딘과 협상하여 라믈라 평화 조약(Peace of Ramla armistice agreement, 1192)을 체결하고 기독교인들의 예루살렘 순례를 보장받았다.
그리고 영국에서 동생 존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에 급히 숨어서 본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올랐다.
그런데 앞서 아크레 전투(Siege of Acre, 1291)에서 승전하였을 때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드 5세도 성에 깃발을 올렸으며 리처드1세와 필리프 2세는 이를 오만한 행위로 보고 레오폴드 5세의 깃발을 내렸는데 리처드 1세의 부하들이 그의 깃발을 훼손하여 모욕을 주었다. 격분한 레오폴드 5세는 병력을 수습하여 먼저 귀국길에 올랐고 보복할 기회를 노렸다. 리차드 1세는 영국으로 철수 중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트 5세에게 포로가 되어 신성로마 제국 황제인하인리히 6세에게 팔렸으며 리처드 1세(Richard Ⅰ)는 하인리히 6세에게 어머니인 엘레오노르(Eleanor of Aquitaine, 배우자:헨리 2세 1152 ~ 1189,루이 7세1137 ~ 1152)의 도움으로 거액의 몸값을 지불하고 1194년 봄에 풀려났으며 반란을 일으킨 동생 존을 진압하고 용서하였다.
이슬람 셀주크 왕조(The Great Seljuk Empire, 1037 ~ 1157, 중앙아시아, 이란, 이라크, 시리아를 지배)의 술탄 무하마드 2세(II. Mahmut, 재위 1808 ~ 1839)에 의해1127년 모술(이라크의 니나와, 장기 왕조의 수도)총독으로 임명된 장기(이마드 앗딘 장기, Imad ad-Din Zangi, 1127 ~ 1146, 십자군과 맞선 최초의 이슬람 장군)가 시리아에 장기 왕조(Zangid dynasty, 1127 ∼1222)를 세웠다.
장기는 살라딘(Saradin, 1137 ~ 1193, 아이유브 조 1169~1252 창시, 재위 1169 ~ 1193)과 그의 삼촌을 중용하여 쇠퇴하고 내분에 싸인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를 점령하기 위해 원정을 보냈다. 살라딘과 그의 삼촌은 파티마 왕조의 실권을 빼앗아 지배하였으며 삼촌이 죽은 후 살라딘은 파티마 왕조를 무너뜨리고 아이유브 왕조(1169 ~ 1252)를 창시했다.
살라딘은 장기 왕조의 왕이 죽자 시리아로 들어가 왕비와 결혼하여 이집트와 시리아를 연합하였으며 세력이 강해지자 십자군과 맞서게 되었다.
살라딘은 1099년, 제1차 십자군(1095 ~ 1099)의 포위공격으로 점령당했던 예루살렘을 1187년에 예루살렘 왕을 포로로 잡고 탈환하였으며 그 후 제3차 십자군(1189 ~ 1192)으로 출병한 영국의 명장 리처드 1세(Richard Ⅰ)와 사투를 벌였던 것이다.
살라딘은 십자군보다 더 넓은 마음으로 리처드 1세(Richard Ⅰ)가 전투 중에 낙마했을 때 새 말을 보내주었고 리처드 1세(Richard Ⅰ)가 고열에 시달렸을 때는 산의 눈(雪)을 보내주었다고 한다.
리처드 1세(RichardⅠ)는 이후에도 직접 출정하여 프랑스와 전쟁을 하는 등 막대한 전쟁 비용을 사용하여 국가 재정에 많은 부담을 주었다.
리처드 1세(프랑스에 있는 영국령에 주로 살았음)는 아들이 없었고 왕위 계승문제로 전쟁을 치렀던 동생 존에게 다음 왕위가 넘어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십자군 원정을 떠날 때 넷째 제프리의 아들 아서를 후계자로 정하여 프랑스의 필리프 2세(PhilipII, 재위1180 ~ 1223)에게 맡겼다.
1199년 프랑스지역의 리모주(Limoges, 프랑스중서부) 자작(子爵, Viscount)이필리프 2세와 동맹을 맺고 영국에 반란을 일으키자 리모주는 전략적 요충지였으므로 리처드 1세가 직접 출군하여 반란을 진압하는 전투 중에 48세로 죽자 존(John Lackland, 재위 1199 ~ 1216, 헨리 2세의 5남)은 자신이 왕위를 계승하고 상속권을 유지하기 위해 아서를 보호하고 있는 필리프 2세(PhilipII, 재위1180 ~ 1223)와 협정을 맺으면서, 그리고 결혼하면서 생긴 문제를 프랑스의 영지를 할양하여 해결했다.
영국의 존왕(John, 1166 ~1216, 재위 1199 ~ 1216)은 1202 ~ 1204년에 프랑스의 필리프 2세(PhilipII, 재위 1180 ~ 1223, 카페 왕조)에게 루앙(Rouen, 노르망디의 레지옹 Région과 센마리팀 데파르트망 Département의 수도)을 공략당하고 프랑스 내 영국의 봉토 중 기옌(Guyenne, 아키텐 Aquitaine)을 제외한 모든 영토를 빼앗겼다.
1209년 캔터베리대주교(大主敎) 선임 문제로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Innocentius III, 재위 1198 ~ 1216)와 맞서다 파문당하였고, 1211년에는 왕위를 박탈당하자 1213년에 교황에게 굴복하였다.
1214년존왕이 1202 ~ 1204년에 영토를 빼앗아 간 프랑스에 복수를 하기위해 조직한 잉글랜드, 신성로마제국, 플랑드르, 볼로뉴 연합군이 프랑스 왕국플랑드르 백작령 부빈에서 벌어진 부빈 전투(Battle of Bouvines, 1214)에서 프랑스의 필리프 2세 군에 대패하여 영국의 존왕은 프랑스 남서부의 귀예네 공국(Guyenne)에 대해서만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고 나머지 프랑스 내의 영지를 필리프 2세(PhilipII, 재위 1180 ~ 1223, 카페 왕조)에게 모두 잃었다.
그는 그 동안 프랑스와의 전쟁비용으로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였으며 캔터베리 대주교 선임권을 두고 교황과 대립하는 등 실정을 거듭하였다.
1214년 존 왕이 필리프 2세에게부빈 전투(Battle of Bouvines, 1214)에서 패배하고 잉글랜드로 귀환했을 때 존 왕의 재정 정책과 귀족들에 대한 대처에 불만이 많던 남작들이 반란을 일으켜 왕권을 제한하고 귀족의 특권을 인정하는 대헌장(Magna Carta, 마그나카르타)을 제시하였으며 1215년 존 왕이 서명하여 일단 화해했다. 대헌장은 교회와 귀족, 자유민의 권리와 자유 등을 보장하고 왕의 준수 사항을 약속한 칙허장으로, 오늘날 영국 헌법 체계의 효시가 되었다.
그런데 1215년마그나 카르타에 합의했지만 왕과 남작들은 조약에 만족하지 못했으며 남작들이 프랑스왕자 루이 8세(Louis VIII, 프랑스 국왕 재위 1223 ~1226)를 영국 국왕(재위 1216 ~ 1217)으로 추대하고 그의 지원을 받아 제1차 남작 전쟁(First Barons' War, 1215 ~ 1217)을 일으켰다. 전쟁 중1216년 존 왕은 이질로 사망했다.
존 왕의 뒤를 이어 아들인 헨리 3세(Henry Ⅲ, 1207 ~ 1272, 재위 1216 ~1272)가 즉위하였다.
헨리 3세를 지지하는 세력이 루이 8세와 남작 반군을 무찔렀다.
헨리 3세(Henry Ⅲ, 1207 ~ 1272, 재위 1216 ~1272)는 어릴 때 즉위하여 귀족의 섭정 기를 거쳐 1236년 20세에 친정을 하였고 프랑스의 엘레아노르 프로방스(Eleanor of Provence, 1223 ~ 1291, 1236년 결혼, 부 프로방스의 백작 라몽 베렝게르 4세 Ramon Berenguer IV, 모 베아트리스 사부아 Beatrice of Savoy)와 결혼하였다.
헨리 3세는 영국 귀족을 멀리하고 엘레아노르의 외삼촌인 윌리엄 사부아와 4촌들을 비롯한 프랑스 귀족들을 최측근으로 등용하였으므로 귀족들의 반감을 샀다.
게다가 헨리 3세의 여동생 앨리너(Eleanor of England, Countess of Leicester)와 결혼한 프랑스인 레스터 백작 시몽 드 몽포르(Simon de Montfort, 1208 ~ 1265)가 정치에 간섭을 하자 귀족들의 불만은 더욱 커졌다.
엘레아노르 프로방스는 헨리 3세가 1253년 프랑스 가스코뉴(Gascony)에 갔을 때 섭정(여왕)을 하였다.
헨리 3세는 대헌장을 지키지 않았으며 프랑스 영토 회복과 시칠리아 정복을 위해 무리한 전쟁 자금을 요구하였다.
이에 귀족들은 재정을 지원하는 대신 왕족과 귀족 대표로 구성된 위원회가 선출한 평의회에 공동 실권을 부여하고 왕권의 제한, 마그나 카르타의 준수, 지방정치를 개선한다는 등의 개혁안인 옥스퍼드 조례(Provisions of Oxord, 1258)에 서명하게 하였다.
그 후 1261년 로마교황이 이 조례를 해제하고 헨리 3세가 파기하였으므로 개혁파 귀족(배런)들이 배런 전쟁(Baron’s War, 1264 ~ 1267)을 일으켜 1264년 5월 루이스 전투(Battle Of Lewes)에서 국왕과 왕자를 포로로 잡아 구금하였다.
배런 전쟁의 지도자는 헨리 3세의 매제인 시몽 드 몽포르(Simon de Montfort, 1208 ~ 1265)였으며 이들은 귀족의 지지를 받지 못하자 1265년 지방의 기사와 도시 공민의 대표가 자문의 자격으로 참가하는 의회를 소집하였는데 그 의회는 귀족, 주 대표, 도시 대표가 고루 참가함으로써 영국 하원의 시초가 된다.
엘레아노르 프로방스 왕비는 귀족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프랑스군을 원군으로 불러들여 도움을 주기도 했다.
1265년 8월 탈출한 왕자 에드워드(Edward, EdwardI, 1272 ~ 1307)는 왕당파를 지휘하여 몽포르와의 전투에서 승리하였으며 몽포르는 전사하였다.
1267년 국왕은 귀족에게 권리를 양보하며 유화정책을 펴 내란을 잠재웠다.
프랑스의 엘레아노르 프로방스(Eleanor of Provence, 영국 헨리 3세 왕비)의 자매들인 언니 마가렛 프로방스(Margaret of Provence, 프랑스 루이 9세의 왕비), 첫째 여동생 산치아 프로방스(Sanchia of Provence, 로마의 왕 리처드의 왕비), 둘째 여동생 베아트리체 프로방스(Beatrice of Provence, 시칠리아 와 나폴리 샤를 1세의 왕비)는 모두 미인으로 왕비였다.
1282년 웨일스(Wales)는 잉글랜드의 국왕 에드워드 1세(Edward Ⅰ, 재위 1272 ~ 1307)에게 정복되었다.
프랑스에서는 필리프 4세(Philippe IV, 재위 1285 ~ 1314, 장남 루이 10세, 둘째 아들 필리프 5세, 막내아들 샤를 4세)의 아들인 샤를 4세(재위 1322 ~ 1328)가 1328년 아들 없이 죽어 카페 왕조가 단절되었다.
이에 4촌인 발루아가(家, La maison de Valois)의 필리프 6세(Philippe VI, 재위 1328 ~ 1350, 발루아 왕조 초대 왕)가 왕위에 올랐다.
필리프 6세(Philip VI, 재위 1328 ~ 1350)가 기엔을 비롯한 프랑스 내의 영국령을 몰수하고 프랑스 자역에 미치는 영국의 영향력을 줄이려는 기세를 보이자 영국 왕 에드워드 3세(Edward III, 재위 1327 ∼ 1377)는 협상을 시도했으나 협상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 전쟁으로 해결해야한다고 생각하여 전쟁을 일으킬 명분으로 플랑드르(Flandre, 현 벨기에 지역, 모직물 공업지대)에 양모 수출을 중단하고 그리고 프랑스 왕위(王位) 계승권이 자기에게 있음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영국 왕 에드워드 3세(Edward III, 재위 1327 ∼ 1377)는 플랑드르(Flandre, 현 벨기에 지역, 모직물 공업지대)에 양모 수출을 중단하고 필리프 6세(Philip VI, 재위 1328 ~ 1350)가 왕위에 오른지 10년이 지난 1337년에 그의 모친이 카페 왕가 출신(샤를 4세의 누이)이라는 이유로 프랑스 왕위(王位)를 계승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이때 프랑스에서는 딸에게는 왕위 계승권이 없었다).
1337년에 프랑스의 필리프 6세(Philip VI, 재위 1328 ~ 1350)가 프랑스 영토 안에 있는 영국 땅을 몰수하고 특히 영국령인 기엔(Guyenne, 포도주 생산지)을 점령하였다.
이에 영국 왕 에드워드 3세(Edward III, 재위 1327 ∼ 1377)가 전쟁을 선포함에 따라 두 나라 간에 백년전쟁(百年戰爭, Hundred Years' War, 1337 ~ 1453, 프랑스 왕위 계승권)이 시작되었다.
영국은 프랑스에 비해 국력이 1/4로 열세였으나 1338년 스코틀랜드 등과의 전투로 경험이 많은 소수의 병력으로 프랑스의 앤트워프(안트베르펀, Antwerpen)에 상륙하여 게릴라전(Guerrilla Warfare, 遊擊戰)을 폈다.
영국의 함대는 네덜란드 앞바다에서 벌어진 슬로이스 해전(Battle of Sluis, Battle of l'Écluse, 1340)에서 프랑스 함대를 전멸시켰다.
1341년 에드워드 3세(EdwardIII, 재위 1327 ~ 1377)는 막대한 전비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의회의 협조가 필요했으므로 의회를 성직자와 귀족으로 구성된 상원(House of Lords, upper house)과 서민인 구, 주의 대표로 구성된 하원(House of Commons, lower house)으로 나누어 양원제(兩院制, bicameralism)를 구성했다.
1346년 크레시 전투(battle of Crecy, 프랑스 칼레 남쪽)에서 영국군은 사석포로 리볼데퀸(Ribauldequin, 오르간 건 organ gun,다발 건)이라고 불리는 대포를 처음 사용하였다.
중국에서 발명된 화약과 화포는 송나라 때 몽고군에 의해 전파되어 유럽 최초로 사용된 것은 13세기 국토 수복 운동 때 이베리아에서 사용된 것으로 보이며 기록으로는 1320년 경에 아라비아에서 대포가 발명되어 백년전쟁 때에 처음 사용되었다.
크레시 전투(battle of Crecy, 프랑스 칼레 남쪽, 1346)에서 프랑스의 석궁이 발사 속도가 빠른 영국의 장궁에 열세였으며 그리고 프랑스의 필립 6세는 용병인 제노바 쇠뇌병을 앞에 세우고 후열에 기병을 세워 전투를 시작했으나 비가 내려 제노바 쇠뇌병의 활줄이 젖어 쇠뇌를 쓸 수 없어 영국의 흑태자는 적은 병력으로 승리하였다.
1356년에는 영국 에드워드 3세의 아들인 흑태자 에드워드(The Black Prince, 1330 ~ 1376, 리처드 2세 아버지)가 푸아티에 전투(Battle of Poitiers, 1356)에서 잉글랜드 군보다 세 배나 많은 프랑스군을 대파하고 프랑스왕 장 2세(John II, 재위 1350 ~ 1364)를 포함한 프랑스군 지휘부를 포로로 잡았다.
이 난국에 프랑스왕 장 2세의 아들인 샤를 왕세자(샤를 5세 Charles V, 1338 ~ 1380, 재위 1364 ~ 1380, 프랑스현명왕)가 어린 나이에 권력에서 밀려나 있었으나 1358년 지방의 군대를 재정비하여 귀족들이 권력을 잡고 있던 파리를 수복하여 통치권을 확립하였다.
프랑스의 샤를 왕세자는 영국에 휴전을 제안하여 브레티니 조약(Traité de Brétigny, 1360)을 맺은 결과 장 2세의 몸값으로 앙주를 영국에 할양(割讓, cession)하고 장 2세를 모셔왔으며 영국은 프랑스 왕위를 포기할 것을 약속했다.
1364년 왕위에 오른 샤를 5세(Charles V, 재위 1364 ~ 1380, 프랑스현명왕)는 전쟁 때만 고용하던 용병을 의회의 의결을 거치지 않고 징수한 조세를 사용하여 상비군으로 전환하였으며 이 상비군을 이용하여 영국군이 대부분 귀국하고 경비병만 남은 앙주를 1380년까지 거의 탈환하였다.
프랑스는 여러 전투에서 패하는 등 우여곡절 끝에 크게 제작한 대포를 동원하고 의기소침한 군사들의 용기를 북돋우는 구심점이 된 잔 다르크(Joan of Arc, 1412 ~ 1431, 동 레미 지역의 소작농 딸) 등의 활약으로백년전쟁에서 승리하였다.
영국이 백년전쟁에 패배함으로써 영국은 프랑스에 있던 영토를 모두 잃었다. 그러나 플랑드르에서 영국의 양모를 수입해 모직물을 만들어 수출하던 플랑드르의 기술자들과 업자들은 전쟁이 끝나자 원료를 찾아서 양모 산지인 영국으로 대부분 이주함에 따라 영국의 모직물 산업은 원료와 기술이 결합하여 계열화됨으로써 크게 발전하였다.
양모산업이 번창함에 따라 양모생산을 늘이려고 밀생산 농지를 양목축지로 변경하는 지경에 이르러 식량부족 현상까지 일어났다.
15 ~ 16세기에 토지를 가진 지주들이 양모산업의 급성장으로 양모생산이 밀농사보다 경제성이 높자 농사를 짓던 농지에 울타리를 치고 양치는 대규모 목장으로 변경함에 따라 많은 농민들이 도시로 밀려나 빈민 노동자로 전락하였다. 이를 1차 인클로저(enclosure)라 한다.
대량으로 생산된 모직물을 네덜란드에 수출함으로써 중산 지주 계급인 젠트리(gentry, 귀족과 요먼의 중간), 자유 농민인 요먼(Yeoman, 독립 자영 농민), 상인 등이 성장하여 왕을 지지하는 세력이 되었으며 나라의 부가 쌓여갔던 것이다.
이후 봉건제도인 영주제도가 쇠퇴하고 자본주의의 관료제도가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백년전쟁에서의 패배로 영국 사회가 날로 불안정해지는 가운데 귀족들은 왕의 혈통 문제를 둘러싸고 붉은 장미를 문장으로 쓰는 랭커스터(Lancaster)가(家)와 흰 장미를 문장으로 쓰는 요크가(York 家)가 왕위 계승권을 놓고 전쟁을 벌였는데, 이것을 장미전쟁(薔薇戰爭, Wars of the Roses, 1455 ∼ 1485)이라고 부른다. 1461년에 요크가(家)가 랭커스터 가문의 헨리 6세를 밀어내고 에드워드 4세(Edward Ⅳ, 재위 1461년 ~ 1470년 10월, 1471년 4월~1483)를 즉위시킴에 따라 요크 왕조 시대가 열렸으나 요크 가문의 분열로 내전은 30여 년간 계속되었다.
랭커스터(Lancaster) 가문의 웨일스(Wales) 출신 헨리 튜더(Henry Tudor)가 보즈워스 전투(Battle of Bosworth, 1485)에서 승리하여 장미전쟁을 종식시키고 영국의 튜더 왕조(Tudor Dynasty)를 열었다.
헨리 튜더(Henry Tudor)는 랭커스터 가(家)의 왕위 계승권자로 요크가(家)의 딸과 결혼함으로써 두 가문을 통합하고 헨리 7세(Henry VII, 재위 1485 ~ 1509)로 왕위에 올랐다.
헨리 7세는 절대주의의 기초를 확립했다.
장미전쟁(1455 ~ 1485)의 결과 귀족 계급의 수가 줄어들고 중산 지주 계급인 젠트리(gentry), 자유 농민인 요먼(Yeoman, 독립 자영 농민), 상인 등이 유력한 계급으로 새로이 성장하였다.
부유한 중산 계급인 젠트리와 상인들이 글자를 읽을 줄 알게 되는 등 전반적인 문화 수준이 높아졌으며, 귀족의 감소로 왕권이 강화되어 영국의 절대주의가 최고조에 달하였다.
헨리 7세는 해군을 강화했다.그리고 영국의 미래가 해상무역에 있다고 생각하였으며 보르도 지방에서 포도주를 수입할 때 영국의 선박이 운송하도록 강제하는 항해법(1489)을 시행하는 등 상인 및 지방의 젠트리(gentry), 요먼(yeoman, 독립 자영 농민) 계층을 지원하는 정책을 폈다. 신흥 중산층은 국왕의 강력한 지지자가 되었다.
웨일스(Wales)는 헨리 7세 때인 1485년 이후 잉글랜드에 통합되었으며 1535년 제정된 연합 법(Act of Unions)에 따라 정치적으로 완전히 잉글랜드에 통합되었다.
1497년 헨리 7세의 명을 받은 존 캐벗(John Cabot, Giovanni Caboto, 지오반니 카보토, 1450 ~ 1499, 이탈리아 출생, 영국 탐험가)이 캐나다의 노바스코샤(Nova Scotia, New Scotland, 뉴 스코틀랜드) 지역과 북미 대륙의 동해안을 탐사하였고, 영국이 이를 영토(뉴잉글랜드 식민지)로 하였다.
헨리 7세의 뒤를 이은 헨리 8세(Henry Ⅷ, 1491 ~ 1547, 재위 1509 ~ 1547)는 헨리 7세의 둘째 아들로 튜더 왕조의 제2대 왕이다.
헨리 8세는 헨리 7세의 정책을 이어받아 해군을 육성하고 항해를 촉진하는 정책을 펴 해군의 아버지라 불렸으며 메리 포춘, 스윕스테이크 등 큰 배를 건조하여 상인들이 임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헨리 8세는 1509년 즉위한 후 곧바로 헨리 7세와 스페인 왕이 일찍이 약속하여 약혼했던 대로 형수 캐서린(Catherine of Aragon, 카탈리나 데 아라곤 이 카스티야 Catalina de Aragón y Castilla, 1485 ~ 1536, 카를 5세 Karl V의 이모)과 결혼했다.
그전에 헨리 7세는 헨리 8세와 캐서린(카탈리나)의 결혼을 허락해 줄 것을 교황 율리오 2세에게 청원하였다. 교황 율리오 2 세는 형수와 결혼할 수 없는 교회법에도 불구하고 캐서린이 20주의 결혼 생활에도 초야를 치르지 않았다고 맹세함에 따라 관면(寬免, dispensation, 특별한 경우 법률의 구속으로부터 해방되는 상태)하였던 것이다.
캐서린은 스페인의 왕국인 아라곤(Aragon)의 왕페르난도 2세와 카스티야 왕국의 여왕 이사벨 1세의 막내딸로 영국의 왕위 계승자인 아서 튜더(Arthur Tudor, 1486 – 1502, 헨리 7세의 맏아들)와 1501년 결혼할 때 많은 지참금을 가져왔다. 헨리 7세는 1502년 아서가 죽어 과부가 된 캐서린이 스페인의 아라곤(Aragon)으로 돌아간다면 정략결혼의 이득을 잃게 되고 지참금을 돌려주어야 했던 것이다.
헨리 8세는 제3차 이탈리아 전쟁(1508 ~ 1516, 캉브레 동맹 전쟁) 중에 프랑스의 저지대를 차지하기 위해 참전하여 1513년 긴가트 전투(Bataille de Guinegatte, 스퍼스 전투, Battle of the Spurs1513.8. 프랑스북부 파드칼레주)에서 루이 12세의 프랑스군을 격파하였으나 별 소득없이 군비만 소모하고 철수하였다.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4세(James IV , 1473 ~ 1513, 재위 1488 ~ 1513, 왕비 마거릿 튜더 Margaret Tudor는 헨리 8세의 누나)가 영국을 적대시하고 프랑스를 우호하는 정책을 실시하자 헨리 8세는 스코틀랜드로 군대를 진격시켜 플로든 전투(Battle of Flodden, 1513.9.)에서 승리하여 에든버러까지 점령하였으며 스코틀랜드에서는 이전투에서 제임스 4세가 전사하고 제임스 5세(James Ⅴ,1512~1542, 재위 1513 ~ 1542)가 즉위하였다.
헨리 8세는 아들을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1534년 왕비 캐서린(카를 5세 Karl V의 이모)과 이혼을 했으며 교황 클레멘스 7세(Clemens VII, 재위 1523 ∼ 1534)가 신성로마제국(스페인) 카를 5세(Karl V)의 눈치를 보며 이혼을 허락하지 않자 종교개혁을 단행하였다.
1534년에 로마 교황청과 단절하고 영국 교회를 관리하는 모든 권한이 국왕에게 있다는 수장령(Act of Supremacy)을 발표하여 로마 교황청에서 독립된 영국 국교회(Church of England, 성공회)를 창립하였다. 헨리 8세 본인이 성공회 수장이 되어 영국 국교인 성공회를 이끌었다. 성공회 교리는 신교에서 가톨릭에 가까운 혼재된 교리라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정통 가톨릭(Catholic) 교도와 신교도(프로테스탄트, Protestant, 16세기 종교개혁으로 로마 가톨릭에서 분리되어 나온 교파의 총칭) 양쪽으로부터 배척받았다. 그리고 수많은 수도원을 해산시키고 재산을 몰수했다.
1536년 헨리 8세(Henry VIII)는 웨일스를 잉글랜드에 통합하였다.
헨리 8세는 6번 결혼하고 많은 사람을 처형한 폭군이었으나 강한 영국을 만들었다.
헨리 8세는 엘리자베스 1세가 부강한 영국을 만들 수 있도록 기초를 닦았다.
헨리 8세(1492 ~ 1587)는 해상 제패라는 웅대한 꿈을 가졌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3,4층의 갑판을 가진 겔리온(Gellyon)선에 칼, 창, 화승총으로 무장하여 선상 백병전에 능한 병사들과 사거리 짧은 화포로 무장한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해야 했다.
그래서 핸리 8세는 장거리 화포로 무장한 해군을 양성하고 이에 맞는 해상 전술 양식을 개발하였다.
이 시절의 화승총은 1521년에 처음 발명된 보병용 화기로, 구경 18mm, 최대 사거리 300m, 유효사거리는 100m 수준이었으며 스페인 해군은 화포보다 화승총에 치중하였으므로 접근전에 유리하였다.
이에 맞서 영국은 원격전을 계획하고 장거리포로 무장한 최강의 함대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한 결과 1547년 핸리 8세가 승하할 때 영국 해군은 53척의 전함에 2,085문의 함포로 무장한 최신의 대함대로 급성장했던 것이다.
헨리 8세의 뒤를 이어 유일한 아들인 에드워드 6세(Edward VI, 1537 ~ 1553, 재위 1547 ~1553, 헨리 8세의 세 번째 부인이자 제 2계비인 제인 시모어 Jane Seymour 출생)가 9살에 즉위하였으나 병약했으며 후계자가가 없었다.
이에 에드워드 6세의 총신(寵臣, favorite)인 노섬벌랜드 공작 존 더들리(John Dudley, 1st Duke of Northumberland, 1504 ~ 1553, 제독, 정치인, 에드워드 6세 총신 1550 ~ 1553)는 에드워드 6세가 가톨릭에 심취한 메리 1세(Mary Ⅰ)가 왕위를 잇는 것에 부정적이자 왕위 계승 순서를 무시하고 에드워드 6세가 후계자를 다시 지정할 수 있다는 방법을 제시하고 튜더가의 방계인 1대 서퍽 공작 헨리 그레이(Henry Gray, 1st Duke of Suffolk, 1517 ~ 1554)와 공모하여 헨리 그레이 딸인 제인 그레이(Jane Grey, 레이디 제인 더들리 Lady Jane Dudley, 1537 ~ 1554, 헨리7세의 차녀이자 헨리 8세의 여동생인 메리 공주의 외손녀, 9일간 여왕 재위)를 왕위에 올리기로 하고 자기 아들과 제인 그레이(Jane Grey)와 결혼시켰으며 1553년 에드워드 6세가 죽자 제인 그레이(Jane Grey)를 왕위에 올렸다.
이에메리 1세(Mary Ⅰ, Mary Tudor메리 튜더, 1516 ~ 1558,재위 1553 ~ 1558)의 지지층이 봉기하였으며 군대로 맞섰으나 메리 1세(Mary Ⅰ) 측이 의회를 점령하고 왕에 즉위하였으며 제인 그레이(Jane Grey)는 9일 천하로 끝났다.
반란 주동자는 참수당하거나 런던탑에 갇혔으며 엘리자베스 1세도 반란에 가담했다는 의심을 받아 런던탑에 갇혔다.
메리 1세(Mary Ⅰ, Mary Tudor메리 튜더, 1516 ~ 1558,재위 1553 ~ 1558)는 헨리 8세와 캐서린 왕비 사이에서 태어난 유일한 딸로서 가톨릭(Catholic)을 매우 숭상했다. 메리 1세는 로마 가톨릭복고 정책으로 개신교와 성공회를 탄압하였으며 성공회 성직자들과 개신교신자들을 300명가량 처형하여블러디 메리(Bloody Mary, 피의 메리)라고 불리었다.
메리 1세는 스페인의 펠리페 2세(고종 5촌)와 정략결혼(政略結婚)했으나 아이를 낳지 못했다.
메리 1세는 프랑스와 스페인 사이의 전쟁(제8차 이탈리아 전쟁, 1551~1559)에 스페인 쪽으로 참전하였다가 1558년 프랑스의 앙리 2세에 의해칼레를 점령당했으며 1559년 4월(엘리자베스 1세 때)에 체결된 카토 캉브레지 조약(Traités du Cateau-Cambrésis)에 의해 대륙의 마지막 영토인 칼레를 잃었다.
메리 1세(Mary Ⅰ, Mary Tudor메리 튜더, 1516 ~ 1558,재위 1553 ~ 1558)는 즉위 5년만에 병이 들어 1558년 42세의 나이로 죽었다.
메리 1세의 뒤를 이은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Ⅰ, 1533 ~ 1603, 재위 1558 ~ 1603)는 헨리 8세의 두 번째 왕비 앤 불린(Anne Boleyn, 1501 ~1536, 시녀 출신으로 비밀리에 결혼)에게서 태어났으며 튜더 왕조의 제5대 왕이 되었다.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Ⅰ, 1533 ~ 1603, 재위 1558 ~ 1603)는 메리 1세의 가톨릭 국가와는 달리 성공회를 개혁하여 가톨릭의 방식을 유지하면서 교리만 개신교로 바꾼 중도적 교회로 만들어 로마 가톨릭의 정치적 간섭을 배제하였으며 성공회를 다시 영국의 국교로 확립하였다.
그녀는 국내 정책을 정비하고 바른 정치로 백성들의 숭상을 받았다.
침략기회를 엿보는 스페인을 약화시키기 위해 네덜란드의 독립전쟁을 지원하였으며 부족한 국가의 재정을 마련하고 스페인을 약화시키기 위해 서인도 제도에서 금은을 싣고 돌아오는 스페인 상선을 약탈하는 사락선( 私掠船, privateer, 개인이 국가의 특허장을 받아 적성국가의 상선을 노략질하는 무장 선박)을 용인하였다.
그리고 해외 식민지 사업을 추진하였다.
1583년 험프리 길버트(Humphrey Gilbert, 1539 ~ 1583)는 대서양을 횡단하여 뉴펀들랜드에 상륙하여 이를 영국령으로 선포했다.
1584년 월터 롤리 경(Sir Walter Raleigh, 1552 ~ 1618, Humphrey Gilbert의 이부 異父 동생)이 플로리다 북부를 탐험하여 ‘버지니아(Virginia, 엘리자베스 1세에서 유래)’로 명명하고 1857년에 사비를 투자하여 로어노크 섬(Roanoke Island, 노스캐롤라이나주)에 식민지를 개척하고 돌아온 후 곧 보급품을 싣고 다시 갈 예정이었으나 스페인 무적함대와의 전쟁(1588)으로 늦어져 1591년에 보급품을 싣고 갔으나 흔적도 없이 사라져 식민지 개척은 실패했다.
철강업, 조선업, 항해술을 발달시켜 민첩한 함대를 만들고 백성들과 군을 단결시켜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하고(1588) 해상권을 잡았다.
1589년 영국은 스페인에 대규모 원정 함대를 파견하는 드레이크-노리스 원정(Drake-Norris Expedition, 1589)을 하였으나 대패하였다. 그 결과 영국은 1588년의 무적함대를 격파한 이점을 잃게 되었고 스페인은 다시 강력한 해군을 재건할 수 있는 시간을 벌었다.
1595년 네덜란드가 포르투갈이 개척한 인도 항로로 진출하자, 이에 자극받은 영국은 런던의 상인들이 중심이 되어 1600년 12월 31일 영국의 동인도 회사(東印度會社, East India Company, EIC)를 설립하였다.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엘리자베스 1세로부터 특허를 얻어 동인도 지역(인도양과 서태평양 지역) 무역의 독점권을 얻었다. 처음에는 한번 항해할 때마다 자본을 모집하고 정산하였으나 점차 그 폐해가 나타나 1613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1602년 설립)를 본받아 합자(合資) 회사를 만들어 영속적인 운영을 하게 되었다.
엘리자베스 1세는 잉글랜드의 지배권을 서쪽으로 확장하여 아일랜드를 지배하고 이주민을 정착시키는 정책을 폈다. 여왕의 치세가 끝날 무렵에는 아일랜드 전역이 잉글랜드의 지배하에 놓였다. 열렬한 가톨릭교도인 아일랜드인들은 그동안 교황과 스페인과 연합하여 저항하였으나 번번이 실패하였다.
엘리자베스 1세 말기의 10년은 침체기였다. 전쟁 동안 국민적 결속이 이루어지고 애국심과 희생정신이 고취되어 왔지만 전쟁이 끝나자 엄청난 전쟁비용 지출로 재정이 고갈되어 의회와 갈등하게 되었고 국민들은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겪어야 했다.
나. 봉건 제도(feudalism, 封建制度)의 쇠퇴와 젠트리(Gentry, 향신, 鄕紳) 및 부르주아(bourgeois) 형성
국가 통치제도의 역사를 보면 한 집단의 지도자로 옹립(擁立)된 군주가 친밀한 소수의 사람들을 등용하고 이들의 자문을 받아 통치하는 군주제에서 국가 구성원의 의견을 대변하는 대표자와 통치 집단을 선출하여 통치자보다 국가 구성원의 의견에 따라 통치하는민주주의 제도로 발전하여 왔다.
이에 따라 구성원 각 개인의 자유가 신장되고 개성이 존중되며 특기가 발휘되어 산업과 경제가 더 능률적으로 발전되어 왔다.
1) 봉건 제도(feudalism, 封建制度)
봉건 제도(feudalism, 封建制度)의 기원은 중국의 주(周) 나라 무왕(武王)이 서주를 건국한 후 천하를 안정하게 통치하기 위해 신하들의 보좌를 받아 시행한 통치 제도이다. 넓은 영토를 차지한 천자는 자제(子弟)나 가신(家臣)인 제후(諸侯)들에게 지방의 영토를 나눠주어 통치를 하게 하였으며 제후들은 분봉(分封) 받은 영지를 다시 자제, 가신들에게 재분봉하여 통치하게 하였던 것이다.
유럽에서의 봉건제도는 로마의 은대지제(恩貸地制, beneficium, 봉건 군주가 가신(家臣)에게 봉지를 주는 대가로 군역 따위의 봉사 의무를 요구한 제도)와 게르만의 종사제(從士制 comnitatus, 주군에게 충성을 다하고, 주군은 종사에게 무기, 식량 따위를 주는 주종관계 제도)가 그 기원이며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 중세 초기에 건설된 프랑크 제국이 분열되고 외세의 침략으로 혼란해지자 이에 대항하기 위해 왕은 봉신(封臣, vassal, 주군에게 봉사하는 대가로 봉토를 받은 사람)들에게 병역 의무의 대가로 토지의 용익권(用益權, Niessbrauch, 일종의 사용권)을 주면서 시작되어 16세기까지의 1,000년 동안 유럽의 프랑스, 스페인, 영국, 독일, 이탈리아 등에서 시행되었다.
황제나 왕이 주군으로 봉신(封臣, vassal)에게 봉토를 주고, 봉신은 주군에게 봉사하며 군사적 의무를 행한다. 토지를 매개로 하는 이런 주종 관계가 왕을 정점으로 하여 중층적으로 맺어졌다. 그런데 주군과 봉신은 본래 같은 전사로서 평등한 신분에 속하였으며, 따라서 주종 관계 또한 평등한 사람들 사이에 맺은 쌍무적인 계약 관계로 주군은 토지를 주고 봉신은 군사적 의무를 가지는 것으로 중국의 혈연관계와는 구별된다.
봉건 제도는 농노제로 경영되는 장원 제도이고 장원은 자급자족의 농촌공동체이며 봉신은 여러 개의 장원을 소유하기도 하였다. 장원에 소속된 농노는 토지를 지급받아 영농하여 생활하는 대가로 주 2~3일을 주군의 영농에 봉사하였고 각종 세금을 납부하였으며 자유로이 장원을 벋어날 수 없었지만 자기 집을 가지고 결혼하여 개별생활을 하였다.
봉신들은 토지에서 나오는 재산으로 자신과 병사들을 무장시키고 왕이 소집할 경우 전쟁에 참여했다.
봉토는 원칙적으로는 봉신의 죽음과 함께 다시 왕에게로 귀속되었다.
장원의 영지는 종복(從僕)이나 농노의 부역을 이용하여 영주가 직접 경영하는 직영지(直營地), 농노에게 대여하여 조공을 받는 탁영지(託營地), 삼림, 목장, 호소(湖沼) 등의 공유지(共有地)로 구성되었다.
장원의 농경지는 삼포식농업(三圃式農業, three course ratation, three-field system)으로 춘경지, 추경지, 휴한지로 나누어 윤작(輪作)을 하였다.
장원에는 제분소, 제빵소, 교회 등이 있었다.
봉건제도하에서 물질적 부와 권세 그리고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사람은 귀족 등 극 소수였으며 대부분을 차지하는 농노들은 물질적 부와 권세와 자유는 물론 없고 농업 특성상 협력하여 전체적인 결과만 이루려고 함으로 개인의 개성과 특기가 말살되어 다양한 발전이 어려웠다.
2) 젠트리(Gentry, 향신, 鄕紳) 및 부르주아(bourgeois) 형성
10세기에 잉글랜드 통합 왕국이 형성될 때부터 영국에는 위탄스(witans, 국왕 자문 위원회)라고 불리는 귀족과 고위 성직자들로 구성된 심의회(deliberative assemblies)가 열렸는데 이 심의회가 대회의(Magnum Concilium, Great council)의 기원이다.
영국에서는 존 왕(John Lackland, 재위 1199 ~ 1216, 헨리 2세의 5남)이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자 1215년 귀족들이 무한한 왕의 권한을 제한하고 귀족의 특권을 승인하는 대헌장(Magna carta)을 제정하고 국왕도 국가의 법에 따라야 한다는 원칙을 제정하여 입헌정치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이어서 1265년 시몽 드 몽포르(Simon de Montfort, 반군 지도자)는 처남인 헨리 3세(Henry Ⅲ, 1207 ~ 1272)에 반기를 들고 세력을 형성하기 위해 대회의(Magnum Concilium, Great council)의 협조를 구하고자 했으나 여의치 못해 귀족과 성직자로 구성된 대회의(Magnum Concilium, Great council)에 도시의 주( 州) 대표를 참여시켜 협조를 얻고자 시도했는데 이것이 영국 의회의 시초가 되었다.
1341년 에드워드 3세(EdwardIII, 재위 1327 ~ 1377)는 프랑스와의 백년전쟁에 필요한 막대한 전비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의회의 협조가 필요했으므로 의회를 성직자와 귀족으로 구성된 상원(House of Lords, upper house)과 서민인 구, 주의 대표로 구성된 하원(House of Commons, lower house)으로 나누어 양원제(兩院制, bicameralism)를 구성했다.
프랑스 왕위계승권을 둘러싸고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벌어진 백년전쟁(百年戰爭, Hundred Years' War, 1337 ~ 1453)이 끝나자 플랑드르에서 영국의 양모를 수입해 모직물을 만들어 수출하던 플랑드르의 기술자들과 업자들이 원료를 찾아서 양모 산지인 영국으로 대부분 이주함에 따라 영국의 모직물 산업은 원료와 기술이 결합하여 계열화됨으로써 크게 발전하였다.
대량으로 생산된 모직물을 네덜란드에 수출함으로써 영국의 상공업이 크게 발달함에 따라 중산 지주 계급인 젠트리(gentry), 자유 농민인 요먼(Yeoman, 독립 자영 농민), 상인 등이 성장하였다.
봉건제도 하에서는 농노들이 협력으로 농사를 지었으므로 개인의 권리, 자유, 특기, 개성 등이 무시되었으나 새로 생성된 중산 지주 계급인 젠트리(gentry), 자유 농민인 요먼(Yeoman, 독립 자영 농민), 상인 등은 쌓은 부와 독립된 생활로 자유와 권리를 주장하고 각자의 특기와 개성을 발휘하여 산업을 발달시켜 나라의 부가 쌓여갔던 것이다.
이들은 점차 부르주아(bourgeois, 프랑스어, 유래-성에 둘러싸인 중세 도시 국가의 주민, 절대 왕정의 중상주의 경제 정책으로 부를 축적한 유산 계급, 자본가)가 되어 왕을 지지하는 세력이 되었으며 이에 따라 봉건제도인 영주제도가 쇠퇴하고 자본주의와 관료제도가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이어서 이들의 집단이 점점 커짐에 따라 권리를 주장하고 과도한 의무에 대해 의견을 표출하기 시작하였다.
점차 젠트리(Gentry, 향신, 鄕紳)들도 의회에 진출하기 시작하여 다수가 되었으며 서민원(하원) 정치로 발전되었다.
이와는 달리 프랑스에서는 제후들이 농노를 이용한 농업이 주가 되는 봉권제도가 계속되다가 위그노 전쟁(Huguenots Wars, 1562 ~ 1598,프랑스에서 구교와 신교 간의 갈등 전쟁)이 지나서야 상공업이 발전되었다.
독일과 이탈리아에서는 제후들이 상업을 독점하고 폐쇄적인 상공업 동업자 조직인길드(guild)의 결성으로 시장이 자유롭지 못해 상공업 발달이 늦어지고 봉건제도가 계속되어 중앙집권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18세기가 되어서야 부르주아(bourgeois, 자본가) 집단이 형성되었다.
다. 1588년 영국의 스페인 무적함대 격파
스페인은 1492년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이래 잉카 제국(Inca Empire, 페루,에콰도르,볼리비아,아르헨티나, 칠레,콜롬비아 등에 걸쳐있었음, 1532년 피사로 Francisco Pizarro, 1475 ~ 1541, 의 침입으로 1572년 멸망)과 아스텍 제국(Aztec Empire, 멕시코, 1519년 에르난 코르테스 Hernán Cortés, 1485 ~ 1547, 의 침입으로 1521년 멸망) 등을 정벌하고 식민지로 삼아 부를 축적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강한 군대를 키웠다.
펠리페 2세(Felipe II, 재위 1556 ~ 1598) 때의 스페인 영토는 아메리카(중미, 남미, 북미의 남부) 외에도 필리핀, 네덜란드, 밀라노 공국(이탈리아 북부), 부르군디 공국(프랑스 동부), 사르데냐 섬(이탈리아 서쪽), 시칠리아 섬, 나폴리 왕국(이탈리아 남부), 아프리카 대륙의 남서부, 인도의 서해안, 말라카(말레이반도 서해안 항구, 후추 집산지 중계항), 보르네오 섬 등으로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다.
스페인은 남미와 중미의 식민지에서 수많은 금과 은을 수탈하여 갈레온(Galleon, 500톤 내외)에 실어 본국으로 날랐다.
영국은 프랑스와의 백년전쟁(프랑스 왕위 계승과 플랑드르 문제, 1337 ~ 1453)에 패하여 대륙에 있던 칼레 등의 모든 영토를 잃고 왕위 다툼인 장미전쟁(薔薇戰爭, Wars of the Roses, 1455 ∼ 1485)으로 약체 국가가 되었다.
영국은 조선업과 해운업, 철광산업 등에서는 발전하였지만 나라의 부는 남미의 식민지를 경영하는 스페인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형편없었던 것이다.
영국은 강대국으로 부상한 스페인이나 프랑스로부터 침략을 막기 위한 정책을 세우고 동맹 외교 전을 폈다. 특히 강국으로 변한 스페인이 영국을 침략할 의향을 가진 것을 간파하였지만 정면으로 바로 전쟁을 수행할 엄두를 못 내고 스페인을 약화시키는 정책을 폈다.
그래서 영국은 바로 이웃한 스페인령의 네덜란드에 스페인 군대가 네덜란드 독립군을 제압하기 위해 주둔하는 것을 영국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여 독립전쟁 중인 네덜란드군에 무기를 몰래 공급해 주어 해안 저지대에 스페인 군이 주둔하는 것을 막아 쉽게 영국을 공격할 수 없도록 하였다.
또 영국은 개인이 무장한 선박으로 적국의 상선을 노략질하는 것(私掠, 사략, privateering)을 허가하는 타국 상선 나포 면허증(letter of marque)을 발행하였다. 영국은 사략선으로 스페인 상선을 해적질함으로써 스페인을 약화시키고 영국의 재정에 도움을 주고자 하였다.
영국의 사략 함대(私掠艦隊, Privateer fleets, 노략질할 권한을 부여받은 민간인의 배)는 식민지인 중남미에서 금은보화를 싣고 돌아오는 스페인 선박을 해적으로 가장하여 칼리브해에서 약탈하였던 것이다.
영국의 사략 함대(私掠艦隊, Privateer fleets)는 스페인의 금은보화 수송선을 해적질로 약탈하여 재미를 보았다.
스페인은 이러한 영국의 해적질을 응징하기 위해 기회를 보고 있었지만 빠르고 뛰어난 항해술을 가진 선원들이 운행하고 개량으로 성능이 뛰어난 영국의 갈레온(Galleon, 500톤 내외)을 잡을 수가 없었다.
사락 함대의 중심에는 홉킨스(John Hawkins, 1532 ~ 1595)와 드레이크(Francis Drake, 1545? ~ 1596, 해적, 제독)가 있었다.
드레이크(Francis Drake, 1545? ~ 1596, 해적, 제독)는 영국 플리머스 항구의 친척인 존 홉킨스(John Hawkins, 1532 ~ 1595) 밑에서 노예무역에 종사하면서 항해와 무역 등 모든 것을 배웠다.
그러던 중에 1566년 드레이크는 처음으로 소형 선박인 주디스호(Judith, 50톤)의 선장이 되어 호킨스를 따라 아프리카에서 납치한 노예를 싣고 1568년 카리브로 가서 멕시코의 산 후안 데 울루아(San Juan de Ulúa, 현재 베라크루스 항 Veracruz)에 스페인군의 승낙을 받아 입항하여 노예를 팔아 황금을 챙겨 귀국하려는 중에 해적이라는 것이 발각되어 스페인 함대에게 기습 공격을 받아 노예 대금과 엘리자베스 여왕으로부터 빌린 선박마저 잃고는 호킨스는 미니언호(Minion)로, 드레이크는 소형 선박인 주디스호(Judith, 50톤)를 각각 타고 겨우 두척만이 탈출하여 보급품도 없이 죽을 고생을 하며 영국으로 겨우 살아 돌아왔다.
1568년 선장이 된 드레이크(Francis Drake, 1545? ~ 1596, 해적, 제독)는 원수를 갚기 위해 돛을 쉽게 다룰 수 있고 속력이 매우 빠른 배를 개발하였으며 철 대포를 개량하여 사거리가 길고 조작이 편리하게 제작하였다.
이때의 포신은 청동 기둥의 속을 파내서 제작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이 없어 반쪽씩 주물로 제작하여 붙였으므로 유효사거리가 짧았다.
영국은 돈이 없어 쉽게 만들 수 있는 청동 대포 대신에 철로 대포를 만들었다. 그렇지만 매우 발달된 제철기술을 이용해 편리하고 사거리가 긴 철 대포를 수많이 생산하여 스페인과 전쟁을 할 무렵에는 유럽 대포 최다 보유국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대포를 운반하기 쉽도록 바퀴를 단 포가(砲架, Gun Mount)를 제작하여 대포를 싣고 포가를 배에 밧줄로 묶어 포를 쏠 때 포가 뒤로 밀려나는 거리를 줄여 발사 간격을 단축하였다.
스페인의 펠리페 2세는 1571년 레판토 해전(Battle of Lepanto)에서 화승총으로 무장한 신성동맹(스페인, 교황청, 베네치아 등) 연합군으로 오스만(투르크) 함대를 격파하였다.
지중해를 지배하고 있던 투르크가 베네치아령 키프로스 섬을 점령하자 이들의 팽창을 막기 위해 베네치아, 스페인(에스파냐), 교황청 등이 연합함대를 조직하여 레판토 앞바다에서 튀르크 함대를 격파하였던 것이다.
이들의 전법은 갤리선(galley, 폭이 좁고 길이가 긴 장선, 돛대 1개와 사각돚, 주로 노를 사용, 속도 빠름, 군함, 50~200톤), 카라크(carrack) 선을 개선한 갈레온(Galleon, carrack의 길이를 길게 하고 홀수를 작게 함, 크고 빠르고 안정함, 범선, 500톤 내외), 큰 갤리어스(galleass, 대형갤리상선을 군함으로 개조, 갤리선의 두 배, 노선(櫓船)과 갈레온 혼합)에 수많은 대포와 보병을 싣고서 적선에 접근하여 대포로 포격한 후 갈고리를 던져 적선에 걸고 끌어당겨 보병이 적선으로 올라가 칼, 창, 아쿼버스(arquebus, 화승총 match lock), 머스킷(musket, 화승총 match lock) 등으로 싸우는 것이었다.
스페인 해군은 레판토 해전 이후 무적함대(無敵艦隊, Spanish Armada)가 되었던 것이다.
독실한 가톨릭 신봉자인 펠리페 2세(1527 ~ 1598, 재위1556 ~ 1598, 이종사촌인 포르투갈의 마리아와결혼 후 사별, 두 번째 영국의 진외 5촌모인 메리 1세(영국 여왕, 헨리 8세와 캐서린 딸)와 결혼하였으나 3년 만에 사별함)는 영국을 점령하여 가톨릭을 전파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엘리자베스 1세 여왕(1533 ~ 1603, 재위1558 ~ 1603, 헨리 8세와앤 볼린의 딸)에게 청혼하였으나 거절당하고는 침략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드레이크(Francis Drake, 1545? ~ 1596, 해적, 제독)는 빠르고 돛을 쉽게 다룰 수 있는 개량된 갈레온(Galleon, carrack의 길이를 길게 하고 홀수를 작게 함, 크고 빠르고 안정함, 범선, 500톤 내외)을 이용하여 1570년부터 서인도 방면에 약탈 원정을 감행하였는데 1572년에는 스페인 령인 파나마의 귀금속 저장소를 습격하여 많은 전리품(戰利品)을 약탈해서 플리머스 항으로 돌아와 시민을 열광시켰다. 드레이크는 노획한 금은보화를 엘리자베스 여왕과 나누어 가지는 등 여왕과 동업으로 해적질을 하였는데 주로 스페인이 식민지에서 금 은 보화를 본국으로 운반하는 배(보물 수송선단, Treasure fleets)를 그 대상으로 삼았다.
1577년 12월 프랜시스 드레이크(Francis Drake, 1545? ~ 1596, 해적, 제독)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명을 받아 5척의 선단을 이끌고 남미의 태평양쪽을 탐사하여 식민지로 개척할 섬을 찾고 스페인의 보물 수송선을 약탈하기 위해 대서양을 건너 남미의 마젤란 해협을 지나 태평양의 칠레 쪽으로 출발했다.
1578년 8월에 마젤란 해협에 도착했으나 엄청난 폭풍우가 몰아쳐 마젤란 해협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다른 배들과 떨어져 남미 끝까지 내력가 돌게 되었다. 그때 다른 배들은 드레이크가 죽은 줄 알고 영국으로 돌아가 버렸다.
드레이크(Francis Drake, 1545? ~ 1596, 해적, 제독)는 기함인 왕실 소유의 골든 하인드 호(Golden Hind, 펠리컨 호 Pelican, Galleons, 범선, 적재량 150톤, 배수량 300톤, 길이 31m, 너비 6.1m, 홀수선 2.7m)로 새로 발견한 남미의 최남단 혼곶(Cape Horn)과 드레이크 해협을 지나 북쪽으로 항해하였고 1579년 3월 칠레 앞바다에서 두척의 스페인 보물 수송선을 발견하여 누에스트라 세뇨라데 라콘셉시온 호(Nuestra Señora de la Concepción, 별칭 Cagafuego 카카푸에고 호)로부터 어마어마하게 많은 금은보화를 약탈하였다.
드레이크는 스페인 함대를 피하기 위해 대서양으로 돌아가지 않고 마젤란이 항해했던 태평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북아메리카 서부 캘리포니아 해안을 지나 태평양을 넘어 필리핀에 도착하였으며 몰루카에서 정향을 구입하여 기함인 왕실 소유의 골든 하인드 호(Golden Hind)에 가득 싣고 희망봉을 거쳐 1580년 9월에 영국으로 돌아왔다. 드레이크는 영국의 1년 예산보다 많은 금은보화를 여왕에게 받쳤으며 훈장을 수여받고 제독이 되었다.
이로써 드레이크는 마젤란에 이어 제2의 세계일주 항해자가 되었다.
1585년에는 서인도제도의 스페인 식민지인 에스파뇰라 섬을 무력으로 공략하였다.
이에 스페인의 펠리페 2세(재위, 1556 ~ 1598)는 노하여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해적질을 금하도록 하였지만 엘리자베스 여왕은 도리어 해적왕 드레이크에게 기사 작위를 주었다. 드레이크는 후에 플리머스 시장, 하원의원에 당선되기도 하였다.
이때 영국은 스페인령인 네덜란드에서 일어난 독립전쟁에 군대도 파견하고 네덜란드 독립군에 무기 지원을 하였던 것이다.
이에 펠리페 2세(재위 1556 ~ 1598)는 네덜란드의 독립군을 평정하고 영국을 가톨릭 국가로 만들며 유럽의 제해권을 확립하기 위해 먼저 영국을 정벌할 계획을 세우고 1581년 합병한 포르투갈을 전진기지로 하여 전쟁 준비를 했다.
영국의 드레이크는 스페인의 침략 계획을 사전에 탐지하고는 어떻게 싸울 것인가를 궁리한 결과 바다에서 빠르고 돛을 쉽게 다룰 수 있는 개량된 갤리선(galley, 폭이 좁고 길이가 긴 장선, 주로 노을 이용, 속도 빠름, 50~200톤, 군함)과 갈레온(Galleon, carrack의 길이를 길게 하고 홀수를 작게 함, 크고 빠르고 안정함, 범선, 500톤 내외)과 사거리가 길고 조작이 편리한 철 대포를 많이 제작하여 대항하기로 했다.
먼저 1587년 스페인 군대 현황을 탐지하고는 군함 몇 척으로 스페인 카디즈 항구에 잠입하여 38척의 배를 파괴하고 침략전쟁을 위해 보관해 둔 수많은 군수품을 불태웠다.
그리고 물통을 제작할 마른나무를 싣고 가던 스페인 배를 우연히 만나 태워버렸다. 물통을 제작하기 위해서는 나무를 완전히 말려야 했으므로 새로 제작하기에는 2년이 더 요구되었다. 그리고는 보물을 약탈하여 항해술이 뛰어난 선원들이 운항하는 빠른 배로 도망쳐 버렸다.
이에 스페인의 펠리페 2세는 영국을 원정(遠征) 하기 위하여 전함 127척, 수병 8천 명, 육군 1만 9천 명, 대포 2천 문으로 대함대를 만들고, 경험 많은 알바로 데 바산(Álvaro de Bazán)이 지휘할 예정이었지만, 출항 몇 달 전인 1588년 2월에 사망함에 따라 메디나 시도니아(Medina Sidonia, 1550 ~ 1615) 공작을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시도니아 공작은 바로 원정길에 나섬에 따라 물통을 제작할 나무를 말릴 시간이 없어 덜 말린 나무로 물통을 제작하였다. 그 결과 배에서 물통과 물이 썩어 많은 병사들이 병에 걸리게 되었던 것이다.
스페인의 무적함대(無敵艦隊, Spanish Armada)는 먼저 영국 플리머스(Plymouth) 연해(緣海, marginal sea)에서 영국 해군을 격파한 다음 영국 본토를 정복하기 위해서 식민지인 네덜란드에 주둔하고 있는 네덜란드 총독 파르마 공작(Duke of Parma, Alexander Farnese, 알렉산더 파르네세, Alejandro Farnesio 알레한드로 파르네시오, 1545 ~ 1592, 네덜란드 총독 1578 ~ 1592)의 육군 1만 8천 명을 칼레의 던커크(Dunkirk)에서 싣고 영국 본토에 상륙시킬 예정이었다.
영국 해군을 격파한 다음 영국에 가까운 네덜란드에 주둔하고 있던 군을 싣고 가는 것이 배가 가벼워 해전에서 편리하고 본토에서 군을 싣고 가는 것보다 군에 필요한 보급품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스페인 대함대는 1588년 5월 28일 포르투갈의 리스본을 출발하여 영국으로 향했다.
이에 맞서는 영국은 육군이 별로 없었으므로 엘리자베스 여왕은 바다에서 싸우기로 했다.엘리자베스 여왕은 하워드 경(卿, Charles Howard, 1st Earl of Nottingham, 1536 ~ 1624)을 사령관으로 하고, 호킨스(John Hawkins, 1532 ~ 1595), 드레이크(Francis Drake, 1545? ~ 1596, 해적, 제독) 등으로 하여금, 전함 80척, 병력 8천 명으로 스페인군을 대적하게 하였다. 스페인 군이 영국에 상륙하게 되면 영국은 육군이 별로 없어 싸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드레이크가 이끄는 영국 함대는 수적으로 열세였으나 기동력이 뛰어난 갤리선(galley)과 포는 사거리가 길고 발사속도가 빠르며 배를 조작하는 선원들은 잘 훈련되어 있었다.
7월 31일 스페인 함대는 플리머스 연해에서 영국 함대를 격파할 예정이었다.
영국 함대는 영국해협의 플리머스 연해에서 초승달 대형으로 이동하는 스페인함대를 발견하고는 멀리서 사거리가 긴 대포를 쏘았지만 명중률이 낮아 별로 손실을 입힐 수가 없었으며 스페인함대는 영국 함대가 접근하지 않아 그들의 전법대로 영국 전함에 스페인 보병이 건너가 싸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영국군은 이 전투에서 적군포의 유효 사거리(약 90m)를 익혀 다음 전투에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스페인 함대는 8월 6일 영국해협을 지나 프랑스의 칼레에 도착했으나 네덜란드의 flying boat들이 항구를 봉쇄하고 있어 싣고 갈 파르마 공작의 육군과 연락이 되지 않아 스페인의 시도니아 공작은 칼레(그레벨링건, Grevelingen, 칼레와 덩케르크 사이)에서 하루를 머물기로 하였다.
8월 7일 밤에 바람이 서남풍으로 바뀌자 영국군이 칼레 연해에서 화공선(火攻船, 배에 송진으로 가득 찬 소나무와 화약을 싣고 불을 붙임) 8척을 앞세워 습격하자 무적함대는 병사들이 놀라 닻을 끌어올리지 않고 끊고는 도망쳤다. 스페인 함대는 대형이 무너져 버렸으므로 협동으로 작전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무엇보다 배를 고정하는 닻을 끊어 버려서 다음에 바람이 세어졌을 때 배를 고정할 수없어 큰 피해를 입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병사들이 놀라 달아난 것은 전에 네덜란드군의 화공선 공격을 받은 배가 불이 붙어 타고 있던 군사들이 전원 몰살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스페인함대는 많은 보병과 물품을 싣고 있어 속력이 느렸으므로 영국 함대는 근접하여 대포를 발사하고는 재빨리 후퇴하는 전법으로 공격하였다.
스페인 함대에도 대포가 있었으나 발사 간격이 너무나 길고 사거리가 짧아 상대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스페인 함대는 이 해전에서 단 2척이 침몰하고 3척이 나포되었을 뿐이었다. 영국군은 500명, 스페인군은 1400명이 전사했다고 한다.
많은 피해를 입지는 않았지만 싸울 수가 없어 도망을 갔던 것이다. 별로 피해를 입지 않은 이유는 포탄이 배에 떨어지면 현재와 같이 폭발하여 크게 부서지는 것이 아니라 쇠덩이가 떨어져 조그만 구멍이 뚫리는 것이었으므로 구멍에 판자를 붙여 수리할 수 있었어 여러 발을 맞아도 침몰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영국 함대도 쏠 포탄이 떨어져 더 이상 계속 공격하지는 못했다.
이에 스페인 함대는 파르마 군과의 합류를 포기하였으며 남서풍이 불어 도망칠 수 있는 곳은 북쪽 밖에 없어 스코틀랜드를 돌아 아일랜드 근처를 지나던 중 허리케인(태풍)을 만나 대부분의 배가 파손되고 65척만 본국으로 돌아갔다.
1589년 영국은 네덜란드, 포르투갈 독립파와 연합하여 150척의 배에 2만여 명의 병사를 싣고 드레이크의 지휘 하에 스페인에 드레이크-노리스 원정(Drake-Norris Expedition, 드레이크 제독, 존 노레이스 장군)을 하였으나 라코루냐(La Coruña, 커루나, Corunna)에서 스페인군에게 대패하였다.
그 이후에도 스페인(에스파냐)은 강한 국력으로 다시 함대를 조직하여 영국을 공격하기도 하였으나 영국 함대에 패하였으며 영국도 함대를 조직하여 스페인을 공격했으나 패하였다. 영국-스페인 전쟁 (1585 ~ 1604)은 1604년까지 이어졌던 것이다.
영국은 무적함대를 격파하여 스페인의 침략을 방어한 것이지 스페인을 항복시켜 국토나 식민지를 뺏은 것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해양강국으로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후 영국이 약한 국력을 키우고 내전(청교도 혁명, 명예혁명, 1642 ~ 1649, 1642 ~ 1660, 의회파와 왕당파 간 전쟁, 찰스 1세 처형)을 치르는 동안 네덜란드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여 강력한 해군력과 발달된 배(플류트 선)를 이용한 값싼 운송료로 해상 무역권을 독차지하였다.
스페인(에스파냐)은 영국을 침략하는 전쟁에는 졌지만 여전히 강한 군대를 보유하였으며 식민지도 그대로 유지되었으므로 상당히 오랫동안 유럽의 강국으로 세력을 유지하였다.
라. 청교도혁명(淸敎徒革命 Puritan Revolution, 영국 내전 English Civil Wars, 1642 ~ 1649, 1642 ~ 1660)
1603년 처녀여왕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 1533 ~ 1603, 재위1558 ~ 1603)는 스코틀랜드의 왕 제임스 6세를 후계자로 지명하였는데 영국에서는 제임스 1세(James VI of Scotland, 1566 ~ 1625, 재위 1603 ~ 1625)라 한다.
헨리 7세의 증손녀(제임스 6세의 어머니, 헨리 7세의 맏딸인 마가릿 튜더의 손녀)인 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 슈트어트(Mary Stewart, 1542 ~ 1587, 재위 1543 ~1567)는 제임스 5세(James Ⅴ, 1512 ~ 1542, 재위 1513 ~ 1542)의 딸로 생후 6일 만에 왕위에 올랐다(모가 섭정).
독실한 가톨릭교도인 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 슈트어트는 영국의 헨리 8세가 그의 황태자 에드워드(에드워드 6세)와 강제로 결혼시켜 지배하려 하자 이를 피하여 5세 때 프랑스로 몰래 건너가 자라면서 프랑수와 2세와 결혼하였으나 프랑수와 2세가 일찍 사망(1560)하자 스코틀랜드로 돌아와(1561) 4촌과 재혼하여 제임스 6세(영국의 제임스 1세)를 낳았다. 칼뱅파의 신교도 국가인 스코틀랜드에서 메리 슈트어트는 가톨릭의 부활을시도하고 남편 살해 용의자와 결혼하는 등의 문제로 1567년 머리(James Stuart Murray) 등의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켜 그녀의 아들인 제임스 6세(JamesVI, 1566 ~ 1625, 재위 1567 ~ 1625, 헨리 7세의 외고손자)를 즉위시키자 영국으로 탈출하였으며 그 후 영국에서 엘리자베스 1세의 왕권 탈취를 시도하다가 처형되었다.
메리 슈트어트(Mary Stewart, 재위 1542 ~ 1567)의 아들인 제임스 1세(스코틀랜드 제임스 6세, 헨리 7세의 외고손자)는 엘리자베스 1세(헨리 7세의 손녀)의 6촌 손자뻘이다.
왕권신수설을 신봉하는 제임스 1세도 의회와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으며 30년 전쟁에서는 신교 편에 가담했다.
국교회의 지위도 여전히 확고하지 못했다. 가톨릭교도들은 국교회를 위협하고 있었고, 비 국교파 프로테스탄트는 국교회 개혁을 계속 주장하였고 청교도(Puritan, 퓨리턴, 영국의 칼뱅 계통의 신교도)는 세력을 넓혀가고 있었다.
1607년에 최초로 버지니아의 제임스타운에 식민지를 건설했다. 국가재정으로는 건설할 수 없어 민간인이 투자한 회사가 돈을 빌려주고 정착 후 돌려받는 방식이었다.
종교적으로 탄압을 받은 청교도(Puritan, 퓨리턴, 영국의 칼뱅 계통의 신교도)들은 네덜란드로 이주도 하였고 1620년에는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북미대륙으로 이주하였다.
제임스 1세의 왕태자인 헨리가 18세에 티푸스로 급사함에 따라 제임스 1세(James VI of Scotland, 재위 1603 ~ 1625)가 죽은 다음 둘째 아들인 찰스 1세(CharlesI, 재위 1625 ~ 1649)가 1625년에 즉위하였다.
찰스 1세는 즉위 2달 후에가톨릭 신자인 프랑스의 어린 앙리에타 마리(Henriette Marie de France, Henrietta Maria of France, 1609 ~ 1669) 공주와 결혼했다. 이에 청교도(Puritan, 퓨리턴, 영국의 칼뱅 계통의 신교도)들은 찰스 1세가 선왕 제임스 1세보다 가톨릭을 더 감싸주고 청교도를 더욱 적대시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더욱이 '고 교회파(High Church, 앵글로 가톨릭 주의)'인 윌리엄 로드(William Laud, 1573 ~ 1645)를 캔터베리 대주교로 지명하였다.
찰스 1세는 가톨릭 쪽에 가까운 국교회(고 교회파, High Church) 신봉자였으며 왕권 신수 사상을 가지고 왕권은 '마그나 카르타(대헌장)'나 의회에 의해 제약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으므로 국가의 주권이 왕에게 있지 않고 의회에 있다고 주장하는 의회, 그리고 청교도가 장악한 의회에서 사사건건 부딪혔다.
헨리 8세는 가톨릭의 재산을 몰수하여 팔았고 엘리자베스 1세는 의회와의 마찰을 피해 왕실 소유의 토지를 팔아 전쟁비용 등으로 사용하였다. 그래서 찰스 1세 때의 왕실은 재정적으로 허약했고 이들 토지를 사들인 상공업자와 자영농들은 젠트리(gentry, 귀족 아래의 중산 지주층)라는 큰 신흥세력을 형성하였다.
의회에는 젠트리(gentry)들이 많이 진출하여 장악하였으며 이들 대부분은 청교도였다.
청교도(furitan, 퓨리턴)는 칼뱅(Calvin, Jean)의 교리에 따라 실천하는 근본주의자들로 근면과 금욕, 절약과 검소한 생활로 살아간다.
찰스 1세는 이들에게 가톨릭에 가까운 국교회를 강요했으므로 청교도(furitan, 퓨리턴)들은 이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부왕 때부터 끝없이 이어지는 30년 전쟁의 비용을 비롯하여 실패작인 네덜란드와 치른 전쟁, 프랑스의 개신교도 반란을 지원하는 원정 등의 전쟁비용 문제로 의회와의 갈등이 이어졌다.
1628년 찰스 1세가 스페인과의 전쟁(30년 전쟁)에 필요한 비용을 지원받기 위해서 소집한 의회는 시민권을 보호하고 왕권을 견제하는 4개 항의 권리 청원서(Petition of Right)를 제출했으며 찰스 1세는 전비를 지원받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어 서명했다.
권리청원(Petition of Right)으로 과세권을 재확인하고 국민이 정당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의회의 회기가 끝나자 찰스 1세는 이를 무시했다.
칼뱅주의(Calvinism)가 확고한 스코틀랜드에 찰스 1세가 국교회를 강제하자 1639년 스코틀랜드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찰스 1세는 의회 동의 없이 원정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628년 이후 11년간 의회를 열지 않으면서 폐지된 조세를 부활시키고 특별세를 부과하였다.
찰스 1세는 특별세를 부과함에 있어써 일부 귀족과 대상인에게 산업상 및 상업상의 독점권을 주고는 특별세를 부과하였으므로 일반 국민들에게는 별 불만 없이 유지해 왔다.
그러나 특별세로 부과된 선박세는 해양국가인 영국에서 선박을 소유하여 해외 무역으로 부를 축적하던 전트리들을 분노케하였다.
1640년 스코틀랜드가 침입하자 스코틀랜드를 정벌할 재정을 정식으로 마련해야 했기 때문에 의회를 소집하여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었으나 의회는 의회의 승인 없이 부과한 특별세의 부당성을 논의하고 왕권의 상징인 특별재판소를 폐지하고, 왕의 측근인 스트래퍼드(Thomas Wentworth Strafford, 1593 ~ 1641, 1632년 아일랜드 총독, 반 의회정치 옹호)를 처형하고 윌리엄 로드 (William Laud, 1573 ~ 1645, 청교도(furitan, 퓨리턴) 탄압, 성공회의기도서를 스코틀랜드에 강요하여1638년 스코틀랜드에서 반란이 일어난 책임) 캔터베리 대주교를 탄핵하였으며 최소한 3년에 한 번은 의회가 열려야 한다라는 규칙을 제정했다. 의회는 국가의 주권이 왕에게 있지 않고 의회에 있다고 생각했다.
스코틀랜드를 원정했으나 지원 부족으로 실패했다.
이어서 가톨릭 지역인 아일랜드에서 인기가 있던 스트래퍼드(Thomas Wentworth Strafford, 1593 ~ 1641, 반 의회정치를 옹호)가 의회에 의해 체포되고 일방적으로 처형되자 아일랜드에서 민중봉기가 일어났으며 의회는 왕의 승인 없이 원정을 결정하였고 1642년 의회에서는 그동안의 실정을 비판하고 책임을 묻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왕은 이를 주도한 의원 5명을 구금하고자 하였으나 의회는 거절했다
찰스 1세는 이를 왕권의 도전으로 보고 1642년 노팅엄에서 군사를 모집하여 상비군을 조직하고 내전에 들어갔다.
이에 의회는 지방의 민병대 통솔권을 의회가 가진다는 법안을 결의했다.
의회파는 부유한 남동부 지역 출신으로 재력면에서 왕당파를 압도하였고 해군을 장악하고 있었다.
영국 전역은 왕당파-기사당과 의회파-원두당으로 갈라져 싸웠으며 1648년 프레스턴 전투(Battle of Preston)에서 왕당파가 결정적으로 패함으로써 7년에 걸친 내전은 의회파의 승리로 끝났다.
찰스 1세는 1647년 스코틀랜드 군대에 항복하였고 의회파에 넘겨져 1649년 참수되었다.
1649 ~ 1651년에는 찰스 2세(찰스 2세(Charles II, 재위 1660 ~ 1685)가 왕당파를 이끌었으나 1651년 우스터 전투(Battle of Worcester, 1651)에서 왕당파가 크게 패하자 찰스 2세는 프랑스로 망명하였다.
1642년부터 1651년까지 왕당파와 의회파 사이에 벌어진 이 내전(English CivilWars)을 청교도혁명(淸敎徒革命, Puritan Revolution)이라 한다.
청교도혁명을 주도한 젠트리 등의 시민계급을 오늘날에는 부르주아(bourgeois, 프랑스어, 유래-성에 둘러싸인 중세 도시 국가의 주민, 절대 왕정의 중상주의 경제 정책으로 부를 축적한 유산 계급 有産階級, 상공업자나 지주인 시민층, 자본가)라 한다.
올리버크롬웰(Oliver Cromwell, 1599 ~ 1658)은 내전에서 의회파를 이끌고 왕당파를 물리쳐서 공화국을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웠다.
크롬웰은 1648년 12월 그의 병사들이 의회를 기습하여 찰스 1세 처형을 반대하는 온건파 의원을 내쫓거나 감옥에 가두게 하여 의회를 장악하고 찰스 1세를 처형하였으며 이어서 1649년 귀족원을 폐지하고 하층민이 포함된 공화파 주도의 공화국(Commonwealth of England)을 세웠다.
공화국(Commonwealth of England)은 국가원수를 호국경(護國卿, Lord Protector), 내각에 해당하는 평의회, 그리고 의회를 설치하여 영국 최초의 공화국(Commonwealth)을 설립하였다.
그러나 성인 남자의 보통선거권, 의석의 재분배, 법률상의 완전한 평등 등이 실현된 것은 아니었다.
공화국에서 크롬웰은 국무회의(Council of State) 의장이 되었다. 측근이 왕으로 옹립하려 했으나 거절하였다.
크롬웰은 1649~1651년에 왕당파의 중심지인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를 정벌하였으며 1651년에는 영국과 영국 식민지로 수출품을 싣고 오가는 배는 영국 선원이 절반 이상 탑승한 영국의 배라야 한다는 내용의 항해조례(Navigation Acts)를 발표하여 네덜란드의 중계무역을 제한함에 따라 네덜란드와 전쟁을 하였다.
1653년에 젠트리 출신으로 청교도인 크롬웰(Oliver Cromwell)은 통치장전(統治章典)을 발표하고 호국경(護國卿, Lord Protector, 호민관 護民官, 1653 ∼ 1658)에 올라 의회와 더불어 입법권을 가지고, 행정권, 관리 임명권, 군사권, 외교권 등전권(專權)을 행사하는 독재정치를 했다.
크롬웰은 정권을 잡자 하층민이 포함된 공화파를 버리고 의회파를 이용하였던 것이다.
이때 영국의 해외 식민지는 뉴펀들랜드, 뉴잉글랜드, 로드아일랜드, 버지니아, 메릴랜드 및서인도 제도의 섬들이 있었는데 내전으로 본국의 영향력이 줄어들자 식민지는 자치적인 지위가 강화되었다. 이에 크롬웰은 이들 식민지를 자치하고 있던 청교도들을 억압하고 통제권을 영국에 귀속시켰다.
1657년 올리버 크롬웰은 동인도회사(東印度會社, East India Company, EIC)에 인도에서 교전, 외교 등 영국 정부를 대신하여 광범위한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강력한 특허권을 부여하였다. 이로 인해 동인도회사는 단순한 무역독점 기업에서 식민지경영까지 하는 제국주의 기업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1658년 크롬웰(Oliver Cromwell, 1599 ~ 1658)이 죽은 후 크롬웰의 지명에 따라 셋째 아들 리처드 크롬웰(Richard Cromwell, 1626 ~ 1712)이 2대 호국경(1658 ~ 1659)이 되었지만 국민과 군대의 불만으로 공화국은 사분오열되었다.
올리버 크롬웰의 부하였던존 램버트(John Lambert, 1619 ~ 1684, 장군, 의회 의원)가 1659년 10월에 쿠데타를 일으켜 의회를 해산시키고 군사 정권을 수립하자 제대한 군 실력자인 조지 멍크(George Monck, 1608~ 1670)는 국민들이 왕정복귀를 열망함에 따라 해외로 탈출한 왕당파와 연락을 취하고 의회 소집을 요구하여 12월에 의회를 부활시켰다. 1660년 1월 잉글랜드로 진군하여 국민들의 지지를 잃은 존 램버트를 붙잡아런던탑에 투옥시켰으며 총선을 실시하여 의회를 새로 구성했다. 그런 다음 조지 멍크(George Monck, 1608~ 1670)는 네덜란드에 망명 중이던, 단두대에 처형된 찰스 1세의 아들 찰스에게 연락하였고 찰스는 1660년 4월 브레다 선언(Declaration of Breda, 네덜란드의 브레다)을 하여 공화국 시절의 대역죄를 사면하고 몰수된 토지를 원상회복시키며 종교적인 관용 정책을 시행하며 군대의 체불임금을 지급하고 군을 해산한 후 국왕이 임명하는 소수의 군대를 재임용할 것이라 하였다.
이에 5월 의회에서 왕정복고(王政復古, Restoration)를 표결로 통과시킴으로써 찰스는 찰스 2세(Charles II, 재위1660 ~ 1685)로 즉위하였다.
조지 멍크는 이 공로로 제1대 앨버말 공작(1st Duke of Albemarle)이 되었다.
1660년 찰스 1세(Charles I, 재위1625 ~ 1649)의 아들인 찰스 2세(Charles II, 재위1660 ~ 1685)로 왕정복고가 되기까지 군주정과 국교회를 폐지하고 영국 역사상 최초로 공화국(Commonwealth of England)을 수립하게 되었던 것이다.
2. 네덜란드의 독립 및 세계 진출
가. 네덜란드 독립
네덜란드 왕국(Kingdom of The Netherlands)을 나타내는 네덜란드(Nederland)는 저지대를 의미하고 홀란드(Holland)는 발전했던 중심주 이름이며, 화란(和蘭)은 홀란드(Holland)의 한자표기이다.
중세의 네덜란드(Nederland)는 현재의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전체인 베네룩스 지역을 통칭하는 지역이다.
네덜란드는 북해에서 강한 바람이 불어오고 25%가 해수면보다 낮은 저지대의 척박한 지역이라 강국들이 명목상 지배하고 자치를 허용하였으므로 지배력이 크게 미치지 않아 자유롭고 수탈이 적어 경제생활은 어렵지 않았다.
고대에 네덜란드에는 켈트족과 게르만족이 살았지만 BC 50년경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바타비아족(Batavi, 고대 네덜란드 지역의 게르만족)을 정벌한 후 로마인들이 들어와 속주로 삼았다.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는 동안 네덜란드의 저지대 개발에 필요한 로마 제국의 선진 토목 기술이 도입되었으며 로마 제국 말기에 가톨릭이 네덜란드에 전파되었다.
로마 제국에 이어서 게르만 족인 프랑크족과 작센-프리시족이 들어와 지배를 하였으며 8세기에는 신성 로마 제국(프랑코 왕국)의 카롤루스 대제(Carolus Magnus, Charlemagne 샤를마뉴, 카를 대제, 로마인 황제 재위 800 ~ 814)의 지배를 받았다.
카를 대제의 아들인 경건왕 루도비쿠스 1세 피우스(Ludovicus I Pius, 재위 819 ~ 840) 사후에 세째 아들과 네째 아들이 장자 로타리우스 1세에 반기를 들어 전투를 치러 승리하여 맺은 베르됭 조약으로 프랑크 왕국이 3분되었을 때 베네룩스는 로타리우스 1세의 중프랑크가 되었다. 로타리우스 사후 서프랑크 왕국과 동프랑크 왕국이 로타링기아(Lotharingia, Lotharii Regnum, 로타르의 나라, 로타르 1세의 영토 중 북부)를 두고 경합을 벌여 몇 차례 전투가 벌어졌고 880년 리베몽 조약(Treaty of Ribemont, 880)으로 동프랑크에 귀속되었으며 '로트링겐(Lotharingen, Lorraine 로렌)'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이 땅을 노리는 서프랑크와 전투가 일어났으나 955년 독일 왕국의 오토 1세가 레히펠트 전투(Battle of Lechfeld, 955, 오토 1세와 마자르족-헝가리인과의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완전히 동프랑크 령이 되었다. 이후 로트링엔은 독일 왕국에 이어 신성 로마 제국(800/962 ~ 1806)을 구성하는 5대 부족 공국(Stammesherzogtum, 바이에른, 프랑켄, 로타링기아, 작센, 슈바벤) 중 하나이다.
영국의 윌리엄 1세(William I, 영국왕 재위 1035~1087)는 유대인들의 자본과 상업 기술을 이용하기 위해 유대인들을 프랑스에서 영국으로 불러들였으므로 영국에는 대부업으로 부유한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1096년 제1차 십자군 전쟁이 일어나자 성직자들과 교황들이 유대인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살인자’들이라고 선동함에 따라 영국 내 반유대 정서가 고조되어 유대인들은 심한 박해를 받았다.
이에 많은 영국의 유대인들이 탈출하여 바다 건너 플랑드르(Flandre, Flanders 플란다스, 현 벨기에)로 이주했다.
영국 유대인들의 이주는 거의 100년간 지속되었으며 영국의 에드워드 1세(Edward I, 잉글랜드왕 재위 1272 ~ 1307)는 1290년에 세계 최초로 대부업을 하던 1만6천명의 유대인을 추방했던 것이다.
14세기 프랑스 국왕 장 2세(Jean II, 프랑스 왕국 국왕 재위 1350 ~ 1364)는 플랑드르(Flandre, Flanders 플란다스, 현 벨기에)의 루이 2세가 후계자없이 죽자 플랑드르를 프랑스 왕국에 귀속시켰다가 네째 아들로서 부르고뉴 공국을 받은 호담공 필리프 2세(Philippe II de Bourgogne, 부르고뉴 공국의 공작 재위 1363 ~ 1404)에게 주었고 호담공 필리프 2세는 플랑드르의 마르그리트(Marguerite de Flandre, 마가레타 3세, 1350 ~ 1405, 플랑드르의 루이 2세의 후계자인 담피에르 가문의 상속녀인 플랑드르 여백작은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2세와 재혼을 함으로써 플랑드르의 통치권이 부르고뉴 공국으로 넘어감)와 결혼하여 플랑드르 땅을 획득하였으며 이후 부르고뉴 공국은 계속해서 네덜란드를 통일하였다.
1337년부터 1453년까지 116년이라는 기간 동안 잉글랜드 왕국과 프랑스 왕국이 백년 전쟁을 치럿는데 플랑드르는 프랑스 왕국의 지배하에 있었지만 경제적으로는 양모 생산국인 영국에 종속되어 있었으므로 전쟁의 중심에 있었다. 이때 플랑드르는 전 지역이 단결하여 전쟁에 가담하였으므로 단합의 중요성과 방법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15세기에는 호담공의 손자인 선량공 필리프(Philippe le Bon, 필리프 3세 드 부르고뉴 공작, 재위 1419 ~ 1467)가 결혼 상속이나 비텔스바흐 가문(Haus Wittelsbach) 등을 정복하여 제후국의 영토을 획득하고 필리프의 손자 용담공 샤를 1세(Charles Ier, 샤를 1세 드 부르고뉴 공작 재위 1467 ~ 1477)도 베네룩스 일대와 프랑스 동부 지역을 정복했다. 이 부르고뉴 공국의 저지대를 부르고뉴 네덜란드라 한다.
샤를 1세(Charles Ier, 샤를 1세 드 부르고뉴 공작 재위 1467 ~ 1477)의 유일한 자식인 딸 부르고뉴 여공작 마리(Marie de Bourgogne, 1457 ~ 1482)와 독일 제국의 프리드리히 3세(Friedrich III, 독일 제국의 제2대 황제 겸 프로이센 왕국의 왕 재위 1888년 3월 ~ 6월)의 아들인 막시밀리안 1세 (Maximilian I, 신성 로마 황제 재위 1508 ~ 1519)와 결혼하였다.
이에 분노한 프랑스왕 루이 11세(Louis XI, 프랑스왕 재위 1461 ~ 1483)는 막시밀리안 1세 (Maximilian I, 신성 로마 황제 재위 1508 ~ 1519)와 전쟁을 벌였으나 패배하였다.
그 결과 프랑스는 프랑슈콩테(Franche-Comté, 프랑스 동부)를 제외한 부르고뉴 지방과 저지대의 피카르디(Picardie, 프랑스 북부)를 소유하게 되었고 부르고뉴 여공작 마리(Marie de Bourgogne, 1457 ~ 1482)는 프랑슈콩테와 저지대 지역(네덜란드)을 소유하게 되었다.
이후 부르고뉴 저지대(네덜란드)는 막시밀리안 1세와 부르고뉴 여공작 마리의 장남인 카스티야의 펠리페 1세(Felipe I, 1478 ~ 1506, 카스티야의 왕,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4세, 필리프 공)가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를 물려받으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가 시작되었다.
11세기부터 발트해에서는 대규모 청어 잡이가 이루어졌으며 15세기 초에는 네덜란드 근해인 북해 어장에서 청어(靑魚, herring)가 많이 잡혔다. 해류가 바뀌어 발트해에서 많이 잡히던 청어가 북해에서 많이 잡히게 된 것이다. 청어 조업 때문에 인근의 스코틀랜드와 전쟁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청어는 크기가 작을 뿐만 아니라 내장이 잘 상하여 오래 보관할 수도 없었다.
그러던 중 14세기에 빌럼 뵈컬손(Willem Beukelszoon, 윌리엄 버클스, William Buckels)라는 네덜란드 어부가 조그만 칼을 만들어 청어의 머리와 내장과 가시를 쉽게 제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스페인에서 쫓겨나 네덜란드로 들어온 유대인들은 청어를 가공하고 포장하는 방법을 찾아내어 무역상품으로 개발하였다.
청어를 소금에 절여 저장하는 방법을 개발하였는데 잡은 청어를 배에서 바로 손질하고 저농도의 소금물에 절여(Gibbing, 기빙)서 신선도를 유지하고 하선 후에 다시 절이는 방식으로 하링(haring, 절인 청어)을 생산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청어를 먼 지역까지 운반할 수 있게 되었다.
북해에서 잡아 만든 하링(haring, 절인 청어)은 네덜란드를 무역로의 한축이 되게 하였으며 부(富)를 쌓는 하나의 산업으로 성장했던 것이다. 청어들은 때때로 북해에서 발트 해로 이동했는데, 그 덕분에 내해에 자리 잡은 도시들도 돈을 벌기 시작했다.
일 년 중 청어를 잡을 수 있는 몇 달 동안 유럽의 배들은 청어를 수송하기 위해 이들 나라의 항구로 들어왔다.
그리고 청어 철이 지나 한가한 기간이 되면, 배들은 중북부 러시아에서 생산된 밀, 목재 등을 남서 유럽으로 날라다 주었다. 이 배들은 돌아오는 길에 베네치아(Venezia, 베니스 Venice, 이탈리아)와 제노바(Genova, Genoa 제노아, 이탈리아)에서 향료, 비단, 카펫, 동방의 융단들을 싣고 와 브루게(Brugge, 벨기에)와 함부르크(Hamburg, 독일)와 브레멘(Bremen, 독일)에 공급했다.
시작은 단순했지만, 이것은 차츰 브루게(Brugge, 벨기에)와 헨트(Gent, 벨기에) 등의 수공업 도시에서 북러시아의 노브고로드 공국 (Novgorod 公國, 공국은 공작 公爵이 다스리는 국가)에 이르는 중요한 국제 무역 체제로 발전했다.
1421년 네덜란드에 큰 홍수가 발생하여 저지대인 젤란드(Zeeland), 홀란드(Holland) 등이 물에 잠겨 황폐화되자 대규모 제방 축조 공사가 시작되었다.
이들 주에서는 제방을 쌓아 간척지를 개발한 사람이 그 땅을 소유하도록 허용하였다.
그 때 대부분의 토지는 주나 교회 소유인데 반해 간척지를 개발한 사람이 토지를 소유하여 자유인이 되었던 것이다.
네덜란드에서는 이렇게 일찍부터 자유인이 생겨났던 것이다.
유대인들은 1492년 스페인의 유대인 추방령과 1497년 포르투갈의 유대인 추방령으로 네덜란드에 이주하여 암스테르담(Amsterdam, Amsterl 강 + dam 댐, 암스텔강의 둑이라는 뜻)과 플랑드르 지역의 수로와 제방 축조에 참여하여 간척한 토지를 소유하였다.
방앗간 동력으로 이용된 풍차(windmill)는 9세기 페르시아 지역에 있었으며 유럽에서는 11세기 무렵부터 이용되었는데, 네덜란드는 개발한 간척지가 해면보다 낮아 배수에 많이 사용되었으며 후에 제재소(製材所, lumber mill)의 수직으로 켜는 톱과 같이 관련 기구가 발명 제작됨에 따라 여러 종류의 수공업의 동력으로 이용되었다.
일찍이 11 ~ 15세기에는 프랑스의 상파뉴와 플랑드르(Flandre, Flanders 플란다스, 현 벨기에)의 앤트워프(Antwerp)가 이 지역 해상 무역의 중심지였으나 스페인이 세금을 높이고 간섭하여 무역이 자유롭지 못하였으며 16세기에는 네덜란드의 독립전쟁으로 봉쇄되어 많은 주민이 암스테르르담으로 이동함에 따라 중계 무역이 암스테르담(Amsterdam, Amsterl 강 + dam 댐, 암스텔강의 둑이라는 뜻), 함부르크(Hamburg, 독일), 뤼벡(Lübeck, 독일) 등의 북부로 옮겨 가게 되었던 것이다.
12, 13세기 유럽에는 한자(Hansa)라고 불리는 각지의 시장을 찾아서 돌아다니며 장사를 하던 편력 상인(遍歷商人) 단체가 많이 있었다.
14세기에는 독일 북부의 도시들과 발트해 연안과 라인강에 인접한 해외의 독일 상인 집단 사이의 편력 상인(遍歷商人)들로 구성된 독일 한자동맹(Hanseatic League)이 무역의 중심이 되어 스웨덴, 영국, 스코틀랜드, 네덜란드, 프랑스 등과 라인강을 따라 주변의 폴란드, 러시아 등에 무역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교역품은 뤼네부르크의 소금, 영국의 양모, 플랑드르의 아마, 방직물 등이었다.
그러던 무역 중심이 네덜란드로 옮겨왔던 것이다.
특히 청어를 절이는 소금을 독일의 뤼네부르크, 폴란드의 비엘리치카(Wieliczka)와 보흐니아(Bochnia) 등의 소금광산에서 생산한 암염(岩鹽)을 한자동맹을 통해 구입하여 사용하였으나 스페인과 러시아 등으로부터 네덜란드로 이주해 온 유대인들이 그들이 살았던 스페인 바스크(Basque, 스페인 북동부와 프랑스 남서부 국경 지대) 지역에서 생산된 천일제염을 수입하여 사용함에 따라 한자동맹에 타격을 주었던 것이다.
후에 네덜란드가 반란을 일으키자 스페인은 소금 수출을 금지하였으며 이에 따라 네덜란드는 스페인에 대한 반감이 더욱 쌓여 독립 의욕이 높아졌던 것이다.
16세기 들어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은 북유럽의 뤼벡(Lübeck, 독일)과 함부르크 중심의 한자동맹(Hanseatic League)을 이어받아 국제 무역도시로 발전하였다.
상업으로 발전한 네덜란드는 발트 삼국(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과 영국, 프랑스 사이에서 무역을 중개했던 것이다. 더욱이 무역 품목도 늘어나 영국에서 대량 수입한 모직물을 유대인들이 암스테르담에서 중계하여 해상을 통해 수출하였던 것이다.
네덜란드(수도 브뤼셀)는 스페인과 멀리 덜어져 있어 17개의 소단위로 나뉘어 자유를 누리며 자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15세기에는 버건디 왕가의 부르고뉴 여공작 마리(Marie de Bourgogne, 1457 ~ 1482)와 합스부르크(Habsburg, 1273 ~ 1918, 유럽 대표적 가문) 왕가의 오스트리아 황제 막시밀리안 1세 (남자)와 결혼으로 나라가 합병되어 합스부르크 왕가(신성로마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갔다(1515).
네덜란드는 1526년 이탈리아 전쟁(1521 ~1526)에 승리한 신성 로마 제국(스페인, 독일)의 카를 5세와 패한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 사이에 맺어진 마드리드 조약(Treaty of Madrid, 1526)에 의해 완전히 신성 로마 제국(스페인)의 영토가 되었다.
카를 5세(Karl V, 제위 1519 ~ 1556, 1500 ~ 1558, 신성 로마 제국, 스페인 카를로스 1세 제위 1516 ~ 1556, 부르고뉴 공작 1507~)는 막스밀리안 1세의 아들인 펠리페 1세(Felipe I, 1478 ~ 1506, 카스티야 공동 재위 1504 ~ 1506,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4세 재위 1482 ~ 1506)와 스페인 여왕인 후아나 1세(Juana, 카스티야, 재위 1504 ~ 1555, 정신병으로 친부에 의해 1509 ~ 1555 수도원 유폐) 사이의 2남 4녀의 첫째 아들로 일찍이 여동생인 마리아 폰 외스터라이히(Maria von Österreich, 1505 ~ 1558, 카를 5세의 여동생)와 함께 마르가레테 폰 외스터라이히(Marguerite von Österreich, 마르그리트 도트리슈, Marguerite d'Autriche, 1480 ~ 1530, 카를 5세의 고모, 막스밀리안 1세 딸)가 가르치고 길렀다.
그리고 마르가레테 폰 외스터라이히 여대공은 펠리페 1세(Felipe I, 1478 ~ 1506, 카스티야 재위 1504 ~ 1506,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4세)가 죽자 1507~1530년 기간 동안 카를 5세를 대신하여 네덜란드를 섭정(총독)하였으며 오스트리아 마리아 폰 외스터라이히(Maria von Österreich, 1505 ~ 1558, 카를 5세의 여동생)도 카를로스 1세를 대신해 네덜란드를 1530 ~ 1555 기간 동안 섭정(총독)하였으며 그 시기에는 주지사와 고위 귀족들은 권력을 잃고 네덜란드 의회가 권력을 행사했다.
네덜란드인들은 권력이 한 한곳에 집중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으므로 의회를 구성하여 권력을 가지게 한 것이다.
1555년, 카를 5세(신성로마제국 Karl V, 1519 ~ 1556, 스페인 Carlos 1세, 막시밀리안 1세와 마리아 데부르고뉴 부르고뉴 백작 사이의 손자)는 스페인으로부터 거리가 너무 먼 네덜란드를 직접 통치할 수 없어 대리인(총독)을 보내어 간접 통치를 하였다.
부유한 네덜란드에서 국세의 40%를 거두어들이는 조세는 카를 5세(스페인 Carlos 1세)의 스페인 제정에 크게 기여를 했다.
그리고 카를 5세(스페인 Carlos1세)는 프랑스를 견제하고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네덜란드에 군대를 파견하여 주둔시켰다.
그런데 과한 조세에 더하여 군비를 현지에서 충당하게 하자 네덜란드 인들의 불만이 높아졌다.
가혹한 징세에 시달리게 된 네덜란드인들은 1539년 폭동을 일으켰으나 진압되었다.
카를 5세(스페인 Carlos 1세)는 신성로마제국(962 ~ 1806, 독일제국)의 봉토 중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를 1520년 그의 동생인 페르디난드 1세(Ferdinand I, 황제 재위 1835 ~ 1848)에게, 스페인과 네덜란드 지역은 1555년 아들인 스페인 왕 펠리페 2세(Felipe II, 왕 재위 1556 ~ 1598)에게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동생 페르디난드 1세에게 물려주었다. 이로써 네덜란드는 스페인의 펠리페 2세가 지배하게 되었다.
펠리페 2세(Felipe II, 왕 재위 1556 ~ 1598)는 네덜란드 17주의 상급 귀족으로 네덜란드 의회를 구성하여 지방정부, 지방 귀족, 지방 주, 왕실, 네덜란드 주 총독, 중앙 정부 간에 권력을 나누었다.
16세기경 네덜란드에는 상공업이 매우 발달하였으며 스페인과 멀어 왕의 간접지배를 받음에 따라 보다 자유스러웠으므로 칼뱅파(Calvinism)와 루터파(Lutheranism)가 들어와 그 중에 칼뱅파(Calvinism)가 급속하게 널리 전파되었다. 칼뱅파가 네덜란드에 급속하게 널리 퍼진 것은 그들의 직업인 상업의 정당성을 칼뱅파(Calvinism)의 교리가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네덜란드의 가톨릭(Catholic) 교세는 위축되었다.
네덜란드의 북쪽 7개주는 스페인의 가톨릭 강요에 저항하였으로 개신교(改新敎, protestantism)가 강했으며 남쪽 10개주는 스페인의 가톨릭 강요를 받아들여 가톨릭(Catholic)이 강했다. 후에 개신교가 강한 북쪽은 독립을 원하여 네덜란드가 되고 가톨릭이 강한 남쪽은 스페인령으로 남았다가 벨기에가 된다.
1558년 스페인 군대의 철수와 세금의 감면에 대한 요구가 하급 귀족들이 중심이 되어 나왔으며 상급 귀족 중에서는 에그몬트 백작(Lamoral, Count of Egmont, 1522 ~ 1568)과 호른 백작(Count of Horn, Philip de Montmorency, 1518 ~ 1568), 오라녜 공 빌렘 1세 등이 네덜란드 의회의 의원직을 사퇴하고 펠리페 2세에게 의회 수장인 그란베레(Antoine Perrenot de Granvelle, 1517 ~ 1586)를 스페인으로 소환할 것을 청원하였다.
1559년 펠리페 2세(Philip Ⅱ, 스페인 왕 재위 1556 ∼ 1598, 포르투갈 왕 재위 1580 ∼ 1598)는 프랑스와 조약(1559년 카토-캄브헤시 평화 조약)을 맺어 네덜란드에는 더 이상 군사적 위험이 없게 되자 자신의 이복 누이인 마르게리타(Margherita di Parma, 1522 ~ 1586, 총독 재임 1559 ~ 1567)를 네덜란드 총독에 임명하여 통치를 강화하고 가톨릭을 전파하며 개신교를 억압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마르게리타는 현지 사정을 파악하고는 반란이 두려워 개신교를 묵인하였다.
칼뱅 주의자들은 성당에 있는 성인들의 성상을 우상숭배로 간주하여 성상파괴 운동을 벌였다. 마르게리타는 군대를 동원하여 이를 진압했다.
스페인의 학정에 불만이 쌓인 북부뿐만 아닐라 남부의 가톨릭교를 신봉하는 시민계급까지 참여한 항거 운동이 1566년부터 일어났다.
이에 펠리페 2세는 더욱 강력하게 이들을 대처하기 위해 1567년 알바 공(페만도 알바레즈 톨레도, Don Fernando Alvarez de Toledo, Grand Duke of Alba, 1507 ~ 1582, 총독 재임 1567 ~ 1573)을 파견하였다.
일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부임한 알바 공은 중과세와 상업 제한 등으로 개신교 탄압 정책을 펼쳤고 가톨릭 교구 증설 등 가톨릭을 개혁하면서 그 비용을 수도원이 충당하게 하는 등 현지민의 원성을 사게 되었다.
알바 공이 전권을 휘두르자 1567년 마르게리타는 총독직을 사임했다.
알바 공은 1568년 에그몬트 백작과 호른 백작을 체포하여 브뤼셀의 대광장에서 참수하였다. 알바 공은 ‘피의 위원회’를 열어 가톨릭에 반하는 이교도를 종교재판으로 8천 명을 혹독하게 죽였다.
네덜란드의 귀족들은 펠리페 2세에게 억압적인 통치를 완화해 줄 것을 지속적으로 탄원했으나 펠리페 2세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러한 스페인의 압정에 대항하여, 당시 홀란트(Holland), 제일란트(Zeeland), 위트레흐트(Utrecht) 3개 주의 총독(Stadholder)이 항거하였다.
또한 독일 나사우(Nassau) 가와 프랑스 남부 오랑주(Orange)가 혈통의 후예인 빌렘 1세(William of Orange, 나사우 백작 오라네 공 빌렘, 윌리엄 1세, Prins van Oranje Willem, Graaf van Nassau, 네덜란드 왕가 기원)가 1568년 스페인 총독에게 반기를 들고 그루닝언(Groningen) 주의 헤일리게레 전투(Battle of Heiligerlee)에서 스페인 군대와 싸워 승리하였으며 이는 이후 80년 전쟁(1567 ~ 1648)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빌럼 1세는 자기 재산이 바닥남에 따라 궁지에 몰렸다. 그런데 스페인도 지중해에서 오스만튀르크와 전쟁(펠리페 2세, 1571년 레판토 해전) 중이었으므로 네덜란드의 반란군과 싸울 힘이 없었다.
1572년 영국 엘리자베스 1세가 항구에서 몰아낸(파견한) 해적(Zee Geusen, 바다의 거지, 괴젠 Geusen, 스페인 왕이 영국 왕에게 퇴치하라고 한 해적, 해산된 네덜란드 개신교군 포함)이 거의 무방비 상태였던 브리엘(Briel)을 점령하여 네덜란드 각 지역의 반군에게 용기를 주었다.
이후 반군은 점차 점령지를 넓혀갔으며 개신교의 반군 결성으로 이어졌다.
알바 공작이 이끄는 스페인군이 1573 ~ 1574년 동안 두 차례 레이덴 시를 공격하였다. 1차 공격은 오랜 기간 레이덴 시를 포위함에 따라 기아로 많은 시민이 죽었다. 고이전(Geusen)이 시를 구원하러 왔으며 빵을 공급하여 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했다.
1573년 펠리페 2세는 총독을 알바 공에서 레퀴상스(Luis de Requesens y Zúñiga, 1528 ~ 1576, 총독 재임 1573 ~ 1576)로 교체하였다.
1574년 스페인(에스파냐)군의 2차 공격에서도 네덜란드의 레이덴 시를 포위하여 공격하였으므로 시가 위험에 처했으나 반 데르 베르프(van der Werff) 시장이 이끄는 시민군은 제방을 허물어 부근 일대를 물바다로 만듦으로써 많은 스페인군이 죽었으며 레이던을 사수하였던 것이다.
1575년 경에 스페인은 재정난에 빠졌다.
1576년 앤트워프(Antwerp, 안트베르펜, 벨기에)에서 스페인 용병들이 2년 동안 잉금이 밀리자 반란을 일으켜 8천명의 학살을 자행(恣行, committing, perpetration)하자 많은 유대인들은 안트베르펜에서 탈출하여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하였다.
1576년 브뤼셀(Brussels)에서 레퀴상스 총독이 갑자기 죽자 오스트리아 요한(Don Juan de Austria, 돈 후안 데 오스트리아, 1547 ~ 1578, 총독 재임 1576 ~ 1578)을 총독에 임명하였다.
이어서 파르마 공작(Duke of Parma, Alexander Farnese, 알렉산더 파르네세, Alejandro Farnesio 알레한드로 파르네시오, 1545 ~ 1592, 네덜란드 총독 1578 ~ 1592)을 총독에 임명하였다.
네덜란드 반군은 1579년에는 대(對) 스페인 투쟁을 강화하기 위하여 윌리엄 공을 정점으로 북부의 7개 주가 참여하는 위트레흐트 동맹(Union of Utrecht)이 결성되었다.
1580년에는 펠리페 2세가 빌럼 1세(윌리엄 공)의 목숨에 현상금을 거는 칙명을 내렸다. 그러자 이에 반발하여 위트레흐트 동맹은 1581년 더 이상 펠리페 2세를 군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하면서 사실상의 독립을 선언하고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네덜란드 왕이 될 것을 제의하였으나 거절하였으며 전쟁 지원만 하였다. 그래서 왕국이 아닌 오렌지공 빌럼 1세(William I, 윌리엄 1세, Prince of Orange, Prins van Oranje Willem, Graaf van Nassau, 1533 ~ 1584)를 초대 총독으로 하는 네덜란드 7개 주 연합공화국(Republiek der Zeven Verenigde Nederlanden, 네덜란드 공화국, 1581 ~ 1795)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독립 선언 이전에는 스페인 총독에 대한 항전이었으나 독립선언으로 스페인 국왕에 대한 항전으로 변했다.
네덜란드는 스페인의 강력한 군주의 보호를 받으며 지내는 것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전쟁을 자주 치른 스페인이 전비를 충당하기 위해 카를 5세 때부터 펠리페 2세 때까지 과도한 세금을 네덜란드에 부과하였고 네덜란드는 펠리페 2세의 가톨릭 강요에 따르지 않았으므로 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결국에는 80여 년의 독립전쟁(1567 ~ 1648)으로 이어진 것이다.
1584년에는 오렌지공 빌럼 1세(William I, 윌리엄 1세, Prince of Orange)가 펠리페 2세의 자객인 발타사르 헤라트에 의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1585년 영국은 논서치 협약(Nonsuch Convention, 독립 전쟁을 위한 기금의 4분의 1을 영국이 지원하는 등)에 따라 네덜란드에 레스터 백작(Earl of Leicester, 1532~1588, 영국 정치가)이 이끄는 5~6천 명 정도의 보병과 천명의 기병을 파병하였으나 레스터 백작과 독립군 간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다.
그래서 1587년 네덜란드 의회는 오렌지공 빌럼 1세(William of Orange, 윌리엄 1세, 나사우 백작 오라네 공 빌렘, Prins van Oranje Willem, Graaf van Nassau)의 아들로 당시 20세였던 오라네 공작 마우리츠(Maurits van Oranje, Maurits van Nassau 마우리츠 판 나사우, Maurice of Nassau, Prince of Orange, 모리스, 1567 ~ 1625, 총독 재위 1585 ~ 1625)를 네덜란드군의 대원수로 임명하였다. 계속된 독립전쟁은 마우리츠와 재상인 올덴바르네벨트(Jan van Oldenbarneveld, 1547 ~ 1619)가 지휘하였다.
마우리츠는 발사속도가 느린 아쿼버스의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아쿼버스병을 두줄로 세워 번갈아 발사하는 전술로 여러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런 가운데 1588년 마침내 7개 주가 통일 공화국인 ‘네덜란드 7개 주 공화국(The Republic of the Seven United Netherlands)’이 성립되었다.
1588년 영국-스페인 전쟁에서 스페인이 영국에게 패배하고 이어서 펠리페 2세가 사망(1598)하여 전쟁은 네덜란드에 유리하게 되었다.
오라네 공작 마우리츠(Maurits van Oranje, Maurits van Nassau, Maurice of Nassau, Prince of Orange, 모리스, 1567 ~ 1625, 총독 재위 1585 ~ 1625)는 1588년 베르겐, 베레다(1590년), 쥣펀, 데벤터르, 델프지일, 네이메헌(1591년), 스텐휘크, 퀘보르덴(1592년), 게르트륀덴베르그(1593년), 흐로닝언(1594년), 그롤, 엔스헤데, 오트마르숨, 올덴잘(1597년), 그라베(1602년) 등의 도시를 점령하였다.
마우리츠의 이러한 점령의 결과 네덜란드는 오늘날의 국경과 유사한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네덜란드는 그동안 전쟁비용이 많이 들고 전쟁에 지쳤으며 가톨릭이 강한 남부까지 탈환할 필요성에 회의를 가지게 되자 1600년 플란데런(Vlaanderen, 플랑드르 Flandre, Flanders 플란다스, 현 벨기에 지역)을 마지막으로 공격한 후 남부 지역(벨기에와 룩셈부르크 지역) 탈환을 포기했다.
1607년 네덜란드의 야콥 판 헤임스케르크(Jacob van Heemskerk, 1567 ~ 1607) 제독이 이끄는 26척의 함정이 지브롤터 항구를 기습하여 정박 중인 스페인 함대를 대포로 전몰시킴으로써 스페인도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하기 어려워 네덜란드와 12년간의 휴전(1609~1621)에 합의하였다.
네덜란드는 1609년 스페인의 펠리페 3세(Felipe III)와 12년간의 휴전조약(休戰條約)을 체결하여 사실상 독립국가가 되었다.
1609년 휴전이 체결되자 네덜란드 독립지역 총독이며 대원수인 오라네 공작 마우리츠(Maurits van Oranje, Maurits van Nassau 마우리츠 판 나사우, 모리스, 1567 ~ 1625, 총독 재위 1585 ~ 1625)와 재상인 올덴바르네벨트(Jan van Oldenbarneveld, 1547 ~ 1619)의 두 지도자 간에 의견 차이를 보이기 시작했다. 마우리츠(모리스)는 독립전쟁을 계속하기 위해 강력한 중앙집권제를 지지하였고, 홀랜드 주(州)를 지배하고 있던 올덴바르네벨트는 지방 자치제를 원하였다. 신학적으로 올덴 바르네 벨트는 항변파(Remonstrants, 알미니안주의)를 지지했고, 마우리츠(모리스)는 반항변파(칼뱅주의)를 지지했는데, 두 사람의 의견 충돌이 격화되자 올덴바르네벨트가 자신의 휘하에 있는 지방 민병대를 소집하자 마우리츠(모리스)는 군대를 파견하여 그를 체포했으며 도르트 회의( Dordrecht Dort/Synod of Dort)가 끝난 후에 그는 반역죄로 처형하였다.
도르트 회의( Dordrecht Dort/Synod of Dort)는 1618년 네덜란드의 도르트레히트에서 칼뱅파(Calvinist)와 알미 니우스 파(Arminians) 간의 분쟁을 종결짓고 알미니우스파를 배제할 목적으로 열린 종교회의(Synod of Dort)이다.
신성 로마 제국(독일 오스트리아) 내의 신구교의 갈등이 국제 전쟁으로 확대된 30년 전쟁(1618 ∼ 1648년)의 초기에 프랑스가 네덜란드를 공격해 오자 마우리츠(Maurits van Nassau, Maurits van Oranje 오라녜 공작 마우리츠)는 머스킷 소충병을 포함한 합동 전술을 개발하여 물리쳤으며 신성 로마 제국과 카를 5세 때 분리된 구교도 국가인 스페인이 신성 로마 제국에 가담하여 전쟁이 진행되자 구교도 국가인 프랑스는 스페인과 신성로마제국의 포위에 압박감을 느껴 신교도 편에 서서 스페인을 공격함에 따라 네덜란드는 프랑스와 같이 신교도 국가로 가담하였으며 1619년 스페인과 재개된 2차 독립전쟁을 치른 이후 전쟁은 소강상태가 되었다.
네덜란드는 스페인과의 독립전쟁 중에는 전쟁에 효율적인 총독제를 유지했다.
1대 빌럼 1세(윌리엄 공, 재위 1559 ~ 1584), 2대 오라녜 공작 마우리츠(모리스, 재위 1585 ~ 1625), 3대 그의 형제 오라녜 공작 프레데리크 헨드리크(재위 1625 ~ 2647)가 총독이 되었다.
네덜란드 경제의 중심지는 암스테르담(Amsterdam, 노르트 홀란트 주, 현재 수도이나 정부는 헤이그에 있음)이었지만 정치의 중심지는 1618년 마우리츠 2대 총통이 군대를 주둔한 이래 헤이그(Hague, 자 위트홀란트 주)가 되었다.
16 ~ 18세기 유럽이 상업을 중시하는 중상주의(重商主義, Mercantilism)시대가 되자 유대인의 시대가 되었다.
중상주의는 중금주의(bullionism)를 중시했으므로 국부를 늘리기 위해서는 수출을 장려하고 수입을 억제했다.
그래서 국가는 값싼 원료의 확보와 수출 확대를 위해 식민지를 개척하고 국부를 증대하기 위한 강력한 계획과 간섭을 하였으며 경제를 주도하는 계층에게 모든 특권을 주었다.
따라서 유통을 장악한 유대 상인들이 이윤을 독점했다.
더욱이 이들은 자본을 축적한 후 공장까지 만들어 생산과 유통을 함께 지배했다.
네덜란드의 함대는 세력이 점점 강화되어 1628년에는 쿠바 인근에서 벌어진 마틴자스(Matanzas) 해전에서 스페인에 승리하여 마틴자스(Matanzas) 항구를 획득했으며 1639년 덩케르크(Dunkirk, 프랑스 북부 노르 주의 주도)에 상륙하려던 스페인의 아르마다 함대를 격파했다.
1648년 네덜란드는 스페인 등이 30년 전쟁에 패한 결과로 맺어진 베스트팔렌 조약(Peace of Westfalen)에 의해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는 스페인 영토로 남기고 스페인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을 했다.
네덜란드는 공화국 체제를 채택하였다.
1648년 4대 총독(Stadholder)에는 프레데리크 헨드리크의 아들인 오라녜 공작 빌럼 2세(William Ⅱ of Orange, 임기 1647 ~ 1650)가 옹립되었으나 빌럼 2세가 죽은 후에는 총독(Stadholder)을 옹립하지 않았으며 그 후 1672년 프랑스의 루이 14세(Louis ⅩⅣ)가 영국, 독일과 연합하여 침공하여 오자 다시 5대 오라녜 공작 빌럼 3세(William Ⅲ of Orange, 빌럼 2세의 아들, 1672 ~ 1702, 영국 월리엄 3세 겸임)가 옹립되었으나 후사가 없어 1702년~1747년간 제2차 호민관 시대가 되었다.
그러던 중 1747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중에 프랑스의 침략을 받게 되자 네덜란드는 오랑쥬(Orange) 가의 혈통인 프리슬란트(Friesland) 주지사(임기 1711 ~ 1751)를 6대 오라녜 공작 빌럼 4세(William Ⅳ, Prince of Orange, 1747 ~ 1751)로 옹립하였으며, 7대 오라녜 공작 빌럼 5세(William Ⅴ, Prince of Orange, 임기 1751 ~ 1806)가 총독이 되었으며 각 주에서는 총독을 독자적으로 뽑는 등 공화파와 오라네 공작파 간의 갈등이 지속되었다.
프랑스에서 대혁명(French Revolution, 1789 ~ 1794)이 일어난 후 1795년 프랑스 제1공화정, 1792 ∼ 1802)의 혁명군이 네덜란드에 침공하여 빌럼 5세를 추방하고 1795년 네덜란드에 바타비아(Batavia, 1795 ~ 1806) 공화국을 설립하였지만 바타비아는 프랑스의 위성 공화국(Client)이 되었던 것이다.
더욱이 나폴레옹 시대(1804 ~ 1815)인 1806년에 프랑스에 합병되었으며 1813년에 나폴레옹으로부터 해방되었고, 영국-네덜란드 조약에서 영국으로부터 해외 영토들을 되돌려 받았다.
현재 네덜란드는 왕국이며 왕가는 1814년 빌럼 1세(William I, William I of the Netherlands, 윌리엄 공의 6세)가 네덜란드 국왕에 취임하면서 시작되었다.
네덜란드의 남부 지역인 플랑드르(Flandre, Flanders 플란다스)가 포함된 벨기에는 네덜란드 독립 전쟁(1568 ~ 1648) 이후 북부와 분열되어 스페인 합스부르크령으로 남았다.
벨기에는 18세기 초에는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로 지배권이 이양되어 오스트리아령이 되었다.
1789년 프랑스 왕국에서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자 혁명에 호응하여 1790년에 벨기에 합중국을 세웠다.
곧 프랑스 혁명군에게 공격을 받아 프랑스의 영토가 되어 지배를 받다가 1793년 벨기에는 프랑스에 합병되었다.
1815년 나폴레옹 전쟁(Napoleonic Wars, 1803년 ~ 1815년) 결과 맺어진 빈 조약으로 네덜란드에 병합되었다.
1830년 벨기에 혁명(Révolution belge, 벨기에가 반란을 일으켜 네덜란드 연합왕국으로부터 독립한 전쟁)으로 1831년 레오폴드(Leopold) 1세를 국왕으로 하는 입헌군주국이 되었다.
나. 네덜란드 해외 진출
네덜란드가 1588년 실질적인 국가가 되어 네덜란드 북부지역이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자 다른 나라에서 유대교, 개신교 등 많은 이교도들이 그들 나라의 압박을 피해 들어오게 되고 그들이 가진 선진 기술과 자본이 함께 유입되어 네덜란드의 산업이 급속도로 발전하게 되었다. 네덜란드는 다른 민족이나 종교를 포용함으로써 다민족의 복합과 융합으로 산업이 급속히 발전하였던 것이다.
특히 1492년 이슬람의 그라나다(Granada)를 점령한 스페인의 이사벨라 여왕과 페르난도 2세가 ‘신성한 가톨릭 교리를 어지럽힌다’며 유대인들에게 가톨릭으로 개종하거나 스페인을 떠나라는 ‘알람브라 칙령(Alhambra Decree, 1492.3.)’을 내리자 많은 유대인들이 포르투갈로 이주하였으나(포르투갈이 이주비를 받고 받아들임) 1496년 12월에 포르투갈의 마누얼 1세가 또다시 유대인 추방령을 내림에 따라(이사벨 여왕이 큰 딸 이사벨(Isabella, Princess of Asturias, 1470 ~ 1498)과 마누얼 1세의 결혼조건으로 유대인 추방을 내걸었으며 마누얼 1 세는 왕자가 없는 스페인에 왕위계승권자가 되고 싶었음) 4 ~ 10만 명의 스페인 유대인들이 네덜란드로 들어와 유대계 네덜란드인이 해운, 보석가공, 금융, 무역업에 종사함으로써 네덜란드는 국가 발전의 기틀을 다졌다.
또 1685년 프랑스 루이 14세(Louis XIV, 1638 ~ 1715)가 위그노(프랑스 신교도)의 종교적 자유를 허용한 앙리 4세(Henry IV, 1553 ~ 1610)의 낭트칙령(Edict of Nantes, 1598)을 폐지하는 퐁텐블로 칙령(Edict of Fontainebleau, 1685)으로 많은 프랑스의 신교도들이 네덜란드로 이주해 왔던 것이다.
네덜란드는 1581년 독립을 선언하고 1588년에 북부를 지배한 이후 적극적으로 해외진출을 도모하였다.
유대인들에 의한 무역이 활발해지자 16세기말에 암스테르담을 새로운 항구도시로 건설할 계획을 세우고 간척사업을 실행하여 늪지를 매립하고 운하를 개설하였다. 여기에 북해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이용하여 수많은 풍차를 돌려서 물을 바다로 퍼냈다.
그리고 물을 퍼내고 남은 풍차의 동력을 모직 공장에 이용하고 제재소를 세워 동력으로 이용(1594)하는 등 증기기관 발명 전까지 공장의 동력원으로 대량으로 이용하였다.풍차의 동력을 이용하여 제재소에서 값싸고 쉽게 목재를 대량 생산하여 사용함으로써 배의 건설 비용을 크게 낮추게 되었던 것이다.
네덜란드라는 작은 나라가 해양업에서 강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선박 건조 기술과 해운업 분야에 발전을 이루어 선박 운송업으로 유럽을 석권하였던 것이다.
1594년 속력이 빠르고 화물을 많이 싣을 수 있고 건조비가 적게 들며 선원이 적게 필요한 플류트 선(Fluyt, 상선, 3개의 돛대를 가진 범선, 200 ~ 300톤, 길이 24미터, 초기 갤리온 설계와 유사)을 건조하여 화물 운송료를 1/3로 줄인 것이다. 17세기에는 세계 무역의 75%를 담당하였다.
플류트 선(Fluyt)은 건조 비용을 줄이기 위해 첨저선(尖底船, 길고 좁은 각재 -용골- 하나만을 바닥에 깔고 그것을 뼈대로 외판을 붙여나가는 배, 건조가 어렵고 비용이 높음, 속도가 빠름)이 아닌 평저선(平底船, 건조가 쉽고 비용이 낮음, 선회가 쉽고 수심이 낮은 곳에서도 항해 가능)으로 건조하였으며 해안선이 많고 수심이 얕은 네덜란드에서 적합하였다.
또 1429년 덴마크와 스웨덴, 노르웨이의 공동 군주이던 포메라니아의 에리크(Erik af Pommern, 재위 1396 ~ 1439)는 외레순 해협(Øresund, Aresund, 스웨덴 남단, 스코네 반도와 덴마크 동부 셸란 섬 사이의 해협, 발트해와 북해 연결)을 통과하는 외국 선박에 ‘외레순 해협 통행세(Øresundstolden, 1429 ~ 1857)’를 부과했다. 1567년에는 통행세로 인해 선박에 실린 화물값이 1~2% 높아졌는데 통행세의 기준은 갑판의 넓이였다.
그래서 플류트선은 갑판의 넓이는 좁게하고 화물칸의 부피는 큰 형태로 만들어 통행세를 절감했다. 단, 갑판이 좁으면 대포를 많이 실지 못함으로 적의 침입을 받으면 안전에 문제가 있었다.
통행세는 1523년 스웨덴이 칼마르 연합(Kalmarunionen)에서 벗어나 독립한 뒤에는 덴마크 왕실만의 수입이 되었으므로 이웃나라와 갈등을 빚다가 1857년 코펜하겐 조약(Copenhagen Convention, 1857, 덴마크 해협의 교통에 관한 해양 조약)으로 폐지되었다.
네덜란드는 설탕, 다야몬드(유대인 담당), 향신료, 비단 등을 암스테르담으로 가져와 가공하여 다시 수출하였으므로 암스테르담은 세계적인 상공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또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은 스페인에서 유대인이 종교재판을 피해 가져온 돈과 그들이 발전시킨 금융기법으로 금융의 중심지가 되었다.
네덜란드 상인은 일찍이 포르투갈의 리스본에서 발트해물품을 넘겨주고 인도에서 들어오는 후추 등 향신료와 여러 종류의 물품을 수입하고 있었는데 독립전쟁(네덜란드 독립 전쟁, Dutch War of Independence, 1567 ~ 1648) 중인 스페인이 1581년 포르투갈을 합병한 후로는 무역을 못하게 방해하자 인도와 직접 무역을 하게 되었다.
네덜란드는 그때까지 포르투갈의 바스코다가마 (Vasco da Gama)가 1498년 인도 항로를 발견하여 포르투갈이 동인도와 직접 무역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지 못했다.
그러던 중에 포르투갈 상인과 동인도에서 같이 일했던 린쇼텐(J, H, Van Linschoten, 1563~1611, 네덜란드 상인)이 1592년 고향인 네덜란드로 돌아와 '린쇼텐의 동인도 항해(The voyage of John Huyghen van Linschoten to the East Indies, 1596)'라는 책을 출판했다.
네덜란드는 이렇게 포르투갈의 인도항로를 알게 되자 리스본에 전문가인 코르넬리스 하우트만(Cornelis de Houtman, 1565 ~ 1599, 탐험가)을 1592년 비밀리에 파견하여 인도항로 정보를 확보하였다.
1594년에 설립된 컴파니 판 베레(Compagnie van Verre, 동인도회사 전신)는 포르투갈이 독점하고 있던 인도항로를 개척하기 위해 코르넬리스 하우트만(Cornelis de Houtman, 1565 ~ 1599, 탐험가)이 이끄는 4척의 원정 상선단을 1596년에 자바 섬(몰루카)에 보냈으며 여기에 도착한 이들은 포르투갈과 토착민과의 전투로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후추, 정향, 육두구 등을 구입하여 돌아왔다. 그때까지 포르투갈이 독점으로 운영하던 동인도 항로가 네덜란드에 처음으로 열린 것이다.
이어서 1595~1601년에는 65척의 선박을수마트라와 몰루카 제도(향료 군도, SpicyIslands) 등에 파견해 활발히 무역을 하였다.
네덜란드는 1597년에 자바의 바타비아(Jakarta, 자카르타)에 처음으로 상관(商館 , 무역 거래소, merchant adventurer)을 설치하였다.
그런데 소수의 귀족들이 투자해서 운영된 컴파니 판 베레(Compagnie van Verre, 동인도회사 전신) 등의 무역회사들은 규모가 작아 별 성과를 낼 수 없었다.
그래서 1602년 공화국 대의장 올덴바르네벨트(Jan van Oldenbarneveld, 1547 ~ 1619, 재상)의 주도로 작은 무역회사들을 모두 통합하고 1,000여명의 민간인의 투자를 받아 영국의 동인도회사(영국 동인도 무역상 연합회사,Governor and Company of Merchants of London Trading into the East Indies)보다 10배나 큰 동인도회사(Verenigde Oostindische Compagnie, VOC)를 설립하였다.
많은 유대인들이 투자하여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를 지배하였으며 동인도회사(VOC)는 주식을 팔고 살 수 있고 주주에게 배당을 하는 등 현대의 주식회사 형태를 띠었다.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Verenigde Oostindische Compagnie, VOC)는 자국으로부터 동인도에 대한 무역권을 부여받아 입법, 행정, 군사상의 권한을 가졌으며 용병을 고용하여 보호받으면서 해외로 진출하였고 무역, 금융, 보험업으로 확장하였다.
실제로는 식민지 습격, 상선(商船)의 약탈과 나포(拿捕) 등도 하였다.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는 1602년 바타비아(Jakarta,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북부 Kota Tua)에 처음으로 설치되었으며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바타비아(자카르타)에 총독 정청을 두고 그곳을 상업 무역의 중심지로 삼았다.
네덜란드와 포르투갈은 1602 ~ 1663년 지원국과 함께 아프리카, 인도양, 말라카, 중국 마카오, 브라질 등 세계 여러 곳에서 네덜란드-포르투갈 전쟁 (Dutch–Portuguese War)을 하였으며 1606년에는 코넬리스 마텔리프 데 종(Cornelis Matelief de Jonge, 1569 ~ 1632)제독이 지휘한 네덜란드 함대는 말라카에서 포르투갈의 안드레 푸르타도 데 멘돈사(André Furtado de Mendonsa, 1588 ~ 1611)가 지휘한 함대를 크게 손상시켰다.
군사력을 앞세운 동인도회사는 1605년에 인도네시아 향료 군도(Spicy Islands, Maluku Islands 말루쿠 군도)의 암보이나(Amboina, Ambon)를 포르투갈로부터 탈취했으며 아프리카 남단의희망봉동쪽 지역의 무역을 21년간 독점할 권리를 얻었다.
동인도회사는 인도에 풀리카트(Pulicat), 구자라트와 벵골, 코로만델(Coromandel) 해안에 상관(商館 , 무역 거래소, merchant adventurer)을 설치해 인도와 교역하면서 동남아시아지역 진출의 교두보로 삼았으며 이어서 포르투갈이 점령하고 있던 인도의 콜롬보(1655)와코친(1659)을 점령하여 포르투갈 세력을 밀어냈다.
말라카(Malacca, 믈라카 Melaka, 말레이반도), 캔턴(Canton, 광저우), 나가사키 등에는 동인도회사의 사무소를 설치하여 인도네시아 제도의 향료를 비롯한 도자기, 방직품 등 많은 물품의 거래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네덜란드는 북아메리카에서 1609년 동인도회사가 고용한 허드슨(Henry Hudson, 1550 ~ 1611, 직업 탐험가, 항해가, 영국)이 아메리카의 허드슨강을 탐사한 후 1610년부터 허드슨강 유역을 개척하여 뉴 네덜란드(New Netherland, Nieuw-Nederland, 니우네데를란트)를 개척하였다.
1626년 신대륙 식민지의 3대 총독이었던 페테르 미노이트(Peter Minuit/Minnewit, 1580 ~ 1638)가 원주민인 인디언 레나페족(Lenape)으로부터 맨해튼섬(Manhattan)을 24달러가량의 장신구를 주고 매입하여 뉴암스테르담(New Amsterdam,
니우 암스테르담 Nieuw Amsterdam, 뉴욕의 전신)으로 개척하였다.
페테르 미노이트(Peter Minuit/Minnewit, 1580 ~ 1638)는 1638년델라웨어 반도에스웨덴 식민지뉴 스웨덴(New Sweden)을 세웠다.
1655년 네덜란드의 페터 스토이베산트(Peter Stuyvesant,1612 ~ 1672, 총독)가 스웨덴이 지배하던 뉴 스웨덴(New Sweden)을 점령하였다.
네덜란드의 연방의회는 스페인과의 2차 독립전쟁(1619)이 소강상태로 되자 1621년 서인도에 기존에 있던 무역 화사를 합병하여 서인도 회사(西印度會社, Dutch West India Company, 1621년 설립)를 설립하여 동인도회사와 같은 방식으로 운영하도록 하였다.
서인도 회사(西印度會社, Dutch West India Company, 1621년 설립)는 브라질의 사탕수수 재배지를 점령하고 1625년 이후에 브라질에서 카리브해 섬에 사탕수수를 들여와 바베이도스(Barbados)에서 버진 제도(Virgin Islands)까지 사탕수수를 재배하여 유럽으로 운송했다.
1634년 서인도의 퀴라소(Curaçao, Leeward Antilles의 가장 큰 섬)를 개척하였다.
네덜란드는 오스트레일리아(호주)를 처음 발견하였다.
네덜란드인들이 인도네시아에 도착했을 때 자바 섬 남쪽에 '오스트랄리스 땅(Terra Australis,라틴어 Southern Land)'이라 불리는 매우 큰 무인도가 있다는 소문이 있었다.
1606년 네덜란드의 윌렘 얀손(Willem Janszoon, Willem Jansz, 1570 ~ 1630)이 듀이프겐 호(Duyfken)를 타고 잘못 항해하여 최초로 오스트레일리아 북부 카펀테리아 만(Carpentaria)에 도착했다.
이에 네덜란드 총독 프레데리크 헨드리크(Frederik Hendrik van Oranje, 재위 1625 ~ 1647)는
1642년에 아벨 타스만(Abel Janszoon Tasman, 1603 ~ 1659, 탐험가, 상인,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를 위해 탐험) 선장을 파견하여 탐험케 하였다.
아벨 타스만은 1642년 오스트트레일리아 남동부지역의 반 디멘스랜드(Van Diemen's Land, Tasmania, 태즈메이니아)를 발견하였고 이어 뉴질랜드(Staten Landt, 스타텐 란트)도 발견하였다.
아벨 타스만은 1644년 오스트레일리아를 뉴 홀랜드(New Holland, Nieuw-Holland)라 하고 1645년 뉴질랜드를 노바젤란디아(Nova Zeelandia)라고 명명했다.
그러나 그가 탐험한 반 디멘스랜드는 향신료 등 찾던 물품은 없었으며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인 애버리진(Australian Aborigine)은 거칠고 도착한 북쪽지점은 사막으로 황량하였으므로 네덜란드 총독은 사람이 살 수 없는 작은 섬이라 생각하여 내버려 두었다.
그 후 1770년에 영국의 쿡(J. Cook) 제독은 오스트레일리아 동해안에 있는 뉴 사우드 웨일스(New South Wales) 지역의 보타니 만(Botany Bay, 삼림이 울창하고 환경이 좋았음)을 발견하고 오스트레일리아를 영국의 식민지로 선포하였다.
영국은 1788년에 약 100세대의 이민자들과 죄수들을 오스트레일리아에 보내어 정착을 시작하였다.
아랍인들은 커피를 독점하기 위해 커피나무가 해외로 유출되는 것을 막고 있었다. 그런데 1616년 네덜란드 인들은 커피의 중요성을 알고 메카를 경유하여 커피나무를 몰래 네덜란드로 가져와 재배하였으며 1696년 식민지인 자바(Java) 섬의 바타비아(Batavia, 자카르타)에 아시아 최초로 전파하였고 그리고 인도 말라바르(Malabar, 인도 남서 해안 지역)에도 심었으며, 1718년에는 남미의 수리남(Surinam) 등에 전파하였다.
1714년에는 커피나무를 프랑스 루이 14세에게 기증했다.
1588년 영국-스페인 전쟁에서 스페인이 영국에게 패배하면서 그동안 스페인이 누리던 번영이 무적함대를 격파한 영국에게 돌아간 것이 아니라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네덜란드가 차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네덜란드는 독립 시에 이미 강력한 해군을 보유하였고 무역 범위를 전 세계로 확장하였으며, 암스테르담은 당시 전 유럽의 경제적 중심지가 되었으며 정치의 중심지는 1618년 마우리츠 2대 총통이 군대를 주둔한 이래 헤이그(Hague)였다. 이로 인해 1세기 동안에 포르투갈이 장악하고 있던 동방무역의 패권을 네덜란드가 장악하게 되었던 것이다.
독일의 신구교 갈등으로 일어난 30년 전쟁(1618~1648)은 유럽의 여러 강대국들이 종교, 영토 및 통상문제 등 다양한 이유로 참전하여 오랜 기간 대규모 전투를 헤아릴 수 없이 치렀으며 발달된 전쟁무기와 공성전으로 수많은 군사와 전쟁 비용이 소모되어 참전한 국가들은 쇠약해지고 국민들을 처참하게 만든 전쟁이었다.
유럽의 강국들이 30년 전쟁(1618 ~ 1648)에 국력을 집중하는 동안 네덜란드는 세계로 진출하였던 것이다.
1648년에는 80년의 네덜란드 독립 전쟁과 30년 전쟁 결과로 맺어진 베스트팔렌조약(Peace of Westfalen)에 의거하여 비록 명목상의 관계였던 신성로마제국의 속국에서 벗어남으로써 명실상부한 완전한 독립을 누리게 되었다.
그리고 네덜란드의 해군은 세계의 최강 중의 하나가 되었다.
다. 네덜란드의 중국, 일본과의 교역
1) 네덜란드의 동인도 진출 및 중국과 교역
네덜란드에서 1594년에 설립된 컴파니 판 베레(Compagnie van Verre, 동인도회사 전신)는 포르투갈이 독점하고 있던 인도항로를 개척하기 위해 코르넬리스 하우트만(Cornelis de Houtman, 1565 ~ 1599, 탐험가)이 이끄는 4척의 원정 상선단을 1596년에 자바 섬에 보냈으며 여기에 도착한 이들은 괴혈병으로 71명이 죽고 포르투갈과 토착민과의 전투로 많은 피해를 입었으며(249명이 츌발하여 87명이 돌아옴) 포르투갈 군을 피하기 위해서 몰루카 제도(향료 군도, SpicyIslands)에는 들어가지 못하였으며 후추, 정향, 육두구 등도 별로 구입하지 못하고 돌아왔지만 향식료 산지의 항로를 개척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때까지 포르투갈이 독점으로 운영하던 동인도 항로가 네덜란드에 처음으로 열린 것이다.
이어서 1595~1601년에는 65척의 선박을수마트라와 몰루카 제도(향료 군도, SpicyIslands) 등에 파견해 활발히 무역을 하였다.
1597년 자바의바타비아(Batavia, 자카르타)에 상관(商館, 무역 거래소, merchant adventurer)을 설치하고 이를 거점으로 명(중국)과 일본에 교역을 시도하였다.
1601년에 반 네크(Jacob Corneliszoon van Neck, 1564 ~ 1638)의 상선이 중국 광저우(廣州)에 통상을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1602년 자바의바타비아(Batavia, 자카르타)에 동인도회사를 설립한 네덜란드는 동인도회사의 명나라 진출을 방해하는 포르투갈의 호경오(濠鏡澳, 마카오)를 공격했으나 점령에 실패하였고, 1604년 바르비크(Wybrand van Warwick, 1569 ~ 1615)의 무장상선이 펑후 군도(澎湖群島,Pénghú Islands, 푸젠성의 타이완 부근)에 상륙하여 통상을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하였으며 1605년에는 마텔리프(Cornelis Matelief de Jonge, 1569 ~ 1632)가 7척의 함선을 이끌고 와서 통상을 강요했으나 역시 거절당하였다.
명나라는 네덜란드인을 모발이 붉다고 하여 홍모이(紅毛夷)라고 불렀다. 그래서 네덜란드 대포를 홍이포(紅夷砲)라 하였다. 이때 명에 들어온 홍이포(紅夷砲)는 청나라에 넘어가 병자호란 때에 남한산성을 공격하는 데 사용되었다.
1624년 네덜란드는 타이완 남부의 섬 곤신(鯤身)을 무력으로 점령하였다. 이에청나라가 1659년에 병력을 파견해 무력충돌이 일어났으며 1662년 15개 조항의 정전 조약을 체결하였다. 조약에 따라 네덜란드는타이완에서 물러나고 청나라는 8년에 한 번 조공을 허용하였다. 이후 청나라는 1685년에 공식적으로 해외무역을 개방하였다.
유럽에서는 중국풍(中國風, Sinicism 영,sinisant 프)으로 꾸민 집에서 중국 비단으로 만든 옷을 입고 중국 차를 끓여서 중국 도자기로 마시는 것이 귀족들 사이에 유행하는 풍속이었다.
이에 네덜란드는 수많은 무역선으로 중국과 일본에서 차, 비단, 도자기 등을 구입하여 유럽으로 수송하였다.
2) 네덜란드의 일본 교역
네덜란드는 1609년 일본 히라도(平戶)에 상관(商館 , 무역 거래소, merchant adventurer) 설치를 허가받아 일본과의 교역을 시작하였다(영국은 1613년).
일본이 가톨릭의 포교 문제로 1639년 포르투갈인들의 일본 입국을 금지하고 1641년 포르투갈 세력을 추방하였다.
이에 종교문제에 보다 자유로운 네덜란드가 포르투갈을 대신해서 동인도회사를 앞세워 무역을 하게 되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나가사키의 데지마(出島)로 상관(商館 , 무역 거래소, merchant adventurer)을 이전하여이후 200년 여 년간 무역을 독점하였다.
일본에서는 난학(蘭學, 네덜란드 학문)이 유행하게 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납치해 간 도예가들로부터 전수받은 장인들이 만든 700만 점 이상의 도자기가 중국 도자기 대용으로 1650년 경부터 80년 동안 네덜란드 선박으로 유럽에 수출되었으며 도자기 포장지로는 일본에서 필요가 없게 된 우키요에(浮世繪, 에도시대 1603 ~ 1867에 서민계층을 기반으로 발달한 풍속 천연색 목판화)를 사용하였다.
도자기 포장지로 사용된 우키요에가 유럽에서 회화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우키요에는 1860년대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의 미술 전반에서 일어난 자포니즘(Japonism)에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라. 열강과의 경쟁
네덜란드는 1634년 카리브해의 앤틸리스 제도의 스페인령 쿠라사오(Curasao, 1527년 스페인인 정착), 보이나레(Boinare, 1501년 스페인인 정착) 등을 점령하여 6개의 작은 섬들로 구성된 네덜란드령 앤틸리스 연방을 설립하였다. 쿠라사오는 네덜란드의 서인도 회사가 요새를 설치하고 카리브해에서 흑인 노예무역과 교역의 중심지로 삼았으며 보이나레 등은 플랜테이션 농장으로사용하였다.
네덜란드는 1609년 독립전쟁 휴전 이후부터 스페인과 협상하여 브라질에 진출하여 많은 설탕 정제소를 운영했다. 1622년 12년의 휴전기간이 끝나고 네덜란드가 서인도 회사를 설립하여 공격적으로 진출하자 네덜란드와 포르투갈의 전쟁이 이어졌다.
1630년 네덜란드의 프레데리크 헨드리크(Frederik Hendrik van Oranje, 1584 ~ 1647, 오라녜 공작)가 지휘한 네덜란드군이 브라질 북부의 페르남부코와 레시페를 점령해 네덜란드령 브라질을 건설했다.
1648년 포르투갈은 브라질에 노예를 공급하는 앙골라를 재점령하여 서인도 회사에 타격을 입히는 등 전쟁이 계속되었으며 포르투갈이 1654년1월 헤시피 재점령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어네덜란드령 브라질을 차지하게 되었다.
1661년에 체결된헤이그 조약(Vrede van Den Haag Tratado da Haia, 1661.8.)에 따라 포르투갈은 브라질 북동부와앙골라를 돌려받았고 현금으로 보상했으며 브라질 내의 네덜란드인들은 본국으로 돌아가거나 북아메리카의 뉴네덜란드로 갔다.
영국에서는 내전(English Civil Wars, 청교도혁명 Puritan Revolution, 1642 ~ 1651, 의회파와 왕당파 간 전쟁, 찰스 1세 처형)을 종식한 후 실권을 장악한 호국경(대통령)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 1599 ~ 1658)이 네덜란드를 견제하기 위해 1651년에 항해조례(Navigation Act)를 선포하였다.
영국과 그 식민지로부터 반입되는 상품은 영국의 선박 또는 해당 상품의 생산지 선박에 의해서만 수송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많은 상선을 가지고 중계무역을 활발히 하고 있던 네덜란드에게는 결정적인 타격을 입히는 것이었다.
상선의 활동 감소는 곧바로 국가 수입의 감소로 이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네덜란드는 영국과 전쟁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제1차 영국 네덜란드 전쟁(1652 ~ 1654)은 승패 없이 1654년 웨스트민스터에서 종전 협정을 맺어 영국의 항해 조례(Navigation Act)를 인정하였다.
네덜란드는 포르투갈로부터 1641년에 말라카(Malacca, 말레이시아, 1824년 영국에 양도), 1658년에 실론(스리랑카, 1796년 영국에 양도)을 양도받았다.
영국의 찰스 2세(Charles II, 재위1660 ~ 1685)때인 1664년 영국 해군 최고 사령관(lord high admiral, commander of the Royal Navy 왕립해군 사령관)인 요크 공작(Duke of York, 1633 ~ 1701, 영국왕 제임스 2세, James II of England, 재위1685 ~ 1688)의 명령을 받은 요크공작의 신랑(Groom of the Chamber 궁정 신랑)인 리처드 니콜스(Richard Nicolls, 1624 ~ 1672, 영국의 왕당파 대령출신, 뉴욕총독)는 4척의 전함과 300명의 병사를 이끌고 뉴 네덜란드(New Netherland, Nieuw Nederland 니우 네덜란드, 수도는 뉴 암스테르담, 니우 암스테르담, Nieuw Amsterdam, 북아메리카 허드슨강 유역, 뉴욕)를 원정하였는데 현지의 뉴 네덜란드의 총독페터 스토이베산트(Peter Stuyvesant, 1612 ~ 1672, 뉴 네덜란드 총독 재임 1647 ~ 1664)가 신임을 잃어 그의 병사들이 전투를 거부함에 따라 쉽게 정복되었으며찰스 2세(Charles II, 재위1660 ~ 1685)는 그의 동생인 요크 공작(Duke of York, 제임스 2세, James II of England, 재위1685 ~ 1688)에게 뉴 네덜란드 일부를 하사하였다.
네덜란드의 피터 미누이트(Peter Minuit, 1585 ~ 1638)가 1625년에 인디언에게 24달러에 해당하는 장식물을 주고 사서 식민지로 개발한 맨해튼 섬이 있는 뉴암스테르담(New Amsterdam, 니우 암스테르담 Nieuw Amsterdam)을 제임스 2세가 된 요크공작을 기념하여 뉴욕(New York)으로 이름을 변경하였다.
네덜란드의 페테르 미노이트(Peter Minuit/Minnewit, 1580 ~ 1638) 원정대가 1638년 델라웨어 반도(윌밍턴)에 인디언으로부터 토지를 구입, 정착지를 세우고 스웨덴 크리스티나 여왕(Queen Christina)의 이름을 따서 크리스티나 요새(Fort Christina)라 하는 등 스웨덴 식민지인 뉴 스웨덴(New Sweden)을 세웠지만 1655년 뉴 네덜란드의 페터 스토이베산트(Peter Stuyvesant, 1612 ~ 1672, 총독)가 스웨덴이 지배하던 뉴 스웨덴(New Sweden)을 다시 점령하여 뉴 네덜란드(New Netherland, Nieuw Nederland 니우 네덜란드)에 병합했던 것이다.
제2차 영국 네덜란드 전쟁(1665 ~ 1667)에서 네덜란드와 프랑스 연합국의 승리로 1667년에 브레다 조약(Treaty of Breda)을 체결하여 네덜란드와 프랑스는 영국으로부터 많은 지분을 얻었다. 2차 전쟁의 승리로 네덜란드는 미국의 뉴 암스테르담(New Amsterdam, Nieuw Amsterdam, Hudson River 하구, 뉴욕, New Netherland 수도)을 영국에 넘기는 대신 사탕수수 농장으로 이익을 창출할 수 있는 수리남(1498년 콜럼 버스가 발견하였으며 여러 나라가 정착을 시도했으나 실패한 후 영국이 1651년부터 정착하여 지배하였음,브라질에서 네덜란드가 포르투갈과의 전쟁에서 패하여 쫓겨난 네덜란드인들이 넘어와 거주하고 있었음)과 향료로 수익을 많이 얻을 수 있는 인도네시아 반다 제도(몰루카 주)의 룬(Run) 섬을 얻었다.
1672년, 프랑스의 루이 14세(Louis ⅩⅣ)는 영국, 독일과 연합하여 네덜란드를 침공하여 제3차 영국 네덜란드 전쟁(1672 ~ 1674)이 일어났다. 이에 따라 네덜란드는 전쟁에 필요한 국민 단결을 위해 황급히 빌럼 2세(William Ⅱ of Orange)의 아들인 빌럼 3세(William Ⅲ of Orange, 1650 ~1672, 총독 재위 1672 ~1702)를 총독(Stadholder)으로 옹립하였다.
빌럼 3세는 네덜란드, 스페인, 브란덴부르크(Brandenburg)와 3국 동맹을 체결하여 겨우 프랑스군을 물리치고 독립을 유지하였다. 이 3차 전쟁에서 영국에게 북미에서 승리하여 뉴 암스테르담(뉴욕주, New Amsterdam, Nieuw Amsterdam, Hudson River 하구, New Netherland 수도)을 빼앗아 오기도 하였지만 전쟁에 패하여 1674년에 맺어진 웨스트민스터 조약에 따라 뉴 네덜란드(New Netherland, Nieuw-Nederland, 지금의 코네티컷, 뉴욕, 뉴저지, 델라웨어주 지역) 전체를 영국에 넘겼다.
1688년 빌럼 3세(윌리엄 3세,William Ⅲ of Orange)는 영국 의회의 요청으로 영국으로 건너가 제임스 2세(James Ⅱ)를 폐하고 메리 2세(Mary II, 제임스 2 세의 딸, 재위 1689 ~ 1694)와 함께 공동으로 영국 왕까지 겸하였다(영국의 명예혁명).
네덜란드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스페인 왕위를 프랑스가 있는 것을 반대하는 연합국가와의 전쟁, (1701 ~ 1714)에 연합국으로 참전하여 1715년 맺어진 위트레흐트 조약(Treaty of Utrecht)에 의해서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항구들과 스페인령 헬데를란트(Gelderland, 네덜란드 중동부)를 합병하였다.
1702년에 윌리엄 3세는 후사가 없이 사망하여 1702년~1747년간 제2차 호민관 시대가 되었지만 1747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중에 프랑스의 침략을 받게 되자 네덜란드는 오랑쥬(Orange) 가의 혈통인 프리슬란트(Friesland) 주지사를 빌럼 4세로 옹립하고 지사의 직위를 세습화하였다.
1751년 총독(Stadholder)으로 옹립된 빌럼 5세(William Ⅴ, prince of Orange)는 미국에서 독립전쟁이 발발하였을 때 미국의 독립군을 상대로 교역을 했으며, 이를 이유로 1784년 제4차 영국 네덜란드 전쟁(1780 ~ 1784)이 일어났며 네덜란드는 영국에 패하여 항복함으로써 해상강국의 지위를 잃게 되었으며 이어서 영국이 해상강국으로 부상하였다.
다른 국가들은 조선업의 발달로 함선을 대형화하여 점점 군사력을 강화하였으나 네덜란드는 해안의 수심이 얕아 대형 함선을 가지지 못함에 따라 상대적으로 군사력이 약해져 1784년 4차 전쟁에 패하여 인도를 영국에 넘기는 등 모든 제해권이 완전히 영국으로 넘어가 대영제국(1783 ~ 1947, 캐나다, 인도,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남아프리카 등을 지배한 제2차 대영제국)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1791년에는 독일에 네덜란드 서인도 회사의 주식을 인도하였다.
프랑스에서 대혁명(French Revolution, 1789 ~ 1794)이 일어나자 프랑스혁명을 부인하고 확산을 막기 위해 제1차 대(對) 프랑스 동맹(1793 ∼ 1797)이 결성되었다. 영국,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 네덜란드, 에스파냐 등이 제1차 대 프랑스 동맹을 맺었으나 이해관계가 맞지 않고 곳곳에서 패하였으며 1795년에는 프랑스 공화국 혁명군이 네덜란드에 침공하여 빌럼 5세를 추방하고 1795년 바타비아(Batavia,1795 ~ 1806) 공화국이 설립되었지만 프랑스 공화국의 위성 공화국(Client)이었다.
더욱이 1806년에 프랑스에 합병되었다.
1813년에 나폴레옹으로부터 자유를 되찾았고, 영국-네덜란드 조약에서 영국으로부터 해외 영토들을 되돌려 받았다. 남아프리카(케이프)는 영국 식민지로 되었다.
17세기는 네덜란드의 황금시대(Golden Age)였다. ‘공해 자유론’의 원조인 휘호 흐로티위스(Hugo Grotius, 1583 ~1645, 국제법의 아버지), 화가 하르먼스 판 레인 렘브란트(Harmensz van Rijn Rembrandt, 1606 ~1669), 과학자 크리스티안 하위헌스(Christiaan Huygens, 1629~1695, 수학자, 물리학자, 천문학자, 진자시계, 운동량 보존의 법칙), 1595년 한스 얀센(Hans Janssen)과 자카리아스 얀센(Zacharias Jansen, Sacharias Jansen, 1585 ~ 1632) 부자가 현미경을 발명하였고 1660년경 안톤 판 레벤후크(Anthony van Leeuwenhoek, 1632 ~ 1723)가 고배율의 현미경을 만들어 미생물학 발전에 기여하였으며 1608년 한스 리퍼세이(Hans Lippershey,1570 ~ 1619)가 망원경 발명하는 등 인류 문화에 공헌한 많은 학자들을 배출하였으며, 유럽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3. 프랑스의 식민지와 제국
가. 중세와 근세의 프랑스
프랑스 와인은 옛날부터 유명했다.
프랑스의 포도재배는 BC 600년 경, 고대 해상왕국 페니키아(Phoenicia, 지중해 동안 지역, 레바논 시리아 팔레스타인 등의 선조, 그리스어, =Punic 포에니 라틴어, Punic 포에니는 현재 튀니지 지역의 카르타고인으로 페니키아인을 뜻함)인들이 갈리아(Gallia, 프랑스 옛 지명)의 마르세유 지방을 식민지로 지배하면서 포도를 재배한 것이 시작이었다.
포도의 원산지는 흑해연안과 코카서스(Caucasus, 캅카스, 카프카스) 지역으로 알려져 있으며 포도주는 8,000년 전 조지아(Georgia, 코카서스 지역)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프랑스(갈리아, Gallia)는 BC 51년에 로마 제국의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 BC 100 ~ BC 44, 재위 BC 44)에 의하여 점령당했는데 침략한 로마 군인들이 와인을 좋아하여 경작지가 확대되었으며 프랑스 와인이 로마 와인보다 인기가 높자 AD 92년 로마의 도미시아누스 (Domitianus, 81 ~ 96) 황제가 프랑스의 포도 재배를 금지하였으므로 포도 재배지가 반이상 줄어들었으나 AD 280년 프로부스 (Probus, 276 ~ 282) 황제는 포도 재배를 권장하였다.
AD 476년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후 중세에 유럽에서는 와인을 주로 교회에서 사용하기 위해 만들었으며 수도사들이 포도 재배 방법과 양조법을 연구하였다.
유럽의 남서부에 위치하는 이베리아 반도에는 지중해 기원의 이베리아인이 살고있었다.
BC 7세기부터 갈리아 지방(Gallia, 골 Gaul, 프랑스, 벨기에, 스위스 서부, 라인강 서쪽의 독일)에는 켈트족(Celts)이 이동해왔다.
BC 51년 로마 공화국(Res Publica Romana, BC 509 ~ BC 27)의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 BC 100 ~ BC 44, 재위 BC 44)는 프랑스(갈리아, Gallia)를 점령하였다.
스칸드나비아 반도와 발트해 주변에 살던 여러 종족의 게르만인들은 농토를 찾아 따듯한 게르마니아로 이주하였으며 인구가 늘어나 농토가 부족해지자 남하하였다.
게르만 케루스키족(Cherusker)의 군장인 세기메루스(Segimerus)의 아들로 태어난 아르미니우스(Arminius, ? ~ AD 21)는 로마 제국의 군대(비루스 군대)에 입대하여 군사적 상황 등을 접하고 귀향하였다.
로마 제국(Rome Empire, BC 27 ~ AD 395)의 황제 아우구스투스(Imperator Caesar divi filius Augustus, 로마 제국 초대 황제, 재위 BC 27 ~ AD 14)는 게르마니아 지역의 지배권을 확립하기 위해 푸블리우스 퀸크틸리우스 바루스(Publius Quinctilius Varus, BC 46 ~ AD 9)를 총독으로 파견하였다.
총독 바루스가 게르마니아 지역에서 횡포를 부리고 아르미니우스(Arminius)을 멸시하자 아르미니우스(Arminius)는 군사들을 규합하여 토이토부르크 전투(Battle of the Teutoburg Forest, AD 9.9.)에서 대승하여 게르만의 영웅으로, 게르만의 해방자가 되었다.
355년 서게르만의 일족인 프랑크족(Franks, Franci 프랑키, gens Francorum 겐스 프랑코룸)이 훈족(Huns, 4 ~ 6세기중앙 아시아와 코카서스에 살았던튀르크계열의 유목민족)의 압박으로 로마 제국(Rome Empire, BC 27 ~ AD 395)의 북부 국경을 침입해오자 로마 제국 부제(副帝, 카이사르 Caesar) 율리아누스(Iulianus, 로마 제국 부제 재위 355 ~ 360, 황제 재위 361 ~ 363)는 358년 그들을 제압하고 그들이 살 수 있도록 네덜란드의 바타비아(Batavia) 지역과 네덜란드와 벨기에 지역인 톡산드리아(Texandria) 지역을 주었다.
동게르만족인 서고트족(Visigoths)이 갈리아지방으로 이동하여 415년로마 제국으로부터 아키텐(Aquitaine, 프랑스 남서부) 지방을 양도받아 서고트 왕국(Regnum Visigothorum, 412 ~ 720)을 세웠다.
동게르만족인 부르군트족(Burgundiōnes)이 부르고뉴(Bourgogne, Burgundy, 프랑스 남동부와 제네바 지역)에 이동하여 413년 부르군트 왕국(Kingdom of the Burgundians, 411 ~ 534)을 세웠다.
451년 훈족(Huns, 훈 제국 Hunnic Empire, 아틸라 제국 Atilla's Empire, 370경 ~ 469)의 아틸라(Attila, 훈 제국 왕 재위 445 ~ 453) 군이 서로마 제국(Western Roman Empire, 395 ~ 476)의 갈리아 살롱 지역(프랑스 북동부의 샹파뉴아르덴 지역)을 침입하자 살리안 프랑크족의 족장 메로베크(Mérovée, Merowig, 메로베우스 1세 Meroveus I, 411 ~ 458, 서로마 제국용병에서 로마군 사령관, 메로빙거 왕조 명칭의 기원)와 서고트왕 테오도리쿠스 1세(Theodoric I, 재위 418 ~ 451)는 서로마 장군 아이티우스(Flavius Aetius, 390 ~ 454) 등과 함께 카탈라우눔 평야에서 벌어진 카탈라우눔 전투(Battle of the Catalaunian, Battle of the Chalons 살롱 전투, 451, 프랑스 북동부)에서 아틸라(Attila, 훈 제국 왕 재위 445 ~ 453) 군을 물리쳤다.
메로베크의 아들 힐데리크(Hildirīk, 킬데리쿠스 1세, Childéric, Childericus, 437 ~ 481, 서로마 제국 갈리아 벨기카 주의 군사령관)가 살리(Salii)안 프랑크족의 족장을 이어 받았으며 이들은 서로마 제국의 용병으로 군사력이 막강했으며 서로마 제국과 우호적이었다.
463년에는 스페인 북부와 프랑스 남쪽에서 세력을 떨치고 있던 서고트족이 서로마 제국을 침입하자 힐데리크는 서로마군과 협력하여 물리쳤다.
476년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제국군의 잔당들이 발호(跋扈)하였다.
힐데리크의 아들 클로비스 1세(Clovis Ier, 클로도베쿠스 1세, Chlodovechus I, 446 ~ 511, 서로마 제국 갈리아 벨기카 주의 군사령관)는 481년에 아버지 힐데리쿠스 1세의 뒤를 이어 살리안 프랑크족의 족장이 되었고 486년 수아송 전투(Battle of Soissons, 486, 프랑스 북부)에서 로마계 군벌 시아그리우스(Syagrius, 430 ~ 486)를 격파하여 수아송 왕국(Regnum Romanorum, 로마 왕국, 457 ~ 486, 북프랑스)을 점령하므로서 영토를 2배로 확장하였으며 프랑크족을 통일하여 메로빙거 왕조(메로베우스 왕조, Merovingian dynasty, 481 ∼ 751)의 프랑크 왕국(Francia kingdom, 481 ~ 843)을 수립했다.
이때에동로마 제국(Eastern Roman Empire, 비잔티움 제국 Byzantine Empire, 330 ~ 1453)의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Iustinianus I, 재위 527 ~ 565)는 이탈리아의 동고트 왕국(Ostrogothic Kingdom, 이탈리아 왕국 Regnum Italiae, 493 ~ 553)과 아프리카의반달 왕국(Kingdom of the Vandals and Alans, 429 / 442 ~ 534, 모로코,알제리,튀니지, 사르데냐, 코르시카)을 멸망시켰고, 서고트 왕국(Regnum Visigothorum)의 발티 왕조 8대 군주 에우리크(Aiwareiks, 재위 466 ~ 484)는 472 ~ 475년에 이베리아반도의히스파니아를 대부분(프랑스 남부와 스페인 지역) 정복하였다.
프랑크 왕국은 이런 대외 환경 속에서 세워진 게르만족의 국가이다.
서고트 왕국(Regnum Visigothorum, 412 ~ 720), 동고트 왕국(Ostrogothic Kingdom, 이탈리아 왕국 Regnum Italiae, 493 ~ 553), 부르군트 왕국(Kingdom of the Burgundians, 411 ~ 534) 등 대부분의 게르만인들은 기독교의 아리우스파(Arianism)로 개종한데 반해 프랑크 왕국의 클로도베쿠스 1세는 삼위일체를 주장하는 기독교의 아타나시우스(Athanasius)파로 개종하여 주교의 도움을 받았다.
프랑크 왕국의 클로도베쿠스 1세는 491년 갈리아 북동부에 있는 튀링겐족을 복종시켰으며 507년 서고트족의 알라리크 2세(Alaric II, ? ~ 507)을 부이예 전투(Battle of Vouillé, 507)에서 격파하고 아키텐(Aquitaine, 프랑스 남부) 전역을 획득하였다.
511년 클로비스 1세(Clovis Ier, 클로도베쿠스 1세, Chlodovechus I, 446 ~ 511)의 사망 후 프랑크 왕국은 살리카법(Lex Salica, Salic Law, 딸은 상속권이 없고 모든 아들은 상속권이 있음)에 따라 영토를 네 아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랭스(Reims) 왕국은 장남 테우데리크 1세(485 ~ 534)에게, 오를레앙(Orleans) 왕국은 2남 클로도미르(495 ~ 524)에게, 파리 왕국은 3남 킬데베르트 1세(497 ~ 558)에게, 수아송(Soissons) 왕국은 4남 클로타르1세(498 ~ 561)에게 주었으며, 대외 전쟁 등은 공동으로 대처하기로 했다.
프랑크 왕국 클로비스 1세(Clovis Ier, 클로도베쿠스 1세, Chlodovechus I, 446 ~ 511)의 네 아들은 534년 부르군트 왕국(Kingdom of the Burgundians, 411 ~ 534)을 격파하고 갈리아 대부분을 정복했으며,537년에는 라이티아(Raetia, 로마 제국의속주, BC 15 ~ AD 476, 동스위스와 북이탈리아)까지 영토를 넓혔다.
이렇게 분리되고 확장된 프랑크 왕국 메로빙거 왕조의 영토를 클로도베쿠스 1세의 막내인4남 클로타르 1세(Chlothar I, 프랑크 왕 재위 558 ~ 561)가 통합하여 자기 아들들에게 다시 나누어 주었다.
이때 게르만족(Germani, 노르만족 Normaunds, 바이킹족 Vikings)은 양고기를 구워 먹고 와인을 마시는 라틴족(Latini)과는 달리 쇠고기를 구워 먹고 맥주를 마셨다.
米. 고트족(Goths)
고트족은 스칸드나비아 반도 발트 해의 고틀란드라는 섬에 살던 게르만족이 중부 유럽을 가로질러 남쪽으로 이주하면서 두 파로 나누어졌다. 서고트족(Visigoths)은 2세기경 다뉴브 강 변경 지방(루마니아 지역)에 정착했으며 동고트족(Ostrogoths)은 더 동쪽으로 이동해 흑해 북서 연안에 정착하였으나 중앙아시아의 흉노족이 서쪽으로 이동함에 따라 그 지역에서 쫓겨난 고트족은 서쪽으로 이동하여 유럽으로 들어왔다. 서고트족은 376년 다뉴브 강을 건너 남쪽으로 이동하여 콘스탄티노플에서 동로마 제국(Eastern Roman Empire, 비잔티움 제국 Byzantine Empire, 330 ~ 1453) 군대를 물리친 다음 이탈리아로 진출한 알라리크 1세(알라리쿠스 1세 Alaricus I, 재위 395 ~ 410)는 409년 로마를 점령하고 다시 북쪽의 갈리아 지방으로 이동하였으며, 서로마 제국(Western Roman Empire, 395 ~ 476)은 이들에게 갈리아 남서부(스페인)를 주었다.
아타울프(Athaulf, 서고트 왕 재위 411 ~ 415)는 서고트 부족 왕을 서고트 왕국(Regnum Visigothorum 레그눔 비시고토룸, 412 ~ 720)으로 확립했다.
451년 카탈라우눔 전투(Battle of the Catalaunian, 샬롱 전투, 451, 프랑스 북동부의 Chalons)에서 서로마 제국의 장군 플라비우스 아이티우스(Flavius Aetius, 390 ~ 454)와 서고트족 왕 테오도리쿠스 1세(Theodoric I, 재위 418 ~ 451) 등의 연합군은 훈족(Huns, 훈 제국 Hunnic Empire, 아틸라 제국 Atilla's Empire, 370경 ~ 469)의 아틸라(Attila, 훈 제국 왕 재위 445 ~ 453) 군을 물리쳤다.
서고트 왕국은 711년 이슬람 제국 우마이야 왕조(Umayyad dynasty, Umayyad Caliphate, 우마이야 칼리파국, 661~750)의 침입을 받아 멸망하였다.
동고트족은 5세기 경, 훈족(흉노족)에 밀려 서고트족을 따라 이탈리아로 이동했다.
동로마 제국(Eastern Roman Empire, 비잔티움 제국 Byzantine Empire, 330 ~ 1453) 황제 제논(Flavius zeno, 재위 474 ~ 491)의 지원을 받은 동고트족의 테오도리쿠스 대왕(Theodoric the Great, 재위 488 ~ 526)은 스위스 왕국 및 발칸 제국의 왕과 함께 488년 이탈리아를 침략하여 493년에 완전히 점령하고 동고트 왕국(Ostrogothic Kingdom, 이탈리아 왕국 Regnum Italiae, 493 ~ 553)을 세웠다.
동고트 왕국은 552년 동로마 제국(Eastern Roman Empire, 비잔티움 제국 Byzantine Empire, 330 ~ 1453)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Justinianus l, 재위 527 ~ 565) 때에 장군 나르세스(Narses, 478~573)에 의해 멸망했다.
732년 프랑크 왕국의 궁재(宮宰, majordomus, 최고 궁정직)로 실세였던 카를 마르텔(Karl Martell, 688 ~ 741)은 우마이야 왕조(Umayyad dynasty, 660 ~ 750 이슬람)의 에스파냐 총독 압두르 라하만(Abdul Rahman Al Ghafiqi , ? ~ 732)의 군대가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하고 피레네 산맥을 넘어 쳐들어 오자 투르 푸아티에 전투(Battle of Tours-Poitier, 732, 파리 남서쪽의 프랑스 중부)에서 승리하여 이슬람의 유럽 진출을 저지하였다.
투르 푸아티에 전투에서 공을 세운 궁재(宮宰) 샤를 마르텔(Charles Martel, Karl Martell, 카를 마르텔)은 영토를 더욱 확장했다.
그리고 그를 이어 궁재(宮宰)였던 그의 둘째 아들이 751년 로마총대주교(교황) 자카리아스(Zacharias PP, 재위 741 ~752)의 인정(실권을 가진 자가 왕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물음에)을 받아 반란을 일으켜 메로빙거 왕 켈데리크 3세(Childeric III, 힐데리히 3세, 재위 743 ~ 751)를 폐위시키고 피핀 3세(피피누스 3세 브레비스, Pippinus III Brevis, 재위 751 ~ 768)로 프랑크 왕국의 왕위에 올라 카롤링거 왕조(Carolingian dynasty, 751 ~ 987, 제국 800 ~ 888)를 열었다.
로마 총대주교 스테파누스 2세(Stephanus Ⅱ, 교황, 재위 752 ∼ 757)는 롬바르드(Lombards, 랑고바르드족 Langobards, 게르만족)가 753년 로마를 위협하자 프랑스로 가서 피핀 3세에게 ‘콘스탄티누스의 기증(Constitutum Donatio Constantini)’이라는 문서를 제시하면서 롬바르드를 물리쳐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왕위 찬탈로 정당성이 없는 피핀 3세는 세례를 주어 왕위 즉위를 정당화시켜주고 신의 권위까지 부여해준 교황에게 756년롬바르디족을 쫓아내고 그 지역(본디는 동로마 영토)을 교황에게 기증하였다.
콘스탄티누스 기증에는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Constantinus I, 재위306 ~ 337)가 로마 교황 실베스테르 1세(Silvester Ⅰ, 재임 314 ~ 335)에게 교황으로부터 문둥병을 치료받고 세례를 받아그리스도교로 개종한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이탈리아, 기타 서방 여러 지역의 종교상 및 세속적 통치권을 바친다'라고 되어 있었으며 이 문서는 그 후 중세기간 동안 세속의 황제에 대한 기독교의 교황의 우위권을 주장하는 근거로 사용되었으나 1440년 인문주의자 로렌조 발라(Lorenzo Valla, 1406 ~ 1457, 이탈리아 인문학자, 철학자)에 의해 위조임이 증명되었다.
프랑크 왕국 카롤링거 왕조의 2대 왕 샤를마뉴(Charlemagne, 카롤루스 대제, 카롤루스 마그누스, Carolus Magnus, 748 ~ 814, 프랑크왕 재위 768 ~ 814, 대제 재위 800 ~ 814)는 프랑스, 독일, 베네룩스(네덜란드), 이탈리아 등의 기원이 되는 서유럽, 중유럽의 대부분을 영토로 확장하였으며 게르만인들이 신봉하던 아리우스 파(Arianism, 예수를 신성시하지 않음)에서 교황청이 신봉하는 아타나시우스파(Athanasius, 예수를 신성시함, 삼위일체 三位一體 Trinity 주장)로 개종하였다.
프랑크의 샤를마뉴(카롤루스 대제, Carolus Magnus, 재위 800 ~ 814)는 773년 알프스를 넘어 774년 교황청을 위협하는
이탈리아 북부의 랑고바르드 왕국(Regnum Langobardorum, 568 ~ 774, 게르만족인 롬바르드족이 세움, 740년경에는 이탈리아 반도에서 로마공국을 제외한 대부분을 차지함)을 멸망시켜 교황청에 넘겨주는 등 교황청을 수호한 대가로 교황 레오 3세(Papa Leone III, 제96대 교황 재위 795 ~ 816)로부터 서로마 제국 계승국으로 공인받아 800년 로마 황제(Emperor of the Romans, 신성 로마 제국, 카롤링거 제국 800 ~ 888 황제)에 올랐다. 교황 레오 3세(Papa Leone III, 제96대 교황 재위 795 ~ 816)는 동로마 제국의 태후 이리니(Irene of Athens, 레온 4세의 황후)가 기독교회에서 여자가 황제가 될 수 없다는 법을 어기고 아들인 콘스탄티노스 6세(재위 780 ~797)를 폐위시키고 황제(재위 797 ~ 802)에 오르자 이 기회를 이용하여 샤를마뉴를 황제로 봉하였던 것이다.
동로마 제국은 샤를마뉴(카롤루스 1세)의 로마 황제 즉위에 불만을 품고 항의하였다.
이 문제는후에 즉위한 동로마 제국의 황제 미하일 1세 랑가베(재위 811 ~ 813)가 812년 카롤루스 1세를 로마 황제가 아니라 단순한프랑코 황제로 인정하여 유럽에 두 명의 황제가 있게 되었다. 이것을니키포로스의 평화(Pax Nicephori)라고 부른다.
경건왕루도비쿠스 1세 피우스(Ludovicus I Pius, 로마 제국 황제 재위 814 ~ 840, 카롤루스 마그누스의 여섯째 아들)가 사망한 뒤 장남 로타리우스 1세(Lothair I)가 동생들에게 841년퐁트누아 전투(Battle of Fontenoy, 오세르 근처)에서 패배함에 따라 3명의 아들이 베르됭 조약(Treaty of Verdun, 843)을 맺어 동프랑크(셋째 루트비히 2세, Ludwig II, 843 ~ 876, 라인강 동쪽, 독일), 중프랑크(장남로타리우스 1세, Lothaire, Lothair I, 로테르 1세, 중프랑크국왕, 재위843 ~ 855, 로마 황제 재위 817 ~ 855, 로트링겐, 부르군트, 북이탈리아, 이탈리아), 서프랑크(막내 대머리왕 카를 2세, Carolus II Calvus, 서프랑크 왕 843 ~ 877, 로마 황제 재위 875 ~ 877, 론강 서쪽, 프랑스)로 분열되었고 이어 870년 동프랑크 왕국의루트비히 2세(Ludwig II, 재위 843 ~ 876)와서프랑크 왕국의카를 2세(Carolus II Calvus, 재위 843 ~ 877, 로마 황제 재위 875 ~ 877)가 메르센조약(Treaty of Mersen, 870)을 맺고 동프랑크와 서프랑크로 재편되었다(둘째 피핀은 일찍이 사망).
중프랑크는 경건왕루도비쿠스 1세의 장남이었던 로타리우스 1세(Lothaire, Lothair I, 로테르 1세, 중프랑크 국왕, 재위843 ~ 855, 로마 황제 재위 817 ~ 855)의 나라였다.
로마 제국의황제인 로타리우스 1세(Lothaire, Lothair I, 로테르 1세, 중프랑크국왕, 재위843 ~ 855, 로마 황제 재위 817 ~ 855)가 로타링기아를비롯한 유럽 중부,이탈리아북부 등(현재 독일 서부, 프랑스 동부, 베네룩스 3국, 스위스,이탈리아북부 등)의 영토를 차지하고세운 중프랑크 왕국(regnum Francia media)은 동프랑크 왕국과서프랑크 왕국을 명목상으로 지배했으나 이질적인 민족들이라 결속력이 약했다. 중프랑크는 루이 2세(Louis II, 로마 황제 및 이탈리아 왕, 재위 844 ~ 875, 855년까지 로테르 1세와 공동)때인 870년 메르센조약(Treaty of Mersen, 870)으로 이탈리아만 남았으나 이마저도 황제위와 함께 875년 서프랑크의 대머리왕 카를 2세(Carolus II Calvus, 서프랑크 왕 재위 843 ~ 877, 로마 제국 황제 및 이탈리아 왕 재위 875 ~ 877)에게 넘어갔다.
동프랑크 왕 카롤루스 3세 크라수스(Carolus III Crasus, Charles III le Gros, Charles the Fat, Karl der Dicke, 839 ~ 888, 서프랑크 왕 재위 884 ~ 887, 신성 로마 황제 재위 881 ~ 887)가 884년에는 서프랑크의 왕(서프랑크에 왕이 2명이 됨)이 되어 카를 대제 이후 프랑크 왕국을 일시적으로 재통일하였지만 조카 아르눌프스(Arnulf, Arnulphus Carintiae, 동프랑크 왕 재위 887 ~ 899, 서로마 황제 재위 896 ~ 899)의 쿠데타로 폐위되면서 카롤링거 왕조(751 ~ 987)의 황위는 끝이 났다.
카롤루스 3세가 폐위된 후에는카롤링거 조 출신의 이탈리아 구이도 가문의스폴레토 공작구이도가 구이도 3세 스폴레텐시스(Guido III Spoletensis, 공동 재위 891 ~ 894)로, 그의 아들이 람베르투스 2세 스폴레텐시스(Lambertus II Spoletensis, 공동 재위 891 ~ 898), 동프랑크의 왕아르눌푸스 카린티아이(Arnulphus Carintiae, 재위 896 ~ 899, 카를 대제의 4대손), 보소니드 가문의 루도비쿠스 3세 카에쿠스(Ludovicus III Caecus, 재위 901 ~ 905, 카롤링거 왕조의 외손)가 황제로 즉위했으며 카롤링거 조의 마지막 황제는 베렌가리우스 1세 포로이울리엔시스(Berengarius I Foroiuliensis,재위 915 ~ 924)로 암살되어 황제위의 대가 끊겼다.
서프랑크 왕위는 카롤루스 3세(Carolus III Crasus, Charles III le Gros, 서프랑크왕 재위 884 ~ 887, 황제 재위 881 ~ 887), 오도(Eudes, 서프랑크왕 재위 888 ~ 898), 카를로스 3세(샤를 3세(Charles III, 서프랑크왕 재위 898 ~ 922), 로베르 1세(Robert I, 서프랑크왕 재위 922 ~ 923), 루돌프(Rodolphe, 서프랑크왕 재위 923 ~ 936), 루이 4세(Louis IV, 서프랑크왕 재위 936 ~ 954), 로테르(Lothaire, 로타르 Lothar, 서프랑크왕 재위 954 ~ 986), 루이 5세(Louis V, 서프랑크왕 재위 986 ~ 987)로 카롤링거 왕조가 이어졌다.
서프랑크의 카롤링거 왕조(751 ~ 987) 왕위는 루이 5세가 후계자없이 낙마로 죽음으로서 끝이 났다.
987년 프랑크 백작 위그(898 ~ 956)의 아들인 위그 카페(Hugues Capet, 재위 987 ~ 996)가 귀족들의 추대를 받아 왕이 되고 다시 통일하여 프랑스 왕국(Royaume de France, 987 ~ 1792, 카페 왕조 987 ~ 1328)을 세웠다.
북유럽의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살던 노르만족은 8세기말~11세기 초에 농토가 메마르고 협소하며 기후가 한랭한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온난하고 비옥한 땅을 얻기 위하여 민족 대이동을 감행하여 러시아, 영국, 프랑스를 침략하고 에스파냐와 북아프리카까지 진출하였다. 뛰어난 항해술을 가진 이들 바이킹(Viking)은 여러 지역을 탐험하고 이민족과 용감히 싸워 정복하였으며 교역도 하였다.
845년 덴마크 바이킹(노르만인)이 프랑스(서프랑크)를 침입하자, 프랑크 왕 샤를 3세(Charles III the simple, 879, 898 ~ 929)는 911년 롤로(Rollo, 공구 흐롤프, Gǫngu Hrólfr, 860? ~ 932?, 노르웨이 바이킹의 한 수령, 초대 노르망디공, 재위 911 ~ 927)에게 회유책으로 사위로 삼고 센 강(la Seine) 하류 지대를 양여하여 노르망디 공작(公爵, Duke)에 봉(封)하였다.
그래서 노르만인들은 프랑스 내에 실질적 독립국가인 노르망디 공국(Duchy of Normandy, 公國, 공작 公爵이 다스리는 제후국)을 세웠다. 그 후 1066년 노르망디 공(公)인 윌리엄 1세(William I, 잉글랜드 왕 재위 1066 ~ 1087)는 영국을 정복하여 영국의 노르만 왕조(Norman dynasty, 1066 ~ 1154)를 열었다. 그 결과 프랑스의 노르망디는 영국 영토가 되었다.
영국왕 헨리 1세(Henry I, 재위 1100 ~ 1135)의 딸 마틸다(Empress Matilda, Empress Maude, 마틸다 황후, 1102 ~ 1167)는 프랑스 앙주 백작 조르푸아(제프리) 5세(Geoffrey V of Anjou, 1113 ~ 1151)와 결혼하여 노르망디 공작 헨리 플랜태저넷(헨리 2세, 1133 ~ 1189)을 낳았다.
노르망디 공작 헨리 플랜태저넷(헨리 2세, 1133 ~ 1189)은 프랑스의 루이 7세(Louis VII, Louis le Jeune, 재위 1137 ~ 1180)에게 간통 문제로 이혼당한 11년 연상의 전 왕비 엘레오노르(Aliénor d'Aquitaine, 알리에노르 다키텐, 1122 ~ 1204, 아키텐 공작 기욤 10세의 상속녀)의 구애를 받아 1152년에 결혼하였다.
엘레오노르는 부(父)로부터 프랑스의 아키텐, 푸아투, 기엔, 가스코뉴를 상속받아 지배하고 있었다.
그리고 노르망디 공작 헨리 플랜태저넷은 프랑스 왕 루이 7세(Louis VII, Louis le Jeune, 재위 1137 ~ 1180)와 싸워서 브르타뉴를 빼앗아 프랑스 국토의 서반부를 탈취하였다. 이때 헨리 플랜태저넷 부부는 루이 7세보다 더 많은 프랑스 영토를 가졌던 것이다.
1152년에 노르망디 공작 헨리 플랜태저넷(마틸다의 아들, 1133 ~ 1189)이 무력으로 영국에 침입하여 영국왕 헨리 2세로 즉위함에 따라 이들 부부의 프랑스 내의 영토는 영국 영토가 되었다.
루이 7세(Louis VII, Louis le Jeune, 재위 1137 ~ 1180)의 아들인 필리프 2세(Philip II, 재위 1180 ∼ 1223)는 15살에 단독왕으로 즉위하여 섭정기를 지난 후 정략적인 술수로 강력한 왕권을 확립하였으며 국가체제를 정비하여 프랑스의 국력을 신장시켰다.
현실주의자였던 프랑스 왕 필리프 2세(Philip II, 재위 1180 ∼ 1223)는 제3차 십자군 원정(1189 ~ 1192)에 참가했으나 십자군에 대한 열정이 약해 동행한 영국왕 리처드 1세(Richard I,재위 1189 ~ 1199)와 대립하였으며 1191년아크레를 함락시키자마자 병에 걸렸다는 이유로 홀로 프랑스로 철군하였다.
필리프 2세(Philip II, 재위 1180 ∼ 1223)는 영국 존왕(John, 1166 ~1216, 재위 1199 ~ 1216) 때인 1202 ~ 1204년에 루앙(Rouen, 노르망디의 레지옹 Région과 센마리팀 데파르트망 Département의 수도)을 공략하고 프랑스 내 영국의 봉토 중 기옌(Guyenne, 아키텐 Aquitaine)을 제외한 모든 영토를 빼앗았다.
이에1214년존왕이 프랑스에 복수를 하기위해 조직한 잉글랜드, 신성로마제국, 플랑드르, 볼로뉴 연합군을 필리프 2세가프랑스 왕국플랑드르 백작령부빈에서 벌어진 부빈 전투(Battle of Bouvines, 1214)에서 승리하여 카페왕조를 빛나게 하였다.
이어서 1259년 루이 9세(Louis IX, 재위1226 ~ 1270)와 잉글랜드의 헨리 3세 간에 맺은 파리 조약(Traité de Paris, 1259, 카페 왕조와 플랜태저넷 왕조 사이의 100년 갈등을 종식)으로 프랑스 내의 영국 플란타지넷 왕조 영토가 대부분 프랑스령이 되었다(플란타지넷 가문인 영국의 헨리 3세가 프랑스에서는 루이 9세의 신하가 되는 조건으로 가스코뉴 Gascogn와 앙주 Anjou의 일부를 영지로 인정받음).
루이 9세(Louis IX, 재위1226 ~ 1270)는 제7차 십자군 원정(1248 ~ 1254)에 참여하여 이집트를 침공해 들어갔으나 1250년 파리스쿠르 전투(Battle of Fariskur, 1250)에서 맘루크왕조·아이유브왕조 연합군에 패하여 포로로 잡혔다가 맘루크(Mamluk) 왕조에 몸값을 지불하고 석방되었으며 제8차 십자군 원정(1270) 중 튀니스에서 풍토병으로 사망하였다.
루이 9세는십자군 원정과 많은 교회, 수도원, 병원을 건립하고 빈자들을 도우며, 몽골 군주들의 개종을 도모한 기독교인으로 1297년교황 보니파시오 8세(Bonifacius PP. VIII, 제193대교황 재위1294~1303)에 의해 생 루이 드 프랑스(saint Louis de France)라는 이름으로 시성되었다.
중세의 프랑스는 영토도 넓고 대부분의 영토가 기름진 땅이라 경제력도 군사력도 상당하였다.
일찍이 11 ~ 14세기에는 프랑스의 상파뉴(Champagne)와 플랑드르(Flandre, 현재는 벨기에)가 이 지역 해상 무역의 중심지였다. 북유럽과 러시아,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 독일의 함부르크 등과 남쪽으로는 이탈리아에 이르는 지역과 무역을 하였다. 그러나 15세기에 이르러 프랑스가 이 지역에 세금을 높이고 간섭하여 무역이 자유롭지 못함에 따라 중계 무역이 암스테르담, 함부르크 등의 유럽 북부로 옮겨 가게 되었던 것이다.
1297 ~ 1302년 필리프 4세(Philippe IV, 재위 1285 ~ 1314)는 가스코뉴, 플랑드르 공국이 영국으로 기울어지는 것을 막기 위하여 이들과의 전쟁에 필요한 전비와 영국의 에드워드 1세(Edward I, 재위1272 ~ 1307)와의 전쟁에 필요한 전비를 확보하기 위해 1296년 성직자에게 과세를 하였다.
교황 보니파시오 8세(Benedetto Caetani Bonifacius Ⅷ, 재위 1294 ~ 1303)가 과세를 반대함에 따라 프랑스와 교황청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자 필리프 4세는 삼부회(三部會, Estates General)를 소집하여 국민의 지지를 얻었으며 교황이 필리프 4세를 파면할 것이란 소식이 전해지자 군사들을 로마교황청의 별궁이 있는 아나니(Anagni)에 파견하여 로마 교황의 정적과 협력해 별궁을 급습하여 교황을 잡아 파리로 납치하려고 했으나 시민의 봉기로 풀어주었다. 그러나 교황은 분에 못 이겨 한 달 만에 사망했다(Anagni Incident, 아나니 사건, 1303).
다음 교황은 로마에서 필리프 4세와 가까운 교황 베네딕토 11세(제194대 교황, 1240 ~ 1304)가 선출되었으나 8개월 만에 사망했다.
그 후 1년의 난항(難航) 끝에 가까스로 1305년 프랑스 출신인 제195대 교황 클레멘스 5세(Clemens V, 재위 1305 ~ 1314)가 선출되었다.
그런데 프랑스에 있던 클레멘스 5세는 로마의 혼란으로 로마 교황청으로 가지 못하고 프랑스의 리옹에서 즉위식을 하고 프랑스 내 교황청 소속의 푸아티에(Poitiers)에 머물렀으며 곧 모국인 프랑스인으로 9명의 추기경들을 서임하였다.
1307년 필리프 4세는 십자군전쟁에 선봉에 섰던 성전 기사단 수백 명을 체포하고 기사단을 해체하였다. 이때 성전 기사단은 하사 받은 재산이 어마어마하게 많아 큰 세력을 형성하여 필리프 4세의 왕권 확립에 걸림돌이 되고 있었다. 필리프 4세는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여 국가 재정에 충당하고 왕권을 강화하려고 했다. 이에 클레멘스 5세(Clemens V)는 불만이 있었으나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교황 클레멘스 5세는 프랑스 필리프 4세의 압력으로 로마로 가지 못하고 프랑스 푸아티에(Poitiers)에 4년 머물렀다가 1309년 교황청을 프랑스 아비뇽 근처인 시칠리아 왕국(Kingdom of Sicilia)의 브나스크 백작령(Comtat Venaissin)으로 옮겼으며 그 후 교황청은 그곳에서 약 70년간 머물게 되었다(아비뇽 유수 幽囚 잡아 가둠, Avignonese Captivity).
1328년 프랑스 카페 왕조(dynastie des Capétiens, 987 ∼ 1328)의 샤를 4세(Charles IV, 재위 1322 ~ 1328, 프랑스 카페 왕조 마지막 왕)가 남자 후계자가 없이 사망하고 4촌인 발루아가(家, La maison de Valois)의 필리프 6세(Philippe VI, 재위 1328 ~ 1350, 발루아 왕조 초대 왕)가 왕위에 올랐다.
필리프 6세(Philip VI, 재위 1328 ~ 1350)는 기엔을 비롯한 프랑스 내의 영국령을 몰수하기 위해 프랑스 지역에 미치는 영국의 영향력을 줄이려는 노력을 했다. 이에 영국 왕 에드워드 3세(Edward III, 재위 1327 ∼ 1377)는 이를 막기 위한 협상의 명분으로 그리고 전쟁을 일으킬 명분으로 플랑드르(Flandre, 현 벨기에 지역, 모직물 공업지대)에 양모 수출을 중단하고 그리고 프랑스 왕위(王位) 계승권이 자기에게 있음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영국 왕 에드워드 3세(Edward III, 재위 1327 ∼ 1377)가 플랑드르(Flandre, 현 벨기에 지역, 모직물 공업지대)에 양모 수출을 중단하고 그의 모친이 카페 왕가 출신(샤를 4세의 누이)이라는 이유로 프랑스 왕위(王位)를 계승해야 한다고 주장한 때는 필리프 6세(Philip VI, 재위 1328 ~ 1350)가 왕위에 오르기 전이 아니고 왕위에 오른지 10년이 지난 1337년이었다는 것에서 명분용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때 프랑스 왕가에서는 딸에게는 왕위 계승권이 없었다.
1337년에 프랑스의 필리프 6세(Philip VI, 재위 1328 ~ 1350)가 프랑스 영토 내에 있는 영국 땅을 몰수하고 특히 영국령인 기엔(Guyenne, 포도주 생산지)을 점령하였다.
이에 영국 왕 에드워드 3세(Edward III, 재위 1327 ∼ 1377)가 전쟁을 선포함에 따라 두 나라 간에 백년전쟁(百年戰爭, Hundred Years' War, 1337 ~ 1453, 프랑스 왕위 계승권)이 시작되었다.
영국은 프랑스에 비해 국력이 1/4로 열세였으나 1338년 스코틀랜드 등과의 전투로 경험이 많은 소수의 병력으로 프랑스의 앤트워프(안트베르펀, Antwerpen, 현 벨기에)에 상륙하여 게릴라전(Guerrilla Warfare, 遊擊戰)을 폈다.
영국의 함대는 네덜란드 앞바다에서 벌어진 슬로이스 해전(Battle of Sluis, Battle of l'Écluse, 1340)에서 프랑스 함대를 전멸시켰다.
1346년 소수의 병력으로 프랑스의 노르망디에 침입하였다.
프랑스군은 많은 병력이 있었으나 용병이 15%로 모집에 어려움이 있었으며 더 큰 문제는 전투 경험이 없었다.
영국군은 사거리가 긴 대포와 프랑스의 석궁에 비해 발사 속도가 빠른 장궁(long bow)을 사용하여, 비까지 내린 날씨 덕에 크레시 전투(Battle of Crécy, 1346)에서 승리하였다.
영국군은 이 전투에서 사석포로 리볼데퀸(Ribauldequin, 오르간 건 organ gun, 다발 건)이라고 불리는 대포를 처음 사용하였다.
중국에서 발명된 화약과 화포는 송나라 때 몽고군에 의해 전파되어 유럽 최초로 전쟁에 사용된 것은 이베리아에서 13세기 국토 수복 운동 때 사용된 것으로 보이며 기록으로는 1320년 경에 아라비아에서 대포가 발명되었으며 영국의 백년전쟁 때에 처음 사용되었다.
1356년에는 영국 에드워드 3세의 아들인 흑태자 에드워드(The Black Prince, 1330 ~ 1376, 리처드 2세 아버지)가 푸아티에 전투(Battle of Poitiers, 1356)에서 잉글랜드 군보다 세 배나 많은 프랑스군을 대파하고 프랑스왕 장 2세(John II, 재위 1350 ~ 1364)를 포함한 프랑스군 지휘부를 포로로 잡았다.
이 난국에 프랑스왕 장 2세의 아들인 샤를 왕세자(샤를 5세 Charles V, 1338 ~ 1380, 재위 1364 ~ 1380, 프랑스현명왕)가 어린 나이에 권력에서 밀려나 있었으나 1358년 지방의 군대를 재정비하여 귀족들이 권력을 잡고 있던 파리를 수복하여 통치권을 확립하였다.
프랑스의 샤를 왕세자는 영국에 휴전을 제안하여 브레티니 조약(Traité de Brétigny, 1360)을 맺은 결과 장 2세의 몸값으로 앙주를 영국에 할양(割讓, cession)하고 장 2세를 모셔왔으며 영국은 프랑스 왕위를 포기할 것을 약속했다.
1364년 왕위에 오른 샤를 5세(Charles V, 재위 1364 ~ 1380, 프랑스현명왕)는 전쟁 때만 고용하던 용병을 의회의 의결을 거치지 않고 징수한 조세를 사용하여 상비군으로 전환하였으며 이 상비군을 이용하여 영국군이 대부분 귀국하고 경비병만 남은 앙주를 1380년까지 거의 탈환하였다.
그러나 프랑스의 현명왕 샤를 5세(Charles V, 재위 1364 ~ 1380)는 젊은 나이로 죽고 1380년 친애왕(le Bienaimé),광인왕(le Fol, le Fou)이라고 불리는 샤를 6세(Charles VI,재위 1380~1422)가 즉위하였다.
백년전쟁은 기간이 길었지만 전투는 간간이 일어났으며 영국은 프랑스 내의 우호세력과 신성 로마 제국의 지원을 받았고 프랑스는 스코틀랜드와 동맹을 맺는 등 여러 국가가 양국의 동맹으로 맞섰다.
이 전쟁에서 프랑스는 영국에게 내내 밀렸으나 잔 다르크(Jeanne d’Arc, Jeanne Darc, Joan of Arc, 1412 ~ 1431)가 오를레앙 전투(Siege of Orléans, 오를레앙 공방전, 1429)에서 활약하여 승리를 거두었으며 1453년 장궁을 가진 영국군에 대형 대포로 대항한 카스티용 전투(The Battle of Castillon)에서 영국에 최종 승리하여 프랑스 내에서 영국 세력을 축출하였다.
백년전쟁 결과 프랑스는 프랑스 내의 영국 세력을 축출하는 데에는 성공하였으나 플랑드르에서 양모산업에 종사하던 사람들이 양모재료인 양털산지를 따라 영국으로 이동함에 따라 프랑스의 양모산업이 타격을 받았으며 영국은 자본과 기술의 유입으로 양모산업이 발달되어 부가 축적되었으며 이에 젠트리(gentry, 지주층, 귀족과 요먼의 중간, 부르주아에 해당, 의회발달로 이어짐)가 생겨나게 되었다.
양국 모두 장기간에 걸친 백년전쟁과 내란에 의해서봉건 귀족세력이 약화되고 국왕의 권력이 강화되는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이탈리아 북부는 서로마 제국이 멸망(476)한 뒤 프랑크 제국의 내전으로 맺어진 베르됭 조약(Treaty of Verdun, 843)으로 중프랑크 왕국에 속하였으며 오토 1세가 독일 출신으로 신성 로마 제국 오토 왕조 초대 황제에 오른 962년 이후로 신성로마제국의 통치하에 들어갔으나 11세기 이후 신성로마제국의 권력이 약화되면서 황제와 교황 간의 세력 다툼이 격화되는 중에 각 지방에는 지방영주가 통치하는 도시국가가 출현하였다.
피렌체, 제노바, 밀라노, 베네치아 등은 자치도시(Comune)를 기반으로 비잔틴, 레반트 교역으로 번성하였다.
신성로마 제국의 프리드리히 1세(Friedrich I, 재위 1155 ~ 1190)가 이탈리아 북부를 침입함에 따라 이탈리아 북부에서는 교황의 지원으로 룸바르디아도시동맹(Lega Lombarda, Lombard League)을 맺고 맞서 1176년 레냐노 전투(Battle of Legnano)에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군에 승리하였다
그 결과 베네치아 조약(Treaty of Venice, 1177)을 맺어 알렉산데르 3세(Alexander PP. III, 재위 1159~1181)를 교황으로 인정하고(대립교황 빅토르 3세) 이탈리아 북부도시들은 신성 로마 제국에 잔류하면서 자치권을 얻었다.
15세기 이탈리아는 북부에 여러 자치도시(Comune, 사보이 공국 Duchy of Savoy, 밀라노 공국 Duchy of Milan, 제노바 공화국 Republic of Genova, 피렌체 공화국 Republic of Florence, 베네치아 공화국 Republic of Venice 등), 중부에 교황령, 남부에 나폴리 왕국, 시칠리아 왕국 등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이들 자치도시는 교역으로 부를 쌓았으나 소국으로 나뉘어져 있어 국방력이 약하였으므로 주변의 강국들이 부를 탐하여 침략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1494 ~ 1559년 사이에 8차례의 이탈리아 전쟁(Great Italian Wars, 1494 ~ 1559, 8차)이 일어났다. 이탈리아 도시국가, 교황령, 프랑스, 신성 로마 제국, 스페인, 영국, 스코틀랜드, 오스만투르크 사이에 70년 지속된 이탈리아 전쟁(Great Italian Wars, 1494 ~ 1559)은 1494년,밀라노 공국의 계승권에 나폴리 왕국의 개입으로 일어난 전쟁에 프랑스의 샤를 8세(Charles VIII, 1483 ~ 1498)가 대군을 거느리고 이탈리아에 침입(제1차 이탈리아 전쟁, 1494 ~ 1495)하므로서 시작되었다.
프랑스의 샤를 8세(Charles VIII, 1483 ~ 1498)는 청동 대포로 밀라노, 피렌체의 콘도티에로 군대(Condottiero, 베네치아, 피렌체, 제노바 같은 도시국가들이 외세를 방어하기 위해 고용한 용병)를 격파하고 나폴리를 점령하여 약탈하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오스트리아 대공 막시밀리안 1세(Maximilian I, 1459 ~ 1519)는 1495년 3월 베네치아 동맹(League of Venice, 베네치아, 밀라노, 피렌체, 교황령, 스페인, 신성로마제국)을 맺고 대항했으며 프랑스군은 세미나라 전투(battle of Seminara, 1495.6)에서 나폴리-스페인 동맹군을 완파하였으나 프랑스-나폴리 사이의 육로가 차단되고 협상이 깨어져 육로로 철군하는 중 1495년 포르노보 전투(battle of Fornovo, 1495.7)에서 베네치아 동맹군에 승리하였으나 완전한 승리를 거두지 못한 채 철군하였다.
나폴리에 남겨둔 프랑스군은 제노바령 라팔로 항구에 있던 프랑스 함대가 나포당하여 해로 보급 부족으로 1497년 스페인군에게 항복했다.
신성 로마제국의 막시밀리안 1세(Maximilian I, 1459 ~ 1519)는 스페인과 오스트리아를 연결하기 위해서는 이탈리아 북부가 필요했다.
이때부터 주로 이탈리아를 차지하기 위해 강력해진 프랑스와 대항해로 부국이 된 스페인(에스파냐), 그리고 신성로마제국 등이 이탈리아 등에서 8차례 전쟁을 계속했는데 이를 이탈리아 전쟁(대이탈리아 전쟁, Great Italian Wars,이탈리아 대전쟁, Great Wars of Italy, 1494 ~ 1559)라 한다.
프랑스의 루이 12세(Louis XII, 재위 1498 ~ 1515)는 상비군 제도를 발달시켜 군사력 강국으로 발돋움했다.
강한 군사력을 가진 프랑스는 주변 국가의 영토에 욕심을 가졌다.
루이 12세(Louis XII, 재위 1498 ~ 1515)는 1499년 제2차 이탈리아 전쟁(1499 ~ 1504)을 일으켰다. 프랑스군은 이탈리아에 원정하여 나폴리 왕국(Kingdom of Naples, 1282 ~ 1816)의 지배권을 두고 대립하던 에스파냐 군(페르난도 2세와 이사벨 1세의 공동 왕)과 체리뇰라 전투(Battle of Cerignola, 1503, 이탈리아 남부)에서 강력한 장창병(長槍兵, pikemen)과 중무장한 기병(騎兵, cavalry)을 보유하고도 스페인 군의 아쿼버스(arquebus) 화승총(방아쇠가 없고 심지에 불을 붙여 발포)을 사용한 창과 총(pike and shot) 전술에 패하였다.
이 결과로 장창과 중무장한 기병이 전투를 지배하던 시절이 끝나게 되었다.
제3차 이탈리아 전쟁(1508 ~ 1516)은 캉브레 동맹 전쟁(Guerre de la Ligue de Cambrai)이라고도 하며 이탈리아 북부에서 베네치아의 세력이 확장되자 교황은 1508년 캉브레 동맹(League of Cambrai, 프랑스, 교황령, 스페인, 신성로마제국 등)을 맺어 1509년 아냐델로 전투(Battaglia di Agnadello)에서 베네치아 군대를 격파했으나,파도바 공성전(Assedio di Padova)에서는 베네치아군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혀 점령에 실패하고 물러났다. 그 이후 베네치아는 북이탈리아의 다른 자치도시(Comune)와는 달리 완전히 독립된 자치도시가 되어 베네치아 공화국(Respùblica de Venexia, 697 ~ 1797)으로 유지되었다.
제4차이탈리아 전쟁(1521 ~ 1526)은 루이 12세(Louis XII, 재위 1498 ~ 1515)의 사위로 왕위에 오른 프랑수아 1세(François I, 재위 1515 ~ 1547)가 일으켰다. 프랑수아 1세(François I)는 이탈리아를 원정하여 밀라노를 점령하였으나 1525년 신성 로마 제국(스페인과 오스트리아)의 카를 5세(Karl V, 에스파냐, 시칠리아, 나폴리 왕 재위 1516 ~ 1556, 신성 로마 제국 황제 1519 ~ 1556)와의 파비아 전투(Battle of Pavia, 밀라노 근처)에서 또 스페인의 아쿼버스(arquebus) 화승총을 사용한 창과 총(pike and shot) 전술에 패하여 사로잡히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그리고 전통적인 기사 전술이 화승총 전술에 무너졌을 뿐만 아니라 용맹을 떨치던스위스 용병들의 명성이 무너졌던 것이다.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François I, 재위 1515 ~ 1547)는 밀라노, 플랑드르, 부르고뉴를 모두 포기한다는 마드리드 조약(Treaty of Madrid, 1526년 2월)으로 풀려났다(대신 두 아들을 스페인 궁에 인질로 보냄).
제5차 이탈리아 전쟁(1526 ~ 1530, 코냑 동맹 전쟁)은 이탈리아에서 강력한 세력을 구축한 카를 5세의 세력을 이탈리아 반도에서 몰아내고자 코냑동맹(League of Cognac, 교황령, 프랑스,베네치아 공화국,밀라노 공국,피렌체 공화국, 페라라 등)을 결성하여 벌인 전쟁이다.
1527년 카를 5세(Karl V,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재위 1519 ~ 1558)의 장군 부르봉 공작 샤를 3세(Charles III de Bourbon, 1490 ~ 1527, 프랑스 출신)가 독일 용병(Landsknecht, 란츠크네흐트)을 지휘하여 아우렐리아누스 성(Aurelian Walls)을 공략하던 중에 존경받던 샤를 장군이 전사하자 급료도 못받아 불만에 싸인 독일 용병들이 흥분하여 로마를 약탈(Sacco di Roma 사코 디 로마, 로마 약탈)하였으며 교황 클레멘스 7세(Papa Clemente VII, 제219대 교황 재위 1523 ~ 1534, 메디치 가문 출신)는 베드로 성당(Basilica Vaticana)에서 스위스용병의 호위를 받아 800m 거리의 비밀 통로를 통하여 산탄젤로 성(Castel Sant'Angelo)으로 탈출하엿는데 스위스 용병(Reisläufer, 라이슬로이퍼)으로 조직된 189명의 근위병 중 40여명만이 생존했을 정도로 결사적으로 싸워 교황을 탈출시켰던 것이다.
교황 클레멘스 7세는 피신하여 숨어 지내다가 카를 5세에게 중립을 지킬 것을 약속하고 교황령을 돌려 받았으며 전통에 따라1520년아헨에서대관식을 치른 카를 5세에게 1530년 황제의 관을 쒸워 주었다.
카를 5세는 교황으로부터 황제의 관을 받은 마지막 황제이다.
전쟁 결과 동맹군은 카를 5세에게 패하였다.
1528년 나폴리 공성전(Siege of Naples)에서 패배한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François I, 재위 1515 ~ 1547)는 1529년 평화조약인 '캉브레 조약(treaty of cambrai, 1529)'을 맺어 막대한 돈을 지불하고 인질이 되었던 두 아들이 석방되었다.
그리고 1530년 프랑수아 1세는 신성 로마 제국 카를 5세의 누이동생으로 왕카스티야 왕후아나 1세, 필리프 1세의 딸인 엘레아노르(Éléonore, 포르투갈 마누엘 1세의 왕비 1518 ~ 1521, 프랑수아 1세의 왕비 1530 ~ 1547)와 1530년 결혼하였다.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François I, 재위 1515 ~ 1547)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화려한 문화와 예술을 프랑스에 도입하여 휴머니즘(인문주의)의 발전을 이룩하였다.
제6차 이탈리아 전쟁은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스페인의 왕인 카를 5세사이의 전쟁이었다
1535년, 밀라노 공작프란체스코 스포르차가 후계자 없이 죽자 프랑수아 1세는 밀라노 공위를 주장하며 오스만 제국과 동맹하여 군사를 일으켰다. 여러 곳을 점령했지만 제노바에 막히는 등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교황바오로 3세가 중재한 1538년니스 휴전(Truce of Nice, 프랑스 남동쪽), 1539년 톨레도 조약(treaty of Toledo, 1539, 스페인)으로 전쟁은 끝났다.
제7차 이탈리아 전쟁(1542~1546)은 오스만 제국 군이 1541년 오스트리아를 물리치고 헝가리 부다(Buda) 점령하면서 이어졌다.
이에 신성로마 제국의 카를 5세가 원정을 하였지만 날씨가 나빠 선박 침몰 등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다.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카를 5세를 물리치고 밀라노 공작을 차지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오스만과 동맹을 맺고 1542년 7월 참전하였다.
1543년 6월 오스만 해군 사령관 바르바로사(Barbaros Hayreddin Paşa)는 프랑스 함대와 연합하여 1543년 8월카를 5세의 영지인 니스를 점령하고 성을 오랜 전투 끝에 함락시켰으며 프랑스 사령관 당기앵(d'Enghien) 백작은 1544년 세레솔레 전투(Battle of Ceresole, 이탈리아피에몬테지역)에서 신성로마제국 군대를 격파했지만 카를 5세와잉글랜드의 헨리 8세가 북 프랑스를 침공하여 불로뉴(Boulogne)와 수아송(Soissons)을 점령하자 당기앵(d'Enghien) 백작은 롬바르디아 점령을 포기하고 돌아왔으며 전선은 스페인과 프랑스 국경지역 등으로 변했다.
그러나 전쟁이 강력한 오스만 제국의 공격으로 교착생태가 되자 1544년 크레피 조약(traité de crépy, 1544, 프랑수아 1세의 이탈리아 주장권 포기와 카를 6세의 솜강과 부르고뉴 공국 포기), 영국-프랑스 전쟁을 끝내는 1546년아르드레스 조약(treaty of Ardres, 프랑스 북쪽)으로 전쟁 전의 상태로 되돌려 졌다.
제8차 이탈리아 전쟁(1551 ~ 1559)은 프랑스의 앙리 2세(재위 1547 ∼ 1559)와 신성 로마 제국(스페인과 오스트리아)의 카를 5세(Karl V, Carlos I de España), 그의 아들 필리프 2세(Felipe II, 스페인 왕 재위 1556 ~ 1598) 사이의 전쟁으로 프랑스의 앙리 2세(재위 1547 ∼ 1559)는 생캉탱 전투(Battle of St. Quentin, 1557)에서 패배하였다.
이탈리아 도시국가, 교황령, 프랑스, 신성 로마 제국, 스페인, 영국, 스코틀랜드, 오스만투르크 간에 70년 지속된 이탈리아 전쟁(Great Italian Wars, 1494 ~ 1559, 8차)은 1559년 4월에 체결된 카토 캉브레지 조약(Traités du Cateau Cambrésis)으로 종결되어, 프랑스 왕국은 앙리 2세가 점령한 부르고뉴 지역 일부를 유지하는 대신 밀라노 공국(Duchy of Milan, 1395 ~ 1797, 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디아 지방)을 스페인 펠리페 2세에게 잃었으며 영국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 1558 ~ 1603)에게 지원금을 주고 칼레를 회복하였다. 신성로마 제국(스페인)은 카를 5세 이후 베네치아를 제외한 이탈리아북부의 종주국이 되었다.
구교도 국가인 프랑스에서 프랑수아 1세(François I, 재위 1515 ~ 1547) 때에 종교개혁 사상이 일어났다.
장 칼뱅(Jean Calvin, John Calvin, 1509 ~ 1564, 개혁교회 신학자, 프랑스)은 1528년에 사촌인 피에르 로베르 올리베탕(Pierre Robert Olivétan, 1506 ~ 1538)으로부터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 ~ 1546, 독일의 종교개혁가 비텐베르크 대학 교수)의 종교개혁사상을 접하게 되었다.
1533년 니콜라스 콥(Nicolas Cop, 1501 ~ 1540)은 파리 대학교 학장 취임식에서 기독교 철학, 법과 복음의 관계 등을 들어 로마 가톨릭 교회의 개혁의 필요성에 대한 취임사를 했는데 이 취임사는 칼뱅이 작성한 것으로 사회적으로 큰 파문을 일으켰다.
칼뱅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강조하고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라는 독력 주의(獨力主義, monergism, 개인의 구원은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이 역사하는 것이다)를 강조하고 상공업자들도 직업 소명설로 평등하다고 하는 등의 칼뱅주의를 개창함으로써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 ~ 1546, 독일의 종교개혁가 비텐베르크 대학 교수)와 훌드리히 츠빙글리(Huldrych Zwingli, 1484 ~ 1531 스위스의 종교개혁가)가 시작한 종교 개혁을 완성시켰다.
루터파는 자기를 신의 용기(容器)로 보는 수동적인 경건(敬虔, godliness, 공경하는 자세로 삼가고 조심함)에 비해 칼뱅 파는 자기를 신의 영광을 위한 도구로 보는 활동 주의적 경향을 가졌고 사회생활에서도 적극적인 태도를 나타낸다.
칼뱅은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François Ier,1494 ~1547)의 박해를 피해(1533) 스위스로 피신하여 활동했으며 칼뱅 사상은 스위스, 독일, 네덜란드 등 유럽 각지로 전파되어 각 국가의 개혁파, 프랑스의 위그노파, 스코틀랜드의 장로파, 잉글랜드의 퓨리턴(furitan, 청교도)을 탄생시켰다.
구교도 국가인 프랑스에서는 칼뱅파의 개신교(신교, 프로테스탄트, Protestant, 16세기 종교개혁으로 로마 가톨릭에서 분리되어 나온 교파의 총칭)의 세력이 성장함에 따라 앙리 2세(Henri II, 재위 1547 ∼ 1559)는 위그노(Huguenot, 프랑스 남부의 신교도)라고 불리던 칼뱅파 개신교 세력에 대해 철저한 탄압 정책을 실시했다.
샤를 9세(Charles IX, 재위 1560 ~ 1574) 때에 시작된 위그노 전쟁(Huguenots Wars, 1562 ~ 1598, 구교와 신교 간의 갈등에 의한 내전, 프랑스 남부의 신교도를 위그노라고 함)에서 앙리 3세(재위 1574 ~ 1589)가 암살을 당하고 후손이 없어 발루아 왕조(Valois dynasty, 1328 ~ 1589)가 끝났다.
이어 개신교도인 나바르 왕국(Royaume de Navarre, 824 ~ 1841, 스페인 지방)의 앙리 드 나바르(Henri de Navarre, 엔리케 3세, 나바르 왕 1572 ~ 1610)는 1589년 프랑스의 앙리 4세(Henri IV, 재위 1589 ∼ 1610)로 즉위하여 부르봉 왕조(House of Bourbon, 1589 ~ 1792, 1815 ~ 1848)를 열었다.
앙리 4세(Henri IV, 재위 1589 ∼ 1610)는 1590년에는 구교도인 파리의 신성동맹(Holy League, La Sainte Ligue, Ligue catholique 가톨릭 동맹)과 그들을 지원하는 에스파냐 군에 대승을 거두었으나 1593년 프랑스 왕위를 유지하기 위해 구교도로 개종하였다.
앙리 4세(Henri IV, 재위 1589 ∼ 1610)는 구교도에 의한 개신교도의 학살로 일어난 위그노 전쟁(Huguenots Wars,1562 ∼1598)을 종식시키고 1598년에 개신교를 허용하는 낭트칙령(Édit de Nantes)을 발표하여 국내 통합을 이루고 상비군을 양성하여 국력을 키워 나갔다.
루이 13세(Louis XIII, 공정 왕 le Juste, 재위 1610 ~ 1643)는 앙리 4세가 1610년 가톨릭 광신도에 의해 살해되어 8세에 즉위하였으므로 모후인 마리 드 메디시스(Marie de Médicis, 1600 ~ 1610, 앙리 4세 왕비, 토스카나 공작 프란체스코 데 메디치 1세의 딸)가 섭정을 하였다.
1617년 16살의 루이 13세는 강력했던 모후를 블루아 성으로 추방하고 섭정에서 벋어났다.
1618년에 독일을 무대로 신교(프로테스탄트, protestant, 개신교)와 구교(가톨릭) 간에 30년 전쟁(Thirty Years' War, 1618 ∼ 1648, 신구교 간 종교 전쟁)이 일어나자 구교도 국가인 프랑스의 루이 13세(Louis XIII, 공정 왕 le Juste, 재위 1610 ~ 1643)는 최강국인 스페인을 견제하기 위해 덴마크와 스웨덴과 함께 개신교를 지원하여 스페인(펠리페 4세, Felipe IV, 스페인 왕 재위 1621 ~ 1665, 포르투갈 왕 재위 1621 ~ 1640), 오스트리아 등과 전쟁을 치러 승리하였다.
이렇게 승리한 30년전쟁은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Peace of Westphalia, Westfälischer Friede, 1648)을 맺고 끝이 났으나 프랑스는 1635년에 시작된 프랑스-스페인 전쟁(30년 전쟁 중에 발생된 프랑스-스페인 전쟁, 1635 ~ 1659)에서 1659년 승리하여 스페인과 피레네 조약(Treaty of the Pyrenees, 1659)을 체결하고 루시옹(Roussillon)과 아르투아(artois) 등 스페인령 네덜란드 영토를 획득했다.
피레네 조약(Treaty of the Pyrenees, 1659)은 프랑스의 루이 14세(Louis XIV, 재위 1643 ~ 1715)의 재상이었던 쥘 마자랭 추기경(Jules Raymond Mazarin, cardinal-duc de Rethel et de Mayenne et de Nevers, 1602 ~ 1661)과 스페인의 펠리페4세(FelipeIV, 재위 1621 ~ 1665, 포르투갈의 왕 재위 1621 ~1640)의 루이스 멘데스 데 하로(Luis Méndez de Haro, 1598 ~ 1661, 귀족, 정치가)가 프랑스와 스페인 국경의 비다소아강 서쪽 끝부분에 있는 하중도(河中島, river island, 강 속의 섬)인 꿩섬(Pheasant Island, 페상섬)에서 회담하여 체결되었고 회담 체결 내용 중에 양국은 6개월씩 번갈아가며 무인도인 꿩섬(Pheasant Island)을 관리하기로 하였으며 지금도 그 방식대로 관리하고 있다.
루이 14세(Louis XIV, 재위 1643 ~ 1715, 태양왕 Le Roi Soleil)가 30년 전쟁에 승리함으로써 프랑스는 독일 지역에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였으며 유럽에서 최강의 대국으로 부상하였다.
루이 14세(Louis XIV, 재위 1643 ~ 1715, 태양왕 Le Roi Soleil)가 5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으므로 모후인 안 도트리슈(Anne d'Autriche, 1601 ~ 1666, 루이 13세의 왕비, 스페인 왕 펠리페 3세의 공주)와 재상인 마자랭(Jules Raymond Mazarin, 쥘 레몽 마자랭, 1602 ~ 1661, 이탈리아 출신 프랑스의 추기경)이가 1661년까지 섭정을 하였다.
이때에 과도한 세금과 마자랭의 통치에 반발하여 고등법원 귀족과 귀족들이 선동하여 2번의 프롱드의 난(La Fronde, 돌팔매 기구, 1649, 1650)을 일으켰다. 난을 피해 모후와 같이 파리를 탈출해야 했던 악몽 같은 경험을 가진 루이 14세는 그 후 친정을 하게 되자 귀족의 자격을 심사하는 제도를 만들어 심사하고 귀족을 베르사유 궁전에 거주하게 하여 귀족의 권력을 서서히 약화시키면서 왕권을 강화했던 것이다.
루이 14세는 마자랭의 추천을 받아 장바티스트 콜베르(Jean-Baptiste Colbert, 1619 ~ 1683, 상인 출신 회계 전문가, 중상주의 정치가)를 재무부 장관(1665 ~ 1683)으로 등용하였다.
콜베르는 국가 재정에 회계를 도입하였고 다르타냥(Charles de Batz-Castelmore D'Artagnan, 1611 ~ 1673) 백작으로 하여금 국고를 축내는 관리를 발본색원(拔本塞源)케하여 국가 재정을 흑자로 전환시켰으며 국내의 산업을 일으켜 보호하고 수출을 장려하면서 수입을 제한하는 중상주의 정책을 펴 프랑스의 경제력을 축척하였다.
그러나 콜베르가 죽고 국가 재정에 대한 간섭이 없어지자 루이 14세는 전쟁, 사치, 향락 등에 국가 재정을 방만하게 사용하였다.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 divine right of kings) 주장으로 유명한 루이 14세(Louis XIV, 재위 1643 ~ 1715)는 과도한 세금 등으로 시민들이 난을 일으킬 것을 염려한 나머지 시민의 난에 대처하기 위해 파리에서 멀리 떨어진(17km) 베르사유에 착공한 베르사유 궁전을 1682년 완공하였으며 1680년대에 위그노를 탄압하였고 1685년에 '퐁텐블로 칙령(Edict of Fontainebleau, 1685)'으로 신교의 자유를 약속한 앙리 4세의 낭트 칙령(Edict of Nantes, 1598)을 폐지했다. 이에 20만 명 이상의 신교도 상공인과 기술자들이 프로이센, 네덜란드 등의 해외로 탈출함에 따라 공장제 수공업과 무역 회사가 무너져 경제가 침체되었다.
루이 14세(Louis XIV, 재위 1643 ~ 1715)는 절대 전제군주였으며 대외적으로도 팽창정책을 펴 전쟁을 일으켰으며 특히 쇠퇴해 가는 스페인과 여러 번 전쟁을 하였다.
루이 14세(Louis XIV, 재위 1643 ~ 1715)의 왕비인 마리아 테레사가 스페인 왕 카를로스 2세(Carlos II, 재위 1665 ~ 1700)의 이복 누나여서 루이 14세는 카를로스 2세의 매형이었지만 스페인을 지속적으로 침략했다.
루이 14 세는 네덜란드의 플랑드르를 프랑스 영토라고 주장하고 침입하여(귀속 전쟁 War of Devolution, 1667 ~ 1668) 스페인령 네덜란드(베네룩스 3국에 있던 스페인의 영토)와 프랑슈콩테(Franche-Comté, 프랑스 동부)의 상당 부분을 점령했다. 이에 네덜란드는 프랑스와의 동맹을 파기하고 잉글랜드-스웨덴과 함께 삼중동맹을 맺는 등으로 대항했다.
프랑스는 스페인과 엑스라샤펠 조약(Treaty of Aix-la-Chapelle, 1668)을 맺어 귀속 전쟁(War of Devolution, 양도 전쟁)을 끝냈으며 이 조약으로 프랑스는 플랑드르의 캉브레(Cambrai),에어 쉬르 라 리스(Aire-sur-la-Lys), 생오메르(Saint-Omer), 프랑슈콩테(Franche-Comté)를 스페인에 돌려주고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플랑드르 일부(Armentières, Bergues 등)를 할양받았다.
1678년 루이 14세는 네덜란드를 침입하여 네이메헨 조약(Treaties of Nijmegen, 1678 ~1679)을 맺고 프랑슈콩테(Franche-Comté), 생오메르(Saint-Omer)와 아르투아(Artois)의 나머지 부분을 할양받았다.
오스만제국 메흐메트 4세(Meḥmed-i rābi,1642 ~ 1693) 때의 실권자였던 메르치폰루 카라 무스타파 파샤(Merzifonlu Kara Mustafa Paşa, 1634 ~ 1683, 재상)가 오스만 제국을 부흥시키기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 오스트리아를 침략하였지만 1683년 제2차 빈 공방전(The Second Siege of Vienna)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신성 로마 제국의 크리스트교 연합군에 패하여 소피아까지 밀리자 프랑스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프랑스 루이 14세(Louis XIV, 재위 1643 ~ 1715)는 오스트리아가 오스만 제국의 영토를 점령하여 강성해지는 것을 볼 수 없어 오스만 제국이 이교도인 이슬람이지만 돕기로 했다.
프랑스는 오스만 제국을 도울 핑계를 찾다가 후계자가 없는 팔츠 공국(Pfalz, 독일 서남부 라인란트팔츠 주 남부의 지방, 신성로마제국 연방, 팔츠 공국의 후계자가 없었음)을 침략하여 영토를 넓히려고 하였다.
이에 전 유럽은 대동맹(大同盟, Grand Alliance)을 맺어 프랑스에 대항했다. 이를 9년 전쟁(팔츠 계승 전쟁, War of the Palatine Succession, 윌리엄 왕 전쟁, King William's War, 아우크스부르크 동맹전쟁, War of the League of Augsburg, War of the Grand Alliance, 1688 ∼ 1697)이라 하며 유럽 본토뿐만 아니라 아일랜드와 북아메리카에서도 전투가 일어났다.
아우크스부르크 동맹(League of Augsburg, 대對 프랑스 연합)은 잉글랜드 왕-네덜란드 총독 윌리엄 3세, 신성로마제국 황제 레오폴트 1세(Leopold I, 재위 1658 ~ 1705), 스페인의 카를로스 2세(Carlos II, 재위 1665 ~ 1700), 사보이아 공국(Ducato di Savoia, 1416년 공국, 1860년 프랑스에 합병, 이탈리아 북부와 프랑스, 스위스의 영토 일부, 신성로마제국 연방)의 비토리오 아마데오 1세(Vittorio Amedeo I di Savoia, 1587 ~ 1637)가 이끌었다.
팔츠 계승 전쟁이라고 부르는 것은 1692년 프랑스 루이 14세가 팔츠(Pfalz, 독일 서남부 라인란트팔츠 주 남부의 지방, 신성로마제국 연방, 팔츠 공국의 후계자가 없었음) 령(領)의 할양을 요구하고 침입하였기 때문이다.
1697년 9년 전쟁(1688 ~ 1697)의 결과 리스위크 조약(Treaty of Ryswick, 네덜란드)을 맺었다.
조약에 따라 프랑스는 스페인으로부터 아이티(생토밍그, 산토도밍고, Santo Domingo, 히스파니올라 섬의 서쪽 1/3)를 프랑스령으로 인정받았으며 스페인은 프랑스로부터 카탈루냐(Cataluña, 스페인 북동부 지방)와 룩셈부르크(Luxembourg, Grand Duchy of Luxembourg, 963 ~ ) 등을 복구하였고 신성로마제국은 프랑스령의 로렌 공국(Duchy of Lorraine, 959 ~ 1766)을 반환받았다. 잉글랜드의 윌리엄 3세는 잉글랜드 왕위를 인정받았고 스웨덴은 팔츠 츠바이브뤼켄 공국(Pfalz Zweibrücken, 신성 로마 제국 연방)을 프랑스로부터 주권을 탈환했다.
루이 14세(Louis XIV, 재위 1643 ~ 1715)는 스페인에 왕위 계승자가 없어 왕위 계승을 기대하며 빼앗은 영토 일부를 스페인에 돌려주기도 하였다(루이 14세의 왕비가 스페인 펠리페 4세의 딸 마리아 테레사 María Teresa, 1638 ~ 1683 임).
스페인의 카를로스 2세(Carlos II, 재위 1665 ~ 1700)는 후사가 없었으며 스페인 왕위를 계승할 수 있는 후보는 합스부르크 왕조의 독일 황제 레오폴 1세(Léopold Ier, empereur d'Allemagne, 1640 ~ 1705)의 외손자 호세 페르난도와 오스트리아 황제 레오폴트 1세(Leopold I, 재위 1658 ~ 1705)의 차남인 카를로스, 그리고 프랑스의 루이 14세의 둘째 손자 필리프(Philip, 1724 ~ 1746)였으며 이 중 호세 페르난도를 후계자로 지명했으나 1699년에 갑자기 죽었다.
그래서 스페인의 왕 카를로스 2세(Carlos II, 재위 1665 ~ 1700)는 즉위 기간 내내 루이 14세의 공격을 받아 프랑스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오스트리아와 바이에른의 비밀협약(1698, 바이에른의 페르디난트가 스페인, 저지대 국가(벨기에)와 스페인의 아메리카 식민지를 받고, 앙주 공 필리프(Philippe de Anjou)가 시칠리아와 나폴리를, 카를 대공은 밀라노와 이탈리아의 나머지 영토 및 스페인 북부 기푸스코아를 받기로 함)에 분노해 프랑스의 17살 난 앙주 공 필리프(Philippe de Anjou, 1724 ~ 1746)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했다.
필리프는 프랑스 루이 14세의 둘째 손자로서 조모(루이 14세의 왕비)는 스페인 펠리페 4세의 딸로 카를로스 2세의 누이인 마리아 테레사(María Teresa, 1638 ~ 1683)였다. 앙주 공 필리프를 펠리페 5세로 지명한 것은 마리아 테레사(루이 14세의 왕비)의 아들과 첫째 손자는 일찍 죽고 둘째 손자밖에 없었던 것이다(프랑스의 루이 15세는 증손자, 첫째 손자의 아들). 이러한 배경으로 인하여 필리프(Philip, 1724 ~ 1746)는 1700년 스페인의 카를로스 2세(Carlos II, 재위 1665 ~ 1700, Habsburgo, 합스부르크 왕조)가 1700년 자손 없이 서거하였을 때 펠리페 5세(Philip V, 재위 1700 ~ 1724, 1724 ~ 1746)로 스페인 왕위를 계승하여 스페인 보르봉 왕조(Borbón, 1700 ~ 1808, 1813 ~ 1868, 1874 ~ 1931, 1975 ~ 현재)를 열었다.
스페인-프랑스가 연합하는 거대 제국을 우려했던 유럽의 주변국인 신성 로마 제국과 영국, 네덜란드 등은 펠리페 5세의 왕위 계승권을 부인하고 1701년에 동맹을 맺어 오스트리아 황제 레오폴트 1세(Leopold I, 재위 1658 ~ 1705)의 차남인 카를로스 대공을 스페인 왕으로 추대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카탈루냐 - 아라곤 연합 왕국도 합스부르크 왕가의 카를로스 대공을 지지했다. 이들 양진영 사이에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1701 ~ 1714)이 일어났으며 1707년 버윅 공작을 위시한 스페인-프랑스 군대가 스페인 동부에서 벌어진 알만사 전투(Battle of Almansa)에서 영국, 포르투갈, 네덜란드 연합군에 승리하였지만 그 후 프랑스군의 참패로 1710년에 합스부르크의 카를로스 대공이 마드리드에 입성했다.
그런데 1711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요제프 1세(Kaiser Joseph I, 재위 1705 ~ 1711)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동생인 카를로스 대공이 신성 로마 제국의 카를로스 6세(Kaiser Karl Ⅵ, 재위 1711 ~ 1740)로 즉위하면서 유럽의 세력균형을 위협하는 존재가 펠리페 5세가 아니라 카를로스 6세가 될 수 있었다.
이에 영국과 네덜란드는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에서 펠리페 5세가 프랑스의 왕위 계승을 포기하기를 요구하였으며 펠리페 5세는 이에 응하여 스페인 왕위를 인정받게 되었다. 영국도 앤 여왕(Anne, 재위 1702 ∼ 1714, 부군은 덴마크 조지 왕자, Prince George of Denmark)의 왕위 승계를 인정받았다.
스페인 왕위에 오른 펠리페 5세는 자신의 왕위에 대해 반기를 들었던 국내의 카탈루냐(바르셀로나 백작의카탈루냐 군주국, 1162 ~ 1714) - 아라곤(아라곤 왕국, 1035 ~ 1707)이 연합된 아라곤 연합왕국(Corona d'Aragón, Crown of Aragon, 1162 ~ 1716)에 대해서는 종래의 자치권을 박탈하고 카스티야(Castilla)에 종속시키는 강경책을 실시하였다.
스페인은 아라곤 연합 왕국을 합병하므로서 포르투갈을 제외한 이베리아 반도 전역을 법적으로 통일하였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은 영국, 네덜란드 및 오스트리아 3국이 신대륙의 무역을 확보하려는 전략에서 프랑스와 스페인의 제휴에 반대하여 전쟁을 시작하여 유럽 대륙, 인도, 아메리카 식민지(앤 여왕 전쟁)까지 확대되었으며, 동맹군 측에 유리하게 진전되어 위트레흐트 조약(Treaty of Utrecht, 1713 ∼ 1715)을 맺었다.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영국은 프랑스로부터 허드슨만과 아케디아(Acadia, 미대륙의 동북부 끝) 등 미국 식민지 일부를 할양받았고 스페인으로부터 지브롤터와 미노르카섬(Minorca, 스페인 발레아레스 제도의 한 섬), 그리고 아시엔토(Asiento, 스페인의 아메리카 식민지에 노예 공급권)를 획득하였다. 네덜란드는 상업상 특권을 승인받았고 프로이센은 프랑스로부터 뇌샤텔(Neuchâtel, 현 스위스 서부)과 겔덜랜드(Gelderland, 헬데를란트, 현 네덜란드 중동부)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인정받았다.
그리고 이듬해인 1714년에 라슈타트 조약(treaty of Rastatt)과 바덴 조약(treaty of Baden)으로 스페인은 독일과 오스트리아에게 네덜란드 지역과 이탈리아 내에 있는 소유령들을 잃음으로써 스페인 제국의 영토는 이베리아 반도의 카스티야와 아라곤, 그리고 아메리카 식민지로 축소되었다.
루이 14세를 계승한 증손자 루이 15세(Louis XV, 재위 1715 ~ 1774, 루이 14세의 대세자이면서 루이 15세의 조부인 루이가 1711년에, 부친인 세손 부르고뉴 공작 루이와 형 브르타뉴 공작 루이가 1712년에 홍역으로 사망, 초기 섭정)의 재임기에는 한때 재정을 잘 관리하고 통화 안정, 무역 확대에 힘을 기울여 국력이 회복되었으나, 폴란드 계승 전쟁(1733 ∼1735), 오스트리아 계승 전쟁(1740 ~ 1748), 7년 전쟁(1756 ~ 1763) 등에 참전하여 재정적자가 심화되었다.
7년 전쟁의 일환으로 1763년 프랑스와 영국이 북아메리카를 무대로 벌인 프렌치 인디언 전쟁(French Indian War, 오스트리아가 푸로이센으로부터 슐레지엔 회복을 위해 일으킨 7년 전쟁 1756 ~ 1763의 부분, 푸로이센 영국 대 오스트리아 프랑스 스페인 러시아)에서 프랑스는 영국에 패하여 몬트리올, 퀘벡 등 전 캐나다를 영국에 넘겼으며 그리고 미국의 루이지애나도 미시시피 강을 경계로 동쪽은 영국에, 서쪽은 먼저 발견하였다며 영유권을 주장해 온 스페인에 넘겼다.
인도에서의 프랑스와 영국의 각축전도 7년 전쟁(1756 ~ 1763, 루이 15세 때인 1757년 인도 플라시 전투, Battle of Plassey)과 1760년 완데와시 전투(battle of wandewash)에서 프랑스가 패함으로써 영국이 인도를 독점하게 되었다.
루이 15세(Louis XV, 재위 1715 ~ 1774)는 전후의 재정 적자를 해소하기 위하여 특권층에게도 과세하려다가 파리 고등법원과 충돌하였다.
1765년 프랑스의 그리보발 장군(Jean-Baptiste Vaquette de Gribeauval, 1715 ~ 1789)은 프랑스 육군의 개혁이 단행될 때 완전한 프랑스 포병 시스템을 개발하였다.
그러나 많은 비판에 루이 15세는 그리보발의 혁신적인 포병시스템을 채택하지 않았으며 루이 16세가 그리보발을 등용하여 포병시스템을 혁신시켰다.
대포 포신의 길이, 탄환의 무게, 화약의 분량 등이 조화를 이루도록 표준화하였고, 부속품들을 일정한 규격으로 통일하여 고장이 나면 쉽게 새 부품으로 교환할 수 있게 하였다. 그 결과 대포의 명중률 등 대포의 성능이 크게 향상되었을 뿐만 아니라 포병 운영의 효율성이 높아졌다. 후에 혁명전쟁, 나폴레옹 전쟁에서 프랑스 군대가 강력하게 되는 하나의 원동력이 되었다.
루이 16세(Louis XVI, 재위 1774 ~ 1792)는 루이 13세, 루이 14세, 15세의 재정적자를 이어받았다.
중농주의적 개혁이 진행되어 많은 농민이 토지를 잃고 도시로 몰려들어 빈민이 되었고 농촌은 농민이 줄어들어 농업 생산성이 낮아지니 흉년이 들면 식량 위기로 나라의 민심이 흉악해지곤 했다. 게다가 볼테르, 몽테스키외, 디드로, 루소 등 계몽사상가들의 영향으로 개인적인 이성적 사상과 권리의 욕구가 증대되었고 이에 따라 귀족의 특권과 왕권의 정당성에 의문을 품기 시작하였다.
루이 16세(Louis XVI, 재위 1774 ~ 1792)는 호화로운 궁정 생활과 여러 전쟁으로 막대한 경비를 소비하여 재정 적자가 과중되었다. 특히 영국과의 전쟁에서 여러 번 패했던 프랑스는 그 보복으로 미국 독립 전쟁(미국 독립 혁명, American War of Independence, American Revolutionary War, 1775 ~ 1783)에 참전하여 전쟁비용으로 과다한 지출을 하였던 것이다.
영국과 프랑스는 7년 전쟁(1756 ~ 1763)과 미국독립 전쟁(1775 ~ 1783) 등으로 심각해진 재정난을 탸개하기 위해 1786년 9월 최초의 국가간 자유통상협정인 이든 조약(Eden Treaty, 1786, 영국 협상대표인 William Eden 남작의 이름)을 맺어 관세율을 80 ~ 120%에서 10 ~ 50%로 내리는 등 원칙적인 자유무역을 하기로 한 것이다.
조약의 결과 프랑스는 관세율 인하로 영국의 면직품 등 저가의 공산품이 쏟아져 들어와 프랑스 산업이 몰락하여 파리의 실업률이 50%를 넘었고 무역 수지를 맞추기 위해 농산물 수출이 급증하여 파리의 빵값이 급등하였으며 기대했던 포도주 등의 수출은 크게 늘지 않았다. 프랑스는 경제난이 가중되어 민중의 분노가 쌓이고 쌓여 대혁명으로 이어졌으며 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국민의회는 1793년 이든조약을 폐기하였다.
루이 16세(Louis XVI, 재위 1774 ~ 1792)는 재정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1787년 명사회(名士會, Assemblée des notables, 승려, 귀족, 상층시민으로 구성되는 의회)를 개최하여 증세를 요구했으나 귀족들의 반대로 해결되지 않았고 귀족들은 세금은 전체의 문제이므로 삼부회(三部會, Etats generaux, Estates General, 귀족, 성직자, 평민으로 구성되는 의회)를 열어서 해결하여야 한다고 주장함에 따라 1789년 삼부회를 열었던 것이다.
1789년 세금제도의 불합리에 불만을 품은 프랑스 시민이 일으킨 프랑스혁명(French Revolution, 1789 ~ 1794)이 일어나 1792년 루이 16세는 처형되고 계속되어 로베스피에르 파에 의해 공포정치로 치닫자 1794년 7월 테르미도르 반동(Convention thermidorienne)이 일어나 국민공회가 로베스피에르를 체포, 처형함으로써 공포정치가 끝났다.
1795년 9월 의회에서 선출된 5명의 집정관이 행정부를 구성하는 총재정부(總裁政府, Directoire, 1795 ~ 1799)가 세워졌으나 나폴레옹의 반란으로 1799년 통령정부(統領政府, Consulat, 1799 ~ 1804)가 새로 세워지고 제1 통령이 된 나폴레옹은 전권을 행사하였다.
나폴레옹은 계속된 전쟁의 승리와 경제적 안정으로 국민의 신임을 얻어 1804년 투표로 황제에 올라 나폴레옹 시대(1804 ~ 1815)가 시작되었다.
나폴레옹 1세(Napoléon I, 집정정부 제1집정 1799 ~1804, 황제 재위 1804 ~ 1814, 1815)가 몰락한 후 왕정이 복구되어 부르봉 왕조(1814 ~1830)의 루이 18세(Louis XVIII, 재위 1814 ~ 1824, 루이 16세 동생)가 즉위하여 입헌군주제가 되었으며 이어서 샤를 10세(Charles X, 재위 1824 ~ 1830, 루이 18세 동생)가 즉위하였다.
1830년 샤를 10세의 왕권 강화에 불만인 국민들과 공화당원들의 봉기로 일어난 7월 혁명(Révolution de Juillet, July Revolution, 1830. 7.)으로 샤를 10세가 물러나고 루이 필리프 1세(Louis-Philippe I, 재위 1830 ~ 1848)가 즉위하였다.
1848년 경제가 불안해지자 '1848년 프랑스혁명(Révolution française de 1848)' 또는 '2월 혁명(Révolution de février, 1848. 2.)'이 일어나 군주제가 붕괴되고 프랑스 제2공화국(République française, 1848 ~ 1852)이 되었다.
나폴레옹 3세(Napoleon III, 샤를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Charles Louis Napoléon Bonaparte, 1808 ~ 1873, 대통령 재위 1848 ~ 1852, 황제 재위 1852 ~ 1870)는 1848년 국민투표로 대통령에 선출되었으며 그리고 1852년 국민투표로 신임을 얻어 제2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에 즉위하였다.
나폴레옹 3세는 파리를 현대화시키고 철도, 프랑스 해운업을 성장시켰으며 10년간의 역사 끝에 1869년 수에즈 운하를 개통시켰다.
멕시코가 채무상환을 불이행하자 멕시코 원정을 실시하여 막시밀리아노 1세(Maximiliano I, 재위 1864 ~ 1867)의 왕정을 세웠으나 군부의 반란이 일어났으며 프로이센과의 관계악화로 지원하지 못해 멕시코 왕정은 붕괴되고 1867년 철수하였다.
1866년부터 신흥 강대국으로 부상한 비스마르크의 프로이센과 갈등이 시작되었고 1870년 7월에 프로이센과 보불전쟁(프로이센-프랑스 전쟁, Franco-Prussian War,1870 ~ 1871)이 일어나 나폴레옹 3세는 스당 전투(Battle of Sedan, 1870.9.)에서 대패하였으며 포로로 잡혔다. 그 결과 나폴레옹 3세는 공화주의자들에 의해 폐위당하였고 프랑스는 제3공화정이 되었으며 프로이센은 독일을 통일하여 독일제국(Deutsches Kaiserreich, 1871.1. ~ 1918)이 되었다.
* 봉건 제도(feudalism, 封建制度)
봉건 제도(封建制度, feudalism)의 기원은 중국의 주(周) 나라 무왕(武王)이 서주를 건국한 후 천하를 안정하게 통치하기 위해 신하들의 보좌를 받아 시행한 통치 제도이다. 넓은 영토를 차지한 천자는 자제(子弟)나 가신(家臣)인 제후(諸侯)들에게 지방의 영토를 나눠주어 통치를 하게 하였으며 제후들은 분봉(分封) 받은 영지를 다시 자제, 가신들에게 재분봉하여 통치하게 하였던 것이다.
유럽에서의 봉건제도는 로마의 은대지제(恩貸地制, beneficium, 봉건 군주가 가신(家臣)에게 봉지를 주는 대가로 군역 따위의 봉사 의무를 요구한 제도)와 게르만의 종사제(從士制 comnitatus, 주군에게 충성을 다하고, 주군은 종사에게 무기, 식량 따위를 주는 주종관계 제도)가 그 기원이며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 중세 초기에 건설된 프랑크 제국이 분열되고 외세의 침략으로 혼란해지자 이에 대항하기 위해 왕은 봉신(封臣, vassal, 주군에게 봉사하는 대가로 봉토를 받은 사람)들에게 병역 의무의 대가로 토지의 용익권(用益權, Niessbrauch, 일종의 사용권)을 주면서 시작되어 16세기까지의 1,000년 동안 유럽의 프랑스, 스페인, 영국, 독일, 이탈리아 등에서 시행되었다.
황제나 왕이 주군으로 봉신(封臣, vassal)에게 봉토를 주고, 봉신은 주군에게 봉사하며 군사적 의무를 행한다. 토지를 매개로 하는 이런 주종 관계가 왕을 정점으로 하여 중층적으로 맺어졌다. 그런데 주군과 봉신은 본래 같은 전사로서 평등한 신분에 속하였으며, 따라서 주종 관계 또한 평등한 사람들 사이에 맺은 쌍무적인 계약 관계로 주군은 토지를 주고 봉신은 군사적 의무를 가지는 것으로 중국의 혈연관계와는 구별된다.
봉건제도(封建制度, feudalism)는 농노제(農奴制, Serfdom)로 경영되는 장원 제도이고 장원(莊園, manor)은 자급자족의 농촌공동체이며 봉신은 여러 개의 장원을 소유하기도 하였다.
영농은 장원에 소속된 농노(serf 종복 從僕)로 일부 직영하지만, 대부분의 농노(Villein 토지에 종속된 소작농 peasant 전호)는 영주로부터 토지를 지급받아 영농하여 생활하는 대가로 주 2~3일을 주군의 영농에 봉사하였고 각종 세금을 납부하였으며 자유로이 장원을 벋어날 수 없었지만 자기 집을 가지고 결혼하여 개별생활을 하였다.
봉신들은 토지에서 나오는 재산으로 자신과 병사(기사, 騎士, knight)들을 무장시키고 왕이 소집할 경우 전쟁에 참여했다.
봉토는 원칙적으로는 봉신의 죽음과 함께 다시 왕에게로 귀속되었다.
장원의 영지는 종복(從僕, serf)이나 농노의 부역을 이용하여 영주(領主, feudal lord)가 직접 경영하는 직영지(直營地), 농노(Villein, 소작농 peasant)에게 대여하여 조공을 받는 탁영지(託營地), 삼림, 목장, 호소(湖沼) 등의 공유지(共有地)로 구성되었다.
장원의 농경지는 삼포식농업(三圃式農業, three course ratation, three-field system)으로 춘경지, 추경지, 휴한지로 나누어 윤작(輪作)을 하였다.
장원에는 제분소, 제빵소, 교회 등이 있었다.
중세 이후 화폐 경제와 상업, 그리고 해외 교역이 발달하자 왕은 조세를 화폐로 쉽게 받아들이게 되었고 이에 현물조세를 담당하던 영주제가 필요없게 됨에 따라 영주들의 경제가 축소되어 토지가 점점 분활되었으며 법학, 관료제의 발전으로 농노들의 토지점유권이 실질적인 재산권으로 변화하였으며 또용병제로 기사의 필요성이 없어짐에 따라 영주들의 세력은 약화되어 봉건제가 무너졌다.
이때 장원에서 상업이나 가내수공업에 종사하던 상공업자들이 도시로 모여 성장한 자유민들과 신흥 지주들이 부르주아(bourgeois, 부르주아지 bourgeoisie, 유산시민 有産市民 , 자본가)가 되어 왕을 섬김에 따라 중앙집권제가 강화되었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Proletarier, 프로레타리아, 무산계급 無産階級, 임금 노동자) 등 도시와 농촌의 하층민들은 의식주에 억매여 살아가고 있었다.
나. 프랑스의 식민지 개척
프랑스는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해양으로 진출하여 부(富)를 쌓는 것을 보고는 해외진출을 시작했다.
프랑수아 1세(François I, 재위 1515 ~ 1547)의 명에 따라 1524년 조반니 다 베라차노(Giovanni da Verrazzano, 1485 ~ 1528, 뉴욕만 발견)의 탐험에 이어 1534 ∼ 1542년에 자크 카르티에(Jacques Cartier, 1491 ~ 1557)가 3번 세인트로렌스 강(Saint Lawrence R., 북아메리카 동부)을 탐사하여 프랑스 식민지인 누벨 프랑스(Nouvelle France, New France, 뉴 프랑스, 미국의 루이지애나와 캐나다 지역)를 개척하였다.
16세기에 들어서자 프랑스는 스페인이 강국으로 변함에 따라 위기감을 느끼고 이에 대응하기 위해 국력과 군사력을 키우고 영국과 네덜란드와 동맹을 맺었다.
프랑스의 앙리 4세(Henri IV, 재위 1589 ∼ 1610)는 위그노 전쟁(Huguenots Wars,1562 ∼ 1598, 신구교 갈등에 의한 내란으로 왕권을 둘러싼 정치투쟁으로 이어짐)을 종식시키고 1598년에 개신교를 허용하는 낭트칙령(Édit de Nantes)을 발표하여 국내 통합을 이루고 상비군을 양성하여 국력을 키워 나갔다.
앙리 4세는 인도 진출을 도모하여 1604년에 동인도 회사를 설립하였지만 성과가 없었다.
앙리 4세는 위그노 전쟁(Huguenots Wars, 종교전쟁, 1562 ~ 1598) 동안 중단되었던 아메리카 탐험을 재개하여 1608년 ‘뉴 프랑스(New France, 누벨 프랑스, Nouvelle-France)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뮈엘 드 샹플랭(Samuel de Champlain 1567 ~ 1635)이 퀘벡(Quebec)을 발견함으로써 이곳이 프랑스 식민지의 주도(主都)가 되었다.
프랑스는 러시아가 시베리아산 모피를 고가에 수출하는 것을 보고 모피를 수집하기 위해 캐나다로 진출하였으며 모피를 유럽으로 대량으로 들여와 수출하자 모피값이 하락하였다.
루이 14세(Louis XIV, 재위 1643 ~ 1715)는 적극적인 식민지 정책을 펴 1664년 장 밥티스트 콜베르(Jean Baptiste Colbert, 1619 ~ 1683)가 기존에 있던 중국 회사, 오리엔트 회사, 마다가스카르 회사를 합병하여 프랑스 동인도회사(French East India Company)로 재편성했으며(루이 14세, 재위 1643 ~ 1715), 1673년 인도의 찬다나가르, 1674년 인도의 폰디세리를 획득했다.
프랑스 서인도 회사(French West India Company)는 1664년 콜베르(Jean-Baptiste Colbert, 1619 ~ 1683)가 설립한 아메리카 대륙 및 아프리카 서해안 제국과의 무역을 위하여 프랑스가 설립한 특허회사였다.
라 살(Rene Robert Cavalier de La Salle, 1643 ~ 1687, 프랑스, 탐험가)은 1669년에 오하이오 강을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라 살은 얼어붙은 일리노이 강을 지나 미시시피강 하구에 도달하였으며 1682년 4월 9일에 발견한 땅을 루이 14세(Louis XIV, 재위 1643 ~ 1715)의 명예를 기려 ‘루이지애나(Louisiana)’라고 명명하고 프랑스 국기를 꽂고 십자가를 세웠다.
콜베르(Jean Baptiste Colbert, 1619 ~ 1683)는 1682년에 루이지애나를 건설하였으며 뉴 프랑스(New France, 누벨 프랑스, Nouvelle France)를 정치적, 경제적으로 본국에 종속시켰다.
1712년의 전성기(위트레흐트 조약 전) 때의 누벨 프랑스(뉴 프랑스) 영토는 뉴펀들랜드 노바스코샤에서 로키 산맥까지 그리고 허드슨만에서 멕시코 만에 이른 미국의 1/2과 캐나다의 대부분의 영토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13년에 걸친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1701 ~ 1714, 스페인 왕위를 프랑스가 계승하는 것을 반대하는 연합국가와의 전쟁) 중에 북미에서는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앤 여왕 전쟁(Queen Anne's War, 1702 ~ 1713)이 일어나 프랑스가 패하였으며 그 결과 1713년 맺어진 위트레흐트 조약(Treaty of Utrecht)과 라슈타트 조약 (Treaty of Rastatt, 1714)으로 프랑스는 허드슨만 해안 일대와 노바스코샤(Nova Scotia, 뉴 스코틀랜드), 뉴펀들랜드 섬을 영국에게 넘겨주었다(루이 14세, 재위 1643 ~ 1715).
루이 15세(Louis XV, 재위 1715 ~ 1774, 루이 14세의 증손자, 초기 섭정) 때인 1763년 프랑스와 영국이 북아메리카를 무대로 벌인 프렌치 인디언 전쟁(French Indian War, 오스트리아가 푸로이센으로부터 슐레지엔 회복을 위해 일으킨 7년 전쟁 1756 ~ 1763의 부분, 푸로이센 영국 대 오스트리아 프랑스 스페인 러시아)에서 프랑스는 영국에 패하여 몬트리올, 퀘벡 등 전 캐나다를 영국에 넘겼으며 그리고 루이지애나도 넘겼는데 미시시피 강을 경계로 동쪽은 영국에, 서쪽은 먼저 발견하였다며 영유권을 주장해 온 스페인에 넘겼다.
인도에서의 프랑스와 영국의 각축전도 7년 전쟁(1756 ~ 1763, 루이 15세 때인 1757년 인도 플라시 전투, Battle of Plassey)과 1760년 완데와시 전투(battle of wandewash)에서 프랑스가 패함으로써 영국이 인도를 독점하게 되었다.
루이 16세(Louis XVI, 재위 1774 ~ 1792) 때에는 루이 14세 때부터 누적된 적자재정이 영국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 독립전쟁(1775 ~ 1783)을 지원함에 따라 재정이 적자로 더욱 악화되었고 이를 해결하고자 증세를 추진하다 프랑스 대혁명(French Revolution, 1789 ~ 1794)이 일어났던 것이다.
프랑스에 혁명(프랑스 대혁명, 1789 ~ 1794)이 일어나자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영국, 러시아 등은 프랑스혁명이 자국에 전파되어 전제왕권과 봉건체제가 붕괴될 것을 우려하였다.
그래서 1791년 8월 27일, 오스트리아의 레오폴드와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는 프랑스망명귀족들과 협의하여 프랑스에 절대왕정으로 복귀할 것을 희망하며 그를 위한 효과적인 수단을 거부하지 않을 것이라는필니츠 선언(Pillnitz Declaration)을발표했다.
이렇게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이 프랑스혁명에 대해 간섭을 하자 프랑스 제1공화정(1792 ∼ 1802, 전쟁을 주장하여 지지를 받은 지롱드 파 내각)은 필니츠 선언을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이 혁명을 위협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1792년 4월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였다.
선전포고 후인 1792년 4월 29일 프랑스의 샤를프랑수아 뒤 페리에 뒤무리에(Charles-François du Périer Dumouriez, 1739 ~ 1823) 장군이 군대를 이끌고 오스트리아 령 네덜란드를 침략하였으나 기대했던 내부 호응은 없고 오히려 왕당파가 내통하였으며 병사들이 달아나는 등 오합지졸이라 마케인 전투(Battle of Marquain)에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폐하였다.
프랑스 정부의 혼란한 틈을 타 1792년 여름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연합군이 벨기에를 통해 침공하자 프랑스의 입법의회(1791.10 ~ 1792.9)는 1792년 7월 11일 “조국이 위기에 빠졌습니다!”라고 선언을 하였으며 이 선언에 따라 프랑스 각지에서 모집된 의용군이 파리에 집결했다.
브라운 슈바이크 공작이 이끄는 4만2천명의 프로이센군, 2만9천명의 오스트리아, 6천명의 헤센(독일) 군대가 연합하여 7월 19일 프랑스 국경을 넘어왔다.
첫 전투에서 프랑스의 샤를프랑수아 뒤 페리에 뒤무리에(Charles-François du Périer Dumouriez, 1739 ~ 1823) 장군의 군대가 대패하여 프랑스 혁명 정부는 큰 위기에 처했다.
프랑스 시민들은 프랑스군의 패배 원인이 국왕 루이 16세가 외국 군주들과 내통하였기 때문이라 생각하고, 8월 10일 튈르리 궁전((Palais des Tuileries, 파리)을 습격하였다.
루이 16세는 의회로 도피하였으나 의회는 왕권을 중지시키고 국왕 일가를 떵플 탑(Tour du Temple, 수도원)에 유폐했다(8월 10일 사건).
3국 연합군은 계속 진격하여 1792년 8월 23일에 롱위를, 1792년 9월 2일에 베르됭(Verdun)을 함락시켰다.
프랑스군은 대혁명으로 유능한 장군들이 처형되고 많은 장교들이 외국으로 망명하였으며 국내 왕당파들의 정보유출과 장교(귀족출신으로 군주제 지지)들의 태업으로 붕괴 직전이었다.
1792년 9월 20일 샤를 프랑수아 뒤무리에 장군은 프랑수아 에티엔 크리스토프 켈레르만(François Étienne Christophe Kellermann,1735 ~ 1820, 육군원수) 장군의 지원받아 프로이센군보다 많은 4만 7천명의 의용군을 이끌고 발미에서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의 프로이센군 3만 5천명과 전투를 벌여 프로이센군의 침략을 저지했다. 이 발미 전투(Battle of Valmy)는 결정적인 승리가 아니고 프로이센군의 전술적인 후퇴였지만, 이 승리는 프랑스 국민을 고무시켰다.
프랑스군은 공세로 전환하여 1792년 11월 뒤무리에가 네덜란드 플랑드르의 제마페스 전투(battle of Jemappes)에서 오스트리아군에게 승리하여 남쪽 네덜란드를 점령했다. 아당 필리프 드 퀴스틴 백작(Adam Philippe, Comte de Custine,1742~1793, 프랑스 장군)은 독일 프랑크푸르트까지 진격했다.
1793년 3월에는 스페인에도 전쟁을 선포하고 원정에 나섰던 것이다.
1792년 11월 공화국의 혁명군이 영국의 대륙 무역 주요 교역로인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현, 벨기에)를 공격하자 1793년 영국의 주도로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스페인 등 11개 국은 프랑스혁명을 부인하고 확산을 막기 위해 제1차 대(對) 프랑스 동맹(First Coalition, 1793 ~ 1797)을 결성하였다.
1792년 12월 영국이 프랑스로의 곡식과 원자재 수출을 금지시키고 런던 주재 프랑스 공사를 추방함에 따라 1793년 2월 프랑스의 국민공회는 투표를 거쳐 만장일치로 영국에 선전포고를 했다.
영국은 중립적 입장을 취하고 있는 미국이 프랑스와 교역을 이어가자 해군을 동원하여 수백 척의 미국 상선을 나포해 미국을 압박하였다. 미국이 밀접한 관계인 프랑스와 동맹으로 발전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함이었다. 국력이 약해 영국과 전쟁을 원치 않았던 미국은 제이 조약(Jay's Treaty, 1794)을 체결하여 미국 영내의 영국군 철수 등과 호혜 통상(互惠通商)을 협약하였던 것이다.
프랑스군의 모병제는 전통적으로 스위스 출신 등으로 구성된 용병제였으나 1792년 혁명전쟁이 일어나자 복무기한이 1년인 지원병을 모집하여 군대를 확대 운용하였던 것이다.
1793년 2월 24일 국민 공회는 병력 부족을 보충하기 위하여 “30만명 모병안”을 결의했지만, 모집된 군인은 부족하였다.
1793년 뒤무리에는 남부 네덜란드 방위하라는 정부 방침을 무시하고 훈련되지 않은 보충병으로 네덜란드를 침공하였으나 1793년 3월 네르빈덴에서 훈련된 오스트리아군에 완전히 패배하였다(네르빈덴 전투 Battle of Neerwinden,플랑드르, 1793.3.).
뒤무리에는 자신의 계획이 실패하자 공화국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려다 부하의 반대에 부딪쳐 오스트리아로 망명하였으며 연합군은 프랑스 침공을 시작하였다.
1792년 모집한 지원병의 1년간의 복무기한이 끝나자 1793년에 법령을 바꾸어 징병제로 전환하였다.
1793년 8월 23일 국민 의회는 "국가총동원령"을 발령하고, 징병제로 30만명을 모병할 계획을 세웠는데 실제는 각 계층의 국민을 평등하게 징병하여 120만명을 모병하였다. 프랑스군은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대군이 되었다.
군장교출신으로 과학자이며 공학자인 라자르 카르노(Lazare Carnot, 1753 ~ 1823, 프랑스 공학자, 수학자, 전쟁장관, 내무장관)가 1791년 9월에 파드칼레(Pas-de-Calais)지방의 국민의회(1789, 국민제헌의회, ~ 1792) 의원으로 선출되고 이어 국민공회(1792 ~ 1795) 의원으로 선출되어 전쟁위원회에서 징병제를 주장하여 150만(1794년) 대군으로 확대시켰으며 그리고 군대 조직을 재편성하여 병사와 군수품을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게하는 등 최강의 프랑스 군대를 조직하여 혁명전쟁과 나폴레옹 전쟁에서 프랑스군을 승리로 이끌게 한 "승리의 조직자"로 불리었던 것이다.
스페인은 프랑스에 대혁명(French Revolution, 1789 ~ 1794)이 일어나 루이 16세를 처형하자 정치에 관심이 없는 카를로스 4세(CharlesIV, 재위 1788 ~ 1808)를 대신하여 왕비 마리아 루이사(María Luisa de Parma, 1751 ~ 1819, 카를로스 4세의 4촌)가 대(對) 프랑스 동맹에 가담하자 프랑스 제1공화정(1792 ∼ 1802)의 혁명군이 1793년에 침입하여 전쟁을 벌인 결과 패하였으며 전쟁에 패한 스페인은 1795년에 제2차 바젤 조약(second peace of Basel, 1795.7)을 체결하여 히스파니올라 섬의 동부 3분의 2를 프랑스에 내어주고 기푸스코아(Gipuzkoa)를 돌려 받는 등 국경선의 변경이 있었으며 1797년에 제2차 산 일데폰소 조약(Second Treaty Of San Ildefonso)을 맺고 프랑스의 동맹국이 되었다.
1795년 프랑스 제1공화정(1792 ∼ 1802)의 혁명군이 네덜란드에 침공하여 빌럼 5세를 추방하고 1795년 바타비아 공화국(Batavian Republic, 1795 ~ 1806)을 설립하였지만 프랑스의 위성 공화국(Client)이 되었으며 이런 혼란스런 힘의 공백기를 이용하여 영국은 1796년 네덜란드로부터 실론(스리랑카)을 탈취하였다.
제1차 대(對) 프랑스 동맹은 프랑스 좌파인 산악파가 여러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프로이센이 1795년 바젤 조약(Peace of Basel, 1795.4)을 맺고 동맹에서 이탈하였고 에스파냐도 제2차 바젤 조약(second peace of Basel, 1795.7)을 맺고 이탈하였으며 네덜란드는 프랑스의 속국이 되었고 총재정부(1795.10 ~ 1799.11) 때인 1797년 나폴레옹이 이탈리아를 원정하여 오스트리아를 굴복시키고 캄포포르미오 조약(Treaty of Campoformio)을 맺음으로써 1797년 무너졌다.
1799년 나폴레옹은 반란을 일으켜 통령정부(統領政府, Consulat, 1799.11 ~ 1804.12)를 세우고 제1 통령이 되어 전권을 행사하였고 1800년에는 마랭고 전투(Bataille de Marengo)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여 1798년 11월에 맺어진 제2차 대(對) 프랑스 동맹을 와해시켰으며 위협을 느낀 영국과는 아미앵 조약(Treaty of Amiens, 1802)을 맺어 강화함으로써 국민을 안심시켰다.
1802년3월 체결된 아미앵 조약(Treaty of Amiens, 1802, 프랑스 북부)으로 영국은 프랑스가 그때까지 취득한 영토을 승인하고,몰타·케이프 식민지·이집트 등의 점령지에서 군대를 철수하며 프랑스도나폴리 왕국과교황령에서 군대를 철수하기로 약속했다.
프랑스는 스페인의 국력이 쇠퇴하자 1659년 이후 서서히 아이티를 점령하였으며 9년 전쟁(1688 ~ 1697)을 종결시킨 1697년의 라이스윅 조약(Treaty of Ryswick)으로 섬의 서쪽 3분의 1을 프랑스령 생도맹그(Saint Domingue)로 만들었다.
스페인과 프랑스의 억압된 지배에 불만을 가졌던 아이티인들은 프랑스 대혁명(1789)이 일어나자 1791년 봉기하였다.
이에 1792년 프랑스 식민의회(로베스피에르 파 자코뱅 정부, 1793 ~ 1794)는 흑인과 물라토(히스패닉계와 아프리카계 사이의 혼혈)를 노예의 족쇄에서 풀어주고 완전한 시민권을 보장해 주었다.
그러나 프랑스가 약해진 틈을 타 영국군이 침범하자 1794년 투생 루베르튀르(Toussaint Louverture, 1743~1803,아이티의혁명가,독립투사)는 4,000명의 아프리카계 해방노예로 게릴라 부대를 결성하여 영국군을 몰아냈으며 프랑스로부터 노예제 폐지를 약속받았고, 다시 스페인이 침략하여 오자 이에 맞서 전투를 하였다.
그러나 새로 설립된 프랑스 나폴레옹의 통령정부(統領政府, 1799 ~ 1804)는 로베스피에르파 자코뱅 정부(1793 ~ 1794)의 약속을 1802년에 파기하고 나폴레옹의 매제인 샤를 레클레르크(Charles Victoire Emmanuel Leclerc, 1772 ~ 1802)를 사령관으로 하는 4만 명의 원정군을 파견하여 히스파니올라의 반군을 진압하였다.
루베르튀르는 노예제를 다시 도입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레클레르크와 강화조약을 맺었다. 그러고는 레클레르크는 루베르튀르를 프랑스로 압송하여 처형하였다.
프랑스 레클레르크는 1802년 황열병으로 사망하였다.
강화 조약이 지켜지지 않자 전쟁은 재개되었으며 프랑스군의 무차별 학살에도 아이티반군은 게릴라전으로 승리하여 1804년 라틴 아메리카에서 처음으로 독립하였다.
아이티 원정으로 막대한 재정적 손실을 입은 나폴레옹 1세는 1800년스페인과의 산 일데폰소 조약(Third Treaty Of San Ildefonso, 1800, 루이지애나와 이탈리아의 토스카나 교환)으로 차지한 루이지애나에 식민지 제국을 건설하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루이지애나를 1803년에 미국에 매각하였다.
포르투갈은 영국과 밀접한 관계였다. 이에 1801년 나폴레옹이 영국과의 관계를 끊고 프랑스-스페인과 동맹할 것을 요구했지만 포르투갈의 주앙 왕자(마리아 1세 1734 ~ 1816는 정신병, 1792년부터 정무)가 거부하자 스페인과 프랑스는 동맹을 맺고 포르투갈을 침략하여 오렌지 전쟁(Guerra das Laranjas, Guerre des Oranges, 1801)에서 승리하여 점령했다. 이에 포르투갈은 이들과 바다호스 조약(Badajoz, 1801)을 맺어 스페인군이 철수하는 대신에 올리벤사(Olivenza, 스페인 국경도시)를 스페인에 할양하였고, 프랑스에 2천만 프랑의 배상금을 지불했으며, 영국 선박의 항구 이용을 금지해야 했다.
대부분의 유럽국가는 용병제였으나 프랑스는 국가적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1793년 징병제로 국민군을 조직했다. 프랑스는 러시아 다음으로 인구수가 많았으므로 국민군의 수가 많았고(최대 300만 명) 군용 화기도 영국 다음으로 많이 생산하여 나폴레옹 전쟁(Napoleonic Wars, 1803 ~ 1815)을 수행하였다.
1803년 5월, 영국은 아미앵 화약(Treaty of Amiens, 1802)을 파기하고 프랑스 제1공화국에 선전포고를 하였으며 해군을 동원해 프랑스 해상을 봉쇄하여 프랑스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이에 프랑스도 영국이 무역을 할 수 없도록 지배국에 영향력을 행사하여 영국을 봉쇄하고자 했으나 중립국이 많아 어렵다고 생각했다.
1804년 나폴레옹은 국민의 신임을 얻어 투표로 황제에 올랐다.
나폴레옹 1세는 울몬 전투(Battle of Ulmon, 1805. 10. 16. ~ 10. 19. 독일 울몬)에서 승리하여 오스트리아군을 함정에 빠뜨리고 바이에른 선제후에게 항복을 강요하였다.
1805년 프랑스 스페인 연합해군은 전국에서 모은 33척의 함정으로 트라팔가르 해(Trafalgar, 스페인 남서쪽 끝)에서 27척의 영국 해군에 맞섰다.
프랑스와 스페인 연합 함대의 피에르 샤를 빌뇌브(Pierre-Charles Villeneuve, 1763 ~ 1806) 사령관은 육지의 포대를 의지하여 우세한 화력으로 방어전을 폈으나 영국 해군은 저돌적으로 쳐들어가 프랑스 군함을 파괴했다.
넬슨(Horatio Nelson, 1758 ~ 1805)이 지휘하는 기함인 빅토리 호(HMS Victory)는 프랑스 기함인 부센토르 호(Bucentaure)를 공격하였고 이를 구하려는 르두타블 호(Redoutable, 선장 장 자크 매젠디, Jean-Jacques Magendie, 1766 ~ 1835)가 돌진하여 빅토리 호와 뒤엉켰고, 르두타블 호의 전투실 상부에 있던 프랑스 저격수들은 빅토리 호의 갑판을 내려다보며 사격을 하여 넬슨을 적중시켰다. 넬슨은 죽어가면서 군을 지휘하여 승리로 이끌었다.
프랑스는 트라팔가르 해전(Battle of Trafalgar, 1805)에서 영국의 넬슨(Horatio Nelson, 1758 ~ 1805, 트라팔가르 해전 중 빅토리호 HMS Victory에서 전사) 제독에 패하여 제해권을 잃었으며 이것이 대륙 봉쇄령의 계기가 되었다.
프랑스의 나폴레옹은 영국이 산업혁명으로 면직물을 비롯한 공업제품을 대량 생산하여 싼 가격으로 전 유럽에 수출하여 부(富)를 창출하고 있었으므로 대륙 봉쇄령으로 이를 막으면 영국에 경제적 타격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1805년 나폴레옹은 영국을 침공하고자 했으나 트라팔가르 해전(Battle of Trafalgar)에서 패하여 제해권을 잃고 단념하였다.
1805년 12월 나폴레옹은 아우스터리츠 전투(Battle of Austerlitz)에서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을 격파했다.
프레스부르크 조약(Treaty of Pressburg)으로 오스트리아(신성로마제국)가 탈퇴하여 제3차 대프랑스 동맹이 무너졌다. 그리고 오스트리아(신성로마제국)는 나폴레옹의 독일 연방에 영토를 양도하였다.
프로이센을 제외한 독일 국가의 연합체인 라인 동맹(Confederation of the Rhine, 남서 독일 16개국의 동맹)을 맺게 하여 독일제국에서 탈퇴시켜 프랑스 속국으로 만듦으로써 신성로마제국이 붕괴되었다.
바타비아 공화국((Bataafse Republiek, 1795 ~ 1806, 네덜란드)은 1806년 6월에 프랑스에 합병되어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Louis Napoléon Bonaparte, 1778 ~ 1846, 네덜란드 왕국 재위 1806~1810, 나폴레옹 둘째 동생)가 네덜란드의 왕이 되어 통치했다.
1806년 나폴레옹의 황제군은 프로이센을 침공하여 잘펠트 전투(Battle of Saalfeld, 1806.10.10.)에서 프로이센 군에 승리하였고 이어서 예나-아우에르슈테트 전투(Battle of Jena-Auerstädt, 1806. 10. 14.)에서 프로이센 군을 격파하여 프로이센을 종속국으로 만들었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Friedrich Wilhelm III, 재위 1797 ~ 1840)는 쾨니히스부르크로 피하였으며 다시 러시아 군을 끌어들여 프로이센을 회복하고자 했다.
러시아는 프로이센이 패망 위기에 몰리자 위기를 느껴 프로이센에 지원군을 파견했으나 물러났다.
그리고 이때 나폴레옹은 점령한 베를린에서 대륙 봉쇄령을 발표하였다(베를린 칙령, 1806. 11. 21.).
1807년, 나폴레옹 1세의 황제군이 폴란드로 진격할 때 프로이센을 구원하러 온 러시아군(제4차 대프랑스동맹, 1806 ~ 1807)을 아일라우 전투(Battle of Eylau, 1807, 동프로이센)와 프리틀란트 전투(Battle of Friedland, 1807, 프로이센, 현 러시아 프라브딘스크)에서 격파하고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Aleksandr I, 재위 1801 ~ 1825)와 프로이센의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Friedrich Wilhelm III, 재위 1797~1840)와 각각 회담하여 틸지트 조약(Treaties of Tilsit, 1807)을 체결하여, 폴란드 지역에 바르샤바 대공국(1807 ~ 1815, 폴란드 지역,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 Friedrich August I)을 세우고 프로이센의 일부에 베스트팔렌 왕국(Kingdom of Westphalia, 1807 ~ 1813, 독일지역)을 세워 세 번째 동생 제롬 나폴레옹 보나파르트(Jérôme-Napoléon Bonaparte, 1784 ~ 1860)에게 통치를 하게 하여 두 나라를 프랑스 제국의 위성 국가로 만들었다. 그리고 많은 배상금을 받았다.
포르투갈이 대륙 봉쇄령을 위반하자 1807년 프랑스의 장 앙도슈 쥐노 장군(Jean-Andoche Junot, 1er duc de Abrantes, 1771 ~ 1813)이 포르투갈로 진군하여 리스본을 함락했다. 이에 영국이 함대를 파견하여 포르투갈이 프랑스와 동맹을 맺으면 리스본을 공격하겠다고 통고했다.
포르투갈 왕실(섭정 주왕 왕자)은 진퇴양난으로 고심끝에 영국의 15척 함대에 5천여명이 타고 브라질의 리우 데 자네이루로 도피했다.
프랑스의 쥐노 장군은 포르투갈의 민병대와 영국군의 공격과 포르투갈의 청야 전술(淸野 戰術, 적군이 사용할 수 있는 군수물자와 식량 등을 없애 적군이 현지 조달을 할 수 없게 만드는 전술)에 궁지에 몰려 산트라 협약(The Convention of Cintra or Sintra, 1808.8.)을 맺고 영국배로 철수하였다.
1808년 로마 교황령을 완전히 병합하고 로마 교황 비오 7세(Papa Pio VII, 재위 1800 ~ 1823)를 유폐하였다.
스페인 해안에서 영국과의 밀무역이 성행하자 1808년 조아생 뮈라(Joachim Murat,1767~1815, 원수)가 지휘하는 12만명의 프랑스군이 포르투갈의 지배를 공고히 하고 스페인이 내정을 바르게 실시하도록 하기 위해 스페인에 주둔하였으며 이에 스페인 왕실이 불안해 하였고 이틈을 타 왕태자가 부추킨 민중봉기로 카를로스 4세가 퇴위하고 왕태자가 페르난도 7세로 즉위하자 나폴레옹은 카를로스 4세와 페르난도 7세를 소환하여 중재회의에서 스스로 왕위를 포기하도록 만들고 뮈라를 왕위에 올리려했으나 국민들의 반발로 그의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Joseph Bonaparte, 나폴리 왕 Giuseppe Bonaparte 재위 1806 ∼ 1808, 스페인 왕 José I 호세 1세 재위 1808 ∼ 1813)를 스페인과 신대륙의 왕으로 임명했다.
조제프 보나파르트(Joseph Bonaparte, José I 호세 1세)는 1808년부터 1813년까지 스페인을 통치했으며 동맹군에 대항하여 싸웠다.
전장에서는 강선(rifle, 총열 안쪽에 파냄 나선형 홈으로 탄환이 회전하게 됨)이 없는 활강식(滑腔式)의 총열에 전장식(前裝式, muzzleloading, 총열의 앞쪽 총구에 화약과 탄알을 넣음)으로 화약과 구슬모양의 납탄을 넣고 수석식(燧石式, Flintlock, 부싯)으로 불을 붙여 발사하는 머스킷(musket)이 사용되었다.
나폴레옹 1세(Napoléon I)는 영국, 러시아, 스웨덴, 오스만 제국 등 일부를 제외한 대륙의 대부분을 점령하여 합병하거나 종속국, 동맹국으로 만들었으나 영국은 해군으로 해상을 점령하여 대륙을 봉쇄하였고 런던은 무역이 활발하여 물자가 풍부했다.
그래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영국을 고립시키기 위하여 1806년 11월 베를린 칙령으로 '대 영국 무역금지법'이란 대륙 봉쇄령을 내렸다. 그러나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Aleksandr I, 재위 1801 ~ 1825)는 프랑스의 대륙 봉쇄령에 따르지 않았다. 이에 나폴레옹 1세(Napoléon I)는 1812년 6월 네만강을 건너 러시아의 모스크바를 침략하였으나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Aleksandr I, 재위 1801 ∼ 1825)와 야전 사령관 미하일 쿠투조프(Mikhail Illarionovich Golenishchev-Kutuzov, 1745 ~1813)는 청야 전술(淸野 戰術, 초토화 전술, scorched earth)로 모스크바를 비우고 결사 항전하였고 겨울이 다가오자 나폴레옹 1세는 추위와 기근을 견딜 수 없어 1812년 12월 퇴각하였다.
러시아군은 퇴각하는 프랑스군을 추격하면서 폴란드를 점령하였으며 프랑스에 항복했던 오스트리아와 프로센 군과 함께 나폴레옹 1세를 대적하였다.
나폴레옹은 포르투갈, 네덜란드, 스페인 등 해외 식민지를 많이 가진 나라들을 합병했지만 영국군이 제해권을 가짐에 따라 해외 식민지를 차지하지 못했으며 영국이 오히려 차지하다 후에 돌려주었다(카리브해의 앤틸리스 제도의 섬들).
나폴레옹은 프랑스가 지배하던 아이티의 독립운동(아이티 혁명, Haitian Revolution, 1791 ~ 1804) 진압에 필요한 전비 등으로 제정이 악화되자 이를 조달하기 위해 1800년 스페인과 비밀리에 체결한 산 일데폰소(San Ildefonso) 조약으로 할양받은 루이지애나를 1803년에 미국에 매각하였으며 1806년에는 대혁명 때인 1790년에 폐지되었던 소금세(가벨, gabelle)를 부활하였다.
그리고 나플레옹은 전투식량으로 휴대에 편리하고 오랜 기간 보관이 가능한 요리방법을 공모하여 최초의 통조림인 유리병 통조림을 개발하여 군에 공급함으로써 먼 곳을 원정하여 전투를 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 병조림(bottled food)은 니콜라 아페르(Nicolas Appert, 1749 ~1841)가 1809년 발명하였다.
프랑스의 나폴레옹 1세는 트라팔가 해전(the Battle of Trafalgar, 1805, 스페인 남서해안)에서 패하여 영국 해군에 포위되자 영국을 경제적으로 봉쇄하는 정책으로 프랑스 지배하에 있는 모든 국가에게 영국과의 무역을 금지하는 대륙 봉쇄령을 내렸으나 별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영국 함대의 프랑스 봉쇄로 프랑스도 해외에서 설탕 수입을 할 수 없게 되자 1811년 말 뱅자맹 들레세르(Benjamin Delessert, 1773 ~ 1847, 프랑스)는 장 바티스트 케루엘(Jean-Baptiste Quéruel, 1779 ~ 1845)가 개발한 사탕무(감채 甘菜, 첨채 甛菜, sugar beet)에서 설탕을 추출하는 방법을 이용하여 파시(Passy)에 설립한 제당 공장에서 처음으로 사탕무 설탕(첨채당, 甛菜糖, beet sugar)을 대량으로 생산했던 것이다. 사탕수수를 수입할 수 없었던 프랑스에서 사탕무를 이용하여 설탕을 제조한 공로로 뱅자맹 들레세르는 나폴레옹 1세로부터 막대한 지원을 포상으로 받았다. 현대에도 사탕무로 생산하는 사탕무 설탕(beet sugar, 甛菜糖, 첨채당) 생산국의 세계 1위는 프랑스이다.
그리고 프랑스 제2제국(제2제정, 1852 ~ 1870)의 황제인 나폴레옹 3세(샤를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Charles Louis Napoléon Bonaparte, 1808 ~ 1873, 대통령 재위 1848 ~ 1852, 황제재위 1852 ~ 1870, 나폴레옹 1세의 둘째 동생이며 네덜란드 왕인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아들)의 지시로 서민들을 위하여 버터 대용으로 개발한 것이 마가린(margarine)이며 1869년에 이폴리트 메주 무리에(Hippolyte Mège Mouriès, 1817 ~ 1880, 화학자)가 발명한 것으로 식물성 액체 기름을 고체화시킨 것이며 1873년에 미국 특허를 획득했다.
* 이베리아 반도 전쟁(1808 ~ 1814, 반도전쟁, 에스파냐 독립전쟁)
1793년 프랑스는 왕당파 반란이 일어난 툴롱 항구에서 이에 가담한 스페인과 영국군을 툴롱포위 전(Siege of Toulon)으로 몰아냈다. 스페인은 툴롱포위 전(Siege of Toulon) 이후로 프랑스에 연전연패하여 1797년 제2차 산 일데폰소 조약(Second Treaty Of San Ildefonso)을 맺고 프랑스의 동맹국이 되었다.
포르투갈은 브라질 식민지 생산물과 영국과의 무역에 의존하고 있었으므로 수세기 동안 영국과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에 1801년 나폴레옹은 "영국과 손을 끊고 프랑스-스페인 동맹과 손잡지 않는다면 무력으로 응징하겠다"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주앙 왕자(마리아 1세 1734 ~ 1816는 정신병, 1792년부터 정무)가 거부하자 스페인과 프랑스는 동맹을 맺고 영국의 오랜 동맹인 포르투갈을 오렌지 전쟁(Guerra das Laranjas, Guerre des Oranges, 1801)에서 승리하여 점령했다. 이에 포르투갈은 이들과 바다호스 조약(Badajoz, 1801)을 맺어 스페인군이 철수하는 대신에 올리벤사(Olivenza, 스페인 국경도시)를 스페인에 할양하였고, 프랑스에 2천만 프랑의 배상금을 지불했으며, 영국 선박의 항구 이용을 금지해야 했다.
오렌지 전쟁(Guerra das Laranjas, Guerre des Oranges)이란 명칭은 전쟁 중에 스페인 수상 마누엘 드 고도이(Manuel de Godoy)가 Elvas에서 오렌지를 따서 리스본으로 가는 중이라는 메시지를 함께 스페인 여왕에게 보낸 데서 유래하였다.
영국은 이에 대응해 1801년 7월 북대서양에 있는 포르투갈의 마데이라 섬을 점령하여 1802년 아미앵 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주둔했다. 또한 1801년 9월 프랑스와 마드리드 조약(Treaty of Madrid, 1801.9.)을 체결하여 포르투갈령 기아나의 절반을 프랑스에 양도하고 프랑스와 평화 협약을 맺었다(프랑스령 기아나).
1803년 아미앵 조약이 파기되어 프랑스와 영국이 전쟁을 재개했을 때 '포르투갈은 영국에게 전쟁을 선포하였지만 영국의 조지 3세에게 영국에 적대행위를 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고 밀사를 보냈다.
1805년 영국이 트라팔가 해전에서 프랑스와 스페인 함대를 격파하자 포르투갈의 주앙 왕자(마리아 1세 1734 ~ 1816는 정신병, 1792년부터 정무)는 즉시 영국과 평화 협약을 맺고 관계를 회복했다.
1806년, 나폴레옹이 대륙 봉쇄령을 내렸으나 포르투갈은 받아들이지 않고 중립을 유지하며 영국 함선들에 테주 강 하구 사용을 허가했다. 이에 프랑스는 다시 포르투갈을 점령하기로 했다.
1807년 10월, 프랑스는 포르투갈 공격에 스페인이 도와주는 대가로 포르투갈의 영토를 프랑스와 분할한다는 퐁텐블로 조약(Treaty of Fontainebleau, 1807,10., 스페인 왕 샤를 4세와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사이에 체결된 비밀 협정)을 체결하였고 스페인은 프랑스군의 피레네 산맥 통과를 허가했다.
나폴레옹의 장 앙도슈 쥐노 장군(Jean-Andoche Junot, 1er duc de Abrantes, 1771 ~ 1813)이 지휘하는 2만 4천명의 프랑스군과 스페인 군은 포르투갈로 진군하여 별 저항 없이 리스본을 함락했다.
이어서 11월에 영국 함대가 리스본 항구에 도착하여 포르투갈이 프랑스와 동맹한다면 리스본을 무력으로 장악하겠다고 통보했다. 주앙은 고심 끝에 브라질에 피신하기로 하였다.
1807년 11월 영국 함대 15척에 포르투갈 여왕 마리아 1세, 섭정 주앙 왕자와 왕실 인사들, 그리고 고위 관료들과 하인들 등 5,000여명을 싣고 브라질로 출발하였다.
이때 포르투갈에 남은 섭정위원회는 프랑스군에 저항없이 항복했다. 쥐노 장군의 프랑스군은 무자비하게 리스본을 약탈했다. 그리고 쥐노 장군은 군사 정부를 수립하고 포르투갈 군인을 독일에 주둔한 프랑스군에 파견했으며, 모든 지방 행정직과 치안관에 프랑스인을 임명했다. 포르투갈인들은 이에 분노해 여러 차례 무력 시위를 벌였지만 진압되었다. 많은 포르투갈인들이 외딴 지역에 숨거나 해외로 피신했다.
포르투갈인들은 프랑스의 폭압적인 정책에 맞서 별도의 행정망을 구축하여 자치행정을 하였으며 파루와 포르투에 의회를 수립하고 각지방에도 지방 의회를 세웠다.
이들은 민병대를 조직하고 영국군과 협력하여 대항했으며 청야 전술(淸野 戰術, 적군이 사용할 수 있는 군수물자와 식량 등을 없애 적군이 현지 조달을 할 수 없게 만드는 전술)로 쥐노군을 궁지로 몰았다.
그러나 쥐노는 이를 진압할 병력이 부족하여 출병하지 못하고 오히려 반란이 일어날 것을 우려해 리스본에서만 머물렀다.
1808년 8월 웰링턴 장군(제1대 웰링턴 공작 아서 웰즐리 경, Sir Arthur Wellesley, 1st Duke of Wellington, KG, GCB, FRS, 1769 ~ 1852)이 약 1만의 원정군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웰링턴 장군은 1808년 롤리사 전투(battle of Roliça, 1808, 포르투갈)에서 앙리 프랑수아 델라보르드(Henri-Francois Delaborde, 1764 ~ 1833) 군대를, 비메이로 전투(battle of Vimeiro, 1808.8.)에서 프랑스 쥐노 장군 군을 격파했다.
쥐노 장군은 웰링턴 장군 후임의 휴 화이트포드 달림플 장군(Sir Hew Whitefoord Dalrymple, 1st Baronet, 1750 ~ 1830)과 협상하여 산트라 협약(The Convention of Cintra or Sintra, 1808.8.)을 체결하였다.
이 협약은 프랑스군이 포르투갈에서 물러나는 대신에 영국 수송선에 프랑스군과 약탈품을 싣고 프랑스로 수송한다는 것으로 이에 따라 쥐노 군대는 포르투갈을 떠나 프랑스로 무시히 철군하였으며 포르투갈은 프랑스의 침략에서 벋어났다.
웰링턴 장군은 잘못 채결된 산트라 협약(The Convention of Cintra or Sintra, 1808.8.) 때문에 후임인 휴 화이트포드 달림플 장군(Sir Hew Whitefoord Dalrymple, 1st Baronet, 1750 ~ 1830)과 같이 영국으로 소환되었으나 웰링턴 장군은 관련이없다는 것이 소명되었다.
스페인 해안은 영국과의 밀무역이 성행하였고, 스페인 지방관리들은 이를 용인했다.
이에 프랑스는 1807년 12월 영국과 해상에서 통상하는 상선을 나포하도록 허가하는 밀라노 칙령(Milan Decree, 1807.12.)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1808년 3월 나폴레옹은 포르투갈 점령을 공고히 하고 스페인인의 내정 질서를 바로 잡기 위해 12만명의 군 병력을 스페인에 주둔시키고 조아섕 뮈라(Joachim Murat, 1767 ~ 1815, 베르크와 클레브 대공) 원수가 지휘하도록 했다.
프랑스군이 마드리드로 향해 오자 불안해진 국왕 부처와 고도이는 아랑후에스(Aranjuez, 마드리드 지방의 도시)시로 도피했는데 이때를 틈타 왕태자는 왕실 근위대를 앞세워 자유주의 적인 개혁을 요구하는 민중봉기를 일으켜 무능한 카를로스 4세를 폐위시키고 페르난도 7세로 즉위하여 마드리드로 돌아왔다.
그런데 3월 24일 조아생 뮈라가 마드리드에 입성하여 나폴레옹의 지시에 따라 스페인 왕실 가족들을 스페인과 프랑스 국경 근처에 있는 바욘(Bayonne)으로 소환했다. 5월 10일 이들에 대한 중재회의에서 나폴레옹은 카를로스 4세와페르난도 7세가 스스로 왕위를 포기하게 만들고 조아섕 뮈라를 왕위에 올리려 했으나 국민의 반발이 심하여 조아섕 뮈라를 나폴리 왕으로 봉하고 나폴리 왕인 자신의형 조제프 보나파르트(Joseph Bonaparte, 나폴리 왕 Giuseppe Bonaparte 재위 1806 ∼ 1808, 스페인 왕 José I, 호세 1세 재위 1808 ∼ 1813)를 스페인과 신대륙의 왕으로 임명했다.
이베리아의 농토는 척박했고, 스페인 경제는 식민지에 의존하여 제대로 된 산업이 없었다. 그래서 민중들의 삶이 피폐하였는데, 여기에 보급품이 부족한 프랑스군이 약탈을 하니 민중들은 살 수가 없어 연이어 반프랑스 봉기를 일으켰다.
이에 영국은 반프랑스군에 무기, 탄약, 자금을 지원하였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에서 일어난 반나폴레옹 반란군은 귀족이나 군인들이 아니라 일반 민중들이 주도했다.
민중은 반프랑스군에 입대하는 것이 프랑스군에게 약탈당하는 상황보다는 훨씬 나은 삶이 보장됐기 때문에 반프랑스군에 입대하는 민중이 늘어나 반프랑스군은 빠르게 늘어갔다.
반프랑스군의 민병대는 게릴라(guerrilla) 전을 폈으며 빠른정보로 유리한 전투를 하였다. 게릴라(guerrilla) 전이라는 용어가 이때에 생겨났다.
1808년 7월, 스페인군(반프랑스 스펜인군)이 안달루시아의 바일렌 전투(Battle Of Bailen)에서 피에르 뒤퐁 드 레탕 장군(General Pierre Dupont de l'Étang, 1765 ~ 1840)이 이끄는 프랑스군을 격파하는 등 이베리아 반도에서 프랑스군은 점점 불리해졌다(1808.8. 프랑스는 포르투갈을 잃음).
스페인군은 1808년 8월 마드리드에 입성해 조제프 보나파르트(Joseph Bonaparte, 호세 1세, 재위 1808 ∼ 1813)를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때 포르투갈에는 3만 명의 영국군이 주둔해 있었으며 영국-스페인-포르투갈 연합군은 스페인의 바스크(Basque, Euskadi 에우스카디, 스페인 북족)까지 진군했다.
1808년 11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 Bonaparte) 휘하의 프랑스-스페인-폴란드 연합군은 8월에 패하여 물러났던 마드리드에 입성하기 위해 진격하는 중에 베니토 데 산후안(Benito de San Juan, 1727 ~ 1809)이 지휘하는 스페인 군과
소모시에라 전투(Battle of Somosierra)가 있었으나 프랑스군이 승리하여 마드리드를 점령했다.
웰링턴 장군 후임의 영국군 사령관인 존 무어 경(Sir John Moore, 1761 ~ 1809)은 1809년 1월 프랑스 솔트 원수(장드디외 술트, Jean-de-Dieu Soult, 1769 ~ 1851) 휘하 군단의 공격으로 코루나 전투(battle of Corunna, 1809.1.)에서 사망했다.
웰링턴 장군은 민중이 봉기한 이베리아 반도가 프랑스를 점령하기 위한 발판으로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웰링턴 장군은 포르투갈 방어에 관한 보고서(Memorandum, 메모, 각서)를 캐슬레이(Castlereagh 경, Robert Stewart, 2nd Marquess of Londonderry , KG , GCH , PC , PC, 로버트 스튜어트, 캐슬레이 자작, 1769 ~ 1822) 경에게 제출하여 승인을 받고 1809년 4월 포르투갈의 리스본으로 다시 돌아왔다.
1809년 7월 탈라베라 전투(Battle Of Talavera)에서 웰링턴 장군의 영국군과 쿠에스타(Gregorio García de la Cuesta y Fernández de Celis, 1741 ~ 1811, 스페인, 민병의 강압으로 봉기민병대를 이끌게 됨) 장군의 스페인군은 연합하여 프랑스 술트 원수(달마시 공작 장드디외 술트, Jean-de-Dieu Soult, 1769 ~ 1851) 군을 물리치고 포르투갈에서 스페인으로 진군했으나 마드리드를 함락시키는 데는 실패했다.
1810년 7월 웰링턴 장군의 영국-포르투갈 군은 포르투갈의 부사코 전투(Battle Of Bussaco, 1810. 7.)에서 앙드레 마세나(Andre Massena, 1758 ~ 1817) 원수가 지휘한 프랑스군을 물리쳤다.
프랑스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여러 차례 포르투갈, 스페인, 영국군과 전투를 치렀으나 결정적인 승리를 이루지 못했고 지루한 장기전에 점점 병력과 물자가 부족해져 갔다.
포르투갈을 굳게 지키고 있던 웰링턴 장군은 1812년 7월 스페인으로 진군하여 살라망카(Salamanca) 전투에서프랑스의 오귀스트 드 마르몽(Auguste de Marmont, 1774 ~ 1852)의 군대를 격파했고 이에 8월에는조제프 보나파르트(Joseph Bonaparte, 호세 1세, 재위 1808 ∼ 1813)는 수도 마드리드를탈출하였으며 프랑스군은 안달루시아를 포기하였다.
그리고 프랑스군이 러시아 원정으로 이베리아 전선의 병력 상당수를 차출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웰링턴 장군은 이듬해인 1813년 6월 영국, 포르투갈, 스페인, 이탈리아 군대를 스페인 비토리아(Vitoria) 지역으로 4방향에서 진격시켜 조제프 보나파르트 왕과 장바티스트 주르당 원수(Jean-Baptiste Jourdan, 1762 ~ 1833)가 지휘하는 프랑스 군을 비토리아 전투(Battle Of Vitoria, 1813.6. 포르투갈)에서 격파하였고 이에 웰링턴 장군은 공작의 작위를 받았으며 프랑스군은 1813년 9월산 세바스티안 공성전(Siege of San Sebastián, 1813.9. 스페인 북부)이 끝난 후 스페인에서 퇴각하였다.
웰링턴 장군은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에 실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스 남부 본토까지 쳐들어갔다.
1813년 12월,프랑스와스페인 사이에 발렌시아 조약(Treaty of Valençay, 1813.12. 스페인)을 맺었으며 이 조약에 의해 스페인에서 프랑스군을 철수하고, 1808년부터 발렌시아에 투옥되어 있던페르난도 7세를 합법적인 스페인 국왕으로 인정함에 따라 스페인은 왕정으로 독립되었다.
결과적으로 이베리아 반도에서 무너진 나폴레옹 군은 이후로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다. 프랑스 식민지 경영
서인도 제도에 있는 아이티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1492년 상륙하여 스페인의 식민지가 되었다.
초기에 원주민인 카리베족(族)은 스페인 정복자에 의해 전멸되고, 아프리카에서 들여온 흑인 노예들에 의해 사탕수수, 커피 농장 등이 운영되었다.
그 후 1626년 프랑스 해적이 토르튀 섬에 근거지를 건설함으로써 프랑스의 세력이 커졌으며 영국도 해적 기지로 이용하였다. 30년 전쟁(1618 ~ 1648, 신구교 전쟁, 구교도 국인 프랑스는 신교도 편에 가담하여 승리)의 승리로 최강국이 된 프랑스는 아이티에서 영국을 밀어냈다.
프랑스는 1697년 9년 전쟁(1688 ~ 1697) 결과 체결된 리스 위크 조약(Treaty of Ryswick, 레이스베이크 조약, 네덜란드)을 맺어 스페인으로부터 아이티(섬의 서쪽 생도맹그 Saint-Domingue 프랑스령-아이티, 섬의 동쪽 산토도밍고 Santo Domingo 스페인령-1763년 영국 령- -도미니카)를 프랑스령으로 인정받았다. 프랑스는 아이티에 흑인 노예를 혹사하여 목화(木花, cotton plant), 사탕수수(sugar cane), 커피(coffee tree), 쪽(polygonum indigo, 마디풀과의 한해살이풀, 염료 원료) 등을 재배하여 가장 번영한 프랑스령 식민지를 경영하게 되었다(생도맹그 Saint-Domingue는 아이티를 의미했으나 현재는 산토도밍고시를 의미하며 섬의 동쪽은 스페인 령의 산토도밍고 Santo Domingo-1763년 영국 령- 도미니카, 스페인은 초기에 섬 전체를 히스파니올라 섬 Hispaniola이라 하였음).
프랑스의 루이 14세(Louis XIV, le Grand, Roi Soleil, 재위 1643 ~ 1715) 때는 뉴 프랑스(New France, 누벨 프랑스, Nouvelle France, 미국의 루이지애나와 캐나다 지역), 인도 등 넓은 식민지를 경영했지만 루이 14세의 손자가 스페인의 필리페 5세로 즉위함에 따라 주변의 영국,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등이 반대하여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1701 ~ 1714)이 일어났으며 스페인과 프랑스는 전쟁에 폐하여 식민지 일부를 잃고 필리페 5세는 스페인 왕으로 인정받았다.
루이 14세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1701 ~ 1714) 중에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정보원을 여러 곳으로 보냈는데 스페인의 식민지인 칠레에도 보냈다.
이때 스페인은 루이 14세의 손자인 필리페 5세가 왕이었으므로 내, 외전으로 위협받는 손자의 왕권 유지 등이 목적이었다.
1712년 프랑스 육군 정보국 소속 정보원으로 칠레에 파견된 아메데 프랑수아 프레지에(Amédée-François Frézier, 1682 ~ 1773) 중령은 다년생의 풀 딸기인 야생딸기를 연구하는 식물학자로 가장하여 칠레에 주둔 중이던 스페인군의 현황을 파악했다. 그는 야생딸기 탐구자로 위장하여 군의 주둔지와 규모 등의 군사 정보뿐만 아니라 실제로 야생딸기를 관찰하여 기록하고 스케치하였다.
야생딸기(Wild Strawberry)는 여러해살이풀로 산딸기(Rubus, 복분자)와 같은 나무딸기와 속이 다르고 뱀딸기(mock strawberry)와도 속이 다르다.
그는 야생딸기의 씨를 채집하여 1714년 고국으로 돌아온 뒤 칠레 딸기를 파리에 심고, 칠레 딸기에 관한 책을 펴냈다.
칠레 딸기는 열매가 달걀 크기만큼이나 크고 빨간색의 탐스런 열매를 맺었으므로 유럽의 식물학계에 알려지면서 관심이 집중되었으나 식용이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래서 유럽의 식물학자들은 칠레 딸기와 야생딸기를 이용한 딸기 종자 개량을 위한 연구가 시작되었다.
야생딸기는 세계에 여러 종이 널리 분포하고 있었으며 그때 유럽에는 유럽 야생종과 15세기에 북미에서 들어온 야생종들을 정원 관상용으로 심기도 하였다.
영국의 식물학자인 필립 밀러(Philip Miller FRS , 1691 ~ 1771)는 1764년경에 북아메리카 야생종 딸기인 프라가리아 버지니아나(Fragaria virginiana)와 남아메리카 야생종 딸기인 프라가리아 칠로엔시스(Fragaria chiloensis)를 교잡하여 식용이 가능하고 크기가 크며 붉은색으로 예쁜 딸기 품종을 개발하였다. 1806년경에는 종을 선별하여 대량으로 생산하게 되었다.
이렇게 탄생된 재배종 딸기인 Fragaria×ananassa Duch. 의 제놈은 2n= 8x = 56로 이질8배체이다.
염색체의 기본수(monoploidy)인 x = 7이고, 반수체(haploidy)인 n =4x = 28이다.
풀 딸기는 라틴어로 fragum(프라굼)이고 프랑스어로는 fraise(프레즈)이며 영어로는 Strawberry(스트로베리)라 한다.
원래 영국은 기후가 습해서 딸기가 잘 자라지 않았지만 영국의 농부들이 축축한 땅에 딸기를 심고 딸기 주위에 밀집(straw)을 깔아 주었더니 딸기가 잘 자라고 딸기에 흙이 묻지 않아 먹기에 좋았으므로 딸기를 strawberry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1714년 루이 14세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시장으로부터 기증받은 커피나무를 파리 식물원에서 길러 번식시켰으며 그 씨앗을 식민지인 열대지역으로 보냈는데 아프리카의 기니 Guinea), 카리브해의 서인도제도인 산토도밍고(Santo Domingo, 아이티), 마르티니크 섬(Martinique I.), 쿠바 등과 멕시코(중앙아메리카) 등에서 커피 생산을 본격화하였다.
1720년경 마르티니크 섬(Martinique)에 근무하던 프랑스 해군 장교 가브리엘 드 클리외(Gabriel-Mathieu Francois D'ceus de Clieu (1687 ~ 1774)가 프랑스에서 휴가를 마치고 2그루의 커피나무를 천신만고 끝에 프랑스 식민지 마르티니크 섬으로 가져가서 심은 것이 서인도 제도의 커피 재배의 시초가 되었다는 설이 있다.
그런데 아메리카의 커피나무는 1715년에 프랑스의 식민지인 산토도밍고(Santo Domingo)에 들어왔고 1718년에 네덜란드의 식민지인 남미의 수리남(Surinam)에 들어왔다고 한다.
사탕수수를 많이 재배하던 아이티가 프랑스 식민지가 되자 파리의 카페 문화가 유입되어 커피 수요가 많아져 생산량이 많아지자 싼값으로 미국에 대량 수출하였다. 그 후 흑인 봉기로 커피 농장이 많이 파괴되었다.
프랑스 대혁명(1789)이 일어나자 아이티에서 1791년 흑인들이 봉기하여 1794년 흑인 노예제 폐지를 이끌어낸 후 1801년에 독립을 선언하였다.
이에 나폴레옹은 1801년 11월에 3만 명의 원정대를 아이티(산토도밍고)에 파견하여 식민지 재탈환과 노예제 부활을 시도하였다.
나폴레옹이 파견한 원정대는 현지인들의 격렬한 저항으로 아이티 정복에 실패했으며 나폴레옹 정부는 막대한 전쟁비용의 지출로 재정에 타격을 입었다.
아이티(산토도밍고)는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1804년 독립했다.
프랑스는 동남아시아의 베트남을 식민지로 지배했다.
1620년에 프랑스인 예수회 신부 알렉상드르 드 로드(Alexandre de Rhodes, 1591 ~ 1660)가 베트남에 들어와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다.
프랑스는 1757년 인도에서 영국과의 플라시 전투에서 패하자 그 이후 베트남으로 진출했다.
1802년 응우옌 푹 아인(阮福映, 쟈롱帝)이 베트남에 새로운 왕조를 세울 때 프랑스 선교사들의 도움이 있었던 관계로 이후 베트남과 프랑스의 밀접한 관계가 시작되었다.
19세기 중엽에 이르러 베트남은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취하고 가톨릭 선교사를 탄압하였는데 이것이 오히려 동양의 진출을 원했던 나폴레옹 3세에게 제국주의적 진출의 구실이 되어 1859년 드디어 프랑스군은 베트남을 침입하여 여러 해 동안 베트남군과 베트남의 보호국이었던 청국과 싸워 승리하게 된다.
1859년부터 1885년까지 프랑스는 무력을 통해 타이와 미얀마를 제외한 인도차이나 반도(즉, 현재의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를 식민지화하여 프랑스령 인도차이나(1885년)를 세웠다.
1898년 프랑스는 아프리카 서쪽의 알제리에서 사하라 사막까지 진출하여 수많은 식민지를 건설하였다.
아프리카는 포르투갈이 신항로 개척 시기부터 바닷가에 항구를 세우고 무역을 하였다. 이어서 세력이 강해진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등이 17세기부터 밀고 들어와 쟁탈전이 벌어졌으며 미개척지였던 바다에서 떨어진 아프리카의 내륙 지방은 19세기에 들어와서 여러 나라에 의해 식민지 개척이 시작되었다.
프랑스가 아프리카에 개척한 식민지는 가봉, 기니, 니제르, 마다가스카르, 모로코, 모리타니, 말리, 베냉, 부르키나파소, 세네갈, 알제리, 중앙아프리카, 지부티, 차드, 카메룬, 코모로, 코트디부아르, 콩고, 토고, 튀니지이고 아시아에 개척한 식민지는 네팔, 라오스, 베트남, 인도, 중국, 캄보디아, 파키스탄이고 중동에 개척한 식민지는 레바논, 시리아이고 아메리카에 개척한 식민지는 캐나다, 미국 루이지애나주(미시시피강 유역 전역), 아이티이며 오세아니아에 개척한 식민지는 바누아투(Vanuatu, 오세아니아의 남태평양에 있는 섬나라, 영국과 공동으로 통치함)이다.
* 베트남의 역사
1000년 동안 중국의 지배를 받아오던 베트남은 중국오대십국의 혼란시대에 독립하여 안남(安南)의 응오 왕조(안남국, 938 ~ 968), 대구월(大瞿越, 대구월국, 968 ~ 1054), 대월(大越, 대월국, 1054 ~ 1802), 월남(越南, 월남국, 1802 ~ 1945) 순으로 나라가 이어진다.
대월국(大越, 1054 ~ 1802)의 막 왕조(1527 ~ 1592, 1592 ~ 1677)시기인 1620년에 프랑스인 예수회 신부 알렉상드르 드 로드(Alexandre de Rhodes, 1591 ~ 1660)가 베트남에 들어와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다.
프랑스는 1757년 인도에서 영국과의 플라시 전투에서 패하자 그 이후 베트남으로 진출했다.
응우옌푹아인(阮福映, 쟈롱帝)은 대월국(大越, 1054 ~ 1802)의 떠이선 왕조(Tây Sơn Triều, 1778 ~ 1802)의 내분을 틈타 떠이선 왕조를 멸망시키고 1802년 베트남 월남국(越南, 1802 ~ 1945) 최후의 왕조인응우옌 왕조(Nhà Nguyễn, 1558 ~ 1777, 1802 ~ 1945)를 열었다.
1802년 응우옌 푹 아인(阮福映, 쟈롱帝)이 베트남에 새로운 왕조를 세울 때 프랑스 선교사들의 도움이 있었던 관계로 이후 베트남과 프랑스의 밀접한 관계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응우옌 왕조(NguyenDynasty, 阮王朝 완왕조, 家阮, 1558 ~ 1777, 1802 ~1945)의 2대 황제 민망제(Minh Mạng, 재위 : 1820 ~ 1841)가 1836년에 선교사 7명을 처형하는 천주교 선교사 박해사건을 일으키자, 영국과 경쟁하여 일찌기 인도차이나로 진출을 꾀하던 프랑스 나폴레옹 3세(Napoléon III, 샤를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Charles Louis Napoléon Bonaparte, 1808 ~ 1873, 제2공화국 대통령 재위 1848 ~ 1852, 프랑스 제2 제국 황제 재위 1852 ~ 1870)는 선교의 자유를 보장받기 위해 외교적 노력을 기우렸으나 베트남이 수용을 아니하자 천주교 탄압을 구실로 1858년 다낭을 공격하였고 이어서 1858년 9월에는 베트남의 이권 장악을 위해 샤를 리고 드 주누이(Charles Rigault de Genouilly, 프랑스 해군 제독)가 지휘한 프랑스-에스파냐(필리핀 주둔 스페인군) 연합군이 사이공을 공격하여 점령하였으나 다시 베트남군에 포위 당해 사이공 포위전(Siege of Saigon)을 전개하여 1859년 2월에 점령하였다. 그 후 프랑스는 베트남 북부 및 중부를 공략하여 1883년 안남 보호령(Protectorat d'Annam)이라는 프랑스령 안남을 세우고 1884년에는 베트남 전국토를 프랑스로 식민지로 선언했다.
1884년 프랑스가 베트남을 보호령으로 만들자, 민족 독립을 표방하는 반(反)프랑스운동이 일어났다.
베트남에 대한 청나라의 종주권을 놓고 프랑스가 베트남 북부의 통킹을 차지하기 위하여 청나라와 벌인 청불 전쟁(청프 전쟁, Sino-French War, 1884 ~ 1885)에서 승리한 프랑스는 베트남을 강점하였다.
1859년부터 1885년까지 프랑스는 무력을 통해 타이와 미얀마를 제외한 인도차이나 반도(즉, 현재의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를 식민지화하여 프랑스령 인도차이나(1885년)를 세웠다.
1차 세 세계대전을 계기로 일어난 민족자결주의 영향을 받아 1927년 베트남 국민당과 1930년 인도차이나 공산당이 조직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일본이 베트남에 침입하자, 민족주의 세력들 중 가장 조직력이 뛰어났던 호찌민이 주도하는 베트남 공산당이 1941년 5월 비엣민(Việt Minh, 베트남 독립동맹회의 Việt Nam Ðộc Lập Ðồng Minh Hội, 월맹)을 결성하였다.
일본 제국의 통치로 베트남에서 40만 명의 목숨을 잃었으며 일본 제국은 베트남의 자원만 독식하였으므로 베트남 경제는 완전히 무너졌다.
1945년 8월 태평양 전쟁이 끝나자 비엣민을 중심으로 베트남 민주 공화국을 설립하였다.
이때 프랑스는 전쟁 전의 지배권을 되찾고자 다시 군대를 파견하여 베트남의 남부를 지배함에 따라 북부의 호찌민이 이끄는 비엣민(Viet Minh,Democratic Republic of Vietnam 베트남 민주공화국, 월맹 越盟, 1945 ~1976)과 남북으로 대립하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1946년 말부터 프랑스와 비엣민(Viet Minh,Democratic Republic of Vietnam 베트남 민주공화국, 월맹 越盟, 1945 ~1976) 사이에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The First Indochina War,베트남 독립 전쟁, 프랑스-베트남 전쟁 the Franco-Vietminh War,1946년12월 19일 ~1954년8월 1일)이 일어났다.
1954년 5월 7일 디엔비엔푸 전투(Battle of Dien Bien Phu, 1954)에서 베트남 민주공화국(월맹)군이 프랑스군에 대승을 거두자 프랑스군은 철수하였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결과 1954년 7월 21일에 체결된 제네바 협정(Geneva Conference, 1954, 스위스)은 통일된 베트남을 수립하기 위하여 1956년 7월 이전에 보통선거를 진행할 것을 규정하였지만 서명되지 않았으며 베트남을 공산주의 국가인 북베트남과 친서방 진영인 남베트남을 일시적으로 북위 17도를 기준으로 분할하는 것에 동의했다.
이후 남베트남에서는 응우옌 왕조의 마지막 황제 바오 다이를 왕으로 내세워 베트남국을 수립하였으나 베트남국은 로마 가톨릭교회신자이며 미국의 지원을 받은 응오딘지엠(Ngô Ðình Diệm, 초대 대통령 임기 1955년10월 26일 ~ 1963년11월 2일) 수상이 쿠데타를 일으켜 국민투표로 군주제를 폐지하고 베트남 공화국(Republic of Vietnam, Việt Nam Cộng Hòa, 1955 ~ 1975)을 세워 북부의 월맹(越盟, 비엣민, Viet Minh,Democratic Republic of Vietnam 베트남 민주공화국, 1945 ~1976)과 남북으로 대립하였다.
1964년 미국은 동남아의 공산화를 저지하기 위한 정책으로 도미노 이론을 주장하며 통킹만 사건(Gulf of Tonkin Incident,1964년8월2일 통킹만에서 북베트남 해군의 어뢰정 3척이 미 해군 USS 매독스함을 선제 공격으로 교전한 사건)을 계기로 베트남에 개입하여 베트남 전쟁을 개시하였다.
1964년 8월4일에도 통킹만에서 양군이 교전하였다고 발표하였지만 이것은 전쟁을 일으키기 위하여 조작한 것으로 밝혀졌다.
라. 프랑스 대혁명(French Revolution, 1789 ~ 1794)
프랑스의 부르봉(Bourbon) 왕조의 루이 14세(Louis XIV, 재위 1643 ~1715)는 강한 국가를 이룩하여 세력을 떨쳤다.
그러나 루이 14세(Louis XIV, 재위 1643 ~ 1715)는 전쟁비용 등으로 세금을 과다 징수하였으므로 파리 시민에 의해 언젠가는 궁전이 위험에 쳐할 수도 있음을 인지하고는 파리에서 남서쪽으로 17km나 떨어진 베르사유에 있던 루이 13세(Louis XIII, 재위 1610 ~ 1643)의 사냥터 별장에 1662년 대정원을 착공하고 1668년 건물을 증축하여 U자형 궁전으로 개축하였다. 1680년대에 다시 큰 건물을 증축하고 남쪽과 북쪽에 별관과 뜰을 추가하여 길이 680m에 이르는 크고 화려한 베르사유 궁전(Chateau de Versailles)을 건설하였던 것이다.
이어서 왕위에 오른 루이 15세(Louis XV, 재위 1715 ~1774)와 루이 16세(Louis XVI, 재위 1774 ~1792)로 넘어가면서 국력이 점차 약해졌다.
루이 16세(Louis XVI, 재위 1774 ~1792) 시대에 이르러서는 상업자본주의가 발달하였으며 이에 부르주아 계급(시민계급)이 새로운 세력으로 떠올랐다.
이때에 프랑스의 앙시앵 레짐(Ancien régime, 혁명 전의 구제도)인 삼부회는 제1신분(성직자)과 제2신분(귀족)은 2%의 인구로 면세, 주요 관직과 40%의 토지를 소유하였지만 인구의 98%를 차지하던 제3신분(평민)은 60%의 토지만을 소유하고 무거운 세금을 부담하며 정치에서는 배제되었다.
그리고 미국의 독립전쟁과 볼테르(Voltaire), 와 샤를 드 몽테스키외(Charles de Montesquieu), 장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 등의 계몽주의가 확산됨에 따라 귀족과 승려 등의 특권층에 대한 피지배 평민 계층의 비판의식이 높아지고, 부패한 왕실에 대한 시민의 불만이 고조되고 있었다.
프랑스는 루이 13세 때부터 30년 전쟁, 7년 전쟁, 베르사유 궁전 건설 등 왕실의 과도한 지출로 프랑스 재정은 적자가 누적되고 있었다.
여기에 루이 16세(Louis XVI, 재위 1774 ~ 1792)는 미국 독립 전쟁을 지원하였으므로 국가 재정은 파산 직전에 이르렀다.
영국도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전쟁을 치렀지만 영국은 세금을 거두어 전쟁비용을 충당한 반면에 프랑스는 빗을 내어 전쟁을 치렀으므로 국가 재정이 더욱 심각하였던 것이다.
영국과 프랑스는 7년 전쟁(1756 ~ 1763)과 미국독립 전쟁(1775 ~ 1783) 등으로 심각해진 재정난을 탸개하기 위해 1786년 9월 최초의 국가간 자유통상협정인 이든 조약(Eden Treaty, 1786, 영국 협상대표인 William Eden 남작의 이름)을 맺어 관세율을 80 ~ 120%에서 10 ~ 50%로 내리는 등 원칙적인 자유무역을 하기로 한 것이다.
조약의 결과 프랑스는 관세율 인하로 영국의 면직품 등 저가의 공산품이 쏟아져 들어와 프랑스 산업이 몰락하여 파리의 실업률이 50%를 넘었고 무역 수지를 맞추기 위해 농산물 수출이 급증하여 파리의 빵값이 급등하였으며 기대했던 포도주 등의 수출은 크게 늘지 않았다. 프랑스는 경제난이 가중되어 민중의 분노가 쌓이고 쌓여 대혁명으로 이어졌으며 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국민의회는 1793년 이든조약을 폐기하였다.
특히 1334년 필리프 6세가 제염(製鹽)을 국가가 통제하고 일반 서민에게 염세(소금세, gabelle)를 부과하기 시작하였는데 국가 제정이 어려워지자 점점 세율을 높여 루이 16세 때에는 생산비의 140배에 달하여 원성이 치솟고 있었다.
프랑스의 염세(소금세, gabelle) 제도에는 8세 이상은 일주일에 한 번 이상 소금을 구입하도록 되어 있어 어느 누구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제3 신분이 국가 전체의 세금을 부담하였으므로 제3신분이 부담하는 세금이 점점 과중해지자 시민계급을 중심으로 한 제3 신분(평민)의 불만은 극에 달하였다.
과다한 세금 등 경제적 불만과 전제 군주제 타파를 주장하며 일어나 혁명을 주도한 상공업자나 지주인 시민계급을 오늘날에는 부르주아(bourgeois, 有産階級, 유산계급)라 한다.
대혁명의 직접적인 원인은 재정적자를 빚을 내어 감당해왔는데 이렇게 누적된 빚을 루이 16세가 조세로 해결하기 위해 삼부회를 열어 불만에 가득찬 제3계급을 이끌 단체인 국민의회를 조직하게 만든 것이라 할 수 있다.
* 계몽주의(啓蒙主義, Enlightenment, Lumières)
17, 18세기에 유럽에서 일어난 계몽주의(啓蒙主義, Enlightenment, Lumières)는 몽테스키외(Charles Louis de Secondat, Baron de La Brède et de Montesquieu, 프랑스), 볼테르(Voltaire, 프랑스), 루소(Jean-Jacques Rousseau, 프랑스), 디드로(Denis Diderot, 프랑스), 엘베시우스(Claude Adrien Helvétius, 프랑스) 등이 주도하였으며 이들의 사상은 17세기 R. 데카르트(Descartes, René, 프랑스), B. 스피노자(Baruch de Spinoza, 네덜란드) 등의 합리주의와 J. 로크(Locke, John, 영국), T. 홉스(Thomas Hobbes, 영국) 등의 철학, 그리고 뉴턴(Isaac Newton, 영국)의 기계론적 우주관에 기반을 두고 있다.
계몽주의는 자연의 빛을 다방면에 미치도록 하자는 것으로 주된 신념은 자연과 이성이다.
계몽주의는 왕권신수설과 같은 도그마와 종교에서의 미신과 같은 구습(舊習)을 타파하고 빛에 해당하는 인간 각자의 이성의 힘을 길러 행동함으로써 이성적, 자립적인 인격의 공동체 실현을 지향하였다.
이는 이성을 초월하는 왕권, 은총과 계시의 권위에 의지하는 구교회, 스콜라철학에 비판적이었다.
정치도 신성(神性) 한 것이 아니라 물리적, 생물학적 등의 자연법칙에 따르고 이성으로 방향을 정하여 조정할 수 있으므로 개개인이 이성을 존중하고 행동할 수 있는 자유와 평등을 정치의 원리로 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종교의 교의(敎義, dogma)도 이성에 반해서 모순되어서는 안 된다는 이신론(理神論, deism)을 주장했다.
계몽사상은 프랑스, 독일에서 강하게 전개되었으며 미국 혁명과 프랑스혁명에 커다란 영향력을 미쳤다.
1) 국민의회(Assemblée nationale, 1789)
루이 16세(Louis XVI, 재위 1774 ~ 1792)는 시민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제1 신분(성직자)과 제2 신분(귀족)에게도 세금을 부과하는 개혁안을 제시했으나 기득권을 침해받을 것을 우려한 귀족과 성직자들은 개혁안을 거부하고 삼부회(三部會, Etats generaux, 귀족, 성직자, 평민으로 구성)를 소집할 것을 요구하였다. 귀족과 성직자들은 삼부회에서 평민이 세금을 부담하도록 의결하고 자신들은 세금을 부담하지 않을려는 의도였다.
국왕은 1613년 이후 150년 만에 1789년 베르사유 궁전에서 귀족 200명, 성직자 200명, 평민 400명의 대의원을 선출하여 구성된 삼부회를 열었다.
삼부회에서 평민 대표들은 봉건사회의 특권을 폐지하고 평등 과세 등의 개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귀족과 성직자들은 평민과 같이 세금을 부담할 뜻이 없었으므로 삼부회에서 평민들이 제안한 안건을 부결시키기 위해 삼부회 표결방식을 귀족, 성직자, 평민 각부가 한 표씩으로 하여 다수결로 결정하는 전통적인 방식을 주장하였다. 귀족과 성직자는 과세 등에서 입장이 같아 합세하면 2:1로 유리하기 때문이었다.
이에 평민들은 사람 수로 표결하는 방식을 5월달 한달 내내 주장하여 세금 문제는 의제로 다룰 수 없었다.
귀족과 성직자 대의원들 중에는 상당수가 평민들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어 사람 수로 표결하는 것이 평민에게 유리하였다.
가) 테니스 코트의 서약(Serment du Jeu de Paume, 세르망 드 쥐드폼, 죄드폼 선서, 1789. 6.)
루이16세는 삼부회에서 세금 개혁안이 결정되지 않자 삼부회를 해산시켰다.
삼부회의 평민 대표(선출된 대표는 농민 등이 아니고 변호사, 부를 축적한 상공인, 지주 등이었음)들은 사람 수 표결 방식이 채택되지 않자 테니스 코트로 장소를 옮겨 독자적으로 회의를 계속하여 새 헌법이 제정될 때까지 해산하지 않겠다는 선언(테니스 코트의 서약)을 하고 1789년 평민 대표들만으로 구성된 국민의회를 설립하였다.
정치세력을 나누는 우파, 좌파라는 용어가 이때에 생겨났다.
1789년 국민의회에서 자리배치를 할때 의장석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의회군주제파(왕당파), 왼쪽에 공화파의 자리를 배치한데서 시작되었다. 서양에서도 오른 쪽은 옳다는 의미를 가졌고 왼쪽은 사악하다는 의미를 가졌으므로 수가 많았던 의회군주제파(왕당파)는 오른쪽에 앉았고 보다 새로운 사상을 가진 소수의 공화파는 왼쪽에 앉았던 것이다. 그후 공화파가 의회군주제파(왕당파)를 타도한 뒤 구성한 1792년의 국민공회에서는 오른쪽에 온건 개혁세력인 지롱드파가, 왼쪽에 급진 개혁세력인 자코뱅파가 앉았다. 이후 우파는 온건한 개혁세력, 좌파는 급진적인 개혁세력을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연 이은 흉년으로 1789년에는 빵값이 천정부지로 올라 시민들의 불만이 폭발 직전이었고 상당수의 성직자들과 귀족층들이 국민의회에 가세하였으며 미라보 백작(미라보 백작 오노레 가브리엘 리케티, Honoré Gabriel Riqueti, Comte de Mirabeau, 1749 ~ 1791, 미라보 후작의 아들로 귀족이었으나 평민 대표로 국민의회의 의장으로 활약) 등도 가세하여 열변으로 세 몰이를 하여 국민의회가 대세가 됨에 따라 루이 16세는 국민의회를 인정하였다. 국민의회는 헌법위원회를 조직해 헌법 제정 작업에 들어갔다. 이때의 국민의회는 입헌 군주파가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치 정부에 해당하는 파리 코뮌(Paris Commune, 144명의 파리 각 지역 대표로 구성, 1789 ~ 1795)을 파리 시청에 설립했다.
초기의 코뮌(Commune)은입헌 군주파, 온건한 지롱드 파(Girondins) 등이 지배했지만 1792년 8월 10일 봉기부터 1794년 7월 27일 테르미도르 반동(Thermidorian Reaction)이 일어나기까지 코뮌의 통제권은조르주 당통, 카미유 데물랭, 자크 에베르,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와 같은 급진적인 자코뱅파(Jacobins)가 장악했다.
나) 바스티유 감옥 습격(prise de la Bastille, 1789. 7.)
경제가 궁핍하여 시민들의 불만이 쌓이고 사회가 불안정한 시기에 정치가의 선동으로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상황이 되자 루이 16세가 영국의 찰스 1세처럼 처형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국경수비대를 베르사유와 파리 지역 일대에 배치시키고 국민의회를 무력으로 진압하려 하자, 7월 14일 파리 민중들은 불만이 폭발하여 봉기에 필요한 무기를 탈취하기 위해 바스티유 감옥(바스티유 요새, 왕정의 상징, 무기 저장소)을 습격하였다. 감옥 호위병과 대치하여 바스티유 감옥장과 협상하는 중에 뒤쪽에서 오발로 시민이 사망하자 성난 민중들은 감옥을 점령하고 파리로 행진했다. 이를 계기로 민중의 저항은 전국으로 번지게 되고 극심한 혼란으로 공포에 떨게 된 지방민들이 파리로 진격할 태세였다. 이에 루이 16세는 정권을 내놓았다.
다)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1789. 8.)
루이 16세(Louis XVI, 재위 1774 ~ 1792)로부터 권력을 이양받은 국민의회는 1789년 7월 16일 파리시 자치정부(Commune de Paris)를 수립하여 국가를 안정시키고 1789년 에마뉘엘 조제프 시에예스(Emmanuel Joseph Sieyès, 1748 ~ 1836)와 라파예트(Lafayette, Marie Joseph Paul Yves Roch Gilbert Motier, Marquis de Lafayette, 1757 ~ 1834)가 기초한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Déclaration des droits de l'Homme et du citoyen)을 국민의회에서 가결하여 선포하였다.
천부인권, 인간의 자유와 평등, 주권재민, 사상과 표현의 자유, 사유재산의 자유 등을 골자로 한 선언은 민주주의의 초석이 되었다.
라) 국왕의 파리 복귀 사건
사회 상황은 점점 악화되었다. 농촌에서 흉작이 들어 파리의 빵값이 뛰자 분노한 파리의 하층계급 주부들이 베르사유까지 행진하며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루이 16세에게 파리로 귀환할 것을 요구했으나, 루이 16세가 거절하자 베르사유 궁전으로 난입해 루이 16세(Louis XVI)와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를 압박하여 파리 튈르리 궁(Palais des Tuileries, 1563년 앙리 2세의 왕후인 메디치의 가타리나 Catherine de Médicis가 세움)으로 끌고 왔다. 이를 '국왕의 파리 복귀 사건'이라 한다.
1334년 필리프 6세(Philippe VI, 재위 1328 ~ 1350)가 제염(製鹽)을 국가가 통제하고 일반 서민에게 소금세(gabelle)를 부과하기 시작하였는데 국가 제정이 어려워지자 왕들이 점점 세율을 높여 원성이 치솟았으므로 국민의회는 1790년에 소금세(가벨, gabelle)를 폐지하였다.
국민의회는 가톨릭 교회의 재산을 국가에서 몰수하여 재정 위기 해소에 사용하고, 성직자들을 교황청이 아닌 정부에 충성하게 했다. 많은 성직자들은 정부에 충성을 맹세하는 것을 거부하고 국민의회를 떠났다. 이는 후에 반혁명운동의 토대를 형성하는 계기가 된다. 정부보다 본당 신부들을 더 신뢰했던 방데 지방의 방데 반란(Guerres de Vendée, 1793~1795, 방데 지방의 왕당파 농민들이 일으킨 반혁명운동)을 비롯한 지방 농민들의 반발을 사게 되었기 때문이다.
2) 입법의회 수립
가) 바렌느 사건(Flight to Varennes, La fuite à Varennes, 1791. 6. 20. ~ 22., 국외 탈출계획)
프랑스 대혁명 초기의 국민의회에는 라파예트(Lafayette, Marie Joseph Paul Yves Roch Gilbert Motier, Marquis de Lafayette, 1757 ~ 1834), 콩트 드 미라보(Comte de Mirabeau, Honoré Gabriel Victor Rigueti Conte de Mirabeau, 1749 ~ 1791), 장 실뱅 바이(Jean Sylvain Bailly, 1736 ~ 1793), 에마뉘엘 조제프 시에예스(Emmanuel Joseph Sieyès, 1748 ~ 1836) 등의 입헌 군주파가 국민의회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1791년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를 보호해 주던 국민의회의 콩트 드 미라보(Comte de Mirabeau, Honoré Gabriel Victor Rigueti Conte de Mirabeau, 1749 ~ 1791)가 죽자 루이 16세(Louis XVI, 재위 1774 ~ 1792)와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 1755 ~ 1793) 일가는 국외 탈출을 시도하였지만 바렌느에서 혁명군에게 체포되었다.
국민의회는 왕과 왕비의 처벌을 하지 않기로 결정하였지만 국민들은 이에 반발했고, 파리 시민들 사이에서는 왕정 폐지 주장이 힘을 얻게 되었다. 7월 17일, 자코뱅파(Jacobins, 클뢰브 데 자코뱅파, Club des jacobins, 헌법의 벗 결사단 1789~1792, 자유와 평등의 벗, 자코뱅 결사단 1792~1794, 1793년 6월부터 1794년 7월까지 혁명정부를 주도)와 코르들리에 클럽(Club des Cordeliers, 인민 결사, 인간과 시민의 권리 정우 결사, Société des Amis des droits de l’homme et du citoyen)이 주축이 되어 파리 마르스 광장에서 왕정 폐지와 공화정 수립을 주장하는 시위가 열렸고, 국민의회는 라파예트(Lafayette, Marie Joseph Paul Yves Roch Gilbert Motier, Marquis de Lafayette, 1757 ~ 1834, 입헌 군주파)가 지휘하는 국민군을 보내 이를 무력 진압하였다.
나) 입법의회(Assemblée nationale législative, Legislative Assembly, 1791. 10.)
국민의회는 프랑스 최초의 헌법을 1791년에 공포했는데, 헌법의 골자는 입헌군주제를 채택하고 일정 금액 이상의 직접세를 내는 성인 남자에 한해 참정권을 허용하는 것 등이었다.
국민의회는 헌법 제정 후 해산되고, 뒤를 이어 입법의회가 10월 1일에 수립되었다.
입법의회의 좌파인 지롱드 파(Girondins, 공화파의 온화한 의회주의, 1791년 10월부터 1792년 9월까지 입법 의회를 장악)는 해외로 망명한 귀족들에게 2개월 이내로 복귀할 것을 명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는데, 이는 망명 귀족들이 해외에서 외국 정부와 결탁하여 프랑스를 혼란스럽게 할 것을 우려한 결과였다.
한편 프랑스혁명으로 유럽 각국은 혁명 열기에 휩싸였다. 각국은 전제왕권과 봉건체제의 붕괴를 우려하고 있었고, 특히 프로이센(독일)에서는 프랑스혁명을 지지하는 분위기가 커져가고 있었다.
다) 프랑스혁명전쟁(French Revolutionary Wars, 1792.4.~)
프랑스혁명의 전파로 자국의 전제왕권과 봉건체제의 붕괴를 우려한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영국, 러시아, 그리고 옛 세력을 회복하려는 프랑스 왕당파 등과 프랑스 공화국 사이에 프랑스혁명전쟁이 벌어졌다.
1791년 8월 27일, 오스트리아의 레오폴드와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는 프랑스망명귀족들과 협의하여 프랑스에 절대왕정으로 복귀할 것을 희망하며 그를 위한 효과적인 수단을 거부하지 않을 것이라는필니츠 선언(Pillnitz Declaration)을발표했다.
이렇게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이 프랑스혁명에 대해 간섭을 하자 프랑스 제1공화정(1792 ∼ 1802, 전쟁을 주장하여 지지를 받은 지롱드 파 내각)은 필니츠 선언을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이 혁명을 위협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1792년 4월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였다.
선전포고 후인 1792년 4월 29일 프랑스의 샤를프랑수아 뒤 페리에 뒤무리에(Charles-François du Périer Dumouriez, 1739 ~ 1823) 장군이 군대를 이끌고 오스트리아 령 네덜란드를 침략하였으나 기대했던 내부 호응은 없고 오히려 왕당파가 내통하였으며 병사들이 달아나는 등 오합지졸이라 마케인 전투(Battle of Marquain)에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폐하였다.
프랑스 정부의 혼란한 틈을 타 1792년 여름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연합군이 벨기에를 통해 침공하자 프랑스의 입법의회(1791.10 ~ 1792.9)는 1792년 7월 11일 “조국이 위기에 빠졌습니다!”라고 선언을 하였으며 이 선언에 따라 프랑스 각지에서 모집된 의용군이 파리에 집결했다.
브라운 슈바이크 공작이 이끄는 4만2천명의 프로이센군, 2만9천명의 오스트리아, 6천명의 헤센(독일) 군대가 연합하여 7월 19일 프랑스 국경을 넘어왔다.
첫 전투에서 프랑스의 샤를프랑수아 뒤 페리에 뒤무리에(Charles-François du Périer Dumouriez, 1739 ~ 1823) 장군의 군대가 대패하여 프랑스 혁명 정부는 큰 위기에 처했다.
프랑스 시민들은 프랑스군의 패배 원인이 국왕 루이 16세가 외국 군주들과 내통하였기 때문이라 생각하고, 8월 10일 튈르리 궁전((Palais des Tuileries, 파리)을 습격하였다.
루이 16세는 의회로 도피하였으나 의회는 왕권을 중지시키고 국왕 일가를 떵플 탑(Tour du Temple, 수도원)에 유폐했다(8월 10일 사건).
3국 연합군은 계속 진격하여 1792년 8월 23일에 롱위를, 1792년 9월 2일에 베르됭(Verdun)을 함락시켰다.
프랑스군은 대혁명으로 유능한 장군들이 처형되고 많은 장교들이 외국으로 망명하였으며 국내 왕당파들의 정보유출과 장교(귀족출신으로 군주제 지지)들의 태업으로 붕괴 직전이었다.
1792년 9월 20일 샤를 프랑수아 뒤무리에 장군은 프랑수아 에티엔 크리스토프 켈레르만(François Étienne Christophe Kellermann,1735 ~ 1820, 육군원수) 장군의 지원받아 프로이센군보다 많은 4만 7천명의 의용군을 이끌고 발미에서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의 프로이센군 3만 5천명과 전투를 벌여 프로이센군의 침략을 저지했다. 이 발미 전투(Battle of Valmy)는 결정적인 승리가 아니고 프로이센군의 전술적인 후퇴였지만, 이 승리는 프랑스 국민을 고무시켰다.
프랑스군은 공세로 전환하여 1792년 11월 뒤무리에가 네덜란드 플랑드르의 제마페스 전투(battle of Jemappes)에서 오스트리아군에게 승리하여 남쪽 네덜란드를 점령했다. 아당 필리프 드 퀴스틴 백작(Adam Philippe, Comte de Custine,1742~1793, 프랑스 장군)은 독일 프랑크푸르트까지 진격했다.
1793년 3월에는 스페인에도 전쟁을 선포하고 원정에 나섰던 것이다.
1792년 11월 공화국의 혁명군이 영국의 대륙 무역 주요 교역로인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현, 벨기에)를 공격하자 1793년 영국의 주도로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스페인 등 11개 국은 프랑스혁명을 부인하고 확산을 막기 위해 제1차 대(對) 프랑스 동맹(First Coalition, 1793 ~ 1797)을 결성하였다.
1792년 12월 영국이 프랑스로의 곡식과 원자재 수출을 금지시키고 런던 주재 프랑스 공사를 추방함에 따라 1793년 2월 프랑스의 국민공회는 투표를 거쳐 만장일치로 영국에 선전포고를 했다.
영국은 중립적 입장을 취하고 있는 미국이 프랑스와 교역을 이어가자 해군을 동원하여 수백 척의 미국 상선을 나포해 미국을 압박하였다. 미국이 밀접한 관계인 프랑스와 동맹으로 발전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함이었다. 국력이 약해 영국과 전쟁을 원치 않았던 미국은 제이 조약(Jay's Treaty, 1794)을 체결하여 미국 영내의 영국군 철수 등과 호혜 통상(互惠通商)을 협약하였던 것이다.
프랑스군의 모병제는 전통적으로 스위스 출신 등으로 구성된 용병제였으나 1792년 혁명전쟁이 일어나자 복무기한이 1년인 지원병을 모집하여 군대를 확대 운용하였던 것이다.
1793년 2월 24일 국민 공회는 병력 부족을 보충하기 위하여 “30만명 모병안”을 결의했지만, 모집된 군인은 부족하였다.
1793년 뒤무리에는 남부 네덜란드 방위하라는 정부 방침을 무시하고 훈련되지 않은 보충병으로 네덜란드를 침공하였으나 1793년 3월 네르빈덴에서 훈련된 오스트리아군에 완전히 패배하였다(네르빈덴 전투 Battle of Neerwinden,플랑드르, 1793.3.).
뒤무리에는 자신의 계획이 실패하자 공화국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려다 부하의 반대에 부딪쳐 오스트리아로 망명하였으며 연합군은 프랑스 침공을 시작하였다.
1792년 모집한 지원병의 1년간의 복무기한이 끝나자 1793년에 법령을 바꾸어 징병제로 전환하였다.
1793년 8월 23일 국민 의회는 "국가총동원령"을 발령하고, 징병제로 30만명을 모병할 계획을 세웠는데 실제는 각 계층의 국민을 평등하게 징병하여 120만명을 모병하였다. 프랑스군은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대군이 되었다.
군장교출신으로 과학자이며 공학자인 라자르 카르노(Lazare Carnot, 1753 ~ 1823, 프랑스 공학자, 수학자, 전쟁장관, 내무장관)가 1791년 9월에 파드칼레(Pas-de-Calais)지방의 국민의회(1789, 국민제헌의회, ~ 1792) 의원으로 선출되고 이어 국민공회(1792 ~ 1795) 의원으로 선출되어 전쟁위원회에서 징병제를 주장하여 150만(1794년) 대군으로 확대시켰으며 그리고 군대 조직을 재편성하여 병사와 군수품을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게하는 등 최강의 프랑스 군대를 조직하여 혁명전쟁과 나폴레옹 전쟁에서 프랑스군을 승리로 이끌게 한 "승리의 조직자"로 불리었던 것이다.
이 시절 유럽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일찍부터 대포의 포신을 주물로 바가지 모양의 긴 원통형으로 만들었다. 그 결과 속 표면이 고르지 않아 조준선을 맞출 수 없어 포탄을 원하는 방향으로 발사하기가 어려웠다. 프랑스에서는 이를 개선하여 주물로 원통형을 만든 다음 그 속을 고르게 파내는 방법으로 포신을 만들어 포의 명중률을 높였다.
1793년 프랑스 공화국 혁명군은 툴롱(Toulon)항을 점령한 왕당파와 영국, 스페인 연합군을 나폴레옹이 요충지에 포대를 설치하고 육지의 포로 연합군의 함선에 발포하여 격침시키는 기지(機智)를 발휘함으로써 상륙했던 연합군을 바다로 철수케 하는데 큰 공을 세웠으나 영국과 스페인 함대는 이 전투에서 프랑스의 주력함대를 거의 불태워 버렸다(Siege of Toulon 툴롱 전투, 1793. 8. ~ 12.).
프랑스군의 모병제는 전통적으로 스위스 출신 등으로 구성된 용병제였으나 1792년 혁명전쟁이 일어나자 복무기한이 1년인 지원병을 모집하여 군대를 확대 운용하였고 1년간의 복무기한이 끝나자 1793년에 법령을 바꾸어 징병제로 전환하였다.
군장교출신으로 과학자이며 공학자인 라자르 카르노(Lazare Carnot, 1753 ~ 1823, 프랑스 공학자, 수학자, 전쟁장관, 내무장관)가 1791년 9월에 파드칼레(Pas-de-Calais)지방의 국민의회(1789, 국민제헌의회, ~ 1792) 의원으로 선출되고 이어 국민공회(1792 ~ 1795) 의원으로 선출되어 전쟁위원회에서 징병제를 주장하여 150만(1794년) 대군으로 확대시켰으며 그리고 군대 조직을 재편성하여 병사와 군수품을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게하는 등 최강의 프랑스 군대를 조직하여 혁명전쟁과 나폴레옹 전쟁에서 프랑스군을 승리로 이끌게 한 "승리의 조직자"로 불리었던 것이다.
1793년 공화국 혁명군은 스페인과 전쟁을 벌인 결과 승리하여 1795년에 강화 조약을 체결하고 스페인을 속국으로 삼았다.
1795년 프랑스 공화국 혁명군은 네덜란드를 침공하여 빌럼 5세를 추방하고 1795년 바타비아(Batavia,1795 ~ 1806) 공화국을 설립하여 프랑스 공화국의 위성 공화국(Client)으로 만들었다.
총재정부의 5 총재정부(집정관) 집권 시기인 1796년에 프랑스군은 제1차 이탈리아를 원정하여 오스트리아를 포위 공략한 결과 1796년 10월 캄포포르미오 조약(Treaty of Campo Formio)을 맺었으며 이에 오스트리아가 동맹에서 탈퇴함에 따라 제1차 대(對) 프랑스 동맹은 붕괴되었다.
1798년, 제2차 대(對) 프랑스 동맹이 결성되어, 오스트리아가 다시 참전하자 프랑스는 다시 열세가 되었다.
1798년 장바티스트 주르당(Jean-Baptiste Jourdan,1762~1833, 공화국파의 군인이자 정치가, 제국 원수)에 의해 제정된 "주르당법"은 "모든 프랑스인을 병사"로 인정하고 20~25세의 남성중에서 미혼 혹은 결혼을 했더라도 자녀가 없는 사람을 대상으로 매년 일정한 숫자를 징병한다는 것으로 프랑스의 징병병제가 확립 되었다.
1798년 프랑스 나폴레옹의 해군 함대가 나일 해전(아부키르 만 해전, The Battle of the Nile or Aboukir Bay,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서쪽)에서 영국 해군에 괴멸되어 오스만튀르크령인 이집트에 원정 중이던 프랑스의 나폴레옹 군대가 고립되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국내 정세가 변함에 따라 정치에 관여하기 위해 클레베르를 후임 총사령관(3년 후에 항복)으로 임명하고 정부의 명령 없이 참모들과 1799년 9월 귀국하였다.
이집트에서 돌아온 나폴레옹이 최고 권력을 장악하고 군을 통솔하여 반격하자 오스트리아는 1801년 2월 뤼네빌 조약(Paix de Lunéville, Peace of Lunéville)으로 다시 강화하였고, 영국도 1802년 3월 아미앵 조약(Treaty of Amiens)을 맺었다.
이리하여 프랑스혁명전쟁은 끝이 났다.
3) 프랑스 제1공화국(Première République française, 프랑스 공화국, République française)
가) 8월 10일 사건과 국민공회(Convention nationale, 1792.9.)
1792년 6월 20일, 파리 튈르리 궁(Palais des Tuileries, 1560년 건축 시작, 1789년 루이 16세 사용)으로 몰려가 루이 16세에게 퇴위를 요구했으나, 루이 16세는 의연한 태도로 맞서 시민들은 물러갔다. 입법의회의 입헌 군주파가 의용군을 모집해 맞서려 하자 공화정 파는 과격하게 시민 봉기로 혁명을 일으켰다.
1792년 8월 프랑스 국민군이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연합군에 연전연패하자 파리 시민들은 패전 책임자의 처벌과 왕정 유지를 주장하는 보수파인 입헌군주파 의원들의 축출을 요구하면서 다시 궐기하여 튈르리 궁(Palais des Tuileries)으로 쳐들어갔다. 루이 16세 일가는 의회로 피신했지만, 시민들이 의회까지 포위하자 결국 의회는 루이 16세 일가를 파리 코뮌(Commune de Paris, 1789 ~1795, 파리 각 지역 대표로 구성된 자치정부, 1792 ~ 1794 급진적인 자코뱅파가 장악) 측에게 넘겨주었다.
이 8월 10일 사건으로 왕정은 폐지되고 공화국으로 선언하면서 많은 입헌 군주파들이 축출되었다.
이후 파리는 1달여간 정부, 의회, 파리 코뮌(Commune de Paris, 1789 ~1795, 파리 각 지역 대표로 구성된 자치정부, 1792 ~ 1794 급진적인 자코뱅파가 장악)의 세 세력이 충돌하여 극도로 혼란스러운 상황이 지속되고 반혁명 용의자들이 대량 학살당하였다.
시민들이 1792년 8월 튈르리 궁(Palais des Tuileries)으로 쳐들어 왔을 때 루이 16세와 왕비는 의회로 떠나고 없었으며 빈궁을 지키던 스위스 용병(라이슬로이퍼, Reisläufer)인 근위대 786명은 궁을 지키는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끝까지 싸우다 전멸하였다.
스위스는 산악지대라 나라가 가난하였으므로 먹고살기 위해 무엇이든 해야 하는 처절하고 절박한 정신력과 산악지대에서 단련된 강인한 체력을 바탕으로 지방정부가 용병을 양성하여 용병을 필요로 하는 유럽의 프랑스 등 여러 나라에 파병하여 돈벌이하는 산업으로 발전시켰던 것이다.
스위스 용병(라이슬로이퍼, Reisläufer)은 외국에 고용되어 백년전쟁(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전쟁), 부르고뉴 전쟁(부르고뉴 공작과 프랑스 왕 사이에 벌어진 전쟁) 등 유럽의 여러 전쟁에 참가하여 명성을 떨쳤으며 현재도 로마 교황청 근위대로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
1792년 9월 프랑스군은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연합군을 발미 전투(Battle of Valmy)에서 격파하여 위기를 벗어났다.
공화파들이 입헌 군주파들을 밀어내고 혁명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공화파는 1792년 9월 21일 왕정 폐지를 선포하고 국민공회(Convention, 공화제 의회)를 설립하였다. 이로써 프랑스 제1공화국이 출범했다.
1791년 9월에 제정한 입헌군주제 헌법을 1792년 9월에 폐기하고 공화제 헌법 제정에 착수했다.
나) 루이 16세의 처형(1793.1.)
입법의회에서 좌파에 해당되었던 지롱드 파(Girondins, 공화파의 온화한 의회주의, 1791년 10월부터 1792년 9월까지 입법 의회를 장악)가 국민공회에서는 우파로 돌아섰고 좌파에는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Maximilien François Marie Isidore de Robespierre, 1758 ~ 1794)를 중심으로 하는 산악파(Montagnards)가 새롭게 등장하였다. 지롱드 파는 본래 영국식의 입헌군주제를 지지한 만큼, 의회 중심주의적 성향과 시민 계급을 대변하였다. 산악 파는 중소시민, 농민 계층을 대변하여, 오늘날의 사회민주주의적 공화국을 지향하였다. 지롱드 파(Girondins)와 산악파(Montagnards)의 중간에 해당하는 파를 평원파(平原派, La Plaine, 온건파인 지롱드 파와 급진 좌파인 산악파의 중간)라 한다.
지롱드 파(Girondins)와 산악파(Montagnards)는 루이 16세 처리 문제를 놓고 격한 대립을 보인다.
산악파(Montagnards)는 파리의 자코뱅 주의자(자코뱅파, Jacobins, 클뢰브 데 자코뱅파, Club des jacobins, 헌법의 벗 결사단 1789~1792, 자유와 평등의 벗, 자코뱅 결사단 1792~1794, 1793년 6월부터 1794년 7월까지 혁명정부를 주도)들과 과격한 민심을 등에 업고 지롱드파를 몰아붙여, 결국 의회에서 투표 끝에 처형하기로 결정한다. 공화파들은 1793년 1월 21일 루이 16세를 처형하였다.
다) 급진 자코뱅당(Jacobins) 출현과 로베스피에르의 독재(1793.4.)
공화국 초기에는 공화파 중에서 계몽 부르주아(bourgeois, 상인이나 지주 등의 시민계급) 중심의 혁명을 지향한 온건한 지롱드당(Girondins, 지롱드 파, 공화파의 온화한 의회주의, 1791년 10월부터 1792년 9월까지 입법 의회를 장악))이 우세하였다. 그러다가 1793년 초부터 조르주 자크 당통(Georges Jacques Danton, 1759 ~ 1794), 장 폴 마라(Jean Paul Marat, 1743 ~ 1793),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Maximilien François Marie Isidore de Robespierre, 1758 ~ 1794) 등 산악파(山嶽派, Montagnards, 국민공회 좌파)를 주축으로 하는 급진 자코뱅당(Jacobins)의 세력이 강해졌다.
이에 위협을 느낀 지롱드파(Girondins)는 국민공회 안에 '12인 위원회'를 설치하고 정치범을 단속한다는 명분으로 파리 코뮌(Commune de Paris, 1789 ~1795, 파리 각 지역 대표로 구성된 자치정부, 1792 ~ 1794 급진적인 자코뱅파가 장악)을 탄압하였다.
이에 분노한 파리 시민들은 1793년 5월 31일, 국민공회를 포위하고 '12인 위원회'의 폐지와 반혁명 용의자 체포 등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국민공회에서는 산악파(Montagnards)와 지롱드 파(Girondins) 사이에 격론이 벌어지고 6월 2일 국민공회에 국민군(Garde national) 사령관 프랑수아 앙리오(François Hanriot, 1759 ~ 1794)가 난입하여 의원들을 위협하여 지롱드파 의원 29명이 제명 및 체포됨에 따라 지롱드파는 무력화되고 국민공회는 산악파(Montagnards)가 장악하게 된다.
전쟁과 경제난 등으로 프랑스의 국정은 혼란 속에 빠졌다.
이에 산악파(Montagnards)는 혼란을 안정시키고 농민들을 지지 기반으로 확보하기 위해 봉건적 공과(貢課, 곡물과 세금)의 무상 폐지와 농민들의 토지 무상분배를 내용으로 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1792년 9월에 입헌군주제 헌법을 폐기하고 새 헌법제정에 착수했던 국민공회는 1793년 8월 공화제 헌법을 제정하여 공포하였다.
1793년 7월 13일, 산악파(Montagnards)의 정신적 지주이자 과격 혁명가였던 장 폴 마라(Jean Paul Marat, 1743 ~ 1793)가 지롱드파 지지자였던 샤를로트 코르데(Charlotte Corday)에 의해 암살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렇게 되자 자코뱅당의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Maximilien François Marie Isidore de Robespierre, 1758 ~ 1794, 1793. 8. ~ 1793. 9. 국민공회의장)는 '방종한 자유의 폐기'를 선언하며 국민공회 안에 공안위원회(Comité de Salut Public)라는 일종의 혁명재판소를 설치하고 자신은 공안위원회 의장을 맡았다. 이를 통해 반혁명 혐의자를 대거 숙청하는 등 공포정치를 실시하였다.
1793년 8월 이후 프랑스의 전세가 불리해지고 경제난이 심화되자 최고가격제를 시행하였고 반혁명 용의자, 귀족 계급뿐만 아니라 악덕 독점 상인과 부르주아(Bourgeois, 有産階級, 상인이나 지주 계층)들까지 처단하였다.
이때 루이 16세(Louis XVI, 재위 1774 ~ 1792)의 왕비인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 1755 ~ 1793.10., 합스부르크 공국 오스트리아의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도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사형당하는 날 스트레스로 하루 만에 머리카락이 하얗게 모두 세었는데 이를 마리 앙투아네트 증후군이라 한다.
공포정치로 약 1년간 1만여 명의 희생자가 났다.
귀족들이 루이 16세에게 정치자금을 빌려주었으나 루이 16세가 정권을 잃어 채권을 돌려받을 수 없게 되자 왕을 포기하였으며 급진 자코뱅당(Jacobins)은 왕을 처단하여 국가의 부채를 정리하였으며 이어서 자코뱅당(Jacobins)은 귀족, 부유층과 더불어 중산층까지 처단함으로써 세수원이 줄어들어 국가 재정이 파탄나 무너지게 되었던 것이다.
라) 산악파(Montagnards)의 분열과 테르미도르 반동(Thermidor coup d'État, 1794.7.)
산악파(Montagnards)는 자크 르네 에베르(Jacques René Hébert, 1757 ~ 1794)를 중심으로 한 급진파와 조르주 당통(Georges Jacques Danton, 1759~1794)을 주축으로 하는 온건파, 로베스피에르 파(Maximilien François Marie Isidore de Robespierre, 1758 ~ 1794)의 세 파벌로 나뉘어 끊임없는 권력 다툼을 벌였다.
에베르가 1794년 3월, 파리의 식량 사정 악화를 이용하여 시민 봉기를 일으키려다 처형되었고 조르주 당통도 반혁명 용의로 처형되어 산악 파는 로베스피에르 파가 장악하였다.
1794년 6월 10일 변호인의 입회와 증인 심문이 폐지되는 등 소송절차를 생략하고 혐의자들을 바로 무죄와 사형, 두 가지 판결로 선고하고 실행하는 프레리알 22일 법(Law of 22 Prairial, Loi du 22 prairial an II)을 제정하고 월말에는 카니발 재판소(tribunal de cannibales)를 설치함으로써 공포정치는 극에 달했다.
1794년 6월 프랑스군이 반혁명 연합군을 벨기에에서 격파하며 공화국은 국가적 위기를 벗어났으나 로베스피에르 파는 에베르와 당통 등 2만여 명을 처형했으므로 파리 시민의 지지를 잃었다.
혁명가들은 초심을 잃고 권력을 남용했으며 공포정치와 국민 생활의 통제로 민심을 잃었던 것이다.
1794년 7월 26일 로베스피에르는 국민공회에서 행한 연설 말미에 공화국을 공격하는 음모에 가담 여부가 의심스러운 의원들이 있으니 이들을 숙청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의원들이 의심스러운 의원이 누구냐고 물었으나 로베스피에르는 대답하지 않았다.
많은 의원들은 자신이 의심스러운 의원 명단에 들어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이에 산악파 내부의 반(反) 로베스피에르 파, 당통파의 잔당(殘黨), 지롱드 평원파(平原派, La Plaine, 온건파인 지롱드 파와 급진 좌파인 산악파의 중간) 등 반(反) 로베스피에르의 국민공회 의원들은 은밀히 음모하여 다음날인 1794년 7월 27일의 국민공회에서 베르트랑 바래르(1755 ~ 1841)의 사회로 국민방위대 사령관 앙리오의 해임을 의결하고, 장 랑베르 탈리앵(Jean Lambert Tallien, 1767 ~ 1820)이 로베스피에르의 죄상을 고발하자 로베스피에르 일당은 파리 코뮌(Commune de Paris, 1789 ~1795, 파리 각 지역 대표로 구성된 자치정부, 1792 ~ 1794 급진적인 자코뱅파가 장악) 군대의 보호를 받아 시청으로 도망갔다. 그날 밤 국민공회는 투표로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Maximilien François Marie Isidore de Robespierre), 루이 앙투안 드 생쥐스트(Louis Antoine Léon de Saint Just), 조르주 오귀스트 쿠통(Georges Auguste Couthon) 등의 유죄를 의결하고 체포를 명령했다. 국민공회군(총사령관 폴 바라스)이 그들을 체포하였고 다음날 민중의 소요를 염려하여 재판 없이 바로 처형하였다. 그들이 제정한 프레리알 22일 법(Law of 22 Prairial)이 그들에게 적용된 것이다.
이 사건을 '테르미도르 반동(Thermidorian Reaction)'이라 한다. 이로서 공포정치가 끝이 났다.
이때 나폴레옹도 로베스피에르 파로 몰려 위험에 처했다. 로베스피에르 파(派)와 가까왔던 살리체티(Saliceti)가 자기가 살기 위해 먼저 선수를 처 리스에 있던 나폴레옹을 로베스피에르 파(派)로 몰아 구금했다가 1달 후 상황이 안정되자 군대에 장교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풀어주었다.
로베스피에르가 몰락한 뒤 정권을 잡은 사람들을 테르미도르파(Thermidorians)라고 부른다.
테르미도르파(Thermidorians)로는 캉바세레(Jean Jacques Régis de Cambacérès , 1753 ~ 1824), 부아시 당글라스(François-Antoine de Boissy d'Anglas, 1756 ~ 1826), 에마뉘엘 조제프 시에예스(Emmanuel Joseph Sieyès, 1748 ~ 1836) 등의 평원파(平原派, La Plaine, 온건파인 지롱드 파와 급진 좌파인 산악파의 중간)와 회개한 산악파(山嶽派, Montagnards)인 폴 바라스(Paul Barras, 1755 ~ 1829), 탈리앙(Jean Lambert Tallien, 1767 ~ 1820), 루이 프레롱(Louis-Marie Stanislas Fréron, 1754 ~ 1802) 등이었다.
. 이어서 5인의 총재가 지휘하는 집단지도체제가 수립되었다.
4) 5 총재정부(總裁政府, 집정관정부, 執政官政府, Directory, Directoire, 1795 ~1799)
1795년 9월 23일 5인 5 총재정부(總裁政府, 집정관정부, 執政官政府, Directory, Directoire, 1795 ~1799)가 수립되었다. 5인 총재정부 체제(Directory)는 500인 회와 원로원의 양원에서 선출된 5명의 총재로 행정부를 구성하였다. 부르주아(시민 계급)로 구성된 국민공회의 5인 총재정부 체제는 구심점이 없고 약했으며 재정난에 직면했다. 무산 계급의 생활은 더욱 악화되었고 왕당파 등의 반혁명 세력이 거세졌다.
1795년 국민공회가 법을 개정하여 의원의 2/3을 현 의원 중에서 선출하도록 함에 따라 정권을 획득할 수 없게 된 왕당파는 반란을 일으켰다.
1795년 10월 왕당파의 반란이 거세어지자 국민공회는 사령관을 교체하여 테르미도르파(Thermidorians)인 폴 바라스(Paul Barras, 1755 ~ 1829, 총재가 됨)를 국내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였으며 폴 바라스(Paul Barras, 1755 ~ 1829)는 자신을 찾아온 나폴레옹 1세에게 전권을 주기로 하고 진압을 명하였으며 1795년 10월 13일 나폴레옹 1세는 조아킴 무라트(Joachim Murat, 1767 ~ 1815)에게 빼돌린 대포를 기병으로 이동시켜 파리의 고층 건물의 옥상에 설치하게 하여 왕당파의 반란을 진압하고(전임 사령관은 민중에게 대포를 사용하기를 꺼렸음) 국민공회(國民公會)를 구하였다.
나폴레옹은 방데 미에르 13일의 반란(Insurrection royaliste du 13 Vendémiaire an IV) 진압에서의 전공을 인정받아 다시 권력을 잡을 수 있게 되었다. 나폴레옹이 1796~1797년 이탈리아에 원정하여 오스트리아 군을 격파함으로써 더욱 인기가 높아지자 집정관(총재)들은 그를 견제하기 위하여 1798년 나폴레옹을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이집트 원정을 보냈다(폴 바라스가 나폴레옹의 출세가 너무 빠르다고 보냈다 함). 그때 프랑스 나폴레옹의 해군 함대가 영국 넬슨 제독의 해군에 괴멸되어(나일 해전 혹은 아부키르 만 해전, The Battle of the Nile or Aboukir Bay, 1798, 알렉산드리아 서쪽) 프랑스 원정군이 고립되자 나폴레옹은 프랑스 국내 정세가 변함에 따라 관여하기 위해 정부의 명령 없이 클레베르를 후임 총사령관(3년 후에 항복)으로 임명하고 참모들과 1799년 9월 귀국하였다.
그때 5인 집정관 중 한 명인 시에예스 신부(Emmanuel Joseph Sieyès, 1748 ~ 1836, 정치가, 법률이론가)는 자코뱅 세력을 부흥시키기 위해 나폴레옹을 앞세워 동료 총재(집정관)들을 위협한 결과 1799년 11월 9일, 시에예스와 자코뱅당이 아닌 두 명의 동료 총재(집정관)인 로저 뒤클로(Roger Duclos)와 폴 바라스(폴 프랑수아 장 니콜라 Paul François Jean Nicolas, 1755 ~ 1829)가 사임하여(5명의 총재 중 3명의 총재) 총재정부는 이미 무너졌지만 두 명의 자코뱅당 총재(집정관)인 고이에(Louis-Jérôme Goyer)와 물랭(Auguste Moulin)이 이에 따르기를 거부하여 나폴레옹이 호위대를 이끌고 원로원에 들어와 협박하여 강제로 사임시켜 야유를 받았으며 500인 회에서는 더 심한 반응이 나타났다.
나폴레옹의 첫째 동생으로 500인회 의장이자 옛 자코뱅 당원인 뤼시앵 보나파르트(Lucien Bonaparte, 1775 ~ 1840, 1799년 500인 위원회의 의장, 1802년 호민관, 1799년 내무부 장관, 1802년 호민관, 1804년 나폴레옹과 의도가 달라 프랑스에서 쫒겨나 이탈리아로 감, 1807년 미국으로 망명 도중 영국군에 체포 1814년 풀려남, 1814년 교황 비오 7세에 의해 카니노(Canino) 왕자, 아폴리노 백작, 네모리의 영주, 1824년 교황 레오 12세에 의해 무시냐노 Musignano 왕자)가 의회 호위병을 불러들여 의원들을 위협하여 사태를 진정시켰다.
12월 13일 500인회가 나폴레옹의 추방을 결의하자 뮈라(Joachim Murat, 1767 ~ 1815, 나폴레옹 누이와 결혼, 후에 원수)가 이끄는 나폴레옹의 호위대가 오랑주리관에서 500인회 대표자들을 모두 몰아냈다.
그 후 원로원은 500인회가 결의한 나폴레옹의 추방을 취소하고 나폴레옹을 제1 통령(제1집 정관, Premier consul), 시에예스를 제2 통령(제2 집정관)으로 하는 3인 통령정부(집정 체제, Consulat, 1799. 11. 9. ~ 1804.5.18.)를 세웠다. 이때 대부분의 장군들은 중립을 지켜 큰 혼란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 사건을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18 Brumaire)'라 한다(혁명력으로 브뤼메르 18일이었기 때문이다).
5) 3인의 통령정부(統領政府, 집정정부 執政政府, Consulat, 1799 ~ 1804)와 나폴레옹 시대
1799년 30세의 나폴레옹 1세(Napoléon I, Napoléon Bonaparte, 나폴레오네 부오나파르테, 1769 ~ 1821)는 제1 통령(제1 집정관, Premier consul)으로 전권을 장악하였던 것이다.
제2 통령((제2 집정관)은 시에예스 (Emmanuel Joseph Sieyès, 1748 ~ 1836), 제3 통령((제3 집정관)은 피에르 로저 뒤코스(Pierre Roger Ducos, 1747 ~ 1816)가 임명되었다.
제1통령이 된 나폴레옹은 대프랑스동맹국에 강화를 제의하였으나 거절당하자 이탈리아 원정에 나서 1800년 마렝고 전투(Battle of Marengo)에서 오스트리아를 격파하고, 위협을 가하는 영국과는 아미앵 조약(Treaty of Amiens, 1802)을 맺어 강화함으로써 국민을 안심시켰다.
나폴레옹 전쟁(Napoleonic Wars,1803 ~ 1815)에서 나폴레옹의 전술은 교묘한 전략적 기동에 의해 유리한 상황을 만드는 것으로 “최고의 군대는 싸우는 부대보다는 빨리 걷는 부대이다.”라고 나폴레옹은 말하였다.
나폴레옹은 전쟁을 일으켜 승리함으로써 국민들을 열광시키고 전쟁으로 승리한 국가로부터 수탈하거나 배상금으로 국가 재정을 안정시킴으로써 국민들로부터 열열한 지지를 받았던 것이다.
나폴레옹은 국민투표를 통해서 1804년 5월 18일 황제에 올랐다. 이로써 공화정은 무너지고 프랑스제1제국(제1제정, 1804 ~ 1814)이 시작되었다.
*) 프랑스 제1제정(第一帝政, Le Premier Empire, 1804 ∼ 1814/1815)
나폴레옹 1세(Napoleon I, Napoleon Bonaparte, 1769 ~ 1821, 재위 1804 ~ 1815)는 1804년 12월 투표(보통투표는 아님)로 황제에 즉위하여 제1제정(1804 ∼ 1814/1815)을 통치했다.
국정을 정비하고 법전을 편찬하는 등 개혁정치를 실시했으며 유럽의 여러 나라를 침략하며 세력을 팽창했다
프랑스함대는 영국 상륙작전을 계획하였으나 1805년 가을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H.넬슨의 영국해군에 다시 격파되어 영국을 제압하지 못함에 따라 나폴레옹의 유럽 장악을 불완전하게 만들었다.
1805년 영국, 러시아, 오스트리아, 시칠리아, 스웨덴 등이 제3차 대 프랑스 동맹(Third Coalition, 1805 ~ 1806)을 결성하여 대항하자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를 공격하여 빈을 함락하였으며, 1805년12월 아우스터를리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에게 대승을 거두고 프레스부르크 조약을 체결하여 독일 서부 라인 강 유역에 라인 동맹이라는 프랑스 종속 지대를 설정하면서 독일 지역을 재편하였다.
나폴레옹 1세는 영국을 고립시키기 위해 대륙의 모든 국가들이 영국과 교역하는 것을 금지하는 대륙봉쇄령을 선포하였다. 하지만 대륙봉쇄령은 많은 식민지를 가진 영국에게는 영향을 미치지 않았고, 대륙의 국가들에게 경제적 악영향을 미쳤다.
프로이센이 대 프랑스 동맹에 가담하면서 영국, 러시아, 스웨덴과 함께 제4차 대 프랑스 동맹(Fourth Coalition, 1806 ~ 1807)을 결성하였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1806년 예나전투와 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프로이센을 격파했다.
1807년 폴란드로 진격한 나폴레옹은 러시아군을 격파하고 형 조제프를 에스파냐 및 나폴리 왕에, 동생 루이와 제롬은 각각 홀란드와 베스트팔리아 왕에 임명하여 프랑스 제국의 종속국으로 만들었다.
1809년 조제핀과 이혼, 이듬해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2세의 딸 마리 루이즈와 재혼하였다.
나폴레옹은 1812년 대륙봉쇄령을 위반한 러시아에 원정하였으나 실패하였고 1814년 3월 영국, 러시아, 프러시아. 오스트리아군에 파리를점령당하여 엘바섬으로 유배되었다.
이듬해 1815년 3월 엘바섬을 탈출하여 파리로 돌아가 황제에 즉위하였으나, 6월 워털루전투에서 패하여 영국에 항복하였다.
그 뒤 대서양의 세인트 헬레나섬에 유배, 그곳에서 죽었다.
※. 나폴레옹 1세(Napoléon I, 1769 ~ 1821)
프랑스 나폴레옹 1세(Napoléon I, 1769 ~ 1821)는 이탈리아서쪽에 있는코르시카 섬(Corsica)의 아작시오(Ajaccio)에서 피사 대학 출신의 변호사(법률가 집안)인 아버지 샤를 마리 보나파르트(Charles Marie Bonaparte 카를로 마리아 부오나파르트, 1746 ~ 1785)와 어머니 마리아 레티치아 라몰리노(MariaLeti´ziaRamoli´no, 1750 ~ 1836, 군인 집안) 사이에 8명의 자녀 중둘째아들로 태어났다(조제프 보나파르트(Joseph-Napoléon Bonaparte, 남, 1768 ~ 1844, 스페인 국왕 재위 1808~1813),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éon Bonaparte, 남, 1769 ~ 1821, 프랑스 황제 재위 1804 ~1814), 뤼시앵 보나파르트(Lucien Bonaparte, 남, 1775 ~ 1840, 내무부 장관), 엘리자(Elisa Bonaparte, 여, 1777 ~ 1820, 장군 펠리체 파스콸레 바치오키 부인), 루이 보나파르트(Louis Bonaparte, 남, 1778 ~ 1846, 홀란드 국왕 재위 1806~1810, 나폴레옹 3세 아버지), 폴린(Pauline Bonaparte, 여, 1780 ~ 1825, 장군 샤를 르클레르 부인 - 아이티 원정 중 황열병으로 사망, 제6대 술모나 왕자 카밀로 부인), 카를론(Caroline Bonaparte, 여, 1782 ~ 1839, 나폴리 왕 재위 1808 ~ 1815 조아킴 뮈라 부인, 나폴리 여왕 재위 1808 ~ 1815), 제롬 보나파르트(Jérôme Bonaparte, 남, 1784 ~ 1860, 베스트팔렌 왕 재위 1807 ~1813)).
그때 코르시카 섬은 제노바 공화국의 지배하에 있었는데 파스콸레 파올리(Filippo Antonio Pasquale di Paoli,필리포 안토니오 파스콸레 디 파올리, 1725~1807, 코르시카 인민 의회 집행 평의회의 의장 겸 군 총사령관)가 지휘한 독립군이 섬의 대부분을 점령하여 1755년 코르시카 공화국을 선포하자 제노바 공화국은 1764년에 프랑스에 파병 요청을 하였으며 원정 온 프랑스군은 섬 일부분을 점령하였다.
1768년 제노바 공화국은 파병 대가로 베르사유 조약을 맺어 프랑스에 코르시카 섬의 통치권을 양도하였다.
프랑스가 코스시카를 지배하기 위해 침공하자 파올리 군대는 1769년 퐁트노보 전투(la bataille de Ponte Novu, 1769)에서 패배하여 파올리는영국으로 망명하였고 파올리의 비서였던 나폴레옹의 아버지 카를로는 코르시카 섬에 남았다.
1769년 프랑스에서 새총독이 임명되어 왔으며 아버지 카를로는 프랑스 쪽으로 전향하였다.
그 해 8월에 나폴레옹이 태어났다.
1769년 피사대주교는 카를로 조상 지위에 따라카를로 가문의 토스카나 가문의 귀족지위를 인정하였고(그들의 조상은 이탈리아 토스카나에 살았고 하급귀족이었다 함), 1771년 총독은 카를로 가문을 프랑스 귀족의 보나파르트 가문으로 봉하였다.
아버지 카를로는 1769년 12월 코르시카 고등평의회의 의원이 되었고, 1770년 에는 아작시오의 프랑스 왕의대리검찰관이 되었으며 1778년베르사이유 루이 16세 왕실의 코르시카 대표(귀족회의 의원)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는 융자를 받아 뽕나무밭을 구입했으나 소득이 시원치 않아 재산을 탕진하였다.
나폴레옹은 9세 때인 1779년에 프랑스의 오탱에 있는수도원부속 종교학교에 입학하였고 1779년 5월에 장학금을 받고 귀족만이 갈 수 있는 브리엔르샤토(Brienne le Château)에 있는 육군사관학교(military academy, 교양과목 이수, 여러 지역에 있었음)에 전학하여 수학과목에 두각을 나타내었고 그의 비서가 되는 루이 앙투안 포블레 드 부리엔만(Louis Antoine Fauvelet de Bourrienn, 1769 ~ 1834)을 만났다.
1750년 루이 15세에 의해 설립되어 하급귀족 청년도 갈 수 있는 파리의 군사학교(École Militaire, 왕립군사학교, 500명 선발)에 나폴레옹은 1784년 입학하여 포병과정을 전공하였으며 속성으로 1년에 2년 과정을 수업하고 3학년에 치르는 사관학교 통과 시험을 1학년 때에 통과하여 1년 만에 학업을 끝내고 1785년 16세에 졸업하였다(집안이 가난하여 빨리 돈을 벌어야 했기 때문이었다고 함).
군사학교를 졸업한 나폴레옹은 프랑스 남동부 론알프 지방 드롬 주 발랑스지역의 라페르 연대에 포병장교로 부임하여 포병대 수습장교의 기본훈련을 10주간 받았다.
1788년 라페르 연대는 오손으로 옮겼으며 1789년 9월 나폴레옹은 코르시카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군대를 휴직하고 귀향하였다.
이때에 나폴레옹 집안은 일가의 유산을 물려받아 부유하게 되었다.
코르시카 섬의 왕당파는 세력을 키우기 위해 영국에 망명해 있는 파스콸레 파올리(Filippo Antonio Pasquale di Paoli, 1725 ~ 1807)에게 귀국하여 그들을 이끌어 주기를 희망하였으며 영국도 자국에 유리하다고 판단하여 귀국을 허용하였으므로 파스콸레 파올리는 귀국하였다.
나폴레옹은 피사대학교에서 법률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 있던 형 조제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Joseph Napoléon Bonaparte, 1768 ~ 1844, 스페인왕, 나폴리와 시칠리아 왕)를 지방의회 의원으로 당선시켰고 자신은 영국 망명에서 돌아온 파스콸레 파올리가 지휘하는 의용대의 제2대대장(의병대 중령)으로 임명되었다.
그때 혁명정부는 지방의회의 의용군 모집과 현역장교가 의용군 지휘관으로 활동하는 이중군적을 허용했으므로 나폴레옹 1세는 의용대에 근무할 수 있었다.
그러던 중 나폴레옹 1세는 그의 아버지의 변절로 보나파르트 가문을 싫어하는 파스콸레 파올리와 의견이 대립되었다. 코르시카 섬 주민 대부분의 지지를 받고 입헌군주제를 지지하던 파스콸레 파올리는 루이 16세가 처형되자 코르시카 섬이 독립된 후에는 왕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나폴레옹 1세는 공화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프랑스혁명정부가 추진한 사르데냐(코르시카 근처에 있는 섬, 대(對) 프랑스 동맹에 가담)를 정복하기 위한 원정(1792.12. ~ 1793.2.)에 나폴레옹이 의용군을 이끌고 참여하였는데 파올리는 그를 따르는 의용군을 작전에서 철수시켜 사르데냐 원정이 실패하게 만들었다. 파올리는 사르데냐 원정이 성공되면 코르시카의 모든 권력이 나폴레옹에게 넘어갈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후에 이를 알게 된 나폴레옹은 분노하였으며 나폴레옹의 공화파와 파올리의 왕당파 사이에 심한 충돌이 일어났던 것이다.
패전 원인을 파악한 혁명정부로부터 소환장을 받는 등 의심을 받게 된 파올리는 선수를 처 나폴레옹 1세 집안의 모든 재산을 몰수하고 나폴레옹과 가족을 구금하였으며 왕당파 의용군은 나폴레옹의 신변을 위협하였다. 나폴레옹과 가족은 나폴레옹의 친구 도움으로 감옥을 빠져나와 코르시카섬을 탈출하여 1793년 5월 프랑스 툴롱(Toulon, 지중해 방면 군항)으로 갔다.
파스콸레 파올리(Filippo Antonio Pasquale di Paoli, 1725 ~ 1807)는 영국을 끌어들여 코르시카를 아일랜드와 같은 형태의 영국에 속하는 자치국가로 건설하고자 했다.
그래서 1794년에 영국군의 도움을 받아 프랑스 총독을 축출하고 1794년에 입헌군주국인 코르시카 왕국(Regno di Corsica Kingdom of Corsica, 1794 ~ 1796, 영국왕 조지 3세)을 세우고 파스콸레 파올리는 의회의 의장이 되었으나 1796년에 영국이 육지에 가깝게 붙어있는 코르시카 섬을 포기함에 따라 프랑스 혁명군이 상륙하여 프랑스에 합병되었고 다시 파스콸레 파올리(Filippo Antonio Pasquale di Paoli, 1725 ~ 1807)는 망명하였다.
나폴레옹은 군대 휴직기간을 넘겼으나 군대에 장교가 부족하였으므로 1793년에 니스에 있는 정규군에 복귀하였다.
혁명으로 혼란한 프랑스에서는 귀족과 성직자들은 타도의 대상이 되어 생활이 위험하였다. 군장교도 대부분 귀족출신이었으므로 생활에 위험이 있어 많은 장교들이 해외로 이주함에 따라 프랑스 군에는 장교가 부족하였다. 나폴레옹도 장교였지만 첫째 남동생 뤼시엥 보나파르트(Lucien Bonaparte, 1775 ~ 1840, 1799년 500인 위원회의 의장, 1799년 내무부 장관, 1802년 호민관, 1804년 나폴레옹과 의도가 달라 프랑스에서 쫓겨나 이탈리아로 감, 1807년 미국으로 망명 도중 영국군에 체포 1814년 풀려남, 1814년 교황 비오 7세에 의해 카니노(Canino) 왕자, 아폴리노 백작, 네모리의 영주, 1824년 교황 레오 12세에 의해 무시냐노(Musignano) 왕자)가 자코뱅 클럽(자코뱅파, 1789년 창당)의 주요 일원이었으므로 문제가 일어나지 않았다.
이때 나폴레옹은 국민공회를 지지하는 '보케르의 만찬(Souper de Beaucaire, 어느 저녁 식사 중에 왕당파와 공화파가 서로 사상논쟁을 하다가 결국 공화파가 이긴다는 이야기로 모든 공화주의자는 국민 공회를 중심으로 단합해야 한다는 내용의 에세이)'을 집필하였다. 나폴레옹은 이 글을 친구인 앙투안 살리세티(Antoine Christophe Saliceti, 1757 ~ 1809, 국민공회 의원, 혁명군 감독)를 통해 국민공회 의장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Maximilien François Marie Isidore de Robespierre, 1758 ~ 1794)의 동생인 오귀스탱 드 로베스피에르(Augustin Bon Joseph de Robespierre, 1763 ~ 1794, 국민공회 의원)에게 보냈다.
오귀스탱 드 로베스피에르는 나폴레옹의 혁명 정신을 설득력 있게 쓴 글에 깊은 인상을 받아 나폴레옹을 혁명 동지로 신임하게 되었다. 이에 살리세티는 이 글을 인쇄하여 소책자로 발간하였다.
1793년 프랑스의 툴롱(Toulon) 항구에서 왕당파의 반란이 일어나고 영국, 스페인, 사르데냐 왕국(이탈리아 북서부) 등 동맹군이 합세하여 툴롱(Toulon) 항구의 프랑스 주력함대를 격파하고 항구를 점령함에 따라 프랑스의 국민공회의 혁명군이 툴롱(Toulon) 항구를 탈환하기 위해 항구를 포위하여 전투를 벌였는데 혁명군의 포병장교가 부상을 당하였다. 이에 나폴레옹 친구인 살리체티(Saliceti, 국민공회 의원, 혁명군 감독)가 보케르에서 수송 임무를 수행하던 나폴레옹을 포병 대위로 임용했다. 나폴레옹 1세는 대(對) 프랑스 동맹군과의 툴롱 전투(battle of Toulon, 1793. 8. ~ 12.)에서 함선을 공격하기에 유리한 바다로 뻗어 나온 군사 요충지를 탈환하여 점령하고 그곳에 포대를 설치하여 동맹군의 함선을 육지에 설치한 포로 격파하는 계획을 입안하여 상부에 올리고 승인받아 먼저 요충지 탈환을 시도했으나 군사력이 약해 실패했다. 이에 동맹군은 요충지의 중요성을 알고 군사력을 크게 보강하였다. 나폴레옹은 요충지를 다시 여러 번 포로 공격했으나 실패하였고 군사력 증원을 요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다가 유능한 사령관으로 교체된 후 소령으로 진급되고 군사력이 증강되어 요충지를 탈환하고 그곳에 포대를 설치하여 해상의 군함을 공격하였다. 그 결과 동맹군의 군함은 급히 철수하고 상륙했던 영국 육군과 스페인, 이탈리아군은 대부분 항복함에 따라 툴롱을 탈환하였으며 이에 큰 공을 세운 나폴레옹은 24세에 준장으로 진급하여 이탈리아방면 포병 지휘관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나폴레옹 1세가 공화파를 지지하는 글을 발표하여 자코뱅파의 지도자인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의 동생인 오귀스탱 드 로베스피에르(1763 ~ 1794)의 후원을 받아 사령관의 교체가 이루어져 군대 내의 작전 발언권이 세어지고 강력한 지휘권을 확보하였으며 병력이 대폭 늘어나 포병이 강력했다고 함, 정치군인).
1794년 로베스피에르 파(派)의 공포정치가 테르미도르 반동(Thermidorian Reaction)으로 끝이 나자 정치군인으로 가담하였던 나폴레옹도 위험에 처했다. 로베스피에르 파(派)와 가까왔던 살리체티(Saliceti)가 자기가 살아남기 위해 먼저 선수를 처 리스에 있던 나폴레옹을 로베스피에르 파(派)로 몰아 구금했다가 1달 후 상황이 안정되자 군대에 장교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풀어주었다.
나폴레옹은 군대에 복직되었으나 이탈리아 방면 포병부대 지휘관이 아니고 반란군 진압부대의 지휘관으로 보임되자 군대을 사임하고 나왔으며 그 후에도 나폴레옹은 이탈리아 원정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하였다.
1795년 총재정부(總裁政府, 집정관정부, 執政官政府, Directory, Directoire, 1795 ~1799)가 세워졌다. 공화파의 집권에도 국민들의 생활이 나아지지 않아 왕당파의 세력이 점점 강해지자 국민공회는 의원을 선출하는 법을 개정하여 의원의 2/3을 현 의원(대부분이 공화파였음) 중에서 선출하도록 함에 따라 정권을 획득할 수 없게 된 왕당파는 반란(1795년 방데미에르 13일의 왕당파 반란)을 일으켰다.
1795년 10월 왕당파의 반란이 거세어지자 국민공회는 사령관을 교체하여 테르미도르파(Thermidorians)인 폴 바라스(Paul Barras, 1755 ~ 1829, 집정관이 됨)를 국내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였으며 폴 바라스(Paul Barras, 1755 ~ 1829)는 우연히 자신을 찾아온 나폴레옹 1세에게 전권을 주기로 하고 진압을 명하였으며 나폴레옹 1세는 조아킴 무라트(Joachim Murat, 1767 ~ 1815)에게 빼돌린 대포를 기병으로 이동시켜 파리의 고층 건물의 옥상에 설치하게 하여 왕당파의 반란을 진압하고(전임 사령관은 민중에게 대포를 사용하기를 꺼렸음) 국민공회(國民公會)를 구하였다.
나폴레옹은 소장을 거쳐 상위직으로 진급했다.
1796년 총재정부(1795 ~ 1799)는 오스트리아 원정을 계획했다.
프랑스군의 동부지역 군편성은 뮤즈강 방면군, 라인강 방면군, 알프스 방면군, 이탈리아 방면군으로 되어 있었는데 프랑스군 총사령관 카르노(Lazar Carnot, 1753 ~ 1823, 프랑스의 수학자,물리학자,군 장교, 정치인)는 라인강 방면군, 알프스 방면의 주력군으 오스트리아의 비엔나로 진격하게 하고 이탈리아 방면군을 조력군으로 삼아 북이탈리아 주둔 오스트리아군을 축출하라는 작전 명령을 했다.
오스트리아 원정을 많이 연구한 나폴레옹은 부유한 이탈리아를 치면 경제적인 이득을 취할 수 있고 지리적으로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를 끊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는 보고서를 제출하여 이탈리아 방면 원정 사령관의 교체가 이루어졌다.
나폴레옹은 1793년 툴롱 포위 전의 침략국으로 참전한 사르데냐 왕국(이탈리아 북서부) 등의 이탈리아를 점령하기 위한 제1차 이탈리아 원정(1796 ~ 1797)군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던 것이다.
1796년 나폴레옹은 애인 데지레(Bernardine Eugénie Désirée´, 1777 ~ 1860, 베르나도트와 결혼, 스웨덴 왕비)를 버리고 사교계의 꽃이었던 6살 연상의 조세핀(Joséphine de Beauharnais, 1763 ~ 1814)과 결혼하였으나 1809년에 이혼하고 1810년 오스트리아 황녀 마리 루이즈(Marie Louise, 나폴레옹 2세의 모)와 다시 결혼하였다.
나폴레옹은 1796년 조세핀과 결혼식을 올리자마자 이탈리아 원정을 떠났다.
그런데 라인강 방면과 알프스 방면의 주력군은 라인강을 건너자 마자 패하였다.
오스트라아군은 프랑스군이 해안가를 따라 이탈리아 반도를 침공하는 것을 염려하여 1796년 3월 먼저 지중해 연안의 프랑스군 전초부대를 공격해 격파했다.
그렇게되자 1796년 나폴레옹의 원정군은 지중해연안이 아닌 산악지대인 알프스산맥을 우회하여 해안을 따라 이탈리아에 진군하였다. 3년 동안의 봉급을 못 받고 보급품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이탈리아에 도착한 병사들은 주민들의 금품을 약탈하기에 바빠 초기 몇 번의 전투에서 패배하였지만 곧 사보이아와 사르데냐 왕국을 항복시키고 북이탈리아최대 거점인 롬바르디아(밀라노 공국)의 만토바(Mantova)에서 오스트리아군을 포위했다(1796.7.).
만토바(Mantova)가 쉽게 함락되지 않자 나폴레옹은 소규모 군을 남겨놓고는 대군을 이끌고 로마를 침공하여 이탈리아 정복을 하였다. 남이탈리아의 강국인 나폴리 왕국과 화친을 맺고 재력이 풍부한 밀라노 공국, 로마 교황령, 베네치아 등을 침략하여 받은 배상금으로 군비를 충당하고 남은 일부를 재정난이 심각한 총재정부에 보내어 환심을 샀다.
그때 프랑스군은 징병제로 5배로 늘어나 보급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폴레옹은 빨리 이탈리아를 공략하여 배상금 등의 약탈로 군대의 임금과 보급을 해결하기로 병사들과 약속했던 것이다. 병사 개개인의 약탈이 아니라 재도에 따라 행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폴레옹의 전술은 교묘한 전략적 기동에 의해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 싸우는 것으로 병사를 빨리 걷게 하여 부대를 빨리 이동시켰으며 보급품을 현지에서 조달함에 따라 부대 이동이 용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나폴레옹 군은 오스트리아군과의 카스틸리오네 전투(Battle of Castiglione, 1796.8. 이탈리아 롬바르디아주 만토바 지방)와 아르콜 다리 전투(Battle of the Bridge of Arcole, 1796. 11. 베네치아 베네토의베로나 지역)에서 고전하였지만 승리하였다. 1797년 2월 오스트리아마지막 구원군을 리볼리 전투(Battle of Rivoli, 1797.2., 피에몬테주 토리노현, 사르데냐 공국)에서 완파했으며 만토바(Mantova)에서 항전하던 오스트리아군도 항복했다(1797.2.).
나폴레옹은 본진을 이끌고 비엔나를 향해 진군하여 오스트리아 찰스 대공(카를 대공, Archduke Charles, Erzherzog Karl Ludwig, 오스트리아의 육군 원수, 황제 레오폴드 2세의 셋째 아들)에게 항복을 권유하였으며 레오벤에서 오스트리아로부터 이탈리아의 대부분과 벨기에를 프랑스에 양도하고 오스트리아는 베네치아 공화국을 차지한다는 조건으로 레오벤 조약(Treaty of Leoben)을 1797년 4월)을 맺고 강화하였다.
프랑스는 이 조약을 오스트리아와캄포 포르미오 조약(Traité de Campo-Formio, 1797.10.)을 체결(10월)하여 승인하였다. 그 결과 오스트리리아를 제1차 대(對)프랑스 동맹(First Coalition, 1793 ~ 1797)에서 탈퇴시킴으로써 제1차 대(對)프랑스 동맹이 깨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탈리아 반도 북부에프랑스 제1공화국과 같은공화제를 도입한 치살피나 공화국(Repubblica Cisalpina, 1797 ~ 1802, 롬바르디아 등)을 수립했다.
나폴레옹이 제1차 이탈리아 원정(1796 ~ 1797)에서 돌아온 후 인기가 점점 더 높아지자 총재(집정관)들은 나폴레옹을 견제하기 위하여 영국과인도의동방 교역로인 오스만 튀르크 령 이집트와 시리아 원정을 계획하고 1798년 나폴레옹을 이집트 원정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이집트 원정에서 육군은 카이로까지 진격하여 승리하였으나 그의 해군이 나일 해전(아부키르 만 해전, The Battle of the Nile or Aboukir Bay)에서 나폴레옹 부대를 추적해 온 영국의 호레이쇼 넬슨(Horatio Nelson, 1758 ~ 1805) 제독이 이끄는 해군에 패함에 따라 고립되었다가 프랑스 국내 정세가 변하자 국내 정치에 관여하기 위해 총재정부의 명령 없이 클레베르(Jean Baptist Kléber, 1753 ~ 1800)를 후임 총사령관(1800년 카이로에서 회교도에게 암살당함)으로 임명하고 참모들과 1799년 9월 귀국하였다.
1799년 5인의 총재(집정관) 중 한 명인 시에예스(Emmanuel Joseph Sieyes, 에마뉘엘 조제프 시에예스, 1748 ~ 1836, 신부, 정치가, 헌법 이론가)는 자코뱅 세력을 부흥시키기 위해 나폴레옹을 정쟁에 끌어들였다.
나폴레옹은 총재(집정관)들을 위협한 결과 1799년 11월 9일, 시에예스와 자코뱅당이 아닌 두 명의 동료 총재(집정관)인 로저 뒤클로(Roger Duclos)와 폴 바라스(폴 프랑수아 장 니콜라 Paul François Jean Nicolas, 1755 ~ 1829)가 사임하여(5명의 총재 중 3명의 총재) 총재정부는 이미 무너졌지만 두 명의 자코뱅당 총재(집정관)인 고이에(Louis-Jérôme Goyer)와 물랭(Auguste Moulin)이 이에 따르기를 거부하여 나폴레옹이 호위대를 이끌고 원로원에 들어와 협박하여 강제로 사임시켜 야유를 받았으며 500인회에서는 더 심한 반응이 나타났다.
나폴레옹의 첫째 동생으로 500인회 의장이자 옛 자코뱅 당원인 뤼시앵 보나파르트(Lucien Bonaparte, 1775 ~ 1840)가 의회 호위병을 불러들여 의원들을 위협하여 사태를 진정시켰다. 12월 13일 500인회가 나폴레옹의 추방을 결의하자 뮈라(Joachim Murat, 1767 ~ 1815, 나폴레옹 누이와 결혼, 후에 원수)가 이끄는 나폴레옹의 호위대가 오랑주리관에서 500인회 대표자들을 모두 몰아냈다.
그 후 원로원은 500인회가 결의한 나폴레옹의 추방을 취소하고 나폴레옹을 제1 통령(제1집 정관, Premier consul), 시에예스를 제2 통령(제2 집정관)으로 하는 3인 통령정부((統領政府, 집정정부 執政政府, Consulat, 1799 ~ 1804)를 세웠다.
이 사건을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18 Brumaire, 1799.11. 9.)'라 한다(혁명력으로 브뤼메르 18일이었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의 반란에 동조하지 않은 장군들은 중립을 지켜 반란군의 진압에 참여하지 않았으므로 쿠데타는 성공하였던 것이다.
나폴레옹의 제1차 이탈리아 원정으로 프랑스에 북부 이탈리아를 빼앗긴 오스트리아는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으로 프랑스는 군을 동원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는 이때를 이용하여 영국과 러시아 제국, 그리고 오스만 제국을 끌어들여 제2차 대(對)프랑스 동맹(Second Coalition)을 결성하여 프랑스를 공격하였다.
1799년, 오스트리아군과 러시아군이 연합하여 공격함에 따라 북이탈리아에 주둔한 프랑스군은 제노바까지 밀려나고 라인 방면에서는 프랑스와 오스트리아군이 대치하는 등으로 총재정부는 국민들의 원성을 샀다.
이에 정권을 잡은 나폴레옹은 제2차 이탈리아 원정(1800 ~ 1802)을 준비하여 1800년 5월에 알프스의 산 베르나르도(San Bernardo) 고개를 넘어 북이탈리아에 진군하였다. 나폴레옹의 프랑스 군은 이탈리아의 알레산드리아 (Alessandria)근처에서 일어난 마렝고 전투(Bataille de Marengo)에서 승리하여 오스트리아(신성로마제국)군을 이탈리아에서 몰아냈다. 이어서 프랑스군은 1800년 12월 뮌헨 인근의 호엔린덴에서 일어난 호엔린덴 전투(The Battle of Hohenlinden)에서 오스트리아군을 물리쳤다.
나폴레옹은 군사독재를 시작하여 국가를 안정시켰으며 전쟁을 일으켜 유럽의 여러 국가에 승리함으로써 국민들을 열광시키고 전쟁으로 정복한 국가로부터 전쟁배상금과 수탈로 국가 재정을 안정시킴으로써 국민들로부터 열열한 지지를 받았다.
1792 ~ 1802년 사이의 전쟁을 프랑스혁명전쟁(French Revolutionary Wars)이라 하고 1803 ~ 1815년 사이의 전쟁을 나폴레옹 전쟁(Napoleonic Wars)이라 한다.
나폴레옹은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국민투표(비밀투표가 아님)를 통해서 1804년 5월 18일 황제에 올랐다.
1804년 대륙법의 원형인 나폴레옹 법전(Code Napoléon, 1804년 프랑스 민법전 Code civil des Français, Civil Code of the French, 1807년 나폴레옹 법전으로 개칭)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황제의 명으로 제정되어 시행되었다.
1805년 7월 프랑스 함대가 영국함대와 피니스테레 곶 해전 (battle of Cape Finisterre, 1805.7., 스페인 북서쪽 피니스테레 곶)을 치렀지만 승패를 짓지 못했다.
나폴레옹 1세는 울몬 전투(Battle of Ulmon, 1805. 10. 16. ~ 10. 19. 독일 울몬)에서 승리하여 오스트리아군을 함정에 빠뜨리고 바이에른 선제후에게 항복을 강요하였다.
나폴레옹 1세의 해군은 1805년 영국과의 트라팔가르 해전(Battle of Trafalgar, 1805.10.21.)에서 패하여 제해권을 잃었다.
1805년 프랑스 황제군은 차르 알렉산드르 1세(Aleksandr I, 재위 1801 ~ 1825)가 지휘하는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을 아우스테를리츠 전투(Battle of Austerlitz, 1805.12., 체코 슬라브코프우브르나)에서 격퇴시켰다. 프레스부르크 조약(Treaty of Pressburg)으로 오스트리아(신성로마제국)가 탈퇴하여 제3차 대(對)프랑스 동맹이 무너졌다. 그리고 오스트리아(신성로마제국)는 나폴레옹의 독일 연방에 영토를 양도하였다. 그 결과 독일 국가의 연합체인 라인 동맹(Confederation of the Rhine)을 창설하게 되었다.
네덜란드는 1795년에 프랑스의 위성국인 바타비아 공화국((Bataafse Republiek, 1795 ~ 1806)이 되었다가 1806년 6월에 프랑스에 합병되어 네덜란드 왕국(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Louis Napoléon Bonaparte, 1778 ~ 1846, 네덜란드 왕국 재위 1806~1810, 나폴레옹 둘째 남동생)이 되었으며 그 후 나폴레옹의 황제군이 1812년러시아 원정에서 패퇴하자 1813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 스웨덴 연합군이라이프치히 전투(Völkerschlacht bei Leipzig, 1813. 10.)에서 나폴레옹 황제군을 결정적으로 패배시키고 네덜란드로 진격함에 따라 네덜란드는 1813년에 프랑스로부터 독립하여 윌리엄 5세(Willem Batavus, 1748 – 1806, 네덜란드 공화국의마지막왕, 1795년 런던으로 망명)의 아들인 빌럼 1세(William I of the Netherlands, Willem Frederik Prins van Oranje-Nassau, 1772 ~ 1843,네덜란드 연합 왕국 오라녜나사우 왕가의 초대국왕 재위 1815 ~ 1840)의 군주국이 되었다.
1806년 나폴레옹의 황제군은 프로이센을 침공하여 잘펠트 전투(Battle of Saalfeld, 1806.10.10.)에서 프로이센 군에 승리하였고 이어서 예나-아우에르슈테트 전투(Battle of Jena-Auerstädt, 1806, 10. 14.)에서 프로이센 군을 격파하여 프로이센을 종속국으로 만들었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Friedrich Wilhelm III, 재위 1797 ~ 1840)는 쾨니히스부르크로 도망쳤으며 다시 러시아 군을 끌어들여 프로이센을 회복하고자 했다.
러시아는 프로이센이 패망 위기에 몰리자 위기를 느껴 프로이센에 지원군을 파견했으나 물러났다.
그리고 이때 나폴레옹은 점령한 베를린에서 대륙 봉쇄령을 발표하였다(베를린 칙령, 1806. 11. 21.).
1807년, 나폴레옹 1세의 황제군이 폴란드로 진격할 때 프로이센을 구원하러 온 러시아군(제4차 대프랑스동맹, 1806 ~ 1807)을 아일라우 전투(Battle of Eylau, 1807, 동프로이센)와 프리틀란트 전투(Battle of Friedland, 1807, 프로이센, 현 러시아 프라브딘스크)에서 격파하고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Aleksandr I, 재위 1801 ~ 1825)와 프로이센의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Friedrich Wilhelm III, 재위 1797~1840)와 각각 회담하여 틸지트 조약(Treaties of Tilsit, 1807)을 체결하여, 폴란드 지역에 바르샤바 대공국(1807 ~ 1815, 폴란드 지역,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 Friedrich August I)을 세우고 프로이센의 일부에 베스트팔렌 왕국(Kingdom of Westphalia, 1807 ~ 1813, 독일지역)을 세워 세 번째 남동생 제롬 나폴레옹 보나파르트(Jérôme-Napoléon Bonaparte, 1784 ~ 1860)에게 통치를 하게 하여 두 나라를 프랑스 제국의 위성 국가로 만들었다. 그리고 많은 배상금을 받았다.
1808년 로마 교황령을 완전히 병합하고 로마 교황 비오 7세(Papa Pio VII, 재위 1800 ~ 1823)를 유폐하였다.
1809년 오스트리아는 아우스테를리츠 전투에 패배한 후 다시 양성한 군대로 프랑스가 이베리아 반도에 군대를 파견(이베리아 반도 전쟁,1808 ~ 1814, 반도전쟁, 에스파냐(스페인) 독립전쟁, 탈라베라 전투 1809, 부사코 전투 1810, 살라망카 전투 1812, 비토리아 전투 1813, 스페인 국왕인 조제프 보나파르트 군이 동맹군에 대항하여 힘겹게 싸움)한 틈을 타 바르샤바 공국과 이탈리아로 진격하여 프랑스와 다시 전쟁을 하였다.
이에 나폴레옹이 직접 지휘한 프랑스 제국군이 오스트리아로 진격하는 도중에 1809년 5월 빈(Vienna) 근처에서 아스페른-에슬링 전투(Battle of Aspern-Essling)를 하였으나 오스트리아 카를 대공(Erzherzog Carl)의 제국군에 패하여 물러났다.
아스페른-에슬링 전투(Battle of Aspern Essling)는 나폴레옹이 직접 지휘한 전투 중에서 최초로 패배한 전투였다. 그리고 이 전투에서 장 란(Jean Lannes) 원수, 루이-뱅상-조제프 르 블론드 드 생틸레르(Louis-Vincent-Joseph Le Blond, comte de Saint-Hilaire, 1766 ~ 1809) 장군이 부상을 당하여 사망했다.
프랑스 황제군은 한 달 후 7월에 오스트리아 제국군을 빈 근교의 바그람 전투(battle of wagram)에서 격파하였다.
1812년 프랑스 황제군이 대륙봉쇄령을 따르지 않는 러시아로 진격하여 보르디노 전투(Battle of Borodino)에서 격렬히 싸워 쌍방이 많은 손실을 입고 프랑스황제군이 승리하였으며 그 후 1주일 뒤 모스크바에 입성하였으나 러시아의 청야 전술(淸野 戰術, 초토화 전술, scorched earth)에 패퇴하였다.
1812년 러시아 원정에서 패하여 파리로 돌아온 프랑스 제국의 나폴레옹 1세는 군을 다시 모집하고 재편성하여 자신의 영향력을 유지하기위해 원정하였다.
1813년 나폴레옹 1세의 황제군은 뤼첸 전투(Battle of Lützen, 1813.5. 러시아)에서 러시아군에 승리하였고 바우첸 전투(Battle of Bautzen, 1813.5. 독일)에서 러시아-프로이센 연합군에 승리하였으며 드레스덴 전투(Battle Of Dresden, 1813.8. 독일)에서 오스트리아, 러시아, 프로이센 연합군을 격파하는 등 제6차 대프랑스 동맹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1813년 11월 메테르니히(Klemens von Metternich,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 후작, 1773 ~ 1859, 오스트리아 수상, 외교관,대프랑스 동맹 주도)이 나폴레옹에게 황제를 유지하고 프랑스 국경을 벨기에(België), 사보이(Savoy, 프랑스의 오베르뉴론알프 일부), 라인란트(Rheinland, 독일과 프랑스, 룩셈부르크, 벨기에, 네덜란드 사이 지역)만 유지하고 이탈리아, 독일, 네덜란드에서 프랑스군을 철수하는 프랑크푸르트 제안(Frankfurt proposals)을 했지만 나폴레옹이 승락을 미루어 평화교섭이 불발되었다.
그 후 프랑스 제국의 나폴레옹 1세는 바르샤바 공국, 이탈리아 왕국, 나폴리 왕국, 라인동맹(Confederation of the Rhine)의 바덴 대공국, 베스트팔렌 왕국, 베르크 대공국 등의 참전으로 조직된 20만명의 병력을 이끌고 독일로 원정하여 작센에서 제 6차 대 프랑스 동맹군과 라이프치히 전투(Battle of Leipzig, 1813. 10. 16.~ 1813. 10. 19.)을 하였다.
동맹군은 프로이센군, 러시아 제국군, 스웨덴 왕국군 14만명, 오스트리아 제국군, 영국군, 라인동맹(Confederation of the Rhine)이 해체되어 작센 왕국군, 뷔르템베르크 왕국군 등은 프랑스를 배반하고 동맹군에 가담하는 등 주위에 100만군이 있었으며 그 중에서 30만명 이상이 참전했다.
군별로 각각 참전한 동맹군은 나폴레옹 1세의 20만명 군을 자연스럽게 포위하여 지연 작전을 폄에 따라 나폴레옹 1세의 제국군은 보급품이 떨어지고 전투에서도 대패하여 영토를 떼어주고 휴전할 것을 제안했지만 거절당하여 적진을 뚫고 필사적으로 후퇴하는 도중에 엘스터 강(elster)을 건너는 다리를 일찍 파괴함에 따라 많은 병력이 포로가 되거나 사상되어 잃고 파리로 돌아왔다.
1814년 나폴레옹이 직접 지휘한 황제군은 파리 동쪽의 샹포베르 전투(Battle Of Champaubert, 1814. 2)에서 프로이센-러시아 군에 승리하였으나 1814년 3월 30일 파리 전투(Battle of Paris, 1814. 3.)에서 마르몽(Auguste Frédéric Louis Viesse de Marmont,오귀스트 프레데리크 비셰 드 마르몽, 1774~1852, 프랑스 원수)이 프로이센, 러시아, 오스트리아 동맹군에 패하고 항복하여3월 31일 파리가 함락되었으며퐁텐블로 조약(Traité de Fontainebleau, 1814)이 체결되어 나폴레옹은 지중해의 작은엘바 섬(Isola d'Elba, 이탈리아)의 영주로 추방되었다.
프랑스는 왕정이 복구되어부르봉 왕가에서 루이 18세(Louis XVIII, 재위 1814 ~ 1824)가 후계자로 선택되었다.
전 후 처리를 위해 빈 회의가 열렸으나 각국의 이해관계가 얽혀 회의는 좀처럼 진행되지 않았다.
그런 중에 1815년 3월 1일 나폴레옹은 측근 장군들과 같이 엘바 섬을 탈출하였다.
이에 루이 18세는 군대를 출동시켜 프랑스에 상륙한 나폴레옹을 사살하도록 명하였으나 그들마저 나폴레옹의 기개에 눌려 나폴레옹 편으로 돌아섰다. 나폴레옹은 3주만에 파리로 돌아와 황제로 복위하였다.
나폴레옹은자유주의적인 새로운 헌법을 발표하여 자신에게 비판적인 세력과의 타협을 시도했다. 그리고 연합국에게 강화를 제안했지만 거부당하여 다시 전쟁을 하게 되었다.
1815년 6월,워털루 전투(Battle of Waterloo, 벨기에워털루)에서 웰링턴 장군(제1대 웰링턴 공작 아서 웰즐리, Arthur Wellesley, 1st Duke of Wellington, KG, GCB, FRS, 1769 ~1852)이 지휘한 영국과 네덜란드 연합군을 공격하여 공세를 취했으나 뜻밖에 뒤늦게 나타난 프로이센군의 가담으로 패하였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엘바 섬에서 탈출하여파리에 도착한1815년3월 20일부터루이 18세가 복위한7월 8일까지의 복위 기간을 백일천하(百日天下, Cent-Jours)라 하는데 그동안제7차 대프랑스 동맹,워털루 전투,나폴리 전쟁 등이 있었다.
1815년 6월 워털루 전투 이후 몰락한 나폴레옹 1세는 적자인 나폴레오네 프란체스코 주세페 카를로 부오나파르테(Napoleone Francesco Giuseppe Carlo Bonaparte, 1811 ~ 1832, 폐결핵으로 사망, 모 - 마리 루이즈 Marie Louise)를 황위 계승자로 지명하여 나폴레옹 2세(Napoléon II, 프랑스 제국 황제, 재위 1815년 6월 22일 ~ 7월 7일)로 하였지만 곧 루이 18세(Louis XVIII, 프랑스 왕, 1815 ~ 1824)의 왕정복고가 이루어졌다.
나폴레옹은 퇴위되어 1815년 8월, 남대서양의 세인트헬레나 섬(Saint Helena, 앙골라 서쪽, 영국)에 유폐되었다.
* 조세핀과 장미
장미(薔薇, rose, 학명 Rosa hybrida)는 고대부터 동서양 어디에서나 사랑을 받아왔다.
야생장미를 처음 재배한 곳은 아마도 B.C 2,000년 경 페르시아(Persia)이며 페르시아에서 메소포타미아, 소아시아, 로도스 섬, 크레타 섬, 그리스, 로마로 퍼져나갔다고 한다. 에게해(Aegean Sea)의 로도스 섬은 장미를 많이 재배했다고 하여 로드(Rrodes)라는 것이다.
18세기말 아시아의 여러 야생종(개화기간이 긴 중국의 들장미, 우리나라에는 중국의 들장미, 해당화, 찔레 등이 있었음)이 유럽에 도입되어 유럽종과 아시아 야생종간에 교배가 이루어져 화색, 화형, 향기, 개화기간, 개화계절 등을 개량하여 새로운 관상용과향료용으로 원예종의 장미(Rosa hybrida Hort.)들이 많이 만들어졌다.
그래서 18세기 이전의 장미를 고대장미(old rose)라 하고 19세기 이후의 장미를 현대장미(modern rose)라 한다.
특히 프랑스의 말메종 성(Chateau Malmaision)에서는 나폴레옹 황제의 황후인 조제핀 드 보아르네(Joséphine de Beauharnais, 1763 ~ 1814)가 전 세계에서 수집한 장미 250여 종 3만 그루를 장미원에서 재배하였다고 한다. 여기에서 교배 개량되어 오늘날의 다양한 장미 품종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 나폴레옹의 주요 원수들
• 루이 알렉상드르 베르티에(Louis Alexandre Berthier, 1753 ~ 1815)
베르티에(Berthier)는 1766년 12살에 왕립 메지에르 공학교(’École royale du génie de Mézières)를 졸업하고 지형측량관이 되었으며 1772년에 정식으로 군에 중위로 임관했다.
1780년, 베르티에는 로샹보 백작이 지휘하는 미국독립전쟁 지원군으로 참가하여 전쟁을 배웠다.
베르티에는 프랑스혁명전쟁에서 급속히 진급하여 1792년 Nicolas Luckner 원수의 참모장이 되었으나, 1793년 방데 전쟁(War in the Vendée, 1793 ~ 1795)에 파견되었다가 귀족이라는 이유로 해임되었으나 재임용되어 큰 공을 세워 1795년 여단장에 이어 사단장이 되었다. 그 후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원정군 참모총장으로 등용되어 1796년 로디 전투(Battle of Lodi, 1796. 5., 밀라노 남쪽)에서 두각을 나타냈으며 1797년 리볼리 전투(Battle of Rivoli, 1797.1., 이탈리아의 북서부)에서는 위험에 처한 주 베르 장군을 구출했다. Berthier는 군대의 다양한 경험과 세부 사항에 대해 완전히 숙달하여 조직과 운영에 있어서 정확하고 빠른 이해력으로 뛰어난 군 지휘 능력을 발휘하는 나폴레옹의 이상적인 참모장이 되어 캄포 포르미오 조약(Traité de Campo-Formio, 1797) 이후 군대를 지휘하였으며 1798년 2월 이탈리아 로마공국을 점령하고 교황을 사로잡았다.
이어서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에도 참전했다.
그는 브뤼메르 18일 쿠데타 (1799년 11월 9일)에 참여한 후 한동안 전쟁부 장관이 되었다.
통령정부에서도 나폴레옹의 참모총장 역할을 수행했다.
1804년 제국의 원수가 되었고
1806년 뇌샤텔 대공(Prince de Neuchâtel)이 되었으며 1807년에는 제국의 부사령관, 1809년에는 바그람 대공(Prince de Wagram)이 되었다.
1812년 러시아 원정을 반대했지만 참전했다.
그러나 나폴레옹 퇴위 후 1814년 루이 18세의 신하가 되었다.
나폴레옹이 엘바 섬에서 베르티에에게 이후의 계획을 알렸으나 베르티에는 나폴레옹 쪽에 다시 참여하기를 꺼려 나폴레옹과 루이 18세 양쪽의 의심을 받았다.
나폴레옹이 다시 파리로 돌아오자 은퇴하여 바이에른주 밤베르크에 머물렀으나 워털루 전쟁 전인 1815년 6월 그의 자택 2층 창문(upstairs window)에서 떨어져 의문사했다.
• 조아킴 무라트(Joachim Murat, 1767 ~ 1815)
프랑스 기병대 지도자인 조아킴 무라트(Joachim Murat, 1767 ~ 1815, 나폴레옹의 막내 여동생 카를론 Caroline Bonaparte의 남편, 나폴리의 왕 1808 ~ 1815)는 1795년 10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왕당파 반란 진압에 필요한 포를 기병으로 빼돌려 파리의 옥상에 설치하는데 공을 세워 보나파르트의 보좌관이 되었다. 이탈리아와 이집트 원정에서는 기병대를 지휘하였고 1799년 브뤼메르 18일 쿠데타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는 나폴레옹의 이인자 중의 한 명으로 1800년에 캐롤라인 보나파르트(Caroline Bonaparte)와 결혼하여 나폴레옹의 처남이 되었다.
무라트(Murat)는 프랑스 제국군의 원수로 임명되었고 울름(Ulm), 아우스터리츠(Austerlitz), 예나 (Jena), 에일라우(Eylau) 전투 등 러시아군을 상대로 대규모 기병 돌격을 이끌었다. 1806년 무라트는 베르크 대공(베르크 대공국, Grand-duché de Berg, 베르크 클레베 대공국, 1806~1813, 1806 조아생 무라트 대공, 1808 루이 보나파르트 대공)으로 임명되었고, 1808년 나폴리의 왕(1808 ~ 1815)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무라트는 라이프치히 전투(Battle of Leipzig, 1813. 10.) 이후 나폴레옹의 여동생인 아내의 의견에 따라 나폴레옹을 배반해 나폴레옹의 원군 요청에 응하지 않고 대프랑스 동맹과 협상하며 나폴리 왕위를 지키기에만 급급함에 따라 나폴레옹이 엘바 섬으로 유배되는 데 일조했으나 그 뒤 100일 천하로 나폴레옹이 복귀하자 다시 나폴레옹의 편에 서서 나폴리 전쟁을 시작하였으나 톨렌티노 전투(Battle Of Tolentino, 1815)에서 오스트리아 제국군에 패배하였다.
• 장 란(Jean Lannes, 1769 ~ 1809)
장 란(Jean Lannes, 1769 ~ 1809)은 프랑스혁명전쟁과 나폴레옹 전쟁의 장군으로 조아킴 무라트(Joachim Murat, 1767 ~1815)와 더불어 나폴레옹 이인자 중의 한 명이었다.
장 란은 여단장으로 여러 전투에서 뛰어난 전과를 올렸으나 1795년 테르미도르파(Thermidorians)가 도입한 군대 개혁으로 해임되었다가 재임용되었다.
1796년 4월에 벌어진 이탈리아 2차 데고 전투(Second Battle of Dego)에서 두각을 나타내었고 1798년 이집트 카이로 함락 작전, 시리아 가자 포위 전, 생장다르크 포위 전 등을 이끌었고 1799년 나폴레옹의 브뤼메르 18일 쿠데타에 가담하였으며 사단장 및 통령정부의 경비대 사령관으로 승진했다. 1800년 6월 9일 몬테벨로 전투에서 오스트리아를 무찔러 마렝고 전투 승리를 이끌었으며 프랑스 군의 원수가 되어 1805년 10월 울름 전투, 1805년 12월 아우스터리츠 전투와 예나-아우어슈테트에 참전했으며, 1806년 12월 폴란드 푸우투스크 전투, 1807년 6월 프리틀란트 전투에서 러시아를 무찔렀다.
스페인 원정에 참전하여 1809년 2월에 사라고사를 함락시켰으나 아스펜-에슬링 전투에서 포탄을 맞고 부상을 당해 사망했다.
• 장밥티스트 쥘 베르나도트(Jean-Baptiste Jules Bernadotte, 1763 ~ 1844, 스웨덴-노르웨이의 왕, 칼 14세 요한 Karl XIV Johan, 재위 1818 ~1844)
나폴레옹의 애인 데지레(Bernardine Eugénie Désirée´, 1777 ~ 1860, 베르나도트와 결혼, 스웨덴 왕비)와 결혼한 장밥티스트 쥘 베르나도트(Jean-Baptiste Jules Bernadotte)는 1794년 장군으로 진급하여 전쟁부 장관직도 역임했고 나폴레옹 황제군의 원수(명예직)로 올랐으며 자녀가 없었던 스웨덴-노르웨이의 왕 칼 13세(Karl XIII, 1748 ~ 1818)는 스웨덴-노르웨이와 아무 관련이 없는 그를 좋게 보고 프랑스와의 관계 개선을 위하여 후계자로 지명하였고 1810년에 스웨덴 의회에서 스웨덴 왕 칼 13세의 후계자로 인정받았으며 나폴레옹 1세도 승낙함에 따라 스웨덴-노르웨이의 왕 후계자(칼 14세 요한 Karl XIV Johan, 재위 1818 ~1844)로 갔으나 나폴레옹의 적이 되어 동맹군에게 나풀레옹 군 격파 계획을 세워 주었다.
* 나폴레옹의 원수 26명 명단
장 란(Jean Lannes, 1769 ~ 1809, 초대 몬테벨로 공작 1st Duc de Montebello, 1804 원수),
조아킴 무라트(Joachim Murat, 1767 ~ 1815, 초대 뭐라 대공 1st Sovereign Prince de Murat, 1804 원수),
루이 알렉상드르 베르티에(Louis-Alexandre Berthier, 1753 ~ 1815, 초대 바그람 공작 1st Duc de Wagram, 1804 원수),
앙드레 마세나(André Masséna, 1758 ~ 1817, 초대 리볼리 공작 1st Duc de Rivoli, 1804 원수),
루이니콜라 다부
Louis-Nicolas Davout, 1770 ~ 1823, 초대 아우어슈테트 공작 1st Duc de Auerstaedt, 1804 원수),
장바티스트 베시에르(Jean-Baptiste Bessières, 1768 ~ 1813, 초대 이스트리아 공작 1st Duc de Istrie, 1804 원수),
아돌프 에두아르 카시미르 조제프 모르티에(Adolphe Édouard Casimir Joseph Mortier,1768 ~ 1835, 초대 트레비즈 공작 1st Duc de Trévise, 1804 원수),
장 드 디외 술트(Jean-de-Dieu Soult,1769 ~ 1851, 초대 달마티 공작 1st Duc de Dalmatie, 1804 원수, 1847프랑스 대원수),
미셸 네(Michel Ney,1769 ~ 1815, 초대 엘힝겐 공작 1st Duc de Elchingen, 1804 원수),
봉아드리안 쟈노 드몽세(Bon-Adrien Jeannot de Moncey, 1754 ~ 1842, 초대 코넬리아노 공작 1st Duc de Conégliano, 1804 원수),
장바티스트 주르당(Jean-Baptiste Jourdan,1762~1833, 초대 주르당 백작 Count Jourdan, 1804 원수),
피에르 오주로(Charles Pierre Augereau, 1757 ~ 1816, 초대 카스틸리오네 공작 1st Duc de Castiglione, 1804 원수),
장바티스트 쥘 베르나도트(Jean-Baptiste Jules Bernadotte, 1763~1844, 초대 퐁트 코르보 대공 1st Sovereign Prince de Ponte Corvo), 1804 원수),
기욤 마리안 브륀(Guillaume Marie-Anne Brune, 1763 ~ 1815, 초대 브륀 백작 1st Comte Brune, 1804 원수),
프랑수아 에티엔 크리스토프 켈레르만(François Étienne Christophe Kellermann,1735 ~ 1820, 초대 발미 공작 1st Duc de Valmy, 1804 원수),
프랑수아 조제프 르페브르(François-Joseph Lefebvre,1755 ~ 1820, 초대 단치히 공작 1st Duc de Dantzig, 1804 원수),
카트린도미니크 드 페리뇽(Catherine-Dominique de Pérignon, 1754 ~ 1818, 초대 그레나드 후작 1st Marquis de Grenade, 1804 원수),
장 마티유 필리베르 세뤼리에(Jean-Mathieu-Philibert Sérurier,1742 ~ 1819, 초대 세뤼리에 백작 1st Comte Sérurier, 1804 원수),
클로드빅토르 페랭(Claude-Victor Perrin,1764 ~1841, 초대 벨륀 공작 1st Duc de Bellune, 1807 원수),
에티엔 자크 조제프 알렉산드르 마크도날(Jacques(-Étienne-Joseph)-Alexandre, MacDonald duc de Tarente,1765 ~1840, 초대 타랑트 공작 1st Duc de Tarento, 1809 원수),
니콜라 우디노(Nicolas-Charles Oudinot,1767 ~1847, 초대 레지오 공작 1st Duc de Reggio, 1809 원수),
오귀스트 프레데리크 루이 비셰 드 마르몽(Auguste Frédéric Louis Viesse de Marmont, 1774 ~ 1852, 초대 라구사 공작 1st Duc de Ragusa, 1809 원수),
루이 가브리엘 쉬셰(Louis Gabriel Suchet,1770년3월 2일~1826, 초대 알뷔페라 공작 1st Duc de Albufera, 1811 원수),
로랑 드 구비옹 생시르(Laurent de Gouvion Saint-Cyr,1764 ~1830, 초대 구비옹 생 시르 후작 1st Marquis de Gouvion-Saint-Cyr, 1812 원수),
유제프 안토니 포니아토프스키(Józef Antoni Poniatowski, 1763 ~ 1813, 초대 포니아토프스키 대공 1st Duc de Poniatowski, 1813 원수),
에마뉘엘 드 그루시(Emmanuel de Grouchy,1766~1847, 초대 그루시 후작 1st Marquis de Grouchy, 1815 원수)
4. 대영 제국(大英帝國, British Empire)
대영 제국이란 영국(United Kingdom)의 정식 나라 명칭이 아니고 영국이 많은 식민지를 가졌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 시대를 말하는 것이다.
대영 제국은 제1차 대영제국과 제2차 대영 제국으로 나눈다.
가난하고 국력이 약했던 영국은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 1558 ~ 1603) 때에 이르러 한자동맹(Hanseatic League)이 쇠퇴함에 따라 잉글랜드 상인들은 오랫동안 봉쇄되었던 발트 해로 다시 진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1579년 북동부의 독일로 직물을 수출했다.
드레이크(Francis Drake, 1545? ~ 1596, 영국 제독, 해적)는 1580년에 사략선(私掠船, privateer)을 타고 마젤란(Ferdinand Magellan, 1480?~1521)에 이어 두 번째로 세계일주를 했다.
지중해 무역을 재개하여 1581년에 투르크 회사가, 1583년에는 베네치아 회사가 설립되어 영국의 지중해 무역을 독점했다. 이 두 회사는 1592년 레반트 회사(Levant Co., 콘스탄티노플과 그 주변 지역, 시리아 알레포 Aleppo와 터키의 스미르나 Smyrna에 지점)로 합병하여 이후 2세기 넘게 존속했다.
1588년 스페인과 전쟁에서 무적함대(Spanish Armada)를 격파하고 침략을 방어하여 군사적 강국으로 부상하였으나 무역에서의 큰 이익이나 식민지를 얻지 못하였다.
1497년 포르투갈의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 1469 ~ 1524)가 인도 항로 개척한 이후 포르투갈은 인도의 제해권을 장악하였으며 인도의 무역 요충지에 인도 정부의 무역권을 얻어 상관(商館 , 무역 거래소, merchant adventurer)을 설치하였으며 성을 쌓고 군대를 주둔시켜 무력으로 상관을 보호하였다.
포르투갈(1580년 스페인과 합병)은 인도 항로를 이용하여 이슬람 대신에 무역을 함으로써 인도와 동남아에서 많은 이익을 남겼지만 인도나 동남아를 점령하거나 통치권을 차지한 것은 아니었다.
네덜란드는 독립전쟁(1572 ∼ 1609, 1648 명목상 독립)을 치르는 동안 강성해진 해군력으로 동인도회사를 앞세워 포르투갈을 밀어내고 인도와 동남아로 진출했으며 영국도 네덜란드를 따라 이들 지역에 진출했다.
개척지는 스페인의 세력이 닿지 않거나 약하게 미치는 북미와 아시아 지역을 대상으로 하였다.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 1599 ~ 1658)은 내전(English Civil War, 1642 ~ 1651, 청교도 혁명 Puritan Revolution, 의회파와 왕당파 간의 전쟁, 찰스 1세 처형)을 종식시키고 1653년 의회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연방의 헌법으로 영국 역사상 유일한 성문법인 "통치장전(統治章典, Instrument of Government)"을 제정함에 따라 공화국을 수립하여 호국경에 취임(1653)하였다.
1651년 올리버 크롬웰이 제정한 항해조례(Navigation Acts, 항해법, 영국과 식민지 배만 상품을 영국 식민지로 운송할 수 있으며, 영국 식민지로 가는 상품은 영국을 거치고 수입관세를내야 하며, 담배, 설탕 같은 식민지 원자재 상품은 영국에만 팔 수 있다는 등)는 해상운송에서 우월했던 네덜란드의 무역에 타격을 가하고 영국의 무역을 확대시켜 대영제국이 되는데 기여를 했지만 제1차 영국-네덜란드 전쟁(The First Anglo-Dutch War1652 ~ 1654)의 원인이 되었다.
1655년 호국경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 1599 ~ 1658)은 해군 제독 윌리엄 펜 경(Admiral Sir William Penn, 1621 ~ 1670, 영국의 해군제독, 정치인, 펜실베이니아를 개척한윌리엄 펜의 아버지)을 파견하여 스페인이 점령하고 있던 자메이카를 점령하였다. 자메이카는 영국의 중남미 지역 최초의 식민지이며 노예무역의 중심지로 활용되었다.
17세기말 영국 국내에서는 왕과 의회의 갈등, 그리고 종교적 갈등이 계속되었다.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 1599 ~ 1658) 사망 후 그의 셋째 아들 리처드 크롬웰(Richard Cromwell, 호국경 1658 ~ 1659)이 1658년 2대 호국경으로 지명이 되었지만 국민과 군대의 불만으로 공화국은 사분오열되었다.
올리버 크롬웰의 부하였던 존 램버트(John Lambert, 1619 ~ 1684, 장군, 의회 의원)가 1659년 10월에 쿠데타를 일으켜 의회를 해산시키고 군사 정권을 수립하자 제대한 군의 실력자인 조지 멍크(George Monck, 1608 ~ 1670)는 국민들이 왕정복귀를 열망함에 따라 해외로 탈출한 왕당파와 연락을 취하고 의회 소집을 요구하여 12월에 의회를 부활시켰다. 1660년 1월 잉글랜드로 진군하여 국민들의 지지를 잃은 존 램버트를 체포하여 런던탑에 투옥시켰으며 총선을 실시하여 의회를 새로 구성했다. 그런 다음 조지 멍크(George Monck, 1608 ~ 1670)는 네덜란드에 망명 중이던, 단두대에 처형된 찰스 1세의 아들 찰스에게 연락하였고 찰스는 1660년 4월 브레다 선언(Declaration of Breda, 네덜란드의 브레다)을 하여 공화국 시절의 대역죄를 사면하고 몰수된 토지를 원상회복시키며 종교적인 관용 정책을 시행하며 군대의 체불임금을 지급하고 군을 해산한 후 국왕이 임명하는 소수의 군대를 재임용할 것이라 하였다.
이에 1660년 5월 새로 구성된 의회에서 왕정복고(王政復古, Restoration)가 승인됨으로써 찰스는 찰스 2세(Charles II, 재위 1660 ~ 1685)로 즉위하였다.
조지 멍크는 이 공로로 제1대 앨버말 공작(1st Duke of Albemarle)이 되었다.
찰스 2세(Charles II, 재위1660 ~ 1685)때인 1664년 영국 해군 최고 사령관(lord high admiral, commander of the Royal Navy 왕립해군 사령관)인 요크 공작(Duke of York, 1633 ~ 1701, 영국왕 제임스 2세, James II of England, 재위1685 ~ 1688)의 명령을 받은 요크공작의 신랑(Groom of the Chamber 궁정 신랑)인 리처드 니콜스(Richard Nicolls, 1624 ~ 1672, 영국의 왕당파 대령출신, 뉴욕총독)는 4척의 전함과 300명의 병사를 이끌고 뉴 네덜란드(New Netherland, Nieuw Nederland 니우 네덜란드, 수도는 뉴 암스테르담, 니우 암스테르담, Nieuw Amsterdam, 북아메리카 허드슨강 유역, 뉴욕)를 원정하였는데 현지의 뉴 네덜란드의 총독페터 스토이베산트(Peter Stuyvesant, 1612 ~ 1672, 뉴 네덜란드 총독 재임 1647 ~ 1664)가 신임을 잃어 그의 병사들이 전투를 거부함에 따라 쉽게 정복되었으며찰스 2세(Charles II, 재위1660 ~ 1685)는 그의 동생인 요크 공작(Duke of York, 제임스 2세, James II of England, 재위1685 ~ 1688)에게 뉴 네덜란드 일부를 하사하였다.
네덜란드의 피터 미누이트(Peter Minuit, 1585 ~ 1638)가 1626년에 인디언에게 24달러에 해당하는 장식물을 주고 산 맨해튼 섬이 포함된 뉴암스테르담(New Amsterdam, 니우 암스테르담 Nieuw Amsterdam)을 제임스 2세가 된 요크공작을 기념하여 뉴욕(New York)으로 이름을 변경하였다.
찰스 2세(Charles II, 재위 1660 ~ 1685)는 네덜란드와 해상무역의 충돌로 2차 영국-네덜란드 전쟁(1665 ~ 1667)과 3차 영국-네덜란드 전쟁(1672 ~ 1674)을 치렀다.
찰스 2세는 찰스 1세와는 달리 종교에는 관용적이었으나 친 가톨릭이었다.
찰스 2세(Charles II, 재위 1660 ~ 1685)에게는 적자가 없어 가톨릭교도인 그의 동생 요크 공 제임스(James, Duke of York)가 1685년 제임스 2세(James II, 1633 ~ 1701, 재위 1685 ~ 1688)로 즉위하여 가톨릭을 부활시키고 전제주의(專制主義)를 강력히 실행함에 따라 의회주의자들과 반가톨릭 국민들의 불만이 고조되었으나 늙고 후사가 없어 제임스 2세(James II, 1633 ~ 1701, 재위 1685 ~ 1688)의 시기가 곧 끝날 것이라 생각하여 참고 기다리는 중에 제임스 2세의 아들 제임스 프랜시스 에드워드(James Francis Edward Stuart, 1688 ~1766, 자코바이트, Jacobite, 명예혁명의 반혁명세력)가 태어나자 1688년 의회의 토리당과 휘그당은 합의하여 3차 영국-네덜란드 전쟁(1672 ~ 1674) 후 제임스 2세의 딸 매리와 결혼한 네덜란드 총독 오렌지공(公) 윌리엄 3세(William III, 1650 ~1672, 네덜란드 총독 재위 1672 ~1702, 영국 왕 재위 1689 ~ 1702)와 메리 2세(Mary II, 1662 ~ 1694, 재위 1688 ~ 1694, 제임스 2세의 딸, 천연두로 사망) 부부에게 영국의 자유와 권리를 수호하기 위하여 군대를 이끌고 귀환하도록 초청함에 따라 윌리엄과 메리 부부가 1만 5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영국으로 들어오자 제임스 2세의 군대는 탈영자가 많아 무너져 버리고 제임스 2세(James II, 1633 ~ 1701, 재위 1685 ~ 1688)는 켄트에서 붙잡혔다가 프랑스로 탈출하였다. 더욱이 제임스 2세는 도망 중 템즈강에 옥새(玉璽, Great Seal, 國璽)를 버려 정당성까지 잃었다.
1689년 의회는 윌리엄 부부에게 ‘권리선언(權利宣言, Declaration of Rights, 1689. 2.)’을 제출하였으며 윌리엄 3세와 메리 2세는 이를 승인하고 공동으로 영국,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왕위에 올랐다. 이를 명예혁명(名譽革命, Glorious Revolution, 1688)이라 한다.
‘권리선언’은 의회의 권리를 인정하고 왕위 계승을 의회가 결정할 수 있게 하는 등 의회정치 발달의 기초가 되었다.
‘권리선언’은 뒤에 수정하여 ‘권리장전(權利章典, Bill of Rights, 1689. 12.)’으로 승인을 하였다.
권리장전(權利章典, Bill of Rights)은 의원선거의 자유, 의회의 면책권을 규정한 문서로 의회중심의 입헌정치를 위한 것이다.
그런데 제임스 2세를 받아들인 프랑스 왕 루이 14세(Louis XIV, 재위 1643 ~ 1715)는 제임스 2세(James II, 1633 ~ 1701, 재위 1685 ~ 1688)와 같이 윌리엄 3세(William III, 1650 ~1672, 네덜란드 총독 재위 1672 ~1702, 영국 왕 재위 1689 ~ 1702)의 영국 왕위 계승을 인정하지 않고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를 끌어들여 영국과의 전쟁을 하였다.
1690년 윌리엄 3세가 반란을 일으킨 아일랜드에 출정하여 7월 보인강 전투(Battle of the Boyne, 1690)에서 제임스 2세의 군대를 대파하여 1691년에 완전히 진압하였고 또 스코틀랜드의 재커 바이트(Jacobite, 명에 혁명의 반혁명세력) 반란도 진압하였다.
루이 14세의 호전성과 팽창정책에 맞서 전 유럽은 대동맹(大同盟, Grand Alliance)을 맺어 프랑스에 대항했다. 이를 9년 전쟁(팔츠 계승 전쟁, War of the Palatine Succession, 윌리엄 왕 전쟁, King William's War, 아우크스부르크 동맹전쟁, War of the League of Augsburg, 1688 ∼ 1697)이라 하며 유럽 본토뿐만 아니라 아일랜드와 북아메리카에서도 전투가 일어났다.
잉글랜드 왕-네덜란드 총독 윌리엄 3세도 아우크스부르크 동맹(League of Augsburg, 대對 프랑스 연합)에 참여하여 신성로마제국 황제 레오폴트 1세, 스페인의 카를로스 2세, 사보이아 공국(Ducato di Savoia, 1416년 공국, 1860년 프랑스에 합병, 이탈리아 북부와 프랑스, 스위스의 영토 일부, 신성로마제국 연방)의 비토리오 아마데오 1세와 함께 주도하였다.
팔츠 계승 전쟁이라고 부르는 것은 1692년 프랑스 루이 14세가 팔츠(Pfalz, 독일 서남부 라인란트팔츠 주 남부의 지방, 신성로마제국 연방, 팔츠 공국의 후계자가 없었음) 령(領)의 할양을 요구하고 침입하였기 때문이다.
1697년 9년 전쟁(1688 ~ 1697)의 결과 리스위크 조약(Treaty of Ryswick, 네덜란드)을 맺었다.
조약에 따라 프랑스는 스페인으로부터 아이티(산토도밍고 Santo Domingo)를 프랑스령으로 인정받았으며 스페인은 프랑스로부터 카탈루냐와 룩셈부르크 등을 복구하였고 신성로마제국은 프랑스령의 로렌 공국을 반환받았다. 잉글랜드는 윌리엄 3세의 왕위를 인정받았고 스웨덴은 팔츠 츠바이브뤼켄 공국(Pfalz-Zweibrücken, 신성로마제국 연방)의 주권을 프랑스로부터 탈환했다.
오렌지공(公) 윌리엄 3세(William III, 재위 1689 ~ 1702)와 메리 2세( Mary II, 1662 ~ 1694, 재위 1688 ~ 1694) 부부에게 자손이 없었고 뒤를 이은 메리 2세의 동생인 앤 여왕(Anne, 재위 1702 ∼ 1714, 부군은 덴마크 조지 왕자, Prince George of Denmark)도 자손이 없어 제임스 1세(재위 스코틀랜드 1567 ~ 1625, 잉글랜드 1603 ~ 1625)의 외증손자(딸의 외손자)인 조지 1세(George I, George Louise, 재위 1714 ~ 1727)가 앤 여왕에 이어 즉위함에 따라 스튜어트 왕조(Stuart Dynasty, 스코틀랜드 1371 ~ 1714, 영국 1603 ~ 1714)가 끝나고 하노버 왕조(House of Hanover, 1714 ~ 1901, 조지 1세의 부가 독일 하노버의 선제후)가 열렸다.
조지 1세는 부친으로부터 하노버 왕가의 선제후도 물려받아 양국의 왕을 겸했으며 이후 200년간 영국 왕은 독일 하노버의 선제후를 겸임했다.
그런데 조지 1세는 정치에 관심이 없어 의원내각제를 세계 최초로 시행하였다.
다수당인 휘그당(Whig Party, 1678 ~ 1859)의 로버트 월폴(Robert Walpole, 영국의 초대 총리, 재임 1721 ~ 1742)이 1721년 초대 총리(first prime minister)가 되었다.
월폴 총리는 영국이 네덜란드에 뒤떨어진 경제를 일으켜세우기 위해 보호무역 정책(protective trade policy)을 실시하였다. 수입 제품에 대한 관세를 인상하고 수입 원자재에 대한 관세를 폐지하거나 인하했으며, 영국산 제품에 대한 수출 보조금을 지급하였고, 영국 상품의 품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품질 관리 규정도 제정하였다.
이렇게 보호무역 정책을 시행한 결과 영국은 세계 무역선의 3/4을 보유한 강력한 네덜란드 제국을 넘어 설 수 있게 되었다.
17세기 중반 이후부터 영국의 지주들은 식량 수요가 증가하자 목장으로 사용하던 공용 토지를 농업의 집약화를 목적으로 밀경작지로 변경하고 "양이 들어가지 못하게 둘러싸는" 제2차 인클로저(enclosure)가 시작되었다.
18세기 후반의 인클로저(enclosure)는 의회(議會)의 입법에 의해 시행되었다.
19세기 전반에는 나플레옹과의 전쟁으로 식량 수요가 늘어나자 영국의 대토지주들이 소토지주의 토지를 대부분 인클로저(enclosure)하여 자본주의적 대규모 농장을 만들었다.
가. 제1차 대영제국
제1차 대영제국은 북미 식민지인 제임스타운을 건설한 제임스 1세 때인 1607년부터 1783년 미국이 독립할 때까지이다.
1) 동인도회사의 진출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 1558 ~ 1603) 때인 1591년 랭커스터(James Lancaster, 1554 ~ 1618)는 동인도로 항해하여 1592년 말레이 반도 서쪽에 있는 페낭 섬(Penang)과 실론(Ceylon, 스리랑카, Sri Lanka)을 항해하고 1594년에 돌아왔는데 이것이 영국 동인도 무역 시작의 기초가 되었다.
랭커스터(J. Lancaster)의 상선은 1601년 동인도회사의 1차 무역 원정에 나서 자바의 반탐(Bantam)에 동인도 회사의 첫 상관을 설립하였으며 1602년에는 말라카 해협에서 포르투갈 상선으로부터 900톤의 향료와 면직물을 탈취하여 1603년에 돌아왔다.
그러나 이때 영국의 인도와의 무역은 주로 레반트 회사(Levant Co. , 1581년, 영국의 지중해 무역상인조합)가 이집트, 시리아, 소아시아(터키) 등의 이슬람과 교역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네덜란드는 리스본에서 인도로부터 들어오는 물품을 수입하였는데 독립전쟁 중인 스페인(포르투갈 합병, 1580 ~ 1668)이 무역을 금지하자 직접 인도와 무역을 하고자 했다.
네덜란드는 포르투갈(포르투갈은 스페인과 합병 1580 ~ 1668 중에도 해외무역과 식민지를 독자로 경영했음)이 진출해 있던 인도를 1594년 민간인이 투자한 컴파니 판 베레(Compagnie van Verre, 동인도회사 전신) 등을 앞세워 군대와 같이 무굴제국인 인도로 들어가 무역을 시작했다.
네덜란드가 포르투갈(스페인이 포르투갈 합병, 1580 ~ 1668)이 독점하던 인도에 들어가자 영국도 네덜란드를 따라 들어가 1600년에 민간인이 출자하여 동인도회사를 설립하였다.
동인도회사는 용병(장교는 자국민이고 병사는 현지인)을 채용하여 보호받았다.
네덜란드에서는 1600년 암스테르담에 동인도 회사가 설립되고 이어서 홀란트 등에 약 10개의 무역회사가 세워져 난립되자 1602년에 기존에 있던 무역회사를 네덜란드 동인도회사(Dutch East lndia Company, Vereenigde Oostindische Compagnie, VOC)로 통합하여 설립하였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1605년 향료 군도(Spicy Islands, Maluku Islands 말루쿠 군도)의 암보이나(Amboina)를 점령하였고 포르투갈의 아프리카와 인도 항해의 독점권을 무너뜨리고 포르투갈을 밀어냈던 것이다.
영국도 네덜란드를 따라 들어가 1612년 호킨스(William Hawkins, 1560 ~ 1613)가 수라트(Surat)에 인도 첫 상관(商館)을 개설하였다.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선점하고 있던 포르투갈 세력과 1614년 수라트(Surat, 구자라트 주)에서 포르투갈 함대의 공격을 격퇴하였다.
1622년 영국-페르시아 연합군은 포르투갈의 오르무즈(Ormuz, 오만, Hormuz 호르무즈)를 빼앗았다.
그리고 1623년 영국과 네덜란드는 향신료 독점권을 둘러싸고 인도네시아에서 암보이나 사건(Amboina massacre)이 일어나 충돌하였다.
영국 동인도회사는 동남아와 인도 등에서 무역을 중점으로 활동하였으나 네덜란드의 동인도 회사에 밀려 인도에서만 주로 활동하였다.
인도에서는 무굴제국의 왕위 다툼에 무력을 지원하여 성공함으로써 1639년에 마드리드, 봄베이 등에 무역소를 설치하여 무역을 확대하였다.
2) 영국의 아메리카 식민지 건설
가) 영국의 미국 식민지 개척
영국은 아메리카를 발견한 스페인과 부딪치지 않기 위해 북미를 탐험하고 개척하고자 했다.
영국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먼저 정착한 인도와 남미, 그리고 북미의 멕시코의 텍사스, 플로리다와 루이지애나 등에는 스페인이 여전히 강국이었으므로 들어가지 못하고 스페인 세력이 미치지 못한 북미의 동쪽을 먼저 탐험하여 식민지 건설을 시작하였던 것이다.
스페인은 자국민을 이주시켜 정착시키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으므로 현지 주민이나 아프리카 노예를 이용하여 고수익을 얻을 수 있는 금광이 많은 중남미나 사탕수수 등 열대작물을 재배할 수 있는 열대지방을 원했으므로 플로리다 등 따뜻한 미국 남쪽 지방까지만 진출했던 것이다.
헨리 7세(Henry VII, 1457 ~ 1509, 재위 1485 ~ 1509)는 1497년 존 캐벗(John Cabot, Giovanni Caboto, 조반니 카보토, 1450 ~ 1499, 이탈리아 출신)을 지원하여 뉴펀들랜드(Newfoundland) 등 북미 북동부 연안을 탐험시켰다. 그래서 1600년대에 영국은 북미 동해안 지방 전체를 영국령이라 주장했다.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 재위 1558 ~ 1603) 때인 1583년 험프리 길버트(Humphrey Gilbert, 1539 ~ 1583)는 대서양을 횡단하여 뉴펀들랜드에 상륙하여 이를 영국령으로 선포했다.
영국령으로 개척된 미국의 13개 식민지 주는 1783년 미합중국(미합중국, United States of America, 1783 ~)으로 독립하였다.
(1) 월터 롤리 경의 로어노크 식민지(Roanoke Colony) 개척
로어노크 식민지(Roanoke Colony)는 유럽 최초의 식민지 개척지이다.
1584년 엘리자베스 1세는 월터 롤리 경(Sir Walter Raleigh, 1552 ~ 1618, 정치인, 탐험가, 작가, 여왕의 총신)에게 버지니아에 식민지를 건설할 수 있는 식민지 면허장(식민지 면허장(식민지 헌장, Colonial Charters, 정부의 권한을 부여함)을 주었다.
1584년 월터 롤리 경(Sir Walter Raleigh, 1552 ~ 1618, 길버트의 아버지 다른 동생)은 탐험대를 보내어 사비를 주어 식민지를 개척하게 했다.
탐험대는 플로리다 북부를 탐험하였으며 1585년 랠프 레인(Ralph Lane, 1532 ~ 1603, 탐험가) 주지사가 이 지역에 로어노크 식민지(Roanoke Colony)를 건설하였으나 보급품 부족과 인디언 부족과의 좋지 않은 관계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귀국하였으며 1587년 존 화이트(John White, 1539 ~ 1593, 식민지 총독, 탐험가, 아티스트,지도 제작자)가 다시 로어노크 섬에 식민지를 개척하고 돌아온 후 곧 보급품을 싣고 다시 갈 예정이었으나 스페인 무적함대와의 전쟁으로 늦어져 1590년에 보급품을 싣고 갔으나 흔적도 없이 사라져 식민지 개척은 실패했다.
월터 롤리는 이 지역을 영국의 처녀 여왕(The Virgin Queen)이라 불린 엘리자베스 1세 여왕(Elizabeth I, 재위 1558 ~ 1603)의 명예를 기려‘버지니아(Virginia)’로 명명하였다.
식민지 개척은 실패했으나 민간인이 출자하여 식민지를 개척하는 선례를 남겨 17세기에 개인이 자본을 출자하여 회사를 만들어 식민지를 개척하게 된다.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는 국제관계와 당파 간의 세력 균형에 결혼이 문제가 되었으므로 애인으로 레스터 백작인 로버트 더들리 경 Lord Robert Dudley(1532? ~ 1588) 등이 있었지만 결혼을 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권력을 나누어 가지는 것을 싫어하여 권력을 가까이하지 못하도록 단속하였고, 애인 중에서 권력욕이 지나친 사람은 런던탑에 유폐하거나 단두대로 보냈다.
영국은 1588년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하고 20년이 지난 다음 미국 식민지 개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영국 정부가 식민지 개척에 지원을 하였으나 식민지를 개척하는 데는 비용이 많이 들어 영국 정부가 주도하여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귀족, 지주나 상인들이 자본을 출자하여 런던 버지니아 회사(Virginia Company of London, London Company)나 플리머스 버지니아 회사(Virginia Company of Plymouth, Plymouth Company) 같은 유한회사(Joint stock company, 주주들이 투자)가 생겨났으며 이들 회사들이 신세계에서 발견되는 광산의 권리와 회사 이익의 1/5을 국왕 제임스 1세에게 받치기로 계약을 하고 국왕의 식민지 면허장(식민지 헌장, Colonial Charters, 정부의 권한을 부여함)을 받아 신세계로 갈 사람을 모집하고 돈을 빌려주게 되었던 것이다.
(2) 영국의 버지니아 제임스타운(Jamestown) 개척
영국은 제임스 1세(James Ⅰ, 재위 1603 ~ 1625) 때인 1606년 주주들이 출자하여 설립한 런던 회사(London Company, Virginia Company of London, 합자회사joint stock company, 후에 버지니아 회사 Virginia Company로 변경)는 1606년 제임스 1세(James I, 재위 1603 ~ 1625)로부터 노스캐롤라이나에서 남부 뉴욕 주 일부에 대한 식민지 면허장(식민지 헌장, Colonial Charters, 정부의 권한을 부여함)을 받았다. 런던회사는 새로운 땅을 개척하여 옥수와 포도주, 원목 등을 본국에 수출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잘 살아보겠다는 경제적인 목적을 가진 사람들에게 개척자금을 빌려주어 모집한 남자 144명을 크리스토퍼 뉴포트 선장(Christopher Newport)이 지휘하는 수전 콘스턴트 호(Susan Constant), 갓스피드 호(Godspeed), 디스커버리 호(Discovery) 등 3척에 싣고 1606년 12월에 버지니아 주(엘리자베스 1세에서 유래)로 출발하였다.
5개월의 긴 항해 끝에 1607년 4월에 버지니아주 포우하탄족(Powhatan, 알곤킨족 Algonquian의 한 부족) 연맹 지역인 체사피크 만(Chesapeake Bay)에 도착하여 스페인과의 갈등을 피하기 위해만에서 제임스 강 상류 60킬로미터 지점의 습지에 미국 식민지로 처음인 제임스타운(Jamestown)을 건설하였다. 명칭은 제임스 1세의 이름을 붙인 것이다.
에드워드 마리아 윙필드(Edward Maria Wingfield, 1550 ~ 1631, 런던회사 창립멤버) 대위가 통치 위원회의 의장이 되어 이끌었으나 존 스미스(John Smith, 1580 ~ 1631, 통치 위원회의 의장 1608 ~ 1609)와 충돌로 1608년 4월 영국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이주자들은 농사보다 황금에 관심이 더 많았던 도회지 사람이었으므로 황무지를 개척하여 새로운 삶을 살겠다는 의지와 능력이 없었다.
초기에 제임스타운은 인디언의 공격을 받았고 습지라 환경이 좋지 않아 말라리아에 시달렸으며 농사를 짓지 않고 식량을 본국의 보급과 인디언으로부터 조달했으므로 식량이 부족하여 많은 어려움을 겪었으며 수많은 정착민이 죽었다.
그나마 식민지의 평의회 의장(통칭 주지사, 1608~ 1609)인 존 스미스(John Smith, 1580 ~ 1631, 영국 군인, 탐험가, 식민지 의장, 뉴잉글랜드 제독) 선장의 통솔로 유지되고 있었다.
1609년에 인디언과의 전쟁에서 부상을 당한 존 스미스가 영국으로 돌아가자 식민지는 무정부 상태가 되었다. 1609년과 1610년 사이에 원주민은 식량공급을 끊었고 이주민들 대부분이 굶어 죽거나 병에 걸려 죽었다. 1610년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3백 명(중간에 이민자가 유입됨) 가운데 60명뿐이었다. 이들은 1610년 버지니아 주지사인 드 라 워 남작 토마스 웨스트(Thomas West, 3rd Baron De La Warr, 제3대 델라웨어 남작 토마스 웨스트, 델라웨어 경, 1577 ~ 1618)가 영국에서 식량을 운반하여 공급함으로써 겨우 살아남았다.
드 라 워 남작 토마스 웨스트 (델라웨어 경, 1609 ~ 1618, 대부분 기간 영국에 거주, 직무는 위임)는 존 스미스 대위의 직속 부하로 버지니아 식민지 지배 위원회를 대신하여 종신 주지사 겸 대장으로 1609년에 임명되었다.
그 후 1609년 포와하탄 부족이 식민지를 공격하여 제임스타운 식민지 통치 위원회의 의장인 존 래트클리프(John Ratcliffe, 1549 ~ 1609)를 살해하였다. 이에 영국에 있던 델라웨어 경은 1610년에 150명의 부대를 모집하고 장비를 갖추어 3척의 배에 실어 지원하였던 것이다.
그 후 담배 농부인 존 롤프(John Rolfe, 1585년경 ~ 1622년)가 1612년 인디언이 재배하던 담배가 너무 독하여 서인도제도에서 가져온 담배 종자와 교배하여 순한 맛의 종자로 개랑하였으며 1614년 인디언 추장의 딸인 포카혼타스(Pocahontas, 1596년경 ~ 1617년)와 결혼하여 인디언들의 담배 재배법을 배웠다.
이주민들은 담배를 대량으로 경작하여 런던 버지니아 회사를 통해 영국에 수출하여 많은 수익을 얻었다.
1607년 이래 이주민들과 포와하탄족들은 같이 잘 지내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였다.
포카혼타스(Pocahontas, 1596년경 ~ 1617년)는 이주민과 어울려 지내는 동안 존 스미스에 관심을 가졌다. 1607년 존 스미스는 탐험 중에 인디언에 붙잡혀 죽을 고비를 포카혼타스의 구원으로 살아났으며 포카혼타스는 그 후 식량을 이주민에 가져다주는 등 도와주었다.
1609년 인디언과의 전쟁에서 부상을 입은 존 스미스는 영국으로 돌아갔으며 영국에서 죽었다고 소문이 났다.
포카혼타스는 1613년 이주민과 교전 중 식민지 이주민에게 붙잡혀 1년 동안 포로로 생활하는 중에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그 후 포카혼타스는 이주민 포로와 교환되어 돌아갔으나 남편인 코쿰은 교전 중 정착민에게 살해되고 없었다.
그녀는 정착민과 살기를 원했다.
포카혼타스는 1614년(17~ 18세) 항해 중 난파로 아내와 아들을 모두 잃은 담배 농부 존 롤프와 결혼하였으며 1615년 아들 토머스 롤프를 낳았다.
1616년, 롤프 가족은 제임스타운 정착촌에 대한 투자를 유치하기 위한 홍보원으로 선정되었는데 특히 포카혼타스를 '문명화된 야만인'의 본보기로 영국 사회에 보내던 것이다. 포카혼타스는 영국에서 유명인사가 되어 각종 사교 모임에 참석했다.
1617년 이들 가족이 배를 타고 미국으로 출항하던 중 테임즈강 근처에서 포카혼타스는 중병에 걸려 영국에서 21세로 사망하였다.
1619년 제임스타운(Jamestown)에서는 각 지역마다 대표자를 선출하여 식민지 의회(House of Burgesses)를 결성하였는데 이것이 선거에 의해 세워진 최초의 미국 정부이다.
영국에서 90명의 신부(처녀)도 데려오고 네덜란드 무역선으로부터 노예도 샀다.
그러나 런던 버지니아 회사는 경작지를 넓히면서 인디언과 충돌이 벌어져 1622년에는 보복으로 제임스 타운 학살(Jamestown Massacre)이 일어나는 등 20년간이나 끊임없는 전쟁을 하여 승리하였으나 1624년에 살아남은 사람이 1,132명으로 파산상태였으며 그 결과 왕립위원회의 건의에 따라 제임스타운은 1624년 국왕령으로 바뀌고 국왕이 임명한 총독이 파견되었다.
1699년 제임스타운에서 일어난 베이컨의 반란 중에 화재가 발생하여 버지니아 주도가 제임스 타운에서 오늘날의 윌리엄스버그(1698년까지 옛 이름 : 미들 플랜테이션 Middle Plantation)로 이전되었으며, 그 이후 제임스타운은 정착지로서의 기능은 중지되었고, 오늘날에는 유적지만 남아 있다.
(3) 메이플라워의 청교도(필그림 파더스, Pilgrim Fathers, 巡禮始祖, 필그림스, Pilgrims, 성지순례자) 플리머스 개척
16세기에 유럽에서 개신교(Protestant, 프로테스탄트)의 출현과 종교 개혁에 이어 종교 전쟁이 일어났다.
영국에서는 헨리 8세(Henry VIII, 재위 1509 ~ 1547)가 왕비인 캐서린 아라곤(Catherine of Aragon, 1485 ~ 1536)과의 이혼 문제로 교황과 대립하여 종교개혁을 하였는데 가톨릭 요소가 많이 포함된 개신교의 한파인 성공회(聖公會, 英國 國敎會, 영국 국교회, Church of England, Anglican Church)를 국교로 창립하였던 것이다.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 재위 1558 ~ 1603)는 가톨릭의 방식을 유지하면서 교리만 개신교로 바꾼 중도적 교회로 성공회를 개선하였다.
제임스 1세(James Ⅰ, 재위 1603 ~ 1625)로부터 비국교도인 퓨리턴(Puritan, 청교도, 영국의 칼뱅 계통의 신교도)들은 심한 박해를 받았다.
이에 개신교도 중 성공회에 불만을 가진 분리파(청교도) 일부는 1608년부터 네덜란드의 라이덴(Leiden)으로 이주하기도 하였다.
1606년 제임스 1세(1603 ~ 1625)는 동부 해안을 식민지화하기 위해 플리머스 버지니아 회사(Virginia Company of Plymouth, Plymouth Company, Joint stock company, 주주들이 투자)를 인가하였으나 플리머스 버지니아 회사는 1607년에 세웠던 팝햄 식민지(Popham Colony, Sagadahoc Colony 사가다호크 식민지, 1607 ~ 1608, 매인 주)를 1608년에 포기하였고 회사가 수년간 중단된 후 1620년 11월에 재 조직된 뉴잉글랜드평의회(Council for New England )에 식민지 면허장(식민지 헌장, Colonial Charters, 정부의 권한을 부여함)을 넘겨주었다. 플리머스 식민지(the Plymouth Colony, 1620 ~ 1686), 뉴햄프셔 식민지(the Province of New Hampshire, 1629 ~ 1641), 매사추세츠 만 식민지(the Massachusetts Bay Colony,1628 ~ 1691), 뉴헤이븐 콜로니(the New Haven Colony,1638 ~ 1664), 메인 식민지(the Province of Maine, 1622 ~ 1691)가 뉴잉글랜드평의회에 소속되었다.
1616년 존 스미스(John Smith, 1580 ~ 1631, 제임스타운 건설)는 자신이 본 신대륙에 대해 열광적으로 소개하는 소책자를 출간하였으며 이 책자는 급진적인 청교도(Puritan) 분리주의자(Separatists)에게 자극을 주었다.
영국 성공회의 박해를 피해 1608년부터 네덜란드로 조금씩 이주하여 라이덴(Leiden)에서 10여 년간 살던 분리주의자(Separatists)인 급진적인 청교도(Puritan)들은 생활고, 자제 교육의 어려움, 그리고 윌리엄 브루스터(William Brewster, 1566 ~ 1644, 인쇄업자)가 영국 성공회를 비판하는 인쇄물을 찍어냄에 따라 제임스 1세가 분노하여 체포령을 내리는 등 제임스 1세의 박해가 네덜란드에까지 미칠 위험이 있어 네덜란드를 떠나 매력적인 신대륙으로 이주하고자 하였으나 이주 비용이 없어 방법을 찾던 중 폴리머스 회사의 지원과 버지니아에 정착할 수 있는 허가를 받게 되었다.
플리머스 회사는 퓨리탄을 회사의 주주(株主)로서, 그리고 자유민으로서 보내며 신대륙에서 발생하는 생산물과 재산을 7년 동안만 공동으로 소유하며 그 이후에는 주주들에게 분배한다는 것이었다.
신대륙 이주를 위해 스피드웰 호(speed well, 60톤)와 메이플라워 호(Mayflower, 화물선, 선장 크리스토퍼 존스, fluijt선, 180톤)를 빌렸으나 스피드웰 호는 1620년 8월에 네덜란드에 거주하던 35명의 청교도를 영국으로 이송한 후 고장이 나 청교도들은 65명의 이주자들이 타고 있던 메이플라워호에 옮겨 탔다.
1620년 9월에 102명이 잉글랜드 남서부 플리머스에서 메이플라워호(Mayflower, 화물선, 선장 크리스토퍼 존스, fluijt선)를 타고 버지니아로 가던 중 폭풍을 만나 항로를 이탈하여 항해가 늦어짐에 따라 겨울인 11월이 되어서야 미국에 다다랐으므로 항로를 바뀌어 처음 목적지와는 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매사추세츠주 케이프 코드(Cape Cod)의 프로빈스(Province)에 11월 21일 상륙하여 정착하였다.
이들은 Mayflower 선상에서 메이플라워 서약서(Mayflower Compact)를 작성하였는데 자주적인 식민정부를 수립하고, 다수결의 원칙에 의해 행정을 운영하며 식민지의 복리와 안녕을 위해 평등한 법을 제정하여 준수할 것을 서약했다.
그들이 정착한 곳은 앞서 이곳을 탐험했던 존 스미스(John Smith, 1580 ~ 1631, 탐험가, 식민지 총독, 뉴잉글랜드 제독, 영국 군인, 제임스타운 건설)가 ‘플리머스’라고 이름 붙인 곳이었다.
플리머스에 최초로 정착한 이들은 처음에는 스스로를 ‘올드 커머스(Old comers)’라 불렀고 후에는 ‘포어파더스(forefathers)’로 불렀으며, 최초의 정착민인 브래드퍼드(William Bradford, 1590 ~ 1657, 총독, 플리머스 식민지 건설자)가 자신들을 '이 세상의 여행자(성서 용어)'라고 불렀기 때문에 2세기 후에는 ‘필그림 파더스(Pilgrim Fathers, 巡禮始祖)라고 불려졌다.
이들 청교도는 현지 사정을 모르고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해 겨울을 지나는 동안 추위와 굶주림, 괴혈병(비타민C 결핍)으로 절반이 죽고 53명만 살아남았다.
이듬해 봄 그곳 인디언 중 영어가 유창한 스관토(별명 Squanto, 본명 Tisquantum, tɪsˈkwɒntəm, 1585 ~ 1622)의 도움을 받아 옥수수 농사법 등 그 지역의 생활 방식을 배워 정착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리고 단풍나무 시럽(Maple syrup)을 생산하는 방법을 배워 당과 비타민 등의 공급으로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다. 단풍나무 시럽(Maple syrup)은 우리나라의 고로쇠나무(Painted maple, 단풍나무속) 수액을 채취하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채취하여 끓여 물을 증발시키고 졸여서 만든 설탕(66%)이 주성분인 감미료이다(수액 40리터를 이용하여 시럽 1리터 생산).
스관토(Squanto)는 1605년 조지 위머스(George Weymouth)에 의해 납치되어 영국으로 끌려간 5명의 인디언 중 1명으로서 영국에서 영어를 배우면서 9년을 살다가 1614년 헌트에 의해 스페인에 노에로 팔렸으며 거기서 기독교 신앙을 가졌고 다시 영국으로 돌아왔다가 메이슨 선장을 따라 뉴펀들랜드에 가서 더머(Dermer) 등과 함께 농원 사업을 하다가 뉴잉글랜드의 고향에 가서 사업을 하면 재산을 모을 수 있다고 더머(Dermer)를 설득하여 1619년 더머(Dermer)와 함께 고향 파투켓에 왔으나 그의 종족은 천연두에 걸려 모두 죽고 없었다.
그런데 인디언들은 영국인들이 전에 저지른 만행에 대해 악의를 품고 공격하였으므로 더머(Dermer)는 버지니아로 물러났다.
그 지역에는 천연두가 만연하여 인다언이 별로 없었으며 인디언 부족끼리 싸움이 벌어져 그 지역 인디언인 스관토는 백인들과 연합하여 다른 부족을 방어하고자 했으므로 이주민이 정착하여 같이 살 수 있는 행운을 얻었던 것이다. 그래서 청교도들은 정착에 성공하여 플리머스 식민지를 건설하게 되었다.
퓨리턴(Puritan, 청교도, 영국의 칼뱅 계통의 신교도)들이 1620년의 메이플라워 호를 시작으로 신천지를 찾는 신교도들이 계속 이어졌다.
그러나 그들은 인디언과 가톨릭을 적대하면서 세력을 늘려 나갔다. 인디언들은 이들을 민족학살 시작의 원흉이라고 말한다.
(4) 캐롤라이나 식민지(Province of Carolina) 개척
1629년 법무장관 로버트 히스(Robert Heath, 1575 ~ 1649)는 찰스 1세로부터 케이프피어 지역에 대한 면허장을 받았다. 히스는 프랑스의 위그노들이 거주하는 지역으로 개척하기를 원했으나 찰스 1세는 영국 성공회 신도들로 제한했다.
노스캐롤라이나 개척민들은 대부분 가난한 담배 농가였으나 사우스캐롤라이나 개척민들은 대규모 농장을 가지고 수익성 작물을 재배하였다. 이들은 목재, 쌀, 인디고 등을 생산해 경제를 일으켰다.
(5) 메릴랜드 식민지(Province of Maryland) 개척
유럽에서 종교 전쟁이 일어나자 영국인 가톨릭교도들에게 피난처가 필요했다.
그래서 1632년 초대 볼티모어 남작 조지 캘버트(Lord Baltimore George Calvert, 1579 ~1632)가 영주 식민지로 개척을 시작하였다.
(6) 로드아일랜드 식민지(Colony of Rhode Island and Providence Plantations) 개척
로드아일랜드 식민지(Colony of Rhode Island and Providence Plantations)는 로저 윌리엄스(Roger Williams, 1603 ~ 1683)가 설립했다.
1636년 모든 사람들을 받아들이며 건설되었다.
1637년, 침례교 지도자 앤 허치슨이 아퀴드넥 섬을 내러갠셋 족의 추장 카노니 카스로부터 구입하여 현재 포츠머스로 알려진 포카셋에 정착했다.
(7) 펜실베이니아(Pennsylvania) 개척
1681년 윌리엄 펜(William Penn, 1644 ~ 1718, 영국의 신대륙 개척자)이 그의 아버지인 윌리엄 펜 경(Sir William Penn, 1621 ~ 1670, 제독, 정치가)이 왕에게 빌려준 돈의 대가로 뉴저지 서부와 남부의 큰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찰스 2세(Charles II, 재위 1660 ~ 1685)에게 청원하여 허락을 받았다.
윌리엄 펜(William Penn, 1644 ~ 1718, 영국의 신대륙 개척자)은 그 지역을 펜실베이니아라고 명명하고 이듬해 현지로 가서 총독과 양원제 의회(兩院制議會)에 의한 정치를 실시하고 퀘이커교도를 중심으로 하는 자유로운 신앙의 식민지로 건설하였다.
* 13개 식민지(十三個 植民地, Thirteen Colonies)
1498년 베네치아 인 존 캐벗(John Cabot, Giovanni Caboto, 조반니 카보토, 1450 ~ 1499, 이탈리아 출신)은 영국 왕국을 위해 북미 해안을 탐험하였다. 그래서 영국은 1600년대 초반에 북아메리카 동해안 지방 전체를 영국령이라고 주장하였다.
A. 뉴햄프셔 주(state of New Hampshire)
1603년 영국의 마틴 프링(Martin Pring, 1580 ~ 1626)이 상선을 타고 피스카타쿠아강(Piscataqua River)을 항해하였다.
프랑스의 탐험가 사뮈엘 드 샹플랭(Samuel de Champlain, 1567 ~ 1635)이 1605년에 뉴햄프셔 해안에 상륙하였다. 1614년 잉글랜드의 선장 존 스미스(John Smith, 1580 ~ 1631, 1607년 버지니아 식민지 제임스타운 건설)가 숄즈 섬에 도달하였다.
1623년 스코틀랜드 출신의 청교도인데이비드 톰슨(David Thomson, 1588 ~ 1628) 등이 라이(Rye, 포츠머스 근처)의 오디온즈포인트(Odiorne's Point)에 정착하였다.
뉴햄프셔 주는 1629년 뉴잉글랜드(코네티컷, 뉴햄프셔, 버몬트, 매사추세츠, 메인, 로드아일랜드 지역) 의회(합작 주식회사)가 존 메이슨 선장(John Mason, 전 뉴펀들랜드 주지사)과 페르디난도 고르지스 경(Sir Ferdinando Gorges, 메인 주 설립)에게 토지를 분할해 줌에 따라 설립되었다.
1641년 찰스 2세는 이 지역에 구성된 공동체에 식민지 헌장(Colonial Charters, 정부의 권한을 부여함)을 주었다.
주의 명칭은 메이슨이 영국 햄프셔 카운티에서 유래한 뉴햄프셔 (New Hampshire)라 명명했다.
B. 매사추세츠 주(state of Massachusetts)
1602년 영국의 바솔로뮤 고스놀드(Bartholomew Gosnold, 1571 ~ 1607, 런던 버지니아 회사 조직원)는 엘리자베스 제도에 있는 커티헝크 섬(Cuttyhunk Island, 케이프코드 Cape Cod)에 처음 상륙하였다.
1605년과 1606년 프랑스의 사뮈엘 드 샹플랭(Samuel de Champlain, 1567 ~ 1635)은 뉴잉글랜드 해안선 지도를 그렸다.
1614년 영국의 존 스미스(John Smith, 1580 ~ 1631, 1607년 버지니아 식민지 제임스타운 건설) 선장은 매사추세츠의 해안을 따라 항해하였다.
1606년 제임스 1세는 동부 해안을 식민지화하기 위해 플리머스 버지니아 회사(Virginia Company of Plymouth, Plymouth Company, Joint stock company, 주주들이 투자)를 인가하였으나 플리머스 버지니아 회사는 1607년에 세웠던 팝햄 식민지(Popham Colony, Sagadahoc Colony 사가다호크 식민지, 1607 ~ 1608, 매인 주)를 1608년에 포기하였고 회사가 수년간 중단된 후 1620년 11월에 재 조직된 뉴잉글랜드평의회(Council for New England)에 식민지 면허장(식민지 헌장, Colonial Charters, 정부의 권한을 부여함)을 넘겨주었다. 플리머스 식민지(the Plymouth Colony, 1620 ~ 1686), 뉴햄프셔 식민지(the Province of New Hampshire, 1629 ~ 1641), 매사추세츠 만 식민지(the Massachusetts Bay Colony,1628 ~ 1691), 뉴헤이븐 콜로니(the New Haven Colony,1638 ~ 1664), 메인 식민지(the Province of Maine, 1622 ~ 1691)가 뉴잉글랜드평의회(Council for New England)에 소속되었다.
영국의 성공회에 불만을 가진 분리파(청교도) 일부는 1608년부터 네덜란드의 라이덴(Leiden)으로 이주하였으나 라이덴(Leiden)에서이들은 생활고, 자제 교육의 어려움, 그리고 윌리엄 브루스터(William Brewster, 1566 ~ 1644, 인쇄업자)가 영국 성공회를 비판하는 인쇄물을 찍어냄에 따라 제임스 1세가 분노하여 체포령을 내리는 등 제임스 1세(James I, 재위 1603 ~ 1625)의 박해가 네덜란드에까지 미칠 위험이 있어 네덜란드를 떠나 신대륙으로 이주하고자 하였다.
신대륙으로 가기 위해 스피드웰 호(speed well, 60톤)와 메이플라워 호(Mayflower, 화물선, 선장 크리스토퍼 존스, fluijt선, 180톤)를 빌렸으나 스피드웰 호는 1620년 8월에 네덜란드에 거주하던 35명의 청교도를 영국으로 이송한 후 고장이 나 청교도들은 65명의 이주자들이 타고 있던 메이플라워호에 옮겨 탔다.
1620년 9월에 102명이 잉글랜드 남서부 플리머스에서 메이플라워호(Mayflower, 화물선, 선장 크리스토퍼 존스, fluijt선)를 타고 출발하여 11월에 프로빈스타운(Province town) 항구에 도착하여 플리머스(Plymouth)에 정착하였다.
1626년 영국의 플리머스회사(Plymouth Company)의 주주(株主)들이 주주의 권리를 식민지 인에게 매도하여 플리머스 식민지는 매사추세츠 식민지에 흡수되었다.
1628년, 청교도들의 합자회사는 매사추세츠 만 지역에 이주민을 단체로 보내어 그 지역의 이주민들과 합작하여 보스턴과 세일럼(Salem) 지역을 식민지화하였다.
1629년, 잉글랜드의찰스 1세는 왕실헌장에 따라 청교도들의 합자회사에 식민지 헌장(Colonial Charters, 정부의 권한을 부여함)을 주었다. 헌장은 회사에 그 지역에 정착과 통치를 하는 데 필요한 더욱 강한 권리를 주었다.
1630년 존 윈스럽(John Winthrop, 1588 ~ 1649, 변호사, 초대 매사추세츠 주지사)은 1,000명의 청교도들을 이끌고 와보스턴 지역에 정착지를 세워 번창시켰다.
식민지가 점점 팽창해지자 원주민인 인디언 부족과의 갈등이 커져갔다.
식민지인들은 코네티컷 강 계곡의 소유권을 둘러싸고 토지의 소유자였던 피쿼트 부족(Pequot)과 1634 ~ 1638년 동안 피쿼트 전쟁(Pequot War)을 하였다.
식민지인들이 1637년 4월 피쿼트 족 마을을 습격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피쿼트 족 전사들은 웨더스필드 타운(Town of Wethersfield)을 공격하여 30명의 식민지 개척자를 죽였으며 그러자 식민지인들은 피쿼트 족의 마을을 습격하여 잿더미로 만들었고, 300명의 피쿼트 족을 죽여 거의 멸족시켰다.
피쿼트 전쟁 후 뉴잉글랜드의 매사추세츠만 식민지, 코네티컷 식민지, 뉴헤이븐 식민지와 플리머스 식민지는 뉴잉글랜드 식민지 연합이라는 방위 조약을 체결했다.
그리고 1675년부터 1678년까지 4년 동안 인디언 부족인 왐파노아그 부족과 필그림 파더스 간에 토지 갈등을 둘러싼 필립왕 전쟁(King Philip's War, First Indian War, Great Narragansett War, Metacom's Rebellion, 1675 ~ 1678)이 일어났다.
식민지인들이 합의했던 경계를 넘어서 들어오자 왐파노아그 부족장
메타코멧(Metacomet, 별명 필립왕)은 분노하여 식민지인들의 농장을 약탈했으며 이에 식민지 민병대는 왐파노아그 부족과 분쟁이 있었던 모호크족(Mohawk People)의 전사들과 합세하여 대항했으나 필립왕이 인디언 특유의 게릴라전을 전개함에 따라 필립왕을 토벌할 수 없었다. 인디언들은 자기들도 후에 민병대와 적이 되어 만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민병대에 게릴라 전법을 가르쳐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민병대는 모히간족(Mohican)과 동맹을 맺고 필립왕을 토벌하였으며 전쟁결과 왐파노아그 부족은 60 ~ 80%에 해당하는 6천명이 죽고 겨우 4백명만이 살아남았으며 식민지인도 8%에 해당하는 600명 가량이 죽었다.
필립왕 전쟁 이후에도 인디언의 저항은 계속되었으나 소규모였으며 별로 성과를 얻지도 못했다.
주 이름은 이 지역에 살았던 매사추세츠 족(Massachusett tribe)의 이름에서 유래하였다.
1684년 매사추세츠는 왕실 식민지로 변경되었다.
C. 로드아일랜드 주(state of Rhode Island)
1524년 지오반니 다 베라자노(Giovanni da Verrazzano, 1485 ~ 1528, 이탈리아, 탐험가)가 프랑스를 위해 로드아일랜드의 해안을 따라 항해하였고 내러갠셋만(Narragansett Bay)에 처음으로 들어왔다. 1614년 네덜란드의 항해자 아드리엔 블록아드리엔 블록(Adriaen block, 1567 ~ 1627상인, 선장)이 내러갠셋만(Narragansett Bay)으로 들어오면서 항해하였다.
1631년 영국에서 보스턴에 도착한 로저 윌리엄스(Roger Williams, 1603 ~ 1683, 영국, 침례교 성직자)는 종교의 자유, 종교와 국가의 분리를 주장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1631년 여름 포리머스로 이주하였다.
청교도 목사에서 침례교 목사로 전향한 로저 윌리엄스는 청교도로부터 분리되었다.
1632년 12월 로저 윌리엄스는 국왕의 헌장을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아메리카 원주민으로부터 땅을 사지 않은 채 플리머스의 땅에 대한 권리를 가지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는 긴 소책자를 썼다.
1633년 12월, 매사추세츠만 당국은 국왕과 헌장을 공격하는 그의 소책자 문제로를 보스턴의 일반 법원에 출두하도록 그를 소환했다
로저 윌리엄스(Roger Williams, 1603 ~ 1683)는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주장했으며 식민지 주민들이 인디언으로부터 토지를 몰수하는 것을 비난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다양하고 새롭고 위험한 의견으로 인해 선동과 이단으로 유죄 판결을 받고 1636년 매사추세츠 만 식민지에서 추방되었다.
1636년 로저 윌리엄스(Roger Williams, 1603 ~ 1683)는 매사추세츠 만 식민지에서 추방된 후 내러갠세트 만(Narragansett bay) 끝에 살고있던 내러갠세트(Narragansett) 부족이 제공한 땅에 정착했다 . 그는 그 곳을 프로비던스 플랜테이션(Providence Plantations)이라고 부르고 종교의 자유가 있는 곳이라고 선언했다.
1640년 프로비던스 플랜테이션(Providence Plantations)에서는 39명의 자유인(시민권과 투표권을 가진 남성)이 민주주의의 다수결 원칙에 따라 "양심의 자유를 옹호할 것"이라고 의결하여 선언하는 협정을 하였다.
로저 윌리엄스(Roger Williams, 1603 ~ 1683)는 시민권과 종교를 분리하여 종교의 자유를 실현하였고 이에 따라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제공하는 근대 역사상 최초의 민주주의 정착촌을 설립했다.
그리고 1638년, 매사추세츠 만 식민지 에서 추방된 앤 허친슨(Anne Hutchinson), 윌리엄 코딩턴(William Coddington), 존 클라크(John Clarke), 필립 셔먼(Philip Sherman)과 종교적인 반체제 인사들은 로저 윌리엄스의 설득에 따라 로드아일랜드에 정착하여 포츠머스 협약(Portsmouth Compact, 1638. 3.)을 체결하고 포츠머스 정착지를 설립하였다.
로드아일랜드 식민지 및 프로비던스 플랜테이션 식민지는 프로비던스(Providence), 포츠머스(portsmouth) 외에 뉴포트(Newport), 워릭(Warwick)이 세워져 형성되었다.
1643년매사추세츠 만, 플리머스, 코네티컷과 뉴헤이븐 식민지들은 내러갠셋 만의 타운들을 제외하고 군사적 동맹을 형성하였으는데 그들은 로드아일랜드를 사악하고 무질서한 장소로 여겨 로그스 아일랜드(Rogue's Island)라고 부르고 군사동맹에서 제외시켰던 것이다.
로저 윌리엄스가 1644년 뉴잉글랜드 내러갠셋에서 프로비던스 식민지의 주를 설립하기 위하여 잉글랜드로부터 식민지 헌장(Colonial Charters, 정부의 권한을 부여함)을 획득하였으나 실현되지 않았고 1660년 잉글랜드에서 왕정복고가 이루어졌을 때에 무효가 되었다가 합자회사에 의해 로드 아일랜드 주가 설립된 후인 1663년 국왕 찰스 2세에 의해 새 헌장이 승인되었다.
로드 아일랜드는 그리스의 로도스 섬에서 유래되었다는 설과, 네덜란드어인 rodlich Eylande(붉은 섬)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D. 코네티컷 주(state of Connecticut)
1609년 네덜란드가 고용한 영국의 탐험가 헨리 허드슨 (Henry Hudson, 1565 ~ 1611 실종)이 현재 자신의 이름을 딴 허드슨 강으로 올라갔다.
네덜란드의 탐험가 아드리엔 블록(Adriaen block, 1567 ~ 1627상인, 선장)은 1614년 코네티컷 강을 항해하여 탐험하고 코네티컷을 뉴네덜란드의 일부라고 주장했다. 네덜란드는 코네티컷에 정착촌을 세웠으나 열심히 개척하지 않았다.
최초의 영국인 정착민은 1633년 Windsor에 정착했고, 다음 해에는 Wethersfield에 정착했다.매사추세츠 출신 존 윈스럽(John Winthrop, 1588 ~ 1649, 변호사, 초대 매사추세츠 주지사)은 1635년 코네티컷 강어귀에 세이브룩 식민지를 건설하라는 위임을 받았다.
존 윈스럽 주니어(John Winthrop Jr., 1606 ~ 1676)코네티컷 주지사는 이미 합자회사로 설립된 코네티컷 주이지만 영국 정부가 뉴잉글랜드의 청교도 식민지에 대해 절대적인 통제권을 시행할 것을 두려워하여 식민지 헌장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한 결과 1662년 식민지 헌장(Colonial Charters, 정부의 권한을 부여함)을 받았다.
1674년 영국-네덜란드 전쟁의 결과 웨스트민스터 조약에 따라 네덜란드는 잉글랜드에게 뉴네덜란드를 할양하였다.
코네티컷이란 이름은 모히간족어 'Quinnehtukqut(긴 강이 흐르는 땅, 긴 하천을 마주한 땅)에서 유래되었다.
E. 뉴욕 주(state of New York)
1524년 프랑스가 고용한 이탈리아의 탐험가 지오반니 다 베라자노(Giovanni da Verrazzano, 1485 ~ 1528)가 뉴욕만 안으로 진입하면서 허드슨 강에 도달하였다
1609년 네덜란드인들이 고용한 영국의 탐험가 헨리 허드슨(Henry Hudson, 1565 ~ 1611 실종)이 현재 자신의 이름을 딴 그 강으로 올라갔으며 곧 네덜란드인들은 허드슨 강 골짜기에 일부 교역지들과 정착지들을 설립하여 뉴네덜란드를 만들었다.
그 해에는 프랑스의 탐험가 사뮈엘 드 샹플랭이 퀘벡에서 뉴욕의 북쪽에 들어왔다
거기서 그들은 인디언들과 함께 모피 교역을 시작했다. 1621년 네덜란드인 상인들의 단체가 네덜란드 서인도 회사를 설립하였다.
뉴암스테르담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1626년 네덜란드의 총독 페터르 미노이트(Peter Minuit, 1580 ~ 1638, 뉴네덜란드 식민지의 제3대 총독)가 맨해튼을 인디언들로부터 약 24 달러로 사들였다.
코네티컷과 매사추세츠에서 건너온 영국의 식민자들이 롱아일랜드에 정착하였다. 오랜 세월 동안 그들은 네덜란드인들과 협동생활을 하였다.
영국의 찰스 2세의 동생 요크의 공작 제임스(James, Duke of York, 1633 ~ 1701, 제임스 2세 재위 1685 ~ 1688)는 뉴네덜란드를 점령하기로 결정하고 1664년 요크공작의 신랑(Groom of the Chamber 궁정 신랑)인 리처드 니콜스(Richard Nicolls, 1624 ~ 1672)가 이끄는 4척의 함대를 보내어 뉴네덜란드를 강탈하였다.
찰스 2세는 뉴욕을 요크의 공작 제임스(James, Duke of York, 1633 ~ 1701, 제임스 2세 재위 1685 ~ 1688)에게 주었다.
요크 공작은 개인 소유의 뉴욕에 1665년 공작법(The Duke's Laws)을 제정하여 뉴욕 식민지 정부의 통치지침으로 사용하였다.
1682년 뉴욕 주의 영주인 요크 공작 제임스는 토머스 동안(Thomas Dongan, 2nd Earl of Limerick, 1634 ~ 1715, 5대 뉴욕주지사, 재임 1683 ~1688)을 주지사로 임명하였으며 토머스 동안은 1683년 뉴욕 최초로 대표 회의를 소집하여 뉴욕 총회에서 자유 및 특권 헌장(식민지 헌장, Colonial Charters, 정부의 권한과 통치 법령)을 통과시켰다. 이 헌장은 찰스 2세의 승인을 받지 않았다.
주 이름은 요크 공작에서 유래하였다.
F. 펜실베이니아 주(state of Pennsylvania)
1609년 네덜란드가 고용한 영국의 탐험가 헨리 허드슨(Henry Hudson, 1565 ~ 1611 실종)이 현재 자신의 이름을 딴 허드슨 강으로 올라갔다.
펜실베이니아는 뉴네덜란드의 일부였으나 1681년 찰스 2세(Charles II, 재위 1660 ~1685, 요크 공작의 형)는 윌리엄 펜(William Penn, 1644 ~ 1718, 식민지 개척자, 작가퀘이크 교도)에게 펜의 아버지 윌리엄 펜 경(Sir William Penn,1621 ~ 1670, 제독, 하원의원)에게 빌린 빚 대신에 그 지방을 펜에게 1681년 개인 소유의 식민지 면허장(Colonial Charters)을 주었다.
펜실베이니아라는 이름도 윌리엄 펜 아버지의 이름(Sir William Penn,1621 ~ 1670, 제독, 하원의원)으로 라틴어로 '숲'을 의미하는 'sylvanus'에서 유래되었다.
G. 뉴저지 주(state of New Jersey)
1609년 네덜란드가 고용한 영국의 탐험가 헨리 허드슨(Henry Hudson, 1565 ~ 1611 실종)이 현재 자신의 이름을 딴 허드슨 강으로 올라갔다.
뉴저지는 뉴네덜란드의 일부였으나 1664년 영국의 요크 공작(제임스 2세, 재위 1685 ~ 1701)이 뉴네덜란드를 점령하였고 찰스 2세(Charles II, 재위 1660 ~1685, 요크 공작의 형)가 요크 공작에게 주었다.
제임스 2세(요크 공작)는 영국 해협에 있는 저지섬의 이름을 따서 뉴저지라고 하였다.
1664년 제임스 2세(요크 공작)는 자신의 친구들인 존 버클리 경과 조지 카터렛 경에게 개인 소유의 식민지 면허장(식민지 헌장, Colonial Charters)을 주었다.
1674년 에드워드 빌린지가 이끄는 퀘이커 교도들이 버클리가 나눈 뉴저지를 매입하였다.
H. 델라웨어 주(state of Delaware)
1609년 네덜란드가 고용한 영국의 탐험가 헨리 허드슨(Henry Hudson, 1565 ~ 1611 실종)이 현재 자신의 이름을 딴 허드슨 강으로 올라갔다.
스웨덴 회사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총괄 피터 미뉴잇(Peter Minuit, 1580 ~ 1638)이 스웨덴 정부를 설득하여 델라웨어주 윌밍턴 지역에 크리스티나 요새(Fort Christina)를 세웠다.
1638년 스웨덴이 정착촌을 세웠으나 1655년 페터 스토이베산트(Peter Stuyvesant, 1612 ~ 1672)가 이끄는 네덜란드 함대가 스웨덴 요새를 점령하여 네덜란드가 델라웨어를 지배하게 되었다.
델라웨어는 뉴네덜란드의 일부였으나 1664년 영국의 요크 공작(제임스 2세, 재위 1685 ~ 1701)이 뉴네덜란드를 점령하였고 1681년 찰스 2세(Charles II, 재위 1660 ~1685, 요크 공작의 형)는 윌리엄 펜(William Penn, 1644 ~ 1718, 식민지 개척자, 작가)에게 펜의 아버지 윌리엄 펜 경(Sir William Penn,1621 ~ 1670, 제독, 하원의원)에게 빌린 빚 대신에 그 지방에 대한 식민지 면허장(식민지 헌장, Colonial Charters, 정부의 권한을 부여함)을 주었다.
델라웨어라는 이름은 뉴저지를 흐르는 강에 버지니아 주 제3대 총독이었던 델라웨어 남작 토마스 웨스트(Thomas West, 3rd Baron De La Warr)의 이름을 붙이면서 시작되었다.
I. 메릴랜드 주(state of Maryland)
1498년 베네치아 인 존 캐벗(John Cabot, Giovanni Caboto, 조반니 카보토, 1450 ~ 1499, 이탈리아 출신)은 은 영국 왕국을 위해 북미 해안을 탐험하였다. 그래서 영국은 1600년대 초반에 북아메리카 전체를 영국령이라고 주장하였다.
스페인의 플로리다 총독 페드로 메네데스 데 아빌레스(Pedro Menendez De Aviles, 1519 ~ 1574)는 1572년 체스피크 만을 탐험하였다.
1608년 존 스미스(John Smith, 1580 ~ 1631, 1607년 버지니아 식민지 제임스타운 건설) 선장은 북부로 향하여 체서피크으로 항해하면서 메릴랜드 지방으로 들어갔다
1631년 버지니아의 윌리엄 클레이본(William Claiborne , 1600 ~ 1677, 버지니아 식민지 국무장관, 농장주, 무역업자)은 체서피크 만에서 켄트 섬에 첫 식민적 정착지인 교역지(交易地, a trading point)를 열었다.
1632년 영국의 찰스 1세(Charles I, 재위 1625 ∼ 1649)는 영국의 첫 번째 볼티모어 경(Lord Baltimore)인 조지 캘버트(George Calvert, 1579~1632)에게 메릴랜드 지방에 대한 개인 소유의 식민지 면허장(식민지 헌장, Colonial Charters, 정부의 권한을 부여함)을 주었으나 일찍 죽고 그의 아들 세실리어스가 1632년 2대 볼티모어 경으로 메릴랜드 식민지의 주인이 되었으며 찰스 1세의 부인 헨리에타 마리아의 명예를 가려 메릴랜드라고 이름을 지었다.
식민지 주민들은 서부 해안의 남부 끝에 세인트 메리스 시티(Saint Mary City)를 건설하였다.
J. 버지니아 주(state of Virginia)
1570년 스페인 예수회의 단체가 버지니아에 처음으로 정착하였으나 인디언들에 의해 몇 달 후에 전멸되었다.
1584년 엘리자베스 1세는 월터 롤리 경(Sir Walter Raleigh, 1552 ~ 1618, 정치인, 탐험가, 작가, 여왕의 총신)에게 버지니아에 식민지를 건설할 수 있는 칙허장을 주었다.
1584년 월터 롤리 경(Sir Walter Raleigh, 1552 ~ 1618, 길버트의 아버지 다른 동생)은 탐험대를 보내어 식민지를 개척하게 했다.
탐험대는 플로리다 북부를 탐험하였으며 1585년 랠프 레인(Ralph Lane, 1532 ~ 1603, 탐험가) 주지사가 이 지역에 로어노크 식민지(Roanoke Colony)를 건설하였으나 보급품 부족과 인디언 부족과의 좋지 않은 관계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귀국하였으며 1587년 존 화이트(John White, 1539 ~ 1593, 식민지 총독, 탐험가, 아티스트,지도 제작자)가 다시 로어노크 섬에 식민지를 개척하고 돌아온 후 곧 보급품을 싣고 다시 갈 예정이었으나 스페인 무적함대와의 전쟁으로 늦어져 1590년에 보급품을 싣고 갔으나 흔적도 없이 사라져 식민지 개척은 실패했다.
월터 롤리는 이 지역을 영국의 처녀 여왕(The Virgin Queen)이라 불린 엘리자베스 1세 여왕(Elizabeth I, 재위 1558 ~ 1603)의 명예를 기려 ‘버지니아(Virginia)’로 명명하였다.
1606년, 국왕 제임스 1세는 합자회사인 런던의 버지니아 회사에게 식민지를 개척할 식민지 면허장(식민지 헌장, Colonial charters)을 주었다. 1607년 제임스타운에 첫 영구적 영국인 정착지를 설립하였다.
식민지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으나 존 스미스(John Smith, 1580 ~ 1631, 1607년 버지니아 식민지 제임스타운 건설) 선장이 잘 이끌었다.
K. 사우스캐롤라이나 주(state of South Carolina)
1521년 카를 5세의 명령으로 프란시스코 고르딜로(Francisco Gordillo)가 스페인 원정대를 이끌고 캐롤라이나 해안을 탐험하였다.
1526년 히스파니올라섬의 산토도밍고에서 온 스페인의 루카스 바스케스 데 아일론(Lucas V?zquez de Aylon, 1480 ~ 1526, 스페인 치안판사)이 미국의 첫 유럽인 정착지(산미겔 데 괄다페)를 건설하였다.
1692년 영국의 찰스 1세는 사우스캐롤라이나주와 노스캐롤라이나 주를 포함한 대지를 로버트 히스 경(Robert Heath, 1575 ~ 1649, 법무부장관)에게 개인 소유의 식민지 면허를 승인(식민지 헌장, Colonial Charters, 정부의 권한을 부여함)하였다. 그러나 히스 경은 캐롤라이나에 정착지를 건립하지 않았다.
캐롤라나(Carolina)는 "찰스(2세)의 땅"이라는 뜻이다.
1663년 찰스 2세가 8명의 잉글랜드 귀족들에게 캐롤라이나를 승인하였다. 1669년 소유자들은 정착자들을 아메리카로 보내어 정착촌을 세웠다.
1719년 국왕은 사우스캐롤라이나 식민지를 실제로 식민지에 가지 않은 식민지 영주로부터 매입하여 총독을 임명했다
1729년까지 7명의 영주로부터 매입하여 노스캐롤라이나 식민지와 사우스캐롤라이나 식민지의 두 직할 식민지를 두었다.
L. 노스캐롤라이나 주(state of North Carolina)
1524년 이탈리아의 탐험가 지오반니 다 베라자노(Giovanni da Verrazzano, 1485 ~ 1528)가 뉴욕만 안으로 진입하면서 허드슨 강에 도달하였다. 1540년 스페인의 에르난도 데 소토(Hernando De Soto, 1495 ~ 1542)가 노스캐롤라이나 지방의 남서부 끝을 원정하였다. 그는 금을 찾는 목적이었으나 실패하였고 미시시피강에 처음 도달한 유럽인이 되었다.
1584년 잉글랜드의 월터 롤리 경(Sir Walter Raleigh, 1552 ~ 1618, 정치인, 탐험가, 작가)이 정착지를 찾기 위해 노스캐롤라이나에 탐험대를 보냈다.
1585년 로어노크 섬에 잉글랜드의 첫 아메리카 식민지가 설립되었으나 모두 돌아갔다.
롤리 경은 1587년 존 화이트(John White, 1539 ~ 1593)를 로어노크 섬에원정대를 보냈으며 존 화이트는 로어노크 식민지(Roanoke Colony)를 건설하고 물자를 공급하기 위하여 1587년 영국으로 돌아갔다.
1588년 스페인과 전쟁으로 가지 못하고 1590년 엘리자베스 1세의 허가를 받아 공급물자를 싣고 로어노크 섬에 갔으나 그의 식민지는 사라지고 없었다.
1629년 찰스 1세는 법무 장관 로버트 히스 경(Robert Heath, 1575 ~ 1649, 법무부장관)에게 버지니아 남동부의 광대한 토지를 개발할 수 있는 식민지 면허장(식민지 헌장, Colonial Charters, 정부의 권한을 부여함)을 주었으나 정착촌 건립에 실패하였다.
캐롤라이나에 첫 영구적 유럽인 정착자들은 1650년 경에 버지니아에서 왔으며 앨버말 사운드 지방에 정착하였다.
1663년 찰스 2세는 8명의 호의적 귀족들에게 개인소유의 캐롤라이나 식민지 면허를 재승인(식민지 헌장, Colonial Charters, 정부의 권한을 부여함)하였다.
캐롤라나(Carolina)는의 북쪽은 남쪽과 크게 달랐고 두 지역 사이의 수송이나 정보 전달이 어려웠기 때문에 1712년에 분할하여 노스캐롤라이나에 행정부가 구성되었지만, 한 식민지 영주가 두 식민지를 지배하였다.
M. 조지아 주(state of Georgia)
1565년 스페인군은플로리다에 상륙하여 세인트오거스틴에 요새를 세웠으며 조지아 해안에는 선교사 양성소들을 세웠다.
1600년대 후반에 영국의 후원을 받은 인디언과 해적들이 조지아의 스페인 선교 시설을 파괴시켰으며 1700년대 초반 앤 여왕 전쟁(Queen Anne's War, 1702~1713) 중에 영국은 스페인과 인디언 동맹을 물리치고 조지아 해안의 통치권을 얻었다.
그 후 20년 동안 조지아 이사(Trustee Georgia)에 의해 관리되었으며 1732년 영국왕조지 2세는 제임스 오글소프(James Edward Oglethorpe, 1696 ~ 1785, 장군, 의회 의원)가 이끄는 조지아 식민지 설립 관리위원회에 조지아 식민지 헌장(Colonial Charters, 정부의 권한을 부여함)을 승인하였다.
주 이름은 영국의 조지 2세(George II, 재위 1727 ~ 1760)의 명예를 기리기 위해 붙였다.
1624년 버지니아 회사가 파산하여 버지니아는 면허가가 취소되었고 버지니아는 최초의 왕실 식민지가 되었다.
독립전쟁이 시작될 무렵까지 개인소유의 식민지로 메릴랜드, 펜실베이니아, 델라웨어가 남아있었고 합자회사 소유로는 로드아일랜드와 코네티컷이 남아있었으며 나머지 8개 식민지는 왕실 소유로 바뀌었다.
나) 영국의 중남미 식민지 개척
영국은 카리브해의 섬을 발견(1625년 바베이도스 발견)하여 장악하였다.
1651년 내전(English Civil Wars, 1642 ~ 1651, 청교도혁명, Puritan Revolution, 의회파와 왕당파 간 전쟁, 찰스 1세 처형)에 혁명군을 지휘하여 왕당파를 물리치고 공화정(Commonwealth)을 세웠으며 1653년에 통치 장전(Instrument of Government)을 제정하여 초대 호국경(Lord Protector)에 올라 독재정치를 시작한 크롬웰(Oliver Cromwell, 1599 ~ 1658)은 해외 국제운송과 무역으로 눈을 돌려 항해조례를 선포하였고 1651년 남미의 수리남(Suriname)에 원정단을 보내어 정복하고 정착시켰으며(1498년 콜럼 버스가 발견하였으며 여러 나라가 정착을 시도했으나 실패한 후 영국이 정착여 사탕수수를 재배함, 1667년 네덜란드와 Breda 조약으로 뉴욕과 교환) 1655년에는 스페인으로부터 자메이카를 탈취하였다.
1717년에는 스페인의 바하마(1783년 미국 독립전쟁 결과 파리조약으로 영국령)를 탈취하였고 1763년에는 7년 전쟁 결과 파리조약으로 프랑스의 도미니카를 차지하여 아프리카 흑인들을 노예로 사탕수수 등을 경작하였다.
그 외에도 영국령 기아나, 영국령 온두라스, 트리니다드 토바고, 윈드워드 제도, 리워드 제도를 식민지로 하였다.
다) 영국의 미국 식민지 확장
영국의 찰스 2세(Charles II, 재위1660 ~ 1685)때인 1664년 영국 해군 최고 사령관(lord high admiral, commander of the Royal Navy 왕립해군 사령관)인 요크 공작(Duke of York, 1633 ~ 1701, 영국왕 제임스 2세, James II of England, 재위1685 ~ 1688)의 명령을 받은 요크공작의 신랑(Groom of the Chamber 궁정 신랑)인 리처드 니콜스(Richard Nicolls, 1624 ~ 1672, 영국의 왕당파 대령출신, 뉴욕총독)는 4척의 전함과 300명의 병사를 이끌고 뉴 네덜란드(New Netherland, Nieuw Nederland 니우 네덜란드, 수도는 뉴 암스테르담, 니우 암스테르담, Nieuw Amsterdam, 북아메리카 허드슨강 유역, 뉴욕)를 원정하였는데 현지의 뉴 네덜란드의 총독페터 스토이베산트(Peter Stuyvesant, 1612 ~ 1672, 뉴 네덜란드 총독 재임 1647 ~ 1664)가 신임을 잃어 그의 병사들이 전투를 거부함에 따라 쉽게 정복되었으며찰스 2세(Charles II, 재위1660 ~ 1685)는 그의 동생인 요크 공작(Duke of York, 제임스 2세, James II of England, 재위1685 ~ 1688)에게 뉴 네덜란드 일부를 하사하였다.
네덜란드의 피터 미누이트(Peter Minuit, 1585 ~ 1638)가 1625년에 인디언에게 24달러에 해당하는 장식물을 주고 사서 식민지로 개발한 맨해튼 섬이 있는 뉴암스테르담(New Amsterdam, 니우 암스테르담 Nieuw Amsterdam)을 제임스 2세가 된 요크공작을 기념하여 뉴욕(New York)으로 이름을 변경하였다.
네덜란드의 페테르 미노이트(Peter Minuit/Minnewit, 1580 ~ 1638) 원정대가 1638년 델라웨어 반도(윌밍턴)에 인디언으로부터 토지를 구입, 정착지를 세우고 스웨덴 크리스티나 여왕(Queen Christina)의 이름을 따서 크리스티나 요새(Fort Christina)라 하는 등 스웨덴 식민지인 뉴 스웨덴(New Sweden)을 세웠지만 1655년 뉴 네덜란드의 페터 스토이베산트(Peter Stuyvesant, 1612 ~ 1672, 총독)가 스웨덴이 지배하던 뉴 스웨덴(New Sweden)을 다시 점령하여 뉴 네덜란드(New Netherland, Nieuw Nederland 니우 네덜란드)에 병합했던 것이다.
영국은 1667년 제2차 영국-네덜란드 전쟁 패배의 결과로 맺어진 브레다 조약(Treaty of Breda)에 의해 사탕수수 생산으로 수익이 많은 수리남, 포레론의 두 섬과 기아나를 네덜란드에 양보하고 뉴 네덜란드(뉴욕주, 수도는 뉴암스테르담 - 현재의 뉴욕)를 영국령으로 인정받았다.
영국은 1674년 네덜란드와 3차 전쟁 중에 점령당한 뉴 암스테르담(뉴욕주)을 웨스트민스터 조약에 따라 네덜란드로부터 다시 넘겨받았다.
영국이 네덜란드령 뉴욕을 침입하였을 때 뉴욕에 Jan(얀)과 Kees(키스)라는 이름의 사람이 많이 있어 그들을 양키(Yankee)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현재는 미국 뉴잉글랜드(New England) 지역의 사람을 양키(Yankee)라 한다.
스페인의 카를로스 2세(Carlos II, 재위 1665 ~ 1700)에게 후계자가 없어 1700년 프랑스 루이 14세(Louis XIV, 재위 1643 ~ 1715)의 손자가 펠리페 5세로 스페인 왕위에 즉위하자 영국,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등은 동맹을 맺어 펠리페 5세의 즉위를 반대하여 스페인과 프랑스에 대항해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1701 ~ 1714)을 일으켰다.
유럽에서 일어난 13년에 걸친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중에 북미에서는 영국이 캐나다의 프랑스령 식민지를 공격하여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앤 여왕(Anne, 재위 1702∼1714) 전쟁(Queen Anne's War, 1702 ~ 1713)이 일어났다.
전투는 뉴잉글랜드 주변과 무역 패권(貿易覇權)을 위한 서인도 제도의 해상에서 일어났다.
동맹국이 유리하게 전쟁이 끝난 후 위트레흐트 조약(Treaty of Utrecht, 1713 ∼ 1715)을 맺었고 펠리페 5세의 왕위를 인정하였다.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영국은 프랑스로부터 허드슨만 일대, 아케디아(노바스코샤), 뉴펀들랜드 섬 등 미국 식민지 일부를 할양(割讓) 받았고 스페인으로부터 지브롤터와 미노르카섬을 획득하였다.
이렇게 미국의 동해안을 장악한 영국인들은 인디언을 몰아내고 영토를 서부로 확대하여 13개 식민지를 건설하였다.
그리고 영국(조지 2세 1727 ~ 1760, 조지 3세 1760~1820)은 1763년 프랑스와 북아메리카를 무대로 벌인 프렌치 인디언 전쟁(French-Indian War, 오스트리아가 푸로이센으로부터 슐레지엔 회복을 위해 일으킨 1756 ~ 1763년 7년 전쟁의 일부분, 푸로이센 영국 대 오스트리아 프랑스 스페인 러시아)에서 프랑스(루이 16세, Louis XVI, 1754. ~ 1793)에 승리하여 미시시피 강 동쪽 루이지애나를 넘겨받았다.
프렌치 인디언 전쟁(French-Indian War, 1754 ~ 1763)은 영국과 프랑스의 팽창정책이 부딪혀 일어났으며 5 대호 남쪽의 오하이오 계곡을 차지하기 위한 전투를 시작으로 오하이오강 지역 등 미국 동북부 지역과 캐나다의 퀘벡 등에서 전투가 벌어졌던 것이다.
영국은 프랑스로부터 넘겨받은 오대호 지역과 일리노이 동부, 오하이오 등에 거주하는 인디언 부족의 저항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들 부족은 자신들의 땅에 들어와 있는 영국 정착민들을 싫어했다. 결국은 ‘폰티액 전쟁(Pontiac's Rebellion, 1763 ~ 1764)'으로 발전되어 인디언들은 여러 요새를 불태우고 정착민을 살해하였으며 영국군은 패하여 북서부 영토에서 쫓겨났다.
영국은 다시 요새를 강화하기 위하여 군대를 파견했으며, ‘부시런 전투(Battle of Bushy Run, 1763)’에서 인디언을 물리쳤다.
영국은 쇼니족(Shawnee) 등 인디언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 '1763년 선언'으로 프랑스로부터 넘겨받은 북서부 영토에 미국 백인 개척민의 이주를 공식적으로 금지시켰다.
그리고 1774년 영국 의회는 '퀘벡법(Quebec Act)'을 통과시켜, 북서부 영토를 퀘벡 식민지에 편입시켰다.
이에 프렌치 인디언 전쟁(French-Indian War, 1754 ~ 1763)에 참전하여 새로운 땅으로 이주하길 원했던 일부 미국 개척민들은 불만을 가졌다.
라) 영국의 아메리카 식민지 경영
영국은 미국 식민지를본토와는 다르다고 생각하여 13개 식민지인들이대표를 선출하여 영국 의회에 진출하는 것을 반대하였으며 반대로 식민지인들은 의회에 진출하는 것을 원했다.
미국 북부의 매사추세츠를 중심으로 하는 뉴잉글랜드 식민지는 추운날씨와 거친 토양으로농업 대신 목재산업,어업,조선업등산업을 발달시킨 결과 초기 자본가와 노동자 계급이 형성되었고 많이 이주해 온 청교도들이 중심이 된 보수적 사회가 되었다.
뉴욕과펜실베이니아를 중심으로 하는중부 식민지는밀 등 많은 농산물을 생산하여 수출하였고 상업도 발전하였다. 다양한 종교인들이 섞여 살았으며 많은 유대인들도 이 지역으로 유입되었다.
버지니아주와조지아주를 중심으로 하는남부 식민지는많은 플랜테이션농업경영으로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였다. 그래서 부족한 노동력을 채우기 위해 아프리카의 흑인들을 사들였다.
영국 국왕이 임명한총독과 노예와 농장을 소유한 부유한 농장주들이 이 지역의 정치와경제를 주도했다. 그리고 자신이영국인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람이 많았다.
영국은 미국 식민지인들이 영국을 통해 원산물을 수출하도록 하였으며 철강 산업을 억제해 제조업 발달을 막았다.
영국은 식민지 초기에는 세금을 별로 부과하지 않았지만 프랜치-인디언 전쟁 후에는 재정적자가 심하여 세금을 부과하였고 이에 식민지인들은 대표 없는 곳에 세금 없다는 구호와 함께 반발하였다.
영국은 식민지를 상대로 삼각 무역(三角貿易, triangular trade)을 하였다.
무기나 화약을 싣고 아프리카에 가서 무기나 화약으로 노예를 산 뒤, 북미대륙이나 서인도제도에 노예를 팔아 그 돈으로 그곳의 물품을 사서 영국으로 돌아오는 삼각 무역(三角貿易, triangular trade)을 하였던 것이다.
두 나라 간의 무역이 균형을 이루지 못할 경우 제3국을 동참시켜 무역을 하게 되는데 이와 같은 세 지역 간의 무역을 삼각무역(三角貿易, triangular trade)이라 한다.
영국외에도 식민지를 개척한 유럽의 여러 국가들은 서아프리카, 미국, 카리브해에 있는 식민지들과 노예, 설탕, 차, 커피 등의 환금작물, 제조 상품들을 삼각무역(三角貿易, triangular trade)하였다.
16세기말부터 19세기 초까지 이루어졌다.
고무(rubber)를 생산하는 파라고무나무(Hevea brasiliensis)는 남아메리카가 원산지이며 아마존강 유역과 아프리카 콩고 등에서만 야생하였다.
브라질에서 생산된 고무가 유럽으로 전해진 것은 18세기 후반이었다.
1770년에 에드워드 네어(Edward Nairne, 1726 ~ 1806, 영국, 안경사, 과학기기 제조사)가 빵조각으로 연필 글씨를 지운다는 것이 실수로 고무조각을 사용하였는데 잘 지워졌다. 그래서 고무조각을 지우개로 팔았다고 한다.
그리고 고무지우개를 rubber(문지르다)란 이름을 사용하게 된 것은 조지프 프리스틀리(Joseph Priestley, 1733 ~ 1804, 영국, 화학자, 산소 발견)가 1770년에 식물에서 추출한 고무를 '흑연을 지우는 용도'로 사용할 수 있다는 기록을처음으로 남긴 것에서 유래하였다.
그런데 채취한 자연산 고무는 온도에 민감하여 여름에는 녹고 겨울에는 부스러져 별로 이용가치가 없었다.
그러던 중 1839년 찰스 굿이어(Charles Goodyear, 1800 ~ 1860, 미국)가 고무를 황과 반응시키면 탄성이 매우 커지고 내약품성, 내열성이 생성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고무가 여러 분야에서 이용되어 중요한 산업 물질이 되자 브라질의 고무 채취업자들은 고무나무에서 채취한 고무를 유럽으로 수출하여 고소득을 올렸다. 이에 고무의 중요성을 인식한 브라질은 고무나무 씨앗이 해외로 방출되는 것을 금하였다.
그렇지만 영국은 1875년 브라질로부터 묘목을 몰래 수입하여 인도 식물원에 심었으나 실패하였고, 이듬해에 7만 개의 종자를 몰래 수집하여 영국의 큐 왕립식물원(Royal Botanic Gardens, Kew)에서 발아시킨 것을 실론섬(Ceylon, 스리랑카)에 심어 재배에 성공하였다.
이 고무나무를 1877년 싱가포르(말레이시아), 1879년 인도네시아, 1886년 오스트레일리아에 전파하여 재배하였다. 그 후 열대지방의 각지에 전파하여 재배하였으나 남아메리카에서는 병충해 발생 등으로 재배에 실패하였다.
현재는 말레이시아 및 인도네시아에서 전 세계 생산량의 95% 이상이 생산되고 있다.
3) 영국의 인도 교역과 침략
스페인은 여러 나라와의 전쟁으로 국력이 점점 약해졌으며 인도를 처음 개척한 포르투갈도 약해져 갔다.
영국은 스페인과 독립전쟁 중인 포르투갈과 전쟁(1650 ~ 1654)을 하였고 영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포르투갈은 평화 조약을 체결하였는데, 포르투갈은 영국의 교역을 위해 브라질, 아프리카, 그리고 동양 식민지들의 문호를 개방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포르투갈은 1668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했으나 국력이 약하여 열강과의 경쟁에서 밀렸고 고아에서 폭동이 일어나 인도에서의 영향력이 감소했으며 식민지로 남아있던 브라질에 주력했다.
인도에서 포르투갈의 영향력이 약해지자 영국과 네덜란드와의 경쟁이 격화되었다.
영국은 마드라스에 이어 1661년 봄베이(뭄바이, Mumbai, 찰스 2세와 결혼한 포르투갈 왕녀 캐서린 브라간사 Catherine of Braganza 카타리나 데 브라간사의 지참금의 일부로써 할양되었다), 1690년 캘커타를 획득하였다.
프랑스도 인도 진출을 도모하여 콜베르(Jean Baptiste Colbert, 1619 ~ 1683)가 프랑스 동인도 회사를 재건하여, 1673년 찬다나가르(Chandannagar), 1674년 폰디세리(Pondicherry)를 획득했다.
영국은 동인도회사를 통한 무역 중심에서 식민지로 차지하려는 야욕을 가지고 1686년 무력으로 인도를 침공했으나 강한 무굴제국에 패배하여 벵골에서 물러났다.
1707년에 잉글랜드 왕국과 스코틀랜드 왕국이 합방하여 그레이트 브리튼 왕국(Kingdom of Great Britain)이 되었다. 그레이트 브리튼 섬 전체를 지배한 첫 왕국이었다.
인도의 무굴제국은 반란이 일어나 1674년에 마라타 왕국이 형성되었고 인도의 서부는 1708년 마라타 동맹(Maratha Confederacy)으로 재건되었다. 1719년에는 여러 명의 황제가 교체되는 등 정치적 혼란이 극심했다.
영국은 인도에서 다시 무역권을 얻어 활동하던 중 프랑스가 인도에 요새를 건설하고 프랑스군이 들어와 세포이(sepoy)를 고용하여 세력을 형성하자 영국 동인도회사도 세포이(sepoy)를 고용하여 군대를 확대하였으며 1708년 영국은 무역 중심에서 식민지 건설 중심으로 정책을 바뀌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상인들이 개별적으로 활동함에 따라 점차 세력이 약해지자 인도에서 말레이 중심으로 옮겨 가고 영국은 인도에 주력했다.
1759년 영국군은 오랫동안 경쟁관계에 있던 네덜란드가 벵골 토후와 결탁해 벵골을 침입해 오자 이를 격파하고 인도의 영향력을 강화했다.
영국군은 인도에서 프랑스군과의 전쟁에서 패퇴하는 등 대립관계가 지속되었다.
프랑스와의 7년 전쟁(1756 ~ 1763, 미국에서는 프랜치 인디언 전쟁이 일어남)중 인도에서도 영국과 프랑스는 여러 곳에서 전쟁을 하였다.
그중에서 중요한 전투는 1757년 벵골의 플라시(Plassey)에서 로버트 클라이브(Robert Clive, 1725 ~ 1774, 정치가, 군인)가 이끄는 영국 동인도 회사의 군사 3천 명과 벵갈 영주(나와브 nawab, 태수, 지방장관) 7만 군과 프랑스 동인도 회사의 연합군과의 전쟁 중에 무굴제국의 내부 반란을 유도하여 승리함으로써 영국 동인도회사는 인도무역을 거의 독점하게 되었고 인도의 식민지화를 추진하기 시작했으며 이어서 7년 전쟁의 일환으로 인도에서 치러진 '3차 카르나타카 전쟁(Third Carnatic War, 1756 ~ 1763)' 중에 '완데와시 전투(battle of wandewash, 1760)'에서 영국군이 프랑스군을 격파함으로써 '3차 카르나타카 전쟁(Third Carnatic War, 1756 ~ 1763)’이 결판남에 따라 1763년 파리 강화조약(7년 전쟁 결과)에 의해 영국의 카르나타카 지역(벵골 지방)의 지배권이 확립되었다.
4) 플라시 전투(Battle of Plassey, 1757)와 인도 수탈
인도의 벵골 지방은 비단, 모슬린(muslin, 평직으로 짠 무명), 초석(화약 만들 때 필요) 등의 특산지로 인도 무역 수입의 2/3를 차지하는 인도의 노른자위였다.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벵골 지방을 차지하기 위해 프랑스와 대립했다.
벵골의 귀족과 상인들은 영국과 무역하기를 원했지만 벵골의 시라지 웃 다울라(Siraj-ud-daulah, 1728?~1757) 태수(나와브, nawab, 지방관, 벵골 왕같이 군림)는 영국의 야욕을 알고 프랑스와 연합하여 영국인들을 몰아내려고 했었다.
그래서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요새를 확장하고 더 많은 군대를 주둔시켰다.
위협을 느낀 벵골의 시라지(Siraj ud Daulah) 태수는 군대를 동원하여 영국의 요새를 공격하여 파괴하고 영국인을 잔인하게 죽였다.
이에 영국 동인도회사는 벵골의 태수(나와브, nawab)를 공격하기 위해 본국의 군대를 지원받아 용병인 세포이(sepoy, 영국에 고용된 인도 용병) 2천여 명을 합쳐 3천 명을 동원하였다.
그러나 시라지(Siraj ud Daulah) 태수의 군은 프랑스군과 합쳐 7만 명이나 되었으므로 승산이 없었다.
그래서 영국군은 벵골을 공략하기 위해 시라지의 심복 자파르(Syed Mir Jafar Ali Khan Bahadur, 에드 미르 자파르 알리 칸 바흐 두르)를 이용하기로 했다.
영국군은 사리지(Siraj ud Daulah) 태수의 심복 자파르(Mir Jafar)에게 벵골의 태수(나와브, nawab)가 되게 해 주겠다고 하였다.
시라지(Siraj ud Daulah)의 심복 자파르(Mir Jafar)는 상인들과 영국군의 지원을 약속받고는 사리지(Siraj ud Daulah) 태수를 배신하기로 결심하게 된다.
1757년, 벵골의 패권을 놓고 시라지(Siraj ud Daulah) 태수 군대와 프랑스 군대는 이동식 대포를 끌고 영국 군대와 콜카타 인근의 플라시 평원에서 대치했다. 양군이 대치한 상태에서 비 오고 안개가 끼어 진격은 못하고 대포로 공격하게 되었는데 사라지(Siraj ud Daulah) 태수 군의 대포는 정비불량으로 작동하지 못하고 영국군의 대포가 우위를 점한 가운데 자파르(Mir Jafar)가 회군하여 아군을 공격하니 시라지(Siraj ud Daulah) 태수 군사들은 놀라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렇게 하여 플라시 전투는 단 하루 만에 영국군의 승리로 끝났다.
자파르(Mir Jafar)는 벵골의 새로운 태수(나와브, nawab)가 되었지만 벵골의 군사적인 지배권은 영국에 있어 자파르(Mir Jafar)는 영국군의 꼭두각시가 되었다.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자파르 태수(나와브, nawab)에게 플라시 전투에 대한 배상금을 요구하였다.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배상할 돈이 없는 자파르 태수(나와브, nawab)에게 배상금 대신에 세금 징수권과 영국 상품에 대한 관세 면제를 요구했다.
영국은 벵골의 세금 징수권을 얻게 되자 인도에 대한 수탈을 본격화하였다.
영국은 인도 상품을 수입하고 벵골 지방에서 거둔 토지세로 대금을 지불했으므로 인도의 부(富)를 영국이 모두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벵골에서 수탈한 재원으로 많은 세포이를 고용하여 인도 대륙을 쉽게 침략할 수 있게 되었다.
인도의 여러 토후국들은 연합하여 영국 세력을 막지 않았다. 원교근공(遠交近攻)이라는 전통적인 인도의 외교정책은 가까운 적은 경계하면서도 영국에게 크게 위협을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영국은 조금씩 세력을 넓혀 나갔으며 1800년 경에는 인도 대륙 전체에 영향력을 가지게 된다.
플라시전투(Battle of Plassey, 1757) 이후 사적 독점상업회사(私的獨占商業會社)로 부정부패가 만연한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인도에서 부당한 활동을 하여 영국내에서 조차 비판이 일어나고, 또 경영난으로 영국정부에 원조를 요청하자 영국의회는 1773년 노스규제법(North's Regulating Act, 회사령 인도, Company rule in India, 동인도 회사의 유럽 및 인도 경영 관리 규정 제정에 관한 법률, 1773)을 제정하여 동인도회사를 본국 정부의 감독하에 두었다. 1833년에는 인도 정부법(Government of India Act 1833, East India Company Act 1833, Saint Helena Act 1833, 세인트 헬레나법, 동인도회사의 세인트 헬레나 섬 통제권을 영국 왕실로 이전)을 제정하여 동인도회사의 무역독점권을 폐지하였고,
1858년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세포이 항쟁(Sepoy Mutiny, 1857 ~ 1859)이 일어나자 이를 계기로 인도령을 영국왕에게 바치고 해산하였으며 영국 정부는 세포이 항쟁(Sepoy Mutiny, 1857 ~ 1859)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인도정청(政廳)을 설치해 인도 식민지를 직접통치하였다.
* 코이누르 다이아몬드(Koh-i-Noor Diamond)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다이아몬드 중의 하나인 코이누르(Koh-i-Noor, 빛의 산) 다이아몬드(186캐럿, 지름 11cm)는 카카티야 왕조(Kakatiya dynasty, 1163 ~ 1323) 시절에 지금 인도의 안드라프라데시주 군투르(Guntur) 지구의 콜루르(Kollur, 인도 동남부)에 있는 광산에서 채굴되었다고 추측한다.
1캐럿(carat, K, ct.)은 약 200mg에 해당한다.
처음에는 카카티야 왕조(Kakatiya dynasty, 1163 ~ 1323, 힌두교)가 소유해 왔으나 14세기 초 투글루크왕조(Tughlaq dynasty, 이슬람, 1320 ~ 1414)가 카카디야왕조를 정복하여 전리품으로 가져갔으며 이어 델리왕조(Delhi dynasty, 노예 왕조 Slave dynasty 맘루크 왕조, 힐지 Khilji, 투글루크 Toughluq, 사이드 Sayyid, 로디 Lodi로 이어진 이슬람의 다섯 왕조)를 멸망시킨 인도의 초대 무굴(Mughul) 지배자인 바부르(Babur)가 1526년 아그라 요새(Agra Fort)에서 취득하였다.
1650년대 초 페르시아를 거쳐 다시 무굴 제국(Mughal Empire, 1526 ~ 1857)의 샤 자한(Shah Jahan)에게 돌아와 무굴 제국에서 대대로 전해지던 보물이었으나 1739년 델리를 점령한 페르시아 아프샤르왕조의 나디르 샤(Nādir Shāh)가 약탈해 갔다.
코이누르(Koh-i-Noor, 빛의 산) 라는 명칭은 이때 지어진 것이라고 전한다. 아프샤르 왕조 멸망 이후, 다이아몬드는 아프가니스탄의 두라니(Ahmad Shāh Durrāni) 왕조의 창건자인 아흐메드 샤에게 넘어갔다가 두라니 왕조가 멸망하자 시크왕국(1799 ~ 1849, 힌두교와이슬람을 접합시킨시크교 Sikhism)에 넘어갔다.
1849년 제2차 앵글로-시크 전쟁결과 라호르 조약(Treaty of Lahore, 1849)으로 펀자브 지방은 동인도회사에 합병되었고 코이누르는 영국에 양도되었다.
코이누르는 1850년 7월 영국으로 운송되어 빅토리아 여왕(Queen Victoria, 재위1837 ~ 1901)에게 헌상되었다. 빅토리아 여왕의 남편 앨버트 공(Prince Albert of Saxe-Coburg and Gotha, 1819 ~ 1861)은 코이누르(Koh-i-Noor) 다이아몬드가 빛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깎아 가공하였다고 한다(105캐럿).
빅토리아 여왕은 이 다이아몬드를 브로치(Brooch)에 부착하여 패용하였다.
1901년 빅토리아 여왕이 죽은 후 알렉산드라 여왕의 왕관에 장식되었으며 지금은 엘리자베스 여왕의 왕관에 장식되어 런던탑에 보관되어 있다.
인도는 독립 후 1947년과 1953년 영국에 코이누르 다이아몬드(Koh-i-Noor Diamond)의 반환을 요구했고, 2000년에는 인도 의회가 공식 서한을 반환을 요구하였으며 파키스탄 등 관련 국가들도 각각 반환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영국은 라호르 조약(Treaty of Lahore, 1849)에 의해 전쟁 배상금으로 코이누르 다이아몬드를 합법적으로 양도받은 것으로 치부하며 반환 요구에 별반응을 보이지 않았으나 2010년 인도 방문 중이던 영국의 총리가 "전례가 되면 대영박물관은 순식간에 텅 빌 것"이라고 하였다.
5) 영국의 아일랜드 식민지 경영
아일랜드는 켈트족이 살고 있었으며 앵글랜드와는 달리 로마나 게르만의 침략을 받지 않았다.
432년 교황이 파견한 성 파트리치오(St Padraig, 성 패트릭, Saint Patrick, 389 ~ 461)에 의해 아일랜드에 기독교가 전파되었다.
아일랜드는 795년부터 11세기 초에 걸쳐 바이킹족이 침입하였다.
12세기경 바이킹족의 세력이 약해지자 아일랜드는 여러 개의 왕국들로 분할되었으며 서부 지역의 코노트 왕국이 동남부 지역의 렌스터 왕국을 점령하자 렌스터 왕국의 국왕이 잉글랜드의 헨리 2세에게 지원병을 요청하였다.
헨리 2세의 군은 아일랜드를 침공하여 데블린 등 일부 영토를 잉글랜드의 식민지로 만들었다.
아일랜드의 켈트족은 끈질기게 저항하여 잉글랜드 세력을 서서히 약화시켜서 동화시켜 버렸다.
그러나 1534년 잉글랜드의 헨리 8세가 아일랜드를 다시 침공하여 식민지로 삼았다. 아일랜드는 1937년 정식 독립될 때까지 약 400년 동안 잉글랜드의 식민지 통치를 받았으며 헨리 2세의 침공으로부터 보면 아일랜드는 약 800년간 지배를 받았으며 독립을 위해 잉글랜드와 싸웠던 것이다.
잉글랜드와 아일랜드는 원래 가톨릭교도 지역이었으나 잉글랜드의 헨리 8세가 종교개혁을 한 후에 가톨릭교도 지역인 아일랜드에 신교를 강요함으로써 갈등이 깊어졌다.
그리고 가톨릭 지주의 토지 대부분을 몰수하여 잉글랜드에서 새로 이민한 개신교도에게 주었다.
제임스 1세(James I, 재위 스코틀랜드 1567 ~ 1625, 잉글랜드 1603 ~ 1625) 때 '얼스터 식민(Plantation of Ulster)' 정책으로 얼스터 지방에 스코틀랜드의 신교도들을 대거 이주시켰다.
가톨릭을 신봉하는 찰스 1세(재위 1625 ~ 1649)와 의회 간의 반목으로 잉글랜드 내전(청교도혁명 1625 ~ 1649)이 일어나자 아일랜드는 왕당파 편에 가담하였으며 이에 올리버 크롬웰이 이끄는 의회파 군대가 아일랜드를 침공했다.
크롬웰은 얼스터 지방의 가톨릭교도들이 소유하고 있던 토지를 몰수하여 원정 군인들에게 하사하고 가톨릭교도들을 아일랜드 서부의 척박한 코노트 지방으로 추방해 버렸다. 그리고 잉글랜드 상품은 아일랜드에 수출하고 아일랜드 상품은 잉글랜드에 수출을 못하게 하고는 상품 대가로 식량을 수탈해 갔다.
크롬웰 침공의 결과로 18세기에 대규모의 스코틀랜드 신교도인들이 아일랜드에 이주하였다. 북아일랜드에 이주해 온 신교도인들은 가톨릭교도들을 밀어내고 대부분의 토지를 차지함에 따라 후에 북아일랜드 문제가 일어나게 된다.
또 1694년에 잉글랜드의 명예혁명 때에도 아일랜드는 제임스 2 세편에 가담함으로써 국왕인 윌리엄 3세가 침공하였으며 아일랜드는 잉글랜드의 압제를 더욱 심하게 받게 되었다.
1801년에 이전까지는 형식상의 동군연합이었던 것이 연합 법에 따라 잉글랜드 왕국과 스코틀랜드 왕국이 합병하여 형성한 그레이트 브리튼 왕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에 아일랜드 왕국이 병합되어
그레이트 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Ireland)이라는 한 나라가 되었다.
잉글랜드의 식민지 경영으로 밀 등의 곡식을 수탈당한 아일랜드는 감자가 전래되자 다른 유럽 국가와는 달리 감자를 재배하여 주식으로 삼았다.
수확량이 많은 품종이라 여겼던 럼퍼라는 한 품종의 감자만 재배하였다.
1848년에 이 품종에 전염병이 발생하여 감자 생산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아일랜드 인구의 1/3이 감자만으로 식생활을 영위할 정도로 감자가 주식이었으므로 대기근이 일어났다. 그때 850만 가량의 아일랜드 인구 중 200만 명이 아사하거나 병사하였으며
200여만 명이 아일랜드를 탈출하여 이민을 갔으며 이들 대부분이 미국으로 향했다.
영국은 아일랜드에서 생산된 곡식을 브리튼 섬으로 운반했고, 영국이나 지주, 영국 상인들은 밀 등의 곡식을 구호품으로 사용하지 않아 아사자가 더 많았던 것이다.
아일랜드인들은 수백 년이나 영국에서 건너온 개신교인들에게 차별과 억압을 받았고, 이들의 불만이 폭발하고 봉기(1916년)로 이어져 아일랜드 공화국군 결성 등의 무장 투쟁이 일어났다.
1918년 아일랜드 독립전쟁이 일어나 1921년 영국-아일랜드 조약으로 영국과 아일랜드는 휴전하였고 아일랜드의 공화주의자들에 의해 남부 아일랜드가 독립하게 되었다.
그런데 아일랜드의 동북부 얼스터 지방의 일부인 북아일랜드는 17세기 제임스 1세 때 '얼스터 식민(Plantation of Ulster)' 정책으로 얼스터 지방에 스코틀랜드의 신교도들을 대거 이주시켰다. 그래서 이 지방은 아일랜드 독립 전에도 친영-개신교 성향이 강한 지역이었으며 19세기말 아일랜드에 자치(Irish Home Rule)가 제안되었을 때도 반대하였다.
1918년 영국 총선에서 북아일랜드에서는 친영파가 의석을 다수 확보했다.
1920년 아일랜드 독립 전쟁을 종식시키는 영국-아일랜드 조약으로 남부 아일랜드가 영국으로부터 분리될 때 북아일랜드는 얼스터 지방 9개 주 중에서 가톨릭 신자가 많은 3개 주는 아일랜드에 귀속되고 6개 주는 영국에 귀속되었다.
6) 영국의 오스트레일리아(Australia)와 뉴질랜드(New Zealand) 획득
네덜란드는 오스트레일리아(호주)를 처음 발견하였다.
네덜란드인들이 인도네시아에 도착했을 때 자바 섬 남쪽에 '오스트랄리스 땅(Terra Australis,라틴어 Southern Land)'이라 불리는 매우 큰 무인도가 있다는 소문이 있었다.
1606년 네덜란드의 윌렘 얀손(Willem Janszoon, Willem Jansz, 1570 ~ 1630)이 듀이프겐 호(Duyfken)를 타고 잘못 항해하여 최초로 오스트레일리아 북부 카펀테리아 만(Carpentaria)에 도착했다.
이에 네덜란드 총독 프레데리크 헨드리크(Frederik Hendrik van Oranje, 재위 1625 ~ 1647)는
1642년에 아벨 타스만(Abel Janszoon Tasman, 1603 ~ 1659, 탐험가, 상인,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를 위해 탐험) 선장을 파견하여 탐험케 하였다.
아벨 타스만은 1642년 오스트트레일리아 남동부지역의 반 디멘스랜드(Van Diemen's Land, Tasmania, 태즈메이니아)를 발견하였고 이어 뉴질랜드(Staten Landt, 스타텐 란트)도 발견하였다.
아벨 타스만은 1644년 오스트레일리아를 뉴 홀랜드(New Holland, Nieuw-Holland)라 하고 1645년 뉴질랜드를 노바젤란디아(Nova Zeelandia)라고 명명했다.
그러나 그가 탐험한 반 디멘스랜드는 향신료 등 찾던 물품은 없었으며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인 애버리진(Australian Aborigine)은 거칠고 도착한 북쪽지점은 사막으로 황량하였으므로 네덜란드 총독은 사람이 살 수 없는 작은 섬이라 생각하여 내버려 두었다.
1688년 영국인 항해사 댐피어(William Dampier, 1651 ~ 1715)가 영국인 최초로 오스트레일리아(Australia)를 탐험하였다.
1768년 영국해군은 금성의 태양면 통과를 태평양에서 관측하고 태양과 지구의 거리를 측정하기 위해 탐험 선단을 구성하였다.
영국의 탐험가이고 항해가인 제임스 쿡(James Cook, 1728 ~ 1779, 대위, 후에 대령) 선장이 이끄는 탐험대는 1768년 인데버호(HMS Endeavor, 돛대 3개인 범선, 길이 32.3m, 폭 8.9m, 무게 397톤, 석탄 운반선으로 제작)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 브라질 리우 데 자네이로를 거쳐 남아메리카 최남단 케이프 호른(cape horn)을 지나 태평양으로 들어가 타히티섬에서 관측을 하고 태평양의 여러 섬을 발견한 다음 희망봉을 거쳐 1771년 영국으로 귀향했다.
1770년에 영국의 쿡(J. Cook) 선장은 뉴질랜드(New Zealand)와 오스트레일리아 동해안에 있는 뉴 사우드 웨일스(New South Wales) 지역의 보타니 만(Botany Bay)을 발견하고 오스트레일리아(Australia)를 뉴사우스웨일스(New South Wales)라고 명명하고 영국의 식민지로 선포하였다.
보타니 만(Botany Bay) 지역은 산림이 울창하고 사람이 살기에 좋은 환경이었다.
뉴질랜드(New Zealand)라는 지명은 1645년 네덜란드의 탐험가 아벨 타스만(Abel Tasman)이 고향의 지명인 제일란트(Zeeland)에 new(nova)을 붙여 ‘노바젤란디아(Nova Zeelandia)’라고 명명한 것을 영국의 제임스 쿡(J. Cook) 선장이 영어식으로 ‘뉴질랜드(New Zealand)’라고 명명하였다.
영국은 1788년에 736명의 죄수들과 1,373명의 이민을 오스트레일리아에 보내어 정착을 시작하였다.
영국의 매슈 플린더스(Matthew Flinders, 1774 ~ 1814, 항해사, 지도 제작자)는 1791 ~ 1803년 사이에 여러 차례 오스트레일리아(Australia) 연안을 일주하는 항해를 하고는 작은 섬이 아니라 큰 대륙임을 밝혀내고 대륙의 명칭을 네덜란드의 아벌 타스만이 붙인 뉴 홀랜드(New Holland), 영국의 쿡 선장이 붙였던 뉴사우스웨일스 (New South Wales) 대신에 남쪽 땅을 지칭하는 라틴어 'australis'에서 유래한 '오스트레일리아(Australia)'라는 지명을 사용할 것을 제안했다.
뉴질랜드(New Zealand)는 1840년 마오리족의 수장들과 와이탕이 조약(Treaty of Waitangi)을 체결하여 영국령이 되었다.
1783년에 아메리카 13개 식민지가 미국으로 독립할 때(1607 ~ 1783년)까지의 북아메리카, 서인도제도, 인도, 호주 등의 식민지 지배체제를 제1차 대영제국이라 한다.
나. 제2차 대영제국
미국 독립전쟁(1775 ~ 1783) 중에 일어난 제4차 영국-네덜란드 전쟁(1780 ~ 1784)에서 1784년에 영국은 네덜란드를 격파하고 제해권과 인도 전체의 지배권을 가지게 됨에 따라 실질적인 대영제국이 되었다.
1801년 아일랜드 왕국과 합병하여 그레이트 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Ireland)이라 하였다.
남아프리카(케이프)는 1488년 포르투갈 선원 바르톨로뮤 디아스(Bartolomeu Diaz, 1450년경 ~ 1500)가 희망봉을 발견한 이래 1652년에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진출하여 네덜란드의 식민지가 되었다.
1795년 네덜란드는 프랑스 혁명군에 점령당하여 바타비아(Batavia,1795 ~ 1806) 공화국이 설립되었고 영국은 1795년 네덜란드령 남아프리카(키예프),1796년 네덜란드령 실론(스리랑카, 1505년 포르투갈, 1658년 네덜란드)을 차지하였던 것이다.
영국은 1798년 나일 해전에서 승리하여 이집트에 원정 중인 나폴레옹을 고립시켰으며 몰래 탈출한 후 집권하여 한 때 유럽 대부분을 정벌하였던 나플레옹을 1805년 트라팔가르 해전과 1815년 워털루 전투에서 패퇴시키고 대영제국을 공고히 하였다.
네덜란드, 포르투갈, 스페인 등이 프랑스에 속국이 되거나 합병이 되었지만 트라팔가르 해전(Battle of Trafalgar, 1805) 전 후로 제해권이 영국에 있었으므로 이들 나라의 해외 식민지는 프랑스보다는 영국이 차지할 기회가 많았던 것이다.
네덜란드는 1806년 프랑스에 합병되었으며 1813년에 프랑스로부터 독립했다.
네덜란드는 그동안 공백으로 잃었던 해외 식민지 일부를 1815년 빈 회의(Congress of Wien, 1814 ∼ 1815, 제1차 파리조약으로 프랑스가 포기한 영토의 처분 회의) 결과 영국-네덜란드 조약을 맺어 돌려받았지만 남아프리카 케이프 식민지(The Cape Colony), 실론은 영국의 식민지로 결정되었다.
영국은 1808년 말라카(Malacca, 말레이 반도)를 점령하여 1824년에 네덜란드로부터 넘겨받았다.
1644년에 아벨 태즈먼(Abel Tasman, 1603 ~ 1659, 네덜란드)이 뉴질랜드를 발견하였지만 쓸모없는 땅으로 생각하였다.
그 후 여러 사람이 탐험하였으며 1840년에 마오리 부족장들과 영국 사이에 와이탕이 조약(Treaty of Waitangi)이 체결되어 뉴질랜드는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1922년 아일랜드 섬의 남부 26주로 구성된 남아일랜드가 아일랜드 자유국(Irish Free State)으로 분리 독립되면서 1927년 그레이트 브리튼 북아일랜드 연합 왕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 약식 United Kingdom, 현재의 영국)이라고 개칭했다.
1783 ~ 1947년 사이의 캐나다, 인도,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남아프리카 등의 지역에 대한 지배를 제2차 대영제국이라 하며 영토가 세계의 1/4에 달하기도 하였다.
16세기 ~ 18세기 대서양에서는 설탕과 노예를 운송하는 삼각무역이 활발하였다.
서인도 제도, 브라질 등을 발견한 스페인, 포르투갈은 이지역에 노예를 이용한 대규모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을 조성하였다.
이후 설탕이 유럽에서 기호품으로 각광을 받자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등이 이들 지역 일부를 침략하여 탈취하거나 이들 지역에서 생산된 설탕 무역에 뛰어들었다.
이들 나라들은 유럽의 무기와 화약, 의류 등을 아프리카에 싣고가서 노예와 교환하고 노예를 신대륙에 실어다 주고 설탕, 럼, 담배, 은 등을 교환하여 유럽으로 가져오는 삼각무역을 하였다.
영국은 17세기 말 대서양 무역에서 얻은 수익의 50%가 서인도 제도에서 생산된 설탕을 무역하는 것이었다.
포르투갈에 이어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등이 노예무역에 참여하였으며 영국은 17세기 후반부터 150년 동안 340만 명의 흑인 노예를 무역하였다.
18세기 이후에는 대서양의 주인으로 성장한 영국이 삼각 무역으로 가장 많은 수익을 올렸다.
다. 방적기(紡績機, spinning machine)와 방직기(紡織機, loom, weaving machine)의 발달과 산업혁명
인도에 진출한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초기에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 밀려 최상의 무역품인 향신료 수입을 할 수 없게 되자 향신료 대신에 인도의 면제품을 수입하였다.
영국은 면제품을 처음에는 인도네시아에서 향신료와 교환하거나 아프리카와 중동 지역에 재수출할 용도로 이용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인도는 면화의 원산지로 방적, 직조, 염색 기술이 뛰어나 인도의 면제품이 서양 제품을 능가하고 있었다.
동인도회사가 인도에서 수입 공급한 수제 면포가 유럽에서 대유행을 하였다.
특히 ‘친츠(Chintz)’라고 불리는 꽃무늬 면직물은 영국 침실의 침구와 커튼으로 애용되었다.
영국에서는 인도산 면직물 때문에 모직이 팔리지 않아 모직공장이 도산하여 노동자가 폭동을 일으킬 정도였으므로 수입을 금지하기도 했다.
그 후 방적기와 방직기가 발달하여 산업혁명이 일어남에 따라 인도에서 면화를 수입하여 증기기관을 이용한 자동화 공장에서 면제품을 생산하여 인도로 역수출하는 중상 무역으로 발전하였다. 그렇게 되자 인도는 영국 면제품을 불 테우는 등 저항 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자동화 공장에서 면제품을 대량 생산하게 됨에 따라 인도산 면화로는 부족하여 미국 남부의 면화를 대량으로 수입(수요량의 3/4)하여 사용하였다.
산업혁명의 시발점인 면 공업은 목화솜으로 뽐은 애벌실을 꼬아서 실로 만드는 방적(紡績, 방사, 紡絲, spinning)과 실로 직물을 짜는 방직(紡織, weaving)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이루어졌다.
인류가 옛날부터 사용한 수직기(手織機, 베틀, handloom, 사람의 손발로 움직여 베를 짜는 기계)는 사람의 힘으로 경사(經絲, warp, 날실)를 위사(緯絲, weft, 씨실)로 역은 것이다. 수직기의 사용은 직기에 건 경사를 번갈아 상하로 갈라서 북이 지나갈 수 있도록 통로를 만드는 종광(heald, heddle, 잉아, 날실을 아래위로 벌려서 씨실이 투입되는 통로를 만들어 주는 장치)의 발명으로 시작되었을 것이다.
먼 옛날에는 종광을 손으로 작동시켰지만 발전되어 종광을 발로 작동시키는 수직기가 사용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733년 영국의 존 케이(John Kay, 1704 ~ 1764, 영국)가 자동 북(flying shuttle, 나는 북)을 발명하여 새로운 방직기를 제작하여 사용함으로써 산업 혁명이 시작되었다.
날실 사이로 씨실이 들어가게 하는 기계장치인 자동 북(flying shuttle)을 발명함으로써 종래의 수직기의 제직 능률을 크게 향상시켰던 것이다. 한 손으로 끈을 잡아당겼다 놓기만 하면 북(직물을 짤 때 씨실 꾸리를 넣어 사용하는 배 모양의 나무통)이 홈통을 따라 좌우로 빠르게 움직여 반자동으로 날실 사이로 씨실이 들어간다.
방직기의 발달로 실의 수요가 늘어나 공급이 부족해지자 방적기의 발달을 가져오게 되었다.
1765년에 하그리브스(James Hargreaves, 1702 ~ 1778, 영국)는 제니(jenny) 방적기를 발명하였고, 1769년에 아크라이트(Richard Arkwright, 1732 ~ 1792, 영국)는 혁신적인 수력 방적기(water frame, 水力紡績機, hydraulic spinning machine)를 개발하였다. 아크라이트의 수력 방적기는 물레의 바퀴에 연결된 구동축과 벨트, 기어들을 이용 하여 여러 개의 롤러를 작동시켜 실이 롤러를 통과하면서 방추(紡錘, spindle, 실을 꼬고 감는 가락, 실을 감는 막대, bobbin)에 감기는 구조였다. 그리고 수력을 사용함으로써 제니 방적기보다 빠른 속도로 작업을 수행할 수 있었다.
영국 면직산업에 필요한 대부분의 솜(3/4)은 인도에 이어 미국 남부에서 흑인 노동력으로 생산되어 공급되었다. 특히 옛날부터 사용해 온 기계로 솜에서 씨앗을 분리하여 제거하는 데는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였다.
솜에서 목화씨를 분리하는 기계를 조면기(繰綿機, cotton gin)라고 하는데 1793년 일라이 휘트니(Elias Whitney, 1765 ~ 1825, 미국)에 의해 새로이 발명되었으며 사람 50명 분량을 처리했다. 그 결과 미국의 면화 생산 농업은 더욱 확대되어 대량의 솜을 영국으로 수출할 수 있었다.
일라이 휘트니의 조면기는 둘레에 작은 철사 톱니로 덮여있는 두 개의 실린더를 회전시키면서 목화를 그 사이로 통과시키면, 그 톱니들이 맞물려 돌아가는 좁은 틈으로 씨를 제외한 섬유만 통과하게 만든 것이었다.
1779년 영국의 크럼프턴(Samuel Crompton, 1753 ~ 1827, 영국)이 하그리브스의 제니 방적기와 아크라이트의 수력 방적기(水力紡績機)의 장점을 혼합하여 뮬 방적기(紡績, spinning)를 발명하였다.
방적기의 발달로 실이 과잉 공급되자 보다 발달된 방직기가 필요하였다.
1785년 영국의 E. 카트라이트(Edmund Cartwright, 1743 ~ 1823, 영국)가 증기기관(蒸氣機關, steam engine)을 이용한 역직기(力織機, power loom)를 발명하였으며, 이것이 급속도로 보급되어 19세기 중반 그동안의 모직물 생산 체계에서 면직물의 대량 생산 체계로의 발전을 가져왔다.
물은 100 °C에서 수증기로 변할 때 수증기의 부피는 액체 상태의 물 부피의 약 1,244배 정도 증가한다. 이 팽창력을 이용하는 기관이 증기기관이다.
증기기관의 역사는 2,000년이 넘지만 피스톤을 이용한 실용적 기관으로 처음 발명한 사람은 1710년경 뉴코멘(Thomas Newcomen, 1664 ~ 1729, 영국)이며 일률은 5마력(3.7kW) 정도였다.
제임스 와트(James Watt, 1736 ~ 1819, 영국)는 1769년 광산에서 배수펌프의 동력원으로 사용하던 뉴코멘의 증기기관을 수리하던 중에 고효율의 ‘증기 기관’을 발명했다.
제임스 와트의 증기 기관이 광산, 방직기, 기관차, 기선 등과 같이 널리 사용되자, 연료인 석탄이 많이 필요하여 생산이 활발해졌으며 따라서 또 각종 기계를 생산하기 위해 값싸고 질 좋은 철 생산이 요구되었다.
제철(製鐵, iron manufacture)은 철광석(鐵鑛石, 철광 鐵鑛, 철Fe를 함유한 광석, 자철석 磁鐵石 magnetite Fe3O4, 적철석 赤鐵石 hematite Fe2O3, 갈철석 褐鐵石 limonite FeO(OH)·nH2O 등)을 제련(製鍊, smelting, 광석으로부터 금속을 추출)하여 철을 뽑아내는 방법으로, 주로 선철(銑鐵, pig iron, 탄소 함유량 1.7% ~ 7%)을 만들 때까지의 공정을 의미하며 제강(製鋼, steel manufacture)은 선철(銑鐵)을 녹여서 탄소와 불순물을 제거하고 강(鋼, steel 강철)을 만드는 과정이다.
제철소(製鐵所, Steel mill, Steelworks)에서 철광석으로 철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용광로에 철광석, 석회석(CaCO3), 탄소(C, 숯, 코크스)을 넣어 철광석에 혼합된 암석을 석회석(CaCO3)으로 제거하여 슬래그(slag, CaSiO3, Al2O3)로 배출하고 산화철의 산소(O2)를 분해하여 제거(환원 반응)해야 철이된다. 용광로에서 탄소(숯, 코크스)에 의한 산화철의 환원 반응이 일어나는데 탄소의 농도를 높게하면 철과 산소의 결합보다 탄소와 산소의 결합이 쉽게 일어남으로 산화철의 산소가 분해되어 탄소와 결합하여 이산화탄소(CO2)가 되어 날아가고 철(Fe)이 생성된다. 이때 용광로는 환원 반응이 잘 일어나게 탄소의 농도를 매우 높게 하므로 생성된 철에는 탄소가 많이 포함된 선철(銑鐵, pig iron, 탄소 함유량 1.7% ~ 7%)이 최종적으로 만들어 지게 되는 것이다.
제강소(製鋼所, Steel Works)에서는 탄소가 많이 포함된 선철(銑鐵, pig iron, 탄소 함유량 1.7% ~ 7%)을 탄소가 부족한 용광로에서 녹이면 선철에 포함되어 있던 탄소(C)가 밖에서 불어 넣은 공기 중의 산소(O2)와 결합하여 이산화탄소(CO2)가 되어 떨어져 나감으로 강철(鋼鐵, steel, 탄소 함유량 0.035% ~ 1.7%)이나 연철(鍊鐵, wrought iron, 탄소 함유량 0% ~ 0.2%)을 생산할 수 있다.
고대와 중세 초기의 제철소에서는 철광석을 충분히 녹일 만한 높은 온도를 낼 수가 없어 약 900℃ 정도의 괴철로(塊鐵爐, 수로 竪爐, Bloomery, 진흙이나 벽돌을 쌓아 만든 2미터 이하의 작은 로)에 숯과 석회와 철광석을 넣고 자연흡기식 가열하면 철광석이 완전히 녹지 않아 스펀지(sponge) 형태의 괴철(塊鐵, Bloom)이 생산된다.
생산된 괴철(塊鐵, Bloom)은 철광석에서 나오는 광재(鑛滓, 슬래그 slag, 찌꺼기)가 분리되지 않고 붙어 있었다. 그래서 불에 벌겋게 달군 반용융 형태의 괴철을 몇 번이고 두둘기는 단련(鍛鍊, temper)을 거듭하여 기공을 눌러서 도로 접합시키고 광재를 짜내어야 철로 이용할 수 있었다. 이렇게 단련된 철을 연철(鍊鐵, wrought iron)이라 했으며 청동보다는 강하지만 현대의 무쇠나 강철보다는 물럿다.
고대와 중세 초기에 사용한 철은 연철(鍊鐵, wrought iron)이었다.
내화벽을 10 ~ 25미터로 높게 쌓아 원통형으로 만든 고로(高爐, blast furnace)는 중국에서는 1세기, 유럽에서는 14세기에 독일의 지겔란트 지방에서 개발되었으며 15세기 후반 왈 로니아(Wallonia, 벨기에) 지역에서 퍼져나가 1491년 영국에 도입되었다.
고로는 꼭대기에 철광석, 석회석, 숯을 넣고 아래쪽에서 열풍으로 연소시켜 불순물 함량이 낮은 질 좋은 선철을 대량 생산하였다.
클레멘트 클라크(Sir Clement Clerke 1st Bt, 1632 ~ 1693, 영국 기업가)와 그의 아들 탈보트(Talbot Clerke, 1663 ~ 1708)는 1678년 주철을 숯이나 석탄과 닿지 않고 용해시키는 구조로 된 반사로(反射爐, Reverberatory furnace, cupola 큐폴라, 용선로 熔銑爐, 노의 내부 또는 상부 벽체로 화염을 분사하면 로내부의 내화물에 열이 축적되고, 축열된 로에서 발생한 복사열(반사열)이 철을 용해함, 중세시대 개발)를 건설하여 납과구리를 제련하고 주조를 목적으로 괴철을 다시 녹이는 데 이용하였다.
반사로는 연료와 재료가 직접 닿지 않으므로 금속에 불순물이 섞이지 않는 장점이 있으며 영국에서 반사로를 이용함으로서 연철 생산량이 급증하여 산업혁명으로 증가한 철 수요를 모두 공급할 수 있었다.
그런데 철광석을 제철하는 제철소에서는 목탄을 사용함에 따라 너무나 많은 나무가 사용되었으므로 나무가 부족하여 제철량을 증산할 수 없었다.
석탄은 일찍부터 여러 분야에서 연료로 사용되고 있었으나 제철소에서는 석탄에 인 등의 불순물이 많아 목탄 대신에 사용할 수 없었다.
그러던 중 1709년 에이브러햄 다비(Abraham Dar'by, 1678 ~ 1717, 영국)가 석탄을 코크스(cokes)로 만들어 제철소에서 목탄 대신에 철광석을 제철(철광석의 산화철을 열로 녹여 분리하고 탄소로 환원시킴)하는 데 사용하여 성공하였다.
1735년 그의 아들인 에이브러햄 다비 2세(Abraham Darby II, 1711 ~ 1763, 영국)는 코크스 제철법으로 연철을 생산할 수 있는 선철을 대량으로 생산하였다.
1740년대 영국의 시계 제작공이던 벤자민 헌츠먼(Benjamin Huntsman, 1704, ~ 1776, 영국, 시계 기술자, 도가니 제강법 발명)은 시계에 사용되는 스프링의 성능을 개선하기 위해 시계 스프링 재료로 사용되던 침탄강(blistersteel)보다 더 우수한 철강재를 생산하기 위해 ‘도가니 제강법(Crucible Process, 고대 인도에서 사용되었음)’을 개발했다.
도가니 제강법은 점토를 구워 만든 도가니로(crucible furnace)에 연철과 주철을 잘게 부수어 한 도가니로(crucible furnace)에 섞어 넣고 가열하여 용해하므로서 탄소량을 조절하여 강철을 생산한다.
강철 사용량이 많아짐에 따라 대량 생산이 어려운 도가니 제강법으로는 강철 수요를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현대의 용광로의 제철 과정에서 처음 생산되는 철이 선철(銑鐵, pig iron, 무쇠)이다. 선철(銑鐵, pig iron, 무쇠)은 탄소함량이 높아 제일 단단한 쇠이며 너무 강도가 높아 잘 부러진다. 선철(銑鐵, pig iron, 무쇠)을 산소가 많고 탄소가 적은 불 속에 넣어 철의 탄소함량을 낮추면 강철(鋼鐵, steel)이 되고 탄소함량을 더욱 낮추면 연철(鍊鐵, wrought iron)이 된다. 반대로 무른 철을 산소가 적고 탄소가 많은 불 속에 넣어 철의 탄소함량을 높이면 강도가 높은 철이 된다.
그리고 강철(鋼鐵, steel)이 강도가 가장 높은 철이 아니고 선철(銑鐵, pig iron, 무쇠)이 강도가 가장 높은 철이며 연철(鍊鐵, wrought iron)은 가장 무른(강도가 낮은) 쇠이다.
이때 영국은 다른 나라와는 달리 1822년 소금세를 폐지하였다. 많은 물품을 생산하는데 화학물질이 필요하였고 화학물질의 생산에는 소금이 사용되었다. 이에 자본가들의 압력으로 소금세를 폐지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식민지인 인도에서는 1930년 소금 법을 제정하여 소금의 생산과 판매를 독점하는 소금 전매제를 실시하고 소금에 고율의 세금을 부과하여 불만을 샀다.
강철의 대량생산을 가능하게 한 것은 영국의 헨리 베서머(Sir Henry Bessemer, FRS, 1813 ~ 1898, 기술자, 발명가)였다.
베서머법(Bessemer process)은 녹은 선철에 공기를 불어 넣어 산화 환원 반응을 일으켜철에서 불순물을 제거하는 것으로 선철에서 강철을 대량 생산하는 세계 최초의 저렴한 강철 제법이다. 1855년에 헨리 베서머가 특허를 취득했으며 윌리엄 켈리도 1851년 같은 제강법을 발견하였다.
강철 제품의 강도를 높이기 위해 강철 표면에 고탄소의 합금층을 만드는 침탄(浸炭, Carburizing)이란 탄화 처리를 하였다.
초기의 침탄은 처리할 강철 주위에 숯을 직접 도포하여 가열하고 단조(鍛造, Forging, 두들기고 눌림)하여 강철의 표면에 탄소를 침투시키는 방식을 사용하였다.
수로(竪爐, 괴철로 塊鐵爐, Bloomery)는 노(爐)의 높이가 2m이하로 낮고 온도도 약 900℃ 로 낮아 반용융 상태의 괴철(塊鐵, Bloom)이 생산되었지만 고로(高爐, Shaft Furnaces)는 노(爐)의 높이가 10 ~ 25m로 높고 온도도 1,500℃로 높아 용융 상태의 선철이 생산된다. 보통 고로를 용광로(鎔鑛爐, Blast Furnace)라 하며 수로(竪爐), 평로(平爐) 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노는 고로(高爐)이다.
수로(竪爐, 괴철로 塊鐵爐, Bloomery)와는 달리 금속을 용해하는 노(爐)를 총칭하여 융해로(融解爐, 용융로 溶融爐, melting furnace)라 하며 용해로의 종류에는 큐폴라(cupola, 용선로 鎔銑爐, 선철 주물을 만들기 위하여 선철을 용해하는 반사로, 강제 원통의 내벽에 내화 벽돌을 붙여(lining) 이 속에 원료를 넣어 융해하는 노로 역사가 깊다), 도가니로, 반사로(反射爐), 평로(平爐, open-hearth furnace, 제강용 반사로), 전로(轉爐, 노 본체를 회전하여 용강(溶鋼)을 흘려내는 용도의 노), 전기로(電氣爐, Electric Furnace) 등이 있다.
이렇게 증산된 철로 기계들을 생산하면서 새로운 제품이 발명되고 생산된 제품이 편리하여 많이 팔림에 따라 대량 생산되어 값이 싸지는 등 모든 산업이 발전되는 산업혁명이 일어났던 것이다.
라. 동양문화의 유입 및 중국과의 아편전쟁(阿片戰爭, Opium War)
포르투갈은 1513년 호르헤 알바레스(Jorge Alvares,? ~ 1521, 탐험가)가 중국 광둥을 탐험했고 1537년에 마카오에 진출했다. 그 후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등이 중국과 교역을 시작했다.
이때에 중국은 세계에서 제일 부강한 국가였다.
서구의 상선이 밀려와도 중앙 정부는 나서지 않았고 지방 정부가 상대하여 일부만 개방했다.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 등은 중국의 마카오, 광저우 등에서만 무역을 할 수 있도록 허가를 받았으며 이들 항구를 통해 중국의 비단(緋緞, silk), 도자기(陶瓷器, porcelain), 차(茶, tea) 등을 말라카(Malacca)를 경유해서 고아(Gôa)로 이어지는 교역 통로로 빠른 범선을 이용하여 유럽으로 수송했다.
중국의 비단, 도자기, 차 등은 유럽 상류사회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유럽에서는 중국풍(中國風, Sinicism 영, sinisant 프)으로 꾸민 집에서 중국 비단으로 만든 옷을 입고 중국 차를 끓여서 중국 도자기로 마시는 것이 귀족들 사이에 유행하는 풍속이었다.
이에 자극받은 유럽 각국에서는 중국 물품을 모방하여 생산하기 시작했다.
프랑스의 리용(Lyon)에서는 중국의 비단을 모방하고 발전시켜 중국 비단을 뛰어넘어 세계적으로 유명한 견직물(絹織物, silk fabrics)의 생산지가 되었으며 고령토가 풍부한 독일의 마이센(Meissen)은 중국의 도자기를 모방하고 발전시켜 중국 도자기를 뛰어넘은 선두가 되었던 것이다.
16세기 대항해 시대에 중국의 차가 말라카와 인도를 거쳐 유럽에 전해졌다.
먼저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가 1610년 일본 녹차를 인도네시아의 자바를 거쳐 유럽에 수출하였다. 그러나 1650년 경부터는 영국이 중국차를 주로 공급하였다.
그 시절 차는 긴 항해를 하는 선원들의 필수품이었다. 선원들은 오랜 항해로 신선한 채소의 공급이 어려워 비타민C 결핍으로 괴혈병으로 고생하였는데 차(홍차에는 비타민C가 없음)로 해결하였던 것이다.
커피가 유럽에 먼저 수입되어 이용되고 있었는데 영국에서는 커피점을 남자만 이용하였고 여자와 아이에게 해롭다는 풍문이 퍼졌으며 커피의 공급이 어려워져 값이 올라감에 따라 차가 널리 이용되기 시작했다.
특히 영국에서 차문화가 널리 퍼진 것은 영국의 찰스 2세(Charles II, 1630 ~ 1685, 재위 1660 ~ 1685, 왕정복고)가 스페인에 합병된 포르투갈의 케서린 공주(Catherine, 카타리나, 1638 ~ 1705, 결혼지참금으로 인도 봄베이와 모로코의 탕헤르를 가져간 것으로 유명함)와 1661년에 결혼하였는데 영국으로 시집온 케서린 공주는 afternoon tea time을 열어 귀족사회에서 차문화를 확산시킨 것이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대부분의 차가 생산되었던 중국으로부터 수많은 양의 차를 수입하였다. 중국은 차의 중요성을 일찍부터 알고 차나무가 외국으로 반출되는 것을 차단했으므로 영국은 필요한 차를 중국으로부터 수입해야만 했다.
영국은 차 수요량이 점점 늘어나 어마 어마한 양의 차를 수입하였으므로 무역에 있어서 큰 적자를 보게 되었던 것이다. 영국은 그때 산업혁명으로 대량 생산하여 유럽에서 인기를 끌었던 모직, 면직 제품을 중국에 수출하고자 했으나 중국이 개항한 항구가 광동으로만 무역이 제한되어 있었고 이곳에서는 이들 제품의 중국 수요가 거의 없어 무역역조 현상이 심화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중국에 수출할ㅛ 품목을 찾던 중 아편으로 선정하고 1757년 플라시 전투 이후부터 인도의 뱅갈 지방(Bengal, 방글라데시와 그 남쪽)에서 양귀비(楊貴妃, opium-poppy)를 대량으로 재배하여 생산한 아편(阿片, opium, 양귀비 열매를 칼로 베어 스며 나온 유액을 약하게 가열, 건조한 것, 모르핀이 주성분으로 마취, 마약으로 이용됨)을 중국에 밀수출하는 삼각무역(영국은 인도에 면화 제품 수출, 인도는 중국에 아편을, 중국은 영국에 차 수출)을 하기 시작했다.
중국은 1839년 임칙서(林則徐, 欽差大臣 흠차대신, 황제를 대리하는 대신)를 보내어 아편 밀수를 본격적으로 단속하였다.
이에 불만을 가진 영국 빅토리아 여왕 Queen Alexandrina Victoria,재위 1837 ~ 1901)은 증기선에 대포와 뇌관식 소총으로 무장한 군을 동원하여 1841년 1차, 1857년에는 프랑스가 가세하여 2차 아편전쟁(阿片戰爭, Opium War)을 일으켜 난징조약(1842)과 베이징조약(1860)의 불평등 조약을 맺어 홍콩을 점령(1842년, 1860년, 1997년 반환)하고 배상금을 받았으며 청국을 개방시켰다.
영국, 프랑스 등 각국은 청국의 여러 곳을 조차하여 조계(租界, 조계지, 租界地, concessions in China)를 설정했다. 조계(租界, 조계지, 租界地, concessions in China)는 외국인이 행정 자치권이나 치외법권을 가지고 거주한 조차지(租借地, Leased territory)이다.
조차지(租借地, Leased territory)는 어떤 나라가 다른 나라에서 일시적으로 빌린 영토의 일부를 가리킨다.
영국의 홍콩이 아시아 무역의 중심이 되자 포르투갈은 아시아에서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 그동안 불법 거주하여 무역활동을 해오던 마카오(Macau, 澳門 아오먼)의 아오먼(澳門) 반도 전역과 타이파(Taipa)·콜로안(Coloane) 두 섬을 무력으로 점령하고, 1887년 청(淸)·포르투갈 조약을 맺어 식민지를 합법화하였으며 1999년에 중국에 반환하였다.
아편전쟁 전까지는 중국의 국내법이 국제법이었으나 아편전쟁으로 중국이 종이호랑이라는 것이 노출되어 세계 열강의 먹이가 되어 무너졌던 것이다.
영국은 플라시 전투 후 인도 동북부와 실론 등에 차를 재배하여 산업혁명으로 늘어난 차 수요를 충당했다. 홍차는 영국의 산업혁명(産業革命, Industrial Revolution)으로 노동시간이 늘어난 노동자의 각성제(覺醒劑, stimulant)로 쓰였던 것이다.
영국은 점차적으로 차문화가 노동자와 농민 등 하층민에 까지 일반화되어 하루에 5회 이상 티 타임(tea time, early tea(bed tea), breakfast tea, eleven tea, mid day tea, afternoon tea, evening tea, after dinner tea, night tea 등)을 가진다. 초기엔 차에는 과세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찻값이 높지 않아 임금이 낮은 노동자 등 하층민까지도 차를 애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영국은 7년 전쟁(1756 ~ 1763)에 이겼으나 재정이 어려워지자 식민지에 세금을 부과하였다.
1773년 영국의 식민지였던 북미에 밀무역으로 차를 공급하던 네덜란드 무역회사를 밀어내고 망해가는 동인도회사(The East India Company, 귀족들이 주주)를 통해 차를 공급하게 하자 미국의 차 밀무역 상인들이 영국의 정책에 불만을 품고 일으킨 보스턴 차 사건(Boston Tea Party, 1773)에 영국이 심하게 대처한 것이 미국 독립전쟁의 단초(端初)가 되었다. 미국에서도 초기에는 차가 유행하였으나 보스턴 차 사건(Boston Tea Party) 이래 영국에 대한 저항으로 차 불매 운동이 일어나고 더욱이 남미에서 커피가 싼값에 공급되었으므로 차 대신에 커피를 마시게 되었으며 커피에 물을 많이 타서 차와 비슷하게 마시게 되었는데 이것이 카페 아메리카노(Caffe Americano)이다. 이탈리아인들이 붙인 이름으로 아메리카노 커피(미국인처럼 마시는 커피)이다.
5. 러시아 제국
가. 러시아(Russia)의 성장
초기 러시아 역사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몇몇 도시 형태로 존재하던 러시아에 8세기경에 아시아 기원의 슬라브족(Slavs, 인도유럽어족의 슬라브어파)이 발칸반도에서 이주해 온 동슬라브족이 정착하으며 9세기경에는 북방의 노르만인 바이킹족(Viking, 협강3 vik에서 온자)이 이주해 왔는데 이들을 루스(Rus, рус, 배를 젓는 사람)라 하였다.
루스(Rus, рус)가 키예프 러시아(키예프 공국, Kievskaya, 키예프 루스, 882 ~ 1240)를 세웠다.
루스(Rus, рус)는 원래 키예프 러시아(키예프 공국, Kievskaya, 키예프 루스, 882 ~ 1240)의 민족, 지역, 국가를 가리켰다.
루스인(Rus, Русь)은 러시아, 우크라이나, 몰도바, 벨라루스인 등의 기원이며 루스(Rus, Русь)에서 러시아(Russia)라는 명칭이 유래하였다.
고대 국가들이 부국강병이 되는 방법은 농업과 전쟁이었다. 자국 농경지를 넓히거나 전쟁으로 영토를 넓히고 전쟁으로 적의 물자을 약탈하고 포로나 주민을 끌고와 노예로 이용하는 것이다. 농업의 기본인 노동력은 노예였으므로 전쟁으로 노예를 확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국가사업이었다. 그런데 전쟁을 자주 하면 농민들은 병졸로 출정함에 따라 사상자가 발생하고 자기집의 농사는 노동력 부족으로 어려워지는 등 많은 피해가 발생해 점점 어려워지는 반면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온 장군과 귀족들은 새로운 영지와 노예를 얻어 더욱 부유해졌다. 결국 농민층은 점차 몰락해갔고 봉건영주 세력은 점점 더 커졌던 것이다.
특히 슬라브족(Slavs)이 많이 살고 있던 발칸 반도에서는 9~10세기에 수없이 많은 전쟁이 일어났으며 적국의 슬라브족(Slavs)을 잡아다 노예로 삼거나 이슬람 국가에 노예로 팔았다. 바이킹(Viking, 협강 vik에서 온자)도 드네프르 강이나 볼가강 수로를 이용하여 내려와 일부는 정착하여 루스(Rus, рус, 배를 젓는 사람)가 되었고 일부는 콘스탄티노플이나 바그다드 등과 교역하면서 모피밖에 교역물품이 없어 강 주변과 넓은 지역에 걸쳐 슬라브계 주민을 납치하여 노예무역을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노예를 뜻하는 영어 Slave(슬레이브)의 어원은 중세 라틴어로 슬라브족(Slavs)을 뜻하는 Sclavus(슬라브)이다.
비잔틴 교회(동로마 정교회)의 키릴로스(Kyrillos, 827 ~ 869)와 그의 형 메토디오스(Methodios, 815 ~ 885)는 863년부터 슬라브족에 기독교 선교사업을 하였으며 이때에 선교를 위해 성경과 기도서 등에 글라골 문자(Glagolitic alphabet, 9세기부터 발칸반도를 중심으로 한 동유럽에서 사용된 문자)를 사용함으로써 키릴 문자(Cyrillic alphabet, 글라골 문자에서 기원한 문자)가 널리 보급되어 러시아 문화와 문학 발전의 초석이 되었다.
988년 키예프 공국(公國, 공작 公爵이 다스리는 국가)의 블라디미르 1세(Vladimir I, Grand prince, Vladimir Sviatoslavich, 블라디미르 스뱌토슬라비치, 재위 978 ~ 1015)는 천한 출생 신분을 상승시키기 위해 비잔틴 제국의 황제 바실리 2세의 여동생과 결혼하면서 그리스 정교를 국교로 정하고 서유럽의 국가들과 동맹을 맺으며 최초의 법전을 만들어 러시아의 왕족 체제를 이루었으며 965년 코카서스 지역의 하자르 칸국(Hazar Khanate, 카자르 칸국 Khazar Khanate, 650 ~ 969, 수도 아틸 Atil, 서돌궐 후예, 유대교)을 정복하는 등 영토를 넓혀 갔다.
러시아에는 블라디미르 공국(1147 ~ 1389), 모스크바(1147) 등 여러 공국이 키예프 러시아의 속국으로 세워졌다.
13세기 중엽 몽골족이 침입하여 키예프 러시아를 멸망시키고 킵차크한국(Kipchak Khanate, 1243 ∼ 1502)을 세워 러시아를 지배했다. 여러 공국 들은 킵차크한국에 흡수되거나 조공했다.
키예프 북동쪽 삼림지대에서 1283년 블라디미르 대공국의 다닐 알렉산드로비치(Daniil Alexandrovich, 1261 ~ 1303)가 모스크바 공국(Grand Duchy of Moscow, 1283 ~ 1547)을 세웠다.
작은 세력에 불과하던 모스크바 공국이 점차 주변의 여러 공국들을 병합해 갔으며, 모스크바 공국의 이반 3세(Ivan III, 재위 1462 ~ 1505)는 1480년 몽골족이 세운 킵차크한국을 멸망시켰다.
이반 3세는 비잔틴 제국의 계승자(1472년 비잔틴 제국의 마지막 황제 콘스탄틴 11세의 조카 소피야 팔레올로그와 두 번째 결혼)로 인정받으며 그로 인해 모스크바 크렘린은 황실과 러시아 정교의 중심이 되었다.
1521년 모스크바 대공국(大公國)의 바실리 3세(Vasily III, 재위 1505 ~ 1533)는 루스(Rus, Русь, 러시아인, 벨라루스인, 우크라이나인의 기원) 공국(公國, 공작 公爵이 다스리는 국가)들을 통일하였다.
이반 4세(Ivan Ⅳ, Ivan the terrible, 1530 ~ 1584, 대공위 1533 ~ 초기 섭정, 차르 1547 ~ 1584)는 부친인 바실리 3세(Vasily III, 재위 1505 ~ 1533)가 죽은 후 3세 때 대공에 올랐으며 모친인 엘레나 글린스카야(Elena Glinskaia, 1508 ~ 1533, 재위 1505 ~ 1533)가 섭정을 하였으나 귀족들에 의해 독살되었다.
우여곡절을 격은 이반 4세는 성년이 된 1547년 전 러시아의 차르(tsar, 황제, 군주)로 등극하여 러시아 차르국(루스 차르국, Русское царство, 루스코예 차르스트보, Tsardom of Russia, 1547 ~ 1721)을 성립시켰다.
1549년에는 서구식 신분제 의회인 ‘전국 회의(젬스키 소보르, zemsky sobor)’를 소집해 주요 사안을 논의하였으며 1550년 무렵에 러시아 최초의 상비군을 조직하고 포병과 공병을 포함한 소총 부대를 창설했다.
이반 4세는 1552년에 카잔한국(Kazan Khanate, 투르크 국가, 1445 ∼ 1552)의 크렘린을 점령하고 1556년에 아스트라 한국(The Astrakhan Khanate, 1446 ~ 1556)을 점령했으며 네바 강 유역의 요새들을 점령하여 발트 해로 나갈 수 있게 되었다.
1555년 영국과 무역 협정을 체결해 영국인들이 러시아 내에서 세금 납부 없이 자유로이 상업 활동을 할 수 있게 하는 등 경제와 대외관계에도 관심을 보였다.
1582년 이반 4세(1533 ~ 1547, 차르 tsar)는 시베리아 진출을 막고 있던 카잔한국 등 칸국을 점령한 후 카자흐의 수장이며 모험가인 예르마크(Yermak Timofeyevich, 1532, 1542? ~ 1584)를 대장으로 하는 탐험대를 시베리아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집권 후반기에는 폭군이었다.
이반 4세의 장남 디미트리는 일찍이 유모의 실수로 익사했고 후계자인 바실리 왕자를 이반 4세가 지팡이로 때려죽여 대가 끊겼다.
뒤를 이은 이반 4세의 동생 표도르 1세(Fyodor I Ivanovich, 재위 1584 ~ 1598)가 1598년 후사 없이 사망하여 류리크 왕조가 끝났다.
표도르 1세의 처남인 보리스 고두노프(Boris Godunov, 재위 1598 ~ 1605)가 표도르 1세의 뒤를 이어 즉위했다.
그런데 1604년 10월 가짜 드미트리가 나타나 보리스 고두노프르를 반대하는 귀족과 폴란드와 야합하여 폴란드군과 카자크 군 등으로 구성된 1만 5,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러시아로 쳐들어와 표도르 2세(재위 1605년 4월 ~ 1605년 6월, 보리스 고두노프의 아들)에 이어 가짜 드미트리 1세(1605 ~ 1606)로 등극했다.
1606년 바실리 4세(Vasily IV Shuysky, 재위 1606 ~ 1610)가 가짜 드미트리 1세를 축출하고 귀족들의 추대로 차르에 즉위하였으나 1609년 9월 폴란드 왕 지그문트 3세 바자(Zygmunt III Waza, 재위 1587 ~ 1632)가 러시아를 침공하여 폴란드 왕 블라디슬라프 4세(Vladislav IV, 재위 1610 ~ 1613)가 즉위하였다.
1613년 모스크바에서 폴란드 군대를 축출한 후 러시아의 국민 대의기관인 전국 회의(젬스키 소보르, zemsky sobor)는 미하일 1세(Mikhail I Fyodorovich, 재위 1613 ∼ 1645)를 차르로 선출하였으며 이로서 로마노프 왕조가 시작되었다.
러시아 정교회는 1453년 비잔틴 제국이 멸망한 후 1472년 이반 3세(Ivan III, 대공 재위 1462 ~ 1505)가 로마제국을 이어받았다고 내세웠으며 1589년에 모스크바의 수도 대주교가 총주교로 승격하면서 러시아 정교회는 그리스 정교회의 적자임을 주장하였다.
러시아 차르국(루스 차르국, Русское царство, 루스코예 차르스트보, Tsardom of Russia, 1547 ~ 1721)의 알렉세이 1세(Aleksei I, 마르틴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 재위 1645 ~ 1676) 때인 1656년에 일어난 러시아-스웨덴 전쟁에 패하여 맺은 카디스 조약(treaty of Kardis)으로 잉그리아, 에스토니아, 프리오제르스크 등의 발트해 연안 지방을 스웨덴 제국에 넘겨주었다.
차르 알렉세이 1세(재위 1645 ~ 1676)의 장남인 표도르 3세(Fyodor III, 1661 ~ 1682, 재위 1676 ~ 1682)가 1682년 후사 없이 죽었으며 왕위 계승 대상자는 이복형제인 이반 5세 (Ivan V, 1666 ~ 1696, 재위 1682 ~ 1696)와 표트르 대제(Peter the Great, 표트르 1세, pyotr I, 재위 차르 대공후 1682 ~ 1721, Emperor 1721 ~ 1725) 밖에 없었다. 이반 5세는 육체적, 정신적으로 병약했으므로 표트르 대제가 추대되어 차르에 등극하였으며 표트르 대제의 어머니가 실권을 행사했다.
그런데 이복 누이인 소피아 공주(Sofia Alekseyevna, 소피아 알렉산세예브나, 1657 ~ 1704, 제위 1682 ~ 1689, 이반 5세의 친 누나, 섭정왕)가 1682년 정변을 일으켜 이반 5세(Ivan V, 재위 1682 ~ 1696)와 표트르 대제(Peter the Great, 표트르 1세, pyotr I, 재위 차르 대공후 1682 ~ 1721, Emperor 1721 ~ 1725)를 공동 차르에 등극시키고 섭정을 하였다.
소피아 공주는 군대 조직을 더욱 발전시키고 1686년 폴란드와의 평화 조약, 중국과의 네르친스크 조약(1689), 1687년과 1689년에 크림반도의 크림 칸국(Criman Khavate)에 원정하였다.
알렉세이 1세의 14번째 아들이었던 표트르 대제(Peter the Great, 표트르 1세, pyotr I, 재위 차르 대공후 1682 ~ 1721, Emperor 1721 ~ 1725)는 소피아 공주에 쫓겨 어머니와 함께 궁 밖에서 살았다. 그때 인접한 독일인 촌을 방문하곤 하여 서구의 선진 문물을 접하고 동경했다.
1689년 소피아 공주에 불만이었던 귀족들에 의해 정변이 일어나 표트르 1세가 실권을 잡고 이반 5세와 공동 차르를 유지하였으며 소피아 공주를 수도원에 유폐시켰다.
서구의 기술을 받아들이기를 원했던 표트르 대제(Peter the Great, 표트르 1세, pyotr I, 재위 차르 대공후 1682 ~ 1721, Emperor 1721 ~ 1725)는 서유럽 여러 나라에 사절단을 파견하였고, 1697년에는 선진 문물을 직접 체험하기 위해 250명으로 구성된 사절단을 조직해 어릴때 궁밖으로 쫓겨나 살았던 곳에 인접한 독일인 촌에서 사귄 여러 나라 사람들의 안내을 받아 알게 모르게 서유럽으로 들어가 17개월 동안 선진 문물을 접하고 기술을 습득하여 돌아와 수백 명의 선박 건조 전문가를 채용하고 선진 설비들을 구입하여 선박, 무기 등을 생산하여 강한 군대를 만들고 산업을 발전 켰던 것이다.
서구의 문물에 뒤졌던 러시아는 비로소 강국의 기초를 마련했던 것이다.
그리고 표트르 1세(표트르 대제)는 귀족이나 천민이나 신분에 관계없이 능력이 있으면 등용하였다.
러시아는 아마, 대마, 피치(pitch), 피혁, 목재 같은 생산물이 많아 이들을 수출하기 위해 큰 배를 만들었으나 부동항이 없어 무역을 원활하게 할 수 없게 되자 부동항을 얻기 위해 흑해로 진출하려고 노력했으나 강력한 오스만 터키를 대적할 수 없어 스웨덴 제국에 빼앗겼던 발트해의 상트페테르부르크(Saint Petersburg)를 다시 찾아 진출하기로 했다. 그러나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지배하는 스웨덴 제국은 강력하였다.
그러던 중 스웨덴 제국의 칼 12세(Karl XII, 1682 ~ 1718, 재위 1697 ~ 1718)가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으며 표트르 1세는 이 기회에 전쟁을 일으키면 쉽게 이길 수 있을 것으로 얕잡아 보고 그동안 스웨덴에게 영토를 빼앗겼던 덴마크와 폴란드와 연맹을 맺어 영토를 찾기 위해 1700년 스웨덴과 대북방 전쟁(Great Northern War, 1700 ~ 1721)을 시작했으나 계속 패하였다. 그래서 1708년 러시아군은 후퇴하여 칼 12세(Karl XII, 재위 1697 ~ 1718)가 이끄는 스웨덴군을 우크라이나 깊숙이 끌어들여서 다가온 추운 겨울에 얼어 죽게 하여 전쟁에 이겼으며 1709년 폴타바 전투(Slaget vid Poltava, 동우크라이나)에서 대세를 결정지었다.
표트르 1세(표트르 대제)는 이렇게 10여 년간의 전투로 쟁취한 상트페테르부르크를 항구로 사용하는 외에 수많은 공장과 제철소를 짓는 등으로 개발하여 수도(1713 ~ 1918)를 모스크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Saint Petersburg)로 이전하였다.
대북방 전쟁(Great Northern War, 1700 ~ 1721)이 끝난 1721년 뉘스타드 조약(Treaty of Nystad)에 따라 러시아 제국(Россійская Имперія, 로시스카야 임페리야, Russian Empire, 1721 ~1917)은 스웨덴 제국으로부터 에스토니아, 리보니아, 잉그리아, 일부의 카렐리야를 획득했다.
1721년 표트르 대제(Peter the Great, 표트르 1세, pyotr I, 재위 차르 대공후 1682 ~ 1721, Emperor 1721 ~ 1725)는 국호를 서유럽식으로 러시아 제국(Россійская Имперія, 로시스카야 임페리야, Russian Empire, 1721 ~1917)이라 하고 황제칭호 차르(tsar)를 전러시아의 황제(Император Всероссийский, 임페라토르 프세로시스키, Emperor of all Russias)라 하였다.
나. 러시아의 영토 확장
1) 시베리아 개척
러시아의 영토확장은 미개발지역으로 남아있던 시베리아(Siberia) 일원에 대한 동진이었다.
러시아는 담비(martens), 비버(beavers), 늑대(wolves), 여우(foxes), 다람쥐(squirrels), 산토끼(hares) 등의 모피(毛皮, fur)를 유럽에 수출하여 많은 이익을 얻었으나 점점 모피가 고갈되어 갔다.
모피가 부족하고 값이 비싸 러시아 왕실에서도 사용량을 제한하였다.
그래서 모피를 얻기 위하여 모피가 많이 생산되는 시베리아로 동진하게 되었으며 17 ~ 18세기에는 국가 재정의 1/3을 시베리아에서 생산되는 모피 수출로 충당했다.
17세기 전후의 지구는 소빙하기(小氷河期, Little Ice Age)로 겨울은 길고 매우 추웠으며 유럽의 여러 왕실과 귀족은 물론이고 대항해로 생겨난 신흥 부르조아(부르주아, bourgeois, 자본가 계급)들이 모피(毛皮, fur)에 열광하였으므로 모피의 수요가 많아지고 값이 천정부지로 높았졌던 것이다.
모피(毛皮, fur)는 신분과 부의 상징이 되었고 여우 모피 한장 값이 말 5필, 소 10마리 값에 해당할 만큼 높았던 것이다.
프랑스가 캐나다에 진출한 것도 모피(毛皮, fur)를 얻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러시아에서 처음에는 해달(海獺, 바다족제비, sea otter)의 모피가 수출의 인기품목이었으나 고갈이 되었고, 흰담비(stoat, marten)의 모피가 가장 고가품이었으나 수량이 적었으며 검은담비(sable, marten)가 가장 인기가 있었으며 그 외에 물개(seals), 스라소니(lynx), 검은여우(fox) 등의 모피가 수출되었다.
그래서 유라시아 횡단에 비단길(Silk Road)과 초원길(Steppe Route, 중국의만리 장성이북, 몽골고원에서 알타이 산맥과 중가리아초원을 거쳐 카스피 해에 이르는 길) 외에 시베리아에 모피길(fur road)이 생겼으며 그 후에 모피길은 우편로로 쓰이다가 그 자리에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놓이게 되었다.
19세기에 북미에서 유럽으로 모피가 공급되자 모피 값은 내려가고 알래스카의 모피는 고갈되어 갔다. 알래스카에서의 모피 수집은 별 이득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알래스카의 개척 속도는 느려져 더 이상의 영토확장이 필요 없게 되었으며 나아가 알래스카를 미국에 매각하였던 것이다.
시베리아(Siberia)는 러시아어로 시비르(Sibir)라 하며 오랜 기간 동안 예네츠인, 네네츠인, 훈족과 같은 유목민의 땅이었다. 시비르의 칸은 현대의 토볼스크(Tobols) 근처에 자리 잡고 있었으며, 630년 아바르족의 가한(可汗, qaghan, Khan)이었던 쿠브라트(Khan Kubrat)가 널리 알려져 있다. 13세기 몽골의 침략 이후 시비르 한국(Sibir Khanate)이 세워졌다.
16세기 초에 이르러 러시아의 이반 4세(1533 ~ 1547, 차르 tsar)는 시베리아 진출로에 있는 카잔(Kazan) 등 칸국을 총격으로 강점하였다.
그리고 이반 4세(1533 ~ 1547, 차르 tsar)는 시베리아 원정을 위해 강력하고 부유한 스트로가노프 가문(Stroganov merchant family)을 앞세웠다.
스트로가노프 가문(Stroganov merchant family)은 위험한 지역인 시베리아를 원정하기 위해 용감한 코사크(Cossacks, 카자크 Kazak, 우크라이나 일대와 러시아 서남부 지역에서 준군사적인 자치 공동체를 이루며 살았던 동슬라브어를 사용하는 민족집단)를 모집하고 대장으로 예르마크(Yermak Timofeyevich, 1532, 1542? ~ 1584)를 뽑았다.
1582년 코사크(Cossacks, 카자크 Kazak)의 수장이며 모험가인 예르마크(Yermak Timofeyevich, 1532, 1542? ~ 1584)를 대장으로 하는 군대와 많은 모피 상인들로 조직된 탐험대를 동방에 파견하였다.
수석식(燧石式, 부싯돌에 쇠로 마찰시켜 점화, 燧 부싯돌 수) 머스켓 소총으로 무장한 540명의 코사크 병력을 동반한 탐험대는 배를 타고 여러 강줄기를 거쳐 동진하였으며 오비(Ob’)강을 넘어 이르티시(Irtysh) 강 유역에 자리한 시비르(Sibir) 칸국을 공략하였다. 그 후부터 우랄 산맥 동쪽의 광활한 초원지대를 일괄해 ‘시베리아’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이어서 1587년 코사크(Cossacks, 카자크 Kazak)들이 시비르 부근에 토볼스크(Tobolsk) 시를 건설하고, 1619년에는 예니세이스크(Yeniseisk) 강까지, 1629년에는 레나 강까지 진출했다.
1625년 벨리키우스튜크(Veliky Ustyug) 지역 출신의 하바로프(Yerofey Khabarov, 1603 ~ 1671, 탐험가)는 토볼스크(Tobolsk)에서 만가제야(Mangazeya)까지 탐사했으며, 1637년에 야쿠츠크를 건설하고, 1638년에는 태평양의 오호츠크 해안까지 도달하였으며 1643년에는 몽골계의 부랴트족(族)을 정복하고 바이칼호(湖)에 도착하였다.
1643년, 바실리 포야르코프(Vassili Poyarkov, 1597 ~ 1668)가 이끄는 코사크 기병대는 오호츠크 해를 탐사했으며, 다시 남쪽으로 방향을 돌려 아무르강(黑龍江, 헤이룽강, 흑룡강) 유역과 사할린 섬을 탐사했다.
1649년 예로페이 하바로프(Yerofey Khabarov, 1603~1671, 탐험가, 탐험한 시베리아에서 많은 돈을 번 스트로가노프 가문의 경영자)는 모피수집과 약탈 등으로 큰 사업이 된다고 생각하고 자기 돈으로 70명의 탐험대를 조직하여 아무르강(헤이룽강) 지역 등을 탐험하고는 러시아와 중국 청나라 간의 국경지대인 아무르강(黑龍江, 헤이룽강, 흑룡강) 일대까지 영토를 확장하였다.
1651년 러시아인들은 우수리강 하구를 지나 송화강(松花江) 방면으로 내려왔고, 1654년에는 네르친스크, 1665년에는 알바지노 등이 건설되었다.
청나라는 이들을 대항하였으나 군사들의 무기 수준이 낙후하여 전쟁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 조선에 총수병을 요청하였다.
이에 1654년(효종)과 1658년 두 차례 나선정벌(羅禪征伐, 나선 - 러시아)이 일어났다.
그 후 차르 알렉세이의 장남인 표도르 3세(Fyodor III, 1661 ~ 1682, 재위 1676 ~ 1682)가 1682년 후사 없이 죽었으며 왕위 계승 대상자는 이복형제인 이반 5세 I(van V, 1666 ~ 1696, 재위 1682 ~ 1696)와 표트르 대제(표트르 1세, Pyotr I, Peter the Great, 표트르 대제, 1672 ~ 1725, 차르이며 대공후 1682 ~ 1721, 황제 1721 ~ 1725) 밖에 없었다. 이반 5세는 육체적, 정신적으로 병약했으므로 표트르 대제가 추대되어 차르에 등극하였다. 그런데 그의 이복 누이인 소피아 공주(蘇菲亞, Sofia Alekseyevna, 소피아 알렉산세예브나, 1657 ~ 1704, 제위 1682 ~ 1689)가 정변을 일으켜 이반 5세와 표트르 대제를 공동 차르에 등극시키고 영민하지 못한 이반 5세와 10살로 어린 표트르 1세(Pyotr I, Peter the Great, 표트르 대제, 1672 ~ 1725, 차르이며 대공후 1682 ~ 1721, 황제 1721 ~ 1725)를 대신하여 섭정왕이 되어 전권을 행사했다.
소피아 공주가 1684년에 아무르강 지역으로 군대를 출동시켰으나 친정에 들어간 청의 강희제(康熙帝, 1654 ~ 1722, 재위 1661 ∼ 1722) 군대가 1685년부터 대반격함에 따라 러시아군은 1689년 아무르강(흑룡강) 이북으로 모두 쫓겨났다. 1686년 청(중국) 이 알바지노(雅克薩, 아극살)의 성을 대포로 공격하여 거의 전멸시켰고 그 뒤 전투가 승리 없이 지속되었다.
1682년에 차르(황제)로 즉위한 로마노프 조의 표트르 대제(Peter the Great, Pyotr I, 표트르 1세, 재위 1682 ~ 1725)의 섭정인 소피아 공주는 시베리아 연해주 침략에 강한 의지를 품었으나 강력한 청군(淸軍)의 제지로 아무르강(黑龍江, 헤이룽강, 흑룡강) 부근에서 멈추었던 것이다.
청나라는 위구르의 반란으로 러시아가 위구르와 연합할까 두려웠고 러시아는 스웨덴과 대치 중이었으므로 파견할 군대의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두 나라는 1689년 네르친스크(Nerchinsk) 조약을 체결하여 국경선 충돌을 해소하고 무역을 위하여 1727년 캬흐타(Kyakhta) 조약을 맺었다.
러시아의 시베리아 정복의 목적은 청과 교역하기 위한 통로를 열고 모피 획득에 있었으므로 많은 러시아 상인들이 군대를 따라 들어왔다. 러시아군은 성을 쌓아 주둔하고 그 부근에 상인들이 모여 도시를 건설하였다.
예전에는 몽골, 남부 시베리아, 중국 화베이(華北), 흑해 북안(黑海北岸)을 잇는 교통로를 초원로(草原路, Steppe Route)라 하여 유목 민족의 이동뿐만 아니라 동서방의 문화의 교류가 있었다.
러시아 제국이 시베리아를 개척하여 시베리아 초원로(草原路, Steppe Route)를 다시 열었던 것이다.
러시아는 모피를 수출하고 중국으로부터 비단, 차, 향신료 등을 수입하였다.
그 후에 시베리아에는 농민들이 일부 정착하여 농장을 경영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베리아는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는 땅이었으며 러시아 제국의 유형지였다.
2) 러시아의 유럽 영토 확장
모스크바 대공국(1283 ~ 1547)을 기반으로 러시아 차르 국(루스 차르 국, 1547 ~ 1721)을 거쳐 1721년 형성된 러시아 제국(1721~ 1917)은 표트르 대제 시절에 급격하게 서유럽화를 진행하였으며 강한 군대를 양성했다.
표트르 대제는 겨울에 얼지 않는 부동 항구를 얻기 위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덴마크와 연합하여 대북방 전쟁을 일으켜 스웨덴 제국을 공격하여 얼지 않는 발트해의 상트페테르부르크(Saint Petersburg) 항구를 확보하고 수도(1713 ~ 1918)를 모스크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전했다.
1722년, 표트르 대제(표트르 1세)는 페르시아의 사파비 왕조가 통치하는 캅카스(Kavkaz)와 카스피 해(Caspian Sea)로 진격하였다.
러시아 제국은 우크라이나와 발트 지방까지를 아우르는 유럽 러시아와 아시아의 시베리아 지방을 지배했다.
예카테리나 2세(Ekaterina II, 재위 1762 ~ 1796)는 제1차 러시아-튀르크 전쟁(Russo Turkish War,1768 ~ 1774)과 제2차 튀르크 전쟁(Russo Turkish War,1787 ~ 1792)의 승리로 러시아의 남부 국경을 흑해까지 확장했다.
그리고 이 시기의 폴란드 분할을 통해 러시아 서북부 지역의 국경이 확장되었다.
나풀 레옹 1세(Napoléon I)는 영국, 러시아, 스웨덴, 오스만 제국 등 일부를 제외한 대륙의 대부분을 점령하여 합병하거나 종속국, 동맹국으로 만들었으나 영국 해군에 의해 해상이 점령되고 교역물자가 런던보다 풍부하지 못했다. 그래서 영국을 고립시키기 위하여 대륙 봉쇄령을 내렸다.
그러나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Aleksandr I, 재위 1801 ~ 1825)는 프랑스의 대륙 봉쇄령에 따르지 않았다. 이에 나풀 레옹 1세(Napoléon I)는 1812년 6월 네만강을 건너 러시아의 모스크바를 침략하였으나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는 모스크바를 비우고 결사 항전하였고 겨울이 다가오자 나풀 레옹 1세는 1812년 12월 퇴각하였다.
러시아군은 퇴각하는 프랑스군을 추격하면서 폴란드를 점령하였으며 프랑스에 항복했던 오스트리아와 프로센 군과 함께 파리까지 추격하여 나풀 레옹 1세를 퇴위시켰다.
러시아는 오랫동안 캅카스(Kavkaz)를 놓고 이란의 카자르 왕조(Qajar Dynasty, 1779 ∼ 1925)와 싸워왔는데 영국이 중재하여 굴리스탄 조약(1813년)을 맺어 캅카스(Kavkaz) 지역을 차지하였다. 1826년 이란의 카자르 왕조는 잃어버린 캅카스(Kavkaz)를 되찾기 위해 침공하였으나 러시아의 니콜라이 1세(Nikolai I, 재위 1825 ~ 1855)는 이들을 격퇴하고 더 많은 영토를 빼앗아 투르크만차이 조약(1828년)을 체결하여 강화하였다.
크림전쟁(Crimean War, 1853 ∼ 1856)은 러시아의 남진 정책에 대항하여 오스만 제국, 영국, 프랑스, 사르데냐 왕국(Regno di Sardegna, 이탈리아 왕국 전신) 연합군이 크림반도와 흑해를 둘러싸고 벌인 전쟁이다.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Napoleon III, Louis-Napoléon Bonaparte, 재위 1852 ~ 1870)가 국내 가톨릭의 인기를 얻으려고 오스만 제국에게 가톨릭교도에게도 예루살렘 성지(聖地)에서의 특권을 요구하자, 오스만 제국은 프랑스의 위협이 두렵기도 하고, 러시아의 과도한 관할권 행사가 못마땅하기도 해서 1852년에 이를 수락했다.
이에 오스만 제국 영내로의 남하 정책을 취하고 있던 러시아의 니콜라이 1세(Nikolai I, 재위1825 ~ 1855)가 예루살렘 성지(聖地)에 대한 그리스 정교도(正敎徒) 권리의 비호자임을 자처하며 1853년 오스만 제국의 지배하에 있던 몰다비아 공국(The principality of Moldavia), 왈라키아 공국(The Principality of Wallakia) 등에 침입하여 점령하자 오스만 제국이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1853년 나히모프 제독이 지휘하는 러시아 흑해함대가 소아시아(터키)의 시노페만(Sinop 灣)에서 오스만 제국의 함대를 전멸시키자, 강성해진 러시아의 남진을 저지하는 전략을 가진 영국, 프랑스, 사르데냐 왕국(Regno di Sardegna, 이탈리아 왕국 전신)은 오스만 제국을 지원하여 1854년 약 6만의 대군을 러시아 령인 크림반도에 상륙시켜 세바스토폴(Sevastopol)을 포위하였다.
열세였던 러시아함대는 세바스토폴만에 함정을 침몰시켜 항구를 폐쇄하고 11개월을 버티었으나 1855년 연합군에게 세바스토폴의 남쪽을 빼앗기자 북방으로 퇴각하였다.
1855년에 등극한 알렉산드르 2세(Aleksandr II, 재위 1855 ~ 1881)는 1856년 파리에서 강화조약을 체결하였다.
러시아는 몰다비아에 다뉴브하구(河口)와 베사라비아의 일부를 양도하였고, 흑해에 함대를 배치할 수 있는 권리를 잃었다. 흑해는 중립이 선언되어 양(兩)해협은 통상상(通商上)의 자유항행은 인정되었으나, 군함의 통과는 일체 금지되었다.
'광명의 천사(The Lady with the Lamp)’, '백의의 천사(a white robed angel)'로 불리는 플로렌스 나이팅게일(Florence Nightingale, 1820 ~ 1910, 영국)이 1854년부터 보스포루스 해협 동쪽 스쿠타리(위스퀴다르 Uskudar)의 야전병원에서 활동하였다.
3) 알래스카 편입과 양도
1725∼ 30년 표트르 1세(표트르 대제)의 명령에 따라 덴마크의 탐험가 비투스 조나센 베링(Vitus Jonassen Bering, 1681 ~ 1741)은 아시아와 아메리카 대륙이 붙어있는지 연속되었는지를 조사하기 위하여 탐험한 결과 1740년 두 대륙이 떨어졌음을 발견하고 베링 해협이라고 하였다.
1741년 베링은 캄차카 반도로 가서 코만도르스키 제도와 알류샨 열도, 알래스카를 탐험하였고 이들 지역은 러시아 제국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알래스카의 최초 정착지는 1784년 러시아 모피 사냥꾼이 코디액섬(Kodiak I.)에 있는 스리세이니츠베이에 건설했으며 러시아-아메리카 회사가 모피 무역을 독점하고 싯카(City and Borough of Sitka)를 건설하여 19세기 초까지 번영을 누렸다.
러시아는 태평양 해안을 따라 더 멀리 남부로 식량조달, 모피 수집 및 무역하기를 원하였다. 1812년 러시아인들은 북부 캘리포니아 해안에 로스 요새(Fort Ros, 모피 고갈 등으로 소용이 없어지자 1841년에 멕시코인에 팔고 철수)를 건설하였다(하와이까지 탐험하여 일시 주둔했었음).
1825년 러시아는 영국과 영국-러시아 협정을 맺어 캐나다와 국경(현재의 알래스카와 캐나나다 국경은 이를 바탕으로 국제사법재판소에 의해 조정되었음)을 확정했다.
러시아는 알래스카에 지사를 파견하여 통치하였으나 그 후 모피가 고갈되고 소득이 없어 방치하였다가 범죄자들의 소굴로 변해 치안에 문제가 되었다.
러시아는 크림전쟁(Crimean War, 1853 ∼ 1856)으로 재정이 궁핍해지고 적국이었던 영국의 식민지인 캐나다에 주둔한 영국군이 알래스카를 무력으로 점령할 것을 두려워한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2세(Aleksandr II, 1818 ~ 1881, 재위 1855 ~ 1881)는 친했던 미국에 매각하였다. 1867년 미국의 장관 윌리엄 H. 수어드(William H. Seward)와 조약을 맺어 720만 달러에 매각하였던 것이다.
미국은 알래스카를 구입함으로서 군사적으로 영국(캐나다)을 봉쇄할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그리고 이때 캘리포니아주로부터 북아메리카의 해안과 베링 해협을 가로지르며 모스크바와 유럽까지 연결하던 전신 망 공사가 러시아의 재정 궁핍으로 알래스카에서 중단되자 투자금에 대해 협상하던 중 매입하게 된 것이다.
미국은 이 전신망의 중요성을 인지하였다는 것이다.
4) 연해주 점령
1652년부터 1689년 사이에 러시아 차르국의 코사크가 아무르강 이북의 청나라 영토를 점유하려고 시도하자 이에 청나라의 대항으로 일어난 군사적 충돌인 청-러시아 국경 분쟁(Sino-Russian border conflicts)이 일어났다.
1651년 예로페이 하바로프(Yerofey Khabarov, 1603~1671, 탐험가, 탐험한 시베리아에서 많은 돈을 번 스트로가노프 가문의 경영자)가 지휘하는 코사크 부대는 청나라의 다우르족을 격파하고알바진의 다우르족 요새를 빼앗는 등 청군과의 공방전에서 여러번 승리하였으나 악날한 약탈 등으로 1653넌 해임되었으며 후임으로 오누프리 스테파노프(Onufriy Stepanov)가 임명되었다.
청나라는 이들에 대항했으나 수석식(燧石式, 쇠에 부싯돌 충격으로 점화) 머스켓 소총으로 무장한 코사크 병사들에 대항하여 활과 창으로 무장한 병사들이 대적하기엔 무기 수준이 낙후하여 전쟁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 조선에 총수병을 요청하였다.
조선에서는 1654년(효종)과 1658년 두 차례 나선정벌(羅禪征伐, 나선 - 러시아, Sino-Russian border conflicts)에 최정예 총수병을 파견하였으며 이들은 청군에 소속되어 용감히 싸웠다.
1차전은 100명이 파견되어 육상에서 전투를 벌여 전사자 없이 승리하였으며 2차에는 200명이 파견되어 아무르강(黑龍江, 헤이룽강, 흑룡강)에서 화전으로 승리하였으나 몇명이 전사하여하였다.
조선군은 화승총(심지에 불을 붙이면 타들어간 심지 불이 화약에 붙어 폭발)이고 러시아군은 격발로 발사되는 발사 횟수가 3배로 빠른 수석식(燧石式, 쇠에 부싯돌 충격으로 점화) 머스켓 소총이었으며 더욱이 조선군을 전선의 전면에 배치했으므로 조선군은 많은 피해를 입었다.
조선군은 노획한 러시아의 수석식 머스켓 소총을 가지고자 하였으나 청군은 조선군이 소총을 복제하여 강군이 되는 것을 염려하여 몰수하였다.
수적으로 우세한 청군이 전투에서 승리함에 따라 러시아의 코사크 병사들은 네르친스크 이북으로 물러갔다.
표트르 1세(Pyotr I, 표트르 대제, 1672 ~ 1725)가 즉위하자 그의 이복누이이자 섭정왕이었던 소피아 공주(蘇菲亞, Sofia Alekseyevna, 소피아 알렉산세예브나, 1657 ~ 1704, 제위 1682 ~ 1689)가 1684년 출병시켰으나 친정에 들어간 강희제(康熙帝, 1654 ~ 1722, 재위 1661∼1722)의 청나라 군대가 1685년부터 대반격함에 따라 1689년 아무르강(흑룡강) 이북으로 모두 쫓겨났다. 러시아는 스웨덴과 대치 중이었으므로 청나라에 파견할 군대의 여유가 없었다. 중국(청나라)은 1686년 대포로 알바진의 코사크 요새인 알바지노(雅克薩, 아극살)의 성을 대포로 공격하여 거의 전멸시켰으나 반란을 일으킨 위구르와 러시아가 연합하여 공격할까 두려워 1689년 러시아와 네르친스크(Nerchinsk)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으로 적대적 행위는 끝나고 청나라는 아무르강(흑룡강) 및 오소리강(烏蘇里江) 유역의 광활한 지역을 중국의 영토로 확보했으며 러시아는 모피를 수출하고 차를 수입하는 등 중국과 무역로를 열었다.
그러나 러시아는 청이 아편전쟁으로 세력이 약화되자 알렉산드르 2세(재위 1855 ~ 1881) 때인 1856년에 블라디보스토크(해삼위)를 무단 점령하여 부동항으로 개발하고 1859년에서 1860년에 걸쳐 재빨리 러시아계 인구로 채워 넣었다.
블라디보스토크는 본디 청나라 길림부도통(吉林副都統)에 속해 있었으며 하이선 와이(海參崴, 해삼위)로 불렸다.
이에 중국과 러시아는 영토분쟁이 일어났다.
이때 아편전쟁(阿片戰爭,Opium Wars, 1840~1842 1856~1860)이 일어나자 러시아는 청과 영국, 프앙스 사이의 중재자로 나섰다.
1860년 러시아는 중재자의 대가로 중국과 불평등한 ‘베이징조약(아편전쟁에 참전한 영국과 프랑스, 중재한 러시아와 각각 맺은 조약)’을 맺었으며 러시아는 이 조약으로 블라디보스토크를 포함한 우수리(Ussuri) 강 이동 지역의 약 40만 km2의 넓은 땅을 총 한방 쏘지 않고 획득했다.
5) 시베리아 개발
러시아는 시베리아 초원로(草原路)를 따라 서(西) 시베리아 지방의 첼랴빈스크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를 연결하는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1891년, 알렉산드르 3세(Alexander III, 재위 1881 ~ 1894) 때 시작하여 1916년, 니콜라이 2세(Nicholas II, 재위 1894 ~ 1917) 때 개통하였다.
이 철도는 극동지방의 군사적 필요성의 증대, 시베리아에 주민 이주, 중국과의 무역 등을 목적으로 계획되었다.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개통으로 시베리아의 자원을 사용하기 위한 대규모 개발이 시작되어 크게 변화하게 되었다.
6. 스웨덴 제국(Swedish Empire, stormaktstiden, 1611 ~ 1721)
북유럽의 스칸드나비아 반도와 발트해 주위에 있는 노르웨이, 스웨덴 및 덴마크에는 노르만(Norman)의 일족인 노르드인(Norse, 바이킹 Viking)이 살고 있었다.
중세 초기(AD 800 ~ 1050년)에 노르웨이 지역의 노르드 인들은 주로 브리튼 제도 북부와 대서양 방향으로 진출하여 침략하거나 무역을 하였으며 스칸디나비아 중부와 덴마크 지역의 노르드 인들은 서유럽의 영국, 프랑스북부, 스페인 등뿐만 아니라 동유럽의 강을 따라 수로를 개척하여 유럽과 아시아 사에의 중계 무역으로 부를 쌓았다.
이때에 노르드인( 바이킹)들은
아시아로부터 은, 보석 등을 수입하고, 모피, 꿀, 목재, 무기류 등 수출하였으며 교역품이 부족하여 흑해연안 지역의 슬라브족(Slavs)을 납취하여 동로마나 이슬람지역에 팔았다. 그래서 영어 단어의 노예(奴隷)가 이것에 기원하여 슬레이브(Slave)라 한다.
노르웨이는 872년 하랄왕(Harald Fairhair, 850 ~ 932)에 의해 노르웨이라는 이름으로 첫 통일 왕국이 만들어진 후 베르겐을 수도로 하여 약 500년간 이어졌다.
노르웨이 바이킹들(800 ~ 1050)은 맨 섬(Isle of Man, 아이리시해), 헤브리디스(Hebrides, 스코틀랜드북서 해양), 북부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등을 정복하였고 그린란드와 아이슬란드에도 정착하였으며 11세기 중엽에는 세력이 강성해져 노르웨이왕이 덴마크왕을 겸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1397년에 '칼마르 동맹'이 맺어진 후 400년간은 덴마크의 속국이었으며 1814년부터 약 90년간은 스웨덴의 연방으로 지배를 받았다.
핀란드는 12세기부터 스웨덴 십자군에 정복되어 지배를 받다가, 1397년에는 칼마르 동맹이 맺어지면서 약 120년간 덴마크의 지배를 받았다.
그 이후 1809년까지 스웨덴, 1809년 이후 100년 이상 제정 러시아의 지배를 받았다.
스웨덴 지역의 테우토니족(Teutoni, Teutons 튜턴족)은 BC 101년 로마 제국의 갈리아(프랑스)를 바다 쪽으로 침범하였으며 그리고 고트족(Goths)은 4세기 무렵 로마 제국을 침략했다.
스웨덴 지역의 노르드인( 바이킹)은 바이킹시대(800~1050)에 비잔틴 제국과 아랍과의 무역을 하기 위해, 발틱 연안에서 카스피해까지 무역로를 열고 러시아 지역에 무역거점 (Trading Station)을 건설하였다.
10세기말 우플란드 지방의 에리크 6세(Erik VI, 945 ~ 995, 스웨덴 왕)가 스웨덴 역사상 최초의 왕이 되었다.
울라프 3세 쇠트코눙(Olof Skötkonung, 재위 995 ~ 1022)은 AD 1008년 스웨덴 역사상 최초로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으며 왕의 칭호로 '렉스(REX)'를 사용하였다.
13세기 초에 스웨덴의 신왕조를 창시한 비르에르얄(Birger Jarl, 1210 ~ 1266)이 통일국가의 기초를 닦았다.
덴마크 지역에는 826년에 최초로 기독교가 전래되었으며 1014년경 스벤 1세(Svend I, Svend Tveskæg, Sweyn Forkbeard 스웨인 포크비어드, 재위 986 ~ 1014)가 잉글랜드를 정복하고 잉글랜드 왕을 겸하였다. 크누드 1세(Canute I, 1016 ~ 1035, 카누트 대왕)는 1016년에 잉글랜드 왕, 1018년에 덴마크 왕(하랄트 스벤센 Harald Svendsen, 1014 ~ 1018), 1028년에 노르웨이 왕위에 올라 '북해 제국(North Sea Empire, 1016 ~ 1035, 앵글로 스칸디나비아 대제국 Anglo Scandinavian Empire)'을 형성했다. 그러나 크누드가 죽은 후 대제국은 분열되었고 덴마크는 다시 스칸디나비아의 한 세력으로 전락하였다.
14세기에 독일의 한자동맹(Hanseatic League)의 세력이 강성해지자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등의 노르드인(Norse)들은 이에 대항하기 위해 세력을 연합할 필요성이 커졌다.
노르웨이 왕 호콘 6세(Håkon VI, 노르웨이 왕 재위 1343 ~ 1380, 스웨덴 왕 재위 1362 ~ 1364)의 왕비 마르그레테 1세(Margrete I, 1353 ~ 1412, 덴마크여왕 재위 1387 ~ 1412)는 그녀의 부왕인 덴마크왕 발데마르 4세(Valdemar IV, 재위 1340 ~ 1375)와 그녀의 남편 노르웨이 왕 호콘 6세의 사후, 그녀의 양 아들 올라프 2세(Olaf II, 1370년 12월 ~ 1387, 덴마크왕 재위 1376 ~ 1387, 노르웨이 왕 올라프 4세 Olaf IV 재위 1380 ~ 1387)에게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왕을 겸하게 했으나, 실권은 자신이 가졌다.
마르그레테 1세(덴마크여왕 재위 1387 ~ 1412)는 스웨덴 왕 알베르트(Albert, 스웨덴 왕 재위 1364 ~ 1389, 메클렌부르크-슈베린 공작 재위 1384 ~ 1412)에게 불만을 가진 반란군과 연합하여 알베르트를 격파하고 1389년 스웨덴왕을 겸하였다가 1396년 올라프 2세(Olaf II, 1370 ~ 1387)의 사후 노르웨이 왕위에 오른 에리크 7세(덴마크왕 에리크 7세 Erik VII 재위 1396 ~ 1439, 노르웨이왕 에리크 3세 Eirik III 재위 1389 ~ 1442, 스웨덴왕 에리크 13세 Erik XIII 재위 1396 ~ 1439)에게 스웨덴 왕위를 넘겼다.
이어 1397년에 스웨덴의 동남부에 있는 칼마르(Kalmar)에서 3국의 귀족회의를 개최하여 3국이 연합하는 칼마르 동맹(Kalmar Union, 1397)을 하였다.
이 동맹의 주도권은 덴마크가 가졌고, 나머지 국가는 그 종속적 지위에 있었다.
'칼마르 동맹'으로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는 번성하였으나 1520년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2세(Kristian II, 덴마크왕 재위 1513 ~ 1523, 노르웨이왕 재위 1513 ~ 1523, 스웨덴왕 재위 1520 ~ 1521)가 독립을 획책하는 스웨덴 섭정 스텐 스투레 덴 윙레(Sten Sture den yngre, 연소자 스텐 스투레, 1493 ~ 1520, 스웨덴 섭정) 일파를 제거하는 스톡홀름 피바다 사건(Stockholms blodbad)을 일으켰다.
스웨덴 귀족 출신의 구스타브 1세 바사(Gustav I Vasa, 구스타브 1세 에릭손 바사 Gustav I Eriksson Vasa, 스웨덴의 국왕 재위 1523 ~ 1560)는 덴마크 국왕인 크리스티안 2세(Kristian II)가 군대를 동원하여 자유선거로 스웨덴의 섭정으로 임명된 스텐 스투레 덴 윙레(Sten Sture den yngre, 연소자 스텐 스투레)가 이끄는 스웨덴 민족주의 진영(칼마르 동맹을 해체하고 독립하려는 계획이 탄로남)을 1520년에 학살한 스톡홀름 피바다 사건(Stockholms blodbad)을 보고 1523년 6월 덴마크 여왕 Kristian 2세에 대항하여 일으킨 반란에 성공하여 스웨덴의 국왕이 되었으며 스웨덴은 독립하였다.
스웨덴이 독립하면서 1523년 칼마르 동맹은 해체되었다.
그 후 구스타브 2세(Gustav II, Gustavus Adolphus, Gustav II Adolf, 재위 1611 ~ 1632)는 1629년에 개발된 가벼운 레예멘츠스튀케(Regementsstycke) 대포를 대량 생산하고 화승총병에 적절한 전술을 적용하는 등 강력한 군대를 육성하여 러시아와 전쟁으로 발트해 동쪽으로 세력을 넓히고 폴란드와 여러 번 전쟁을 하였다.
구스타브 2세는 발트해 연안의 무역과 신교(新敎)를 위하여 30년 전쟁(168 ~ 1648)에 참여하여 여러 전투에서 승리했으나 전사했다.
스웨덴 제국은 30년 전쟁(1618 ∼ 1648)에 레예멘츠스튀케(Regementsstycke) 대포를 동원하여 신성로마제국 제후국을 절반까지 점령하기도 하였다. 스웨덴 제국은 30년 전쟁의 결과로 맺어진 베스트팔렌 조약(Peace of Westfalen, 1648)으로 러시아와 스페인 제국 다음으로 유럽의 영토를 3번째로 많이 차지한 나라가 되었던 것이다.
스웨덴 제국은 베스트팔렌 조약에 의해 얻어낸 독일 내 영토를 가지고 신성로마제국의 내정을 간섭하였으며, 황제의 선출권도 가졌다.
스웨덴은 덴마크와 영토문제로 크리스티나 여왕(Drottning Kristina, 재위 1632 ~ 1654) 때인 1643 ~ 1645년, 칼 구스타브 10세(Karl Ⅹ Gustav, 1654 ~ 1660) 때인 1657 ~ 1658년의 2차례 전쟁에서 승리한 후 발틱 해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노르웨이, 덴마크, 독일 북부, 현 발틱 제국 및 핀란드 일부를 영토로 확장하여 강력한 스웨덴 제국(Swedish Empire, stormaktstiden, 1611 ~ 1721)을 건설하였으며 유럽의 패권국으로 부상했다.
카를 10세(Karl X, 칼 10세, 재위 1654 ~ 1660)는 1656년 폴란드를 침략하여 점령한 영토를 분할하여 차지했다.
스웨덴 제국은 1645년의 브룀세브로(Brömsebro) 조약과 1658년 맺은 로스킬레 조약(Treaty of Roskilde, 1658)으로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중요한 지역을 획득하였으며 1656년에 일어난 러시아-스웨덴 전쟁서 승리하여 맺은 카디스 조약(Treaty of Cardis, 1661)으로 잉그리아, 에스토니아, 프리오제르스크 등의 발트해 연안 지방을 러시아 차르 국(루스 차르 국, 1547 ~ 1721)으로부터 획득했다.
그 결과 후에 에스토니아, 리보니아, 그리고 북부 독일이 되게 되는 잉그리아, 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지배하는 최대 영토를 가지게 되었다..
카를 12세(Karl Ⅻ, 칼 12세, 재위 1697 ~ 1718) 때인 1700년에 러시아의 표트르 1세(Peter the Great, 재위 대공 후 1682 ~ 1721, 차르 1721 ~ 1725)는 덴마크, 폴란드와 연맹을 맺고 그동안 스웨덴에게 빼앗겼던 영토를 되찾기 위해 전쟁을 선포했다. 이를 대북방 전쟁(大北方戰爭, Great Northern War)이라고 한다.
전쟁 초기에 패하여 해체되었던 동맹국들은 1709년 폴타바 전투(Battle of Poltava, 동 우크라이나)에서 카를 12세(Karl Ⅻ, 칼 12세, 재위 1697 ~ 1718)의 스웨덴 군대가 러시아에게 크게 패하자, 폴란드와 덴마크가 전쟁에 재 참전하였고 스웨덴은 많은 영토를 잃었다. 칼 12세가 전쟁 중에 죽고 이에 스웨덴이 전의를 상실한 가운데 러시아는 스웨덴 연안 지방을 공격하여 1721년에 뉘스타드 조약(Treaty of Nystad, 1721, 핀란드)을 맺어 에스토니아, 리보니아, 잉그리아, 일부의 카렐리야 등 스웨덴의 동쪽 절반이나 되는 영토를 차지했다.
스웨덴 제국은 1721년에 끝났으나 19세기까지 지역 강국으로 남았다.
스웨덴은 아메리카 대륙에 해외 식민지들을 개척하였다. 크리스티나 국왕(Drottning Kristina, 스웨덴 여왕, 재위 1632 ~ 1654) 시기인 1638년에 델라웨어 강 계곡에 뉴 스웨덴(New Sweden, Nya Sverige, 뉘아스베리예, 현재의 델라웨어주 윌밍턴 지역)이 세워졌다. 피터 미노이트(Peter Minuit, 1580 ~ 1638, 네덜란드 뉴암스테르담 총독, 인디언에게 은화 2 파운드 값의 패물을 주고 맨해튼을 구입)의 원정대가 인디언으로부터 토지를 구입, 정착지를 세우고 스웨덴 여왕의 이름을 따서 크리스티나 요새라 하였으며 그 후 1655년 네덜란드의 페터 스토이베산트(Peter Stuyvesant,1612 ~ 1672, 총독)에 의해 스웨덴이 지배하던 뉴 스웨덴(New Sweden, Nya Sverige, 뉘아스베리예)이 네덜란드에 점령되었다.
1731년에 민간인에 의해 스웨덴 동인도 회사(Svenska Ostindiska Companiet)가 설립되었다.
주로 중국과 무역을 했다. 회사는 스코틀랜드인이나 네덜란드인으로 조직되어 운영되었으며 스웨덴은 식민지가 없어 중시하지 않았다.
7. 독일(獨逸, 도이칠란트, Deutschland)의 식민지 개척과 독일제국
가. 독일의 중세와 근세
스칸드나비아 반도와 발트해 주변에 살던 여러 종족의 게르만인들은 농토를 찾아 따듯한 게르마니아로 이주하였으며 인구가 늘어나 농토가 부족해지자 남하하였다.
게르만 케루스키족(Cherusker)의 군장인 세기메루스(Segimerus)의 아들로 태어난 아르미니우스(Arminius, ? ~ AD 21)는 로마 제국의 군대(비루스 군대)에 입대하여 군사적 상황 등을 접하고 게르마니아로 귀향하였다.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Imperator Caesar divi filius Augustus, 로마 제국 초대 황제, 재위 BC 27 ~ AD 14)는 게르마니아 지역의 지배권을 확립하기 위해 푸블리우스 퀸크틸리우스 바루스(Publius Quinctilius Varus, BC 46 ~ AD 9)를 총독으로 파견하였다.
총독 바루스가 게르마니아 지역에서 횡포를 부리고 아르미니우스(Arminius)을 멸시하자 아르미니우스(Arminius)는 군사들을 규합하여 토이토부르크 전투(Battle of the Teutoburg Forest, AD 9.9.)에서 대승하여 게르만의 영웅으로, 게르만의 해방자가 되었다.
800년 교황 레오 3세( Leo PP. III, Papa Leone III, 제96대 교황 재위 795 ~ 816)는 프랑크의 왕 카롤루스 1세(Carolus Magnus, Charlemagne, 카롤루스 마그누스, 칼 대제, Karl, 742? ~ 814, 카롤링거 제국 황제 800 ~ 814)를 황제로 인정하였다.
경건왕루도비쿠스 1세 피우스(Ludovicus I Pius, 로마 제국 황제 재위 814 ~ 840, 카롤루스 마그누스의 여섯째 아들)가 사망한 뒤 장남 로타리우스 1세(Lothair I)가 동생들에게 841년퐁트누아 전투(Battle of Fontenoy, 오세르 근처)에서 패배함에 따라 3명의 아들이 베르됭 조약(Treaty of Verdun, 843)을 맺어 동프랑크(셋째 루트비히 2세, Ludwig II, 843 ~ 876, 라인강 동쪽, 독일), 중프랑크(장남로타리우스 1세, Lothaire, Lothair I, 로테르 1세, 중프랑크국왕, 재위843 ~ 855, 로마 황제 재위 817 ~ 855, 로트링겐, 부르군트, 북이탈리아, 이탈리아), 서프랑크(막내 대머리왕 카를 2세, Carolus II Calvus, 서프랑크 왕 843 ~ 877, 로마 황제 재위 875 ~ 877, 론강 서쪽, 프랑스)로 분열되었고 이어 870년 동프랑크 왕국의루트비히 2세(Ludwig II, 재위 843 ~ 876)와서프랑크 왕국의카를 2세(Carolus II Calvus, 재위 843 ~ 877, 로마 황제 재위 875 ~ 877)가 메르센조약(Treaty of Mersen, 870)을 맺고 동프랑크와 서프랑크로 재편되었다(둘째 피핀은 일찍이 사망).
중프랑크는 경건왕루도비쿠스 1세의 장남이었던 로타리우스 1세(Lothaire, Lothair I, 로테르 1세, 중프랑크 국왕, 재위843 ~ 855, 로마 황제 재위 817 ~ 855)의 나라였다.
로마 제국의황제인 로타리우스 1세(Lothaire, Lothair I, 로테르 1세, 중프랑크국왕, 재위843 ~ 855, 로마 황제 재위 817 ~ 855)가 로타링기아를비롯한 유럽 중부,이탈리아북부 등(현재 독일 서부, 프랑스 동부, 베네룩스 3국, 스위스,이탈리아북부 등)의 영토를 차지하고세운 중프랑크 왕국(regnum Francia media)은 동프랑크 왕국과서프랑크 왕국을 명목상으로 지배했으나 이질적인 민족들이라 결속력이 약했다. 중프랑크는 루이 2세(Louis II, 로마 황제 및 이탈리아 왕, 재위 844 ~ 875, 855년까지 로테르 1세와 공동)때인 870년 메르센조약(Treaty of Mersen, 870)으로 이탈리아만 남았으나 이마저도 황제위와 함께 875년 서프랑크의 대머리왕 카를 2세(Carolus II Calvus, 서프랑크 왕 재위 843 ~ 877, 로마 제국 황제 및 이탈리아 왕 재위 875 ~ 877)에게 넘어갔다.
서프랑크 지역인 프로방스(Provence, 프랑스 남부와 이탈리아 북서부 일부) 위그(Hugh of Provence)의 아들인 이탈리아의 로타르 2세(Lothar II, 이탈리아 왕, 재위 947 ~ 950)는 부르고뉴(Bourgogne, Burgundy 브르군디, 프랑스 동부) 왕 루돌푸스 2세(Rudolph II of Burgundy, 재위 912 ~ 937)의 공주인 아델라이데(Adelaide of Italy, 931 ~ 999, 부르고뉴 여왕)와 결혼(947)하여 이탈리아 왕국의 왕이 되었으나 토리노에서 정적인 베링가리오 2세(Berengar II, 900 ~ 966)에 의해 축출되어 독살되었다.
이탈리아 왕으로 즉위 한베링가리오 2세가 아델라이데(Adelaide of Italy. 이탈리아 여왕)를 옥에 가두고 그의 아들 아달베르토(Adalbert)와 결혼을 강요하자 아델라이데는 951년 옥에서 탈출하여 독일 왕(동프랑크 왕) 오토 1세(오토 대제, Otto I, 재위 작센 공작 936 ~ 973, 이탈리아 국왕 961 ~ 973, 신성로마제국 황제 962 ~ 973)에게 구원해 달라는 편지를 보내어 구원해 주면 결혼하겠다고 하였다.
아델라이데는 파비아에서 오토 1세를 만나 951년에 결혼하였다.
오토 1세는 교황령을 위협하던 마자르 족(Magyars, 머저르 족, 헝가리 족)을 955년 레흐펠트 전투(Battle of Lechfeld)에서 승리하여 물리쳤다.
960년 베링가리오 2세는 교황령을 침공하였으며 이에 요한 12세(Ioannes PP. XII, 제130대교황, 재위955 ~ 964)는 960년 독일 왕(동프랑크 왕)오토 1세에게 특사를 보내어 도움을 요청했다.
961년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로 진격한 오토 1세는 베링가리오 2세의 항복을 받았으며 962년 로마를 점령하여 이탈리아 왕국(Regnum Italiae, 962 ~ 1801, 신성 로마 제국 일원, 수도 파비아)을 세웠다.
오토 1세는 962년교황 요한 12세(Papa Giovanni XII, 제130대교황, 재위955 ~ 964)에 의해 로마에서 황제로 즉위하면서 신성로마제국(Holy Roman Empire, 962 ~ 1806)이 탄생하였다. 그리고 아델라이데(후에 성 아델라이데 Saint Adelaide로 추앙됨)를 황후로 인정했다.
이 때부터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는 대부분 이탈리아와 독일의 왕이었다.
938년 작센의 람멜스부르크에서 대규모 광맥이 발견되어 많은 양의 은, 구리, 납 등의 광물이 생산되었으며 오토 1세는 이광물을 기반으로 재정을 튼튼히 하였고, 이후 수백 년 동안 독일 중북부 고슬라(Goslar)의 람멜스베르크(Rammelsberg) 광산은 유럽의 주요 광물 자원의 공급지가 되었다.
독일 왕인 오토 1세가 이탈리아와 교황령을 겸하여 강성해지고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어 권위가 높아지자 교황 요한 12세는 오토 1세에게 위협을 느끼고 반기를 든 베링가리오 2세와 내통하여 맞서려 하였다.
이에 963년 오토 1세는 로마로 다시 돌아와 베링가리오 2세를 독일로 압송하였으며(966년 옥사) 종교 회의를 열어 요한 12세를 폐위시키고 교황 레오 8세를 선출하였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권은 교황권을 압도했다.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3세(Heinrich III, 재위 신성로마제국 황제(1046 ~ 1056)는 4명의 교황을 마음대로 세우는 등 교황권보다 황제권을 우위로 행사했다.
그런데 어린 하인리히 4세(Heinrich IV, 재위 독일 국왕 1053 ~ 1105, 이탈리아 국왕 1056 ~ 1105년 12, 신성로마제국 황제 1084 ~ 1105)가 즉위하여 왕권이 약화되자 교황 그레고리오 7세(Gregorius VII, 재임 1073 ~ 1085)는 서임권(주교 등의 성직자 임명권) 등 교황권 투쟁을 벌였다.
1073년 밀라노 대주교를 선출하는 과정에서 개혁파 주교들이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의 허락을 받아 대주교를 옹립했으나 하인리히 4세는 반대하여 다른 대주교를 내세웠다.
이에 1075년 교황 그레고리오 7세(Gregorius VII, 재임 1073 ~ 1085)는 교황 교서(Dictatus papae)에서 서임권은 교황에게 있고 교황은 오류를 범하지 않으며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않는다. 그리고 교황에게는 황제를 폐위할 권한이 있다는 등 교황권의 여러 조항을 발표했다.
그레고리우스 7세는 유럽 왕국들을 지배하여 교황의 신권 정치 원리를 적용하려 했던 것이다.
이에 1076년 1월 하인리히 4세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를 폐위시켰으나 오히려 그레고리우스 7세에게 파문(破門, Interdikt)을 당하여 제후들의 충성을 받을 수 없게 되었다.
그 결과 1077년 하인리히 4세는 카노사의 굴욕(Humiliation at Canossa, 카노사 성의 교황을 찾아가 성 밖 눈 속에서 맨발로 3일간 서서 용서를 빌어 파문의 사면을 받음)을 겪어야 했다.
그런데 하인리히 4세의 파문 철회를 반대하는 제후들이 1077년 슈바벤 공작 루돌프를 독일 국왕(슈바벤 공작 프리드리히 1세)으로 선출함에 따라 국왕이 2명이 되었다.
하인리히 4세와 루돌프는 독일 왕국의 왕권을 놓고 3년 동안 전쟁을 하였다. 이에 1080년 그레고리우스는 루돌프를 왕으로 승인하고 다시 하인리히 4세를 파문시켰다.
그러나 이번에는 제후들이 교황권의 강화를 우려하여 반대하였고 루돌프가 전사하자 하인리히 4세는 교황을 폐위시키고 라벤나 대주교 구이베르트를 교황 클레멘스 3세(Clemens III, 재임 1080 ~ 1100)로 옹립함에 따라 교황이 2명이 되었다.
1081년 하인리히 4세가 로마를 침입하여 1084년 교황 그레고리우스를 폐위시킴에 따라 클레멘스 3세가 단독 교황이 되고 1084년 하인리히 4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되었다.
그 이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들은 교황권이 황제권 위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였으며 300년 동안 황제가 임명해 오던 대주교와 수도원장의 서임권도 보름스 협약(Concordat of Worms, 1122)으로 교황권이 되었다.
교황 하드리아노 4세( Papa Adriano IV, 제169대 교황, 재위 1154 ~ 1159)는 1157년에 로마 제국이 교황의 봉토임을 선언했다. 이에 프리드리히 1세(Friedrich I, 재위 신성 로마 황제 1155 ~ 1190)는 1157년에 로마 제국(Römisches Reich, Imperium)에 종교적 권위를 강조하기 위해 신성을 붙여 신성 제국(Sacrum Imperium, Heiliges Reich)이라하였고 1184년부터는 신성 로마 제국(Sacrum Romanum Imperium)이라하였으며 1474년 프리드리히 3세(Friedrich III, 신성 로마 황제 재위 1452 ~ 1493)는 독일 민족의 신성 로마 제국(Sacrum Imperium Romanum Nationis Germaniae, Heiliges Römisches Reich Deutscher Nation)이라는 국호를 처음 공식적으로 사용하였다.
황제는 선제후(황제 선출권이 있는 제후)들에 의해 추대되었다.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는 호엔슈타우펜 왕조(Hohenstaufen, 1138 ~ 1254, 독일왕, 황제, 슈바벤 공작)의 프리드리히 2세(Friedrich II, 1194 ~ 1250)에게 후사가 없어 황제 시대가 끝이 났다.
교황권이 강하여 황제권을 압도함에 따라 제후들이 황제 즉위를 꺼려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대공위시대(大公位時代, Interregnum, 신성 로마 황제의 추대가 제대로 되지 않은 기간, 1256 ~ 1273)가 이어진 것이다.
12, 13세기 유럽에는 한자(Hansa)라고 불리는 각지의 시장을 찾아서 돌아다니며 장사를 하던 편력 상인(遍歷商人) 단체가 많이 있었다.
14세기에는 독일 북부의 도시들과 발트해 연안과 라인강에 인접한 해외의 독일 상인 집단 사이의 편력 상인(遍歷商人)들로 구성된 독일 한자동맹(Hanseatic League)이 무역의 중심이 되어 스웨덴, 영국, 스코틀랜드, 네덜란드, 프랑스 등과 라인강을 따라 주변의 폴란드, 러시아 등과 무역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교역품은 뤼네부르크의 소금, 영국의 양모, 플랑드르의 아마, 방직물 등이었다.
한자동맹(Hanseatic League)은 해군을 보유하여 교역로를 독점하면서대항해시대이전 중세 유럽의 교역에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제후의 세력이 커진 대공위시대(大公位時代, Interregnum, 1256 ~ 1273)가 이어지며 독일의 정세가 혼란해지자 교황은 황제 등극을 원하였으나 교황권이 강하여 황제권을 압도하는 상황에서 황제 선출의 선거권을 가진 강력한 제후들은 자신이 황제가 되는 것이 싫었지만 다른 제후들이 황제가 되어 세력이 커지는 것도 원치 않았다. 그래서 독일의 선제후들이 타협하여 스위스 지방의 미천한 합스부르크 가문의 백작 루돌프 4세를 로마왕 루돌프 1세(Rudolf I, 재위 1273 ~ 1291)로 선출함에 따라 다시 황제 시대가 되었다.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를 4세(Karl IV, 재위 황제, 이탈리아 왕 1355 ~ 1378, 보헤미아 왕,
로마 왕 1346 ~ 1378, 부르군디 왕 1365 ~ 1378)는 1356년 황금문서(黃金文書, 금인칙서 金印勅書, 금인헌장 金印憲章, Goldene Bulle)라고 하는 제국법(Golden Bull of Emperor Charles IV)을 제정 발포하였다. 제국법은 대공위시대(大空位時代) 이후 독일의 정치적 혼란을 해결하기 위해 제정한 것으로 황제(국왕) 선거의 절차와 선제후(選帝侯)의 권리를 정하였으며 황제 선출권을 선제후 7명만이 가지도록 하였으나 후에 그 인원이 늘어나게 되었다.
15세기부터는 합스부르크가(家, Habsburg Haus, 1273 ~ 1918, 오스트리아 왕가로 독일, 헝가리, 이탈리아, 폴란드, 터키, 체첸,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등을 지배)에 의해 프란츠 2세(Franz II, 재위 1792 ~ 1806 신성로마제국 황제, 1804 ~ 1835 오스트리아 제국의 초대 황제)가 제위(帝位)에서 물러난 1806년까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세습되었다.
전쟁에서 화포를 네 바퀴 수레에 장치하여 사용한 것은 중부 유럽의 보헤미아가 처음이었다.
화포를 네 바퀴 수레에 장치하면 이동할 때의 번거로움과 발사할 때의 반동을 줄일 수 있었다.
독일왕의 봉건영지였던 보헤미아에서 서민들의 지지를 받던 얀 후스(Jan Hus,1370 ~ 1415)가 봉건 학정을 성토하였다는 죄로 처형되자 후쓰파(Husité, 얀 후스를 따르는 체코의원시 개신교 운동)의 주도로 격렬한 폭동이 발생하였으며 화포 전문의 잔 지즈카(Jan Zizka, 1360 ~ 1424, 타보라이트 Taborites를 이끌었던 체코 장군) 장군은 1420년 여름 독일군과 대항하기 위해 7천명의 병력과 화포를 네 바퀴 수레에 장치하여 끌고 프라하로 진군했다.
독일왕 지기스문트(Sigismund, 독일왕 재위 1410 ~ 1437, 보헤미아 왕 재위 1419 ~ 1437,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재위 1433 ~ 1437)가 태자를 보내 대병력으로 프라하를 포위했지만 지즈카는 치밀한 작전을 펼쳐 대승을 거두었던 것이다.
제217대 교황 교황 레오 10세(Papa Leone X, 재위 1513 ~ 1521)는 전쟁, 낭비, 가문 퍼주기 등으로 재정난이 심화되자 이를 타개하기 위한 방편으로 성 베드로 대성전(Basilica di San Pietro in Vaticano, 성 베드로 대성당, 바티칸 대성전) 건축 기금을 마련한다는 핑계로 로마 가톨릭의 대사부(大赦符, Indulgentia)인 '면죄부(免罪符)' 판매를 승인하였고 이에 주교들은 반강제로 면제부(免罪符, Indulgentia)를 판매하였으며 또 주교를 겸직한 선제후도 3명이나 있어 십일조와 세금을 함께 받는 등 가톨릭의 부패가 극에 달하였다.
1517년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 ~ 1546)에 의해 종교개혁이 일어났다.
아우구스티노회(Augustini) 수사(修士)이며 비텐베르크 대학교의 교수였던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 ~ 1546, 독일 종교개혁가)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면죄부 판매가 회개가 없는 용서, 거짓 평안이라고 비판하고 오직 믿음(Sola fide)을 통해 의을 얻는 이신창의(justification by faith)를 주장하여 개인 구원의 새 시대를 열였다.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대학교 교회 문에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게시한 것이 종교 개혁의 시작이었다. 루터가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게시하여 면죄부를 대량 판매하던 도미니코회 수사이자 설교자 요한 테첼에 맞서자 1520년 제217대 교황 레오 10세(Pope Leo X, 재위 1513 ~ 1521)는 마르틴 루터를 파문했다.
1522년 루터의 영향을 받은 기사들이 트리어 선제후 국(Kurfürstentum Trier, 선제후 국이란 황제를 뽑을 권한을 가진 제후)을 공격했던 ‘기사 전쟁(騎士戰爭, Ritterkrieg)’, 1524년에서 1525년까지 루터의 영향으로 봉기한 농민들과 기사들이 싸운 ‘독일 농민 전쟁(Der deutsche Bauernkrieg)’, 1529년과 1531년 스위스에서 츠빙글리 파 신교도와 가톨릭교도들이 싸운 ‘카펠 전투(Battle of Cappel)’, 13세(Karl V, 에스파냐 왕 재위 1516∼1556, 신성로마제국 황제 재위 1519∼1556)는 아우크스부르크종교화의(Augsburg 宗敎和議)를 개최하였으며 아우크스부르크종교화의에 의해 신교(루터파)와 구교가 분리되었다.
그런데 제후들의 종교만 신교(루터파)와 구교로 분리되고 개인의 종교는 분리되지 않아 제후의 종교를 따라야 했으며 개인은 다른 제후국으로 옮겨갈 수는 있었다.
독일은 종교까지 분리됨에 따라 국력이 분산되어 국가 간의 경쟁에 뒤지고 한자 동맹도 쇠퇴해졌다.
17세기 초, 신교와 구교 간의 갈등이 다시 깊어졌다. 신성 로마 제국과 교황이 신교를 믿는 지역을 강제로 가톨릭을 믿는 제후의 통치 지역으로 편입시킴에 따라 신교를 믿는 팔츠의 선제후(황제를 뽑을 권한을 가진 제후)를 중심으로 신교파 연합이 구성되었으며 이에 구교 제후들도 바이에른을 중심으로 가톨릭 연맹을 결성함에 따라 반목이 깊어져 갔다.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가톨릭교회와 개신교 간의 분쟁뿐만 아니라 개신교 내의 루터파와 칼뱅파 사이에도 분쟁이 깊어졌다.
루터파는 가톨릭교회의 교리만 거부하고 정치, 사회적 구조는 기존의 중앙 집권의 절대주의를 그대로 유지했지만 칼뱅파는 자유를 추구하는 도시민들이나 권력의 중앙 집중화에 반발하는 지역 봉건 영주들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화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마티아스(Matthias, 재위 1612 ~ 1619,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의 왕, 보헤미아의 왕, 오스트리아의 대공) 때인 1618년 프라하에서 제2차 프라하 창밖 투척사건(보헤미아의 개신교도들이 국왕 직할령의 개신교 교회 건설을 중단시킨 것에 항의하다가 섭정관들을 수상부 건물 창밖으로 던져버린 사건)이 일어나 30년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1617년 가톨릭교도인 페르디난트 2세(Ferdinand II, 1578 ~ 1637,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1619 ~ 1637, 보헤미아 헝가리 크로아티아의 국왕 1617년 ~ 1637)가 보헤미아의 왕위에 올라 가톨릭 절대 신앙을 강요하자 1618년 보헤미아와 오스트리아의 프로테스탄트(개신교, 신교, Protestant, 16세기 종교개혁으로 로마 가톨릭에서 분리되어 나온 교파의 총칭)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켜 30년 전쟁(Thirty Years' War, 1618 ∼ 1648)이 일어났다.
1619년 페르디난트 2세(Ferdinand II)가 로마제국(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자 개신교 보헤미아 인들은 그를 축출하고 1619년 프리드리히 5세(Friedrich V, 1596 ~ 1632, 라인의 팔츠 선제후 겸 보헤미아 왕국의 국왕 1610 ~ 1620)를 보헤미아 국왕으로 선출하고 페르디난트 2세의 황제 군에 대항하였으나 1620년 바이서베르크 전투(Weißerberg, Battle of White Mountain, 백산 전투)에서 패배하고 다시 탄압을 받았다.
이에 덴마크 왕 크리스티안 4세(Christian IV, 재위 1588 ~ 1648)가 영국과 네덜란드의 군자금을 지원받아 침입했으나 페르디난트 2세(Ferdinand II)의 황제 군인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Albrecht Eusebius Wenzel von Wallenstein, 1583 ~ 1634)과 요한 체르클라에스 폰 틸리 백작(Johan 't Serclaes van Tilly, 1559 ~ 1632)에 패하여 1629년 뤼베크 조약(Lübecker Frieden)으로 화해하였다. 이에 따라 페르디난트 2세(Ferdinand II)는 반란에 가담한 제후들에게 배상령(賠償令)을 내리고 종교제후(宗敎諸侯, 교황을 따르는 제후)로 확고히 하였으며 루터파(派)를 공인(公認)하였다.
1630년 신교 편에 선 스웨덴의 구스타브 2세 아돌프(Gustav II Adolf, 1594 ~ 1632, 재위 1611 ~ 1632)가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다시 침입하여 연전연승을 거두었으나 1632년 뉘른베르크 공방전에서 밀리자 눈치를 보던 제후들이 페르디난트 2세(Ferdinand II) 편에 가담함에 따라 뤼첸 전투(Battle of Lützen, 1632)에서 패하고 구스타브 2세도 전사했다. 이후 스웨덴군은 전투를 계속하였으나 패배를 거듭하고 1634년 뇌르틀링겐 전투(Schlacht bei Nördlingen)에서 패하자 1635년 황제와 그리스도교군의 작센 선제후 사이에 프라하 화의가 성립되었다.
1635년 신교 세력을 지원하던 프랑스가 에스파냐에 선전 포고를 하고 스웨덴과 연합하여 독일에 출병하였다.
승리 없이 전쟁이 계속되다가 1637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계승한 페르디난트 3세(Ferdinand Ⅲ, 재위 1637 ~ 1657)는 불리한 전세와 오랜 전쟁에 1641년 종전을 제의하여 1648년 베스트팔렌조약(Peace of Westfalen, 1648)을 맺어 30년간 이어진 종교전쟁이 끝이 났다.
30년 전쟁(Thirty Years' War, 1618 ∼ 1648)에 신교 편으로 참전한 프랑스와 스웨덴은 전쟁에 승리한 결과 베스트팔렌조약(Peace of Westfalen, 1648)으로 독일 내 많은 공국을 지배하였으며 그 지분으로 신성로마제국의 내정을 간섭하고 황제 선출권에도 참여했다.
30년 전쟁(Thirty Years' War, 1618 ∼ 1648, 독일을 무대로 신교와 구교 간의 종교전쟁) 결과로 맺어진 베스트팔렌 조약(Peace of Westfalen, 1648)에 따라 종교적 평화는 달성되었으나, 각 공국이 주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고 세력이 강해져 연방체제가 되면서 신성로마제국은 유명무 실화되었으며 그래도 황제 자리를 유지하면서 헝가리, 이탈리아 일부 등까지 영유하고 있던 합스부르크가의 오스트리아가 가장 강하였다.
30년 전쟁(1618~1648)은 유럽의 여러 강대국들이 종교, 영토 및 통상문제 등 다양한 이유로 참전하여 오랜 기간 대대적인 전투를 헤아릴 수 없이 치렀으며 발달된 전쟁무기와 공성전으로 수많은 군사와 전쟁 비용이 소모되어 참전한 국가들은 쇠약해지고 국민들을 처참하게 만든 전쟁이었다.
30년 전쟁(1618~1648)의 결과로 맺어진 베스트팔렌 조약(Peace of Westphalia)으로 각 국가는 자국 영토에 대한 배타적인 주권을 가지며 정치는 종교의 영향에서 벗어나 세속화하여 국가 간의 세력 균형으로 질서를 유지하는 베스트팔렌 체제(Westphalian system, 베스트팔렌 주권 Westphalian sovereignty)가 확립되었다.
네덜란드와 스위스가 독립을 인정받았고 독일은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이름 아래 서유럽에서 가장 큰 영토를 차지하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오랫동안 작은 300여 개의 소왕국과 공국으로 나뉘어 있어 대항해시대 초기에는 식민지 개척에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프로이센(Preussen, 독일)은 튜턴 기사단(German Order)이 지배하던 지역이었으나 1525년 기사단장 알브레히트 폰 프로이센(1490 ~ 1568)이 신교로 개종하고 세속화하여 프로이센 공국이 되었으며 1618년 호엔촐레른가(Haus Hohenzollern)에서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과 연합되었고 1657년 폴란드와 스웨덴의 지배로부터 벗어났다.
대(大) 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Friedrich Wilhelm I, Friedrich Wilhelm von Preußen, 1640 ~ 1688) 이래 강력한 부국 강병책을 쓰면서 지방 영주들(Junker, 융커)에게 여러 특권을 부여하는 대신 토지세를 걷어 대규모 상비군을 마련하여 강력한 프로이센 공국(Preussen)으로 발전하여 오스트리아에 도전할 만큼 강한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프랑스의 루이 14세(Louis XIV, 재위1643 ~ 1715)가 1685년 신교의 자유를 약속한 낭트 칙령을 폐지하자 프랑스의 20만 명 이상의 수많은 신교도 상공인과 기술자들이 프로이센 공국으로 이주해 와 프로이센 경제 발전에 기여했다.
브란덴부르크 프로이센은 1701년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Friedrich III, 공작 재위 1688 ~ 1701, 프로센 왕국의 프리드리히 1세, Friedrich I, 재위 1701 ~ 1713)가 신성로마제국 요제프 1세(Joseph I, 1678 ~ 1711)에게 원군을 제공한 공으로 왕위를 인정받아 프로이센 왕국(1701 ~ 1918)을 세우고 프리드리히 1세(Friedrich I)가 되었다.
그리고 수도를 쾨니히스베르크(Königsberg)에서 베를린(Berlin)으로 옮겼다.
오스트리아는 카를 6세(Karl VI, 1685 ~ 1740)가 남성 후계자 없이 사망하여 23세의 딸인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ia, 1717 ~ 1780, 재위 1745 ~ 1765 신성로마제국 황후, 1740 ~ 1780 오스트리아 대공)가 합스부르크가의 오스트리아 왕위를 계승하고, 신성로마 황제는 그녀의 남편 프란츠 1세 (Franz I, 1708 ~ 1765, 재위 1745 ~ 1765)가 즉위하였다.
그런데 고대 게르만 법인 살리카 법전(Lex Salica, 프랑크족의 주족인 살릭족의 법전)은 여성의 왕위 계승을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작센, 바이에른 등은 마리아 테레지아의 왕위 계승을 반대하였으며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Friedrich II, 프리드리히 대제, 1712 ~ 1786)는 슐레지엔(Schlesien, 현재 대부분이 폴란드령)을 넘겨준다면 왕위 계승을 인정하겠다고 하였다.
프리드리히 2세(Friedrich II, 프리드리히 대제, 1712 ~ 1786)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때 오스트리아에 지원군을 파견하는 대가로 슐레지엔을 받기로 했었는데, 아직까지 약속이 이행되지 않았다는 주장이었다. 이에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ia, 1717 ~ 1780, 재위 1740 ~ 1780 오스트리아 대공)는 이를 거부했고, 프리드리히 2세는 슐레지엔을 침공했다(제1차 슐레지엔 전쟁, 1740 ∼ 1742).
프랑스는 전통적으로 합스부르크 가의 오스트리아와 적대적이었고, 라인강 좌측의 독일 땅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프랑스의 루이 15세(Louis XV, 1715 ∼ 1774)가 프로이센 왕국과 동맹을 맺자 오스트리아 마리아 테레지아는 세가 불리하여 1742년에 프리드리히 2세와 단독 강화를 맺어 슐레지엔을 양보하였다. 그러나 프랑스 등과의 싸움은 계속되었으며, 오스트리아 계승 전쟁은 1748년에야 끝이 났다.
프랑스는 동맹을 맺은 프로이센의 일방적 강화에 불만이었고 오스트리아는 슐레지엔을 양보했지만 회복하기 위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1744년 오스트리아에 전쟁이 유리하게 돌아가자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가 슐레지엔을 탈환할 것을 염려하여 다시 전쟁을 일으켰으며(제2차 슐레지엔 전쟁, 1744 ∼1745) 전쟁에 패배한 오스트리아는 러시아와 비밀조약으로 동맹을 맺고 프로이센을 견제하기로 했다.
영국도 러시아와의 비밀 협상을 하여 프로이센이 독일 내의 영국 영토인 하노버를 공격할 경우 러시아군이 개입하며 그 대가로 영국은 재정 지원을 약속했다.
이를 알아낸 프리드리히 2세는 영국과 독일 내의 하노버를 영국 영토로 유지하기로 약속하고 동맹을 맺었다.
이에 오스트리아는 200년 동안 적대관계에 있던 프랑스와 제휴하고 러시아, 스웨덴, 작센 등과 동맹을 맺고 프로이센을 포위할 체제를 정비하였다.
프리드리히 2세를 증오해 온 러시아의 엘리자베타(Elizabeta Petrovna, 1709 ~ 1762, 재위 1742 ~ 1762) 여제와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ia, 재위 1740 ~ 1780 오스트리아 대공), 그리고 프랑스의 루이 15세(Louis XV, 1715 ∼ 1774)가 베르사유 조약 (1756년)으로 동맹을 맺었으며 이를 두 여왕과 루이 15세(Louis XV, 1715 ∼ 1774)의 애인인 퐁파두르 부인(Marquise de Pompadour, 1721 ~ 1764) 사이의 합작품이라 하여 ‘세 여인의 동맹’라고도 불렸다.
이때 영국과 프랑스는 인도, 북미 등에서 식민지 쟁탈로 대립하고 있었으며 북미에서는 1754년부터 프랜치-인디언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영국과 동맹을 맺은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는 1756년 8월 작센에 침입함으로써 제3차 슐레지엔 전쟁(7년 전쟁)을 일으켰다.
프로이센은 초기에 선제공격과 탁월한 작전으로 승리를 거두었으나 얼마 후 병력수에서 우세한 오스트리아군의 반격을 받아 점차 병력이 소모되어 수세에 몰렸다. 특히 1759년 8월 오스트리아, 러시아 연합군에게 쿠네르스도르프 전투(battle of Kunersdorf)에서 대패한 후로는 일시 베를린도 점령당하였고 영국의 외교를 강조한 대(大) 피트 수상(제1대 채텀 백작 윌리엄 피트, William Pitt, 1st Earl of Chatham, 1708 ~ 1778)이 조지 3세(George III, 재위 1760 ~ 1820) 때인 1761년에 실각함에 따라 영국의 군자금의 지원도 끊어져서 고립무원의 절망 상태에 빠졌다.
그런데 1762년 러시아의 엘리자베타 여제(Elizabeta Petrovna, 1709 ~ 1762, 재위 1742 ~ 1762)가 죽고 프리드리히 2세(프리드리히 대제, 1712 ~ 1786)를 숭배하는 표트르 3세(Peter Ⅲ, 재위 1761 ~ 1762)가 러시아 황제로 즉위하여 거의 승리한 전쟁을 거부하고 1762년 프로이센과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Treaty of Saint Petersburg, 1762)을 체결하여 프로이센과 러시아의 7년 전쟁을 종결했다.
1763년 2월 후베르투스부르크 조약 (treaty of Hubertusburg)이 성립되고 프로이센은 슐레지엔의 영유를 확인받게 되었다. 그 결과 프로이센 왕국은 유럽 열강의 지위에 올라 독일 내에서 패권의 기초를 다졌다. 또 7년 전쟁은 해외 식민지를 둘러싼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싸움이었는데 영국은 인도와 북미 등에서 프랑스에 승리하여 대(大) 식민제국으로서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1740년 이후 신성로마제국은 합스부르크가(Habsburg Haus)의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왕국으로 분리되었다.
1806년 나폴레옹의 침공으로 신성 로마 제국은 해체되었다.
프랑스의 나폴레옹 1세가 1812년 러시아 원정에 실패하자 프로이센·러시아·영국·오스트리아가 제6차 대프랑스동맹을 결성하였다.
프랑스의 나폴레옹 1세가 1813년라이프치히전투(Battle of Leipzig)에서 패배하였고, 동맹군은 1814년 3월 파리에 입성하였다.
프로센의 리드리히 빌헬름 3세(Friedrich Wilhelm III, 제5대 프로이센 국왕 재위 1797 - 1840)는 나폴레옹 1세의 침략에 대항하는 제6 차 대프랑스 동맹에 참여하여 파리에 입성했다.
프로이센은 빈 회의(Congress of Wien, 1814 ∼ 1815)에서 바르샤바 대공국과 작센을 귀속받기를 원했으나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와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 세력에 눌려 작센의 2/5 등을 차지하는데 그쳤다.
빈 회의(Congress of Wien, 1814 ~ 1815)에서 회의를 주도한 오스트리아 재상 메테르니히의 반동정책(반동주의, 反動主義, reactionism, 과거의 체제나 질서로의 회귀 주장)에 의해 독일은 38개의 주로 분할되어 독일연방(獨逸聯邦, Deutscher Bund, 1815 ~ 1866)이 성립되었다.
이때 각 주에서는 절대주의적 지배 체제를 강화했으며, 이를 반대하여 통일과 자유를 표방하는 부르셴샤프트(Burschenschaft, 1815년 독일 예나대학에서 결성한 학생동맹) 등의 운동도 일어났다.
그 후 농민해방과 관세 동맹 성립을 계기로 농업과 공업의 자본주의화는 진전되었고 그 결과 1840년대에는 라인 주를 중심으로 하는 산업 부르주아와 정권을 독점하는 동부 융커(Junker, 지방호족, 대지주) 귀족층 간의 충돌과, 초기 자본주의 하에서 고생하던 노동자 및 영락 수공업자와 부르주아 간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Friedrich Wilhelm IV, 제6대 프로이센의 국왕, 재위 1840 ~ 1861) 때인 1848 ~ 1849년에는 자유주의자들에 의한 1848 독일혁명이 일어났으며 그 결과 프랑크푸르트 국민회의가 해산되고 독일 제국이 해체되었으며 입헌주의의가 확산되었다.
빌헬름 1세(Wilhelm I, 1861 ~ 독일왕, 독일 제국의 초대 황제 재위 1871 ~ 1888)는 1861년 왕이 되자 오토 폰 비스마르크(Otto Eduard Leopold von Bismarck,1815 ~ 1898)를 수상으로, 헬무트 카를 베른하르트 폰 몰트케 백작(Helmuth Karl Bernhard Graf von Moltke,1800~1891)을 참모총장으로 등용하여 독일을 통일하고자 하였다. 빌헬름 1세(Wilhelm I, 1861 ~ 독일왕, 독일 제국의 초대 황제 재위 1871 ~ 1888)는 1864년 프로이센-덴마크 전쟁,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1870 ~ 1871)의 스당 전투(Battle of Sedan, 1870.9.)에서 나폴레옹 3세를 포로로 잡고 승리한 뒤, 1871년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 제국(獨逸帝國, Deutsches Reich, 제2제국, 1871 ~ 1918, 제1 제국은 신성로마 제국) 황제가 되었다.
나. 독일의 산업혁명
독일 농부들은 가난했으며 흉년이라도 들면 살기가 더욱 어려웠다.
1820년대에 도시에서 소규모의 수공업이 생겨나자 농촌의 농부들이 이농하여 도시로 몰려들었으므로 값싼 노동력이 풍부하였다. 이들 노동자들은 공장에서 일하여 월급을 받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던 것이다.
이런 풍부하고 값싼 노동력이 산업화의 바탕이 되었다.
독일의 산업화는 정부가 주도하여 중요 산업에 집중적으로 투자하였으며 프랑스로부터 많은 기술을 들여왔다.
1840년대에 증기기관차를 수입하여 건설한 철도가 산업화에 결정적이었다. 철도에 의한 수송의 발달은 석탄 산업의 발전을 가져와 에너지 공급 문제가 해결되었다.
이어서 알프레드 크루프(Alfred Krupp, 1812 ~1887)는 영국이 먼저 개발한 제철 기술을 개발하여 풍부한 철을 공급함으로써 다방면의 기계를 생산하는 중공업이 일어났으며 1841년 주강생산기술을 개발하여 '철혈 정책'에 의한 독일 통일을 추진했던 프로이센에 고성능 대포를 공급하였다.
프로이센(독일)은 풍부한 노동력과 개발된 신기술과 정부의 집중적인 투자로 산업화가 진행되었던 것이다.
신성로마제국은 수많은 제후국으로 분열되어 있었지만 관세동맹(1834)을 맺었으므로 산업화로 생산된 제품들을 독일 관세 동맹 지역으로 쉽게 수출이 가능하여 산업이 더욱 빠르게 발달되었다.
1848년 독일 혁명(Deutsche Revolution, 1848 ~ 1849) 일어나 자유주의적인 캄프하우젠 내각이 성립되어 제헌의회의 준비와 언론·출판·결사의 자유를 보장했다.
1850년대에 들어서는 대량의 철이 생산되었고 압연 기술의 발달로 기관차를 자체 생산하는 등 선박, 기계산업, 섬유산업 등 다방면으로 산업화가 진행되었다.
그리고 1861년 빌헬름 1세(Wilhelm I, 재위 1861 ~ 1888)가 즉위하고 1862년에 비스마르크(Otto Eduard Leopold von Bismarck,1815 ~ 1898)를 수상으로 등용하여 독일 통일 사업을 진행함에 따라 군수품 생산이 활발해졌다.
뇌관식 소총은 1805년 알렉산더 존 포사이스(Alexander John Forsyth, 1769~1843, 발명가, 스코틀랜드 교회 목사)가 염소산칼륨(KClO3)에 타격을 가하면 폭발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여 충격 잠금 장치(percussion-lock)을 발명하여 1807년에 특허를 받았다.
뇌관식 격발장치는 게속 개량되어 1841년부터는 뇌관식 격발장치의 소총을 만들었으며 크리미아 전쟁(Crimean War, 1853 ~ 1856)과 1861년 남북전쟁에 사용되었다.
1836년 독일의 드라이제(Johann von Dreyse, 1787 ~ 1867, 발명가)가 발명한 바늘 총(needle gun, 공이가 있는 총)은 소총에 혁신을 가져와 프로이센군은 이 총으로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Second Schleswig War, 1864)에서 덴마크군을 참패시켰고 프러시아-오스트리아 전쟁(Austro-Prussian War, Seven Weeks' War 7주전쟁, 1866)에서도 압승했다.
프로이센이 독일 통일을 위해 1866년 오스트리아를 침략하여 항복을 받았으며 1870년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를 재침할 의향을 나타내자 프로이센이 강해지는 것을 볼 수없었던 나폴레옹 3세(NapoleonIII, 프랑스 제2 제국 황제, 재위1852 ~ 1870, 나폴레옹 1세의 동생인 네덜란드 왕 루이 보나파르트의 아들)가 선전포고를 함에 따라 일어난 프로이센-프랑스 전쟁(1870 ~ 1871)의 스당 전투(Battle of Sedan, 1870.9.)에서 나폴레옹 3세를 포로로 잡고 승리하여 프랑스로부터 받은 전쟁 배상금을 산업화 자본으로 사용하여 산업화를 더욱 가속화시켰다.
발달된 군수품의 생산은 자동차 산업 등의 후속 산업의 발달로 이어졌다.
독일의 산업화는 영국과 프랑스보다 늦게 출발하였지만 영국과 프랑스의 경공업 중심의 산업과는 달리 철 생산을 시작으로 중화학공업을 일으켜 뒤떨어진 산업화를 가속화시켜 50년 만에 따라잡았고 추월하였던 것이다.
더욱이 독일은 경공업 제품의 생산에 필요한 중화학 제품을 생산하여 영국과 프랑스에 수출하여 많은 이익을 올림으로서 영국과 프랑스의 부가 독일로 넘어와 독일의 부가 영국과 프랑스의 부를 추월하였던 것이다.
독일은 산업화가 진행됨에 따라 기업가, 수공업자, 상인, 공장 노동자 등으로 새로운 사회 계층이 형성되었고 전통과 봉건제도는 무너졌다.
다. 독일의 통일과 식민지 개척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의 유럽 지배는 분열된 독일에 영향을 주어 통일의 기운이 일어나게 하였다.
독일은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 (Friedrich II, 재위 1740 ~ 1786, 프리드리히 대왕) 때부터 서서히 국력을 키워 수많은 소왕국, 공국(公國, 공작 公爵이 다스리는 국가)들을 정복하여 유럽의 5대 강국(1815년 빈 회의 : 영국, 프랑스,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의 하나가 된다.
1791년 강국이 된 프로이센은 네덜란드 서인도 회사의 주식을 인수하였다.
독일이 하나의 단일 국가로 통일된 것은 프로이센(Preußen, Prussia, 프러시아)의 빌헬름 1세(Wilhelm I, 재위 1861~1888)와 수상 비스마르크(Otto Eduard Leopold von Bismarck, 1815 ~ 1898)의 주도 아래 이루어졌다.
프로이센은 발달된 새로운 기술로 만든 후장식의 뇌관식 소총과 강력한 대포로 무장한 군대를 동원하여 1864년 덴마크와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전쟁(Schleswig-Holstein-Frage)에서 승리하여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을 차지하였고 이 승리로 유럽의 중심세력으로 떠올랐다.
1866년에는 전장식의 부싯돌식 머스킷(flintlock musket, 수석총 燧石銃) 소총에다 총검하여 돌격하는 오스트리아군을 쾨니히그레츠 전투(Battle of Königgrätz, sadowa 자도바 전투)에서 대파하여 오스트리아를 독일연방에서 밀어내고 북독일 연방을 결성했다.
1871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승리하여 프로이센 국왕 빌헬름 1세는 나폴레옹 3세를 포로로 잡고 파리에 입성하여 베르사유 궁전에서 평화조약을 맺고 전쟁 배상금과 엘자스-로트링겐 지방을 획득했다.
그리고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 제후들의 추대로 독일 제국 황제로 즉위하였다.
지금의 독일 지역과 프로이센, 알자스, 로렌 지역의 39개 공국이 합쳐 성립된 제2독일 제국(獨逸帝國, Deutsches Reich, 제2 독일제국 1871 ~ 1918, 제1 독일제국은 신성로마제국)이다.
비스마르크는 식민지 개척에 경제적인 부담은 크고 이익은 별로 얻지 못함을 알고 처음에는 식민지 개척에 반대했으나 1884년에 이르러 식민지 건설이 외교에 유용한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정부가 민간사업에 재정을 지원하여 식민지를 개척하였다.
그런데 이미 열강들이 신대륙의 대부분을 차지하였으므로 국력이 약해진 오스만 제국과 열악하여 남아있는 아프리카 등을 대상으로 하였다.
독일은 산업의 발달로 국력이 강성해지고 군대가 막강해짐에 따라 늦었지만 제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비스마르크는 외교력을 발휘하여 평화와 안정을 유지했으나 새로 즉위한 빌헬름 2세(Wilhelm II, 재위 1888 ~ 1918)는 식민지를 개척하기 위한 제국으로의 전환을 위해 1890년에 비스마르크를 실각시키고 3B정책(Berlin, Byzantium, Baghdad를 연결)을 추진하여 식민지를 개척하기 위한 강력한 제국주의적인 팽창정책을 추진했다.
그로 인해 3C정책(Cairo, Cape Town, Calcutta를 연결)의 대영제국과 영구 부동항을 확보하려는 러시아 제국, 그리고 프랑스와 대립하여 무리한 팽창 정책을 계속 추진함으로써 열강들과 충돌하게 되어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이어지게 된다.
독일 제국이 개척한 해외 식민지 영토를 독일 식민제국(Deutsches Kolonialreich, 독일 제국의 일부)이라 하며 1894년에 시작되었다. 독일 식민제국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이 패배한 후인 1919년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해체되었다.
독일 식민제국(Deutsches Kolonialreich,1884 ~ 1918)의 아프리카 식민지로는 독일령 동아프리카(탄자니아, 르완다, 부룬디), 독일령 남서 아프리카, 독일령 서아프리카(나미비아), 독일령 카메룬, 토골란드가 있고 오세아니아 식민지로는 독일령 뉴기니(나사 마크 제도), 독일령 사모아가 있으며 아시아 식민지로는 중국의 자오저우 만 조차지, 톈진 조계가 있다.
독일제국(獨逸帝國, 제2 독일제국, Deutsches Reich, 1871 ~ 1918)은 유럽의 여러 열강과 대립하다 제1차 세계 대전(1914 ~ 1918)을 일으켰으나 결국 패배하고 베르사유 조약(1919)의 가혹한 조항들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베르사유 조약은 독일의 식민지와 해외 이권의 포기, 군비의 축소 및 제한 연합군에 배상금 지불, 그리고 알자스, 로렌을 프랑스에 넘기고, 포메른 지방을 폴란드에 내주는 것이었다.
1919년에 탄생한 바이마르 공화국(Die Republik von Weimar, 1919 ~ 1933)은 가혹한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해 국민들이 인플레이션 등으로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렸으나 곧 외국 자본을 도입하여 최신의 생산 설비를 갖추고 기술을 개발하였으며 생산성을 향상해 고급 상품을 대량생산하게 되어 세계에서 1, 2위를 다투는 대공업국으로 발전하였다.
1923년에는 기한도 없는 독일의 배상금 지급에 불만을 품은 프랑스가 루르 지방을 강제 점령하자 1924년 9월 5년간의 배상금 지급액과 미국의 원조계획인 도스안(Dawes Plan)이 성립되어 배상문제도 해결되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의 부흥 없이는 독일로부터 전쟁 배상금을 받을 수 없고 미국도 영국과 프랑스에 전쟁 중에 발행했던 채권을 회수하기 위해서는 독일이 부흥해야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919년 창당된 나치스(나치, Nazis, 정적들이 낮추어 부르는 용어, 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NSDAP)는 베르사유 체제 타파와 강력한 독일 건설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1889 ~ 1945)가 주도하였다.
히틀러는 1923년 집권을 위해 쿠데타를 획책하다 투옥된 후부터는 합법적으로 정권 쟁취를 위해 노력하였다.
독일이 겨우 다시 일어서는 순간에 1929년 미국에서 시작된 경제 대공황이 파급되어 과잉생산에 공장은 문을 닫고 실업자는 급증하였으며 국고는 거액의 적자로 허덕이게 되면서 바이마르 공화국은 대 혼란에 빠졌다.
경제 대공황은 갈수록 심각해져서 국민들의 불만과 생활고는 높아져만 갔다.
민족주의를 내세운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1889.4.20. ~ 1945.4.30.)는 유대인을 악의 축으로 선동하였으며 공황으로 무너진 경제를 되살리고 1차 세계대전 패전으로 잃어버린 조국 땅을 되찾고, 유럽을 포함한 러시아까지 무력으로 합병하는 것 등을 목표로 제시하여 군부, 관료, 자본가, 농민 그리고 중산층까지 지지를 받게 되었다. 이에 좌파인 공산당은 분열되었으며 우파는 민족주의를 표방하는 나치스(나치, Nazis)를 지지했다.
1933년 나치스(Nazis)는 총선에서 절대적인 지지로 집권했으며, 제3 독일제국(제3 제국, 第三帝國, Drittes Reich), 즉 나치스 독일(나치 독일, NS-Staat)을 선포했다.
히틀러는 미국의 뉴딜 정책을 모방하여, 대제국의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군사력을 키울 수 있는 대규모의 공공사업을 계획하여 다임러 크라이슬러(Daimler Chrysler), 크루프(Krupp), 빌리 메서슈미트(Willy Messerschmitt) 등 군수 산업의 확대와 원활한 물류를 위해 전국에 라이히스 아우토반(Reichs Autobahn, 자동차 전용도로, 1932 ~)을 건설하였다. 이러한 정책으로 수많은 실업자들이 거의 없어지는 등 공황이 해결되었다.
※ 스위스의 독립과 스위스 용병
* 스위스 독립
스위스는 프랑크에 이어 신성로마제국에 속해 있었다. 제국의 압제가 점점 심해져 감에 따라 스위스 국민들의 불만이 쌓여갔다.
1291년 스위스의 우리주, 슈비츠주, 운터발덴주는 합스부르크의 황제 루돌프 1세가 사망하자 스위스 서약 동맹(구스위스 연방, Old Swiss Confederacy, 1291 ~ 1798, 느슨한 연방)을 체결하여 합스부르크 가문(Haus Habsburg, 오스트리아)에 대한 항쟁을 결의하였으며 합스부르크의 레오폴트 1세(Leopold I, 로마인 황제 재위 1658 ~ 1705)는 1315년에 중무장한 기병대와 다수의 보병으로 이루어진 2만의 군으로 스위스를 침공하였다.
이에 대항하는 스위스 연방군은 창병 1500에 약간의 궁수가 전부였으므로 스위스 지휘관 베르너 슈타우프파허(Werner Stauffacher, 슈비츠 주지사)는 기습작전을 폈다.
스위스 지방에서 벌어진 모르가르텐 전투(Battle of Morgarten, 1315, 스위스)에서 스위스 연방군은 대승을 거두었으며 오스트리아 군은 철수하였다.
이에 레오폴트 1세는 3개 주의 자치권을 인정하였다.
1353년 원래의 3개 주에 글라루스와 추크와 루체른, 취리히, 베른의 도시 국가에 합류하여 8개 주의 ‘스위스 서약 동맹(구스위스 연방, Old Swiss Confederacy, 1291 ~ 1798)’을 형성했다.
1386년 젬파흐 전투(Battle of Sempach, 1386)에서 스위스 연방군은 합스부르크 왕조 군(오스트리아 군)을 격파하고, 신성로마제국으로부터 실질적인 독립을 쟁취했다.
1515년 프랑스 왕국의 프랑스아 1세(François I,재위 1515 ~ 1547)는 3만 5천 명의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쳐들어갔다.
이에 스위스 주정청(州政廳)들은 이탈리아로 군대를 파견하여 프랑수아 1세의 군을 공격했다가 마리냐노 전투(Battaglia di Marignano, 1515)에서 참패하고, 이후 프랑스 왕국의 발루아 왕조(dynastie des Valois, 1328 ~ 1589)에만 용병을 보내겠다는 서약을 하여 사실상 프랑스 왕국에 예속되었다. 그러나 프랑수아 1세의 프랑스 왕국이 카를 5세의 신성 로마 제국과 적대 관계가 되면서 카를 5세에 의해 스위스 본토마저 유린당했다. 장창(Pike 파이크)으로 무장한 스위스 용병들은 화승총(火繩銃, 매치락 matchlock)으로 무장한 신성 로마 제국과 싸운 파비아 전투(Battle of Pavia, 1525) 등에서 잇따라 패배했다.
파비아 전투(Battle of Pavia, 1525)는 신성로마제국(스페인)의 화승총부대가 기존의 장창(Pike 파이크)부대를 격파한 최초의 기념비적인 전투였다.
독일 신,구교간의 종교전쟁으로 벌어진 30년 전쟁(1618 ~ 1648)에 신교로 참전한 스위스는 전쟁 결과로 맺어진 웨스트팔리아 조약(Peace of Westphalia, 1648)에서 정식으로 스위스 독립을 인정받았다.
1798년 프랑스 혁명 중 스위스는 프랑스 혁명군에게 점령당하여 주(Kanton 칸톤)들을 지휘할 중앙 정부인 헬베티아 공화국(Helvetische Republik, 1798 ~ 1803)이 세워졌다. 그런데 급진적인 대개혁에 알로이스 폰 레딩(Alois von Reding, 1765 ~ 1818, 군인, 정치가)이 1798년 반란을 일으켰으나, 프랑스 군에게 진압되었다. 이후 1803년 제1집정 나폴레옹 1세가 스위스 연방을 설립하기 위해 스위스 중재법(Acte de Médiation)을 만들었다.
나폴레옹 전쟁의 결과를 처리하기 위해 개최된 빈 회의(der Wiener Kongress, 1814 ~ 1815)에서 스위스는 독립과 영세 중립국의 지위를 인정받았다.
* 스위스 용병(라이슬로이퍼, Reisläufer)
스위스는 대부분이 산악지대이므로 땅이 너무 거칠고 기온이 낮아 농사를 짓거나 목축을 하기에는 부적합하여 주정청(州政廳)은 산악지대에서 길러진 튼튼한 체격과 체질을 가진 국민을 용병으로 수출하여 국가와 가정 경제를 꾸려왔다.
주 전체가 용병업이란 직업을 대대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고용주에게 신뢰를 쌓아야 했다.
그래서 고용이 결정되면 계약 목적을 달성할 때까지 목숨을 받쳐 충성을 다했던 것이다.
프랑스 등 여러 국가에 용병을 수출하였으며 교황청 근위병은 현재까지도 스위스 용병으로 조직되어 있다.
교황청이 스위스 용병을 교황청 근위병으로 고용한 것은 교황 식스토 4세(Papa Sisto IV, 제212대 교황 재위 1471 ~ 1484)가 스위스 연방과 동맹을 체결하고 1503년 교황 율리오 2세가 스위스 정부에 근위병 200명을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며 1506년 근위병 150명이 로마에 도착함에 따라 교황청 스위스 근위대(Papal Swiss Guards)가 창설되었다
교황청 스위스 근위대(Papal Swiss Guards)의 역사적인 활동은 다음과 같다.
• 제5차 이탈리아 전쟁(1526 ~ 1530, 코냑 동맹 전쟁)은 이탈리아에서 강력한 세력을 구축한 카를 5세의 세력을 이탈리아 반도에서 몰아내고자 코냑동맹(League of Cognac, 교황령, 프랑스,베네치아 공화국,밀라노 공국,피렌체 공화국, 페라라 등)을 결성하여 벌인 전쟁이다.
1527년 카를 5세(Karl V,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재위 1519 ~ 1558)의 장군 부르봉 공작 샤를 3세(Charles III de Bourbon, 1490 ~ 1527, 프랑스 출신)가 독일 용병(Landsknecht, 란츠크네흐트)을 지휘하여 로마를 싸고 있는 아우렐리아누스 성(Aurelian Walls)을 공략하던 중에 존경받던 샤를 장군이 전사하자 급료도 못받아 불만이 쌓인 독일 용병들이 흥분하여 로마를 약탈(Sacco di Roma 사코 디 로마, 로마 약탈)하였으며 교황 클레멘스 7세(Papa Clemente VII, 제219대 교황 재위 1523 ~ 1534, 메디치 가문 출신)는 베드로 성당(Basilica Vaticana)에서 스위스용병의 호위를 받아 800m 거리의 비밀 통로를 통하여 산탄젤로 성(Castel Sant'Angelo)으로 탈출하였는데 스위스 용병(Reisläufer, 라이슬로이퍼)으로 조직된 189명의 근위병 중 40여명만이 생존했을 정도로 결사적으로 싸워 교황을 탈출시켰던 것이다.
• 1792년 8월 프랑스 국민군이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연합군에 연전연패하자 파리 시민들은 패전 책임자의 처벌과 왕정 유지를 주장하는 보수파인 입헌군주파 의원들의 축출을 요구하면서 시민들이 궐기하여 튈르리 궁(Palais des Tuileries)으로 쳐들어 왔을 때 루이 16세와 왕비는 의회로 떠나고 없었으며 빈궁을 지키던 스위스 용병(라이슬로이퍼, Reisläufer)인 근위대 786명은 궁을 지키는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끝까지 싸우다 전멸하였다.
• 1798년 제1집정 나폴레옹 1세의 군대가 로마를 침략했을 때 교황청 근위대는 교황 피우스 6세를 위해 용맹하게 싸우다 전멸했다.
•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 히틀러 군대가 로마에 진격했을 때에도 교황청 근위대는 죽음으로 독일군들의 바티칸 진입을 막았다.
8. 식민지 노예
북아프리카의 이슬람인들은 오래전부터 간혹 사하라 사막 남쪽으로 내려가서 흑인을 데려와 노예로 삼았다. 그리고 십자군도 원정에서 돌아올 때 흑인들을 데려와 노예로 삼았다.
1434년에 엔히크 왕자가 보낸 길 에아네스(Gil Eanes, 1395 ~?)가 이끄는 함대가 보자도르곶(Cabo Bojador)을 탐험하고는 그곳의 상황을 알기 위해 원주민을 사서 데려와서는 리스본에서 노예로 팔아 원정대 비용으로 사용하였다. 이렇게 포르투갈 원정대가 흑인을 리스본에 데려와 노예로 사고 판 것이 노예무역의 시작이었다.
1441년에는 농업 노동력으로 이용하였으며 1443년에 6척의 함대가 아르깅(Arguim, Mauritania, 모리타니) 제도에서 275명의 노예를 데려오는 등 노예무역은 계속 이어졌다.
엔히크 왕자는 노예무역의 1/5을 세금으로 받았으며, 교황은 영혼을 구원한다는 이유로 가톨릭의 노예무역 상인들이 우상을 숭배하는 흑인들을 노예로서 데려오는 것을 인정했다.
16세기 초 포르투갈은 에스타도 다 인디아(Estado da india, 포르투갈 인도)를 설립하고 동아프리카 노예무역을 시작하였다. 1830년대까지 매년 200명의 노예가 모잠비크에서 수출되었고, 그리고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합병된 기간(1580 ~ 1640)에 아시아에서 필리핀으로 끌려온 노예 수도 비슷하였다.
스페인은 콜럼버스(1451? ∼ 1506)가 서인도제도를 발견한 이래 이래 아메리카 인디언을 노예화하여 광산개발, 사탕수수와 담배 재배의 대농장 등에서 혹사하였으므로 인디언의 수가 격감하였다.
그리고 인디언을 노예로 사용하는 것을 1530년에 스페인령(領)에서, 1570년에는 포르투갈령인 브라질에서 법규로 금지하였다.
이에 아메리카에 정착한 유럽인들은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설탕, 커피, 면화, 담배 등의 농장을 대규모로 개척하였으므로 노동력이 크게 부족하게 되었다.
16세기 초엽에 스페인은 선교사 B. 라스카사스(Bartolom de Las Casas,, 1474 ~ 1566)의 권유로 아프리카 흑인 노예를 인디언 대신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아프리카 대륙의 대서양 연안에서 여러 부족의 흑인들이 노예무역상을 통해 남북 아메리카 대륙에 수입되었다. 노예무역 상인들은 노예를 공급한 아프리카의 흑인 유력자에게 노예 제공 대가를 전쟁무기와 인도산 면직물로 지불했다.
흑인 노예무역이 성행했던 이유는 식민지에 많은 노예 수요가 있었고 아프리카 현지인이 노예 포획을 직업으로 삼아 그 지역의 경제를 유지했으며 스페인 왕실의 이권 확보의 수단이 되었고 무역상이 흑인 노예무역으로 얻는 수익이 다른 무역에 비해 300 ~1,000%로 높았기 때문이다.
스페인은 아프리카 흑인 수입권(輸入權)을 스페인 왕령으로 독점 특허권(獨占特許權, lit Asiento de Negros, 아시엔토 데 네그로스, '흑인의 정부계약')을 발부했다.
첫 번째 아시엔토는 카를로스 1세(Carlos Ⅰ de España, 재위 1516 ~ 1556)가 1518년 노예무역을 인정하고 플랑드르(Flemish)의 로랑 드 구베노트(Laurent de Gouvenot, 플랑드르 궁정의 귀족이자 스페인 국왕 국무회의 회원)에게 내어준 것으로 최대 4천 명의 아프리카 흑인 노예를 8년 동안에 수입하는 독점 사업이다.
스페인의 카를로스 1세(Carlos Ⅰ de España, 재위 1516 ~ 1556)는 1542년 노예무역을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면서 자신의 승인을 철회했지만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포르투갈 노예무역상인들은 서아프리카의 상(上) 기니와 시에라리온 지방에서 노예를 사들여 아메리카로 보냈다. 1575년 포르투갈의 앙골라를 식민지로 건설한 후에는 포르투갈 총독들이 개인적 이익을 위해 더욱 적극적이었으며 17세기 초에는 아메리카의 스페인 식민지로 공급되는 흑인노에의 85%를 앙골라에서 포르투갈이 수송했다..
1662년에는 네덜란드 서인도 회사가 아시엔토에 대한 대규모 계약을 맺어 스페인 식민지에 2만 4천 명의 흑인 노에를 공급했다.
그 이후 1702년 프랑스의 기니 회사(Compagnie de Guinée)가 4천8백 명의 흑인 수입권을 받았고 1713년의 위트레흐트 조약(Treaty of Utrecht,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 영국 정부가 스페인으로부터 얻어낸 노예무역의 독점 특허권(獨占特許權, 아시엔토, Asiento)은 1743년까지 30년 동안 11만 4천 명의 흑인 노예를 스페인령 아메리카에 수송하는 것으로 남해회사(South Sea Company)에 양도하였다.
노예무역이 성행한 300년 동안 약 1,500만 명의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이 아메리카로 강제 이송되었다.
식민지 시대의 노예 수요는 카리브해 지역 및 중남미가 압도적이었고, 북미에 노예 수출은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미국은 18세기 사우스캐롤라이나주를 중심으로 인디언 노예 매매가 성행하였다. 19세기의 미국 남부의 목화 등의 광대한 플랜테이션 농업은 노예 제도에 의해 유지되고 발달되었다. 미국은 흑인 노예무역이 금지되자 흑인 노예 자손을 모두 노예화하여 노예수를 늘였다.
노예무역의 폐지는 1792년 영국에서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 윌리엄 윌버포스, 1759 ~ 1833, 정치가.)가 제안한 노예무역의 점차적 폐지를 목적으로 하는 결의안이 하원을 통과하였다.
활발히 노예무역을 하던 영국 상인을 뒤이어 미국 상인들이 마지막으로 노예무역을 하였던 것이다.
1802년에 덴마크, 1807년에 미국이 노예무역을 금지하였고, 1814년에 프랑스도 1819년부터 노예무역을 금지한다고 결의하였다.
노예해방령은 1833년 영국에서 세계 최초로 법령이 통과되었다.
미국은 1865년 남북전쟁이 끝남에 따라 노예제가 폐지되었다.
IV. 식민지 독립
1. 라틴 아메리카(Latin America)의 식민지 독립
아메리카(America)는 지리적으로는 북아메리카(North America), 중앙아메리카(Central America, 멕시코에서 파나마 지협까지, 카리브해 지역 포함), 남아메리카(South America)로 나뉘지만 문화적으로는 로망스어(Romance language, 라틴어에서 분파된 언어, 스페인어, 브라질 포르투갈어, 프랑스어)군의 언어를 사용하는 라틴아메리카(Latin America, 중앙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와 영어를 주로 사용하는 앵글로 아메리카(Anglo-America, 북아메리카)로 나뉜다.
가. 스페인 식민지 독립
중, 남미 등의 스페인 식민지는 1519년 멕시코 부왕(총독)령(副王領, 누에바 에스파냐 부왕령, Virreinato de Nueva España, Viceroyalty of New Spain, 1519 ~ 1821, 멕시코, 미국 남서부 및 플로리다, 루이지애나, 카리브해, 필리핀, 괌등, 수도 멕시코시티), 1535년 페루 부왕령(副王領, Virreinato del Perú, Viceroyalty of Peru, 1542 ~ 1824, 초기 페루, 칠레, 콜롬비아, 에콰도르, 볼리비아, 파라과이, 우루과이, 아르헨티나, 후기 페루, 볼리비아,수도 리마), 1717년 페루 부왕령에서 분리 설치된 누에바 그라나다 부왕령(副王領, Virreinato de Nueva Granada, Viceroyalty of New Granada, 그라나다 신왕국 부왕령, 산타페 부왕령, 1717 ~ 1819, 콜롬비아 , 베네수엘라 , 에콰도르 , 파나마 및 가이아나 에세키바, 수도 산타페 Santa Fe), 그리고 1776년 페루 부왕령에서 분리 설치된 리우 데 라플라타 부왕령(副王領, Virreinato del Río de la Plata, Viceroyalty of the Río de la Plata, 1776 ~ 1814,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파라과이, 볼리비아,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 등으로 행정 단위가 나누어져 있었다.
이들 지역에서는 계급이 뚜렷하여 피지배 계급의 불만이 쌓여갔다. 에스파냐(스페인) 인이 최고 지배층이었고, 크리오요(Creole, 현지 스페인 2세)가 그다음을 차지하였으며, 메스티소(mestizo, 백인과 인디오 혼혈)는 중간 계급, 인디오와 흑인, 몰라토(mulato, 흑백 혼혈)는 최하층에 속하였다.
1) 아이티독립
일찍이 스페인 령 아이티에서는 열대 기후에 알맞은 사탕수수 농장이 개설되어 수많은 흑인 노예들이 고역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들은 고역에서 벗어나기 위한 전쟁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스페인이 군대를 파견하여 진압하였다.
이에 아이티의 흑인들은 게릴라전을 펼치며 저항하였다.
스페인 령 아이티는 스페인의 국력이 쇠퇴하자 프랑스는 1659년 이후 서서히 아이티를 점령하여 9년 전쟁(1688 ~ 1697)을 종결시킨 1697년의 라이스윅 조약(Treaty of Ryswick)으로 섬의 서쪽 3분의 1이 프랑스령 생도맹그(Saint Domingue)가 되었다.
스페인과 프랑스의 억압된 지배에 불만을 가졌던 아이티인들은 프랑스 대혁명(1789)이 일어나자 고무되어 1791년 봉기하였다.
이에 1792년 프랑스 식민의회(로베스피에르 파 자코뱅 정부, 1793 ~ 1794)는 흑인과 물라토(히스패닉계와 아프리카계 사이의 혼혈)를 노예의 족쇄에서 풀어주고 완전한 시민권을 보장해 주었다.
그러나 프랑스가 약해진 틈을 타 영국군이 쳐들어오자 1794년 투생 루베르튀르(Toussaint Louverture,1743~1803,아이티의혁명가,독립투사)는 4000명의 아프리카계 해방노예로 게릴라 부대를 결성하여 영국군을 몰아냈으며 프랑스로부터 노예제 폐지를 약속받았지만, 다시 스페인이 침략하여 이에 맞서 전투를 하였다.
1802년 프랑스 나폴레옹의 통령정부(統領政府, 1799 ~ 1804)는 로베스피에르 파 자코뱅 정부(1793 ~ 1794)의 약속을 파기하고 나폴레옹의 매제인 샤를 레클레르크(Charles Victoire Emmanuel Leclerc, 1772 ~ 1802)를 4만 원정군의 사령관으로 하는 해군 선단을 파견하여 히스파니올라의 반군을 진압하였다.
루베르튀르는 노예제를 다시 도입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레클레르크와 강화조약을 맺었다. 그러고는 레클레르크는 루베르튀르를 프랑스로 압송하여 처형하였다.
프랑스의 샤를 레클레르크는 1802년 황열병으로 사망하였다.
강화 조약이 지켜지지 않자 전쟁은 재개되었으며 프랑스군의 무차별 학살에도 아이티반군은 게릴라전으로 승리하여 1804년 라틴 아메리카에서 처음으로 독립하였다.
2) 멕시코 독립
스페인은 멕시코, 미국남서부 및 플로리다, 카리브해, 필리핀, 괌등에 멕시코 부왕(총독) 령(副王領, 누에바 에스파냐 부왕령, Virreinato de Nueva España, Viceroyalty of New Spain,1519 ~ 1821, 수도 멕시코시티)을 설치했다.
그 후 이를 다시 누에바에스파냐, 누에바갈리시아(Nueva Galicia, 멕시코 지역), 누에바비스카야(Nueva Vizcaya, 필리핀), 누에보레온(Nuevo León,멕시코북동부), 누에보멕히코(Nuevo mexico, 뉴멕시코) 등 5개의 구역(reinos)과 1개의 유카탄 주(Yucatán, 멕시코남동부)로 분리하여 통치하였다.
멕시코 부왕령(副王領, Viceroyalty)에서는 1810년 이달고(Miguel Hidalgo y Costilla, 미구엘이달고 이 코스띠야, 1753 ~ 1811, 독립의 아버지) 신부가 이끄는 수만 명의 군중들이 에스파냐에 대항해 시위를 벌이다 무참히 진압된 후에도, 모렐로스(José María Morelos, 호세 마리아 태클로 모렐로스, 1765 ~ 1815) 신부가 게릴라 부대를 이끌고 독립 투쟁을 계속 이어 나갔다.
그 후 멕시코의 독립을 주도한 인물은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Agustin de Iturbide, 1783 ~ 1824)였다. 스페인 군인으로 들어가 독립운동을 무참히 진압했던 그가 반기를 들어 군사적으로 멕시코 부왕(총독)과 협의하여 코르도바 조약(Treaty of Córdoba, 1821. 8.)을 체결하고 독립하였다.
1822년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Agustin de Iturbide, 1783~1824)는 군사력으로 아구스틴 1세로 황제에 등극했으나 총살당해 1823년에 제국이 무너지고 내전이 일어났다.
1823년 과테말라, 니카라과, 엘살바도르, 온두라스, 코스타리카로 구성된 중앙아메리카 연방 공화국이 형성되어 분리되었다.
멕시코는 1824년 공화정 수립, Guadalupe Victoria 장군이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텍사스 민병대가 독립전쟁을 일으키자 1836년 4월 멕시코 대통령 산타 안나(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안나Antonio de Padua María Severino López de Santa Anna y Pérez de Lebrón, 1794 ~ 1876)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출병하였으며 샘 휴스턴(Sam Houston, 1793 ~ 1863, 텍사스 공화국 초대, 3대 대통령, 상원의원, 텍사스 주지사) 장군이 이끄는 텍사스 독립군이 산 하신토(San Jacinto)에 주둔한 멕시코군을 급습하여 멕시코 대통령 산타 안나를 포로로 잡고 텍사스 공화국 대통령 대행인 데이비드 G. 버넷(David G. Burnet)과 산타 안나가 벨라스코 조약(Treaties of Velasco, 1836. 5.)을 맺어 텍사스가 분리 독립하게 되었다.
1846년 미국의 텍사스 합병에 따른 분쟁으로 미국과 멕시코 사이에 전쟁(미국-멕시코 전쟁
Mexican–American War, 1846 ~ 1847)이 일어났다. 멕시코가 국교를 단절하자 미국이 전쟁을 시작한 것이다. 멕시코는 멕시코시티를 점령당하는 등 전쟁에 패하여 1848년 멕시코와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Treaty of Guadalupe Hidalgo, 평화조약, 1848)을 맺었는데 그 내용은 미국이 텍사스는 물론이고 우월적 지위를 이용하여 1500만 달러를 지불하고 캘리포니아와 오늘날의 미국 남서부(캘리포니아, 네바다, 유타 주, 그리고 콜로라도, 뉴멕시코, 애리조나, 와이오밍 주 일부)를 찬탈하였던 것이었다.
이 조약으로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을 리오그란데 강과 힐라 강으로 확정했는데 이것은 미국이 전쟁 전 멕시코 영토의 약 55%를 차지한 것이었다.
그리고 1854년에는 개즈던 매입(Gadsden Purchase)으로 애리조나(Arizona) 남쪽 일부와 뉴멕스코(New Mexico) 남쪽 일부를 미국에 매각하였다.
1864년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Napoleon III, 샤를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Charles Louis Napoléon Bonaparte, 1808 ~ 1873)는 멕시코가 빚을 갚지 못하자 군대를 파견하여 멕시코를 점령하고 막시밀리아노 1세(Maximiliano I, 재위 1864~1867,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동생)를 황제로 세워 통치하였으나 1867년 멕시코군에 의해 막시밀리아노 1세(Maximiliano I) 황제가 처형된 후, 1871년 다시 공화제가 되었다(프랑스는 비스마르크의 프로이센과의 관계악화로 지원군을 보낼 수 없었다.).
3) 남미 스페인 식민지 독립
누에바 그라나다(Nueva Granada, 콜롬비아) 부왕령(副王領, Viceroyalty)에서는 1808년 나폴레옹 1세가 에스파니아(스페인)를 점령함에 따라 식민지 지배권이 약화되자 볼리바르(Simon Bolivar, 1783 ~ 1830)가 이끄는 크리오요(Creole)들이 앞장서서 에스파냐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일어섰다. 콜롬비아(1819), 베네수엘라 (1821), 에콰도르(1822)를 차례로 에스파냐로부터 해방시키는 데 성공하고 이들을 연방으로 묶는 대콜롬비아의 대통령이 되었다. 볼리바르(Simon Bolivar, 1783 ~ 1830)는 산마르틴과 협력하여 1825년에는 페루를 독립시키고 이어 볼리비아를 해방시키는 등 남아메리카 제국(諸國)의 독립에 큰 공헌을 하였다. 1826년 범미 회의(汎美會議)를 개최하여 남미 연방 조직을 계획하였으나 실패하였다.
4) 스페인의 쿠바, 필리핀, 푸에르토리코, 괌 등의 상실
쿠바는 1511년이래 스페인 령이었으나 1895년에 일어난 독립전쟁이 실패하자 1898년 미국이 개입하여 일어난 미국- 스페인 전쟁(Spanish-American War, 1898. 4 ~ 1898. 8) 결과 미국이 승리함에 쿠바는 미국의 군정(軍政)이 3년 간 실시 된 후 독립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미국과 스페인의 전쟁(Spanish-American War, 1898. 4 ~ 1898. 8) 결과 스페인은 필리핀을 미국에 2,000만 달러에 양도하였고 괌(Guam)과 푸에르토리코(Puerto Rico)도 미국에 양도하였으며 태평양 상의 스페인령 북 마리아나 제도(남태평양)등도 미국령이 되었다.
나. 포르투갈 식민지 브라질 독립
포르투갈은 브라질에 대규모 사탕수수 농장과 목화 농장을 경영하였다. 아프리카에서 끌고 온 흑인 노예와 내륙에서 잡아 온 인디오를 노예로 이용하였다.
목화는 영국에 팔고 사탕수수는 아메리카의 2위 생산국으로 막대한 부가 창출되었으나 포르투갈 왕실이 브라질과 포르투갈 간의 무역과 운송에 독점권을 행사하여 대부분의 부를 가져갔다.
17세기 중반에는 미나스 게라이스(Minas Gerais) 지역에서 금광이 발견되면서 해안가에 모여 살던 인구가 내륙으로 많이 이동하였다.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혼혈이 많이 생겨나 메스티소(mestizo, 인디오와 포르투갈, 스페인계 백인 사이의 혼혈)와 물라토(mulato, 백인과 흑인의 혼혈), 파르도(pardo, 다인종 혼혈) 등으로 구성원이 다양해졌다.
이들은 억압과 수탈, 차별 등으로 불만이 쌓여가고 있었으며 미국의 독립사상과 프랑스 루소 등의 개혁적인 사상이 도입되어 브라질을 공화국으로 만들고자 하는 열망이 커져가고 있었다.
유럽에서 프랑스 나폴레옹이 전쟁으로 세력을 확장하여 1807년 포르투갈을 침공해 오고 영국은 함대를 파견하여 브라질로 피신한다면 배로 운송해 줄 수 있지만 포르투갈이 프랑스와 동맹을 맺으면 리스본을 침략하겠다고 통보했다. 포르투갈의 주앙 왕자(마리아 1세 1734 ~ 1816는 정신병, 1792년부터 정무)는 고심끝에 브라질에 피신하길로 했다.
영국배 15척에 5,000여명을 태우고 1808년에 브라질로 출발했다.
1814년 프랑스군이 이베리아 반도에서 축출되어 전쟁이 종식되자 포르투갈인들은 주앙에게 조속히 귀국해달라고 요청하였지만 아직 불안정한 포르투갈에 돌아가는 것보다 브라질에서 통치하기로 했다.
그래서 1815년 12월 16일 '포르투갈-브라질-알가르브(Algarve, 포르투갈 남쪽 끝) 연합왕국(Reino Unido de Portugal, Brasil e Algarves)'을 창설하고 리우데자네이루를 수도로 삼았다. .
주앙 왕자(마리아 1세 1734 ~ 1816는 정신병, 1792년부터 정무)는 그동안 봉쇄하였던 항구를 개방하여 여러 나라에 무역을 허락하였다. 브라질은 미국의 노예 무역업자로부터 부족한 노예를 수입하고 커피를 미국으로 수출하였다.
1817년 독립군이 봉기하여 페르남부코(Pernambuco)에 '공화국‘을 세웠으나 주앙 6세는 군을 동원하여 무자비하게 진압하였다.
1820년 10월 포르투갈의 리스본에서 민중 봉기가 발발하여 입헌군주제를 채택하였다.
이들은 주앙 6세(João VI,, 1767 ~ 1826, 현명왕 O Clemente, 재위 1816 ~ 1826)가 포르투갈로 즉각 돌아와 입헌군주제(立憲君主制, constitutional monarchy)를 받아들일 것을 요구했다. 또한 브라질과의 무역에서 포르투갈의 독점권을 회복하여 브라질을 식민지 상태로 되돌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왕이 돌아올 때까지 잠정적인 정부를 수립하기로 하고, 제헌 의회 의원 선거를 실시했다.
1821년 1월 30일, 새 의원들로 구성된 코르테스(Cortes, 신분제 의회)가 포르투갈의 리스본에서 열린 뒤 군주의 즉각적인 귀환을 요구했다.
1821년 4월 21일 브라질에서도 자유주의자들이 자체적으로 선거을 실시하여 의원들을 선출하고 코르테스(Cortes, 신분제 의회)를 조직했다. 주앙 6세는 어찌할 수 없어 브라질에 조직된 코르테스를 인정했다.
브라질의 상황이 이처럼 악화되자, 주앙 6세는 포르투갈로 귀환하기로 했다. 그는 황태자 동 페드루 4세(Dom Pedro IV, 1666 ~ 1718)를 브라질의 섭정으로 임명하여 남겨두고 자신은 1821년 4월에 왕실 식구들 및 귀족들과 함께 리스본으로 향했다.
포르투갈에서 주앙 6세의 입헌군주제가 시행되었다.
브라질에서는 개혁을 열망하는 지식인들과 파르도(pardo, 다인종 혼혈) 자유민들이 이 기회를 이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황태자 동 페드루 4세(Dom Pedro IV, 1666 ~ 1718)는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황제명을 어기고 그들의 요구에 따라 입헌 군주제를 받아들이고 브라질의 독립을 선언하여 브라질 황제 동 페드루 1세로 즉위하였다(1822).
이렇게 브라질을 잃은 포르투갈은 막대한 경제적 손실로 쇠퇴하게 되었다.
그 후 브라질은 입헌 군주국에서 공화국으로 넘어가면서 많은 혼란을 겪었다.
2. 인도 독립
영국 동인도 회사는 1757년 플라시 전투에서 승리하여 뱅골을 점령한 후 더욱 많은 세포이를 고용하여 인도에 대한 지배 지역을 확장하기 시작하였다.
1764년 북사르 전투에서 무굴 제국에 승리, 영국-마이소르 전쟁(1766 ~ 1799), 영국-마라타 전쟁(1772 ~ 1818)에서 승리하여 나르마다강 이남의 인도 대부분을 지배하였다.
19세기에 들어 총독 리처드 웨슬리는 동인도 회사의 직접 지배 지역을 확장하였다. 그리고 제2차 영국-시크 전쟁 이후 카이베르파크툰크와주와 카슈미르, 펀자브 지역에 존재하던 제후국들과 종속 동맹을 맺었다. 종속 돌맹은 제후들의 군사를 동인도회사가 지휘하는 것이다.
한편 1814 ~ 1816년 영국-네팔 전쟁의 결과 영국은 구르카스 지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1854년에는 지금의 마하라슈트라주에 속하는 베라르 지방과 종속 동맹을 맺었다(빅토리아 여왕 Queen Alexandrina Victoria,재위 1837 ~ 1901).
인도의 지식인들은 영국의 식민지 지배하에서 서양사상에 자극을 받아 민족주의를 자각하기 시작했다.
영국은 동인도 회사를 통해 간접적으로 인도를 지배하였으며 동인도회사는 25만 명의 군을 보유하여 인도를 통치하였다. 그중 20만 이상이 현지서 고용한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였으며 초기와는 달리 카스트를 많이 고용하였다.
그런데 이 인도 세포이들이 독립운동의 시초라고 볼 수 있는 반영(反英) 항쟁(1857 ~ 1858)을 일으켰다.
영국 동인도 회사의 세포이의 종교 허용이 상위 카스트를 존중하는 정책으로 진행되어 오히려 종교와 카스트에 따른 차별을 느낀 세포이가 많았으며 또 임금에 대한 불만도 높아지고 인도의 장례 풍습인 사티의 금지, 과부의 재혼을 합법화하는 등의 사회개혁 등으로 세포이 항쟁이 촉발되어 1858년 6월에는 세포이에게 과리오르가 함락되기도 하였다.
세포이 반란을 진압한 영국은 동인도 회사를 해체하고 직접 통치하였다. 빅토리아 여왕(Queen Alexandrina Victoria,재위 1837 ~ 1901)은 인도제국의 군주를 겸하게 되었던 것이다.
민족주의를 자각한 인도 지식인들에 의하여 다양한 영역에서 수많은 단체가 생겨났으며 이들 단체들과 이에 가담한 수많은 대중들에게 각종 종교적, 사회적 개혁운동을 전개하여 독립운동으로 연결하고자 하였다.
그중에서 1885년 결성된 '인도 국민회의'가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인도 국민회의는 영국 정부에 건의하는 소극적인 방법을 사용하였으나 에드워드 7세(Edward Ⅶ, 1901 ~ 1910) 시절인 1905년 인도의 커즌(George Nathaniel Curzon, 1859 ~ 1925) 총독이 강권과 억압의 반동 정책을 펴자 민족주의 운동은 급진적으로 변해갔다. 특히 1905년 인도에서 반영 여론이 높은 벵골 지방을 동·서로 분열하는 벵골 분할령을 내리자 더욱 심화되었다.
이에 인도 국민회의는 보이콧(boycott, 영국 제품 불매) 및 스와데시(Swadeshi, 국산품 장려 운동) 운동을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전 인도에 전파하였다.
영국은 독립운동을 방해하기 위한 분할통치 정책으로 이슬람교도와 힌두 교도 간 대립을 유도하였으며, 1906년에는 국민회의를 견제할 이슬람교도 연맹이 결성되도록 배후에서 지원하였다.
영국은 제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이 되면서 더욱 강경한 식민정책을 실시하였다.
1919년 4월 암리차르시에서 영국의 인도 탄압법(彈壓法)인 로란트법에 반대하는 집회를 무자비하게 학살하여 진압하였다.
암리차르 학살사건이 일어난 후에 간디의 지도하에 제1차의 비폭력적 저항운동이 시작되어 새로운 민족운동이 전개되었다.
마하트마 간디가 이끄는 인도 국민회의는 영국이 제시한 자치령을 거부하고 완전한 독립을 얻기 위해 불복종 운동을 전개하였다.
1930년 소금 법(소금의 생산과 판매를 독점하고 통제하는 소금 전매제를 실시하고 소금에 고율의 세금을 부과하였음)이 발표되자 제2차 비폭력적 저항운동이 일어나 인도 민중의 힘이 결집되었다. 몇백 명으로 시작한 염전으로 가는 시위 행렬이 6만 명으로 늘어났던 것이다.
해변의 염전에서 무단으로 소금을 생산하는 것이 위법이라는 것은 잘못된 법이란 것을 무언의 행동으로 나타내 던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이슬람교도 연맹은 파키스탄의 분리 독립을 요구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영국은 연방제로 하는 인도의 독립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국민회의와 이슬람교도 연맹 간의 합의가 실패로 끝나고 대규모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이에 영국이 인도와 파키스탄을 분리 독립시키기로 결정하였고 이것을 국민회의가 받아들임으로써 인도는 1947년 8월 15일 영연방의 자치령으로 독립하게 되었다.
인도는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였지만 타파해야 할 카스트(caste) 제도라는 악습이 남아 있었다.
카스트(caste) 제도는 기원전 1500년경 시베리아의 남북과 투르케스탄(Turkestan) 등지에 살고 있던 유목민인 아리아(Arya)족이 인도를 침략하여 흑색의 피부색, 낮은 코을 가진 콜(KOl)족, 문다(Munda)족, 그리고 후에 이주해 온 드라비다 인(Dravidian) 등의 원주민을 정복하여 다사, 다 수유라는 계급으로 만들면서 시작되었였다.
지배 계급을 이룬 아리아(Arya)족은 원주민보다 수가 적었으므로 아리아인과 원주민을 카스트제도로 분명하게 나누어 놓음으로써 그들의 권리를 그대로 유지하고 원주민과의 혼합으로 인하여 아리아인이 사라지는 것을 방지하고자 하였다.
지배계급이 된 아리아족은 단순히 자신들의 직업에 따라 종교적 일을 담당하는 브라만(Brahman), 정치와 군대의 일을 담당하는 크샤트리아(Ksatriya), 상업과 농업을 담당하는 바이샤(Vaiśya)로 나누었다. 피 지배인 들은 세 지배계급을 시중드는 노예로 수드라(Sudra)라고 하였다.
이 카스트 제도의 신분계급은 태생부터 정해진 것으로 현생애에서는 변화될 수 없었다.
네 개의 신분 제도는 처음에는 단순히 직업을 구별하는 제도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직업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는 제도로 변질되었다.
고대 베다 시대(BC15~BC6)에는 전쟁 위주의 사회였으므로 크샤트리아(Ksatriya)의 무사 계급이 지도적 위치에 있었으나 점차 농업과 산업에 종사하는 안정된 사회가 되자 초자연적인 신의 힘과 교류하는 브라만(Brahman) 계급이 상위로 올라간 것이다.
천민도 더욱 세분화되어 수드라(Sudra) 계급에도 들지 못하는 불가촉천민(Untouchables)들도 많아졌다.
불가촉천민(Untouchables)을 다리트(Dalit), 또는 하리잔(Harijan)이라 하며 약 15%이다. 이들은 온갖 멸시와 배척을 받는다.
이보다 더 낮은 ‘트리발(Tribal, 부족민)’은 토착민들로 약 5,000만 명에 이른다.